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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소개글을 보긴 했지만 대충 가진 나의 편협하고도 의례적인 생각은, 도감류이거나 그림을 그리는 분이시니 세밀화 비슷한 류의 도감형식일 거라고 지레 짐작을 하고 있었다. 몇몇만 들꽃을 바라본 느낌 정도를 써내려간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건 정말 나의 기우였다. 작가에게 처음 가진 내 생각에 대해 미안할 정도. 머리말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고도 남았다. 들어보지 못한 많은 식물들의 이름들은 물론이요, 그 식물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고스란히 그리고 솔직하게 드러나서 나도 모르게 책을 꼭 쥐게 되었으니까. ![]() 다닥냉이 부분의 그림이다. 이 그림에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화식물과 이주 노동자를 비유하는 표현이 이렇게나 적절하다니!!
사실, 책의 목차만 보고는 내가 찍어댄 사진들만 떠올렸더랬다. 나도 식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치기어린 마음, 인정받고 싶은 나의 감정을 마구 드러내고 싶었다. 폴더를 만들고 대충 사진을 추려내고 다시 책을 읽어 내면서 감정이 다스려지고 있음을 느꼈다. 뭔가를 잘 해야한다는, 잘 하고 싶어하는 마음들. 잘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 이렇게 나열하고 있는 것도 좀 유치하긴 하지만 사실은 칭찬받고 싶어하는, 제대로 된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지 싶다. -요즘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감정에 대해 집중하다 보니 늘 나의 감정에 대한 표현을 아끼지 않게 된다.
눈여겨보지 않는 식물들, 들꽃들,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건, 주어진 자극에게만 반응하는 의식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턴가 가끔 찍는 사진의 대상이 바껴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과 행동에 주목을 하여서 늘 아이들 모습과 보이지 않는 뒷모습 등을 찍어댔는데 3~4년 전부터는 보이지 않는 언어를 나도 모르게 찍고 있었던 것이다. 봄꽃에 대한 나의 느낌이 언제부턴가 떠오를 때가 있었는데, 봄꽃이 피어오름에 난 참 많이 안도했었다. ![]() 도심 속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화. 잎도 없이 꽃이 먼저 피는 봄꽃의 특성 그대로 추위를 이겨낸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골목을 지나다가 만나기도 하고 무심히 서 있다가 만나기도 한 봄꽃. 추운 겨울을 이겨낸 저 꽃에 얼마나 감사하고 힘을 냈었는지 모른다. 겨울마다 나도 모르게 느끼는 경기의 한파와 연말과 명절을 보내며 구멍을 뚫린 지갑으로 아이의 개학 혹은 입학을 맞이하는 우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듯, 저 꽃잎에 나는 기운을 많이 얻었었다. 그러고 보니 매화꽃을 제대로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는 듯하다. 열매에만 관심이 있었지, 열매를 맺기 위해 이루어지는 자연의 흐름에 대해선 말로만, 책으로만 익혔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에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무심히 넘기는 것에 대해 이젠 바라볼 때가 되었다는 것인가. 그런가 보다.
또 겨울이 왔다. 연료비에 움츠러드는 주부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겨울도 같이 맞이하는 건 아닐까 싶어 조바심이 났었는데 한 권의 책으로 나보다 더 움츠러들어있는 또 한 켠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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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자기한 그림과 색감 때문에 그냥 바라만 봐도 미소가 나오게 하는 책입니다. 사이즈는 일반 도서책보다 세로 사이즈가 작아서 약간 아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들꽃 이야기'라는 제목이 그냥 마음에 드네요.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책 제목이 '들꽃'과 비슷해서인듯합니다. 어릴때는 잘 몰랐었는데, 지금은 어린시절 시골에 살았던 것에 참 감사하고 있어요. 물론 그 덕분에 지금도 까무잡잡한 피부는 살짝 마음에 들지 않지만^^;; 좀 더 풍요로운 감성을 배울수 있었던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어릴적부터 식물, 곤충, 동물등에 좀 더 관심이 많았던것 같습니다. ![]() 아직도 이름 모르는 들꽃들이 많아요. 도시 구석 구석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들꽃들을 보면서 희망을 보는것 같습니다. 이름을 모를때는 그냥 잡초라 불리우던 것들이, 이름을 아는 순간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 서 이 책을 읽고 싶었어요.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혹 아이들이 이름을 물어볼때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수 있는 저를 바라기도 하면서 말이지요. ![]() 처음에는 이 책이 세밀화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판화 작업으로 인해 좀 더 단순하게 구성된 삽화였습니다. 단순하다지만 그 특징만을 잘 잡아서 실제 식물들을 만나면 알수 있을것 같습니다. (하지만 100% 구분하기엔 제가 좀 많이 부족한듯 합니다.^^) 책 첫 페이지는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접하는 가로수인 '플라타너스'예요. '양버즘나무'라는 우리말 이름이 있는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그것만 처음 안것이 아닙니다. 항상 가로수의 꽃가루 때문에 불평하던 저는 9가지의 장점을 볼줄 모르고 1가지 단점만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 강우근님의 글은 저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하나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볼수 있는 눈을 말이지요. ![]() 한국적인 판화도 이 책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림만 보고 있어도 배부른 느낌이예요.^^ ![]() 예전에는 조팝나무라는것이 있는줄도 몰랐어요. 지금은 '조팝나무'하면 아버지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프라하에서 지내면서 부모님께서 방문하신적이 있었어요. 어머니는 그 전에도 종종 친구분들과 해외여행을 하셨지만, 아버지는 해외 여행이 그때가 처음이셨어요. 집 근처에 가까운 성이 있어서 산책을 자주 가셨는데, 그 곳에 '조팝나무'가 있었어요.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보며 프라하에도 한국처럼 같은 꽃이 있다며 좋아하시던 아버지. 아버지 덕분에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꽃의 이름이 '조팝'이라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 아마 조카는 '도토리'를 보면 할아버지를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큰 조카를 위해 이쁜 도토리를 주워다가 팽이처럼 돌려주셨거든요. 둘째 조카는 그런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것이 무척 아쉽네요. ![]() 세삼 들꽃들에게 많은 의미가 주는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기도 하고, 어떤 장소와 사건들을 기억하게 하기도 하고... ![]()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들꽃들의 모습을 보며, 서민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들꽃의 특성과 함께 우리사는 모습과 함께 투영해 설명해주셔서 글이 쏙쏙 들어왔어요. 이 책을 들꽃을 설명하는 세밀화인줄 알았던 저로써는 훨씬 많은것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단순히 책으로만 자연을 접하는것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자연을 접할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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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래미야~ 저녁 먹었으니 하천가에 운동가자~” 배불리 저녁 먹고 편안히 쇼파에 누워 책 한 권 오지게 읽으려 했던 나는 ‘내일 가면 안되요?’라는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지만 그녀는 이미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준비완료를 외치신다. 하는 수 없이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집 앞 하천가를 향해 함께 터벅터벅 걸어 나가게 되는데 지금은 겨울이라 금방 날이 저버려 아무 것도 안보이지만 한 여름 해질녁의 하천가에는 참으로 다양한 꽃이나 풀들이 자리를 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 진짜 마음먹고 눈길을 주지 않는 이상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이름 모를 풀들이 저마다의 모양을 뽐내는 것이 신기할 때가 참 많았는데... 쭈그리고 앉아서 눈을 똥그랗게 떠야만 볼 수 있는 녀석부터 큰 키를 자랑하며 우뚝 솟아있는 꽃들에 이르기까지 어찌나 그 모습들이 다양하던지. “장맛비를 맞고 수북수북 자라나는 저 흔한 잡초들도 한 포기, 한 포기가 수만 개 씨앗 가운데 살아남은 하나다. 쉽게 자라나는 것 같지만 수만 가지 시행착오를 피하고 살아남은 것들이다. 쥐꼬리망초는 한 포기 싹이 터서 자라게 하기 위해 수만 개 씨앗을 준비한다. 그런 쥐꼬리망초 삶에 요행이란 없어 보인다. 쥐꼬리망초가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은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쥐꼬리망초에게는 그게 최선의 방식이지 않을까.” P. 49 귀화식물을 또 다른 이주노동자라고 칭하거나 풀에서 사람이 보인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런 온갖 종류의 들꽃들에서 우리네 삶을 발견한다. 언땅에 뿌리내리고 겨울을 나는 점나도 나물에서조차 비정규직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그렇지만 따뜻한 봄은 당신들 것이라고 응원하는 저자의 한없이 따뜻한 마음에서 나는 훈훈한 사람의 냄새를 느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사람내음이라고나 할까? 풀 한포기, 꽃 한송이를 바라보면서도 저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려면 세상을 얼마나 따뜻한 눈으로 수용해야만 가능한 걸까? 갑자기 저자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이 책에는 이름도 낯설고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 같은 수많은 들꽃들이 등장한다. 들꽃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반면, 왜 난 이런 작은 생명에게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는지 삶의 여유가 참 없긴 하구나 싶어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잡초마저도 그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고 나 역시 그렇다. 요즘은 도시들도 온통 친환경에 아름다운 미관을 가꾸기에 열을 올린다. 구청 앞이나 횡단보도 옆에 일렬로 늘어선 꽃들을 보면 와~ 예쁘다. 라는 생각이 처음엔 들지만 자꾸 지나가다 보면 뭔가 획일화되고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에 결국 인공적인 감상만 남는다. 때로는 아직 철도 지나지 않아 싹 바뀌어버린 꽃들을 보며 ‘이런 식으로 내 세금을 낭비하다니...’하고 살짝 분노하기도 한다. 그럴땐 차라리 풀 숲, 공터, 계단 밑에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풀들이 더 생명력 있고 귀해 보여서 이 녀석들에게 더 마음이 가기도 한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하고 스스로 살아간다. 그래서 자연이다. 잡초가 많다는 것은 자연이 망가졌다는 것이고, 망가진 자연이 스스로 치유하고 있다는 표시다. 몸에 상처가 나면 생기는 상처딱지 같은 게 잡초다. 자연이 스스로 회복되면 상처딱지가 떨어지듯 잡초는 더 이상 그곳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러니 무작정 잡초를 뽑는 것은 아물지도 않는 상처딱지를 떼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꾸 이벤트를 벌이고 돈을 들여 그럴듯하게 뭔가를 만들고는 있지만 그건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다. 또 그건 바꿔 끼워진 생명 없는 고무 보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P. 185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하고 그 자리에서 온전히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수많은 들꽃들을 우리는 얼마나 더 짓밟고 괴롭혀야 그 존재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은 오늘은... 화려하고 강한 향을 뿜는 꽃보다는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 잡은 저 이름 모를 들꽃들에게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눈인사라도 하고 싶은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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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과 민초, 진정한 생태를 말한다.]
들꽃에 관심을 갖고 하늘보다 땅을 보며 걷는 재미를 알게 된지 벌써 6년째다. 큰아이 덕분에 전형적인 도시엄마 딱지를 떼고 싶어서 도감을 사서 봄마다 들로 산으로 다닌지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 그렇지만 자연은 늘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올봄에 눈마주치고 '나, 이제야 너 알아보겠다~'했던 들꽃이 다음해가 되면 다른 모양새로 인사하는 듯해서 '누구세요?'를 반복하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야 지나치다가 몇년 만에 만난 벗처럼 그제야 알아보는 눈을 키울 수 있으니 말이다.
[사계절 생태놀이]란 책으로 유명한 작가 강우근은 그냥 아이들 책에서 만난 생태작가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만난 강우근의 <들꽃이야기>는 내게 새로운 생태를 보는 법, 작은 들꽃을 통해 인생을 말하고 듣는 법을 알려준 고마운 책이다. 그동안 내가 보아왔던 들꽃은 책속의 도감사진과 길가의 들꽃을 얼굴과 이름을 맞추면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정도였다. 이제야 알아보고 조금 더 반가워하면서 들꽃이름을 불러주는 정도였을 뿐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으면 달라졌으려나~ 아니, 어쩌면 안다는 자만감으로 관심이 덜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내게 강우근은 들꽃을 통해 인생과 진정한 생태를 바라보는 법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봄여름이 되면 늘 외래유입 동식물 때문에 생태계가 위험해진다는 기사를 보곤 했다. 돼지풀이나 서양등골나물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생태계 교란식물의 이름이 이제는 다섯 손가락을 훌쩍 꼽게 된다. 기사 덕분에 길가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이 식물을 뽑아 없애야 된다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 그러나 작가는 그보다는 좀더 원초적인 생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동식물이 나쁘다라고 이야기하는데는 우리 토종 동식물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란다. 토종민들레는 서양밀들레에 자리를 내주고 등골나물은 서양등골나물에 자리를 내주는데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인간의 환경파괴가 그 전도자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환경에 민감한 토종식물은 사람의 손이 타는 개발 앞에 쓰러져가지만 강한 외래식물들은 파괴된 곳까지 그 뿌리를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무엇이 나쁘다를 외칠 것이 아니라 산 속에 길 하나, 골프장 하나 짓는 그것부터 멈추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진정한 생태는 환경파괴가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지 유입된 외래식물을 뽑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이 한 장 차이지만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말이 아니던가..
청계천을 둘러싸고 생태하천이라고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서울시와 생태학자들간에 공방이 오간 적이 있다. 작가의 들꽃이야기를 읽고나면 생태라는 말을 얼마나 우리가 남용하고 무심하게 듣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1급수에 살고 있는 각양각색의 물고기를 청계천에 갖다 풀면 청개천이 생태하천이 되는가? 인공의 손길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때에 생태라는 말은 무색하게 들리게 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생태는 인간을 기준으로 얼마나 유익할가를 따지는 이기적인 잣대는 아닐까? 자연이 유지되기 위한 생태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보조수단으로 바라는 생태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많은 들꽃이야기 중에서 유독 기억나는 것은 '다닥냉이와 이주노동자의 현실'이다. 귀화식물인 다닥냉이의 영어명칭은 poor mom's pepper이라고 한다. 겨울에 나는 다닥냉이를 나물로 먹으면 쌉싸름한 맛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귀화잡초이지만 굶주린 이들의 배를 채우기도 하고 사막이 아닌 이상 살아남아가는 다닥냉이와 같은 귀화잡초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험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들의 삶과 비슷하기도 하다. 다닥냉이 사이로 줄지어 있는 이주노동자의 모습이 아주 인상깊은 삽화로 남아있다.
민초들의 삶은 늘 들꽃과 잡초로 비유된다. 누군가 돌보지 않아서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들풀의 그것과 같이 때문이다. 길가에 너무 흔하게 밟혀서 그 생명력에 대해서 고민해보지 않았던 들꽃이 오늘따라 인생의 철학자처럼 느껴진다. 보잘 것 없지만 가장 근원적인 삶을 형성해나가는 들꽃의 인생을 통해서 삶의 가치를 느껴보게 된다.
참, 한가지 이 책을 읽으려면 사진이 있는 들꽃도감을 함께 보기를 권한다.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도 들꽃은 구분하기 힘든데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통 모를 들꽃들이다. 도감을 펼치고 실제 사진을 보면서 길가에서 한번쯤 보았음직한 녀석에게 인사도 건네면서 작가의 특징적인 삽화와 글을 살펴보길 권한다. 또 한가지는 욕심내서 단번에 읽지 않았으면 한다. 보고 싶은 들꽃부터 골라서 봐도 되고 드문드문 봐도 되지만 여러번 가까이 하면서 들꽃의 이름을 한번씩 더 불러보면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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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소식이 한참 들려오던 때, 부산은 가을이 늦게 오는건가 하는 마음을 가졌었다. 다른 곳에서는 노란 은행잎이랑 단풍이 한창이었는데, 여전히 초록색 잎을 단 은행나무를 보면서 그렇게 느낀 것이었다. 대한민국이 좁다하나 자연의 변화는 그래도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결코 좁은 곳이 아님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곤 한다.
3일전, 나는 출근을 하다가 우연히 노랗게 변해버린 은행잎에 마음을 빼앗겼다. 육교를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내 눈에 노란 잎을 풍성하게 달고 있는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마흔을 코앞에 두고 감성적으로 변한걸까? 그 은행나무는 내 눈길은 물론 마음을 홀딱 뺏아갔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바닥에 수북이 쌓인 은행잎을 밟으면서 딴 생각에 빠진 채 가야 할 목적지와는 다른 버스를 타버렸다. 곧장 직진해야할 버스가 좌회전을 하는 걸 본 다음에야 내가 버스를 잘못 탔음을 알고 후다닥 챙겨내리면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번 걸어볼까 하는 마음에 목적지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착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노란 은행잎 때문이었다.
새벽에 제법 세차게 바람이 불더니 인도에 은행잎이 가득 쌓여 그걸 밟는 느낌도 꽤 새로웠던 것 같다. 제 아무리 예쁜 인공조형물들은 보는 순간을 황홀하게 만들지만, 수수한 자연의 변화는 그렇게 온종일 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었다. 봄날 흩날리는 벚꽃과는 또다른 느낌.
아마도 강우근의 들꽃이야기를 몇날 며칠 들고 다니면서 읽고 있었는데 그 영향도 한몫을 했지 않았을까싶다. 저자는 들꽃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다. 내가 아이들과 씨름하며 쪼달리는 생활고로 허덕이는 동안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다. 내 앞에 산적한 문제들만으로도 복잡하기만 했다. 알고보면 그것 역시 남과 다를 바 없는 문제이고 그것을 조금 더 크게 바라보면 세상일일텐데 말이다.
지난 봄에 한솔이가 대문 옆에 핀 민들레를 매일매일 관찰하던 때가 있었다. 흔히 말하는 서양민들레였는데, 매년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다. 한솔이가 꽃이 피었나 안피었나 매일 관찰하기에 나도 관심을 갖고 보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침 깨끗하게 누군가가 뽑아버린 것을 보고 한솔이가 꽤나 슬퍼했던 일이 있었다. 키도 크지 않고 바닥에 딱 붙어서 피어있던 민들레는 영문도 모른 채 뽑혀져 나갔다. 그래도 내년 봄엔 다시 그 자리에서 또 싹을 틔울 것이다. 골목길에 잡초가 무성하다면 시아버님이 싹 뽑은 것이었다. 메마른 도시의 골목길에서 아침마다 노란 얼굴로 인사를 하던 민들레가 참 그립다. 그러고보면 은행잎도, 민들레도 노란색이다.
회색으로 가득찬 도시에서 노란색은 가라앉은 기분조차 즐겁게 만든다. 꽃밭가꾸기를 한다면서 길가에 심어놓은 꽃들은 자생력을 갖고 피었다 지는 것이 아니라 꽃이 필때가 되면 옮겨 심었다가 질 때가 되면 다른 꽃으로 대체된다. 그래서일까? 살아있는 꽃이지만 살아있음을, 생명을 느끼기보다는 만들어놓은 조화같은 느낌이 든다. 가로수길의 나뭇가지들도 어느날 싹 가지치기를 해서 볼썽사납게 만들어놓기도 한다.
우리집 앞에는 내가 어렸을 때 다니던 초등학교가 있다. 내가 그 학교 4회졸업생이니 그때 심었던 나무들도 30년이나 지나 제법 아름드리가 되었다. 그런데 작년에 학교 둘레에 서 있던 그 나무들이 싹 베어지고 초록색 철조망과 장미덩쿨로 바뀌었다. 나는 그 길을 지나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한솔이에게 이 나무가 엄마가 학교 다닐 때는 참 작은 꼬마나무였단다 하고 말해주길 즐겼는데, 그것들이 사라지고 나니 어찌나 마음이 허하던지. 빨간 장미꽃은 5-6월동안 얼굴을 보이다가 10달동안 초록색 철조망만 덩그러니 남겨놓는다. 늘 그자리에 서 있던 나무들이 또 그립다.
내가 이름조차 모르는 작은 꽃들이 차가운 도시의 흙을 뚫고 나와 피어있는 것을 본다.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 눈에도 잘 띄지 않는 작은 꽃들을 아이들은 잘도 찾아낸다. 내가 무심코 길을 갈때 한솔이는 와 꽃이다, 예쁘다를 연발하며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바라본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면 정말 꽃이다.
세상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꽃이 필 때가 되면 화분에 옮겨심어졌다가 꽃이 질 때가 되면 가차없이 퇴출당하는 꽃과 같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무리 차갑고 어둡고 딱딱한 곳에서도 자기의 역할을 다하면서 피고 지는 들꽃같은 사람도 있다. 우리는 전자의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내 아이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하기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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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오색찬란한 꽃이 아닌 소박한 식물이 내 눈에 들어왔던가. 언제부터 하늘이 시리게 가슴으로 들어왔던가. 화려함을 뽐내는 꽃이 아닌 풀색 생명들, 꽃이라기엔 소박하기 그지없는 들꽃들, 늘 그 자리에 있는 하늘을 고마운 마음으로 눈에 담게 된 건, 되짚어 세어보니 꽤 나이가 들어서부터였다.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것이다. 내남의 구분이 조금은 희미해지고, 미운 대상과 고운 대상이 그리 확연히 구분되지 않기 시작한 것도. 길 가다가 담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나, 블록 틈새의 조그만 풀들, 그렇게나 매연을 뒤집어쓰고 섰으면서도 여전히 푸르거나 단풍지는 나무들이 다 눈물겹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꽤 나이가 들어서부터였다. 그런 게 삶의 비애일 것이다. 상당히 늦게 깨닫는 것. 이 책은 그런 나를 비춰주는 구리거울 같은 책이다. 구석구석, 사이사이에 다 시선을 주고 아끼는 마음을 되새기게 해주는 책. 유리거울처럼 샅샅이 백일하에 다 드러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약간 너울지고 자세히 봐야 보이는 거울 같은, 그런 책이다. 아주 젊은 날, 라일락 잎을 씹으면 사랑의 맛이 느껴진다 하여 입에 넣어본 이래, 시장에서 팔지 않는 모든 풀은 오랫동안 내게 기피대상이었다. 개개의 이름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그것들 모두가 ‘잡풀’이었다. 먹을 수 없으며,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볼 필요도 없고, 더구나 어떻게 살아가는지 생각해볼 필요는 더더욱 없는 나와 무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나 자신의 생명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면서 마침내 이름 모를 풀들, 조그만 들꽃들에 관찰의 눈길이 간다. 하늘에 높이 떠서 내려다보면, 하나하나의 모양이나 키나 또는 색깔이 다 고만고만하고 모두가 한결같이 ‘생명’일 거라는 생각이 짙어진 까닭이다. 뭉뚱그려 ‘잡’이라는 접두사를 붙여 한쪽으로 밀쳐버릴 수 있는 생명이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이다. 저자는 들꽃 한 포기 한 포기를 다 쭈그리고 앉아 관찰하는 듯한 시각을 보여준다. 급히 지나치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도시 틈새의 생명들에 대해 이름도 잘 알고, 그 생명이 어찌하여, 어떤 방법으로 그곳에서 그렇게 살아가는지도 잘 헤아린다. 그리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원래 어디가 원산이냐를 따져서 잘 귀화해 살고 있는 식물들을 뿌리 뽑는답시고 전시 위주의 행정을 펼치는 일의 어처구니없음을. 그렇게 원래 우리 것과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을 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문화가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할 사람들이라고 독자도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을 함께 공유하고 공생하는 관계들이다. 들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도시에서 찾아지는 식물들이라, 들꽃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는 생각을 드문드문 했다. 사람이 신경 써 키우지 않고, 저 혼자 자란다는 의미로 읽힌다. 혼자 자라는 것일수록 더 들여다보자고 이야기하는 듯한 책. 작은 제목 하나하나가 다 경구 같고, 그림 하나하나가 다 가까이서 속삭이는 귀엣말 같다. 제일 좋은 건 독특한 눈으로 찍은 사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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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계신 부모님은 외할머니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꽤 넓은 마당에 잔디를 심으셨다. 굉장히 현실적이신 외할머니는 그곳에 채소를 심어서 경제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엄마는 잔디밭 뿐만 아니라 마당이 아니라 텃밭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공간을 꽃밭으로 만드셨다.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는 게 꿈인 나는 당장 내가 그런 집에 살지 못하는 대신 엄마네 집이라도 그렇게 꾸며보고자 틈만 나면 잔디밭의 풀을 뽑는다. 그런데 이놈의 풀은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다. 그래도 악착같이 풀을 뽑다가 문득 만약 잔디가 뽑아야 할 대상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디는 생명력이 강해서 웬만해서는 죽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풀을 보고 생명력이 강해서 잔디에게 해를 끼친다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어떤 경우는 잔디밭에 있으니 풀을 뽑긴 하는데 꽃이 너무 예뻐서 차마 뽑지 못하고 망설이기도 했다. 아마 그 꽃이 벼룩이자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른 봄이면 잔디 새싹이 나오기 전에 풀들이 나온다. 먼저 자리를 잡기 위해서다. 또, 풀이 난 곳을 파보면 영락없이 땅속에 잔디 뿌리가 있다. 뿌리 내리기 좋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땅속에서 쟁탈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얘네들도 서로 좋은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걸 보며 참 신기했다. 이렇게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구나. 그런데, 나는 무슨 근거로 잔디만 남기고 나머지는 하찮게 취급하는 것일까. 하지만 여전히 잔디 자리를 빼앗는 풀을 보면 호미를 들고 만다.
그러면서 전에는 관심없었던 풀에 관심이 갔다. 무슨 풀인지 알고나 뽑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들꽃이라고 하니 그렇게 불려야겠다. 아무래도 '풀'이라는 단어보다 '들꽃'이라는 단어가 더 쓸모있어 보이니까. 여하튼 잔디밭에 자라는 들꽃을 보며 도감을 뒤졌다. 바랭이, 뚝새풀, 방동사니, 띠풀. 그래서 이젠 하나를 뽑아서 '이런 풀'이 많다고 하지 않고 이름을 말한다. 비록 뽑더라도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뚝새풀은 원래 논에 많이 난다. 모내기 하기 전이면 논바닥을 가득 채웠던 풀. 바람이 살짝 불면 잔물결을 일으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위에 눕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뚝새풀은 작고 불그스름한 꽃이 핀다. 그래서 동생이 조카,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그걸 고추가루라고 장난을 쳐서 진짜 그런 줄 알았다며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한다. 요즘에는 그처럼 많은 뚝새풀을 보기 힘들다. 풀이 그만큼 자라기 전에 미리 논을 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이야기하듯이 제초제를 줘서 아예 풀씨를 말려버리기도 한다.
붉나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작가의 소소한 일상에서 만나는 들꽃 이야기를 읽다 보니 어렸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그리고 시골에서 만났던 많은 식물들이 새롭게 떠오른다. 귀화식물인 다닥냉이를 보며 이주노동자의 힘들고 고달픈 삶을 생각하고 그 둘을 하나로 연결시켜 읽는 이를 공감하게 만든다. 귀화식물이라고 무조건 배척하고 없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할을 인정해주듯 이주노동자의 역할도 인정해주자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이처럼 들꽃을 이야기하며 우리네 삶의 이면을 들춘다. 애써 바라보고 싶지 않은 면을 들춤으로써 조금 더 진실에 가까워지라고 하는 듯하다. 아, 그런데 이 작가의 그림이 워낙 익숙하다지만 잘 모르는 들꽃이 나왔을 때는 그림을 보고 어떻게 생긴 건지 감을 못 잡겠다. 아무래도 도감을 옆에 놓고 읽어야 했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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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번에 공고한 대로 아파트 수목 소독을 하는 날입니다. 입주민 여러분께서는 나무에 아이들이 손이 닿지 않게 주위시켜 주시고 소독하는 동안 가급적 창문을 닫아주십시오. 이상은 00 아파트 관리실에서 알려 드립니다."
매달 같은 멘트에 말을 듣는다. 벌레가 생기지 않게 하는 소독을 하기 위해 관리비에 포함된 소독비를 똑같이 낸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나무나 풀은 절대 만지면 안된다고 세뇌당한다. 거기다 에비~ 에비~ 하면서 못만지게 하는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새 아파트에 어울리는 야생화를 심는다. 봄이면 늘 같은 종의 꽃을 심고 겨울이 오기전에 가지치기를 하고 소나무에 옷을 입힌다. 같은 자리에 서있는 나무와 풀들은 가로등보다 눈에 들지 않는다.
작은 아이와 매일 아침 아파트 옆 논두렁을 바라보면서 차를 기다리다 지루한 아이와 보도불럭 틈새(아파트 관리 밖이라)에 비집고 나온 잡초들을 유심히 본다. 그리고엄마인 나를 보며 묻는다. "엄마, 왜 이 풀들은 이름이 뭐야?" "어, 그 그게 뭐더라" 하면서 얼버무린다.
아이들의 눈은 똘망똘망해서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짓을 말하면 금방 울어버릴 것 같은 눈을 보면서 차마 이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이름이 있을 텐데.. 모른다. 오늘 비로소 그 풀의 이름은 마디풀임을 알게 된다.
아마 내가 알고 있는 들꽃의 이름은 열손가락이 다 필요하지 않다. 이름은 들어봤는데 보면 연결할 수 없다. 관심 받지 못하지만 오늘도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대단한 들꽃들이다.
책을 열고 목차를 보고 깜짝 놀란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들꽃이 있었구나. 강우근의 <들꽃이야기>(2010.11 메이데이)는 이땅에 같이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들꽃처럼 항상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만들어준다.
어느날 별안간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기 전에도 있었고 우리가 이땅에 없어져도 존재할 들꽃은 너무 흔하게 비춰져서 그 가치를 잘 모른다.
주목받는 1%가 되고 싶어 경쟁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들꽃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얼마나 소중한 생명인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확인시켜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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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어디까지나 관심이 있을 때만 가능한) 작은 들꽃들에 대한 대변(代辯)같은 이야기라고나 할까......
'들꽃이야기'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책 속에 등장하는 것들은 우리의 주변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무와 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들꽃이라하여 정말 들에서 피는 꽃이려니 했다가는 깜짝 놀라게 되지 않을까 싶은 책이다.
특히,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그 존재감을 미처 느끼지 못해 '잡초'로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풀들이 있음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러고보니 생김새는 제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름 하나하나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딸아이를 위해 이름없는(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름을 알지 못하던) 식물들에 대한 반짝 관심이 있어 가까운 들로 산으로 다니던 때도 있긴 했었다. 그러나 어느새 아이가 커가면서 그나마의 반짝 관심도 자취를 감추고 어느새 '풀'이란 이름으로 싸잡아서 부르고 있지 않은가...
북한산 밑자락에서 초등학교 두 아이를 키우며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자연의 이야기를 쓰고, 찍고, 그린다는 저자는 그래서인지 이야기 속에 주인공이기도한 들꽃이며 풀, 나무들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그렸다. 때론 진짜 식물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고 또 사진도 담아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애쓰는 듯하다. 가끔은 익숙한 이름의 들꽃 이야기가 나오니 참으로 반갑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틈에서도 자란다는 들꽃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질기디 질긴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고, 먼먼나라 그 아득한 곳에서 언제, 어느 경로로인지는 몰라도 흘러들어와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토종보다 더 당연한듯 살아내고 있는 귀화식물들도 세계 곳곳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들꽃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인듯 다가오는 이야기에 새삼 들꽃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 곧 모든 생물들이 생장을 멈추고 죽은듯 숨죽인다는 겨울이다. 그러나 차가운 도시의 담벼락 틈사이에도, 서둘러 재촉하는 우리네 발밑에도 따사로운 봄볕을 기다리는 들꽃들의 질긴 몸부림이 계속되고 있음을 이제는 알지 않을까....
들꽃이야기에 나오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집근처로 나섰다. ![]() 애기똥풀같기도 한 풀이 자라고 주차장 입구 쇠기둥을 감싸고 자라고 있는 이름모를 풀도 자라고 있다. 단풍나무 아래 수북하게 쌓인 마른 단풍잎 사이에 보이는 저것은 토끼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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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죽어버린듯 누렇게 위장한 저것도 땅속 깊숙이 뿌리를 박고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과연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은 들풀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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