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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의 [1984]를 읽어보지않았다. 눈앞에 책이 있어도 회피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펼쳐들면 서장의 첫번째 문장이 조지오웰의 글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도 역시 조지오웰의 글 한 문단이 인용되어있다. 물론 참고문헌에도 똑같이 처음과 마지막이 조지오웰의 글이다. 그런데도 읽어보고싶은 마음이 들지않는다. 보통은 이정도로 강렬한 느낌이 들면 책을 찾아 읽는 게 내 일반적인 독서 방법이지만 끝내 모르는 척 눈감기로 했다. 이 책 [집단 기억의 파괴]를 읽으면서 너무 힘들었다. 리뷰를 쓰기로 하고 받아든 책이었으니 책임감때문에 끝까지 읽었지만, 요즘처럼 봄이 올 듯 말 듯 왔다갔다하는 날씨만큼이나 감정의 기복이 커져서 책을 숨겨놓고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추운 겨울이 맹위를 떨쳐도 기어코 오는 봄은 막지 못하는 것처럼 책 속에도 봄같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희망을 노래하는 결말이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끝까지 읽었다. 나의 믿음은 답을 얻었을까?
책표지에는 제목과 함께 거꾸로 된 건물사진이 있다. 이 건물은 본 책 342쪽에 있는 사진을 거꾸로 합성한 것으로, 1945년 2월 파괴되기 전의 드레스덴 프라우엔키르헤 교회이다. 이 건물은 재건 과정을 거쳐서 2004년에 외부공사가 끝났단다. 거꾸로 된 사진, 이것은 파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시 재건되었기에 완전한 파괴는 아니지만 변형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밑에 "흙먼지가 되어 사라진 세계 건축 유산의 운명을 추적한다"는 부제가 붙어있다. 책을 검색하다보니 원저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되어있었다. 원저의 표지그림은 총탄이 무수히 박힌 성모마리아상 뒤로 화염에 싸여있는 건물 사진이다. 어딘지는 모르겠다. 책 속에는 여러 자료 사진들이 흑백으로 들어있는데 이게 또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 지금은 사라진 건축물들이기때문에 아련한 기억 저편의 모습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내게 그 본 기억이란 게 있을리도 없으면서말이다. 원제는 The Destruction of Memory : Architecture at War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번역자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제목으로 바뀐 것 같다. 사실 처음 제목만 듣고서 이 책을 읽고싶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냥 전쟁에서 건축물의 파괴가 갖는 의미가 그 기억의 파괴라는 사실보다 '집단 기억'의 파괴라는 표현때문이었던 것이다. 이건 어느 민족, 누구라고 지칭할 것도 없이 인간 본연의 악한 심리는 아닐까싶게 정복자들은 그곳의 과거 기억을 파괴하고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하는 것이다.
책에는 온통 파괴와 인종청소, 집단 학살, 내전, 정복, 혁명, 해체, 투쟁 등과 같은 살벌한 용어들이 난무한다. 어디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할지 모를 정도로 인간의 광기어린 파괴행위들이 나열되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있는 홀로코스트나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동안 잘 몰랐던 역사적 이야기들도 많이 있었다. 특히나 인명피해가 지극한 전투 뒤에 잇따르는 건축물, 특히 죵교적이거나 기념적이거나 공공의 건물들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끝없는 반복들에 머리를 흔들어 떨쳐버리고싶어지게 만든다. 물론 이런 건물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누군가의 목숨을 잃은 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이런 건축물의 훼손은 단지 전쟁 중에 목표물을 가로막아서가 아니라 건축물 자체가 공격 대상이 되어 역사를 바꾸고싶어하는 사람들의 행위인 것이다. 어떤 민족과 그 집단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을 말살하는 행위는 민족 자체를 말살하는 것과 불가피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앞서 읽었던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에서 언급된 약탈된 문화재들을 돌려주지않고 각자의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사할 지경이었다. 건축물은 떼어가고싶어도 그러기가 쉽지않으니 파괴하는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토록이나 처참한 역사가 들어있을 줄은 짐작을 못했다. 사라진 인류의 문화가 안타까운 게 아니라 인간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처참함에 마음에 상처가 생길 지경이다.
이런 파괴행위가 꼭 전쟁 중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오늘날 많은 도시에서도 자행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개발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것들이다. 책은 이런 여러 분류의 파괴행위를 크게 몇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문화청소, 테러, 정복과 혁명, 울타리와 이웃. 제목만 봐도 무슨 이야기가 들어있을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리고 5장과 6장에서는 재건과 기념,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라는 보호와 기소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덧붙여져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파괴되고 있는 어떤 건축물이 있을거란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책은 전반적으로 무겁고 어려웠다. 내가 전쟁에 대해서도 지식이 별로 없고, 세계사나 지리에 능통하지않아서 이것저것 들춰가며 읽었다. 게다가 인용해서 알려주는 내용이 너무 많다보니 일일이 이해하지 못한 채 글자만 눈으로 읽은 것도 꽤 된다. 누군가가 이 건축물의 파괴에 대한 첫 기록이라는 이 책을 따로따로 세분해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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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뛰어난 기억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억이란 것이 완전하지 못해서 잘못 인식한 것을 기억하기도 하고 스스로 왜곡시키기도 한다고 합니다. 생소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집단기억’의 개념은 [북소리]에서 소개한 바 있는 제프리 K 올릭의 <기억의 지도; http://blog.yes24.com/document/7653944>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집단기억’은 에밀 뒤르켕의 문하생 모리스 알브바슈가 1925년도에 발표한 <기억의 사회적 구성틀>에서 처음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기억의 지도>를 감수하신 김문조교수님은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인식적 가교로써 ‘삶에 보탬이 되는 지혜나 교훈의 교훈’이라는 온축적 가치를 넘어, 역사의 물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려는 집합적 열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 의의를 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등을 빚는 집단들은 상대 집단의 집합적 열망을 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마련일 것입니다.
대립하는 집단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치명적 사례로 제노사이드가 있습니다. 역시 [북소리]에서 소개한 허버트 허시교수의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http://blog.yes24.com/document/7320471>에서 인용한 글을 다시 인용해보면, 제노사이드는 ‘집단학살(集團虐殺)’이라 번역되고 “그리스어로 민족, 종족, 인종을 뜻하는 ‘geno’와 살인을 뜻하는 ‘cide’를 합친 말이며,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범죄를 일컫는다.”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집단 학살의 정확한 정의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법적인 집단 학살의 정의는 1948년 국제 연합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서 나온다. 이 협정 2조를 보면 집단 학살을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한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집단의 일원을 살해하거나 심각한 육체적ㆍ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고의적으로 육체적 파멸을 의도한 생활 조건을 강제하는 것, 집단 내 출생을 막는 것,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 이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948년 유엔이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을 마련하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집단이 저지른 것과 같은 대규모 학살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자는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만, 세계대전 이후에 아프리카와 동유럽 등지에서 벌어진 이민족들 간의 전쟁에서 여전히 재현되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집단이 확대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집단과의 부딪히게 되고 필연적으로 전쟁이라는 치명적인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온 일이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고 도시가 무너지는 일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상황논리일 뿐, 정복당한 집단이 언젠가는 세력을 키워 복수에 나설 것을 걱정하기 때문에 정복한 집단을 아예 절멸시킨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정복자의 문화청소행위에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애절한 감정을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민족을 말살하려면 먼저 그들에게서 기억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지. 누군가는 그들 책과 문화와 역사를 파괴하지.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다른 책을 쓰고, 그들에게 다른 문화르 제공하고,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고. 그러고 나면 민족은 서서히 자신의 현재 모습과 과거 모습을 잊기 시작하지. 주변 세상은 그 민족을 더더욱 빨리 잊어 가고 말이야.(밀란 쿤데라 지음, 웃음과 망각의 책 297쪽, 민음사, 2011년; http://blog.yes24.com/document/6738341)”
국제사회의 감시를 의식하여 인종청소행위를 대규모로 저지르지는 못하는 대신 이를 대체할 수단이 자행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로버트 베번의 <집단기억의 파괴>는 제노사이드에 병행하여 일어나고 있는 또 다른 집단기억의 말살행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바로 건축물의 파괴와 같은 문화청소행위입니다. 저자는 영국의 건축잡지 <빌딩 다자인>의 전임 편집인을 지낸 건축저널리스트이자 저술가입니다.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유럽의 건축유산의 자료화면을 넋 놓고 바라보기도 했다는 저자는 인도에서 보스니아까지 무수한 파괴의 현장을 직접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정복자들이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한 집단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그들의 정신이 담긴 건축물을 파괴해왔으며 또 지금도 파괴하고 있는지를 알아낸 것입니다. 전쟁에서 건물이 무너지고 도시가 파괴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도서관이나 미술관 혹은 종교건물과 같이 집단의 현전(現前, presence)의 상징은 특히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답니다. 이들 건축물들은 역사적 기억의 저장고이자 특정 집단의 현재를 과거 그리고 미래와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 건축물이 파괴되는 것은 전쟁의 부수적인 피해가 아니라, “건축물과 장소에 깃든 기억과 역사와 정체성의 말살, 즉 망각의 강요 그 자체가 목적인 분쟁에서 일어나는 특정 건축양식이나 전통에 대한 적극적이면서도 조직적인 파괴다.(9쪽)”라고 저자는 잘라 말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집단학살과 인종청소의 과정에서 건축물이 맞는 숙명을 살펴보고, 건물을 표적으로 한 테러 활동과 정복 활동, 사람들을 분산시키거나 결집시키기 위해 구조물을 세우거나 철거하는 행위, 과거의 잔해 위에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혁명적인 새 질서로 파괴된 건물들을 짚어가고 있습니다. 1938년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수정의 밤, 1938년 11월 19일부터 10일까지 나치의 선동을 받은 독일인들이 유대인의 집과 사업장, 시너고그 등을 습격한 사건)로부터 시작된 나치 독일의 광범위한 유럽문화 말살행위는 물론, 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의 배려로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된 이스라엘이 선주민 팔레스타인 사람과 문화를 말살하려는 행위들도 빠트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코소보 내전 기간 동안 세르비아 강경주의자들에 의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무슬림 문화의 파괴 실태, 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신구교의 충돌, 중국 정부가 티베트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하여 저지른 문화파괴 행위 그리고 문화혁명기간 동안 저지른 중국의 권력층이 저지른 자기문화 파괴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들을 뒤쫓고 있습니다. 다만 지리적 혹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건중심으로 서술하지 않고 문화파괴의 형태에 따라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어 사건들이 중복하여 인용되다보니 맥락이 매끄럽지 못한 느낌도 남습니다. 저자가 골라낸 주제어는 문화청소, 사기와 선전전으로 포장된 테러, 정복과 혁명, 갈등을 일으키는 분할, 그리고 재건 등입니다.
집단 간의 충돌은 대체적으로 종교적 이념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문화파괴행위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실용을 강조했던 시기에조차 라이벌의 종교적인 건축 유산을 파괴하는 쪽이었다. 반면 이슬람교는 비록 일관적이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믿음이 없는 자’들의 교회를 다루는데서 좀 더 유연했으며 파괴하기 보다는 모스크로 개조하는 쪽을 택했다.(27쪽)” 이슬람의 이런 관념은 바로 스페인의 코르도바 메스키타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785년 건축이 시작된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로마인과 서고트인들이 세웠던 교회에 지은 이슬람 사원인데, 메카의 사원양식을 고집하지 않고 교회의 주춧돌과 기둥, 건축양식까지 고스란히 이용하여 전형적인 교회 평면구조의 회교사원인 새로운 칼리프양식을 탄생시켰던 것입니다(김희곤 지음, 스페인은 건축이다 138-146쪽, 다산북스, 2014년; http://blog.yes24.com/document/7646432).
물론 탈레반이 저지른 바미안석불의 파괴행위와 같이 완벽할 정도로 실효적이지는 못하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그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고 보존하여 후손에 물려주도록 하자는 진화된 문화유산의 보호개념은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기념물이나 건축물은 쓸모를 잃으면 파괴되거나 대체 또는 개조되었던 것인데, 특히 자신의 전통이 아닌 문화유산까지도 존중해야 한다는 관념은 거의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건축물이 파괴되거나 무시되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건축물이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는 존 러스킨은 ‘건축은 성스러운 기억의 요체이자 수호자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건축이 역사가 되도록 하고,지나간 시대의 건축을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 보존할 의무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존 러스킨 지음, 건축의 일곱 등불 231쪽, 마로니에북스 펴냄, 2012년 ; http://blog.joins.com/yang412/13284036) 앞서 유엔의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한 것은 탈레반이 예고하고 실행에 옮긴 바미안석불의 파괴행위를 저지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응방안이 마련되지 못ㅎ라고 결국은 석불이 파괴되고 말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미안석불의 사례처럼 국제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세르비아 반군에 의한 두브로브니크 포격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서구 언론은 세르비아 반군의 두브로보니크 포격을 세계의 집단 건축유산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포격을 멈추라고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얻었던 것입니다. 다만 두브로브니크에 들어서 있는 후기 르네상스건축물들이 서구인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같은 기간 동안 벌어진 발칸반도 일원에서 벌어진 이슬람유산의 파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미온적인 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이슬람 문화에 대한 서구인들의 뿌리 깊은 문화적 근시안 또는 적대감 탓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파괴된 문화유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 역시 뜨겁습니다. 저자는 “재건은 그 재건을 가져온 파괴만큼이나 상징적이다. 건설은 파괴된 건축 환경을 이어 붙이거나 예전 삶의 결을 하나로 엮는 데 사용된다. 집단기억에는 새로운 시금석이 놓인다. 한때 비인도적인 기념물, 곧 일상의 예배 장소와 도서관과 분수였던 것은 재건을 통해 파괴를 야기한 사건을 떠올리는 의도적인 기념물이 된다. 역사는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간다.(309쪽)”라고 재건의 의미를 새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문화를 파괴해 망각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재건은 특히나 의심스럽다.’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러스킨은 “복원은 건물에 가해질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어떤 잔여물도 거두어들일 수 없는 파괴다. 더불어 파괴된 작품에 대해서 거짓된 묘사를 하는 것과 같다.(존 러스킨 지음, 건축의 일곱 등불 249쪽)”라고 하여, 파괴된 건축물의 재건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진실을 표방하는 역사가 유산에 자리를 빼앗기는 사례가 너무 잦다’라고 지적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로웬덜역시, 유산은 ‘이미 지나간 신념에 바치는 맹세이며 과거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자부심은 유산의 부작용이 아닌 근본인 목표’라고 하여 건축의 재건을 이용하거나 남용하는 이들을 경계하기도 합니다(315-316쪽). 저자 역시 “재건을 통해 건축물을 구조하는 임무에는 파괴 이후의 관습과 공식적으로 인정된 역사에 부합하는 거짓 기억을 이식할 위험이 존재한다. 재건된 역사는 그것이 위조된 것일때도 과거의 진본 기록으로 읽힐 수 있다.(324쪽)”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이 여전히 당면하고 있는 위기상황을 정리한 저자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건물을 세운 사람은 사라지고 없다 해도 죽은 건물은 사어(死語)처럼 슬픈 웅변이 될 수 있다. 파괴된 건물은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조각된 석조 칸막이와 목재 파편에 뒤섞여 포차 공동묘지에 묻힌 보스니아 무슬림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의 유산에서 발전한 공동의 세계유산이라는 관념은 물론이거니와 평등과 정의와 이성이라는 계몽주의의 가치와 객관적인 역에 대한 열망까지 위험에 처했다. 분쟁의 한복판에서 보호에 대한 약속이 헌신짝처럼 버려진 20세기의 역사가 21세기에 또다시 되풀이될지 아닐지는 다음 몇 년 안에 판가름이 날 것이다.(369쪽)”
저자가 핵심적으로 인용한 사례들은 주로 현재진행형인 것들이지만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문화청소행위에 대한 기록들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저지른 문화말살 정책을 저자에게 설명할 기회를 만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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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혼과 미,정체성이 오롯이 담겨져 있는 건축물과 창작 작품은 사회 구성원들 뿐만 아니라 예술을 탐미하고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더 없는 심미함과 창작의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또한 인류가 시작되면서 세계에 손에 꼽을 정도로 찬탄을 금치 못하는 인류 4대문명을 비롯하여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문화재산까지 포함하면 인류는 먹고 살기 위한 존재를 넘어서 후대에게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남겼다고 생각한다.문화재산은 한 사회의 재산일 뿐만 아니라 전인류가 오래도록 보존해야 할 재산이 아닐까 한다.
'숭례문'소실 소식이 엊그제 같다.언론매체에 의해 활활 타오르는 안타깝기 그지없던 순간과 문화재를 잃은 국민들의 비애와 자탄의 목소리를 감지하고 나 또한 문화재를 사랑하는 한사람으로서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지금도 가끔 숭례문 주위를 돌아 갈 때 내 마음 속엔 새롭게 만드는 것보다는 이를 보전하기 위한 국민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그리고 정부의 문화재에 대한 정책실현과 각별한 보호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비단 숭례문 뿐만이 아닌 일제총독부에 의한 '광화문'이 철거되고 조선총독부가 세워진 일은 나라 잃은 약체국의 설움과 속절없음에 다름 아니다.
이 도서는 세계 2차대전에서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참화 속에 스러져 간 건축물,도서관,미술관은 역사의 기억의 저장고이자 특정 집단의 현전을 과거와 잇고 현재와 미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증거물들이 국가간 영토확장,종교,부족간의 갈등에 의해 처참하게 한 줌의 흙으로 변한 몰골을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깝고 가해국 및 명령권자의 지성은 과연 몇 점일까? 전쟁은 독자적 현상이 아니라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연장이라고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격언을 되새겨 본다.
보스니아 내전의 스타리 모스트,사라예보 국립도서관,세르비아의 모스타르 정교회 성당,바덴바덴의 시너고그(유대인 예배당),보스니아의 오스만제국 시대의 모스크,아르메니아의 수도원,9.11테러(세계무역센터),더블린 법원 건물,영국 길드 집회소,세인트 폴 대성당,중국의 티벳 건축물,탈레반에 의한 석불 두 기,베를린 장벽의 희생자 화해의 교회,터키군의 키프로스 침략을 기점으로 그리스 유산 등이 정치 전쟁,종교 전쟁,내전 등으로 소실되고 한 줌의 흙으로 변하고 말았다.다행히 2차 세계대전중 파리만큼은 문화재 소실로부터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다.뜻있는 독일 장군에 의해 히틀러의 명령보다는 문화재의 소중함을 길고도 멀리 내다볼 수 있었던 혜안이 있었기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건축물의 파괴가 위주가 되지만 가해측의 파괴 음모와 양상을 보면 그들은 문화청소,테러,정복과 혁명,분할(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낳은 비극 등을 엿볼 수가 있다.인종청소와 문화청소는 병행되었다. 집단 기억과 공유의 역사 그리고 장소와 건축 환경에 대한 애착심,나아가 가해측의 표적인 공동체에 속한 동시대인의 목숨은 물론 역사의 존재까지 말살하기 위해서였고 묘지와 기념물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탈레반에 의해 처참히 파괴되고 수많은 인명이 스러져간 9.11테러는 미국이 전세계의 우상이 될 만큼 중동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미국이 자신들의 문화적,정치적,경제적인 권력으로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은 무슬림을 예솏키려는 '시옩의자 십자군 동맹'의 선봉장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알카에다의 실권자의 말을 인용하면 "십자군과 유대인은 살인과 유혈 참사,불붙은 건물이라는 언어밖에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듯 묵은 원수의 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그들의 시계(視界)안에 들어오는 서구의 대사관과 기업 건물을 목표물로 삼았고 미국과 이슬람 관계는 이라크 전쟁을 통해 수많은 문화재와 인명 살상이 자행되고 잔인한 역사의 기록으로 잊혀지지 못할 사건이다.
비문명인,즉 이웃의 야만인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문명인의 공포는 역사도 깊다.정착민이 유목민 무리를 만났을 때 느끼는 공포,이질적이지만 질서 잡힌 도시의 주민들이 편협한 부족주의의 태동을 지켜보며 느끼는 공포이기도 하다.그 대표적인 도시 사라예보이다.모스크와 로마의 카톨릭교회,정교회가 어우러진 곳인데 세르비아인들이 배척해야만 하는 완성미와 예술적 가치가 녹아 있는 건축물로 모여 있는 곳으로 문화재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웠던 모스타르 주민과 무슬림을 극도로 혐오스러워했던 크로아티아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모스타르의 다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전쟁에 의해 불태워지고 재건되는 경우도 있고 다른 건물로 새로 지어지는 경우도 있다.원폭으로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는 전면적인 재건이 불가피했지만 그 파괴의 물리적 흔적을 말끔히 없애는 이유는 트라우마를 잊기 위함일 것이다.그러나 값비싸게 얻은 교훈에는 증거가 필요하기에 참상의 현장에 사건의 물리적 현현(現顯)이 필요하고 과거를 회피하기보다는 기록하고 설명함으로써 그들 나름의 쓰라린 역사적 교훈을 후대에게 보여 주고 그것을 기념하는데 진일보한 것으로 보여진다.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은 진실이다.
1954년 헤이그협약과 추가된 제네바협약 의정서에 의거해 집단학살과 인도에 반하는 기타 범죄를 기소할 권한에 더해 기소 면제권한까지 명시하고 있다.물론 여기에는 전쟁법과 전쟁 관습법을 위반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 군사적 필요에 의해 정당화되지 아니하는 도시와 마을,촌락의 고의의 파괴나 손상 * 무방비 상태의 도시와 마을,거주지나 건물에 대한 모든 수단의 공격이나 폭격 * 종교,교육,예술,과학 또는 자선 목적의 시설과 역사적 기념물,예술과 과학의 결과물를 몰수,파괴 또는 고의로 훼손하는 행위 * 공공재산 및 사유재산의 약탈
전쟁은 어떠한 명목으로든 인류가 보전해 나가야 할 건축물,예술작품,기념물 등에 이르기까지 파괴하고 훼손해서는 더 이상 안될 것이다.개인의 영웅심과 침략행위가 문화와 인종청소로 이어지는 일은 21세기엔 더욱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우주와 지구를 살리는 금융위기,기후문제,식량문제,생태계 오염 문제 등에 더욱 실질적이면서도 현인류의 질적인 삶의 제고를 위해 정책타협안을 기초로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다.왜냐하면 인류는 우주라는 대자연이 준 시혜를 잠깐 빌렸다가 되돌려 주어야 할 숙명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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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기억의 파괴/로버트 베번/나현영/알마 인류 역사는 전쟁사의 다른 이름이다. 영토 정복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데올로기 중심의 양차대전 이후 민족과 종교 분쟁으로 변질되어 문화유산과 종교 건축물의 무차별 파괴를 수반하였다. 저자는, 전쟁 중 건축에 가해진 이러한 탄압은 결국 인종청소로 이어졌고 이것은 한 민족의 집단 기억을 말살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의도된 행위임을 증명한다. 저자는 종교적 편견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야만적인 문화 파괴를 일컫는 ‘반달리즘’의 억울한 어원적 의미나 현재까지 이슬람 민족이 받는 근거 없는 문화유산과 종교시설 파괴에 대한 오해 역시 타문화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한다. 유고 연방의 민족 분쟁으로 시작된 건축물 파괴는 이후 타 지역의 모범 사례가 된다. 마치 보고 베껴 쓴 답안지와도 같이 건축물을 철저히 파괴하고 인종청소를 자행하는 것은 과거 홀로코스트의 광기를 무색케 한다. 이러한 파괴 행위는 세계 각처에서 자행되었다. 중국의 티벳 침략과 사원 파괴, 인도의 종교시설 파괴와 학살, 루마니아에서 자행된 인종과 건축물 학살 역시 마찬가지다. 민족 분쟁은 새로운 형태의 케토를 출현시켰다. 팔레스타인 사이에 쳐진 예루살렘 장벽과 신, 구교의 갈등으로 생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장벽, 그리스계 키프로스인과 터키 사이의 ‘그린 라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역시 종교와 민족 분쟁으로 인해 파생된 또 다른 유산이다. 이러한 참혹한 현실을 보면서도 국제기구는 아무런 역할도 못했으며 그나마 서구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지역은 자신들이 선호하고 친숙한 휴양지 정도였다. 크로아티아의 항구 도시 두브로브니크에 가해진 포격에 대한 국제 여론의 거센 비난과 반발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이에 반해 탈레반의 바미안 석불 파괴와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이슬람 유산 파괴 등에 대한 무관심은 타문화에 대한 무지가 상당 부분 작용했다. 저자는 파괴된 건축물에 대한 성급한 복원에는 신중한 입장을 견지한다. 자칫 아무 의미도 없는 ‘디즈니화’한 건축물로 복원될 때 그것이 또 다른 역사 조작이 될 것을 우려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괴된 현장을 일부 보존하면서 복원하는 ‘비판적 복구’를 지지한다. 바미안 석불에 대한 복원 방향이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히로시마에서 시행된 피해 현장의 보존과 복구를 겸한 복원이기도 하였다. 이런 ‘비판적 복원’론은 일제 강점기하에 지어졌던 중앙 청사의 돔을 잘라서 내리면서 역사 청산의 의미를 부여하던 우리의 모습과 비교된다. 과연 우리는 그 중앙청 첨탑을 잘라 내려서 얼마나 역사를 청산 하였을까? 저자는 건축물에 대한 범죄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문화재 보호법안인 헤이그 협약이 국제적 조약으로 강제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헤이그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미국이 이라크 전쟁시 박물관이나 코란 도서관보다는 석유부 건물을 우선 보호한 상황을 거론하며 그 전쟁의 당위성과 목표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한다.
만일 역사의 서술이 승자의 특권이라면, 성공적으로 역사를 고쳐 쓰는 것도 승자의 특권일 것이다.[97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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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인간은, 혹은 적어도 나는 여러 감각 안에 각각의 어떤 기억을 담아 놓는 동물이다. 미각, 후각, 청각, 촉각 등과 관련하여 어떤 특정한 본인만의 기억을 담거나 연상시킨다.
나만해도 어떤 향기를 맡으면 혹은 어떤 음악을 들으면 과거의 어떤 상황 속으로 돌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공간에 관한 감각 혹은 기억도 인간에게 참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를 들어,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본인만의 공간은 매우 중요하다. 집에 자기 자신만의 방이 있다가 어떤 이유로 없어지면 그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혹은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고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예로, 예전에 사랑하던 사람과 즐겨 찾던 곳이 다른 가게로 바뀌어 있다거나 하면 정말 큰 상실감을 맛보게 된다.
그만큼 인간에게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공간, 더 나아가 건축물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큰 의미를 갖게 한다.
이 책에서도 나온 내용이지만, 사실 나는 911 발생 당시 뉴욕 바로 옆 주에 있었고, 아침 수업을 가다가 영화같은 뉴스를 보며 놀랐던 기억이 있다.
WTC 가 내게는 별 의미도 없고 잘 모르는 건물이어서인지 그 당시 내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이 더 충격이었고, 그래서 친구들과 얘기하기를 내가 만약 빈 라덴이었다면 사람을 덜 죽이는 방향으로 테러했을 것이었고, 충분한 위협과 상실감을 주기 위해서는 자유의 여신상이나 금문교를 폭파시켰을 것이라는 말을 했던 기억도 났다.
물론 빈 라덴과 알 카에다는 서구 문명의 상징으로서 WTC를 고른 것을 아직까지도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여하튼 전혀 그런 개념을 몰랐음에도 인명 피해가 덜한 쪽의 문명, 건축물 파괴를 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같은 사람도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니 이전의 전쟁꾼들이 이런 것을 잘 활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건축물 파괴 혹은 문화 파괴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인간에게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치고,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건축물을 파괴당한 인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있어서도 큰 손실이다.
유럽의 도시를 가면 대부분 구 시가지와 신 시가지로 도시가 나뉜다. 집을 지어 사람 살 곳도 없는데, 굳이 그렇게 구역을 나누어 놓는다.
즉 그만큼 자신들의 옛 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러한 역사와 건축물들은 파괴 후 훌륭한 기술로 복구한다고 해서 무마되는 것이 아니다. 해당 나라의 국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계 모든 이들이 서로의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이때에 그런 역사와 문화들이 없어진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로 큰 손해이다.
이 책에서 본 내용 중 문화/문명 파괴로서 건축물 파괴와 더불어 내 생각에 참 무서운 것은 도서관, 역사관 파괴였다.
몇 년 전 모 카메라 광고의 카피가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적이 있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라는 카피였다.
정말 그 카피를 충실히 이행하여 지금까지의 기록을 지우고, 승자로서 과거를 부정하고, 과거를 조작하여 지나간 역사를 새로 쓰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 더한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는 만큼 보게 되었고, 또 그만큼 행동과 생각을 바꿔야 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전쟁시 단순히 민간인 학살은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민간인 학살 보다도 더 비인간적인 것으로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인 건축물, 문화 파괴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흔하지 않은 소재를 다룬 책이라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만큼 더 모르는 분야를 알게 된 것 같아서 읽고 난 후에도 느낀 점이 많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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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기억의 파괴]의 지은이 로버트 배번은 청소년 시절 영구적일 것만 같던 건축물이 때이른 종말을 맞게 될 때 공포와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고 책의 서두에서 고백한다. 지은이는 ‘우리는...공포와 매혹을 한꺼번에 느낀다’라고 표현하므로 두 가지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몰아가지만, 그것은 지은이의 감정일뿐임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의 화재 뉴스를 보고 내가 느낀 감정은 공포와 분노였지 사람의 마음을 호리어 감정을 사로잡는다는 ‘매혹’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지은이는 생소한 분야의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몇 페이지에 걸쳐서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청소년 시절 건축물의 파괴에 매혹을 느끼고 죄책감을 가진 자신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 것 치고는 꽤나 거창한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지은이는 청소년 시절 제2차세계대전의 학살과 건축물 파괴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서 자랐는데, 그러한 파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1989년 9월 11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1993년 9월 11일에는 크로아티아의 폭격으로 모스타르의 역사적인 다리인 스타리모스트가 무너졌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에는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이 무너졌다. 이것은 9.11이라는 숫자가 파괴의 날을 암시하는 어떠한 미신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가능한 이유는 건축물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가 무수히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건축물 파괴가 전쟁이나 테러로 인한 불가피하고 부수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이 있고 그 자체로도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 할 수 있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숭례문의 화재 사건 역시도 60대 노인이 자신의 토지 보상 문제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것이었다. 나는 당시에 숭례문 화재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 이전에는 숭례문에 대해 별다른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조금은 어리둥절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감정은 당연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무너진 모스타르의 다리를 보고 수많은 무슬림들은 흐느껴 울었으며, 크로아티아 출신의 작가는 자신이 학살당한 사람들을 볼 때보다 파괴된 다리를 보고 더 큰 고통을 느끼는 이유를 궁금해 했다. 그 이유에 대한 대답으로 지은이는 이러한 내용을 인용한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수명에도 끝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명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파괴하는 행위는 이야기가 다르다. 다리는 그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개인보다 더 오래 살아남도록 지어졌다. 다리는 영원을 붙잡으려는 시도이며 개개인의 운명을 초월한다. 죽은 여인은 우리 가운데 한 명이지만 다리는 인류 전체다.’ 그렇다. 나 역시도 화재로 새까맣게 탄 숭례문을 볼 때 느꼈던 상실감은 단순히 그 가치가 훼손되는 데서 느끼는 슬픔만은 아니었다. 나와 우리가 속해있는 집단이 이루어내지 못하는 영원함을 대신해주는 건축물이 파괴됨으로 인한 상실감이었으며, 숭례문이 불러일으키는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부터 추방당하는 망각의 강요에 대한 분노였던 것이다.
건축물 파괴의 역사는 근대 이전부터 있어 온 것이고 그러한 파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9.11이라는 우연성을 만들어 낼 정도로 무수히 일어나고 있어 그 자료 또한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책에서도 1990년대의 크로아티아 내전 이야기가 나오다가 갑자기 그로부터 55년 전의 유태인학살사건이 나오는가 하면 20세기 이전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사건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학살을 다루기도 한다. 자료가 방대하다 보니, 그 사건들을 나열하기에 급급하고 서사적인 관점으로 풀어내는 것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러한 기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건축물을 파괴함으로 집단 기억의 망각을 강요하는 집단에 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괴의 현장을 기억하라, 그것은 집단기억의 파괴가 계속되고 있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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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말살의 기본은 집단기억의 파괴다. 집단기억의 파괴로 가장 직접적이고 유효한 것은 건축물의 파괴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을 온몸으로 견뎌낸 우리는 집단기억의 파괴와 역사적 망각이 얼마나 위해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이른바 식민사학과 고대사의 왜곡은 겨레의 정체성을 분열시키고 파괴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술수였다. 과거와 기억은 언제나 정당화의 지배수단으로 활용된다. 증거로서의 과거를 재구성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 건축물을 파괴한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한눈에 정리한 책이 출간되었다. 바로 영국의 건축 저널리스트 로버트 베번의 《집단 기억의 파괴》이다.
저자는 건축물을 매개로 한 문화청소(cultural cleansing) 현상을 연구한다. 한때 예술과 건축에 표현된 문명의 가치를 파괴하는 행위를 가리켜 '반달리즘'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런 애매한 어법보다는 폐쇄적 민족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가 건축물과 기념물의 의도적인 파괴를 이해하기 위한 이론틀로써 더 합당하다. 문화유산과 건축물의 파괴가 왜 민족 정체성의 파괴와 인종말살의 수단으로 활용되는지,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여기서 건축물은 토템의 성격을 띤다. 예컨대 적의 모스크는 단순한 모스크가 아니라 말살하려는 집단의 현전을 상징한다. 도서관과 미술관은 역사적 기억의 저장고이자 특정 집단의 현전을 과거와 잇고 현재와 미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증거다. 이런 이유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구조물과 장소는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는 결코 '부수적 피해'가 아니다. 건축물과 장소에 깃든 기억과 역사와 정체성의 말살, 즉 망각의 강요 그 자체가 목적인 분쟁에서 일어나는 특정 건축양식이나 전통에 대한 적극적이면서도 조직적인 파괴다."(8-9쪽)
건축물은 역사공동체의 집단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촉매제다. 건축물의 파괴는 타민족의 정체성을 흔들고 이들의 집단기억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 인종말살의 연장선이 된다. 가령 스탈린은 가톨릭 교회를 파괴했고, 히틀러는 유대교 회당인 시너고그와 슬라브족의 건축유산을 파괴했다. 세르비아 범죄자들은 사라예보의 국립도서관에 불을 질렀고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불을 폭파했다.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 문화유산 말살운동의 일환으로 히츠콘크의 아르메니아 수도원들을 파괴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는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파괴했다. 이런 단순한 파괴의 기록만으로도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건축물의 파괴는 대부분 인종청소와 병행되었다. 독일의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을 예로 들면, 상징적인 건물(시너고그)에 대한 공격과 파괴는 '타자'로 호명된 민족(유대인)에게 맹공을 퍼붓기 전의 예행연습이자 곧 있을 인종청소에 대비해 적을 약화시키는 과정이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 학살의 경우는 반대로 먼저 집단학살이 있었고 문화재 파괴가 뒤를 이었다. 여기서 "묘지와 기념물의 파괴는 인종청소를 소급 적용하는 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폴란드에서는 나치스의 인종청소와 바르샤바 건축물의 파괴가 동시에 자행되었다. 여기에는 토착 건축물의 파괴를 새롭게 획득한 영토의 질서를 개편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개념이 깔려 있다. 이처럼 타자의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경시 경향은 그 민족에 대한 인종학살과 병행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미 1954년에 '무력분쟁 시 문화재 보호에 관한 헤이그 협약'이 발표되었지만, 타자에 대한 극심한 증오에 눈 먼 이들에게 이런 종이 쪼가리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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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가 되어 사라진 세계 건축 유산의 운명을 추적한다”라는 표제 말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자못 진지하게 책장을 넘겼습니다. 제목만으론 쉽게 짐작되지 않던 책의 내용이 지은이의 이력과 책표지 사진, 문구 등으로 인해 어렴풋이 다가왔습니다. 평소 한번쯤은 생각해봤던 인류문화제파괴에 관한 내용이었기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읽었습니다. 무릇 건축물이라 하면 웅장하고 역사가 깊어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인류 문화유산으로 생각되어지는데, 인류의 탐욕과 이기로 인해 숱하게 사라진 문화유산을 쫓다보면 너무나 큰 상실감과 분노를 느낍니다.
작은 예로 우리나라에서도 간간히 일어나고 있는 타종교배척으로 인한 석상파괴와 과거 전란으로 잃어버린 수많은 소중한 서책과 건축물, 비석 등이 지금 막 책을 읽고 난 제 머릿속을 한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인류가 살아오며 끊이지 않았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영토정복의 야욕입니다. 특히 인종청소, 영토정복등과 함께 반드시 따라온 것이 바로 의도적으로 건축물을 파괴하는 행위인데, 정복에는 영토정복뿐 아니라 그 민족에 대한 이데올로기정복 또한 포함 됩니다. 바로 건축물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개인, 크게는 민족의 집단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민족문화의 얼이 담겨있기 때문에 이를 훼손함을 통해 그 민족의 정체성을 흔들고 민족근간을 뿌리채 뽑으려는 것입니다.
과거 브란코 그루이츠 세르비아계 즈보르니크 시장이 무슬림주민을 추방하고 모스크를 파괴한후 “즈보르니크에 모스크는 원래 없었습니다.”라고 한 말을 보면, 한민족을 말살할 때는 그들의 문화유산인 건축물, 도서관(많은 역사를 안고 있는 자료를 품은)을 없애는데, 이는 건축물이 기억을 떠올리는데 필수적인 유형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건축물을 없애 그 민족의 발자취를 없애고 과거를 부정하며 그들의 정신마저 빼앗아 버리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파괴는 비단 과거, 저 먼 나라의 일이 아닌 바로 우리가 과거 몇십년 전 겪었던 일이기에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또한 그 후에도 빈번히 많은 국가에서 전쟁을 하고, 또 약한 나라를 억누르며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많은 문화재 보호협약 등이 있었지만, 끔찍한 집단학살과 문화적 집단학살은 아직도 국제법상 올바른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자행되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잠시나마 생각의 전환점을 발견했는데, 바로 대부분의 끔찍한 인간 집단 학살 중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유대인에 대한 “크리스탈 나흐트”사건입니다. 이제껏 여기에 관해서는 인간에 대한 반인륜적인 행위라고만 생각했지 당시 유대인들의 건축물, 즉 건축유산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당시 무수한 사망자가 나왔고 수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가서 희생당하는 등의 인권유린, 학대 등에 대해서 끔찍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문화적 측면에서의 집단학살은 생각조차 못했었습니다. 허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조금 생각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인간에 대한 인권유린도 용서 못 할 일이지만 허나, 인간은 언젠가 죽고 인류 중 일부분이지만 문화유산, 건축물은 인류전체이고 이를 통해 민족, 나아가서는 인류의 정체성을 알게 하고 나아가야할 바를 알게 해 주는 역사입니다.
“역사는 반복되지만 한번 사라진 예술의 특별한 소명은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멸종한 어느 야생 조류의 노랫소리처럼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조지프 콘래드,《바다의 거울(1906)》라는 글귀를 보더라도 더욱 인류문화유산으로서의 건축물을 소중히 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끝으로 스위스의 법학자 에머리히 드 바텔은 《국제법》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한 국가가 완전히 파괴된다 해도 인류에게 명예가 되고 적의 군사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원이나 무덤, 공공건물 및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모든 건물은 보존되어야한다. 그것을 파괴하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일각에서는 꾸준히 일어나고 공감을 얻지만, 정작 최근에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인류 중요문화재를 파괴하는 일은 빈번히 일어나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해서는 보다 엄정한 문화재파괴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개개인이 소중한 건축 유산을 보호하려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본 서평은 이벤트 당첨으로 출판사로부터 제공을 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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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가 되어 사라진 세계 건축 유산의 운명을 추적한다’란 부제가 달린 《집단 기억의 파괴(2012.1.27.알마)》는 민족 자체를 말살하기 위해 토템의 성격을 띤 건축물을 파괴하는 행위를 고발한 책이다. 저자는 전쟁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건축물이 훼손된 경우가 아니라 민족 말살이라는 고약하고도 잔인한 저의를 품고서 중요한 건축물과 기념물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행위가 전 세계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집단 기억의 파괴》에서 증명하고자 한다. 이 책은 ‘집단학살과 인종청소의 일부로서 건축물이 맞는 숙명을 들여다본 다음 건물을 표적으로 한 테러 활동과 정복 활동, 사람들을 분산시키거나 결집시키기 위해 구조물을 세우거나 철거하는 행위, 과거의 잔해 위에 유토피아를 세우려는 혁명적인 새 질서로 인해 파괴되는 건물들을 차례로 살펴(p.11)’보는 순서로 진행된다. 저자는 종교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건축물과 기념물에 가해지는 공격이 사전에 계획되었는지의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란 쉽지 않음을 시인한다. 건축물의 파손이 전쟁 중 무차별 폭격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종교적 건물을 파괴하고 묘지를 없애고 거리 이름을 바꾸는 등 세르비아에서, 보스니아에서, 그리고 터키, 중국 등 많은 나라에서 무슬림,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행해졌던 파괴적이고 잔혹한 행위가 무엇이 있었는지 파고들어 그 모든 게 문화청소, 인종청소를 위함이었음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테러집단들이 노리는 목표물이 왜 상징적인 건축물에 집중되는지, 상징적인 건축물의 파괴행위는 어떤 치명적인 효과를 낳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과 펜타곤에 가해졌던 항공기 자살 테러인 9.11테러사건을 통해 미국 국민을 비롯하여 전 세계인이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이미 알고 있으므로 충분히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집단 기억의 파괴》를 읽으면서 종교와 종교의 대립뿐 아니라 민족과 민족의 대립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잔혹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인류 전체에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도 확인하였다. 파괴되고 훼손되어 지금은 사라진 모스크, 석불, 성당 등의 세계건축유산을 우리의 후손들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작년에 폴란드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도시의 80%가 완파되었던 수도 바르샤바의 재건 과정과 재건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 책을 읽을 당시에도 나는 바르사뱌 도시의 건축물 파괴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에서야 그 잔인함이 온몸으로 느껴져 소름끼친다. 이 모든 행위는 바로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집단 기억의 파괴》는 하루, 이틀 남짓의 시간을 할애하여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은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고 여러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백과사전을 여러 번 들춰봐야 한다. 하지만 많은 시간 동안 공들여 읽은 만큼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 또한 가볍지 않다. 읽어냈다는 뿌듯함도 여기에 포함된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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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살아왔던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이사나온지 1년이 좀 넘었다. 집값이 오를 거라고 시세 차익, 경제적 이익을 들먹이는데
건축물은 기억을 떠올리는 데 필수적인 유형물이고 과거를 일깨우는 촉매 구실을 한다. 말살하는 행위는 민족 자체를 말살하는 것과 같다. 이 책은 집단학살과 인종청소의 일부로서 건축물이 맞는 숙명, 건물을 표적으로 한 탈레반, 루마니아, 인도와 파키스탄, 베를린 장벽까지의 사례들을 통해서
광기로 인해 흙먼지만 남긴 채 사라지는 건축물 특정 집단과의 동질감 강화가 필연적으로 타자성을 증폭시키기에 추방된 공동체가 돌아올 빌미를 깡그리 제거하고 그들이 거기 존재했다는
테러라는 무기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는 데 사용된다. 베데커 공습은 독일의 여행안내서 베데커에 실린 역사적 영국 도시들만 골라
피정복민이 다시 예전의 영광을 꿈꾸거나 옛 종교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혁명적 변화는 과거 문화의 잿더미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기에 창조를 위한 파괴는
집들이 사람 대신 벌을 받는다. 건축물로 치르는 대리전 양상은
재건의 주체가 가해자든 희생자든 역사의 증거인 균열과 빈 공간, 잔해를 자존심과 저항의 표현으로 옛모습 그대로 복사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재건할 수도 있고 가해자인 독일은 연합군에 도시가 잿더미가 됐어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과거의 건축적 유물에 파묻혀 과거 속에 살라고 촉구하지 않는다.
역사적인 건물들은 건축적, 문화적 기념물 때문에 선택된 게 아니라 강력한 법 집행만이 집단의 기억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글로 읽어서 건물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건물의 사진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과 불편할 것 같지만 세계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해준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