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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쫙 펴 보자. 그 상태에서 새끼손가락 중간 부분에 있는 두 마디를 구부려보자. 네 번째 손가락의 마디들도 함께 구부러진다.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이 함께 구부러지는 이유는 신경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피아노 악보에서는 엄지손가락을 1번으로 표시하고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새끼손가락을 5번으로 표시한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바로 4번과 5번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로따로 통제하는 것이다. 신경이 연결돼서 동시에 움직이려 하기 때문이다. 작년 봄부터 거의 매일 피아노를 1시간 이상씩 치고 있다. 아이에게 아버지가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한 것도 있고, 어릴 적에 한참을 치다가 그만둔 피아노 실력을 그대로 썩히는 것이 아쉽기도 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피아노를 쳐서 그런지 손가락이 내 생각만큼 움직여주지 않았다.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과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8번을 꾸준히 연습했는데 처음에는 악보에 그려진 음표를 따라 건반을 누르는 일만도 벅차 정신이 없었다. 특히 4번, 5번 손가락이 내 마음대로 잘 움직이지 않는 문제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역시 연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어느덧 악보를 보지 않고도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을 큰 실수 없이 무난하게 칠 정도가 됐다. 어릴 적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시기였다면 이 정도쯤에서 다른 곡을 골라 연습하기 시작했겠지만, 나이를 먹어 경험이 쌓여서 그런지 예전과는 다른 뭔가를 감지했다. 테크닉이 손에 어느 정도 익자 귀에 내 연주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연습이 부족해 악보를 보며 손가락으로 건반을 제대로 누르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때에는 정작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을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내 연주가 내 귀에 제대로 들리기 시작하는 것은 내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저명한 피아니스트이지 음악비평가인 찰스 로젠의 저서 <피아노 연주에 관한 7가지 테마>에는 이런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잘 나와 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자신의 소리를 직접 들어보기 위해서 그들의 연주를 녹음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연습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이러한 연습은 연주하는 순간 순간의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우리에게 오히려 그와 반대로 기계 장치에 더욱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중략)...한 피아니스트가 객관적인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완전히 잊고 그 작품에 몰입하는 실제의 주관적 경험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객관적 상태란 그 피아니스트로 하여금 자신의 주관적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상태이다. 보통 이러한 객관적인 상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작품을 완전히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때이다. 의식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당신의 손가락이 어떤 테크닉의 어려움도 없이 음악을 연주할 때, 당신은 관망하듯 자신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며 새로운 음색의 효과와 보다 더 섬세한 루바토를 시도하며 곡의 해석을 주도할 것이다. 한 작품을 처음 접할 때부터 그 곡의 모든 내용이 소리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 파악하는 연주자들도 있겠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런 연주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피아니스트는 이렇게 무의식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해야 한다. 물론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무의식적 기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전문 피아니스트들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한 실력을 갖춘 그저 그런 아마추어 애호가일 뿐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손가락 운동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면서 내 귀에 들리는 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나에게 음악의 또 다른 세계를 열어 주었다. 하지만 그 새로운 세계는 신기하면서도 괴로웠다. 손가락에만 집중할 때는 내 연주가 그렇게 형편없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마치 악보의 모든 음표들이 근육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뽀빠이 이두박근 음악을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연습이 필요했다. 소리 하나하나에 내 감정을 담기 위해 손가락과 손목의 근육과 관절뿐만 아니라 어깨, 등, 목의 근육과 관절을 미세조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피아노 연주에 관한 7가지 테마>는 제목에 나와 있듯이 몸과 마음, 피아노의 소리, 악기로서의 피아노, 음악학교와 콩쿠르, 연주회, 레코딩, 연주 양식, 이렇게 7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7가지 테마 중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레코딩 부분에서 저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여러 기술적 ‘조작’들에 대해 소개한 일화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러한 진실성에 대한 요구는 왜 레코딩에서의 테이프 이어 붙이기가 도덕적인 딜레마를 만들며 왜 그 존재 사실이 특히 ‘실황’ 레코딩에 있어서는 자주 숨겨지는가를 설명해준다. 호로비츠가 수년간 잠적 후 다시 무대로 돌아왔을 때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그의 리사이틀은 컬럼비아 레코드에 의해 녹음되어 발매되었다. 호로비츠는 한 인터뷰를 통해 연주는 어쨌든 레코드에서 수정되지 않을 것이라 밝혔으며, 몇 개의 틀린 음들은 그것을 충분히 기억할 정도로 두르러졌지만 정말 손대지 않은 채 남겨졌다(몇 년의 공백기로 인해 긴장한 호로비츠는 틀린 음을 치며 리사이틀을 시작했었다). 하지만 컬럼비아의 엔지니어는 쇼팽 발라드는 특히 테이프 이어 붙이기가 어려웠었다고 말했다. 이는 호로비츠가 대중 앞에서 연주하기 전, 홀에서 전곡을 녹음해야 함을 의미했다...(중략)...또 한번은 컬럼비아의 한 제작자가 테이프의 한 부분을 양손목에, 다른 한 부분을 목에 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들은 『흑건』에 있는 옥타브 패시지입니다(약 1.5초 간 지속되는 패시지). 호로비츠는 한 녹음에서 이 옥타브의 시작 부분을 마음에 들어했고 다른 녹음에서 이 옥타브 패시지의 끝부분을 마음에 들어했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 두 부분을 연결할 짧은 조각을 찾으려고 지금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피아노의 거장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도 레코딩에서는 실황연주도 ‘조작’을 하고 스튜디로 레코딩의 경우는 여러 군데서 짜깁기를 한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다른 일화에서는 어떤 피아니스트가 테크닉으로 굉장히 어려운 부분을 왼손과 오른손 부분을 따로 녹음해서 합쳤다는 내용도 있다. 이런 일화들을 통해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 과연 ‘레코딩’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책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페이스북으로 미국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지인에게 저자 찰스 로젠에 대해 질문을 했더니 다음과 같은 답이 왔다. “그럼 잘 알지. 이미 너무나 유명한 분. 저 책은 아직 읽어보진 못했으나 『The Romantic Generation』, 『The Classical Style』이 대표저서라고 할 수 있어. 거의 전공생들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이 책 때문에 피아노를 치는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가지게 됐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강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