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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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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관한 생각의 백과사전’이라는 제목으로 독후감을 썼던 <여행자의 책>의 저자 폴 서루의 단편집 <세상의 끝>을 만났습니다. 20대 초반에 아프리카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하면서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30대부터는 영국에 살면서 여행을 다니고 여행기를 썼는데, 아직 그의 여행기는 읽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프리카 방랑>이 소개되어 있는 것 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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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관한 생각의 백과사전’이라는 제목으로 독후감을 썼던 <여행자의 책>의 저자 폴 서루의 단편집 <세상의 끝>을 만났습니다. 20대 초반에 아프리카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하면서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30대부터는 영국에 살면서 여행을 다니고 여행기를 썼는데, 아직 그의 여행기는 읽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프리카 방랑>이 소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끝>에는 표제작인 ‘세상의 끝’을 시작으로 모두 14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무대 혹은 등장인물이 경험한 장소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장소가 분명치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만, 첫 번째 ‘세상의 끝’의 경우 런던에 있는 구역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저자 자신이 여행을 통해서 가본 장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옮긴이는 ‘변경지대의 씁쓸한 풍경화’라는 제목의 후기를 “폴 서루의 단편소설들은 대체로 상징적 의미에서 ‘세상의 끝’에 놓인 인물들을 그려낸다. 그들은 낯선 곳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려 혼란과 좌절을 겪기도 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기도 한다.(381쪽)”라고 시작합니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것이 대개는 낯선 곳에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일인데, 특히 저자처럼 자유여행을 하는 경우에는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하겠습니다.

옮긴이는 이어서 ‘폴 서루는 이 단편집에서 자의로든 상황에 의해서든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군상에 초점을 맞추고 이주자들의 행각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도 때로 공감적으로, 때로는 냉담하고 신랄하게 서술한다’라고 정리합니다. 하지만 문화가 다른 탓인지 읽는 입장에서 쉬이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런던에 있는 세상의 끝이라는 구역으로 이주한 부부와 여섯 살난 아들의 한 가정이 가장의 의도와는 다른 결말로 치닫는 것을 보면, 과연 미국인 가정이 거처를 나라밖으로 옮기는 것을 가장 혼자서 결정했을까? 그리고 이름처럼 세상의 끝이라는 동네에서는 동네사람들이 각자 섬처럼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 와중에 아내와 아들은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다는 설정이 낯설어 보인다 하겠습니다.

코네티컷주에 있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프랑스를 여행하는 동안 마르세유에서 아내가 ‘자기 삶을 살고 싶다’는 이유로 남편을 떠나고, 그렇게 혼자된 남편은 코르시카를 여행하면서 음식점에서 일하는 프랑스 유부녀를 유혹해서 달아나는 장면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보니 불문학교수는 12년의 결혼기간 언행이 일치하지 않아서 부인과의 관계가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던 것이고, 프랑스 여인 역시 코르시카 태생의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염증을 내던 참이었던 것이 함께 달아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목처럼 ‘말은 곧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 같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던가 심지어는 섬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고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이 과연 성공할까 싶기도 합니다.

아프리카 특유의 기생충-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파리의 유충이라고 했습니다만-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하얀 거짓말’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버림받은 여자들이 자기를 속인 남자에게 유산된 태아를 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리지 않은 셔츠를 입으면 파리의 유충에 감염되어 온몸이 종기가 돋아나는 비상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은 더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프리카를 다녀오기 전에 이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y*****2 2019.04.08. 신고 공감 4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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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환상으로 도착하지 않는 세계 - 폴 서루 《세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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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이거나 디스토피아적인 소설을 보면 흔히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거대 서사나 문명의 위력 등이 등장하는데, 한 개인으로 따져 봤을 때 파멸이나 좌절은 아주 일상적인 데에서 온다. 폴 서루의 이 단편소설집을 읽고 그는 그걸 잘 전달하는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했다. 폴 서루는 대학 졸업 후 평화봉사단원으로 아프리카로 간 이후부터 50년간 전 세계를 누비며 유랑하며 글을 써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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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이거나 디스토피아적인 소설을 보면 흔히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거대 서사나 문명의 위력 등이 등장하는데, 한 개인으로 따져 봤을 때 파멸이나 좌절은 아주 일상적인 데에서 온다. 폴 서루의 이 단편소설집을 읽고 그는 그걸 잘 전달하는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했다. 폴 서루는 대학 졸업 후 평화봉사단원으로 아프리카로 간 이후부터 50년간 전 세계를 누비며 유랑하며 글을 써왔고, 빌 브라이슨 같은 후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는 여행 문학의 대가로 격찬 받아왔다. 비루한 생활을 거부하고 자유를 택한 타향살이 속에서 그가 듣고 보고 겪은 것들이 녹아있는 이 소설집의 내용과 인물들은 전혀 유토피아적이지 않다. 자신이 속한 나라, 관계, 일상을 조금만 벗어나도 혼란과 분노, 두려움, 실패 패배감, 절망 등으로 온통 뒤흔들린다.

1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크게 세 갈래블랙 코미디 같은 문단의 공허한 실상, 시대와 공간(타향) 속에서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인물들의 서사, 타지와 일상 사이 균열 속에서 각자의 선택로 분류할 수 있겠다.

  

블랙 코미디 같은 문단의 공허한 실상

좀비들은 노년에 명성을 얻게 된 작가가 알코올 중독과 과거의 망령 속에 무력하게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카리브 제도 출신으로 제인 에어를 카리브 여성 관점에서 다시 쓴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작가 진 리스를 모델로 함).

방정식은 문학을 전혀 모르는 동성애자 주류 판매원 점원이 허위 허식의 문단 사람들과 친해지며 영국 왕립문학협회 회원이 되는 블랙코미디를 보여준다.

잡역부는 미국의 교수들이 여름 방학마다 영국에 가서 자료를 수집하며 대단한 업적인양 과시하는 허위의식이 큰 그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류 시인의 편지를 편집해 대학 종신 교수가 된 별 볼 일 없는 인물 블러드워스는 은둔 시인 벨라미에게 접근하지 못하자 시인의 집 잡역부에게 시를 훔쳐 오게 하고 잡역부의 시를 신인 작가 인양 소개한다. 가관이다.

감사의 글은 이 소설집의 에필로그 위치에 있어 헷갈리기도 하는데 자세히 읽어보면 비평가연하며 사익을 추구하고 교묘하게 타인을 이용하는 인물의 인사치레를 비꼬듯 단편화하고 있다 

폴 서루 단편엔 유난히 시인 캐릭터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류 시인에 대한 희화화를 보니 시가 소모되는 걸 싫어하는 작가인 듯?

 

시대와 공간(타향) 속에서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인물들의 서사

좀비들에서 작가가 인종차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실제로 진 리스가 반() 흑인적이라는 이유로 출간하지 못한 임피리얼 로드를 폴 서루의 상상으로 새로 쓴 임피리얼 얼음 상점은 식민지 시대에 흑인과 백인이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서사가 아주 서늘하다.

과거에 전시 경험을 겪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단편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종전 후는 프랑스인 라모 씨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게 당한 경험들을 가족과 그들을 찾아온 영국인 소녀에게 되돌려주는 억압적인 폭력이 인상 깊었고, 클래펌 정션에서는 전후 말레이시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아무런 가책 없이 원주민 약탈꾼을 살해한 영국 군인과, 과거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 여성에게 남편을 뺏기고 지금 서른이 넘는 정신지체아 딸을 크리스마스 시즌에 요양원에 보내는 에릭터 부인의 비정함을 보면서 전쟁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다른 모습일 수도 있었겠지 싶어 비감해진다.

  

타지와 일상 사이 균열 속에서 각자의 선택

세계의 끝에서는 주인공이 가족을 데리고 희망을 품고 세상의 끝이라는 기이한 지명의 런던으로 이주한 뒤 불식간에 아내의 외도와 가정의 붕괴를 맞게 된다.

야드 세일 2년간 평화봉사단원으로 사모아에서 거주한 청년이 미국으로 돌아오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가족은 이미 붕괴되어 있고 그는 사모아의 삶과 문화에 동화되어 있어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다.

여인의 초상은 하버드 경영대학 출신의 미국 청년 하퍼가 불법 자금 운반하는 첫 일로 파리에 와서 겪게 되는 이야기인데, 폴 서루는 관습적이고 순진하지만 물욕적인 미국과 퇴폐와 기만적인 유럽의 대비를 보여준다. 누가 더 낫다 어떻다 할 수 없는 상황.

말은 곧 행동은 미국인 교수인 주인공이 여행 중에 아내에게서 이혼 통보를 받고 즉흥적으로 코르시카 레스토랑에서 만난 유부녀와 도주하는 스토리인데, 이 교수 인물에서도 미국인에 대한 폴 서루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군더더기 없는 단편이라고 할 하얀 거짓말은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사기를 치며 성공할 기회를 엿보는 미국 청년 제리가 아프리카에서 겪게 되는 인과응보적인 이야기인데,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을 보듯 액자식 구성과 미스터리한 전개 등 잘 짜인 단편이다. 코믹해서 더 좋았다.  

자원 연설가는 미국 외교관들이 권태로운 삶을 일탈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관계나 직위가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 같다. 한국에도 2013년 윤 뭐라는 분이...

영어의 모험은 영어를 익히기 위해 영국을 갔지만 사실 낯선 곳에서의 로맨스를 꿈꾸는 네덜란드 중년 여인의 이야기가 다과(茶菓) 이야기처럼 펼쳐진다.

폴 서루의 자전적 단편 가장 푸른 섬은 젊은 대학생 커플이 아이를 갖게 돼 비밀리 출산을 위해 푸에르토리코로 갔다가 사랑의 환멸을 절감하고 아이를 입양시키기로 결정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이야기대로 폴 서루는 꿈꾸던 작가가 되었고 평생 자유롭게 떠도는 영혼이 되긴 했다. 하지만 그 선택 이면엔 실제 입양 보낸 아이뿐 아니라 잃은 게 있을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보석도 많은 커팅으로 완성되듯이.

 

우리 안에도 늘 세상의 끝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어날 때 일어나고 잠들 때 잠드는 그런 것이.

 

 

 

 

선택해,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이미 오래전에 이뤄졌다. 그는 이 섬에서 자신의 작고 푸른 영혼을 발견한 것이다. 그 영혼이 홀로 내면에 품은 생각은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적혀 있었고, 이제 그는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ㅡ 「가장 푸른 섬, p364

 

 

 


g******i 2017.09.07. 신고 공감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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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서루_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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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선택한 소설집, <세상의 끝>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끔찍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이 불만족스러운 이 생의 근원으로 우리를 이끈다." _김연수(소설가)   이 소설에 대한 두 거장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폴 서루의 단편소설 모음집이기에 읽어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세상의 끝>은 국내에는 처음으로 출간되는 폴 서루의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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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선택한 소설집, <세상의 끝>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끔찍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이 불만족스러운 이 생의 근원으로 우리를 이끈다." _김연수(소설가)

 

이 소설에 대한 두 거장의 언급이 아니더라도, 폴 서루의 단편소설 모음집이기에 읽어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세상의 끝>은 국내에는 처음으로 출간되는 폴 서루의 소설집이다. 나는 휴가의 마무리로 이 책을 골랐다. 휴가의 끝에 읽는 <세상의 끝>

 

50년간 세계를 여행하고 글을 써온 여행 문학의 대가 폴 서루의 책이기도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일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소설로 유명하다. 나는 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을 선물받아 읽었었는데 시끄럽지 않고 화려하지 않은, 담담하고 담백한 문장과 단어들이 상당히 맘에 들었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 이 짧은 소설들 속에 펼쳐질 문장들이 기대가 되었다.

 

이 소설집은 런던, 파리, 독일, 아프리카, 코르시카 섬, 푸에르토리코 등 세계의 여러 곳을 배경으로 한 14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세상의 끝, 좀비들, 임피리얼 얼음 상점, 야드 세일, 방정식, 영어의 모험, 종전 후, 말은 곧 행동, 하얀 거짓말, 클래펌 정션, 잡역부, 여인의 초상화, 자원 연설가, 가장 푸른 섬) 여행 문학의 거장다운 면모가 돋보인다. 본인이 직접 보고 겪은 경험들이 소설 속 배경과 상황에 녹아들어 생생함을 전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예쁜 표지처럼 낯선 세상의 끝에서 일어나는 몽글몽글한 이야기들이 아니다. 표지를 보고 그런 이야기를 보고자 이 책을 펼쳤다면 당혹스러울 수 있겠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 또는 낯선 사람들 그 경계에서 벌어지는 때론 당혹스럽고, 때론 우울하고, 때론 우스꽝스럽고, 때론 탄식하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처음엔 엉뚱하게 느껴졌던 이 표지가 소설들을 다 읽고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잘 어울렸다. 이상과 현실, 설레임과 불안, 그 간극을 묘하게 잘 표현했다고나 할까. 책을 펼치기 전 그저 예쁘게만 보였던 표지가 책을 다 읽고나면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게 한다. 그런 느낌들이 가득한 <세상의 끝> 

 

이 소설집의 제목이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세상의 끝>은 행복한 사내였던 로바지의 모험의 끝에 관한 이야기다. 아내 캐시와 아들 리처드를 데리고 미국을 떠나 런던의 '세상의 끝(World's End, 영국 런던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으로 이주한다. 회사도 그의 운영방식을 좋아했고 캐시도 낯선 일상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신감이 드러났다. 여섯 살밖에 안 된 리처드도 글을 읽고 쓰고 2학년은 되어 보였다. 그렇게 4년간 살아온 '세상의 끝'에 있는 그의 집은 안식처였다. 로바지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였다. 출장을 다녀오며 로바지는 아들과 함께 날릴 연을 사온다. 아내는 "멋지네."라고 말했지만 너무나 단조롭고 모호하다. 이곳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즐겁지 않냐며 캐시를 놀리는 듯한 로바지. "그래, 당신은 만족해?" 하며 갑자기 그녀는 울음을 터뜨린다. 로바지는 리처드가 말한 박스 힐로 가서 연을 날린다. 갈매리를 보았다는 리처드, 정확히 바람 부는 곳을 알고 있는 리처드, 연에는 꼬리가 꼭 있어야 된다는 리처드, 아빠 넥타이로 연을 만들 수 있다는 리처드. 뒤로 걸으면 줄이 팽팽해질 거라는 로바지의 말에 줄을 실뭉치에 감는 리처드. 더 큰 플라스틱 연을 사주겠다는 로바지의 말에 그건 영국 법에 걸린다고 말하는 리처드. "누가 그러든?" "어떤 남자가 말해줬어요." "어떤 남자가?" "엄마 친구요."

 

그들은 이 낯선 나라의 '세상의 끝'에서 외따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자기 얼굴이 일그러지며 슬픔을 드러낸 것 같았다. _22p
 


아이를 추궁하고 싶지만 겁에 질릴 것 같아 그들은 차를 타고 아무 말 없이 '세상의 끝'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로바지에게 '세상의 끝'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게 되었다. 그곳은 균열의 끝이었다.

너무 늦었고, 너무 멀어졌고, 너무 깜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들 모두가 사라졌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_32p

 

하퍼는 수백 번이나 혼자서 말했다. "난 지금 파리에 있어." 처음에는 흥분에 들떠서 속삭였다. 하지만 며칠 지나자 낙심한 태도로 거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굴욕적인 어조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_246p

 

<여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최근에 졸업한 하퍼는 파리의 한 이란인의 부동산 투자금, 불법 자금을 운반하는 역할(배달원)을 맡아 파리에 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이란인의 대리인인 언더쇼를 만날 수 없고, 그의 사무실에서 국립예술기금을 받아 파리에 와서 시를 쓰고 있는 범가너를 만난다. 하퍼는 자기가 낸 세금의 대가로 그가 파리에서 공짜로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하퍼는 언더쇼의 지시를 마냥 기다리게 된다. 파리는 아주 작아보였다.

우리는 하염없이 기다린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더 낫고, 덜 굴욕적이다. 어른의 힘은 이 조급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품위를 유지하는 데 있다. _256p

 

하퍼는 침대에 홀로 누워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벽지 무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호텔의 벽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한없이 외로운 여행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_256p

 

지루해진 하퍼는 산책을 하고 결국 언더쇼 사무실을 찾는다. 그곳의 비서 클레어와 술 한잔을 하게 되고, 그녀는 아나키스트에 약혼자가 있는 레즈비언이었다. 하퍼는 아내를 사랑하고 어떤 욕망도 느끼진 않았지만, 그의 호텔 방에서 관계를 가진다. 범가너, 언더쇼, 클레어를 만나면서 그는 개방적인 파리에서 관습적인 미국을 그리워한다. 돈이 들어 묵직한 서류 가방을 보면서 자신이 아직 파리에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그들에게 모욕당한 느낌이었고 스스로 자신을 혐오스럽다고 느낀다. 빨리 이 수치스러운 볼일을 끝내기를 바란다.

 

낯설고 이질적인 공간과 사람은 개인의 사고와 생각을 더 명확히 해준다. 그것이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나의 욕망과 집착일 수 있다. 숨겨 놓았던 나의 습관과 취향일 수 있다. 낯선 곳과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하고 외로워 익숙한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반대로 자신을 모르는 곳과 사람들 사이에서 억제된 감정을 표출하고 일탈을 한다.

 

폴 서루의 <세상의 끝>은 제목 그대로 세상의 끝에서 만난 나 그리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 끝에서 만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씁쓸한 그 끝의 경계에 우리는 서 있다. 

 

낯선 곳에서의 일요일은 가장 지독한 지옥이었다.

c******y 2023.10.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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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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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세상의 끝>은 영화적이다.풍경과 심리, 상황의 묘사가 선명하고 입체적이다.비명없는 비극이 고요한 파국을 불러온다.   아련한 느낌의 표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설들로 채워진 <세상의 끝>은책 뒷장에 실린 김연수의 추천사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덕분에 만나 볼 수 있었다.낯선 작가의 글을 통해 만나는 낯선 세계는 늘 일말의 설렘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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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세상의 끝>은 영화적이다.

풍경과 심리, 상황의 묘사가 선명하고 입체적이다.

비명없는 비극이 고요한 파국을 불러온다. 

 

아련한 느낌의 표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설들로 채워진 <세상의 끝>은

책 뒷장에 실린 김연수의 추천사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덕분에 만나 볼 수 있었다.

낯선 작가의 글을 통해 만나는 낯선 세계는 늘 일말의 설렘을 동반한다.

 

 

 

m*****5 2018.01.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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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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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서루는 여행 문학의 거장이다. ​15편의 단편 소설에는 각국을 배경으로 한다.포르투칼, 네덜란드, 사모아 섬 등. 여행 문학이라고 해서 각 나라의 풍경과 문화를 언급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 군데군데 주변의 풍경과 주인공의 심리를 비교해서 글을 쓰고는 있지만, 여행지의 풍경과 정서가 주소재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생각과 고민이 주소재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일,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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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서루는 여행 문학의 거장이다. ​15편의 단편 소설에는 각국을 배경으로 한다.포르투칼, 네덜란드, 사모아 섬 등.

여행 문학이라고 해서 각 나라의 풍경과 문화를 언급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 군데군데 주변의 풍경과 주인공의 심리를 비교해서 글을 쓰고는 있지만, 여행지의 풍경과 정서가 주소재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생각과 고민이 주소재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일, 나이, 부모 등의 이유로 외롭고 소외된 사람들이 나온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은 세상의 끝으로 갔고, 그 곳에서 그들은 ​​사랑했던 연인, 가족, 독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관심을 바란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낯선 곳에서 둥둥 떠 있는 주인공들이 위태로와 보였다. 자신이 알고 믿어왔던 것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을 폴 서루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푸른 섬'은 저자의 자서전적 이야기라고 해서 한번 더 읽어보기도 했다. 폴 서루는 스스로 여행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극에 달하면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이 열린다고 한다. 세상의 끝에서 그들이 모두 새로운 삶을 이어나갈 희망을 보길 바란다.

YES마니아 : 로얄 d*******a 2017.08.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