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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인플레의 시대에 비정규직,알바의 정중앙에 놓여 있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을씨년스러운 시절이 언제 풀릴지 모를 정도로 오리무중은 계속 되고 있다.보리 고개의 시절이 힘들고 고역스러워 자식들에게만은 고통을 남겨 주지 않으려 1세대 위의 부모들은 허리끈을 졸라 매면서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간난신고의 세월을 다 바쳤다고 회고한다.나도 그러한 부류 중의 하나이지만 제대로 된 명함을 내밀 정도가 되지 못해 심리적인 위축과 낮은 자존감으로 버텨 나가고 있다.어느 사회나 전사회 구성원의 생활의 질을 만족시켜줄 수는 없겠지만 신자유주의(1980년대 레이건에 의해)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 사회에도 1990년대부터는 신자유주의,FTA 등 선진제국들의 칼바람이 몰아치면서 산업의 기초인 농업의 근본마저 흔들릴 정도였고 농민들의 거센 항의와 시위는 공권력같지 않은 공권력에 의해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다.1990년대 후반 IMF 경제위기를 맞이하면서 기업의 구조조정과 함께 노숙자의 대량생산과 비정규직의 도입으로 한국사회는 어느덧 신자유주의의 탈을 쓰고 사회구조,시스템을 전방위적으로 바꿔 놓고 말았다.
모서리 위의 인간이란 추락(墜落)에 대한 공포와,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안간힘과,그 딱딱하고 각(角)진 공간이 제공하는 통증 때문에 그다지 쾌적한 존재를 영위하지는 못한다.그럼에도 왜 굳이 평평한 면들을 놔두고 모서리를 택했냐고 묻는다면,언젠가부터 모서리가 이 세상이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공간'이 되었다고밖에는 답할 수 없다. - 본 문 -
밥을 먹는 식탁,회의 및 모임에서의 탁자에서의 모서리는 인원이 가득차서 앉을 자리가 없는 가운데 모서리 한켠에 앉아 있는 불필요한 잉여의 존재를 상상해 볼 수가 있다.모서리라는 의미가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불완전하면서 낙오된 자리이고 현상으로 보면 제도권 축에 끼지 못한 어정쩡한 존재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활발한 사회활동을 하지 않기에 한국사회의 실상을 예리하게 해부할 수는 없지만 피부로 느끼는 물가지수,사회구성원간의 까칠한 관계,심대한 빈부격차,연고를 통한 줄서기,돈과 권력의 기승과 사회지배 등을 실감한다.돈과 권력의 속성을 들여다 보면 갖은 자는 태생부터 갖은 자이고 어쩌다 기회(시류)를 잘 타고나 졸부가 된 부류도 있을 것이다.나아가 요즘 권력은 자본을 쥐고 있는 기업인에 의해 사회가 좌지우지 되는 꼴이 되어 버렸다.항간에 정의와 상식이 회자되고 관심을 갖었다고 하지만 돈과 물질 앞에서는 나라의 수장도,사법권,언론,경찰,공무원 등도 굽신거릴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어 참으로 안타깝다.유전무죄,무전유죄가 일개 구성원을 잣대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개인의 표현과 창의력이 존중되는 시대는 맞는 말이지만 이를 계발하고 탁월하게 발휘하여 사회적 존재를 부각시키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그친다.이를 발현하기 위해 학생들은 학부모의 열렬한 지원과 떠밀림에 의해 유아부터 대학(대학원,유학)까지 막대한 금전을 뿌렸건만 개인이 원하는 직업을 찾지 못하는 고학력 실업사태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건만 남의 일 같지가 않다.얼마나 사교육을 빡세게 시키고 있으면 대한민국이 '교육왕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을까.실상은 외화내빈의 형국은 아닐런지 모르겠다.사교육은 좋은 점도 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사오정(사오십대 정년)의 한파까지 곂쳐 경제적 실권을 상실한 가장들의 비애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경제적 위기가 몰고 온 배경에는 신자유주의 즉 대기업위주의 시장형성과 조직적인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는 기득권층의 밥줄 놓치 않기가 세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과 서민들이 겪는 현재 및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이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낮추고 있다.얼마나 살기가 힘들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좌절과 불안,우울감이 극대화 되었으면 자살율 세계1위의 악명을 떨치고 있겠는가.그것도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고 하니 과연 경제선진국 맞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경제위기가 계속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사회현상은 겉으로는 풍요롭고 평온하게 보이지만 사회구성원들의 관계는 흑과 백의 이분법적이다.흑이냐 백이냐가 가치관일 뿐 중간개념은 찾아볼 수가 없다.간혹 있더라고 이것은 바람만 불면 한쪽으로 늘어붙고 나자빠지는 것들이다.요즘 사회초년생들이 1980년대 후반생들이다.이들은 부모세대가 386세대인데 부모세대와의 생각과 이념의 가치가 물과 기름과 같다.두 세대 모두 출세를 위해 공부에 진력을 했지만 386세대는 한국사회의 거칠고 공포스러웠던 군부독재 시절을 거쳐 왔다면 1980년대 후반생들은 1988년 올림픽과 함께 아파트 개발붐과 신도시형성에 따라 풍요롭지만 개인주의에 가까운 시대를 타고 났다고 보여진다.공동체사회가 무너지면서 거주지가 아파트로의 이동은 개인적 삶을 편하게 만들었지만 따뜻하고 배려하는 인의예지신의 덕목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특히 부모가 맞벌이라면 아이는 온종일 사교육과 혼자가 되어 대화를 나누고 문제점을 찾아가는 능력을 상실하고 주어진 밥그릇도 찾아 먹지 못하는 온실 속의 세대가 되었다고 본다.비록 어렵게 사회진출을 했더라도 기존세대와의 다양한 격차와 갈등이 상존할텐데 기존세대는 군대식 문화에 젖었다면 지금세대는 개인의 능력과 표현을 당당하게 내세우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일반적 인식은 제도와 절차 그리고 법의 이면에서 암약하는 권력들의 역학이 이 사회의 진실이라는 냉소적인 버전이다.이는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선언에서부터 MB 정부에서 불거져 나온 수많은 비리와 역설적 슬로건(공정사회 등)들로부터 더더욱 근거를 두고 있다. - 본문 -
문화평론가로서 연봉 1,000만 안짝으로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 최태섭저자는 젊지만 문체는 예리하고 분석적이다.가식이 없는 문체에 건전한 비판력이 돋보이고 있다.일전에 읽은 <인간의 조건>,<현시창>,<응답하라!PD수첩>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이 글은 더욱 이해 및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지도층들은 과연 국리민복을 실행하려는 의지와 실천력을 갖춘 인물들일까.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사회가 보다 더 나은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바라고 진정한 경제선진국을 원한다면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내놓고 사교육비를 줄이고 복지정책(의료보험,노령인구대비책 등)을 점진적으로 늘려 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구호로 외치는 이러한 정책들이 실행화되지 않는다면 높아진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된서리를 맞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그리고 '나는 잘나고 너는 못낫다'라는 이분법의 사회구조를 지도층부터 과감하게 털어버리고 몸과 마음이 서민들의 상처와 고통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를 현실에 맞게 대처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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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kbs -기자가 간다에서는 전 안기부장인 장세동의 취재를 다뤘다. 전 안기부장인 동시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5공의 실력자로 불렸었던 그가 수지김 사건으로 국가에 내어야 할 세금은 약 15억원이다. 15년 전 수지 김을 간첩으로 지목하며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한 당사자 장세동은 법원으로부터 15억원의 배상책임을 판결받았다. 그러나, 그는 돈이 없다며 국가 배상금 일부를 내지 않고 있다. 장세동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참 아이러니 한 것은 , 개인의 삶을 조작하여 갈기갈기 찢어 놓은 그가 2002년 대선에 출마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삶이 조작과 은폐로 철저히 부셔질 수도 있지만, 지배계급의 가해자는 언제나 건재할 수 있는 사회. 이와 비슷한 사건은 한국사회에 차고도 넘친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이해해야만 한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영남제분 싸모님 사건' 역시도 이러한 정경유착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사건이다. 저자는 <한복과 한국의 부르주아 그리고 근대성>에서 정·재계와 사법계에 걸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명실공히 '지배계급'에 대하여 이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가 아닌 선진자본주의의 중심지라는 사실과 <진실대신 욕망만 남은 천안함>에서는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모든 룰은 그 어느 시대에도 불편부당하지 못했다. 곧게 서 있어랴 할 막대는 현실의 권력관계에 따라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이쪽저쪽으로 구부러지기를 반복했다.' 라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불공정한 부분을 정의한다.
# 이렇게 청년 문화연구가 최태섭의 《모서리에서의 사유》는 일련의 사회현상들을 하나의 프레임안에 두며 프레임의 사각지대인 '모서리 한 귀퉁이'에서 사회를 바라본다. 그가 이 모서리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스스로가 사회의 프레임 사각지대에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30대의 젊은 문화평론가인 저자는 ‘ 모서리 위의 인간이란 추락에 대한 공포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안간힘과, 그 딱딱하고 각진 공간이 제공하는 통증 때문에 그다지 쾌적한 존재를 영위하지 못한다’라며 5년동안의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 2년에 한번 열리는 무한도전 가요제는 정말 볼만하다. 열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남아있지 않은 대학가요제를 대신하여 뽕끼 제대로 발산해주시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창작을 위한 순수한 집념과 열정이 참 좋다. 이번 가요제에서 눈에 띈 노래는 단연 장미하관의 ‘오빠라고 불러다오’였다. 아저씨들의 발칙한 반항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더 애절한 발악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고 리드미컬한 박자 사이에 터져나오는 함성은 분명 본심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책을 보면서 아저씨를 대변하여 쓴 저자의 <아저씨> 에 대한 해석은 더욱 나의 생각을 확고히 다져주었다. '현대 사회의 아저씨들은 외롭다. 사리분별 능력을 잃어버리고, 생존과 욕망의 노예가 된 속이 텅 빈 괴물이 우리가 지겹게도 만나고 있는 그 수많은 아저씨들의 정체다. 아저씨가 되지 않으면 패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남자 정글의 법칙이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는 룰이기 때문이다.'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 배 나온 남자 아저씨라 부르지좀 말아줘요 날씬하진 않지만 깜찍하고 귀엽기만 하잖아/ 숱없는 남자/ 아저씨라 부르지 좀 말아줘요/머리 큰 남자/ 아저씨라 부르지 좀 말아줘요/ 오빠라고 좀 불러다오.
# 이런 일련의 사태들은 전혀 다른 분야 다른 이야기이지만, 서로 각기 다른 부분에서 사회현상을 대변해주고 있다. 우리사회를 대변하고 있는 수많은 언어들, '된장녀'의 계보에서부터 꾸준히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지배계급들의 속내, 공정한 사회라는 슬로건과는 다르게 비리와 부패의 온상으로 빠르게 동화 되어 가고 있는 현 사회의 모습을 저자는 장 보드리야르의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이미지들만이 둥둥 떠다니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사회라 칭한다. 이 부분은 또한 랑시에르가 말한 ~도 아니고 ~ 도 아닌 이중부정의 의미인 교차모순의 사회와도 같다고 본다. 인터넷과 통신기술의 발달은 기존 언어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문자언어와 구술언어만 존재하였던 언어가 이제는 문자적이지도 구술적이지도 , 사적이지도 공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비현실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 우파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은 '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 된다. 진보와 보수가 , 학교교육이, 문화와 정체성이 , 민주화와 공산주의 이념이 , 잉여세대의 증가와 공허한 메아리인 사이버 세상이 , 랑시에르가 말한 ~도 아니고 ~도 아닌 , 포스트모던 비평의 꼭지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도 아닌 뭣도 아닌 , 혼란 그 자체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생각에 종종 빠져들게 한다. 인터넷 발달은 아이러니하게도 신구 세대간의 불통을 가져왔다.나는 이런 극심한 분열과 분리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의 세대를 심히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이 책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의 냉철함과 저자의 중립적인 시각이 마음에 들었다. 모서리라고 하지만, 저자처럼 우리는 사회를 한 발 떨어져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가능하다면, 가슴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갑게.
우리는 우리가 이뤄놓았다고 자부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더이상의 논공행상도 연말정산도 집어치우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한국 사회를 새로운 영점零點으로 삶아야 한다. 필요한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이고, 새롭게 발명하는 것이다. 아직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들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민주화를 비롯한 모든 해방의 역사는 화석이 아니라 해방의 힘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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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라고 하면 어찌 보면 변방이다. 널따란 책상 위에서 가운데 평평한 곳은 놔두고 각진 모서리라면 무언가 불안하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소외된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 전도(全圖)에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지면 변방이 된다. 더군다나 양쪽 해안선을 따라서 가다 보면 영락없는 비주류의 세계이다. 그래서 모서리는 변방이고 또 비주류의 세계와 일맥 상통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모서리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또 그곳, 변방에서 하는 생각들은 어떤 시각을 갖고서 하게 되는 걸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편협함에서 벗어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변방이기에, 주류가 아니기에 딱히 지켜야 할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편과 적을 가르며 치열하게 논쟁을 할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패배주의에 물들었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사 모든 일들을 한걸음 떨어져 바라본다면 무엇이 옳고, 누가 그른지를 더 잘 파악할 수도 있는 법이다. 훈수를 두는 사람이 실제 대국하는 사람보다 수를 더 잘 보듯이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흑백논리, 이분법적인 사고가 판을 치고 있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계급이 분화되고, 기술과 문명이 발전해 갈수록 사고 역시 다양해질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아직도 이분법적인 틀에 갇혀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과거의 암울했던 독재시대,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그런 사고가 일정부분 필요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가 아직도 여전한 것을 보면, 그만큼 우리들 모두의 사고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자신들 모두가 이 사회의 주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과거의 틀에서 제대로 벗어났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모서리에서의 사유란 결국 편견이나, 쏠림을 배제한 상식에 기초한 자신만의 고유한 시각으로 모든 현상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사람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지향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일정부분 쏠림과 편들기가 있을 수 있지만, 사회의 모든 현상에 대해 일방적인 지지와 비난이 교차하는 것들을 보면, 분명 상식 또는 정의와는 동떨어진 것임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느낄 수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제 서른이 갓 넘은 저자가 그 동안 각종매체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이 책은, 저자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기존의 그것들과 조금은 새롭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저자도 본인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가치가 있기에 모든 면에서 불편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바라보는 시선은 모서리에서의 시각, 한걸음 뒤 떨어져 바라보는 변방에서의 시선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런 만큼 기존의 시각으로 볼 때는 삐딱해 보이기까지 한다. 김정은 세습이나, 중학생 졸업식 나체소동, 그리고 천안함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진실대신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하려는 욕망이 앞섰기에 온갖 얘기들이 나돌고, 된장녀, 패륜녀, 혹은 일전에 어떤 여대생의 말에서 촉발된 루저 파동의 실상은 남성들의 패배감, 여성들에 대한 억압의 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들 파동의 내면에는 여성들이 이제는 남성들을 선택한다는 당혹감, 자신은 그녀들이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다는 박탈감이 그토록 과격하게 표출된 것이라는 저자의 말은 일견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는 사회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정치, 경제문제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는 시선은 삐딱하기만 하다. 이명박 시대에 일어났던 각종 정치적 사건들이나, 삼성을 위시한 재벌가에 이르는 각종 비리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평평한 중앙에서 생각하느라 알고도 모르는 척 함으로써 위안을 삼는 우리들을 비판한다. 뉴스와 담을 쌓은 지 퍽이나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tv는 거의 보지 않고, 종이신문은 아예 거들떠 보지도 않고, 인터넷에 접속을 하더라도 포탈사이트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며 각종 사건들에 대한 저자의 삐딱한 시선을 접하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사건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생각에, 소외를 스스로 자초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꼭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저자는 ‘아무런 의무도 책임감도 소속감도 없이 어떤 의문들만을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결코 평평하지 않은 총천연색의 3D이다.’라고 말한다. 내가 그런 의문들을 보았다면 과연 어떤 의무나, 책임감이나, 소속감 없이 보았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괜히 열만 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기에 그것들을 모서리에서 보고, 모서리에서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뉴스에 대한 나의 담쌓기는 계속 될 것만 같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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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다. 그 뜻은 ‘물체의 모가 진 가장자리’ 또는 ‘수학에서 다면체에서 각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선분들’이라는 해석이 적혀있다. 수학적 의미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상적인 뜻은 이해가 된다. 우린 흔히 ‘모서리’라는 단어를 대하면 ‘변방’이라든가 ‘구석’을 생각한다. 즉 주류에서 배재된 변방의 의미이다. 이 책 『모서리에서의 사유』는 주류 언론의 얘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주류 언론의 목소리가 아닌 20대 한 젊은이의 목소리이다. 그렇다고 그의 논지가 모서리처럼 하찮은 얘기라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그만의 시각일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모서리에서의 시각이 중앙에서 바라보는 시각보다 더 정확할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암묵적인 합의나 힘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는 이들의 논지보다 어쩌면 아무 힘과 권력도 없는 이들의 글이 본인의 이득이나 지명도를 후광효과로 사용하는 글보다 훨씬 세상의 이슈에 더 솔직한 시각으로 다가갈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서리에서의 사유가 모두의 인정을 받게 되면 어느 순간 주류가 된다. 이 책 『모서리에서의 사유』는 청년문학가 최태섭이 그동안 신문과 잡지 등에 기고했던 세상을 향한 자신만의 시각을 정립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기존 언론의 시각이 아닌 이 시대의 지성을 갖춘 젊은이의 신선한 시각이다. 그동안 일어난 사회의 제반현상에 대한 그 나름의 분석과 치열함이 그의 글 곳곳에 묻어난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용산 참사, 성상납 커넥션으로 자살한 장자연, 쌍용자동차 사태, 민간인 사찰, 농협사태와 저축은행 사태 등 지나간 기억속의 아픈 상처들이 그의 문체를 만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한 여대생의 ‘루저 발언’으로 인한 사회적인 논란과 관련한 그의 글을 접하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놀랍기만 하다. XX녀로 총칭되는 특정여성들에 대한 편하의 발언 뒤에 감춰진 남성들의 심리는 남자인 나로서도 전혀 고려해보지 못한 시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을 접하곤 내 앞에 감추어진 남성성이 가지는 편협함이 무장해제를 당한 느낌이었다. 이처럼 칼럼형식을 띤 그의 글은 기존의 고질화된 언론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하나의 사건이나 사회현상을 두고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 나름의 정의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의 글이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때로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만큼 일반적인 글이 아니라는 반증도 되겠다. 한나라의 문화수준의 그 나라 국민의 평균 문화척도이며, 한나라의 정치수준의 바로 그 나라의 국민의 수준과 비례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의 정치는 국민에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를 외면하게 만든다. 우린 그걸 정치인들의 잘못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정치인을 내세운 것은 바로 우리의 투표의 결과이고, 그런 정치인들이 탄생한 것은 바로 위에 언급된 말처럼 우리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국민이 올바르고 제대로 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건의 이면에 갇힌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면 어느 정치인도 그런 국민을 무시하고 진실을 외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지금의 현실이 바로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얘기이다. 그동안 TV뉴스도 외면하고, 신문도 보지 않고 컴퓨터에 접속해도 포털 뉴스를 보지 않았다. 뉴스 속에 나오는 정치기사가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뉴스를 보지 않으니 마음은 편했다. 가끔 지인들과 어울리다 뉴스를 장식하거나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상식을 벗어난 얘기들을 들을 때면 그 스트레스는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나하나 편하자고 세상을 외면하는 순간 그들을 국민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한다. 이 책의 부제가 ‘청년문화연구가 최태섭의 삐딱하게 세상 보기’이다. 어쩌면 그의 시선이 삐딱한게 아니라, 사회를 쳐다보는 우리의 시선이 삐딱한 것은 아닌지. 어쩌면 모서리의 그 삐딱함에 아니라 올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우리가 보기에는 삐딱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가 그의 의견에 동조할 때 그의 글은 주류언론이 되고, 그의 글이 추구하는 바는 우리 모두의 논리로 재탄생된다. 그래서 우리가 미처 바라보지 못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삐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선하다. 여러 부분에서 사회의 제반현상에 대한 그의 새로운 안목에 감탄하게 된다. 사진작가는 자신만의 카메라아이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 책의 저자는 그 나름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조하고 재단한다. 그 재단법이 올바를 때 세상은 그에 맞추어 정의를 향해 치닫게 된다. 그렇듯 모든 국민들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질 때 이 땅에 새로운 정의가 구현되고 우리 모두가 살고 싶은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런 모든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 사회의 제반현상에 대해 외면하는 그 순간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모습에서 한걸음씩 멀어진다. 그의 책은 그런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래서 그의 글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 이 리뷰는 예스 24의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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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이 멋지다. 모서리에서의 사유라니. 모서리라는 말은 어쩐지 뾰족한 인상을 주지만 대개는 남들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기 위한 모서리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날을 세운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내게 들려오는 뾰족한 말들도 예전보다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올해 서른 살이 된 저자의 직함은 문화비평가이며 글을 써서 벌어들이는 연봉이 천만 원쯤 된다고 밝힌다. 굳이 액수까지 말하는 이유는 이런 금액을 받으면서 전업으로 글쓰기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주로 <경향신문>,<프레시안>,<자음과 모음R>, <한겨레> 등에 실었던 글들과 블로그나 온라인 매체에 실은 글들을 가려 뽑았다. 저자처럼 젊은 필자들을 ‘2030필자군’으로 묶어 부르며 그들의 글이 아직 익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기성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책의 내용은 1장 검열된 근대화, 2장 문화, 정체성, 욕망, 3장 우리들의 찌질한 섹스게임, 4장 노동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5장 민주화당한 세계 이렇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2장에서는 주로 우리 사회에서 두드러진 이슈들을 짧게 적은 글들을 모았다. 짧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주장은 분명하다. 어른들의 죄의 무게와 비교할 때 말도 안 되게 가벼운 졸업식 사건을 일벌백계의 차원에서 강력한 처벌 운운하는 어른들의 불공평함을 비판하고 천안함 침몰로 죽은 자들을 위로해주기 보다는 그 사실을 이용해 덕을 보려는 사람들의 투쟁을 비난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더할 수 없이 준엄하게 이루어지는 법의 심판이 일부 특권층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지는 상황에 입맛이 쓰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들을 짧지만 강한 전달력과 설득력을 가진다. 공짜로 문화를 취하는데 익숙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문화거지들”이란 말로 이야기하는데 나 역시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3장에서부터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좀 더 풀어서 하고 있다. 많은 분량을 삼성과 <딴지일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삼성은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그룹이다. 삼성제품을 하나라도 사용하지 않는 국민이 없으며, 삼성을 욕하면서도 가족은 삼성 그룹에 취업하기를 소망하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삼성을 이끌어가고 있는 오너의 독단과 비리,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말하는데 이 부분은 새로운 것이 없어보였다. 또 <딴지일보>와 나꼼수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건 저자가 한동안 <딴지일보>에서 머문 적이 있기 때문에 할 말이 많아서라고 밝힌다. 《닥치고, 정치》로 사회적인 충격을 일으킨 김어준 총수의 방송에 대한 허점을 짚고 있는데 나름대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갓 삼십인 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짧은 글들은 짧은 대로 명확하게, 긴 글은 긴 글대로 넘치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너무 균형을 잡으려고 하다보면 앞으로 나가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처럼 자신의 내면을 깨우는 모서리에서의 사유로 좀 더 자신만의 목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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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서른를 넘은 젊은 저자가 〈경향신문〉,〈프레시안〉등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만든 책이다. <모서리에서의 사유>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언젠가부터 모서리가 저자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 되었다는 저자의 말에서 88만원 세대, 2030 세대가 느끼는 사회에 대한 불편함과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모서리에서만 보이고 모서리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진실과 사회상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하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근대화, 문화, 섹슈얼리티, 노동, 민주화라는 5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우리사회의 모습을 비판적 시각에서 조망한다. 넘치는 사건사고를 나열함으로써 과연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오늘날 청년문제의 본질은 사회적 관점에서 청년들을 불필요한 잉여의 존재로 대우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성과 폭력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비뚤어진 도덕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필연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도 한다.
논란의 여지가 많은 민감한 사회 이슈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저자의 개인적 주장보다는 사회적 현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문제의 프레임을 찾아내어 제공한다는 점이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다.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루저녀 사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살펴보자. "키 180센티미터 이하의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이 방송된 이후 남성들의 분노가 이상하리만큼 격했던 적이 있었다. 저자는 이런 격한 반응의 한켠에 적어도 외모에 관해서는 '평가하였던 자'였던 남성들이 순식간에 '평가받는 자'로 격하되었다는데 대한 당혹감과 분노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 동안 여성들에 대해 외모와 신체에 대한 광범위한 남자들의 품평들이 존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말은 정말 날카로운 분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전되면 우리의 삶이 행복해지는가 하는 근본적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성장은 사회 각 부분에서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인간적 측면들은 점점 비효율적인 것으로 매도되고 사회는 점점 각박해 지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비정규직, 시간제 노동자, 청년실업, 양극화와 같은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마땅한 대책이 어려운 것도 어쩌면 이런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이 책은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하기에 마음 편하지 않은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점에 대하여 주류가 아닌 변방에서 보고 있다. 이젠 이런 사회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해결책을 고민해 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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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요 뉴스에 모 재벌 회장님이 세계 100대 억만장자에 재 진입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 있어 돈 많은 것이 무슨 문제냐 할 수도 있지만, 해당 재벌가의 재산이 그리 깨끗하게 형성된 것이 아니란 점에 문제가 있다. 솔직히 나는 해당 재벌가를 곱게 보지 않는 입장이다. 이들과 관련해서 나라 전체가 시끌시끌할 정도의 이슈가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모 변호사의 고백록 형태의 책을 통한 고발 사건과 함께 보게 된 ‘법 위에 돈 있다’라는 쓰디쓴 참담한 결과는 대한민국의 어두운 현실을 보여줬다. 이뿐만 아니다. 부의 세습과정에서 발생한 탈세와 불법 행위들, 해당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의 축소 및 은폐 등 이들과 관련된 문제는 심심할 만하면 하나씩 드러나곤 한다.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증거가 드러나도 그들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는 현실에서 대한민국 내에서 돈의 위력에 대해 새삼 실감한다. 정당하게 벌어서 축적된 부라면 칭송 받아 마땅하지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할 적정선의 부조차 먼지 빨아들이듯 불법적인 독식을 하고 분배대상들에게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구조에 찬사를 보낼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부조리함이 존재한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신자유주의 탄생 이후 자의이든 타이이든 간에 그 정책을 도입하게 된 결과는 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 물질만능주의의 팽배, 경쟁의 심화, 불안정한 고용의 문제 등을 가져왔다. 나라는 성장했다 하는데 서민의 삶은 팍팍하게만 변해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임을 깨닫지만 당장의 생존에 문제제기는 고사하고 관심 갖기도 어렵다. 어느 시대나 그래왔듯 불평등한 사회를 비판하고 불법적인 작태를 고발하는 이들은 존재한다. 이 책이 현실에 대한 비판만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문화평론이라 함은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두고 비평을 하는 것임에, 문제 많은 대한민국에 대해서 비판적인 내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잣대를 가지고 현실의 이슈들을 헤집어 보고 꼬집는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국내의 주요 문제들에 정치가 빠질 리가 없고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이 책이 정치색을 띠고 있다 느낄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진 않다. 부제에도 달려 있지만 삐딱하게 세상을 본 책이고 대부분의 글들이 2010년도부터 블로그에 적어오던 글들인 관계로 당시 정권에 대한 비판은 불가피했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렇다고 반대쪽 입장을 옹호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사건만을 놓고 기술했다는 것이 개인적인 느낌이다. 책 속에는 수많은 주제들이 등장한다. 천안함 사건, 고교졸업식 난동 사건, 남북 간 관계와 관련된 정치 대립 문제, 학벌과 학력이 주도하는 사회 등에 대한 비판부터 시작해서 홍대 문화나 취향의 문제, 섹슈얼리티를 부각시키는 사회문화, 루저 발언이나 XX녀/XX남 등의 문화 이슈들과 노동자와 민주화, 삼성과 관련되어 발생한 사회적 문제 등 크게 부각되었던 이슈들이다. 우리는 언론이 추려내서 포장해 낸 정보들을 보게 된다. 저자가 말했듯 더 이상 대중이 언론이 만들어 가는 대로 세뇌 당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 책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도 반발할 수도 있다. 저자가 저자 나름대로의 사회적 통찰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기술했듯 독자도 해당 사건들을 보며 각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며 반대 의견을 묵살하지 않고 상대 의견을 존중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아닐까 싶다. 문득, 앞서 말했던 모 변호사가 낸 책에서 봤던 내용이 떠오른다. 재벌 회장의 생일 파티에서 테이블에 천만원짜리 와인을 깔아두고 마시더라는 얘긴데, 그 와인의 가격이 보통 서민의 자산 기준으로 따져봤을 때 10원의 가치밖에 안됨을 깨닫고 참 검소한 사람이네 하고 씁쓸한 농담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파티에 깔린 와인과 음식들 가격만으로도 몇 십, 몇 백 가구에 따뜻한 겨울을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참 세상 구조가 왜 이런지 알 수가 없다. 잘 모른다고 내 일이 아니라고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덮어둬서는 절대 변할 수 없을 것이다. 다 알고 두 눈 부릅뜨고 보고 있는 데에도 대놓고 불법행위가 벌어지는 세상이다. 삐뚤게 세상을 바라 보던 똑바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잘한 것은 잘한 것이다. 상식이 통용되는 세상 만들기. 그것이 그렇게 힘든 것일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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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알 수 없는 불안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 최태섭은 그 형체 없는 불만의 실체를 해소한다. 누군가에겐 에어백이, 누군가에겐 칼날이 되는 사법의 부조리함부터 여기저기 서로 제각각인 민주주의의 명분을 들여다보며 불안의 실체와 마주하기를 망설이지 않는 글쓰기다. 물론 비교대상이라 할 순 없으나 언젠가 정희진의 칼럼을 처음 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다시 느낀다. 담담하지만 명쾌한 글쓰기에 처음 끄덕이고, 그저 알 수 없는 불만에 멀리했던 저 세계를 우리 스스로의 목소리로 들은 기분에 두 번 끄덕인다. <오마이뉴스>의 팀블로그 리트머스에 올려진 최태섭의 글 중 이 책에도 실린 ‘한국사회와 섹슈얼리티’을 보면 자음과 모음 2011 가을호에 실린 글을 2012년 10월에 올리며 저자는 “쓴지 딱 1년 정도가 지났는데 어제 쓴 것 같아서 저도 무서운 글입니다.” 라고 코멘트한다. 이 책이 딱 그렇다. 2010년부터의 글을 모아 지금 세상에 나온 책이지만 어느 것 하나 시기적절하지 않은 사회담론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내는 이 체제는 문화비평가에겐 글감이 넘치는, 변화무쌍해보이지만 좋은 쪽으로 변화가 매우 더디고 어려운 곳임을 실감한다. 더 나빠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오히려 땡큐! 해야 할 판. 지금 군대에서 열심히 뺑이치고 있을 저자는 제대 후에도 수많은 글감이 넘쳐나는 ‘창작과 비평’의 틈바구니에서 ‘열정노동’자로, 여전히 수년 전의 글이 엊그제 쓴 글 같아 무서울 것이라 조심히 예측해본다.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회의주의가 팽배한 우리는 저자의 문화비평이 씌여지고 읽는 데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할까. 자신이 정한 답을 내세우기보단 사회담론을 문제 그 자체와 그 근본을 짚어내는 이 젊은 문화비평가의 시선에는 뭐라 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에 매우 가까운 느낌이 있다. 맹목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려는 글과는 거리가 있으며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에서 추천하고픈 글들이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그 밑도 끝도 없는 불안을 조금 정리해줄 가능성 때문이다. 그렇게 간결한 그의 글이 저.세.계.에 대해 독자의 사유를 장려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 가장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불만의 실체를 피하지 않고 노려볼 수 있는 것, 공유하고 또 다른 담론을 재생산 하는 작동은 권리를 위한 최소한의 투쟁이다. 각개전투 하느라 너덜너덜해진 스스로가 도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를 마주 앉을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그 세대가 바라보는 세계가 결코 자신들이 속하지 않은 세계이며 언저리 어디쯤에 위태위태하게 서서 세계를 (절대 존경어린 동경이 아닌, 그저) 맹목적인 현실감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자기 최면적 젊은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최태섭의 글은 이런 면에서 두 가지 화두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는데, 스스로 잉여라 자칭하는 그 세대(그 안에서 아무데로나 튀는 적대감, 반대의 무기력, 그나마 존재하는 열정에 대하여),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결핍이다.(신화로 꽉 차 있지만 분명 휴머니즘이나 정의와 같은, 응당 있어야 했던 기본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배워왔던 옳은 세계와는 거리가 있는, 공정과 평등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이는 세계에 대한 혼란, 우리는 이것을 현실이라 부른다. 그 현실에 순응할지, 직업으로 퇴색되긴 했지만 꿈을 계속 꾸어야 할지, 헷갈리다 못해 이제 ‘이상이 없’고 생각하기를 포기한 좀비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경향신문의 최병준 대중문화부장이 칼럼에서 잉여로 불리는 청춘을 좀비에 비유한 바 있다. 그는 청춘에게 잉여라는 호칭이 잔인하며 그들을 수술대에 올리려 하지 말고 이들을 찍어내는 세계를 올리라 말하고 있다. 교장비리가 터졌는데 학생복장단속한다는 최태섭의 비유와 함께 비슷한 맥락에서 꿈이 직업과 동일화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꿈꾸라 할 게 아니라 그 희망을 이룰 다양한 직업을 갖게끔 일자리 창출을 하는 것이 정치, 경제, 행정이 해야 할 일이라 말하던 조국교수가 떠오른다.) 보통 좀비는 영화에서 퇴치의 대상이지만 좀비가 아닌 이들의 노력에 의해 치유되거나(영화‘나는 전설이다’) 스스로 치유되기도 하지(영화‘웜바디스’) 않나. 저자의 말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질문과 반향을 통해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서리에 있는 좀비라면, 또 다른 잉여질에 눈을 돌릴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사실은 누구와 맞서야 하는 것인지, 세상이 적이라며 손가락질 하는 곳으로 눈을 돌리기보다 하이퍼리얼리티에 압도되지 않고 시뮬라시옹을 시뮬라시옹으로 읽어내는 잉여만의 눈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볼수도, 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들을 보는 눈이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스크린 밖’, 저자가 옹색하게 앉아있는 ‘모서리’, 그 잉여만의 공간에 주목한다. 바로 그 자리에 우리도 까치발을 하고 서 있다. 까치발 하고 서 있다간 이 가장자리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두려운, 바로 그 자리 말이다. 하지만 잉여들도 차곡차곡 포개다가 못 견디겠으면 넘어지면 된다. 바로 그때, 낭떠러지 말고 그 반대편인 저 세계의 중심을 향해 넘어지면 뭔가 세상에 작은 균열 정도는 줄 수 있지 않겠나. 나는 청춘들 스스로 잉여라 자칭하며 또 다른 영토 확장을 도모하는 모양새에 주목할 필요성을 느낀다. 자본주의 세계의 ‘생산적이다=이익을 창출한다’의 공식에는 걸맞지 않을진 모르지만 저자를 비롯해 잡지 ‘월간 잉여’,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2030 웹진 여잉추(ingchu.com, 여기 잉여 추가여, 혹은 여성 잉여들에게 추천합니다 등의 줄임말이 될 수 있다고 한다.)에서 나는 유쾌한 잉여들을 보며 영감을 받는다. 이러한 잉여활동은 공간의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3D 수직으로 포개진 잉여가 세계 안으로 자빠져서 재기발랄하게 웃어제낄 수 있지 않을까. 그 세계조차 거부하고 잉여들만의 공간을 세계 위에 중층으로 펼쳐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또한 실재가 아닌 희망의 신화가 될지 모르겠지만 과잉의 세상에 과잉이 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 자체가 이미 과잉인데 그걸 전복시키려면 혁명적일만큼의 과잉이 필요하지 않을까. (영화 ‘두사부일체’의 윤제균식의 과잉이 순간 떠오른다. 평단은 질색했지만 학교재단비리와 체벌폭력에 맞서려면 조직폭력같은 권력을 넘어서는 묻지마 폭력이 필요했고 조직폭력을 미화시켰다느니, 체벌폭력을 과장했느니 하는 반작용을 버티려면 과장된 코메디라는 옷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윤제균식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이 연출방식은 문제 자체가 과잉이니 그걸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과장된 조치가 필요하다는 해석이 가능해 오히려 나는 호감이 갔던 기억이 있다.) 2030 웹진 여잉추(ingchu.com)를 둘러보다가 2013 서울시 청년 삶 재구성 국제컨퍼런스의 한 부분을 스틸로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의 고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생계를 유지하면 좋겠다. 무기력해지거나 안팎으로 적을 찾게 되는 모두의 고민이자 이상이다. (열정노동으로는 세 번째 조항이 충족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아직 계몽과 근대화중인 세계의 사정없는 물살에 튕겨 나와 겨우 모서리에 서서 세상을 보는 대로 써내려가는 그의 글에 주억거리며 그의 글쓰기가 잉여 열정노동자의 투쟁이며 그 투쟁의 기록임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투쟁의 여지는 남아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허덕허덕 살기도 바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투쟁은 잉여만의 고유한 시선일지 모르겠다. 그 투쟁은 우리가 가지는 당연한 의문들의 사유가 주는 (저자의 언어대로 표현하자면) 어떤 불쾌감과 마주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고 꿈이 무엇인가. 하지만 그 질문들을 가로지르는 현실이라 불리는 반작용, 늘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공정, 공존할 수 없는 공정과 평등, ‘진실’로 인정할 수 없는 언론보도, 냉전시대의 왜곡된 망령에 사로잡힌 이들, 정치의 근본이어야 했던 철학과 정신의 부재, 늘 자기들 기준대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그 결과로 이분법적으로 세상과 사람을 분류하며 차별을 정당화하고 교육으로 재생산하는 권력사회, 무슨 기준에서인지 모를 차별적 보상을 마주하는 순간 불쾌함이 들겠지만 잉여들에겐 적어도 세상이 이율배반을 요구하는 것을 알고 선택할 수 있으며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영토 확장을 유쾌하게 꾀해 볼 기회가 분명 있다고 믿고 싶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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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무엇보다 나에게 참으로 답답했던 날들을 환기시킨다. 담고 있는 글들이 모두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어떤 일들이 있었던가? 새해 벽두부터 일어났던 용산 참사, 강요로 인한 성상납 커넥션 때문에 자살한 장자연, 김진숙씨의 골리앗 고공 농성과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자살, 사어(死語)인줄 알았던 '민간인 사찰', 농협 사태와 저축은행 사태, 4대강 강행 등등. 참으로 기존에 가진 상식과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 도대체 이 나라에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숙고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나날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기록을 담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하는 소개에 따르자면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의무감도 책임감도 없는 연봉 천만원의 삶을 사는 20대 후반의 젊은이가 그 시기를 관통하면서 했던 사유의 기록물인 것이다. 그렇게 사적인 공간인 블로그나 여기저기의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두 검열, 문화, 섹스, 노동 그리고 민주화 이렇게 다섯 가지의 주제로 나눠 엮어놓은 책이 바로 이 책, '모서리에서의 사유'다.
제목이 왜 '모서리에서의 사유'가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책에서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모서리 위의 인간이란 추락에 대한 공포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안간힘과, 그 딱딱하고 각진 공간이 제공하는 통증 때문에 그다지 쾌적한 존재를 영위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왜 굳이 평평한 면들을 놔두고 모서리를 택했냐고 묻는다면, 언젠가부터 모서리가 이 세상이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공간'이 되었다고밖에는 답할 수 없다.(-> 이것은 잘못된 문장으로 보인다. '되었다고 답할 수 밖에는 없다.'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이념과 역사는 물론이고 사물의 질서로부터도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한 나로서는 언제나 모서리에 걸터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사건과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의무도 책임감도 소속감도 없이 어떤 의문들만을 손에 쥐고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결코 평평하지 않은 총천연색의 3D였다. 모서리에서 보이고 모서리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이 책은 '모서리에서의 사유'다.(P. 6)
길게 인용한 것은 이 책이 취하고 있는 시선의 핵심, 혹은 말하고 있는 것이 어떻게 산출된 것인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렇게 모서리로 밀려난 자가 모서리에서의 불안과 모서리가 가져다 주는 통증을 자각하면서 누구든지 자기처럼 밀려날 수 있는, 결코 평평하지만 않은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그렇게 이 책은 질문으로 가득하다. 바로 그 질문들을 통하여 우리가 별 뜻없이 된장녀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지은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보다 깊이 헤아려 보지는 못했던 일들, 아니면 무턱대로 진리로, 상식으로 치부해 버린 것들, 혹은 과도한 지지나 호응을 보냈던 일들에 대해 과연 그것이 옳았던 것인지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세상의 진실은 어떤 땐 오로지 모서리에 서 있을 때 보여지는 것이라 말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이 책 전체는 일종의 초대장이라고 보아도 좋다. 즉, 지은이가 서 있는 모서리로의 초대인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에서는 미처 보지 못하는 진실, 평평한 곳에 서 있다면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손을 잡아 이끄는 것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의무도 책임감도 그리고 소속감도 없다는 지은이의 말마따나 그는 그 어떤 입장이나 당파에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지극히 개인만의 시각으로 말하는 모든 사건들을 보며 해석하고 질문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일종의 대화의 시작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막엔 꼭 이런 한 문장이 따라 붙는. '자, 내 생각은 이런데 네 생각은 어때?'
난 그런 기분으로 읽었다. 그래서 지은이의 생각에 동조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지만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근거도 적확하고 논지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예단하고 일반화하는 것은 아닌지 싶은 곳이 많았다. 특히 '나꼼수'에 대한 열렬한 반응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라든가 허지웅 비판의 문제, 대중에 대한 관점 등이 그랬다.(이보다 더 많았는데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의하는 부분도 많았다. 거기다 386의 분석처럼 아주 흥미로운 것도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역시 이 부분인 것 같다. 특히 크게 고개를 끄덕인 부분은 바로 여기.
그러나 88만원 세대도 386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한 가지는 이 자신만만함 뒤에 존재하는 거대한 무능함이다 이들은 동지들의 변절도, 진보정치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파국도 막을 수 없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실패들의 원인을 언제나 밖에서 찾으려 했다. 음모론과 국개론이 대놓고 혹은 암묵적으로 제시되고 책임은 온갖 곳으로 돌아간다. 이들은 이것을 반복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점점 고갈시켰다.(P. 250)
동의한다. 386에 대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당시의 정권 교체 때문에 과장되거나 각종 언론이나 저술 때문에 신비화된 감이 없진 않다. 모두들 대선이 끝났을 때 연령별 투표 현황을 보면서 '87년 6월 세대'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했었는데 사실 386이 와해되고 무능의 존재로 전락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정말로 그것은 허상이었는지 모른다. 소수의 특성을 무리하게 일반화시킨 가상의 존재 같은 것. 이것이야 말로 지은이가 말한 평평한 세상의 단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 마치 모든 개인적인 욕망이나 가치관은 없다는 듯이, 오로지 하나의 일반화로 몰개성의 포장도로를 깔듯 밀어버린 세계...
그래서 지은이는 더더욱 모서리에 서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88만원 세대'등과 같이 이런저런 세대들을 참 많이 가지고 있지만 가만히 헤아려 보면 그 어느것도 그리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허상들이 우리에겐 참 많다. 성급한 일반화로 개인들을 규정하려는 허상들이. 어쩌면 정말 위험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일반화인지도 모른다. 무분별하게 하나의 군집으로 묶어 나를 나 자신이 아니라 그 외부적인 것으로 규정당하도록 하는 것 자체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로 충만한 이 '모서리에서의 사유'는 일독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동의를 하든 나처럼 한 50%정도 반대나 비판을 하든, 아무튼 읽다보면 나 자신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의 움직임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우리가 어떤 세상을 지향하든 출발은 바로 거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 어떤 세상이든 자신이 온전히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것의 일부가 되어야만 인정된다면 그건 결국 또 하나의 지옥이 되어버릴테니까. 역사가 증명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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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최태섭은 자신의 입장이 마치 모서리에 간신히 엉덩이를 걸친 지경이라고 했다. 세상이 자기에게 유일하게 허락한 공간이 그 지점 쯤이라는 얘길 테다. 이념과 역사는 물론이고 사물의 질서로부터도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한 필자는 언제나 모서리에 걸터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사건과 사람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의무도 책임감도 소속감도 없이 어떤 의문들만을 손에 쥐고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결코 평평하지 않은 총천연색 3D였다. 모서리에서 보이고 모서리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이 책은 '모서리에서의 사유'다.(6쪽)
그러기에 어쩜 이념적 정향이 위태위태해 보인다 할까? 혹은 글의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예단도 슬몃 끼어든다. 모서리에서 졸속으로 막 써댄 글이 아닐까 우려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우였다. 몇 편의 글만 읽어보아도 청년 문화연구가, 아니 청년을 빼고 다시 말하자면 당당한 문화연구가의 면모가 엿보인다 할까.
우선 주례사 풍의 그렇고 그런 류의 글이 아니라는 점이 눈길을 확 끈다. 같은 진영에 속해있다할 수 있는 김기협이 쓴 북한 정권 세습을 미화(?)하며 싱가포르에 비긴 글을 두고 뉴라이트 계열의 논리를 답습한 반민주적 주장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노선에 따라 호불호를 미리 단정지어버리는 글쓰기가 아닌 것이다. 치밀한 과학적 논리를 바닥에 깔고 있는 그의 글을 읽다보면 누구든 양식 있는 자라면 머리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두번째로 꼽을 수 있는 그의 글의 미덕은 적절한 반문과 아름다운 문구가 어우러진 표현력에 있다 하겠다. 앞서 들었던 김기협의 글을 반박하며 '대체 그럴 거면 민주화는 왜 했나?' 한다든지 졸업식 비행사건을 주도한 청소년들에 대한 과도한 법적 제재에 대해 '이들을 바로 사법적으로 단죄할 것이라면 대체 교육은 왜 필요하고, 미성년자라는 개념은 왜 필요한가?'라는 이의제기는 읽는 이를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니고 있는 대목이라 할까?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런 부분,
우리는 왕국도 신정국가도 아닌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소한의 도덕이지, 도덕으로 통치하는 사회가 아니다.(35쪽)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애둘러 우리 사회의 실상과 성격을 이렇게 잘 규정할 수 있을까 싶다. 철학적 배경으로 무장한 멋진 글이라 하겠다. 그러니 즐겁게 잘 읽힐 밖에. 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지니고 있달 밖에.
하여 이런 고백을 해야 할 듯하다. 실은 청년 문화연구가의 글이라 하여 얕잡아본 측면이 있었음을 밝힌다. 좀 설익은, 그렇지만 약간의 센세이셔널한 면은 지니고 있을 것이란 정도로 기대수준을 낮춰잡고 읽기 시쟉했단 얘기다. 이 점 저자에게 사과라도 하고픈 심정이다. 내가 짧았다고, 섵부른 예단으로 좋은 글 놓칠 뻔했다고 말이다. 신진 문화연구가의 쌈박한 글 유쾌하게 잘 읽었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