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2권으로 발간된 책이다. 시공 디스커버리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데 중점은 두는 총서이다. 그래서 특정 분야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면 읽어내기가 그리 만만치 않은 총서인것 같다. 이번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는 내가 읽은 4번째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의 시리즈이다. 이 총서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글로 다소 건조한 느낌이 있어서 잘 읽혀지지는 않으나 고급스러운 종이질과 도판을 많이 넣어 시각적 읽기를 함께 시도하고 있어 딱딱한 문체가 보완되는 것 같다.
고대근동의 세계는 참으로 낯설고 생소하며 이국적인 세계이지만, 그 거대하고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문명의 세계는 참으로 매혹적이다. 주로 파라오들의 연대와 그 업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나로써는 이집트의 도굴과 발견의 역사위주로 쓰여진 이 책에 그리 썩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이집트 발견의 역사 흐름에 대해서 간략하고 쉽게 쓰여져서 대략적인 그림을 그리기에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첫장은 고대근동의 패권자이자 거대한 문명을 이룩한 이집트 문명이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4세기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카톨릭이 지배적이었다.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이교도 신전을 모두 패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 무렵 이집트에는 전통적인 신(神)이나 여신을 신봉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신전의 패쇄는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그곳 주민 사이에 쓰이던 상형문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집트 문명이 사라진 배경은 그리스 로마 제국에 의해 이집트가 점령되고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교도 신전의 패쇄 명령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신전이 패쇄되고 신관이 쫓겨나면서 이집트 문자는 점차 사라지게 되고 이집트 역사 사본이 보관되어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 없어지므로 이집트의 기억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집트 문명이 그때 사라지지 않고 역사속에서 전달되었다면 오늘날의 건축이나, 천문학등 많은 학문들은 이집트 문명에 많은 빚을 졌을 것이고 처음 인류세계에 대한 더욱 명확한 그림을 그릴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잊혀지고 파괴되어진 이집트 문명을 그 자체의 매혹과 거대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여행자들의 방문을 받게 되면서 서서히 잊혀졌던 문명에 대한 기억들이 복원되기 시작한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를 점령하뎐 제국주의 시대에 드농, 드로베티, 벨조니, 솔트와 같은 전문적인 도굴꾼들-이 책에서는 위대한 모험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도 돈이 될만한 이집트 유물들을 수집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비싼 값에 팔아버린 도굴꾼에 지나지 않는다-에 의해 이집트의 유적이 발견되고 유물들이 수집되면서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해독되어 감추어진 문명을 드러내는 단초를 마련해 주게 되었다.
고고학에서는 유물자료도 중요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역시 유물을 해석하는 문서자료이다. 그래서 문자를 해독하는 것은 한 문명을 재발견하는데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이집트 문명을 재발견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799년 알렉산드리아 근처 로제타에서 프랑스 육군 장교에 의해 발견된 로제타 스톤이였다. 이 로제타 스톤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칙령으로 그리스어와 아랍어 그리고 이집트 상형문자로 구성된 비석이였고 이것을 프랑스의 고문서 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에 의해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해독되게 된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여러학자들의 연구가 쌓이고 자료들이 축적됨에 따라 이집트 문자에 대한 해독이 가능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투탄카멘이나 프수세네스 무덤과 같은 거대한 유적이 계속적으로 발견되면서 이집트의 역사는 조금씩 베일을 벗기 시작했고 새롭게 발견되어 그 거대함과 이국적인 문명의 실체를 드러내기기 시작했다.
조금씩 드러나는 이집트 문명의 거대함의 끝자락을 보고 나타내는 사람들의 반응은 놀람과 경외감이다. 1776년부터 3년동안 카이로에 머물면서 피라미드 내부들어간 사바리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간신히 1.2km쯤 전진했을 때, 두 개의 거대한 피라미드의 머리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왕국과 제국이 붕괴하고 폐허가 되는 가운데서도 그대로 남아 있는 고대의 유적을 바라보면서 경외감이 솟아올랐다. 이들을 건설한 사람들의 위대함에 영광이 있으라!
이집트는 놀랍과 경외의 시선을 갖게 한다. 인류역사상 이렇게 거대한 문명을 이룩한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종교가 생활이였고 이생보다 내세의 삶을 더욱 믿었던 이집트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그렇게 거대한 신들을 모신 신전을 건축하였던 것이다. 신비와 거대함과 놀람과 경외와 신으로 가득찬 이 이국적인 나라는 죽음 너머에 있는 내세에 대해 희망을 갖게하고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이상을 품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집트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매혹적인 문명인 것은 분명하다.
이 첵에 오타도 여러곳에서 발견되더라. 특히 66쪽 '2차로 그러모은'은 '2차로 끌어모은'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
이집트여행을 준비하면서 읽게 된 책입니다. 이집트문명은 가까운 그리스문명의 뿌리라고 합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집트 고왕국을 정복한 이후 이집트는 그리스의 지배를 거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 등 외세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고대 이집트의 화려한 문명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단절된 문명을 복원해내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고고학적 연구를 통하여 조금씩 진전을 보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고대 유적은 제대로 발굴되어 보존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그동안 지키려는 의지도 없고, 훔쳐가기 바빠서, 마구잡이로 들어내다 보니 맥락을 제대로 찾지 못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재발견이라고 포장하는 얄팍함을 볼 수도 있습니다.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는 이집트 사람들을 포함해서 주로 유럽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문명이 남긴 유물들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랍사람들의 경우에는 고대이집트의 유물을 도굴하는 방법까지 적은 책도 있었다고 합니다. 시공디스커버리 총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풍부한 도판을 곁들여 잘 요약된 설명이 돋보이는 내용입니다.
이 책에서도 기독교가 인류역사에 저지른 몹쓸 짓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믿던 비잔틴제국의 테오도시우스1세가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이교도 신전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계기로 이집트의 문명을 간직한 자료들이 모두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450년 무렵에는 고대이집트 문헌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문명은 고대 그리스와 라틴작가들에 의하여 기술되었고, 이집트에서 가까운 히브리사람들의 역사에도 이집트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만, 고분에 같이 묻혀있는 부장품을 훔치려는 도굴을 고대사회에서도 있었다고 합니다. 옛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불러온 현상이겠습니다. 운송수단의 발전에 따라 예전에는 가져갈 수 없었던 거대한 규모의 유물까지도 실어낼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로마제국 시절부터 인기품목이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런 유물의 가치를 알았는지 어땠는지 오히려 외국에 선물로 제공한 이집트 지배자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고대 이집트문명을 제대로 해석하게 된 것은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에서 발견된 로제타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윗부분에는 상형문자로 된 글이, 중간부분에는 아랍어로, 아랫부분에는 그리스어로 된 글이 새겨져있었습니다. 기원전 196년에 내려진 프롤레마이우스5세의 칙령을 새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무렵만 해도 이집트에는 원주민을 비롯하여 아랍에서 흘러든 사람들, 그리고 지배자인 그리스 사람들이 섞여 살았던 모양입니다. 결국은 그리스 문자를 열쇠로 하여 고대 이집트 문명이 사용하던 상형문자의 해독이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흔히 프랑스 사람 상폴리옹이 로제타석의 내용을 해독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로제타석의 해석에 도전했던 영국의 윌킨슨과 독일의 렙시우스 등의 연구도 기여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세상을 깜짝 놀랄만한 연구도 천재 혼자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 같습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 남긴 유물 가운데 숨겨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가봅니다. 그래서인지 이미 비어버린 것으로 알고 있는 대피라미드에서 조차 발굴할 유물이 더 남아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는가 봅니다. 그래서인지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의미를 뒤늦게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이 책은 이집트 고대사를 밝히는데 주력하기 보다는 고대 이집트의 유산이 어떤 식으로 사라지고,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남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아마 이집트 고대사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라면 약간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문화유산이 오늘날 남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특히 고대 이집트의 문화유산이 어떤 식으로 세계 열강들에게 수탈되고 훼손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이 아주 적당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역시 유럽 열강들과 일제에게 수없이 많이 수탈되었기 때문에 이집트 문화유산의 수탈 과정은 필자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책은 첫장부터 도발적인 문구로 시작한다.
- 4세기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카톨릭이 지배적이었다.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이교도 신전을 모두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 무렵 이집트에는 전통적인 신(神)이나 여신을 신봉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신전의 폐쇄는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그곳 사이에 쓰이던 상형문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며,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한 나라의 수천년 역사가 어둠 속으로 파묻혀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 고대사를 말살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이집트인들의 문화적 전통을 소멸시키려고 계획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미 이집트인들은 그들 선조의 종교적 · 문화적 소산을 상실한 상태였고, 전혀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던 정책의 실행으로 인해서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문화재 얘기를 할때면 으례 근대 서구 열강이 약탈해간 문화재들과 일제강점기때 약탈당한 문화재들(지금 반환해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수없이 외치고 있는)에 대해 거론하며 비분강개한다. 물론 필자 역시 마찬가지도 말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 우리 문화유산을 상실할만한 바탕을 마련한 적은 없었을까? 예를 들어 오늘날 기독교 단체에서 단군상을 부수고, 문화재로 지정된 불교건축물의 정당성을 따지고 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종교적 · 문화적인 기준이 바뀜에 따라 우리 스스로 우리 선조의 문화를 외면하고 잃어버린 적은 없었을까? 당연히 없었다고 얘기하지 못 할 것이다. 유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우리는 수천년 불교문화를 상실했고, 그 유교문화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고 바뀌면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었다. 이후 찾아온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그런 문화재의 상실을 더욱 더 가중시켰고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없게끔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집트에 저만큼의 문화유산이 남아 다행인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 문화유산을 이제는 지켜야할 때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음 장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집트의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수차례의 사건때문에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이집트 고유 종교가 사라지면서 신을 숭배하는데 읋었던 문자가 사라졌고, 그 후손들마저 그 문자를 아는 이가 없게 되었다. 이후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침공으로 인해 70만권이나 되는 장서를 보관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화재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450년 무렵에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 중 상당수가 사라졌고, 고대 이집트 문헌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우리가 오늘날 한국 고대사를 공부할때『삼국사기』나『삼국유사』(그 시대부터 상당히 후대에 만들어진)를 갖고 연구하는 것처럼 이집트 역시 그런 전처를 밟게 된 것이다. 우리가 몇몇 단편적인 금석문을 애지중지하면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처럼 이집트 역시 로제타스톤과 같은 몇몇 중요한 금석문을 토대로 그 역사적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으니 이 책을 읽는 내내 동질감이랄까, 그런 것들을 많이 느꼈다. 또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 중국 문헌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이집트 고대사에 있어서는 헤로도토스, 디오도루스, 스트라본, 플루타르크와 같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장가들이 남긴 여행기가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제3자의 시각으로 쓰여진 기록이지만 그나마 이집트에 대한 단편적인 역사는 그렇게라도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집트하면 벨조니를 가장 처음 떠올렸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이미 17세기 초 테브노와 같은 선교사들이 이집트를 방문해 미라, 문화, 풍습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19세기에는 프랑스 총영사 브노이 드 마예와 같은 악명높은 유물 약탈자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집트에 대해 포괄적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으며(거기에는 1735년 케옵스의 피라미드 단면도를 정확한 측량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수많은 유물들을 약탈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클로드 시카르 신부는 이집트 전역을 여행하면서 최초로 이집트 지도를 완성하기도 했으며, 비방 드농은 이집트학의 탄생에 크게 기여할 정도로 학문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비방 드농의 연구성과는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게 하였고, 위원회는 2년 간의 준비 작업을 거친 후 기념비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이집트지(誌)』를 남겼다고 한다. 이집트의 초창기 학문적 성과는 로제타스톤이 그 시초인 줄 알았는데 이미 18세기 말에 이러한 학문적 성과가 이뤄졌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것도 자국의 역사가 아닌, 안개 속에 가려진 타국의 고대사를 말이다. 이 책의 번역판이 나와있는지 한번 찾아보고 싶을 뿐이다.
실제 비방 드농의『이집트 나일강 상류와 하류 여행기』, 동방원정대 과학 · 예술위원회의『이집트지』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이집트 열기가 유행처럼 번져 나갔고, 1802년부터 1830년 사이에 프랑스, 독일, 영국, 스위스 등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이집트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학문적 성과는 오히려 부작용을 불러왔으니 바로 유물 약탈이 이전보다 더욱더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도굴 안내서까지 나왔을 정도니 말 다했다. 특히 오스만투르크 황제가 임명한 이집트 총독 모하메드 알리가 이집트 현대화를 추진하면서 유물 약탈을 조장했으며, 드로베티나 헨리 솔트, 벨조니 등 유명한 약탈자(?)들이 루브르, 대영박물관의 수장고를 꽉꽉 채워주기 시작했다. 카이로 항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범선에 실려 지중해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떠났던 것처럼 부산항에서도 수많은 유물들이 증기선에 실려 현해탄을 가로질러 일본으로 떠났을 것이다. 지금은 정창원 곳곳에 쳐박혀 있거나 어딘지도 모른채 숨겨져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후 샹폴리옹이 로제타스톤을 해석함으로써 고대 이집트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마리에트, 가스통 마스페로, 하워드 카터, 피에르 몽테 등 수많은 이집트 유적들이 학문적으로 발굴 조사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야기는 일단 여기에서 끝을 맺는다. 투탄카멘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벌어진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전하면서 말이다. 아마 하워드 카터가 그 앞에서 느꼈을 전율은 김원룡 선생님이 무령왕릉 앞에서 느꼈을 전율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실제 투탄카멘의 무덤 역시 다른 무덤을 조사하기 위해 쌓아놓은 흙더미 때문에 나중에 발견된 것처럼 무령왕릉 역시 다른 무덤때문에 가려져 도굴(도굴적 발굴조사든 뭐든)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은가. 필자 역시 평생에 그러한 대단한 발굴을 한번쯤은 해보고 싶은데, 언제 기회가 올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집트 사막 어딘가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대단한 유적들이 많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 본다. 우리나라도 파면 무조건 유적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또한 책의 뒷부분에는 아부심벨 구조작업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예전에 책에서도 보고 다큐멘터리로도 봤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완댐 공사로 인해 거대한 석조구조물을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을 하다니. 우리 나라에서도 수많은 댐공사가 벌어지고 그로 인한 구제발굴이 수없이 많이 일어난다. 물론 그 안에서 아부심벨 신전과 같은 거대한 시각적 효과를 가진(이건 그만큼 돈벌이가 될만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적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이러한 보존작업은 행해지지 않겠지만, 무조건 유적을 조사하고 덮어버리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밖에 이 책의 저자인 장 베르쿠테의 하루를 소개한 '고고학자의 하루'라는 1장짜리 챕터 역시 볼만하다. 뭐 오늘날 고고학자의 삶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이렇게 일기 형식으로 매일매일을 기록해두면 나중에 그 스스로에게 굉장히 좋은 기록자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고학자라면 누구나 현장에서 야장이라고 하는 작은 수첩에 그날그날의 일들을 기록한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매일매일의 작업 진행상황을 알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훗날 보고서 작업을 할때 도움을 얻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유적을 조사할때 그 진행과정을 자세히 남김으로써 자료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걸 보면 필자 역시 외국에 나가서 이런 발굴조사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을 매일매일 남기면 필자 또한 훗날 이처럼 책을 쓸때 서먹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이 책은 전체적으로 많은 삽화와 도판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보는 내내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읽는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책 가장 뒷편에는 이집트 왕조의 연표를 서술해 놨는데 이집트사를 개략적으로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한국 고대사의 현황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았다. 다른 독자분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
1996년 6월 13일 이집트 '기제 피라미드' 앞에 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과연 지금의 인간이 4000년 전의 인간보다 더 과학의 발전을 이루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20세기 최첨단 과학문명, 최고의 건축기술을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피라미드를 건축한 이들에 비하여 우리 시대 사람들이 그들보다 낫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기제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다. 한 변이 230미터, 넓이가 5만평방미터다. 사용된 돌 개수는 260만개 총중량은 700만톤에 이른다. 이런 규모는 현대 건축물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화려한 이면은 내면을 들여다 보는 순간, 인간이 만든 위대한 문화를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완악하게 파괴했는지 알게 되는 순간, 분노할 수밖에 없다. 시공사에서 시리즈로 내놓은 시공디스커버리총서 002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는 인간탐욕을 고발하고 있다.
이 책은 서양문명이 이집트 문명을 파괴한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밝힌다. 391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이교도 신전을 모두 폐쇄하라 명령했고, 그 결과 이집트 상형문자는 사라지게 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B.C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때 불타버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장서 70만권이 있었다. 그 중에는 파라오 시대를 기록한 <이집트 역사> 30권도 포함되었다. 이집트 역사를 집대성한 문헌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복사본이 남아 있었는데 테오도시우스 1세의 신전 폐쇄 명령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신전을 교회로 개축하는 콥트파 수도사들, 로마와 비잔틴 황제들은 오벨리스크, 스핑크스를 제국 수도의 장식품으로 만들었고, 페르시아 왕들은 고대 이집트 신전에서 빼내온 조상(彫像)들을 페르세폴리스로 실어날랐다. 아랍어로 쓴 도굴 안내서인 <감춰진 진주와 고귀한 신비에 관한 책, 발견된 보물과 숨겨진 보물 위치에 대한 안내서>까지 나왔다. 1900년 카이로 박물관 이집트 관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전쟁이나 세월의 흐름보다 더 강력히 고대의 유물을 파괴해버렸다."(본문 59쪽)
왜 인간은 이런 탐욕을 통하여 파괴했을까? 이유는 단 하나. 현대 문명이 그들보다 더 나은 문화라는 교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가 우수하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가 형성했던 문화와 문명을 파괴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이집트라는 거대한 문명 앞에 현재의 사람들은 과학과 문화에서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
지금의 인간은 그들이 파괴해버린 문명과 문화재 보호라는 미명하에 루브르, 대영제국박물관에 약탈한 것을 보관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라 자랑하지만 그들의 문명과 문화재는 찾아볼 수 없고, 제국주의 시대, 제국의 이름, 군대로 파괴하여 약탈한 유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는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서구문명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벨리시크, 스핑크스, 석관, 거대한 조상을 약탈했던 벨조니의 <이집트와 누비아 여행>을 통하여 약탈과정을 살펴보자
"선박 화물업자와 협상하여 1,800프랑에 배 한 척을 빌리기로 했다. 준비작업을 하는 동안에 벨조니는 여신 세크메트를 상징하는 사자 두상 18점, 세티 2세가 무릎을 꿇은 형상 조각 한 점, 다수의 스핑크스를 카르나크에서 발굴해 흉상과 함께 배에 실었다."(본문 75쪽)
이렇게 이집트 유물은 약탈되었고, 서구인들은 약탈 유물을 자신들의 문명인듯 자랑하고 있다. 잊혀진 이집트는 이집트 사람 탓에 잊혀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유물들이 그저 제자리에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피라미드, 상형 문자,룩소르 신전, 로제타 석을 우월성을 내세워 도둑질하여 자기들 나라에 고이 모셔놓았을 뿐이다. 룩소르를 발견한 '가스통 마스페로'는 룩소르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탈취한 이문이다. 룩소르는 그저 제자리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룩소르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겉으로는 이집트 문명을 찬양하는,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처럼 읽히지만 왠지 심연에서는 그들을 향한 분노를 발한다. 내 서재에는 '로제타 석'을 판본하여 만든 짝퉁 로제타 석이 걸려 있다. 내 방에 걸려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약탈이 만들어낸 짝퉁이라는 것이 마음에 분노를 일으킨다.
우리에게도 빼앗긴 문화재가 많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를 쓴 저자의 나라는 프랑스이다. 그 프랑스에 있는 <직지심경> 아직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만 잊힌 것이 아니라 고려와 조선도 잊혔다. 잊혀진 문명이 각자 처음 자리 잡았던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진짜 문명과 문화 사회임을 알아야 한다. |
이 책의 원작자는 프랑스의 한림원 아카데미 회원이며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고문서 연구소장과 카이로대학교수인 장 베루쿠스(Jean Vercoutter)로서 그는 고대 이집트에 정통한 고고학 전문가 이다. 책 내용 또한 단순한 나열식의 전개가 아니라 고고학 학자로서 학문적인 해설과 유적지 발굴 과정과 현장 설명, 발굴에 관한 에피소드, 고대 이집트 역사 등 다양한 내용이 펼쳐 진다. 세계적인 이집트 유물을 발굴하는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숨막힐듯한 감동을 준다.
우리에게 고대 이집트 문명이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보면 과학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했다고 고대인을 우습게 아는 자만에는 빠지지 않는지, 현대인들은 그들과 비교해서 창작적이고 더 뛰어난 유산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책 속에서 그림, 조형물, 벽화 등의 보고 있노라면 고대 이집트인의 작품을 모방한 현대 작품들이 조형물에서부터 디자인 작품들까지 얼마 많은 가를... [인상깊은구절] 대 신전이 비밀을 드러내다. 절망은 화신으로 바뀌었다. 작업을 시작한지 3주만에 인부 네 사람이 입구를 발견했다. 이제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신전의 방대한 규모는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주위에 가득찬 그림, 음각, 거대한 조상 같은 훌륭한 예술품이었다.”벨조니는 큰 방의 삼면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신전 안은 44°C로 너무 더웠기 때문에 스케치 하기도 고통스러웠다.”라고 기록했다... 매의 머리를 한 실물 크기의 사자상 두 점과 소형 좌상 한 점, 구리로 만든 신전문의 파편 조각을 기념품으로 가지고 왔다.( 이 유물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내심 벨조니는 매우 실망했다. 수세기 동안 아무에게도 침범당하지 않은 이 신전에서 호화로운 보물을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
광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 화려함은 우리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시중에 나와있는 수많은 책들은 이집트의 역사에 대해, 문화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는데 있어서 우리를 가장 매혹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이집트에 관한 사진들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로 인해 오히려 이집트에 대해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곤 한다. 위대한 문명(물론 이집트 문명은 위대하다.), 그 이상 혹은 이하로는 생각치 않는,.... 이 책은 무언가 새로운 관점에서 이집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이집트 자체를 바라보고, 이집트 문명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요약해놓은 책들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돋보인다. 표음문자이자 표의문자이기도 한 이집트 상형문자, 그리고 그리스 문자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들이 책 앞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이집트는 비잔틴 제국의 신전폐쇄와 함께 세상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된다. 아무도 이집트 상형문자를 읽지 못하게 됨으로 인하여 그 거대한 제국에 대해 그 어떠한 것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몇몇 상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이집트를 방문했고, 그들을 통해 이집트인들의 생활상이라던가 자연환경 등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긴 했지만, 이집트인들이 직접 기록한 문자보다는 정확치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스트라본에 의해 기록된, 이집트 인들의 악어숭배에 대한 기록은 참으로 이색적이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로 많은 이들이 이집트를 방문하게 되고, 그들에 의해 이집트 유적들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발굴 목적이 단순한 학문적 목적이 아니었고, 그 사이에 개입된 각국의 이해관계와, 도굴을 통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상술로 인해 화려한 이집트 문명들은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이집트 문명의 보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발전을 위해 고대신전을 무너뜨리고 그 돌을 용광로에 녹여 사용했다는 식의 묘사가 진정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집트에 그것들이 머무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나라의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지는게 나음에 틀림없으니 말이다. 샹폴리옹에 의해 해독가능하게 된 이집트 문자는 발굴되어진 무덤들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로 인해 이집트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얻게 되었다. 마리에트는 이집트에 고대유물 관리국의 전신인 유적발굴 본부를 창설함으로써, 고대유물에 대한 약탈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기여하기도 했다. (물론 그 배후에는 프랑스 세력이 있었고, 발굴의 주체는 이집트 당국이 아닌 프랑스였다..) 이러한 많은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서 마침내 이집트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이 생겨나기도 하였고, 오늘날 많은 이들이 경외시여기는 이집트에 대해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에서 존재하느 자신과 자국의 잇속을 챙기는 행동들로 인해 이집트 문명의 본질이 많이 훼손된것도 사실인듯 싶다. 미신적 요소에 대해서 그다지 믿지는 않지만, 투탕카멘의 저주 등의 말이 괜실히 생겨난 것이 아닌, 발굴 과정에서 보여준 서양인들의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태도에 대한 일종의 경고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기존의 책들이 이집트의 역사에 대해 시대순으로 나열하고, 특정 인물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거나 이집트 문명의 화려함을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책은 그러한 이집트 문명이 어떻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발굴의 역사에만 머무리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이집트 문명이 지니고 있는 화려함, 우수함 등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다르고 있는 듯 하다. 사진보다는 그림이 주가 되는게 조금은 아쉽긴 하지만, 중간중간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그림과 사진들로 인해 이집트 문명이 단순하고도 공허한 말이 아닌, 현실적인 것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이 느껴진다 |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이집트는 어떤 나라였을까? 그리고 그들이 남긴 문자는 해독할 수 있을까? 초기에 남긴 상형문자는 이집트 신전이 폐쇄돼면서 아무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수천년이 지난 이후 한 위대한 학자에 의해 그 내용이 해독되면서 우리는 이집트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분의 위대한 노력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이집트 문자를 해독하면서 우리는 이집트의 과거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역사는 도굴의 역사이기도 하였다. 이집트 왕들의 무덤을 많은 이들이 도굴해갔다. 바로 수많은 금은 장식들을 가져다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지금 남아 있는 유물을 어떻게 보존해야 할지를 잘 고민하게 한다. |
세계적인 유적지로 유명한 이집트는 그 중에서도 세계7대 불가사리 중 하나라는 '피라미드'를 손꼽을 수 있다. 이 피라미드는 나폴레옹의 계산에 따르면 피라미드 건축에 사용된 돌이면, 프랑스 전체를 폭 30cm, 높이 3m의 성곽으로 둘러 쌓을 수가 있다니 특별한 기계가 없던 그 시절까지 가만한다면 가히 현세에서도 입 쫙 벌어질 만한 그 규모에 엄청나게 놀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집트의 왕족 투탄카멘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얘기들이 실려있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투탄카멘이 쉬고 있는 현실까지 도달하는 데만 무려 4년 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해서 책을 읽으면서 이리 저리 놀람 투성이다. 이런 사실들을 학문적 성과로 남기기 위해서 많은 학자들의 희생과 도움이 컷다. 거기에 대해서는 책 뒷부분 '기록과 증언'에 남겨져 있다. 이해를 많이 돕기 위해 페이지 마다 좋은 재질로 그림이 삽입되어 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사진보다는 그림이 많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워낙 신경써서 잘 해놓았기 때문에 모자람은 없어 보인다. 이집트에 대해 좀 더 진실적으로 알고 싶던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