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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법사 일행이 드디어 영취산 발치의 옥진관에 도착했다.
당초 이삼 년이면 올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십사년 동안 십만팔천리 길을 유목 끝에 다다른 것이다. 영취산에
오르려는데 강이 길을 가로 막는다. 접인조사가 노를 젓는 바닥 없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상장법사의
시체가 강물에 떠내려온다. 상장법사가 인간의 태에서 난 뼈와 살로 이루어진 몸에서 벗어나 해탈을 한
것이다. 뭍에 오른 일행은 뇌음사를 향해 영취산 정상으로 향한다.
삼장법사 일행을 만난 석가여래는 아난과 가섭에게 경전을 내주라 하지만 삼장법사가 예물을
바치지 않자 글자 없는 경전을 준다. 그러나 연등고불의 도움으로 글자가 없는 경전임을 알게 된 삼장법사는
그 동안 동냥하는데 썼던 자금 바리때를 아난존자에게 예물로 바치고 경전 오천마흔여덟 권을 얻는다. 허나
삼장법사 일행이 오는데 걸린 날 수는 십사년, 즉 오천사십일 이다. 석가여래는
경전 수를 맞추기 위해 여드레 안에 삼장법사가 당나라에 경전을 전해주고 돌아올 수 있도록 팔대금강에게 신위를 부리라고 명령한다.
한편 관음보살은 삼장법사의 고난장부를 보다가 여든 번의 재난을 겪은 것을 알고는 또 한번의
재난을 겪게 만든다. 불가에서는 ‘구구 팔십일’의 수를 채워야 참된 도로 귀의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대금강은
구름을 타고 가던 삼장법사 일행과 경전을 땅으로 떨어뜨리는데, 그곳은 통천하였다. 흠뻑 젖은 일행은 간신히 뭍으로 올라와 옷과 경전을 말린다. 여든
한번째의 고난을 겪은 일행은 다시 팔대금강을 따라 바람을 타고 당나라로 돌아온다. 당태종을 만나 경전을
전한 일행은 여드레 만에 다시 영취산으로 돌아오고 모두 진인이 된다. 삼장법사는 전생에 석가여래의 둘째
제자였는데 수행을 게을리하여 동녘 땅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경전을 구하여 당나라에 전하는 고행은
인과응보였다.
10권에 이르는 [서유기]를 읽는 여정이 끝이 났다. 비록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읽다가, 쉬다가 하기를 반복하며 읽었지만, 읽는 동안은 나 역시 삼장법사와 같이 십만팔천리를 여행한 기분이다. 여행은 끝이 났지만 내가 왜 고전을 읽는지, 그리고 고전을 읽으면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불교, 도교, 유교의 경구들을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지만, 아직은 머리 속에서 정리되지 않고 엉킨 실타래마냥 중구난방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동안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우선시했던 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으로 다가온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것이 다 자기 마음속에 있다는 것, 구도라는 것이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어찌 보면 뻔한 결론이 새삼스레 진리로 다가온다. 마침 책을 검색하다 보니 대승반야의 핵심적 경전이라는 [금강경]을 해석한 책이 눈에 뛴다. 삼장법사가 서역으로 구하러 간 경전이 대승불교의 삼장三藏이었음을 생각하니,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책을 통해 또 한 권의 경전을 만났다는 것만 해도 [서유기]라는 고전을 읽은 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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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을 읽은 지 보름여가 훨씬 지났다. 서유기 마지막 권의 리뷰를 쓰려고 몇 번을 시도했지만 단 한 줄도 나가지 못했다. 쓸 말이 없어서는 아니다. 어쩌면 서유기의 10권의 리뷰를 쓰는 순간 마주칠 서유기와의 이별이 아쉬워서였다. 그렇다고 시작을 한 일을 끝을 내지 않고 계속 미룰 수는 없는 일. 이제는 그 긴 여정과 함께 했던 나의 여정도 마무리를 지어야 될 듯하다. 참으로 즐거운 여정이었다. 마지막 권에 다다랐는데도 요괴는 끊임없이 출몰한다. 해도해도 너무하다. 난 처음에 10권이나 9권 중반에 가면 서역에 도착해서 대단한 환영행사나 영취산에 대한 묘사가 이어질 줄 알았다. 헌데 이게 웬일 10권의 중반을 넘어가는데도 요괴는 끊임이 없다. 역시다. 서유기의 목적은 불경에 있지 않다. 그 여정에서 겪는 고난에 있다. 그러면서 단련되고 성장하며 자신들도 모르게 이미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삼장법사의 고기와 원양을 욕심내는 요괴들은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쇠머리 귀신, 코뿔소 요괴가 삼장법사의 고기를 노리고, 원양을 노린 요괴가 변신한 공주와 결혼할 뻔도 했다. 그 요괴는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는 옥토끼가 지상에 내려와 요괴가 된 것이다. 만 명의 스님에게 보시를 드리는 것을 평생의 원으로 삼는 구원회의 집에 가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그동안의 여독을 씻던 삼장법사 일행은 도둑의 누명을 쓴다. 도둑들에게 살해당한 구원회의 영혼을 천상에서 다시 살려내고 누명을 벗은 손오공 일행 드디어 부처님이 계신 영취산에 도달한다. 손오공 일행이 수없이 맞이한 요괴. 그 요괴들은 어쩌면 적이면서 동시에 나의 분신 이다. 한 때는 천상의 신선이나 동물이었지만 마음 하나로 요괴로 변하고 요괴로 변하는 순간 나와 원수가 되었다. 내가 이겨내야 하고 겪어내야 할 업이 된 것이다. 즉 천하에 몹쓸 요물이면서 동시에 보살의 현현이다. 안에 있는가 하면 밖에 있고, 밖에서 오는가 하면 안에 있다. 전후좌우 그 어디에도 있고, 또 그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요괴들의 정체다. 그런 점에서 요괴란 적게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고난이고, 크게는 일종의 화두이다.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존재,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 화두 말이다. 삼장법사와 세 제자들은 이 화두를 붙들고 끊임없이 씨름했다. 어쩌면 서역의 여정은 그 화두와의 싸움이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화두이다. 그렇게 해서 십만 팔 천리를 장장 십 사년에 걸쳐 주파했다. 근데 석가여래가 사는 곳은 기대와는 다르다. 선을 행하고 공양을 올리고 수행을 하고 경전낭송을 한다. 이게 다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난 10권 초입부터 기화요초가 피고 모두가 행복한 모습으로 원하는 것을 다 소유한 그런 삶을 사는 영취산을 그렸다. 하지만 이게 웬일. 수행하는 게 다다. 모두가 진리의 수행자다. 우리가 상상했던 천국이나 이상세계와 너무 다르다. 어떤 책에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가 원하고 상상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곳,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상상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구현되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바로 지옥이라고. 그런 곳이 처음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루함이 넘쳐난다. 무언가가 없을 때는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거라 생각하지만 원하는 것이 차고 넘치는 곳에서는 그 자체도 고통이다. 그런 곳이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이다. 하지만 그런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한없이 담백하고 평화로운 삶이 이어지는 곳, 하여 모두가 수행자이고 진리의 순례자가 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삼장법사 일행은 능운도를 거쳐 바닥없는 배를 타고 피안에 이른다. 강을 건너는 동안 시체 한구가 떠내려 온다. 자세히 보니 바로 삼장법사이다. 삼장법사가 마침내 몸의 태를 벗고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요괴 같은 화두를 만나고 나서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삼장법사는 제자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때 손오공이 “사부님이나 저희나 모두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서로가 모두 돕고 의지한 것이니까요. 저희들은 사부님 덕분에 해탈하고, 불문을 통해 공을 닦아 다행히 정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저희들의 보호를 받아 불법의 가르침을 지켜 다행히 세속의 테를 벗게 되셨습니다.(212쪽)”말한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인연법의 오묘한 경지이다. 우린 나 하나의 힘으로 세상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도 홀로 살지는 않는다. 서로 의지하고 힘을 주면 사는 것 아닌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이다. 그러니 세상에 쓸모없는 인연은 없다. 이런 경지를 깨우치는 것 보니 이들이 다다른 곳이 서천이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석가여래는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아난과 가섭을 시켜 이들에게 경전을 하사하게 한다. 한데 경전을 주기 전에 아난과 가섭이 삼장법사 일행에게 선물을 요구한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그들에게 아난과 가섭은 무자경전을 준다. 글자가 없는 경전. 불립문자(不立文字)인가? 궁극적인 도는 말로써 전달되는 것이 아닌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탄식하는 삼장법사. 유일한 보물인 황제가 선물한 자금 바리때를 바치고 나서야 “유자경전 오천마흔여덟 권”을 받는다. 전체 불경의 삼분의 일에 해당된다. 헌데 이들의 고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관음보살이 그동안 삼장법사 일행이 당한 고난을 살펴보니 81난에서 하나가 부족하다. 그러니 재난 하나를 더해 81난을 채워야 한단다. 재난은 피할 수 없다. 외면할 수도 없다. 겪어야 할 것은 겪어야 한다. 그래야 풀린다. 마지막 재난은 통천하에서 맞이한다. 삼장법사 일행을 등에 태워 통천하를 건네주던 자라가 그들을 물에 빠뜨려버린다. 덕분에 불경이 몽땅 물에 젖어 높은 벼랑위로 경전을 옮겨놓고 햇볕에 말린다. 헌데 《불본행경》 몇 권이 바위에 눌러 붙어 찢어져 버린다. 이에 삼장법사는 자신의 부주의를 탄식한다. 하지만 손오공의 생각은 달랐다.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에요. 하늘과 땅이 온전하지 않은데, 이 경전은 원래 온전했기 때문에 이제 바위에 붙어 찢긴 것입니다. 바로 불완전한 것에 대응하는 오묘한 뜻이 깃든 일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관여할 수 있겠습니까?”(251쪽) 대단하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손오공. 맞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태양의 길인 황도도 들쭉날쭉한 타원형이고, 지구의 자전 축 역시 23.5도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결국 하늘과 땅의 완전한 일치란 없다. 혼돈의 우주론. 그러니 그 속에 존재하는 경전이 어찌 완벽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완벽은 없다. 완벽을 향한 끝없는 수양과 구법의 여행만 있을 뿐. 끝에 도달하는 순간 또 다른 문이 열린다. 마지막 순간 손오공은 삼장법사에게 머리의 긴고태를 풀어달라고 한다. 이에 삼장법사가 “예전에는 너를 통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법력을 써서 너를 다스렸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미 부처가 됐으니 벌써 저절로 없어져 버렸느니라. 아직까지 그 태가 머리위에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느냐? 한 번 만져보아라(284쪽)” 누군가가 풀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풀렸다. 자신을 옥죄었던 굴레가 말이다. 그렇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고난을 당하는 것도 그 고난을 이기는 것도, 그 고난을 이기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그러니 구법의 여행이 되었던, 우리가 사는 삶이 되었던, 그 삶은 혼자서 이겨내고, 스스로 깨우치며 가야하는 길이다. 서유기의 구도의 여정은 자신을 이기는 행로를 보여주는 여정이다. 변화의 동력은 마음이다. 원숭이 같이 천방지축으로 뛰던 마음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그런 인간의 마음이 구법여행을 통해 해탈에 이르러 부처가 된 것이다. 손오공의 변신술은 존재가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마음의 행로, 구법 여행을 통해 스스로 성찰을 꾀하고 변화되어 가고 깨달아가는 인간 마음의 행로의 축소판이 바로 서유기의 여정이다. 색은 색이로되 본디 색이란 없으며 공은 공이로되 그 역시 공은 아니라네. 고요함과 시끄러움, 말과 침묵은 본래 같은 것이니 꿈속에 살면서 꿈을 말해 무엇하리 쓸모 있음의 쓸모 가운데 쓸모없음이 있고 공덕 없음의 공덕 가운데 공덕의 베풂이 있다. 마치 과일이 익으면 자연히 붉어지니 어떻게 가꾸는지 물을 필요 없는 것과 같다. (144쪽) 色色原無色 空空亦非空 색색원무색 공공역비공 靜暄語默本來同 夢裡何勞說夢 정훤어묵본래동 몽리하노설몽 有用用中無用 無功功裡施功 유용용중무용 무공공리시공 還如果熟自然紅 莫問如何修種 환여과숙자연홍 막문여하수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