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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글 - 무라카미 류
어디에나 있는 장소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당신을 위한 소설
나는 이 책에서 선술집이나 공원, 편의점 등 일본의 어디에나 있는 장소를 무대로 하여, 시간을 응축하는 기법으로 해외 유학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는 사람들을 그리려 했다. 생각해보면, 폐색감이 짙어지기만 하는 일본 사회에서 해외로 나가는 것은 몇 안 되는 희망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 단편집에서는 등장인물들만의 고유한 희망을 담고 싶었다. 사회적인 희망이 아니다.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개별적인 희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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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는 서문에서 '사회적 희망이 아니라,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개별적인 희망'을 말했다. 그런데 '문화일보'나 '리브로'의 책소개자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거 같다. 그들은 한결 같이 결핍과 갈등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주인공들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건 이 책을 읽지 않았거나 잘못 읽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류가 말하는 희망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그런 희망적인 희망이 아니다. 마지막 손에 쥐어진 작은 끈, 그 끈을 놓으면 자살할 수밖에 없는,, 그 끈을 놓지 않으려는 주인공들의 마지막 발악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지구 끝에 힘들게 매달려 있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을 뿐이다.
출판사는 왜 제목을 '어디에나 있는 장소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나'에서 '절망이라는 여자와의 섹스'로 바꿨을까? '어디에도 없는'은 바로 소외를 말한다. 물건과의 소외, 장소와의 소외, 그리고 인간과의 소외까지 모든 소외를 맛본 사람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절망에 빠져버린다. 절망에 굳이 性을 붙여 여성으로 정하고, 섹스도 보통의 에로틱이나 로멘틱이 아닌 홍상수식 건조한 섹스라면 이해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음악이라도 안 듣거나, 섹스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절망의 순간이 그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들이다.
서술적 특징 : 류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있다. 류는 현재에서 과거를 유추해낼 때 리모컨의 일시정지 단추를 누른다.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올 때 또 한 번 일시정지 단추를 누른다. 보통 비디오를 보면 플레이가 지속되고 일시정지는 부득이한 경우에만 사용하지만, 류는 일시정지를 반복해서 누르듯 플레이의 흐름을 거의 멎게 한다. 즉, 일시정지를 누르고 과거를 유영한다. 유영이 끝나면 다시 일시정지를 누르고, 화면은 0.1초간 움직인다. 또 다시 그의 과거는 시작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올 때 일시정지를 누른다. 화면은 또 0.1초가 흐른다. 예전에 봤던 퍼니게임에서 악의적(?) 주인공이 리모컨으로 상황을 과거로 돌리는 획기적인 방법을 썼듯이, 류도 그 방법을 노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덧붙임말 : 홍상수 감독은 어쩌면 하루키보다는 류의 더 영향을 받았는지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사회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겠지만 말이다. 류와 하루키의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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