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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자라난 식물의 군락은 때로 장관을 이룬다. 우리는 그래서, 무엇이건 간에 저 자랄 대로 가만 내버려 두는 게 바른 섭리에 부합하는 것 아닌가 하며 마음을 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장관이란 드물게 발생할 뿐이며, 정해진 공간에서 인간의 눈을 만족시키려면 대개는 섬세한 관리가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인접한 주택 지구에서 어느 한 가구가 자신의 정원을 제때 관리하지 않으면 당국에서 주의를 주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대도시에서 정원까지 두며 호사를 누리는 세대가 많지는 않겠으나, 노인분들이 기르는 작은 화초 컬렉션을 정원의 축소판이라 본다면, 얼마나 세심한 정성이 기울여져야 원하는 대로의 식생이 가능할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다. 때 되면 비가 오겠거니, 양분은 심어진 땅에서 알아서 빨아들이겠거니 마음을 놓는다면, 그 결과는 열이면 아홉 재앙에 가깝다. '방치'란, 그 대상이 자연에 속한 과제라 해도, 대개는 태만과 황폐와 실망과 실패로 이어지기 십상인 것이다. 그럼, 현대에 요구되는 지성과 세계관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를 '정원형 지성'으로 표현한다. 다행히도 우리가 마주해야 할 환경은, 막막한 사바나나 풍토병이 들끓는 정글은 아니며, 그저 한 뙈기의 정원에 불과하다. 이 자그마한 정원도, 사람의 손길이 무심히만 스치면 불쾌한 난장판이 될 수도 있고, 마냥 뻔한 루틴만 거치는 게 아니라 제법 고난도의 해법을 고안해야 할 도전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 정원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란, 으레 급작스런 변화가 닥칠 수도 있겠거니, 어차피 한 번 제대로 수를 쓰고 나머지는 손 털고 여유롭게 지내려니 하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일은 끝이 없고, 한번 찾은 안정이라도 곧 께어지게 마련이며, 그럴 때마다 기민한 재치를 발휘하여 미관과 질서를 되찾게 하려는 역동적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정원형 지성에서 우리가 이웃, 다른 사회 성원을 대하는 태도는 어때야 할까. '기계형 지성, 세계관'에서 그저 합리적이고 냉정한 개인들이 고립적으로 제 할 일만 기계적으로 수행했다면, 이 정원형 사고 속에서는 혼자서 고유의 기능을 완수하는 원자는 없다. 모두가 네트워크의 일원이며, 존재는 상호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가 규정된다. 이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안정되고 완성된 위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적 진화를 이루는 역동적 실존이다. 기계형 지성이 '이기적 인간'을 당연한 원형으로 삼았다면, 정원형 지성에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이상상은 '사회적이고 연대하는 인간'이다. 책은 특히 전통적 프레임으로 여전히 이 변화무쌍한 세상을 재단하려는 우파 주류경제학을 맹렬히 비판한다. 케인즈 역시 한 세기 전, '도대체 가만 내버려 두면 돌아가지를 않을 뿐 아니라 유해하기 짝이 없는 부작용까지 양산하는 시장을 왜 가만 방치하고만 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정부의 끊임없는 개입을 촉구한 적 있다. 이 책 저자들이 한 세기 전 그 거인의 시야와 다른 태도를 표방한다면, 그 개입의 주체가 정부 아닌 시민이라야 한다는 점이겠다. 이와 관련, 저자는 특히 1995년 합리적 기대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단독 수상한 로버트 루카스의 관점을 비판하며, 합리적이고 구조정합적인 기대를 완성하는 '이성'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긴 행동경제학의 패권이 학계를 휩쓴 지 거진 십 년이 지나가며, 이 대세를 확인이나 시켜 주듯 올해도 또 같은 유파의 학자가 노벨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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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ardens of Democracy
에릭 리우와 닉 하나우어가 공저한 정치 에세이다. 에릭과 닉은 대중에게 시민의식을 강연하고 글 쓰는 작가이자 활동가들이다. 저자들은 민주주의를 정원에 비유하며 책의 포문을 연다. ‘아름다운 정원은 지속적인 투자와 개선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훌륭한 정원사는 흙을 갈아엎고 여러 식물을 바꿔가며 심는다.’ 현대의 민주주의 나라들에서는 서로 상충하는 의견들을 두고 정부를 통해 조정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러한 견해들이 대립한다. 정부는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하고 있다. vs 부자일수록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 모든 이들은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vs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돈을 의료보험에 쏟아 붓고 있다. 우리는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vs 우리는 경제가 지속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우리 경제와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다. vs 노동조합은 지나치게 보호주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상당부분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는 강한 정부가 필요하다. vs 우리는 강한 시민이 필요하다. 이 밖에도 복잡한 사회에서 서로 충돌하는 목소리들은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정치는 이를 어떤 관점과 기준을 통해서 수용할 것인가. 선거와 투표 외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어디이고 어떤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깊이 들어가서 정부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해 필요한가. <민주주의의 정원>은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 작가들이 찾은 해법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들은 지성에 두 종류가 있다고 보았다. 기계형 지성과 정원형 지성이 그것이다. 기계형 지성은 계몽주의 정치철학의 산물이다. 기계형 지성은 사람들이 톱니바퀴를 구성하는 톱니라고 생각한다. 선거는 정치적 기계에 의해 좌우되고, 소비자는 마케팅 기계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다. 빈곤과 환경파괴, 효율적인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관심과 이기심같은 사회악을 용납한다. 그러나 정원형 지성은 정반대를 추구한다. 이 세계와 민주주의는 서로 밀접히 연결된 하나의 생태계로 본다. 기계형 지성이 변화를 위험한 일탈로 간주하는 반면에 정원형 지성은 불안정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상정한다. 따라서 계속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며 김을 매어야 한다. 정원사가 된다는 건 ‘그대로 자연에 맡기는’ 것이 아닌 ‘돌봐야 한다’는 의미다. 화초를 잘 가꾸고 잡초는 솎아내야 한다. 정원형 지성은 사람을 역동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독립적인 창조자로 본다. 각자의 개인적인 선택이 모여 대중적인 양식을 이루되, 과정은 계획할 수는 있으나 결코 통제할 수는 없는 흐름이 된다. 정원형 지성은 우파와 좌파의 한계를 모두를 극복하고자 한다. 저자들은 상식적이고 단순해보이지만 통쾌한 명제를 제시한다. 진정한 사익 私益은 공익 公益 이다! 가 그것이다. 작가들은 미국에서 2009년에 경제불황이 발생한 것은 기존의 계몽주의 정치의 여파가 작용했다고 진단한다. ‘오늘날 사람들을 서로 단절된 로봇으로 취급하고 모든 어려움을 다른 누군가의 문제로 취급하는 법적·경제적 정책이 지배하게 된 것이다.’ (49p) 에릭과 릭은 우리 시대가 두 번째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먼저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단순→복잡 원자론적→네트워크적 평형→비평형 기계론적→행태론적 예측적→적응적 독립적→상호의존적 합리적 계산→비합리적 어림잡기 이기심→강한 호혜 승-패 → 승-승 또는 패-패 경쟁→협력 우리 눈에 보이는 패턴들은 고립적인 행동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다. 이러한 패턴들이 움직이는 방식은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전 세계 누구든 6단계의 지인만 거치면 서로 연결된다는 이론은 그저 웃자는 게임이 아니다. 우리 세계인들은 서로 강하게 혹은 헐겁게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좋든 싫든 간에 네트워크 속에 존재하며 동일한 망의 일부다. 따라서 중동의 석유가 기후변화를 일으키면서 북아프리카 가뭄의 원인이 되고 이는 식비를 상승시키며 이 때문에 튀니지의 한 노점상이 분신을 하게 되니, 결국 이것이 중동을 발칵 뒤집어놓은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는 가정이 가능한 것이다.’ (54쪽) 19세기 물리학과 고전경제학은 안정에서 안정과 부가 창출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에릭 바인하커에 따르면 혁신과 부를 만들어내는 발전적인 기회란 비평형의 혼란에서 비롯된다. 두 번째 계몽주의 시대는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행동은 전염되며 가끔 이런 전염은 무의식적이고 예측불가능하게 이뤄진다’고 했다. 또한 개인적인 선택이 갑작스럽게 사회적 변화의 커다란 파도가 되어 휘몰아칠 수 있다고 하였다. 과거에는 리스크와 예측할수 없음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봤다. 반면에 현대는 인간의 적응력을 높이 평가한다. 위험성 혹은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2점이 의사결정의 매 순간마다 더욱 가치를 발하는 유연성과 회복탄력성을 만들어낸다. 미국 초기 개척자들은 독립심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자율성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우리 정치와 문화는 훨씬 더 상호의존적’이라고 작가들은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다. (60p)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신봉했다. 반대로 최근의 행동과학은 우리를 좀 더 심도깊게 탐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비합리적이거나 이성에서 벗어나 감정적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시장은 언제나 이성적인 예측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행동을 만드는 동기에서 사람들의 두려움과 갈망, 탐욕같은 야성적 충동이 자주 발견된다. 사람들이 이기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모든 행동은 전염성이 있으며, 선한 일에는 상을 주고 나쁜 일에는 벌을 주는 것이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에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인식이 싹텄다. 결국 친사회적인 도덕성은 그저 도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현명한 것이 된다. 과거에는 ‘당신의 이익이 나의 손해’라는 식의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사람과 집단이 모두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경쟁적 관계처럼 보일수록, 삶은 언제나 승패의 시나리오로 설명되었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는 고정된 크기의 파이를 두고 제로섬게임을 생각한다. 그러나 건강한 사회는 ‘1+1=3’을 생각하는 한편 파이의 크기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규범에 따라 움직인다. 정치와 경제의 합당한 목표는 이러한 윈윈 시나리오를 극대화시키는 데 있다.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다. 당신의 손해는 나의 이익이다 → 당신이 잘할수록 나도 잘할 수 있다. 세상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 세상은 협동하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극렬한 개인주의가 승리한다 → 팀워크가 이긴다. 자신의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 →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진정한 사익은 공동의 이익이다” 라고 저자들은 강력히 외친다. 생존과 번영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주변사람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것. 이러한 명쾌한 저자들의 주장이 독자에게 희망을 전해 준다. 그리고 정원이라는 민주주의의 이론은 두루뭉술하지 않고 뚜렷하게 논지를 전개해 간다. 공익이 진정한 사익이라는 관점은 국제적 기후 변화와 테러, 마약, 대중문화, 마케팅이 대두되는 현대에 더욱 부합한다. 인간은 누구도 섬이 아니라는 전제를 갖고 출발할 때 민주주의 사회의 세가지 기본요소에 대해서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 즉 시민의식과 경제, 정부에 대해서 진지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정원사는 정원에 대해 책임을 갖는다. 자신이 정원의 미래에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의무감도 가져야 한다. 나쁜 것은 솎아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좋은 것을 심을 줄도 알아야 한다. 작가들은 현재의 미국인들이 시민의식을 잃어버렸다고 고발한다. 그저 기본적인 법을 준수하고 배심원의 의무와 투표 정도에 한정해서 시민의 행위를 한정하고 있다고 본다. 시민의식은 그저 투표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의식은 아주 단순하게 말해 공개된 공간에서 행동하는 방식이다. 여기엔 정중한 태도와 공손한 언어가 포함된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엔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작은 행위들을 아우른다. 어떤 장소를 방문했을 때 처음 상태보다 떠난 후가 아름답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또한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돕고 도움을 청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른 누군가의 책임으로 미루고 싶은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는 의미다. (83쪽)
정원형 지성은 시민이 우리가 공유하는 작은 땅을 관리하는 정원사라고 간주한다. 우리는 서로를 형성한다. 그리고 서로의 선택에 묶여 있다. 우리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오로가 말했듯,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할 수 없는’ 것이다. (87p) 정원형 지성의 관점에서 시민의식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라는 명제에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갖고 있다. 우리는 모두 함께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결국 내 문제가 된다. 사회가 개인보다 앞선다. 협력은 필수적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건 상호적이며 이를 통해 세계가 움직인다. 신뢰는 더욱 강한 경제 체제와 국가를 만든다. 나의 행동은 전염성을 지닌다. 그래서 사회는 내가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내가 하는/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목표를 설정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다. 그 이후에는 그 목적이 옳은 목적인지,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건 아닌지 보기 위해 지속적이고 조심스럽게 관여해야 한다. 에릭과 닉은 시민들이 정부와 시장의 정책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제시해 나간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작가들은 빅 왓, 스몰 하우 Big What Small How 라고 표현했다. 무엇 what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큰 big 정부. 어떻게 how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작은 small 정부 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커다란 국가적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엔 강하게, 이러한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에는 약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서비스 제공자 이기보다는 도구 제작자가 되어야 한다. 채찍보다는 당근을 써야 하고 부모가 아닌 코치가 되어야 한다. 자판기가 아니라 시민행동을 위한 도구함이 되어야 한다. ‘빅 왓, 스몰 하우’ 정부는 높이뛰기를 위한 장대를 높이 걸어두되 도약판에 최대한으로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헌신과 노력을 통해서 그 장대를 뛰어넘도록 경쟁하게 만들어야 한다. (200 page)
빅 왓 스몰 하우는 모든 측면에서 정부를 ‘소유’하는 체계이다. 정부에 대한 권리를 보유하면서 책임도 함께 지는 것이다. 빅 왓, 스몰 하우는 요령 있는 정원사가 일하는 방식이다. 정원사는 넝쿨에게 담장을 타도록 시키거나 장미가 저절로 피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채소를 심을지 꽃을 심을지 결정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씨앗을 심는다. 필요한 토마토와 불필요한 잡초 사이에서 무엇이 제대로 자라고 있는지 구분해낸다. 무엇보다도 정원사는 자신이 정원을 가꾸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227쪽)
정부는 우리가 각자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가 만들어낸 존재다. 작가들은 정부가 개인적인 기회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우파의 의견에 동의한다. 다만 이는 신뢰와 협력, 개인들의 출발선을 조정하는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정부의 역할이 공정함과 정의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좌파의 의견에도 동의한다. 다만 이는 좀 더 지역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으로써 사람들에게 지방 자치에 대해서 더 책임감을 부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가 정부다. 우리는 정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렇다면 정부를 유지할 수도 있는 것이다. (228 p) 자유란 무엇인가? 성인들은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결국 자유의 본질을 지키고 폭을 확장시킨다는 걸 안다. 에릭 리우와 닉 하나우어는 정원의 비유를 통해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다. 모두를 위한 정원을 가꿀 수 있다고 격려한다. 이는 그저 위시리시트가 아님을 작가들은 분명히 밝히면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저자들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분석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흥미롭고 유용한 책이다. 우리는 매우 실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냉소적인 계산으로서의 실용주의가 아니라, 무엇이 합당한지 판단하는 방식으로서의 실용주의 말이다.
가치는 의견이 아니다. 가치는 실제다. 즉, 가치에는 결과가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쟁취한 독립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는 상호의존을 추구할 수 있을까 우리는 민주주의를 잘 운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엄청난 도전들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훌륭한 씨앗들이 우리를 위해 뿌려졌다. 이제는 현명함과 겸손함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정원을 가꿔 나가야 할 차례다. ( 240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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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처음엔 누구나가 예쁜 정원을 꿈꾸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남모를 수고가 뒤따라야 한다. 귀찮다고 아니면 힘들다고 방치해두면 정원은 온통 잡초 밭이 된다. 물론
잡초라는 것이 인간의 관점에서 나쁜 것이라고 정의 내린 것이지만, 꽃을 심기 위해 만든 정원에서 잡초는
불청객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정원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기에 자신의 정원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정원사만이 그런 정원을 가꿀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민주주의의 정원]은 민주주의를 정부와 경제와 시민이라는 세 종류의 꽃이 살아가는 정원에
비유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는 완벽하게 효율적인 영구운동기관이 아니라 여러가지 변화가 조합된 복잡적응시스템
즉, 정원이라고 말하는 저자들은 민주주의라는 정원에도 당연히 정원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경제와
시민권력의 생태계를 가꾸어 나감으로서 소수가 아닌 다수에게 이익을 안기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시민들, 그들이
바로 정원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문은 우리가 능숙하고 생산적인 정원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지만, 우리는 연습, 함께 하는 연습을 통해서 훌륭한 정원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겉으로는 복잡해 보여도
나름 숨겨진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고 한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 세계와 민주주의를 시계와 톱니바퀴, 균형과 평형력 등으로 설명 가능한 일련의 기계장치와 같다는 보는 ‘기계형
지성’이라 불리는 시각과 사고방식에 갇혀 있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경제는 인간의 합리성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완벽하게 효율적이며 자정작용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나 경제는 규제로 안정을 찾아 나가는 기존의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이제는 이 세계와 민주주의를 얽히고 설킨 하나의 생태계로
보는 ‘정원형 지성’이 필요한 때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경제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제대로 구축되어 관리될 때에만 비로소 효율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은 우리가 공익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방식으로 완전히 변화해야 하며, 정치 또한
이를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익이 달려 있다고 믿는 영역에 대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전통적인 경제이론에서 우리는 개인이 이성적으로 자신의 사익을 극대화 시킬 때 시장은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간다고
배웠다. 그러나 ‘정원형 지성’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정치와 경제의 특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변화시켰고 이런 발상의 전환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다시 말해 정원을 구성하는 세가지 요소, 즉
시민의식, 경제, 정부의 역할은 새로운 사고와 시각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생존과 번영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주변사람이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며 그래서 “진정한 사익은 공동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자율성을 최고로 여기는 이데올로기의 근본이자 결과라고 한다. 시민의식이란 시장이나 국가 어느 한쪽도 사회를 위해 할 수 없고 또 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제공하는 힘이라고
말하는 저자들은 “사회는 우리가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다른 사람은
내가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며, 내가 친 사회적으로 행동한다면 나와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한 최종적인 결과는
더 좋아진다는 것이다. 가장 큰 과제는 시장과 국가가 점진적이고 때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의
시민의식을 몰아내려는 경향을 가졌음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경제에 대한 고전적인 접근 방식은 경제가 자신의 상황을 최적화하려고 노력하는 합리적인 행위자들로 구성된 선형시스템이라
가정한다. 이러한 모델은 경제와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이념적 이야기의 기반이며, 정책수립에 영향을 주고 이기심을 정당화하는 사회통념으로 변화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경제는 트리클다운 경제학으로 부자들이 잘살 때 우리가 잘살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수에게
힘을 부여했고 결과적으로는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제는 ‘정원형 지성’의 관점인 미들 아웃 경제학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소수가 아닌 우리 ‘나머지 사람’들이 부를 창조하는 엔진이라는 것이다. “다같이 잘살 때 모두가 잘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누진세와 노조라고
한다. 누진세는 시장이 본질적으로 지닌 수학적 경향을 상쇄시켜 승자독식주의의 집중을 막고, 노조는 집중된 기업권력에 대한 필수적인 균형 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다르다. 우파는 제한된 정부 혹은 작은 정부를 주장했다. 무엇을
할 것인지, 혹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불문하고 정부의 역할은 작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다 (small what small how). 이에 반해 좌파는 큰 정부 즉,
big what big how를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제 큰 정부, 작은 정부에 대한 논쟁은 접어두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큰 정부(big
what),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작은 정부(small how)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부는 국가적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는 강하게,
이러한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에는 약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민주주의는 널따란 정원이라고
강조한다. 그곳에는 시민생활, 공동체생활, 시장, 경제, 정부 라는
수많은 생명체가 얽혀 있다. 훌륭한 정원사는 자신이 자연을 만드는 것이 아니란 걸 아는 겸손함과 자연을
가꾸는 건 자신의 적극적인 손길에 달려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자유란 ‘우리는 함께’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며 책임이라고 한다. 저자들은 민주주의의 정원을 가꾸는 건 바로 우리라며, 현명함과 겸손함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 정원사가 되자고 촉구한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삶의 태도로서 다시
태어나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정원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의 정원에서 열매들을 제대로 수확할 수 있을 것이기에..
진정한 사익은 공동의 이익이다!
다같이 잘살 때 모두가 잘살게 된다! 사회는 우리가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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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청산'은 지금 우리 시대의 화두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고인 물이 썩어도 너무 썩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거기서 흘러나오는 악취와 폐수에 고통 받았다. 정의는 바보들의 하찮은 미덕이 되었고 공정은 힘을 쓸 줄 모르는 자들이나 믿는 어리석은 희망이 되어버린 나라였다. 능력이 아니라 타고난 가문의 힘과 돈이 있어야 개 돼지가 아니라 사람으로 인정받는 세상. 정유라의 말대로 돈 없는 아빠 엄마를 원망하는 게 당연시 되던 사회였다. 그러나 공정에 대한 바람은 인간 DNA에 깊숙이 새겨진 것이었고(침팬지조차 자기가 이유없이 남보다 적게 받으면 불같이 화를 낸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 언어를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은 같이 협력해서 무언가를 얻었을 경우, 이유없이 남이 자기보다 적으면 자기 것을 기꺼이 나눠준다고 한다. 바로 공정에 대한 생각이 우리 유전자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독 정의롭지 못한 것과 불공정한 것에 분노하는 것도 실은 거기 있는 것이다.) 당연히 참는 데도 한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터져 나왔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우리가 가진 인내의 임계점을 벗어나게 한 것이다. 오늘의 '문재인 정부'는 천만이 넘는 수많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져온 것이었다. 언론은 그런 적극적인 시민의 움직임을 휘발시키려 일부러 '장미대선'이란 프레임을 붙였지만, 그건 아니 될 말, 그것은 '촛불대선'이라 붙여야 옳았다. 하긴 최고 적폐 중인 언론이 멀쩡한 행동을 할 리 없다. 어쨌든 우리는 촛불 행동을 통해 소중한 교훈 하나를 깨우쳤다. 지금 너무도 일을 잘 하는 문재인 정부를 보면서 더 실감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바라는 세상이 있다면 그런 세상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적극 참여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 이런 교훈을 쉬운 말과 훌륭한 논리로 민주 시민들에게 적극 설득시키는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미국의 유명한 시민 행동가 에릭 라우와 작가 닉 하나우어가 공저한 '민주주의의 정원'이라는 책이다.
때로는 제목이 책의 내용을 아주 집약하여 잘 보여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이 그러하다. '정원'이라는 말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다. 정원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마냥 내버려두면 꽃은 시들고 풀은 썩어 아름다움이 아니라 불쾌감만 잔뜩 불러 일으키는 혐오의 공간이 되어 버린다. 정원의 생명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적극적인 참여에 있다. 정원으로 가서 날마다 잡초를 뽑거나 벌레를 쫓거나 다른 꽃과 나무의 씨를 뿌리고 물을 주기도 하는 등 이것, 저것을 자꾸만 해야 비로소 정원답게 된다. 훌륭한 정원사는 절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정원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p. 16) 민주주의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누군가 대신 해 주겠거니 생각하고 그저 손 놓고 있으면 민주주의는 악취가 진동하는 폐허의 장소가 될 뿐이다. 남의 정원이 아니라 바로 내 정원이라 생각하고 그 어떤 일이든 거침없이 나설 때, 정원은 비로소 우리에게 평안과 희망의 공간이 되어준다. 우리의 위대한 시민의식은 시민생활을 하나의 정원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모든 문제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의지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정원 말이다.(p. 75) 이런 생각을 민주 시민의 의식 깊이 뿌리내리기 위해 이 책은 정말로 마치 정원을 만들고 가꾸는 것과 같은 순서로 되어 있다. 처음 씨를 뿌리는 단계에선 민주주의의 정원사가 되기 위해 그 의식부터 지금까지의 기계형 지성이 아니라 정원형 지성으로 바꾸길 원한다.
문명은 한 때 자신에게 성공을 안겨준 방식에 갇히게 되는 경향이 있다. 문명 만이 아니다. 회사도, 사람도 어떤 방법으로 성공을 맛 봤다면 거기서 잘 벗어나지 않는다. 저자들은 지금 우리의 지성이 그렇다고 한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올 때, 자본주의와 더불어 정립된 기계적 지성은 지금까지 우리들을 지배해왔다. 그러나 이제 환경이 달라졌다. 좋은 정원사들은 아무 데나 씨를 뿌리지 않는다. 토양을 잘 살피고 거기서 잘 자라날 만한 식물들의 씨를 뿌린다. 그와 같다. 씨를 뿌릴 토양이 달라진 것이다. 이제 세상은 모든 것이 저마다 긴밀하게 연결된 네크워크의 시대다 . 얼른 하나로 떼내는 것이 어려울만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생태계(p. 29)'다. 기계적 지성은 너와 나의 구별이 쉬웠던 때에나 통했던 것. 이런 너와 나의 구별이 어려운 생태계에선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원형 지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런 정원적 지성으로 보면 지금까지의 기계형 지성의 시선과는 다르게 많은 것들이 달라 보인다. 특히 사익이 그러하다. 정원형 지성의 시선에서 사익은 더이상 나만의 이익이 아니다. 이 사회의 가장 힘없고 어려운 이들의 일조차 바로 나의 일이므로 그렇게 사익은 곧 공동의 이익이 된다. 모두의 이익이 다 나의 사익이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은 이것을 가장 기본적인 신념으로 하여 형성된다. 나의 사익이 확장하여 공동의 이익과 결부되므로 이 사회에 벌어지는 그 어떤 일 또한 나와 무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모두가 민주 사회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문제든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설 때,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사는 것이 저마다의 이상이 되고 그것을 향해 가열차게 움직이는 '민주주의의 정원'이 완성될 것이라 본다. 이렇게 '민주주의 정원'은 그들의 말마따나 기계형 지성에 물든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사익은 나만의 이익이며 '나 하나 기를 쓰고 노력해봤자 되는 거 하나도 없으니 그저 남이 먼저 해 주길 바라며 무임승차나 하자'라는 생각이나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나만 잘 살면 되지 뭐.' 하는 생각 따위를 저 멀리 날려 보내고 전혀 다르게 생각할 것을 꽤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민주주의 부활의 기점에 선 우리들이 정신 무장을 위해서라도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이다. 촛불 행동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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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를 넘어 새 시대를 여는 시민 교과서 <민주주의의 정원>. 경제와 정치 이야기를 어려워했던 분이라면 에릭 리우, 닉 하나우어 저자가 경제와 정치를 정원으로 묘사해 설명하는 이 책 추천해드려요. 청소년들도 읽을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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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고리타분한 이데올로기에서 제한적인 선택만 해왔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중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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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단 크기가 일반 책 사이즈보다(대략 150*225*25mm 정도) 작다(118*188*20mm). 포인트나 자간도 가독성 있게 편집되어 있어 일단 책을 읽을 때 여러가지로 부담이 적었다. 책은 총 6장, 251쪽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에서는 핀란드의 사회민주주의 체제와 미국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교 분석하면서, 신자유주의 체제를 대표하고 있는 미국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 사회민주주의 체제로의 급격한 변화는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그 중간쯤 어딘가가 되더라도 결론적으로는 변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사회 체제에 대한 고민은 결국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고민과 대안찾기가 아니였나 싶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책 <민주주의의 정원>에서는 과연 민주주의라는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인 우리에게 무엇을 제안하고 있을지, 어떤 변화를 제시할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를 위해 책은 일관되게 시민, 경제, 정부라는 세 주체들의 기존 패러다임들을 살펴보면서 이 페러다임들의 변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이를 은유(정원, 정원사로 시작되는)로 전환될 수 있도록(p.233)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민의식, 경제, 정부의 역할이 기존의 사고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시각으로 변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p.36). 그 중에서 <시민의식>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각 장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책에서 말하는 은유로의 전환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1장 씨앗 뿌리기>에서는 기존 산업혁명으로 인해 발생하였고 지금까지도 축이 되고 있는 <기계형 지성>과 그 대안으로 저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정원형 지성>에 대한 비교를 통한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었다. <제2장 다르게 보기>에서는 <사익> 즉 개인의 이익이 재정의(redefinition)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여러 분야에서 맞이했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첫 번째 계몽주의 시대에서의 정의(定義, definition)가 이제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두 번째 계몽주의 시대를 열어가는 현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제3장 위대한 정원사>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내가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시민 의식>이 2장에서 언급한 재정의된 사익 곧 공공의 이익을 위해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나의 행동 변화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실천 가능한 작은 일들로 예를 들고 있었다. 즉 ‘부탁드립니다’와 ‘감사합니다’와 같은 사소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말을 통해서도 사회는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었다(p.103). <제4장 진정한 번영>에서는 기존의 트리클다운(Trickle down) 경제학의 폐단(부의 분배에 있어 톱다운(Top-down) 형식의 실패와 이로 인한 부의 양극화 현상)에 대해 지적하면서 돈이라는 경제생태계의 필수적인 생명의 피가 한곳에 정체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순환하기 위해서는 미들아웃 경제학(Middle-out economices)(부의 분배가 바텀 업(Bottom-up) 형식으로 진행되어 결과적으로 두터운 중산층 만들수 있는)을 실현해야 하는데 이를 이루기 위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제5장 자치의 기술>에서는 4장에서 언급했던 정부의 역할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었는데 목표를 달성을 위해 투자할 땐 정부의 역할이 커져야 하지만 우리가 총체적으로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에 있어서는 정부의 역할이 작아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행동 이론을 빅 왓, 스물 하우(Big What, Samll How)라고 이름붙였다(p.177). 아울러 자유지상주의 접근법은 노 왓, 노 하우(No What, No How) 보수적 접근법은 스몰 왓, 스물 하우(Small What, Small How) 진보적 접근법은 빅 왓, 빅 하우(Big What, Big How)라고 정의내리고 있었다. 이어 <6장 수확> 부분에서는 앞부분에서 논의 했던 내용들을 정리하며 마무리하고 있었다.
저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미국의 유례없는 실험은 약 230년이 넘는 역사를 지녔다(p.37)고 말하면서 이제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맞서야 하는 변혁기를 거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번혁기에 시민이라는 정원사는 변화된 <시민의식>으로 민주주의라는 정원을 끊임없이 살피고 점검함으로써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함을 역설하고 있었다. 이는 저자가 주장하는 바 우파나 좌파 사이에서 절충의 방법을 찾으려는 ‘온건주의자’나 ‘중도주의자’가 아닌 독립적인 사고에(p.22) 대한 물꼬를 트는 좋은 계기였던 것 같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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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좌우를 넘어 새 시대를 여는 시민 교과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책의 내용 중 대부분은 부제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기존의 이분법적인 진보와 보수를 넘어 조금 더 21세기에 걸맞는 정치 집단 그리고 이를 위한 시민의 참여를 강조한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번역된 책이기 때문에 그 '진보와 보수'는 미국을 기준으로 적혀 있습니다. 저자가 클린턴 쪽에서 일했던 전력이 있다는 약력을 읽어서 그런지 '진보와 보수를 넘는'이라는 표현보다는 '새로운 진보 모델'이라는 말이 조금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한국의 (소위) 보수 집단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읽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의 복잡성은 끝없는 관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다면 중요한 연결 고리에만 신경쓰면 되겠으나 복잡한 세상은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흔한 비유로 북경의 나비가 날개짓을 해서 뉴욕의 태풍을 불러올 수 있으니까요. 저자는 이 끝없는 관심을 정원을 돌보는 행동으로 설명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해주니까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정원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잡초만 창궐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라는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려면 지속적인 솎아내기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아비가 잘 했으니 딸도 잘 할거야'라는 지지자들의 무비판적인 지지가 만들어낸 결과를 알기에 이러한 이야기는 마음에 와 닿습니다. 반면 책 내용 중 '정원'에 대한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점은 의아했습니다. 제목에서처럼 참신한 설명이 책을 뒤덮기를 너무 곧이 곧대로 기대했나 싶기도 합니다. 근래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대통령을 믿고 기다려 보자'라는 글이 많은 추천을 받고 있습니다. 지켜주지 못했던 노 전 대통령을 반면교사 삼은 행동으로 이해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대통령이 다른 후보들보다 '듣고 행동을 바꾸는 능력'이 나아 보여서 선택했습니다. 방해가 되는 잡초들은 그 때 그 때 제거해준다는 마음으로 조금만 비판적으로 지지를 한다면, 이 정부는 이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좋은 마무리를 보일 수 있으리라 믿어 봅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 ![]() ![]() ![]() ![]() ![]() ![]() ![]() 정치에 관심이 없는 국민 대다수도 작년 촛불 혁명을 통해서 정권이 바뀌면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라는 이데올로기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채 표류 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단순하게 이분법되어 있는 한국 정치 형태와 그걸 이용해서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는 정치인과 어려운 단어와 용어로 정치를 풀어내고 있는 방송을 통해서 점점 벽이 쌓여가고 있는 것 같다 팟캐스트와 SNS를 통한 정치적 행위가 활발하지만 편향적인 모습이 많이 보이고 진실 여부보다 폭로성이 강한 탓에 거부감이 드는것 또한 사실이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고 새로운 정치 형태의 실현을 위한 대안으로 '민주주의의 정원'에서는 적극적인 시민들의 정치 참여와 정부의 필요에 의한 개입을 주장한다 미국을 주 무대로 책에 내용이 서술되어 있지만 한국의 상황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에 읽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책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것 처럼 땅에 씨를 뿌리고 가만히 놔둘 것인가 아니면 가꿀것인가는 우리의 몫이 되어 버렸다 인상 깊은 구절들
『좌파의 중앙계획자와 우파의 시장근본주의자라는 합리주의자들의 계획이 큰 대가를 치룬 자만심으로 연결되었다면, 새로운 과학의 영향을 받은 공공정책은 이제 지속적인 겸손함으로 이어져야 한다』(70p)
『소수의 승리자만을 가진 경제를 택할 것이냐, 열심히 일한 자들은 모두 승리하게 되는 경제를 택할 것이냐, 선택은 우리 몫이다』(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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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정원>에 대한 첫 인상은 작고 두껍지 않은 책이었다. 그리고 쉽게 읽을 수 있겠다는 '자만'도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이 책은 크기가 작고 두껍지 않다고 해서 얄팍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여러 책을 만나다보면 쉬이 읽히는 책이 있는데, 그렇게 순순히 쉬이 읽히는 책 또한 아니다. 깊이가 있고 어려운 부분이 있어 때로는 쉽게 넘길 수 없으며, 한 번 읽는 것으로는 부족한 그런 책이다. <민주주의 정원>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정원'과 접목하여 설명하는 책이다.
'정원'과 '민주주의'라는 연결 고리를 쉽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정원형 지성과 기계형 지성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조금은 정원과 민주주의에 대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인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이루어지면서,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방향'을 말해주고 있다. 어렵지만 차분하게 읽다보면 왜 '정원사'와 같은 마음이 필요한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진다.
정원사가 정원을 돌보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일방적인 사익이 아니라 진정한 사익은 공동의 사익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민주주의. 지금의 상황과는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고, 어쩌면 비슷하게 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앞으로 가야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나름의 의의를 가지고 있는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에 대해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읽기에도 나쁘지 않고, 이미 기존의 민주주의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민주주의 정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