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이책을 읽게된 것은 심리학 강의 중 교수님께서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때문이었다. "월든이라고 있는데...한번 읽어봐라"는. 제목에서는 대체 무엇도 느낄 수가 없어서 궁금함에 도서관에서 찾아보았는데, 사실, 당시엔 시선과 촉각을 자극하는 것들에 둘러싸인 신입생이었던지라 차분히 읽지 못하고 이내 내려놓았었다. 그러부터 몇년이 지난 뒤 서점에서 우연히 다시 발견하고는 밥먹으면서 휴식하면서 읽어나가면서, 제대로 몇 되 보게되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어쩌면 한세기도 전에 쓰여진 내용이 지금과 절묘하게 맞아들어가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월든 호숫가에서의 삶 속에 녹아나온 생각들이 세월이 지나도 여전한 것은, 우리 삶의 그 본질적인 모습 - 외면이든 내면이든.. - 바뀌지 않고 계속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과연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변하지 않는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내 삶에서 취하게 버려야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어떻게 삶을 완성해야하는가....라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게 해주는 책. 모든 분께 강력 추천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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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월든]을 알게 된 그 예전, 이 사람이 내게 준 삶의 자세는 이전의 많은 분들이 준 것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한 때는 나도 이 사람이 끔찍해 하는 바보 같은 꿈을 꾸었더랬다. 좋은 직장, 좋은 집, 안락한 인생이 마치 전부인 듯..... 그러나 Thoreau는 그 모든 것을 요즘 말로 매트릭스의 가상 세계처럼 흥미 없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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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19세기 명작 <월든>은 미국의 동북부에 있는 호수이름이라고 한다. 고 장영희님과 법정스님께서 그리도 아름답고 장엄하게 묘사한 <월든>을 드디어 읽고 말았다. 처음 책을 만났을 때 청록빛 표지디자인에 친밀감이 느껴졌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부피와 내용의 장대함에 약간 멈칫한 감도 있었다.
숲의 경제학으로부터 독서와 고독과 삶과 사회정의에 대한 소로우의 평범하지 않은 의식의 흐름을 서서히 산책하듯 따라가 보았다. 쟝 쟈끄 루소의 <어느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속의 루소처럼,산책하듯이, 깊이 들고 나는 호흡이 필요했다.
읽는 동안 자연의 생태학적인 접근이 다소 생경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당시 숲주변의 동식물의 실태와 그것들과 마주하는 소로우의 소박한 친밀감이 느껴지는 대목이기에 주어진 글귀를 따라가 보기도 했다.
소박하고 검소한 그의 의식주생활은 무소유에 버금가는 그것이었다.
왜 법정스님이 그토록 월든을 예찬하셨는지, 그리고 생전에 두어번 방문하셨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어느 시대든 존재하는, 당시 사치하고 부패한 사회와 타협하지 않은 고매한 성품도 보였고 <논어>, <맹자>, <대학>등 동양사상과 인도 철학에 심취한 그의 맑고 품위있는 정신세계로의 접근은 숲의 침엽수림같은 기상과 향취가 느껴지기까지 했다.
<월든>을 읽고 도저히 숲에 가지 않고는 이 마음의 청정함을 잃어버릴 것 같아 집근처 원시림으로 발길을 옮겼다. 4월이지만 오래 추웠던 탓에 울창한 숲을 기대하기는 일렀다.
밝은 햇살이 꼿꼿이 솟은 침엽수들의 끝에 꽃혀있던 날!
숲을 걷고 싶었다.
드넓은 대지의 숨결이 느껴지는 숲이 내 앞에 펼쳐진다.
애써 가꾼 티가 나지 않은... 자연 그 상태로의 숲이 가까이 있슴에 감사하면서 겨우내 묵혀둔 그 숲길을 걸어보았다.
![]() ![]()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 것, 나태하면 악마가 손길을 뻗는다고 했다.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곡기를 해결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바지런히 하루를 시작하지만 해질 무렵 유난히도 자신의 모습이 애처로운 것은 마음 속 열정을 자신의 것으로 꾸미지 못한 애석함이, 그 미련이 남아서일 것이다.
걷다가 지치면 다정하게 자리를 내어 주는 나무벤치의 아량처럼, 쭈욱 뻗어 있는 길같지만 어느새 막다른 길목이 나타나는 것처럼, 굴곡지고 슬픈 우리 삶에 한 줄기 소나기와도 같은 신선함과 한없이 아카데믹한 삶의 구성을 요구하는 명작, <월든>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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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에게 있어서 월든에서의 삶이란 ''미친 짓''이 아닌, 근본적 독창성(p.216)의 발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다른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림으로 인해 가치가 결정되는 ‘상품’이 아닌, 그 자체로서 고유의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예술로서의 ‘작품’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소로우는 진정한 주체로서의 자신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할뿐더러,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이 달리니까 자신도 달리는 식으로 달리기를 시작했으면서도 그 달리기를 멈추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다고 여기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월든 호숫가에서의 자신의 직접적인 삶을 통해 청빈한 삶을 기반으로 한 주체적이고 본질적인 생활을 통한 행복의 영위가 충분히 가능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책을 통해 일관되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에 대한 성찰과 그에 대한 진실한 추구’이며, 이는 개개인의 삶이 ‘상품’이 아닌 ‘작품’임을 이야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시각의 이면에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 뒷받침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세상과 삶에 대해 던지는 그의 많은 물음과 지적들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 만으로도 현대 문명사회의 병폐를 지적하고 사회에 속한 개개의 구성원들이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과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도록 함에 있어서 충분히 유효하다. 단, 소로우의 비판은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인 당신은 지금 정녕 행복한가’라는, 개별 주체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결부됨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므로, 단순히 세상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는 것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내가 굶주리고 있을 때 내게 먹을 것을 주고,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옷을 주고, 수렁에 빠졌을 때 나를 건져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게 무조건 좋은 사람은 아닌 것이다.(p.106) 왜냐하면 특정 상황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특정한 부분의 결여에 대한 보완이 아니라,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 혹은 표면에서 드러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소로우에 의하면 ‘세상의 어떤 것이 문제인가’라는 질문보다 우선적인 질문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며, ‘독립적 주체로서의 나는 세상의 어떤 것을 문제로 인식하는가’하는 질문이다. ‘문제’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이 실상 주체적 사유의 결과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자신에게 만큼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며, 여기서 강조점은 문제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에게 놓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소로우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은 미래에 문제로서 인식될 것에 대한 소로우의 예측의 결과물이라기보다, 19세기에 소로우 자신이 삶의 행복과 관련하여 당대의 문제로서 인식한 것에 대한 지적일 따름이다. 그의 주장은 대부분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들이지만, 그러한 보편성은 자신도 모르게 인습적으로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소로우 자신의 의식적 사유를 통해 면밀히 검토된 결과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할 점이 있다면, 그가 살았던 삶은 청빈한 것이었으나, 이는 나머지 모든 사람들 또한 자신과 외적으로 유사한 검소한 삶을 살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스스로의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따라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구현된 형태가 반드시 고독하고 외딴 생활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문명사회의 많은 요소들이 개개인에게서 의식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채 그것이 혹자의 삶을 무분별하게 이끌고 있는 현실이 문제인 것이며, 이에 대한 스스로의 사색과, 사색의 결과로서의 외현적 삶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게 도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단, 여기에는 스스로에게 진정으로 정직할 것과, 맑은 눈, 그리고 굳건한 용기를 가질 것이 요구 될 따름이다.(p.459) 쿠루시의 지팡이 장인과 같이(p.466), 스스로가 기대하는 완전한 삶을 바라보며, 세상의 흩날리는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목적 가득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눈을 감던 그 순간처럼, 항상 평온하고 보다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월든』을 통해 소로우가 이야기하는 핵심은 문명 사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정직한 고민과 함께 스스로의 안을 진실하게 들여봄으로써 진정 스스로가 기대하는 주체적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고정관념과 타성에 젖지 말고 날마다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하라는 것이며, 항상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에 직면하여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스스로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다.(p.129) 소로우의 말처럼 고독은 한 사람과 그의 동료들 사이에 놓인 거리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학의 혼잡한 교실에서도 정말 공부에 몰두해 있는 학생은 사막의 수도승만큼이나 홀로인 것이다.(p.194) 따라서 각 개별적 주체는 스스로의 내부 법칙에 의하여 과감히 ‘고독’해져 볼 필요가 있다. 삶이란 ‘상품’이 아닌 ‘작품’이며, ‘작품’을 만들어가는 예술가로서의 개별적 주체는, 어쩌면 다른 사람이 ‘실패’라고 이야기하는 특정한 과정을 실패가 아닌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서 유쾌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소로우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산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었다고 고백하였듯이, 아마도 그 ‘예술가’보다 더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이며, 어쩌면 그 아름다운 삶에 대한 사회적 동경은 한 사회가 바뀌어 가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인상깊은구절] ”날마다 그대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하라.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영원히 새롭게 하라.“(p.127) |
| 월든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좋은 책이다. 이 책에는 소로우가 2년 동안 홀로 월든 호숫가의 숲에서 지낸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단순한 숲 생활이 아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예찬하는 동시에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살아 있다. 도시 생활은 무엇인가를 소유해야만 하고 그 소유물에 구속당하기 십상이다. 소로우는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으려는 독립적인 존재다. 그는 호숫가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동안 자연과 교감한다. 그리고 모든 교훈은 자연에서 온다는 말을 스스로 증명해낸다. 환경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요즘, 수돗물, 형광등 전기 같은 도구 없이도 잘 살았던 소로우의 삶이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소로우처럼 시민을 존중하고 자연과 친한 정치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내게 월든은 읽어야하는 책의 하나였다. 그것은 의무감과 비슷한 것이었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내게 유명한 책들은 지적인 허영심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막히지 않을 자유로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
| '내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얽매임이 없는 자유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더라도 나는 행복하게 살아 나갈 수 있으므로...' 소로우는 그러한 삶을 발견하였고, 2년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한 정신적인 여유와 자유를 누리기 위한 노력은 사실 현대인들이 실천하기에는 버겁다고 느껴진다. 하루 하루가 달라지는 광속적인 삶을 쫓아가느라 너무나 바쁘다. 너무나 바빠서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생존조차 위협을 받는 경우도 많다. 소로우 같은 삶을 게으름과 동의어로 불러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게 현대의 비극이라 하겠다. 과연 돌아갈 자연은 있는가?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소유로 되어있고, 그것을 침범하게 되면 용서라는 것이 없는 현실에서... 목가적인 삶,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느껴보는 감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치열한 삶에 익숙한 나는 돌아갈 마음의 고향, 자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이며, 결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이웃의 길을 가지 않도록 당부하고 싶다.'는 그의 바램은 현실과의 괴리감만 증폭시킨다. 150년 전에 이 책이 쓰여졌고, 환경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런데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2천년 전에 노자, 공자, 불교, 힌두교에서 이미 말했던 것들이다. 2천년이 흘렀고, 150년이 흘러도 세상은 별로 바뀐 것이 없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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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5년3월 말경, 나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 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호수 가까이에 집 한 채를 지을 생각으로 곧게 뻗은 한창때의 백송나무들을 재목감으로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 내가 일한 곳은 소나무가 우거진 기분 좋은 언덕배기였는데 나무들 사이로 호수가 보였고, 어린 소나무와 호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숲 속의 작은 빈터도 보였다.(60-61쪽)”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자신으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성찰을 이루게 된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사실 저도 몇 년째 집근처에 있는 양재천에 산책을 나가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는 동안 양재천에서 느끼는 변화를 사소한 것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살피곤 합니다만, 소로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시간의 흐름과 자연을 느끼는 방식의 차이, 두 가지 정도일 것 같습니다. 제가 양재천에 산책을 나가는 큰 이유는 자연을 관조하려는 것보다는 건강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큰 탓에 비교적 빠른 속도로 걷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재천의 변화는 보고 들으면서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느리게 사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소로우는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에 스스로를 담기 때문에 그 변화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월든>을 읽어나가면 자연에 대한 소로우의 세심한 관찰과 사념의 깊이에 매료될 수밖에 없습니다. “들판과도 같이 넒은 물은 공중에 떠 있는 정기(精氣)를 반영한다. 그것은 위로부터 끝없이 새로운 생명과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중간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 땅 위에서는 풀과 나무들만이 흔들리지만 물은 그 자체가 바람에 의해 잔물결이 일게 된다. 나는 수면에 미풍이 불어 지나가는 곳을 빛줄기나 빛의 파편이 번득임을 보고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호수의 표면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언젠가 우리는 공가의 표면을 내려다보며 한층 더 신묘한 정기가 어디를 스쳐 지나가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271쪽)”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는 스스로에 대한 비판에도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과거 학교경영에 간여하면서 가졌던 생각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가 아니고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므로 그것부터가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100쪽)” 오늘날 교육에 종사하는 분들 가운데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임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합니다. 특히 이념까지 끼어들다 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발붙일 자리가 없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소로우는 월든호수로 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129-130쪽)” 그러면 왜 호수였을까요? “호수는 하나의 경관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한 지형(地形)이다 그것은 대지의 눈이다. 그 눈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은 자기 본성의 깊이를 잰다.(268쪽)” 소로우는 대지의 눈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보려 한 것이고, 자신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앞에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호숫가 작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저의 작은 소망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소망이 언제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 듯 세상살이에 매몰되어 정신없이 사는 삶에 매달리다보면 정신의 샘이 말라붙어버릴 것 같다는 걱정이 남습니다. 이제라도 삶에 희망을 물줄기가 흘러내릴 수 있도록 마음속에 월든호수를 담아봐야 하겠습니다. 마치 ‘쉴 새 없이 그리움을 솟아 올리는’ 최홍규 시인님의 호수처럼 말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0925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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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월든을 읽으면서 느낀것은 2009년 올해 내가 읽은책중 최고의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읽지않은 다른책들에게 미안하지만 어쨌든 월든은 기대이상의 책이다. 그리고 월든과 같은 느낌을 전해줄 책을 또 발견하게 되길 바라고.
<월든>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숲속 월든 호숫가 근처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 2개월동안 자연과 함께 지냈던 삶에 대한 기록이다. 일인칭 화자인데 에세이의 성격도 묻어난다. 이 기간동안 그는 의식주를 손수 해결했다. 최소한의 돈과 최소한의 육체노동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복에 있어서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을 입을 것. 옷이라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정말 헤지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흙을 묻혀 매일 놀지 않는한, 옷 한벌로 몇년을 입지 않는한. 옷은 원래의 옷감 형태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음식에 대해서는 밭을 직접 갈고 콩이나 기타 농작물을 심어서 재배했다. 생선은 월든 호숫가에서 낚시질로 잡고. 커피나 차를 마시는 것을 경계했는데 이 부분은 아직도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커피를 굉장히 좋아하므로. 농작물 재배를 하면 그것을 갖다 팔기도 했다.
집에 있어서는 통나무집을 직접 지었는데 그 과정이 꽤나 상세하게 나와있다. 집을 짓는데 드는 비용도 기록해 놓았다. 여기서 그는 사람들이 집을 갖기위해 평생을 고생하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통나무집에 든 비용은 정말 약소하다.
사람에게 있어 의식주는 필수품이다. 필수품이 있고나서야 사치품에 대한 여유도 생기기 마련인데 오늘날의 의식주는 얼마나 해결이 되고 있을까. 다른 것은 몰라도 집의 문제는 너무 심각할 정도. 소로우에게 있어 의식주의 해결은 너무나 간단하게 보였는데 의식주가 고민거리가 되지않는 사회가 진짜 유토피아일 것이다.
자연에 대한 묘사도 뛰어났는데 특히 월든 호숫가가 겨울동안 얼고 녹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돋보였다. 근처 다른 호숫가들의 언제 얼고 녹는지에 대한 기록도 대단한 점이다. 그것을 어떻게 관찰을 하는지. 보통 추상적으로만 그럴것이라고 느끼는 부분을 그는 직접 관찰로 일일이 다 기록하고 있었다.
체험에 의한 앎은 꽤나 경건하다. 훨씬 진지하고 또한 설득력이 있다. 모든이의 삶이 다 자신들에겐 소중하다. 하지만 지향하는 삶이란 것도 있는데 소로우의 2년 2개월동안의 체험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소로우가 평생을 월든 호숫가에서 살았다면 그건 체험이 아니라 그의 고루한 생활이었을 뿐일지도. 지향하는 삶이 있다면 짧은 기간이라도 체험해 보는 것이 분명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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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월든 한번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죽음이 찾아왔을때 차라리 마음이 편하리라
인생 느즈막히 읽어본 사람들은 왜 이 책을 몰랐을까... 아쉬움과 후회로 잠 못들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감명을 받은 나로서는 전자의 사람들이나 후자의 사람들이나 애석하기는 마찬가지
기왕이면 젊은 나이에 꼭 한번 읽어서 아니 여러번 읽어서 인생을 가치있게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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