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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최후의 날] ~ 빅토르 위고 ~ 중세 독일의 한 치안판사가 일생 동안 사형에 처한 사람의 숫자는 무려 3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 아찔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아마 그 시대의 어떤 대단한 전쟁영웅이나 혹은 극악무도한 악당도 그만한 숫자의 인간을 혼자 죽인 예는 없었을, 그 대단한-그리고 참혹한- 위업을 일개 지방도시의 비리비리한 판사가 법의 이름 아래 찬란하게 이루고 만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법체계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고, 규문(糾問)주의적인 재판구조 탓에 법관의 독단으로 집행이 가능했기에 벌어졌던 일이므로 이런 몇 가지 예만 들고서 함부로 국가나 법체계의 불용(不用)을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 발전된 법체계와 성숙한 국민의식과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는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으며 국가와 법은 국민과 개인을 수호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그리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들 또한 타국과 비교할 때 국가/법의 혜택과 보호를 상당 부분 받고 있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독단으로 3만명이나 사형에 처한 먼 옛날 어떤 판사의 만행(?)보다는 그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시대의식이다. 비록 아무리 그 시절이 지금에 비해 미개하고 신분의 격차가 심했다 하더라도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이나 도덕, 그리고 그런 것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토대가 닦인 법전 등이 존재했다. 즉, 이 법관이 한평생 법의 이름 아래 수많은 사람을 황천길로 보냈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살육을 저질렀다든가, 폐쇄된 공간 안에서 방탕귀족이 정신이상적인 기행을 저지른 경우와는 다르게 권력과 신분의 힘 이외에도 그 당시 사회일반적으로 그렇게까지 해도 된다는 의식이 깔려 있기에 가능했던 경우라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 때의 사람들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사형제도에 대한 거부감이나 저항감이 적었다는 뜻이다. 고대부터 사형제도는 엄연한 국가차원의 사회질서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8조법에는 “사람은 죽인 자는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기원전 1750경에 성문화된 함무라비 법전에도 “생명에는 생명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명한 보복주의적인 논리에서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고 명기하고 있는 것을 시작하여-물론 이 때의 규율은 신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노예를 죽인 귀족은 사형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돈 등으로 상대 주인에게 변상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랜 기간 동안 형벌이란 지극히 응보의 원리에 따라 적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렇듯 확고하게 유지되어 오고 있던 질서는 신분제가 무너지고, 인권의식이 성장하면서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91년 유엔에서는 사형폐지조약이 제정되었고 암흑시절, 어떤 국가법보다도 우선하는 교회법을 위시하여 수많은 이들을 형장, 그리고 전쟁터의 이슬로 보내버렸던 가톨릭 교회가 지금은 어떤 단체보다도 강력한 사형제도, 낙태를 반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또한 1997년 12월 30일 이후 10년째 단 한건의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어 사실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밖에 사회적으로도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인식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것만 봐도 그러한 인식의 변화는 쉽게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바로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정권 아래 억울한 죽음을 당해 보상받지 못한 이들이 수두룩하기에 형벌, 특히 사형제도의 보복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은 일찍이 19세기의 프랑스에도 존재하였다. 그가 바로 앞으로 소개할 감상문의 저자, 빅토르 위고이다. ‘라미제라블(장발장)’과 ‘노틀담의 꼽추’의 저자로 유명한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제도를 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악한 행위로 규정, 이와 투쟁할 것을 결심하고 “사형수 최후의 날”을 집필했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초판에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익명으로 출판한 후 마치 진짜 감방에서 고뇌하며 수기를 적은 사형수의 기록을 우연히 찾아낸 것처럼 가장하여 많은 파장을 일으켰었다. 이것은 센세이션적인 반향을 통해 책을 더 많이 팔겠다는 속셈이 아닌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효과적인 변론을 위한 전략이라고 후기에 저자는 적고 있는데, 진실은 그야말로 본인과 당시 출판사 직원들밖에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소설은 방금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 ‘사형수의 수기’라는 독특한 형태로 진행되며 내용은 어떤 우발적인 살인을 통해 사형수가 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 비세트르 감옥에서 처형되기 몇 주 동안 고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그는 옥안에서 자기 이전에 사형에 처해진 죄수들의 낙서를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음울한 죄수들의 정경과 친절하지만 이미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간수들, 상냥하지만 죽음에 익숙해져 자신과의 고해를 하나의 통과의례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늙은 신부에 대해 죽음의 앞둔 이로서 분노의 외침을 토하기도 한다. 빅토르 위고는 의도적으로 사형제도의 추악한 면을 직설적이면서도 투박하지 않게 들추어내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아래 선고받기 전의 주인공의 독백과 죽기 며칠 전 늙은 신부와의 고해를 앞두고의 사색이 특히 인상적이다. “사형선고는 비오는 추운 겨울밤, 음침하고 어두운 법정에서 자정에 횃불을 켜고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팔월, 아침 여덝 시에 더구나 이렇게 좋은 날씨에, 이런 선량한 배심원들이… 불가능한 일이야!” “(전략)…그런데 이 빌어먹을 늙은이는 나에게 뭐란 말이냐? 나는 그에게 무엇이고? 한낱 불행한 족속, 그가 수없이 보아온 생명 없는 그림자, 사형을 받은 죄수들의 숫자에 더해질 한 단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후략)” 그의 분노는 정당하다. 비록 죄를 저질렀다고는 해도 갚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 누구나 행복해야 할 화창한 아침에 죽음의 선고를 받아 결국 시체지기나 마찬가지인 노구의 신부에게 부드럽기만 할 뿐 어떤 따스함도 느껴지지 않는 위로를 받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하는 운명에 누가 한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듯 빅토르 위고는 형장에 끌려가기 몇 시간 전까지 뚝뚝 끊어지는 필체를 남긴 사형수의 마지막 수기로 작품을 마무리하며 5판부터는 “1829년 소설을 위한 서문”이라는 본편의 1/3 정도에 해당하는 긴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거센 주장을 덧붙인다. 여기서 빅토르 위고는 지금의 사형제도 폐지론자들이 내세우는 주요 주장의 근간이 될, “생명을 존중하야 하며 실수로 죄 없는 자에게 집행이 이뤄졌을 때 보상할 길이 없고,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사형제도가 없는 국가가 오히려 존치하는 국가보다 범죄율이 더 낮다”는 것을 사형제도 반대의 이유로서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강력하게 자리 잡은 과거 보복주의적인 사상에서 비추어 볼 때 이런 빅토르 위고의 소설과 주장을 비롯해 현재 사형제도 폐지론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히 혁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죄를 지은 자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응보원리가 범죄자의 인권은 물론 범죄 자체를 누구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 다함께 껴안고 가야 할 짐으로서 점차 그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유럽 각지의 혁명을 시작으로 민주주의의 발달, 인권사상의 신장 등과 함께 발달되어온 사형제도 폐지론의 주장에 대해 나는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선 국가에서 범죄를 처벌하는 가장 큰 목적 중의 하나는 다름 아닌 사회제도 및 질서유지를 위해서다. 단순히 복수심 충족만을 위한 것이라면 굳이 국가가 나설 것도 없이 중동지방의 문화처럼 가문의 손에 맡겨도 하등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법의 가장 큰 목적은 범죄의 예방과 범죄자의 교화가 되어야지, 처벌을 위한 형벌이 되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상론의 관점일 뿐, 반면 현실적인 사형제도 자체를 생각해 볼 때 나는 과연 사형폐지가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예를 들어 빅토르 위고의 ‘사형수 최후의 날’,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또 일본만화 코테가와 유아의 ‘사형수042’ 등을 다시 한 번 보자. 이들 작품은 전부 사형제도의 폐지를 사형수의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며 “이렇게 우리들과 다를 것 없이 단지 한 때 길을 잘못 들어 남들보다 좀 큰 죄를 진 사람들이 속죄할 기회조차 같지 못하고 생명과 행복을 빼앗겨서야 쓰겠냐”라고 주장하고 있다. 분명 감성적으로 마음을 뒤흔들고 일리가 있는 말이며 어쩌면 이것이 문제의 근본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보다 더한 흉악범에 대해서도 과연 이와 같은 주장이 통하는 것일까. 우발적이 아닌 재산 등을 빼앗기 위해 계획적으로 살인을 계획한 사람, 지존파 같은 무리들, 유영철 같은 연쇄살인범, 최근 대두가 되고 있는 사이코패스 등등…… 분명 세상에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자기 한 일에 대해 반성도 하지 않으며 가만히 놔두었을 경우 재차 또 그런 일을 저지를 범죄자들도 수두룩한 게 사실이다. 이런 사실에 대해 ‘사형수042’에서는 주인공과 다르게 선량하지도 않고, 난폭한 다른 사형수를 내세우며 그런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도모해보려고 하나 결국 작가역량상-아마 그 작가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답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땅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만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사형집행에는 반대하지만 사형제도 자체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이 다 그러하지만 법 또한 완벽하지가 않으며 어떤 구멍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번에 감상으로 썼던 존 그리샴의 “최후의 배심원”에서도 극악살인범인 패드깃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실질적으로 당시 미국에서 무기징역이란 이러저러한 사정 때문에 10년 정도면 갖가지 이유로 석방될 수 있었던 형이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풀려나게 되고 또 다른 문제의 도화선이 되게 된다. 말하자면 이처럼 시대상황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안전장치로서 사형제도 자체는 설령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보존하고 있는 것이 옳다고 본다. 또한 비록 그것이 주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나 보복심리의 충족 역시 형벌의 중요한 역할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안양 초등학생 살해범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족감을 느꼈는지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단순히 대중들의 호기심이나 만족감을 채워주는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설령 집행을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고’를 받았다는 자체가 범죄에 대한 경각심과 법원에 대한 신뢰감, 나아가서는 전국민적인 결속력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너무 고리타분하고 파시즘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일상, 나아가서는 사회안전을 보장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울타리와 상자가 치워졌을 때 얼마나 혼란스러울지에 대한 제대로 된 고찰 없이 단순히 촌스럽고 과거 악용된 적이 있는 사상(?)이라고 해서 배척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여러 통계 등에서 사형제도의 유무와 범죄율 증감은 관계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런 통계의 오류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며 무엇보다 살인은 우발적인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제도나 사상을 들더라도 반대편의 기회비용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수치상으로 사형제도의 존폐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있는 현실에서의 사형제도에 대한 고찰일 뿐, 점진적으로는 사형제도 폐지의 근본에 깔린 인본주의적, 사회공동책임적인 사상은 분명 틀린 주장이 아니고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점임에는 분명하다. 단순히, 그리고 폭력적으로 형벌을 보복의 수단으로 사용하던 오랜 전통을 깨고, 점차 예방과 치유에 목적을 두는 이런 획기적인 혁명의 바람은 분명 바람직한 방향으로 불고 있다고 생각하며 역자후기처럼 본작품은 “문학 강의실보다 지하철에서 더 많이 읽혔으면 좋겠고, 보편적 가치에 대해 토론하기보다는 이 땅에 가득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거리에서 읽혔으면 좋겠다.”는 말에 동의한다. 사형제도의 폐지를 논하든 찬성을 논하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며 그런 의미에서 본작품은 하나의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P.S : 재미있게도(?) 제가 이 소설과 역자후기를 읽은 건 지하철에서였습니다. 이런 것도 운명이라 하는 걸까요. > ![]() [안단테의 티스토리 블로그](클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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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빅토르 위고가 사형제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서 썼다고 하는 1인칭 시점의 소설이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끔직한 심정을 적고있고, 사형 폐지론적 주장이 가득한 소설. 끝까지 사형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있고, 단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형수의 심리적 변화만을 그리고 있다.
얼마전 뉴스에서 싱가폴에서 마약을 운반하는 어느 한 청년이 싱가폴에서 잡혀 사형을 집행하게 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호주내에서도 시위를 하고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각별한 노력을 쏟아붓고 있지만 싱가폴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데....
이 호주 청년은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라기에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한다.
이 책으로 인해 사형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무엇이 개인이 아닌 전체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제도란 말인가?
[인상깊은구절] 별게 아니라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편안한 최후라고? 죽음이 그런 식으로 아주 간단해졌다고 그들은 말한다. 아니! 6주 동안의 단말마의 고통과 하루종일 계속 된 헐떡거림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천천히 그리고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돌이킬 수 없는 하루동안의 불안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단두대에 이르는 이 참을수 없는 고통의 사다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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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컨대, 여전히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조금 전에는 두려웠다.
다행히 지금은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제목에서 뭔가 의미심장한 느낌을 받는다. 사형수 최후의 날. 제목대로 이 책의 내용은 사형 판결을 받은 한 젊은이가 감옥에 갇혔을 때부터, 실제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느낀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빅토르 위고라는, 레미제라블로 유명한 작가의 글이라서 더욱 관심을 가지고 뽑아 든 책이다. 아무도 나를 증오하지 않고, 모두 나를 동정하며, 그리고 모두 나를 구할 수 있는데도 그들은 네 아빠를 가지고 그렇게 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죽일 것이다. 마리, 넌 이것을 이해하겠니? 침착하게, 예식을 차려가며, 좋은 일을 하듯이 나를 죽인단다! 아! 이럴 수가! 이 외에도 위고는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사형제도가 갖는 부당함을 강변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해보게 되었다. 과연 사형이란 저자의 말처럼 어떠한 존재이유를 갖지 못하는 불합리한 형벌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