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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2] 부산 향리(鄕吏)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
"[25-12] 부산 향리(鄕吏)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 내용보기
왜 부산 사람은 사행일기(使行日記)를 남기지 않는 것일까<동도일사(東渡日史)>는 부산광역시의 모태인 동래부(東萊府) 사람이 쓴 유일한 사행일기(使行日記)라고 한다. 조선 후기부터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포함한 12차례의 통신사(通信使)와 개항 이후 4차례의 수신사(修信使)가 일본으로 파견되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의외의 일이기도 하다.그렇다고 부산 사람이 통신사나
"[25-12] 부산 향리(鄕吏)의 눈으로 본 근대 일본" 내용보기
왜 부산 사람은 사행일기(使行日記)를 남기지 않는 것일까

<동도일사(東渡日史)>는 부산광역시의 모태인 동래부(東萊府) 사람이 쓴 유일한 사행일기(使行日記)라고 한다. 조선 후기부터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포함한 12차례의 통신사(通信使)와 개항 이후 4차례의 수신사(修信使)가 일본으로 파견되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의외의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부산 사람이 통신사나 수신사 일행에 참가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고구마 종자를 전파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조엄(趙曮, 1719~1777)을 정사(正使)로 하는, 1763년 통신사에는 적어도 두 명의 부산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계미수사록(癸未隨槎錄)>을 쓴 제2기선의 기선장(騎船將) 변탁(卞琢)과 <부산진 순절도(釜山鎭 殉節圖)> 등을 남긴 제3기선의 기선장 변박(卞璞)이 바로 그들이다. 비록 변탁이 <계미수사록>을 남겼지만, 이는 통신사 일행이 타고 갈 기선(騎船)과 복선(卜船)의 제조 과정과 운항 실태를 기록한 것이라서 일반적인 사행일기(使行日記)와는 거리가 있다. 이들이 남긴 글과 그림으로 볼 때, 사촌간인 이들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역관 집안인 밀양 변씨(密陽 卞氏)의 일원이지만, 사행일기를 남기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들 지방의 중인들은 나랏일은 나와 상관없다고 선을 긋고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사행일기를 쓰지 않았거나 썼더라도 전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동도일사(東渡日史)]의 구성과 내용

그런 의미에서 중앙의 사대부 출신 관료가 아닌 지방의 중인 출신 향리가 남긴 <동도일사>는 독특하면서도 소중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박상식(朴祥植, 1845~1882)의 <동도일사>는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떤 내용으로 되어 있을까? 

 <동도일사>는 크게 3부분, 즉 박상식 본인의 사행일기[1부], 1880년 7월 6일에서 8월 4일까지 정사(正使)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일본 외무성 관료들이 주고 받은 문답[2부], 수신사 관련 공문[3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김홍집과 일본 외무성 관료간의 문답이 기록된 2부다. 왜 저자가 이것을 기록해서 자신의 사행일기에 남겼을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향서기(鄕書記)라는 직책으로 수신사에 합류한 저자의 이 결정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당시 조선과 일본이 가진, 날것의 생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보면,

7월 6일 차관보에 해당하는 외무소보(外務小輔)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 顯正, 1842~1920, 이하 ‘요시카와’]와의 대화가

요시카와: 귀국의 사신은 이번 행차에 며칠 머물 것인가?

나[김홍집]: 한 보름 계획하면 일을 마치고 도로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요시카와: 병사(兵士)의 기숙사[寮舍]와 기국(機局)은 볼 것이 많은데 여행기간이 이처럼 촉박한가?

나: 종전 통신사의 행차는 이보다 더 되지 않았다. 또한 병학(兵學)과 기계(器械)는 이 사신이 어수룩해서 평소에 아는 바가 없어서 보더라도 도움될 것이 없다. [p. 87]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조선의 집권층은 두 번째로 수신사를 보내는 순간까지도 일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겠다는 자세가 안 보인다. 어쩌면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일본에 대한 시혜(施惠)라고 여기는 시각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이는 수신사로 파견된 59명 중 실무를 담당한 것은 당상관 이종무(李宗懋), 군관 윤웅렬(尹雄烈, 1840~1911), 서기 이조연(李祖淵, 1843~1884)와 강위(姜瑋, 1820~1884), 반당(伴倘)1) 지석영(池錫永, 1855~1935) 등 19명이고 나머지 2/3가 사행 때 부절(符節)과 부월(斧鉞)을 받들고 가는 절월수(節鉞手), 나팔수(喇叭手), 가마꾼 등 의례를 위한 인원이었다는 점에서도 엿보인다.

또한 일본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이에 따른 소요시간에 대한 예측도 없었던 것 같다. 요시카와와의 대담에서 보름이라고 언급한 일정이 두 배로 늘어 한 달이 된 것은 이를 반증(反證)한다.
7월 8일 차관급인 외무대보 우에노 가게노리[上野 景範, 1845~1888, 이하 ‘우에노’]와의 대화는

우에노: 우리 나라는 요즈음 부강해지는 기술을 모두 터득했다. 귀국도 부강해지기를 원하는 만큼 상무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요즈음 세계의 형세가 일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순치의 도움이 있어야 하니, 귀국과 함께 동심동력(同心同力)으로 군무(軍務)나 기계 등 어느 곳이나 서로 이끌어 구라파(歐羅巴)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나: 귀국의 왕성한 의욕이 이러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정부에 일찍 알게 해 주어 감사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강토(疆土)가 한구석에 있고 서쪽에는 청국, 동쪽에는 귀국이 있는데 그 밖의 다른 나라는 처음부터 경계를 접하지 않고 왕래도 없으므로 조야(朝野)의 인심이 옛 규정만 지키니 오늘날의 사세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바가 있다. [p. 95]


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에는 시대의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옛 것만 묵수(墨守)하는 조선 지배층의 모습이 엿보인다.

하긴, 오죽 답답했으면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팔’이라는,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 馨, 1836~1915]가 수신사 일행이 떠나기 직전인 8월 3일에 만났을 때 충고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이노우에]: 각하가 돌아가 보고할 지라도 조정에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충고하지 않을 수 있나? 서양 각국은 먼저 수호하기만 바랄 뿐이지 서둘러서 반드시 통상을 하려 하지 않는다. 현재 귀국의 계획을 보건대 병사와 기계는 배울 필요가 없고 오직 빨리 몇 사람을 파견해 이곳에 와 머무는 동안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허술하게 듣지 마시기 바란다.

만약 위험에서 안전하게 회복하고 재해에서 유리해진 뒤에도 성의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다시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 조정에서 명령하는 뜻을 미리 알 수는 없을지라도 어찌 감히 하나하나 상세히 아뢰지 않겠는가?

그: 예조의 원서계(原書契)2) 외에 각국 사정을 하나로 마련해 별도로 함에 넣어 올린다. [pp. 105~106]


뿐만 아니라 김홍집은 일본을 경계한 것인지 오랑캐라고 멸시하는 화이관(華夷觀)이 발동한 것인지 몰라도 묘하게도 일본인과의 교류에 소극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인천항 개항과 관세문제에 대한 재논의를 목적으로 파견되었는데, 전권위임장과 초안을 아예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신사를 파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논의의 기회를 상실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김홍집만 일본인에 대해 이런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박상식도 7월 11일 사행일기에서 일본에 대한 선입견을 노출한다.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와 공사 하나부사가 와서 이야기를 했다. 모두 천하의 형편과 세계의 대세를 이야기했는데 과장된 저의가 아닌 것이 없었다.

~ 중략 ~

그 자랑하고 과장하는 버릇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pp. 57~58]


뿐만 아니라, 7월 17일 일기에서 서양 각국을 양이(洋夷)로만 여기는 시선을 드러낸다.

오후에 10리쯤 돌아가 도서관에 갔더니 바로 성묘(聖廟)3)였다. 밖에서 들어가니 문이 셋 있는데 첫 번째는 서적관(書籍館)이고 두 번째는 입덕문(入德門)이고 세 번째는 행단(杏壇)인데 정전(正殿)에 대성전(大成殿)이라는 액자(額子)가 걸려 있었다.

~ 중략 ~

메이지[明治] 이후 양서(洋書)를 조금 두었는데 그 수가 오히려 많으니 생도(生徒)가 모두 오랑캐로 변하고 유풍(儒風)은 거의 잠잠하다고 한다. [p. 64]


그런데 신기한 것은 수신사의 일원으로 방문한 기계공작소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서술했지만, 유곽(遊廓)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다. 유곽이 있는 오시와라[吉原]를 묘사하는 7월 15일의 일기와 기계공작소를 설명하는 7월 16일의 일기는 그들이 얼마나 서양 문물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기계공작소에 들르니 쇠를 다루고 나무를 다듬는 일을 오로지 기관차의 힘에 의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천기(天機)를 쏟고 화공(化工)을 모으는 것이라 할 만하다. [p. 63]


멀리 높은 누각과 큼직한 집들을 바라보니 몇 리에 걸쳐 있는지 알 수 없는데 층마다 난간에 채색등이 상. 중. 하 세 줄로 걸려 있고, 창문에는 수를 놓았다. 반쯤 걷어 올린 주렴 속에는 아가씨들이 백옥(白玉)같은 용모로 너덧 혹은 예닐곱씩 짝을 지어 있었다. 모두 머리에 금화(金花)를 꽂고 몸에는 청라(靑羅)를 입고 손에는 단선(團扇)을 흔들면서 담소하며 찻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화려한 촛불이 안팎으로 환히 밝히고 있는 것이 흔히 말하는 <요지연도(瑤池宴圖)>와 흡사했다.

~ 중략 ~

조금씩 보고 지나면서 100여 집이 넘었으나 끝을 보지 못했다. 이윽고 계수나무 그림자가 서쪽으로 기울고 향기로운 먼지가 얼굴을 스치니 정신이 피로하고 눈이 어른거려 바로 관소로 돌아왔는데 그 형용을 생각해 보면 춘몽(春夢)에서 깨어난 것 같다. [pp. 61~62]


이것은 일본에서 독촉하니 방문은 하지만, 천(賤)한 기술은 관심도 없다는 마음자세가 반영된 기록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수신사에 참여한 이들이 개방이나 근대화에 찬성한 것은 신기하다. 비록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에 영향 받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웠지만.

그래서 훗날 김홍집을 비롯해서 이조연(李祖淵), 종두법을 보급하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한 지석영(池錫永) 등을 동도서기(東道西器)에 기반을 둔 온건개화파로 분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살짝 결이 다른 이도 있다. 갑신정변 참여로 급진개화파로도 분류되는 윤웅렬(尹雄烈)은 적극적인 친일활동은 안 했다지만,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 받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바 있다.

어쨌든 수신사에 실무진으로 참여한 이들이 국제정세에 눈을 떴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동도서기’에서 출발했다는 태생적인 한계는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끝내 조선의 집권세력을 설득하지 못했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올라가 조선을 제대로 바꾸지도 못했다. 결국 이 책에 암시된, 어설픈 충격이 가져다 준 근대화 욕구는 우리가 아는, 예정된 비극으로 치달았다. 읽으면서 왠지 입 안이 씁쓸해졌다.


 
1) 반당(伴倘)은 조선시대 종친, 공신, 당상관들에게 그 특권을 보장하고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급한 일종의 호위병이다.
2) 서계(書契)는 조선시대 일본과 내왕한 공식 외교문서를 의미하고, 원서계(原書契)는 그 원본을 가리킨다.
3) 성묘(聖廟)는 공자(孔子)의 신위(神位)를 받드는 묘우(廟宇)로 공자묘(孔子廟) 혹은 문묘(文廟)라고도 부른다.
w******f 2025.10.14. 신고 공감 1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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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선비, 근대일본을 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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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선조들이 남긴 글을 읽으려고 서해문집 【오래된 책방】 시리즈를 꽤 많이 구입했다. 원래 시리즈를 계속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앞서 읽었던 「발해고」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권, 두 권, 기존에 읽고 싶었던 고전을 몇개 골라내다보니 어느새 9권이나 구매. 이럴 바엔 그냥 시리즈 1권부터 하나씩 살껄 그랬나 후회가 들긴하지만... 이게 또 몇 몇 고전은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부산선비, 근대일본을 목격하다." 내용보기

옛 선조들이 남긴 글을 읽으려고 서해문집 오래된 책방시리즈를 꽤 많이 구입했다. 원래 시리즈를 계속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앞서 읽었던 발해고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권, 두 권, 기존에 읽고 싶었던 고전을 몇개 골라내다보니 어느새 9권이나 구매. 이럴 바엔 그냥 시리즈 1권부터 하나씩 살껄 그랬나 후회가 들긴하지만... 이게 또 몇 몇 고전은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가지고 있거나, 읽어 본 것도 있는지라 참 애매하다.

 

이 책, 동도일사는 서세강점의 시기. 조선이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최초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에 쓰여진 글이다. 정확히는 당시 부산에 살던 선비 박상식이 제2차 수신사 사행원으로써, 근대 일본을 방문 한 뒤 남긴 일종의 일기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적인 일기라고 말하기에는 또 어렵다. 어찌보면 이 책은 일기이기 이전에, 수신사행에 대한 업무 보고서 같기도 하다. 이 책 동도일사의 구성을 보면 이렇다. 1부는 박상식 본인의 사행일기, 2부는 정사 김홍집과 일본 외무성 관료와 주고 받은 문답, 3부는 수신사 관련 공문이다. 1부는 본인 일기, 2-3부는 사행원이자 일종의 속기사로써 받아적은 공적인 업무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으로 수신사를 보냄)

 

이 책을 한글로 국역한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제2차 수신사 관련 연구는 수신사행등록, 수신사기록, 동문휘고, 왜사일기, 김홍집유고등을 기본 사료로 활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 동도일사에는 앞서 언급한 기본사료에는 없는 기록들이 상당부분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가 큰 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학계의 주목은 커녕 존재 자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뭐 그것과 별개로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지점이 여럿 있었다. 아니 생각보다 많닸다. 강화도 조약이 어떤 조약인지도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던 조선의 위정자들은 세계사적으로 조선의 위치가 어땠는지를 알지 못했고, 본인들이 얼마나 함몰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중화사상에 찌들어있었다. 조선보다 먼저 개항하여 변화와 개혁을 한 근대 일본을 눈 앞에 두고도 그들을 업신여겼다. 오히려 일본에서 만난 청나라 사람들을 동포 만나듯 했고, 그럼에도 청나라 사람들이 대 명나라의 사람에 비해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명나라를 이어가는 소중화였기에, 실제 조선이라는 나라는 빈껍데기였다. ‘소중화그 안에 함몰되어 있으며 빗장을 꽁꽁 걸어닫고 있었기에, 외세가 침범해도 그 속뜻을 이해 못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중화라고 정신승리에 취해,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기울어져가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게 당시 조선의 위정자였다.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비롯하여 사행원들이 만난 사람들 중에는 우리가 아는 인물들이 몇몇 나오는데, 적어도 좋은 의미로 아는 인물은 아니다. 일단 전부 메이지 시대의 인물이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당시에 다들 한 끝발 하던, 혹은 관련 업무를 하던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인물이 두명 있으니 이토 히로부미오쿠라 기하치로. 경술국치 이후 초대 조선통감 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우리나라 문화재란 문화재는 일본으로 무단반출한 오구라 콜렉션을 알린 오쿠라 기하치로. 이런 사람들은 2차 수신사들은 반갑게 맞이했다. 어쩌면 강화도 조약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이때 우리 선조들은 세상물정을 몰랐고, 너무나 순진했다.

 

2차 수신사들에게 이토 히로부미나 오쿠라 기하치로 등은 그저 조선에서 온 사행원을 위해 찾아온, 정성을 보여준 일본인 손님에 불과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순조 때 까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행은 꾸준히 있었다. 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낼 당시 조선의 위치는 일본보다 위, 그러니까 우리가 너네 나라의 격을 높여주기 위해 특별히 통신사를 보내주겠다라는 느낌이 강했다. 적어도 조선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은 자국 내에서 조선이 일본 막부에 조공을 하는 사절이라고 했으며, 일본이 유일하게 교류한 서양 네덜란드에도 조선을 일본의 종속국이라 했다. 조선만 몰랐을 뿐이다. , 뒤가 달랐던 일본을 봐왔고 임진/정유재란이라는 전쟁의 참상까지 겪었는데도, 또 당한거다. 조선은 그저 우리의 높은 문물을 일본에 전달해준다고 생각했을 그 뿐이었다.

 

통신사 교류 중단도 일본에서 먼저 요청했다. 일본은 조선 통신사를 통하여 빼먹을 기술은 다 빼먹었고, 어느 시점부터 조선보다 일본의 기술이 낫다는 것을 깨달은 뒤였다. 그 때가 조선 순조 때다. 조선에서는 세도정치가 판을 쳤던, 조선의 발전시계를 200년 정도 후퇴하게 만들었다는 바로 그 때다. 바로 이때 조선은 퇴보했고, 일본은 발전했다. 이후 얼마 안가서 일본은 조선을 찾아와 문호개방을 요구하니,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이다.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답방 겸 재개된 게 수신사인데, 앞선 통신사와는 차별점을 둬야 하기에 부르는 명칭도 수신사로 바뀐 것이며 그 이동경로도 달라진것이다. 달라지지 않은 거라고는 일본은 조선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통신사의 마음과, 수신사의 마음이랄까.

 

이 책의 저자 박상식이 참가한 제2차 수신사 사행원 명단을 보면 낯 익은 이름있었다. 조선책략을 가지고 왔으며 당시 쓰러져 가는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김홍집, 얼마전 광주공원에서 만난 친일파 윤웅렬, 그리고 종두법의 지석영. 특히 지석영은...진짜 그 종두법의 지석영이 맞나 잠깐 고민했는데, 아주 친절하게도 책 말미에 그 지석영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책을 읽으며 답답했던 점이 정말 많았지만 그나마 다행인건, 당시 수신사 정사였던 김홍집이 늦게나마 국제정세에 눈을 떴다는 점이다. 문호 개방, 부국강병, 근대화에 필요성을 깨달았기에 이 때 그 유명한 조선책략을 조선에 가지고 온 것이다. 물론 이 책을 가져와서, 조선의 위정자들이 얼마나 동조를 했느냐 를 이야기 한다면, 거기서 끝이라는게 아쉽긴 하다. 당시 조선의 왕과 고위관리들은 그저 자기들의 재산과 안위를 지키기 위해 급급했고, 그를 위한 정치를 했으니까. 말이 근대화 개혁이지 정말 백성을 위한 근대화 개혁이었나? 라고 들춰보면, 어디까지나 황제를 위한 개혁이었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유독 욱했던 부분들이 <2, 정사 김홍집과 일본 외무성 관료들의 문답에 참 많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외교능력이 얼마나 덜떨어졌는지,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치가 얼마나 불통에 유연함이 없었는지. 일부만 발췌 해본다.

 

-요시카와: 병사의 기숙사와 기국은 볼 것이 많은데 여행기간이 이처럼 촉박한가 

-김홍집: 종전 통신사의 행차는 이보다 더 되지 않았다. 또한 병학과 기계는 이 사신이 어수룩해서 평소에 아는 바가 없어서 보더라도 도움될 것이 없다.

 

-우에노: 신문을 보니 귀국 신사가 글씨를 잘 쓴다는 데 본 받을 글씨를 주시기 바란다.

-김홍집: 본 신사는 글씨 쓸 줄 몰라 귀국에 들어왔을 때도 붓을 잡은 적이 없다. 혹 사행원 중에 글씨 쓰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게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우에노: 아니다. 신문에서 전한 것은 부산에서 온 사람이다. 들으니 귀국신사는 문망이 있다고 했다.

-김홍집: 이것은 혹 잘못 전해진 것이다. 대단히 부끄럽다.

 

-우에노: 우리 나라는 요즈음 부강해지는 기술을 모두 터득했다. 귀국도 부강해지기를 원하는 만큼 상무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요즈음 세계의 형세가 일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 순치의 도움이 있어야 하니, 귀국과 함께 동심동력으로 군무나 기계 등 어느 곳이나 서로 이끌어 구라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김홍집: 귀국의 왕성한 의욕이 이러하고 우리나라와 우리 정부에 일찍 알게 해 주어 감사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강토가 한구석에 있고 서쪽에는 청국 동쪽에는 귀국이 있는데 그 밖의 다른 나라는 처음부터 경계를 접하지 않고 왕래도 없으므로 조야(조정과 민간)의 인심이 옛 규정만 지키니 오늘날의 사세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바가 있다.

 

-이노우에: 이 자리의 대서기는 어제 독일에서 돌아왔는데 이탈리아 지방에서 러시아 해군경을 만나 같은 배를 타고 중국 상해 땅에 와서 길이 갈렸는데 앞으로 연료를 싣고 다시 나가사키 섬으로 온다고 한다. 배 안에서 그의 동정을 살피니 걱정이 되어 대단히 조급했는데 중국 일이 다행이 잘 끝나 빨리 떠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중략) 이 때 귀국 병력은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러시아 사람이 이 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걱정이 다시 절박해질 터이니 이를 어쩌겠는가 

-김홍집: 우리나라는 러시아와 국경은 상접해 있을지라도 서로 통상하지 않고 오직 귀국에게만 친목하므로 유사시에는 서로 보호해주기 바란다.

 

-이노우에: 각하가 돌아가 보고할 지라도 조정에서는 들어줄 이유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충고하지 않을 수 있나? 서양 각국은 먼저 수호하기만 바랄뿐이지 서둘러서 반드시 통상을 하려 하지 않는다. 현재 귀국의 계획을 보건대 병사와 기계는 배울 필요가 없고 오직 빨리 몇 사람을 파견해 이곳에 와 머무는 동안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허술하게 듣지 마시기 바란다. 만약 위험에서 안전하게 회복하고 재해에서 유리해진 뒤에도 성의를 마음에 두지 않으면 다시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외교력도 꽝이었고, 정보력도 꽝이었으며, 보고 듣고 배울 마음 조차 없었다. 오죽 답답하면 일본 외무공사가 각국의 교제 사정을 상세히 연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라는 이야기 까지 할까 싶었다. 일본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도 수신사 일행은 때 되면, 조선에 있는 왕을 향하여 망궐례, 진하례를 챙겼다는게 함정이다.

 

만약 근대일본을 보고 온 이들이, 근대일본을 보고 온 이들의 보고서를 본 조선의 위정자들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난 이 책을 읽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을 거다. 이렇게 수신사를 보냄으로써 근대 일본을 본 조선이, 우물 안에서 벗어나 우리 식으로 근대화를 수용하는 등 개혁을 하여 그들과 동등하게 혹은 그들보다 더 우위로 갔다면. 적어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했다면, 나는 이 책을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읽었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일제강점기라는 역사가 어떻게 해도 변경되지 않을 고정적인 시점이라면, 적어도 조선이 당시 세계 각국에 대한 정세를 알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자기들 안위 때문이 아닌, 어떻게든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조선이라는 땅에서 살고 있는 수 많은 백성들을 위한 개혁을 하려고 했다면 역시나 나는 이 책을 정말 기쁜 마음으로 읽었을 거고, 당시 우리 조상들을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눈으로 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읽을 수록 씁쓸한 책이다.

이달의 사락 c******0 2019.12.08.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