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르헤스가 꿈을 꾼다면 어떤 언어로 꿈을 꿀까 나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다. 그는 나이가 들어 자기가 세운 꿈만으로도 능히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그 속에서 기거했으리라. 매일매일 다른 언어로 꿈을 꾸지는 않았을까. 언어의 무수한 조합과 경우의 수와 새로운 언어와의 만남 속에서 상상력이 현실로 툭툭 눈에 밝게 밟히는 신비한 경험을 했으리라. 내 뱃속에서부터 들은 언어를 몇 십 년 지난 지금도 옹색하고 졸렬하게 써대는 수치도 부끄럽지만 새로운 언어와 내 모국어를 연애는커녕 손 잡을 기회도 마련해주지 못하고 좋은 시절 보내게 만든 것도 회한이다. 독서의 목적은 무엇일까를 새삼 고민한다. ‘장미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것은 꽃이 피기 때문에 꽃을 피우는 것이다.’ 라는 앙겔루스 실레지우스(Angelus Silesius)의 말대로 독서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나에게 독서는 더욱더 내 욕망을 자극하는 붉은 피이길 바란다. - 보르헤스의 말대로 그에게 시력의 상실은 서서히 다가왔다. 황혼이 붉게 물들 듯, 여름날의 느릿느릿한 석양처럼. 장님의 세계는 완벽한 어둠이라기 보다는 희미한 빛만 존재하는 세계라 한다. 보르헤스는 완전히 시력을 잃지는 않았으며 노란색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시력을 상실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어한 색깔은 검은 색과 빨간 색이었다고 한다. 빨간 색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나는 보르헤스보다는 행복한 상태다. - 어디론가 나아가기 위해, 무엇인가를 생산하기 위해 탄탄하고 두서없이 쌓여지는 토대가 되길 바란다. 보르헤스의 독서의 경지를 나도 경험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작가로서의 보르헤스 못지 않게 나는 독서가로서의 보르헤스를 존경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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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 보르헤스의 알레프를 처음 읽었을 때 굉장히 당황했었다. '소설 밑에 달린 주석 내용은 진짠가...?' 역자의 말에 나온 대로, 그의 소설은 '진지한 농담'이다. 나보코프가 탐미주의적인 것과 달리 보르헤스는 본인의 독서는 "쾌락주의적"(12쪽)이라고 한 것처럼. 지적인 쾌락주의. 2. 이 책 사일 밤-불교에서 "우리는 열정을 버려야만 합니다. 자살은 그 자체가 열정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와 같은 문장. 벌써 몇 년이 흐른 어떤 죽음이 실망과 환멸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이 도피하고 싶은 꿈의 세계에 대한 열정 때문에 자살을 했다니.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대부분의 자살은 따분하거나, 책에 나온 대로 꿈의 세계로의 열망 때문이라기보다 삶이 핍진하고 지난하거나, 혹은 현실에서의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폭력이나 가해 때문인 것 같다. 아마 열정적인 행위로서의 자살은 좀 더 다른 것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히 누군가를 사랑하는 열정 만큼의 숨죽여 움직이는 열정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선 열정적인 행위가 맞지만, 일반적인 열정은 아니고, 좀 더 구체적인 한정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3. 정말 죽고싶을 때는 죽고싶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이 잘 안 든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루 종일에 걸쳐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처럼. 다른 대상으로의 치환이 불가능.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이 행복해서가 아니라, 살아갈 열정이 죽고싶은 마음보다 더 커서, 문득문득 행복해서 살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지인도 때로는 죽고 싶었다던가, 유명한 모 강사 선생님도 길거리에서 미친사람처럼 울면서 퇴근을 했다던가... 수천 년 전, 청산별곡의 화자는 날아온 돌에 맞아 울고 청산에 살고 싶다가 이내 바다로 가서 살고 싶어하며, 노래로서 오늘까지 울고있지 않던가. .... 인간의 감정은 수천 년 전에 비해 지금은 진화했을까? 보르헤스 읽다보면 삼천포에서 이역만리까지 간다. 나는 역자가 말했듯이 중심이 없다는 점이 보르헤스의 최고의 매력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