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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법사
일행이 경전을 구하기 위하여 서역으로 향한 십만팔천리에 이르는 길은 분명 구도求道의 길이었다. 길을
가는 동안 수많은 요괴들이 앞을 가로 막으며 그들을 고난 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유혹들이 그들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꿋꿋하게 앞을 향해 나아간다. 유목만이 구도를 완성할 수 있다는 듯이..
일전에
어느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부귀에 대한 탐욕은 정착으로 이어지고, 정착은
또 다른 정착을 부른다'라는 대목에서 마음이 심란해짐을 느낀 적이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은 그 옛날 농경문화의 도입과 함께 이루어진 정착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정착은 또 다른 탐욕을 낳고 인류는 탐욕 속에서 정착을 더욱 단단하게 인류의 속성으로
만들었다. 삼장법사 일행이 가는 길은 분명 정착이 아니라 유목의 길이다. 그러나 고난이 닥칠 때마다 정착에 대한 유혹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인지도 모른다.
서우하주
땅에서 세 보살이 딸 셋 가진 과부로 변장하여 꼬실 때 다 거절 하는데 저팔계가 응한 것은 정착이 주는 달콤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저팔계는 힘이 들 때마다 부도산의 고로장으로 돌아가 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고로장에는 그와 혼인했던 아내와 먹고 살만한 부富가 있어 이미 정착의 최상조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고로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말은 곧 정착하고 싶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4권에서도 저팔계의 정착에 대한 희망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평정산 연화동에 사는 두 마왕이
앞을 가로막았을 때나, 고송간 화운동에서 홍해아에게 삼장법사가 납치되었을 때, 저팔계는 어김없이 여기서 흩어지자고 말한다. 자신은 고로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정착에
대한 유혹은 요괴들과 싸우거나 자신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구도의 길을
떠났다고는 하나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목적지가 보이지 않을 때, 이제는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때, 정착에 대한 욕망은 살그머니 찾아온다. 보림사 근처에 도착한 일행에게 삼장법사가 말한다. "길
위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며 가을이 지고 겨울이 온 것도 사,오년 째인데, 어째서 아직도 도착을 못한 거냐고?" 손오공이 그 말을
받는다. "아직 한참이에요, 한참! 아직 대문도 못 나섰다고요."(150쪽) 이 말을 듣고 있던 저팔계, 아예 그냥 돌아가자고 말을 거든다.
보림사에서 삼장법사가 밝은 달을 쳐다보고 고향을 생각하며 한탄하자, '달빛에 고향만 생각할 줄 알았지, 달이 의미하는 것이 자연 삼라만상의 규범인줄은 모른다'고 손오공이 나서서 꾸짖는다. 서로의 역할이 바뀐 것 같아 웃음을 자아내게도 만들었지만 번뇌는 고승에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구도란 바로 이러한 장애와 번뇌를 마주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일 게다. 그렇기에 그들이 가는 길이 평탄하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 평정산에서 금각대왕과 은각대왕을 사로잡고, 보림사에서 오계국왕을 구원해준 일행은 찬두호산에 도착하면서 요괴 홍해아에게 삼장법사가 납치 당하는 위기를 맞는다. 이번에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구도를 향한 유목의 길을 계속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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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팔계의 사과에 힘입어 손오공은 다시 돌아와 황포요괴에게 잡힌 삼장법사를 구한다. 하지만 여정에 나타나는 요괴는 한둘이 아니다. 평정산에 다다른 삼장법사 일행. 삼장법사가 열 세상을 윤회하며 수행을 한 사람이라 원양(元陽)이 조금도 새지 않았기에 그의 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 할 수 있다는 소문이 요괴들 사이에 퍼진다. 그러니 험한 산마다 나타나는 요괴들은 삼장법사를 잡아먹고 천수를 누리기 위해 애를 쓴다. 평정산에서는 금각대왕과 은각대왕이 변신을 해서 삼장법사를 잡아간다. 멋진 제천대성 손오공. 삼장법사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끝내 힘이 부쳐 관음보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원래 금각대왕과 음각대왕은 태상노군의 밑에서 금화로와 은화로를 지키던 동자였다. 이들은 남해의 관음보살이 삼장법사 일행이 진심으로 서천으로 갈 생각이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 보낸 것이다. 아직도 관음보살은 이들이 못 미더웠던 모양이다. ^^ 보림사에서 머무르게 된 일행, 삼장법사 꿈에 오계국 왕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를 도와 나라를 다시 찾게 해주고 문수보살을 찾아가 오계국 왕을 다시 살려 내는 공덕을 베푼다. 이 또한 선행을 통해 업을 쌓는 것일 것이다. 다시 길을 떠난 일행 앞에 삼장법사를 잡아먹기 위한 또 다른 요괴인 홍해아가 삼장법사를 납치해 간다. 손오공은 도를 닦았기에 요괴가 변신을 하고 나타나도 언제나 알아채지만, 삼장법사와 저팔계는 알아채지 못한다. 삼장법사와 저팔계는 언제나 짝짜꿍이 되어 손오공과 의견대립을 이룬다.
손오공은 사물의 근본을 본다. 그를 도를 깨달았기에 외모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삼장법사와 저팔계는 언제나 사람의 외모만을 보고 판단한다. 거기에 고집도 세다. 하여 요괴가 변신하고 나타나면 손오공은 그 근본의 기운을 알고 요괴의 존재를 인지하지만 삼장법사와 저팔계는 번번이 속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다름이 없다. 그러니 번번이 요괴의 꼬임에 넘어간다. 하여 언제나 의견차이가 수시로 발생한다.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정도면 우둔함을 넘어 아둔한 수준이다. 거기에 저팔계는 게으름과 불평불만의 극치이다. 손오공이 요괴를 처치하는데 방해가 된다. 잘난 손오공을 삼장법사에게 모함하는 것도 언제나 저팔계이다. 끼리끼리는 통한다고 했던가. 저팔계와 삼장법사는 손오공을 모함할 때는 궁합이 잘 맞는다. 손오공은 금공(金公)이라 칭한다. 즉 오행상으로 금(金)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금은 단단하고 정미로운 기운을 의미한다. 돌과 쇠. 보석과 칼 등을 떠올리면 된다. 상극의 원리상 금을 극하는 건 화(火)다. 손오공은 화기운도 엄청나다. 하늘 궁전에서 대소동을 피울 때 태상노군의 팔괘로에서 사십구일 동안 단련되는 바람에 ‘심장과 간은 금으로, 허파는 은, 머리는 구리, 등은 쇠로 변하고 불같은 눈에 금빛 눈동자’를 갖게 되었다. 그러니 손오공은 불에 잘 달궈진 금인 것이다. 기질적으로는 금과 화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오행상으로 금은 정의감과 의리, 주체성과 리더쉽 책임감등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지배욕과 공격본능으로 나아간다. 손오공이 여차하면 여의봉으로 요괴들을 때려죽이고 성격이 급한 것도 그가 금공(金公)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손오공이 누구인가. 바로 원숭이다. 십이지신중에서 원숭이는 신(申)을 의미하니 신은 양의 기운이다. 손오공이 가지고 있는 금공의 기운에 원숭이 양의 기운이 합해졌으니 그의 성격이 불같을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 성격은 삼장법사와는 상극이다. 삼장법사는 저팔계의 꼼수는 인정할지언정 손오공의 폭력성향은 용서하지 못한다. 해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우는 것도 손오공이지만 가장 많은 사고를 치는 것도 손오공이다. 이렇게 상극이 한배를 탔으니 그 여정이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이렇듯 찌그럭 짜그락 호흡이 맞지 않는 밴드이지만 위기사항에서는 철저히 단합한다. 4권에서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우리가 사는 현재의 모습은 바로 전세의 인연의 고리이다. 즉 지난 생의 업보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현생의 삶의 모습은 후생의 모습을 결정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면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난다고 하지 않던가. 즉 윤회는 축복이 아니다. 삶은 고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윤회를 통해 삶을 반복하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업보(業報)를 씻기 위해서이다. 삼장법사 일행이 서역으로 가는 것도 해결되지 않은 업보 때문이다. 삼장법사는 불경을, 제자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씻고서 업장소멸을 위해서이다. 삼장법사는 열 번의 생을 살면서도 이루지 못한 자신의 업장소멸을 위해 서역 길에 간 것이다. 이 논리로 보면 우리네 삶의 모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난 윤회는 믿는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의 업을 짊어지고 후생에 태어난다는 연관성은 믿지 않는다. 육신도 전생의 육신이 아니고, 기억에도 없는 전생의 공과(功過)로 인해 현생의 삶의 모습이 결정된다면 이 또한 억울한 일이 아닌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생의 공과를 현생으로 되 물림된다는 불교의 교리와 원죄로 인해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논리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를 달리 생각해볼 수는 있겠다. 우리가 매일 잠을 자는 것을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전생과 현생 후생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매일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오늘의 나의 모습은 어제의 결과물이다. 내일의 나의 모습은 오늘 내가 사는 삶이 결정한다. 미래의 모습을 알고 싶으면 현재 나의 삶을 지켜보면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매일 저녁 잠자리가 죽음이라고 생각 한다면 우리는 매일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제는 전생이 되는 것이고, 오늘은 현생이 되는 것이며, 내일은 후생이 되는 것이다. 오늘 일을 미루면 그건 후생에서 내가 해야 될 일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악행을 행하면 그것 또한 업이 쌓이는 것이다. 오늘 내가 못다 한 말은 미련이 남아 후생으로 넘어간다. 그것 또한 업이다. 그러니 내가 숨 쉬고 있는 오늘, 내가 살고 있는 현재가 가장 귀하고 귀하다. 해야 될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될 말, 하고 싶은 말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미루는 순간 그것은 후생. 즉 내일의 업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내가 지은 죄도 바로 내일, 즉 후생의 삶을 결정하니 죄악을 쌓지 말아야 하는 것도 당연지사이다. 죄악도, 원망도, 미움도, 증오도 모두 다 멀리해야 하는 것이다. 어제의 기억을 오늘로 가져온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윤회와 다른 점은 없다. 오늘이 삶의 마지막 인 것처럼, 이 순간이 마지막 호흡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실존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우리 삶의 매일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다. 삶은 그 자체가 바로 윤회의 연속은 아닌지. 우리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날 우리를 얽어맨 윤회의 사슬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것은 아닌지. 삶의 순간순간이 참 귀하다. 내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 쉬는 한 번의 호흡 또한 참으로 귀하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의 꽃이 피네(一行一步一花新)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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