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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끝에 나의 시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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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썼으므로 내가 읽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 고민하는 이가 문학인이라 했었나. 그들이 맨처음 어떤 방식으로 사유하고 어떻게 생각을 만들어내고 무엇으로 쓰기 시작하는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종종 언문일치의 벽을 깨부수고 나온 문학을 만날 때에만 세상이 만들어낸 뻔한 거짓말을 알아채곤 했다. 그때부터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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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썼으므로 내가 읽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 고민하는 이가 문학인이라 했었나. 그들이 맨처음 어떤 방식으로 사유하고 어떻게 생각을 만들어내고 무엇으로 쓰기 시작하는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종종 언문일치의 벽을 깨부수고 나온 문학을 만날 때에만 세상이 만들어낸 뻔한 거짓말을 알아채곤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앞선 고민이 문학이라면, 문학이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좀 더 뒤엔 알 수 없는 감정이 찾아왔다. 의식의 제일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쓰라던 어느 작가의 말처럼 그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몰랐다. 흘러내린 절망을 추어올리면 그게 희망일 수도 있단 사실을.  

 

어릴 때부터 유난히 공상이 많은 아이였다. 꼬맹이때부터 말하고 느껴온 것들을 글로 썼다면 수만장은 됐을 것이고, 알맹이가 훌륭했다면 사유의 세계라 불러도 썩 괜찮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지루하게 읽히고 내겐 더없이 훌륭한 의식소설로 읽혔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는 수식을 빼고도 쿳시는 충분히 난해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의 출생과 시대가 말해주고, 나열하기에도 벅찬 작품들이 또 한 번 증명한다. 인기스타가 나오는 일본 드라마에 몇 시간 올인하다가 축구 한일전이 열릴 때면 [절대 이겨야 한다]를 부르짖는 이중성을 좀 더 고민해서 쿳시처럼 문학으로 표출시킬 수만 있다면 나도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달콤한 생각이 따랐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한계를 한계라고 인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일 뿐, 세상에 무한정이란 건 절대적으로 없는 영역인지도 모른다(여기서 '무한정'이란 <노팅힐>의 줄리아 로버츠 대사에서 따온 'indefinitely'가 아니다). <나라의 심장부에서>는 비교적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전달하는 주제가 명확하다. 전달하는 방식이나 문체가 난해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읽혀야 한다. 무척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아프리카의 황량한 사막에 핀 한 송이의 장미를 상상하며 읽었다. 오히려 척박한 땅의 질척함과 절망, 고독과 스산함 또 두려움이 제 존재를 더욱 또렷이 드러낸다. 등장인물은 몇 없다. 사유의 주인공 마그다와 그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자, 아버지 농장에서 일하는 하인 헨드릭과 그의 아내 안나가 벌이는 조용한 향연이다. 그런데 그조차도 어렵다. 마그다의 의식인지 실제인지 분간해가며 읽는 노력을 중간에 그만뒀을 정도다(어차피 알 수도 없었겠지만).

 

마그다의 독백은 존재의 정체성을 찾아 끊임없이 유영한다.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닮아있는 마그다와 헨드릭의 관계에서 언뜻 오리엔탈리즘을 대입해 읽고 분석 보고서를 썼던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떠올렸다. 메마른 식민의 땅이긴 해도 백인여자이자 농장주의 딸로 살아가는 일이 기댈 곳 없는 흑인남자 헨드릭보다 고통스럽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여자이기에 식민의 삶이 고달프다 말한다. 그녀는 억울한 것이다. 부당을 잘못됐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의 진수를 보여주는 문장을 곱씹는 일은 녹록지 않다. 뱉어냈다가 담고, 다시 밀어내고 또 주워담는 일련의 호흡은 쿳시의 문장이 아니라 마그다의 호흡이다. 의식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파도처럼 넘나드는 사유 속에서 그녀는 못 가는 곳이 없고, 안 가는 길이 없다. 욕망을 드러내는 일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고통의 밑바닥으로 침잠하는 일이란 걸 그녀에게서 배운다. 남자가 이런 감성, 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167.
(중략)
그는 내가 혼자 침대에서 뭘 하는지 얘기한다. 내가 밤에 집 안을 돌아다닌다고 그녀에게 얘기한다. 그는 내가 무슨 꿈을 꾸는지 얘기한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얘기한다. 나를 여자로 만들어주고 감싸줄 남자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내가 나이를 먹었어도 어린애라고, 늙은 어린애라고, 곰팡내 나는 체액으로 가득한 사악한 늙은 어린애라고 얘기한다. 그는 누군가가 나를 여자로 만들어줘야 한다고, 누군가가 내 몸에 구멍을 내서 낡은 체액을 빼줘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는 그녀에게 묻는다. 그 일을 해줄 사람이, 밤중에 창문으로 기어올라 그녀 옆에 누워 그녀를 여자로 만들어주고 새벽녘에 빠져나올 사람이 나여야 할까? 당신 생각에는 내가 그렇게 하도록 그녀가 내버려둘 것 같아? 그냥 꿈인 척하고 내버려둘까? 아니면 완력을 써야 할까? 내가 그녀의 앙상은 무릎을 벌릴 수 있을까? 그녀는 허둥대면서 소리를 지를까? 내가 그녀의 입을 닥치게 해야 할까? 그녀는 끝까지 가죽처럼 단단하고 마르고 질길까? 내가 그 건조한 구멍으로 강제로 들어가면 결국 바이스 같은 뼈에 으깨져 흐물흐물해질까? 혹은 결국 그녀도 여자가 부드럽듯이, 당신이 부드럽듯이 여기가 부드러울까? 안나는 어둠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남자한테 달라붙는다. (pp.165~166)   
 
   


 

 

p.s. 그때 생각이 났다. 아주 추운 겨울 비엔나에 있었다. 해가 빨리 떨어지는 우기여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가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쩌면 시내마다 연결된 트램을 타고 돌아다니느라 좀 여유로웠는지도 모르겠다. 벨베데레 궁전에 들어갔다. 클림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클림트 옆의 쉴레 그림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발걸음을 멈췄다. 그때 나는 이상한 나라로 빨려들어가는 중의 앨리스 같았을 거라고 훗날 생각했다. 책을 덮고난 느낌이 딱 그때와 같다.

s*****d 2011.01.29.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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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과 소통을 위한 절규 혹은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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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대체 어디까지가 실제 벌어진 일이고, 또 무엇이 극단적 고립에서 비롯된 환상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심지어 주인공인 마그다조차 자신이 풀어내고 있는 얘기의 리얼리티를 신뢰하지 못할 정도이니. 그것은 진짜 이야기인지 모른다. 혹은 어쩌면 나는 내내 착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는 결국 죽지 않았는지 모른다.(234) 하지만 현실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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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대체 어디까지가 실제 벌어진 일이고, 또 무엇이 극단적 고립에서 비롯된 환상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심지어 주인공인 마그다조차 자신이 풀어내고 있는 얘기의 리얼리티를 신뢰하지 못할 정도이니.


그것은 진짜 이야기인지 모른다. 혹은 어쩌면 나는 내내 착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아버지는 결국 죽지 않았는지 모른다.(234)


하지만 현실이든 착각이 빚어낸 가상적 픽션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싶다. 이 모든 일들은 마그다의 내면이 오롯이 투영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굳이 분별할 필요가 없을 듯 하기에 말이다. 그녀의 심경을 읽는데 환상이면 어떻고 실상이면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그다는 철저하게 고립된 외톨이였다. 외견상 여럿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으로 교감하며 의사와 감정을 긴밀하게 나눌 만큼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글거리는 내면을 지니고 있었다. 본원적인 성향이 자존감을 느끼며 타인과 의미 있게 소통할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사회적 자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충족되지 않는 현실에 갈급해 할밖에. 하여 그 목마름을 해소하려고 신분을 넘어 헨드릭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또 아버지라는 권위를 제거해고자 나서는 등 일탈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고. 아니 그런 것들을 꿈꾸었을 수도 있었고.


결국 나는 혼자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만약 내게 미지의 곳 한복판에 있는 펠트 한 가운데에서 허리까지 묻혀 살라는 운명이 주어졌다면,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228)


밤이면 밤마다 생겨나는 감정들을 고갈될 때까지 세도록 한 기계도 아니다. 내게는 자리를 바꿔 넣을 조약돌, 청소할 방, 이리저리 옮길 가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내게는 얘기할 수 있는 형제나 아버지, 어머니가 필요하다. 역사와 문화가 필요하다. 희망과 포부가 필요하다. 행복해지기 전에 도덕의식과 목적론이 필요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나 혼자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다시 혼자다. 역사적 현재 속에서 혼자다. 헨드릭도 갔고 안나도 그를 따라갔다.(229)


생래적으로 혼자임을 못 견뎌하던 마그다는 결국 자신의 처지가 밀폐된 공간에 옭죄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는 그 질곡에 저항하게 된다.


내가 스스로의 역사를 만든 것은 진정한 억압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내 아버지를 섬기고 하녀들에게 명령을 하고 집안일을 꾸려가며 세월을 보내는 삶의 무료함에 대한 반발이다.(245)


집행관에게 철사통을 들려 이곳으로 보내 농장 문들을 봉해버리게 한 다음 나를 그들의 마음에서 몰아내버렸는지 모른다. 사람은 좁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넓은 공간에도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는 이미 끝나버렸고(233)


그리고 소통을, 대화를 나눌 상대를 그녀는 간절히 원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이다.(240)


그러나 현실에선 도무지 이룰 수 없다는 걸 안 그녀는 결국 하늘을 올려다보고 만다. 결국 마지막엔 환청까지 들리고, 그 환청을 불러일으킨 가상적인 이들과 소통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와 교감하는 가운데 마그다는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극단적 행동의 원인을 서서히 파악하게도 되었고.


목소리들이 말한다. 외부의 적과 저항이 전혀 없고 숨 막히는 협소함과 규칙에 갇히면 사람은 결국 모험으로 돌아서는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그들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그들은 내가 무료해서 나의 삶을 허구로 만들었으며 나를 비난한다. 그들은 내가 전략적으로 스스로를 실제 나보다 더 폭력적이고 더 변화가 많고, 더 고통스러워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며 나를 비난한다. 마치 내가 책을 읽듯 나 자신을 읽다가 재미없어지자 옆으로 밀치고 스스로를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처럼.(244)


모험적으로 돌아선 선택이 자신을 옭죄는 구조적 질곡, 가상적인 적의 대명사격인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이라곤 없는 궁벽한 상황이 마그다의 고뇌와 분노, 그리고 일탈을 낳은 근원이었던 것이다.


예스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던 노예에게 노라는 말 외엔 하지 않았고 그것이 내 모든 고뇌의 출발점이었다.(245)


그녀는 결국 하늘과라도 소통하고자 하는 간절한 몸짓으로 주변의 돌을 쌓아 스페인어로 자신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대상에게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그녀만의 언어로 자신의 울분을, 진솔한 속마음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나는 세상에 정의가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하늘에서 온 말들은 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아지게 한다. 나는 보편적인 것에 질렸다. 나는 진실에 이르기 전에 죽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진실을 원한다. 하지만 결말을 훨씬 더 원한다.(249)


돌을 12피트 높이로 쌓아 퀴에로 운 오트르(다른 사람이 필요해요.) 라고 썼으며 다시 손 이솔라도(나는 외로워요)라고 썼다.(253)


아버지에게, 헨드릭에게 아니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현실과 환상이 일관성 없게 교차되고 내러티브의 시점도 과거인지 현재인지 애매하기만 한 이 난해한 작품을 쓴 쿳시는 결국 마그다의 얘기를 통해 궁벽한 사막, 고립된 외톨이의 지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인간미가 넘치는 이들이 자존감을 느끼며 아름답게 소통하는 곳을 지향하지 않았나 싶다. 그곳은 신분의 벽도 없고 아버지와 딸의 수직적 권위 같은 것도 사라져 누구나 존중받는 사랑의 공동체이기에 좌절하고 절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마그다처럼 정서적 불안정으로 인해 일탈을 꿈꾸거나 실행하는 극단적인 선택은 시도조차 않게 될 것이고. 그런 세계를 그려보이고자 쿳시는 착각 속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마그다의 얘기를 빌어온 게 아닐까.


헨드릭과 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 때문에 망가진 걸까? 혹은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잘못됐고, 만약 내가 더 부드러운 형태의 친밀감을 향해 차츰차츰 나아가는 길을 찾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었을까? 혹은 불과 얼음의 사막은 우유와 꿀의 나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연옥일까?(226쪽)

a*****7 2011.01.2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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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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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작고 얇은 책이다. 이 사이즈 이 두께의 책으로 필립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전락>, 토리 모리슨의 <술라>가 있다. 물론 더 있겠지만 내가 읽었고 지금 생각나는 책들이 이 정도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과 달리 책을 읽는 것이 녹록치 않은 생활이라 두께에 늘 예민한데, 이정도의 얇기라면 부담없이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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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작고 얇은 책이다. 이 사이즈 이 두께의 책으로 필립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전락>, 토리 모리슨의 <술라>가 있다. 물론 더 있겠지만 내가 읽었고 지금 생각나는 책들이 이 정도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과 달리 책을 읽는 것이 녹록치 않은 생활이라 두께에 늘 예민한데, 이정도의 얇기라면 부담없이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책들은 물론 완전 강추하고 싶은 책들이다. 재미와 두께를 다 잡았다고나 할까. 존 쿳시의 <나라의 심장부에서>는 쉬이 경험할 수 없는 독서경험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일단 소설의 배경이 남아공의 농장이고, 주인공은 그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백인 여성이다. 번호를 매긴 단편적인 글들의 모음인 이 책은 그냥 읽어야 한다. 구성을 파악하려 한다거나, 인과관계를 따지려 들면 진도를 나갈 수 없다. 그냥 주인공에 빙의되어 시를 읊조리듯 죽 따라 나가다 보면 문장의 아름다움에 몸을 떨게 된다. 읽으면 읽을 수록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스포가 될 까봐 더 이상의 언급은 안하겠지만, 존 쿳시의 <추락>에 앞서 읽으면 쿳시에게 입문하게 된다.

c*****5 2016.12.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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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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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존 쿳시의 작품 <나라의 심장부에서>. 흑인과 백인이 절재적으로 공존할 수 없었던 그때가 배경이다. 외로운 한 소녀. 교육도 잘 받고 백인이고 어느 정도의 부도 누리는 그녀는 친구도 없었고 외로움에 떨어야만 했다. 아빠가 있었지만 그녀에게 별 관심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놀아야 했다. 하인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백인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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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존 쿳시의 작품 <나라의 심장부에서>. 흑인과 백인이 절재적으로 공존할 수 없었던 그때가 배경이다.
외로운 한 소녀. 교육도 잘 받고 백인이고 어느 정도의 부도 누리는 그녀는 친구도 없었고 외로움에 떨어야만 했다. 아빠가 있었지만 그녀에게 별 관심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놀아야 했다. 하인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백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빠가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행한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이야기는 펼쳐지지만 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보여주진 않는다. 그녀, 외로운 그 소녀의 시야로 모든 것을 작가 대신 말하고 있다. 피부에 따라 지배하는 모순, 억압의 역사를 백인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스스로가 친 울타리에 갇혀 빠져 나가지도 못하고 아무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이 아이러니적인 상황을 그녀, 작가가 깨닫게 해준다.

남아공에 대해 사람들은 단순히 피부가 까만, 아프리카보다 조금 더 잘사는 나라로 알고 있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길 바란다. 어떤 역사가 숨쉬고 있었는지....

k******o 2011.03.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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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 문학의 정수 [나라의 심장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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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남아프리카 공화국 황야에 한 여자가 있다.     나는 행복한 촌뜨기가 아니다. 나는 불행하고 검은 처녀이며, 내 이야기는 내 이야기다. 설령 그것이 그것의 의미와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행복한 삶을 알지 못하는 따분하고 검고 맹목적이고 어리석고 비참한 이야기일지라도. 나는 나다. 성격은 운명이다. 역사는 신이다. 에잇, 에잇, 에잇.     아버지로부터는 사랑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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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남아프리카 공화국 황야에 한 여자가 있다.

 

 

나는 행복한 촌뜨기가 아니다. 나는 불행하고 검은 처녀이며, 내 이야기는 내 이야기다. 설령 그것이 그것의 의미와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행복한 삶을 알지 못하는 따분하고 검고 맹목적이고 어리석고 비참한 이야기일지라도. 나는 나다. 성격은 운명이다. 역사는 신이다. 에잇, 에잇, 에잇.

 

 

아버지로부터는 사랑받지 못했다. 흑인들과 함께 자랐으나 그들과 친하지는 못했다. 백인. 주인이기에 교육을 받고 교양을 가졌다. 어쩌면 백인인 그녀가 주인으로 군림하는 것, 백인인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친구가 없는 것, 이 모든 요소들이 어쩌면 모순적으로 어쩌면 당연하게 그녀의 비뚤어진 성격을 형성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내 내면의 독백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짧은 문장들(짧은 단상들) 속에 들어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안쓰럽고 안타깝다. 어느샌가 하인들이 없으면 생활을 기댈 곳 없어 그들에게 의지하는 그녀의 모습은 개인적으로, 작게 보면 한 여인의 고독으로부터 발원한 것이지만 크게 본다면 아프리카의 백인과 흑인의 관계를 비트는 이야기의 틀이다.

 

 

어쩌면 내가 시간을, 코르크마개나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나를 싣고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강물로 생각한 것은 잘못일지 모른다. 혹은 어쩌면 시간은 한동안 땅 위에서 흐르다가, 다시 지하에서 한동안 흐르다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나타나 지금은 빛 속에서 흐르고, 나도 함께 흐르고 있는지 모른다.

 

 

책 전체를 흐르며 압도하는 정서는 그녀의 고독이다. 관계에의 부재는 고독으로 이어지고, 이 고독은 어쩐지 비뚤어진 방식의 타인과의 관계를 촉발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은 그녀대로의 방식이고, 어쩌면 실제인지 상상인지도 모를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독자인 나는 그녀가 이해됨을 느낀다. 그 나라의 심장부에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홀로 바람 맞으며 서 있는 그녀를. 아프리카에서 백인이며 주인이자 손님으로 태어난 여성의 정체성의 혼란을.

 

 

나는 어렸을 때 이후로 달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주먹을 움켜쥐고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강바닥의 회색 모래 위를 힘들게 달리고 있다. 나는 전적으로 내 임무에 열중하고 있다. 생각 없이 하는 행동, 재앙이 덮치자 공중으로 튀어오르는 90파운드짜리 동물.

 

 

비교적 존 쿳시의 초기작으로 일컬어지는 이 소설은 무게감있고 아름답게 그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 형식은 초현실주의적이지만 내용은 현실에 기반하며 신랄하기까지 하다. 아프리카 땅에 침입자로, 주인으로 군림하는 백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위치를 통렬하게 주목하는 소설이다. 그렇기에 이 이후 나온 책들의 근원을 <나라의 심장부에서>라고 보는 건 아닐까.

 

 

2003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존 쿳시를 알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 책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펼쳐들 일이다.

p*********y 2010.11.1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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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묻고 나는 답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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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외딴 곳에서 살아가는 처녀 마그다...그녀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하인들과 살아가고 있다.그녀는 고민한다. 할 수 밖에 없다.아버지는 그녀를 하인처럼 대한다. 마치 흑인처럼. 흑인 하인들을 그녀를 어려워한다.그들도 그녀를 피한다. 그녀는... 혼란스럽다.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다.실존의 문제, 그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만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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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외딴 곳에서 살아가는 처녀 마그다...

그녀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하인들과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고민한다. 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는 그녀를 하인처럼 대한다. 마치 흑인처럼.


흑인 하인들을 그녀를 어려워한다.
그들도 그녀를 피한다.


그녀는... 혼란스럽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다.

실존의 문제, 그 앞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만난 존 쿳시의 소설이었다.

진지하면서도 진중한 물음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소설이 묻고 나는 답하려 하고 있다.

b****n 2011.03.1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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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가장 고립된 장소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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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부재였다. 나는 이 집의 한복판에 있는 여성적인 온기가 아니라 제로이고 영이며, 그것을 향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진공이고, 복도에서 소용돌이치는 싸늘한 바람처럼 숨을 죽인 희끄무레한 혼란이었다. 무시당해 복수심에 불타는.(p.8) 마그다의 죄라면 남아공의 네덜란드계 백인지주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일 테다. 끝내 아들을 낳아주지 못한 어머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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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부재였다. 나는 이 집의 한복판에 있는 여성적인 온기가 아니라 제로이고 영이며, 그것을 향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진공이고, 복도에서 소용돌이치는 싸늘한 바람처럼 숨을 죽인 희끄무레한 혼란이었다. 무시당해 복수심에 불타는.(p.8)


마그다의 죄라면 남아공의 네덜란드계 백인지주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일 테다. 끝내 아들을 낳아주지 못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마그다는 하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부재'이자 '제로'인 채로 자라나 일평생 결핍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비대한 욕망에 시달리는 노처녀가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풍만하고 교활한 새어머니를 데려왔을 때 음습한 어둠 속에서 도끼를 휘두르게 되는데-


그는 집에 새 부인을 데려오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그의 딸이고, 만약 나쁜 말들을 거둬들인다면 착한 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실패에 대해, 평생 실직적인 어둠에 갇혀 있어 구애의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실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나는 그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뛴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움직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다.(p.35)


새 부인을 데려온 적이 없는 아버지와 여전히 유명무실한 존재감의 마그다가 공존하는 시공을 마주하면서, 이 이야기가 온전히 마그다 혼자서 구축해나가는 고립의 역사라는 것이 밝혀진다. 새 부인 대신 아버지가 침대로 끌어들이는 것은 하인 헨드릭의 새 색시 안나이다. 애욕에 찬 날들을 위해 농장의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아버지의 행동의 끝에는 아버지의 흑인 정부를 위해 수발을 드는 처지로 전락해버릴 마그다가 덩그러니 남는다. 도끼 대신 무거운 사냥총을 아버지의 침실 창문으로 쏘아버린 것은 과연 일어난 일인가, 다시 마그다가 창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광기의 역사인 것인가.


우리 중에 누가 짐승일까? 나의 이야기는 이야기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질문을 해야 하는 순간을 연기할 뿐이다. 덤불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내가 으르렁 거리는 소리일까? 공간이 나로부터 확장되어 지구의 네 구석 모두로 퍼져나가는 나라의 심장부에는 나를 막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미친 듯이 날뛰고 무절제한 내가 두려운 걸까?(p.97)


아버지를 부재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나니, 농장에서의 권력구도는 순식간에 전복되어버린다. 체불한 임금대신 마그다의 몸을 강탈하는 헨드릭에게 오히려 친근한 유대감을 애걸하기 시작하는 양상에까지 이르면, 일평생 잊힌 존재였던 여자가 어떻게 또다시 잊히고 철저하게 고립되어 가는지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하인인 채로 마지못해 권력의 우위의 점하게 되다가 주인살해오명이 두려워 헨드릭과 안나가 도주하고나자 마그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공허한 나날들뿐이다. 세상의 가장 외진 곳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자아내는 일 말고는 남은 것이 없는 여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온통 모순에 차고, 자학의 광기로 넘실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내게는 얘기할 수 있는 형제나 아버지, 어머니가 필요하다. 역사와 문화가 필요하다. 희망과 포부가 필요하다. 행복해지기 전에 도덕의식과 목적론이 필요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나는 나 혼자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다시 혼자다. 역사적 현재 속에서 혼자다.(p.229)


존 쿳시의 두 번째 소설인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으려는 순간부터 심신을 옥죄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또 어떤 문장들로 광막함을 자아낼 것인지, 자진해서 개미지옥으로 몸을 던지는 것 마냥 철저하게 몰아붙이는 날 선 문맥은 신경증의 향연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의아할 지경이다. 남아공 식민지배의 역사 속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의 형상을 그네들이 정착해 만든 '아프리칸서스'로 전하는 데 인색했던 목가적 전통의 기존문단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덜' 식민지적인 언어인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해왔던 쿳시가 모국어인 아프리칸서스를 결합해서 탄생시킨 이 소설은 식민지의 온상인 시골농장의 야만적인 본모습을 극렬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결국은 철저하게 자신이 구축한 역사 '나라의 심장부'말고는 가질 수 없던 마그다의 참상을 독백으로 전하면서 세상 어느 곳보다 외지고 고독한 변방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이다.(p.240)



a******i 2011.01.2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존 쿠시의 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쿠시의 나라의 심장부에서" 내용보기
책을 읽을때마다의 느낌은 모두 제각각이다. 즐거움을 느낄때가 있는가하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상을 들여다보는듯한 생각을 가지게 될때도 있고 미쳐 알지못한 지식을 알아가는 쾌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면에서 이 책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고독과 외로움이 가져다준 성집착,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부른 살인과 하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걸까? 게다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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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때마다의 느낌은 모두 제각각이다. 즐거움을 느낄때가 있는가하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상을 들여다보는듯한 생각을 가지게 될때도 있고 미쳐 알지못한 지식을 알아가는 쾌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으니....

그런면에서 이 책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고독과 외로움이 가져다준 성집착,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부른 살인과 하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걸까?

게다가 실제와 상상속 이야기가 얽혀들고 있음에 내 머리는 마구마구 헝클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고나니 무언가 남겨지는것이있다. 가족간의 의미와 단절된 사회속에서 한 인간이 황페 해져가는 상황들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것, 짓밟힌다는것이 물리적인 제약만이 아님을.....

문학적 정신분석이란 말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이야기엔 외부적 상황들로 고립되어버린 영혼이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기위해 시도한 일에 묶인채 다시금 고립되어버리는 아픔으로 다가온다.   

 

백인소녀 마그다는 아프리카의 외딴마을에 자리한 농가에서 살아간다. 그녀에게 가족은 아버지뿐으로 또다른 사람이라봐야 그 둘을 돌보는 하인들이 있을뿐이다. 그들은 아프리카 오지라고하는 황폐한 식민지 땅에서 좀더 행복해지는 삶을 꿈꾸었겠지만 그렇게 단절되어버린 생활은 그들에게 행복을 주기는 커녕 외로움에 지친나머지 성에 탐닉해가는 일상을 주었을뿐이었다.

 

원하는 아들을 낳지도 못한채 죽어버린 마그다의 엄마, 그 딸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느꼈던 아버지, 그 사이에서 숙명처럼 외로움을 떠 안아야만했던 마그다는 어느날 하인 헨드릭의 아내인 안나까지 침실로 끌어들이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채 총을 쏜다.  그리곤 헨드릭과 그의 아내이자 그녀의 아버지의 정부인 안나는 새로운 인간관게를 형성해간다. 그속에서도 그녀는 자유롭지가 못하다. 스스로 못생겼다라는 강박관념사로잡힌채 세상도 모르고 인간관계도 모르고 생존의 기본조차 해결할수 없다라는 나약함이 그녀를 하인들에게 매달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조차 나의 주관적인 판단일뿐 이야기는 내내 마그다의 생각속에서만 존재했다. 마치 세상의 하직에 앞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듯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일뿐이었다. 모든것이 가능했던 아버지와 헨드릭의 힘, 스스로를 우월하게 만들었던 안나의 미모, 그 무엇도 갖추지 못한 자신에 대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혔던 마그다의 영혼은 그렇게 끝까지 고독했다. 그렇게 타인과의 소통이 원활치 못한채 단절된 삶속에서 끝까지 외로웠던 마그다를 보면서 그 세상은 백인과 흑인이라는차이, 식민지와 그 지배자라는 사회적 현상이 만들어낸 편견이었을까? 아님 한 개인의 문제인걸까에 심취한채 난 여전히 인간 본질의 문제에대한 심오한 생각속에 빠져든다. 



d****0 2011.01.19.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결코 녹록치 않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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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쿳시의 작품은『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를 읽은 게 전부다. 그 한 권의 책으로 존 쿳시라는 작가는 무척 독특한 작가로 인식되었다. 두 이야기를 한꺼번에 펼쳐놓는 구성에 다른 작품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두 번째로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와는 또 다른 구성의 이야기라 저자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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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쿳시의 작품은『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를 읽은 게 전부다. 그 한 권의 책으로 존 쿳시라는 작가는 무척 독특한 작가로 인식되었다. 두 이야기를 한꺼번에 펼쳐놓는 구성에 다른 작품도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두 번째로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와는 또 다른 구성의 이야기라 저자의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야기가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독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 다른 작품도 궁금하게 만들었다. 아마 이 작품을 읽고『추락』을 구매한 것 같은데 아직도 책장에 묵히고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작가인 것 같다.

  소설 속 배경과 주인공 마그다를 보고 있으면 인간이 얼마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또 얼마나 빠르게 순응해 가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했다. 남아프리카의 황량한 농가에서 아버지와 흑인 하인들과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는 정작 주인으로써의 우월감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다. 흑인 하인들과 별다를 바 없는 삶이 그녀에게 주어졌고 그녀는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보다 그냥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지만 아버지는 딸이라기보다 하인 취급하며 그녀에게 상처만 주고 있었고 그렇게 서로에게 어긋난 관계가 집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차라리 결혼을 해서 분가를 했다면 적어도 마그다 그녀의 삶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 고통스러운 집에서 그 고통을 스스로 자초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벌어진 일들, 그녀가 행한 일들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폭력성은 늘 잠재해 있지만 언제든지 순식간에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행동했을 때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럼에도 정죄 받지 못한 채 혼자 남겨졌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그다도 하인 헨드릭에게 겁탈도 당하고 그들 부부에게 모욕을 당했으면서도 어떠한 조취도 취할 수 없다. 그녀가 아버지를 죽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기댈 사람이라곤 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버지였다. 헨드릭의 아내를 침대로 끌어들였고 딸인 마그다를 딸 취급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총으로 쏜 사람이 마그다가 되었고 그 비극은 현실과 환상의 몽롱한 그녀의 의식 가운데서 밝혀졌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이 모든 이야기를 읽어내는데 결코 녹록했던 건 아니다. 친절하게 독자에게 안내해주는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딴생각을 할라치면 금세 딴 길로 새버리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간추려 본 줄거리만 보아도 충분히 우울한데도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이다. 끄트머리에 가서는 마그다가 현실 속에 살고 있는지 아니면 환상속의 이야기를 현실로 끌어당기고 있는지 구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비극적이고 쓸쓸했다. 혼자서 고립된 공간에서 늙어가고 있었고 저렇게 있다간 정신을 놓아버리진 않을까 걱정까지 될 정도였다. 그 모든 일들이 일어났는데 마그다는 혼자서 감당하면서 우뚝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삶의 끈질긴 인연과 동시에 착잡하기만 했다.

  꾹꾹 눌러온 인간 본연의 어두운 면이 뻥하고 폭발한 듯한 느낌이 든다. 무언가에 억눌려오다 모든 것을 폭발시켰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실을 마주하면서 과연 이 삶을 지속시켜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더불어 한 번뿐인 인생이라고 하는,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허리를 곧추 세우게 만들기도 했다.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과연 나는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는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내가 지나온 과정도 중요하지만 앞으로의 행보가 더 중요함에도 자꾸 뒤돌아보는 건 이미 지나온 내 삶에 아쉬움이 많았나 보다.

s****m 2015.01.2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 독백 , 그 맥락의 중심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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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정확히 삼등분으로 잘라 읽었다. 문단마다 이어진 숫자를 따라 80페이지 가량을 넘겼고, 망설임없이 마지막 페이지로 넘겨 옮긴이의 말을 읽고는 뒷장부터 앞으로 80페이지를 읽었으며 마지막으로, 책의 딱 절반부분을 갈라 앞, 뒤 순서없이 마구잡이로 읽었다. 여자의 끊임없는 망상과 고독에 찬 독백, 부리는 하인에 의한 성폭행과 부적절한 관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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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정확히 삼등분으로 잘라 읽었다. 문단마다 이어진 숫자를 따라 80페이지 가량을 넘겼고, 망설임없이 마지막 페이지로 넘겨 옮긴이의 말을 읽고는 뒷장부터 앞으로 80페이지를 읽었으며 마지막으로, 책의 딱 절반부분을 갈라 앞, 뒤 순서없이 마구잡이로 읽었다. 여자의 끊임없는 망상과 고독에 찬 독백, 부리는 하인에 의한 성폭행과 부적절한 관계에 선 아버지를 향한 총알까지 모두 여자의 독백을 통해 들으며 읽었다. 고백컨데, 이런식의 갑갑하기만 한 문자배열식의 글은 진저리가 난다. 한 작가에게 두 번은 주지 않는 부커상을 두 번 받았다는 명성조차도 잔뜩 힘이 들어간 내 눈의 긴장을 풀지는 못했다. 책을 펼칠때마다 '그래, 그래도 한 번 부딪혀 보자' 라는 식의 각오를 세우고는 읽기 버거운 책을 읽는 첫 번째 방법을 나는 시도한거다. 앞서 말했듯 마구잡이로 읽기, 그것이다. 국외소설은 좀처럼 읽히지가 않는데, 갑작스런 미션과 함께 받아 든 이 책은 훑어보는 단계에서 부터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읽다가 막히는 종종 기이하게도 로맹 가리를 떠올리기도 하고 다자이 오사무를 오버랩시키기도 하면서 자기 세뇌까지 하며 읽었으니 책장을 모두 넘겼을때는 왈칵, 하니 긴 숨을 뱉어냈다.

 

 여자의 일생이라고 해도 될런지. 끊이없이 이어지던 여자의 과대망상과 환멸에 사로잡힌 여자의 독백은 흥미로웠던 반면 꽤나 괴팍했다. 순간, 미스터리를 읽는 기분인가 싶으면 여자의 처지가 안타까워 마음을 쓸어내릴라 치다가도 다시금 미간을 한껏 좁히게 된다. 옮긴이의 말을 토대로 하자면 인종의 차별과 식민지 시대를 미화시킨 작품이라는데, 좀 더 개인적으로 솔직해지자면 그 어느 부분에서도 주인공들의 비애를 눈치 챌 수 없었다. 어쩌면, 옮긴이의 말 처럼 너무도 완벽하게 미화된 작품으로서, 그들의 애증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도 모를일이다. 단, 내가 느꼈던 건 글이 굉장히 절제적이고 단단하다는 거였다. 문체 자체도 그러했지만 헨드릭의 말투에서는 가장 진득하게 묻어났음은 물론, 아버지의 절도적인 언행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질만큼 굉장히 둔탁하고 강한 메리트였다고 볼 수 있다. 페이지를 쉽사리 넘길 수 없었던 점과 더불어 같은 문단을 몇 차례 반복하여 읽어내려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가 하면, 어처구니없고 돌연한 행동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나라의 심장부에서」의 책은 그저 어떤 시대, 어떤 인물, 어떤 풍경을 막연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다. 여자의 보이지않는 내면의 창을 누군가가 걷어 올려주는 것으로서 제2의 삶과 구원에 대한 손짓이다. 비록 마구잡이식의 작품에 대한 가당찮은 독서였다 할지언정, 결코 여자의 목소리를 쉬이 흘려보낸 것이 아니다. 여자의 독백에서 시작해 여자의 독백이 끝이 아니듯, 독백은 또 다른 독백을 낳는다. 이야기의 흐름에 발을 맞출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맥을 끊고 읽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그녀의 공간속에서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비법이 아니었나싶다. 여자의 갈망, 혹은 구원이 사랑이었는가 싶다가도 결국, 끝은 고독으로 남겨지는 것은 그녀의 삶이 아닌 여자다운 혹은 여자의 삶을 그린 하나의 자화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한 번더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 할 책임을 안다. 여자의 형성과 고독으로 이루어진 여자의 생이 조금 더 마른 가슴으로 차오를때즈음, 망설임없이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을 생각이다. 첫 시작부터 동의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여자의 와해 된 생활을 나 역시 겪을테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구태여 찾아 읽지 않아도 내 몸이, 내 가슴 밑바닥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수 많은 말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그을려 타닥타닥 타들어갈지도 모를일. 그저, 형체의 중심부를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g****a 2011.01.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