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무슨 주의(이즘)이라는 것에 아직도 모호하고 두리뭉실하기만 한 내게 가장 어렵고 이상한 것이 실존주의였는데 카프카는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이다. 역시...그 길지도 않은 책이 참, 마음을 부대끼게 한다. 어느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벌레가 되어버린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3명의 가족들의 이야기였다. 벌레가 되어버린 이유도 밝히기를 꺼려햐는 작가에게 서운함이 드는 것은 약과다. 벨레이나 그의 의식은 늘 인간 그레고르 그 자체이다. 벌레의 형상을 하고 벌레의 행동을 하고, 벌레의 입맛을 가진 사람이 가진 인간의 의식이란 너무 처참하다. 혹, 이 상황이 꿈속의 일은 아닐까...라는 나의 얄팍한 생각을 작가는 그냥 주인공의 허망한 죽음으로 여지없이 무질러대는 폭력을 행사했다! 결국 나중에 카프카의 생애을 알고 나서야, 카프카가 평생을 다해 주장하던 인간 실존의 문제들에 대한 물음표가 이 작품속에 집약되어 있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번역가가 소개하는 카프카를 참고삼아 소개해 본다. '유태인으로 태어나 유태교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인도 아니었고,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도 아니었다. 일상적인 가정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작가이길 원했지만, 완전한 의미의 작가도 아니었다. 그는 많은 세계에 조금씩 속하면서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방인'이었으며 숙명적으로 고독의 짐을 지고 살았다.' 그는 3번의 약혼을 모두 파기하고 평생 홀로 지냈으며 그토록 책을 쓰기 원했지만, 직업인(노동자재해보험국의 직원)으로 살면서 밤에만 글을 썼다. 결국 인간은 죽음 전에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없다(내 해석으로는)는 식의 그의 끝없는 물음은 결국 아무런 답도 없이 자신도 폐결핵 끝에 41살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음으로 끝을 맺고 만다. 하지만, 그는 한순간도 그 질문들에 답을 내리려 하지 않았기에 실존주의자라 불리우는 것일 지도 모른다. '소유는 없다. 단지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 호흡이 끊어진 후, 갈망하는 존재가 질식한 이후의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도저히 난 이해할 수도 설명을 할 수도 없는 그의 말들에 깊은 수렁속에 잠겼다 건져진 것처럼 물음표만이 즐비하다. 이책을 덮으면서도 뭔가 한권을 읽은 듯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시작도 끝도 모를 추상화를 한편 보고 있는 기분이다... |
| 프란츠 카프카 (1883 -1924) : 변신 (1912, 1915) 1. '게오르그 잠자가 어느날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때 자신이 흉칙한 벌레로 변해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 20세기 서구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변신"의 도입부는 독자에게 작가특유의 기괴함과 엽기적인 상황을 연출해 보여준다. 일상이 버거운 영업사원인 주인공은 자신이 어느날아침 벌레 한 마리로 변해 버린것을 알아차리고도 우선은 '그냥 한숨 늘어지게 자고 싶은'마음 뿐이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되겠다는 안도감과 함께. 우리시대 모든 샐러리맨들이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서 한번쯤 소망하고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20세기 초반 유럽의 변방인 체코프라하에서 살다간 카프카에게도 간절한 소망이었던것 같다. 평생 자신의 출생지 프라하를 맴돌며, 비록 전업작가로서의 삶을 영유하고자 갈망함에도 일상적인 직업인의 삶에서 벗어날수 없었던 카프카가 자신을 옥죄는 사회질서에 대한 반항으로 이런 그로테스크한 ''변신''을 이야기하고 있는터일것이다.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 게오르그 잠자는 지방을 순회하는 외판원 업무로 부모와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다. 언젠가 부터 무위도식하며 잠자를 욱박지르기만하는 집안의 폭군인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권위에 꿈적못하는 수동적이기만한 어머니, 잠자의 장자로서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고고한 바이올린 연주취미를 가진 누이동생, 이들은 잠자에게는 더이상 가족이라기 보다는 잠자를 일터로 몰아내고, 그를 노예처럼부려먹는 기생충같은 존재들이다. 불안한 꿈에서 깨어난 잠자가 자신의 변신을알아차리고도 차라리 잠이나더 자고말아야 겠다는체념을 쉽사리할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부양하여야할 부모형제가 더이상 가족으로 다가오지않기 때문이다. 벌레가되어버린 잠자를 다시금 인간으로 환원시키고,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의 지위로 되돌릴수 있는 것은 따스한 가족의 사랑일 터인데, 주인공을 기다리는 것은 질타와 냉소 그리고 무관심일 뿐이다.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잠자를 회피하고, 아버지는 심지어 벌레로 변한 아들에게 사과를 마구 집어던져서 심한 상처를 주기까지한다. 벌레가 된 잠자가 깨닫는 바는 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가족이 아니라 자신에게 모질게 대하던 직장의 상사와 다름없는, 자신을 옥죄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형리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인식이다. 카프카는 일생을 가부장적인 아버지와의 갈등에 고통받아왔는데,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비판의 모티브는 그의 다른 글들(성, 아버지에의 편지)에서도 자주 등장하고있다. 벌레로 변해버린 잠자에게 비록 훈계일뿐이긴 하지만 말을 걸고,간간히 음식을 가져다 주며 잠자의 방에 그나마 나타나는 유일한 가족은 누이동생이다. 그러나, "변신"에 드러나는 가족관계는 누이동생은 어머니와 경쟁관계이고, 아버지와 잠자 역시 유사하게 이해되어지는 심리학적인 관찰의 틀에서 이야기되어진다. 시일이 지날수록 가족들은 잠자의 존재를 점차 망각하고, 벌레가 되어버린 잠자를 방치하여서 외로이 죽음으로 몰아간다. 다른 가족들에게는 잠자의 역할이란 노예처럼 일을 하고 가족들을 부양할 돈을 벌어오는 노예같은 존재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잠자의 존재는 가족내에서도 자신을 둘러싼 바깥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외 그자체 였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한 세계에 소속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세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존재함이 아닐 것이다. 2. 카프카는 말하기를, 한인간은 그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을 자유로이 선택할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결국 '미로와같은 길'을 걷고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말하자면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든 부자유롭든지간에그것과는 아마 상관없어 보이는 끝없이 방황하는 오디세이와 같은 것이리라. 미로같은 인생은 내면세계와 외부세계의문제적인 상호의존성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여겨지고 있으며, 카프카의 '문학속으로의 도피'는 삶 자체가 더이상 지니고 있지 못하는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로 이해되어 진다. 카프카의 소설이 무한히 계속되면서 완결이나 본래적인 종말을 갖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수 있다. 카프카의 소설은 인간개개인의 어떤 문제를 어느 특정한 방법으로 형태화시켜 결론으로 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모형을 창조하며, 그 모형은 또한 본질상 완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대립적인 긴장과 개인이 겪는 압박과 소외가마침내 무력한 한 개체를 한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신''시키고, 그나마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아버지가 던진 사과 한알로 치명상을 입고 쓸쓸히 죽어가는 게오르그 잠자의 스토리는 카프카문학의 주체들이 곧잘 표현하는 , '선험적 고향상실의 시대'의 분열된 자아의 또다른 모습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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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그레고르는 아침에 깨어나자 자기 자신이 흉칙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이 살아가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레고르 자신에 외모는 벌레로 변해 있지만 인간적 감정과 생각을 가지고 가족들의 행동과 주위 사물 및 자신의 행동을 이야기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어떤 미로 속에서 길을 헤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벌레가 죽자 지겹고 역겨운 일이 사라 졌다는 듯이 편안하게 가족들이 여행을 떠난다. 즐거워 하는 모습에서는 허전하고 쓸쓸함이 느껴졌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느 누구도 "왜" 라는 물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라는 질문은 내 자신 속에 계속해서 묻고 있다. -" 왜 "벌레가 되었을까? -" 왜 "아무도 그레고르를 찾지 않을까? -" 왜 "자신이 그레고르라고 알리지 않을까? -" 왜 "자신이 죽자 슬퍼하는 사람이 없을까?
실존문학이니 프로타고니스트니 등등 난 이런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간이 살아 가는데 있어서 항상 외로운 존재라고 느끼고 사는데 변신에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삶이 외로운 존재에 대해 아주 잘 표현해 준 작품 같다.
자신의 처지에서도 그레고를는 가족들을 탓하는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이는 누굴 탓하기 보다는 삶은 옳지 않음을 보여 주는 듯하다.
이 책은 끝없는 내 자신을 알아 가야 하는 긴 여정을 짧게 나마 보여주지는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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