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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황인숙
의도한 페이지 분할인지는 모르겠고 , 남진우 시인의 가시와 황인숙 시인의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ㅡ 두 시가 펼치는 풍경이 사뭇 재미나서 , 시집 안에서도 먹고 먹히며 죽고 태어나는 말들의 잔치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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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500호 시집은 출간된 지 최소 10년이 지난 시집들 중,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1989), 황지우의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8),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1981) 등 판매가 두드러지고 독자와 시단의 꾸준한 관심을 받아온 65명의 시인들의 시집을 추려보았다. 최근 40년 사이 한국 시단에서 이른바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다고 불릴 만한 시집들을 모은 것이다. 서시, 사랑시, 시인에 관한 시 등의 테마를 지녔던 기존의 기념 시집들에 비한다면, 이번 시집은 독자가 만든 시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40년간 우리에게 각별했던 시집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며, 독자들은 한국 시사를 압축적으로 다시 읽는 보람을 느낄 수 있고 나아가 특정시기에 탐독했던 시들과 재회하며 지난 시절의 '나'를 발견하는 소소한 기쁨도 누릴 수도 있다." - 조연정 <우리가 시를 불렀기 때문에> (시집 발문 중에서)
지난 날, 만났던 시를 다시 만나는 기쁨도 있지만, 지난 날 만나지 못했던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시가 있었기에 어제를 버틸 수 있었고, 시가 있기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고, 시가 있으므로 내일을 꿈꿀 수 있다. 시가 나를 불렀기 때문에, 나는 살아가고 있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 그 속에서도 바람은 /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 김명인 <<길의 침묵>> 일부
시를 보면서 가끔씩은 울고 있는 내 마음을 본다. 그 마음이 정화되고 정화되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주고, 절망적이었던 마음이 희망적으로 바뀌는 순간, 그 기쁨의 순간. 잠시잠깐이었지만, 그 기쁨의 순간은 오롯이 나를 바꾸어놓고 내 미래를 바꾸어놓는다.
"흔들리는 풀꽃이여, 유명해졌구나 / 그대가 사람을 만났구나 / 돌 속에 추억에 의해 부는 바람, 흔들리는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 -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일부
시를 만난다는 건 그래서 기쁜 일이 된다. 나를 다듬고 다듬는 일, 내가 희망이 되어서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일. 내가 가지기도 하지만, 나누어주기도 하는 일.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일부
나누어준다고 내가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손은 비어있을지 몰라도 마음은 풍족하니, 이보다 더 좋은 삶이 어디 있을까.
"시가 우리를 직접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시가 있음으로 해서 누군가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만은 포기되지 않으면 좋겠다." - 조연정 발문, <<우리가 시를 불렀기 때문에>>에서
시가 나를 불렀으므로, 그러므로 나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되어가고 시가 있음으로 인해 누군가의 삶도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는다. 우리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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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두 천 1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 驛頭 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고만고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혀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김명인 , < 동두천 ,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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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묵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 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 본문 48 , 49 , 50 , 51 쪽 ) 김명인 , < 길의 침묵 , 1999 >
ㅡ 시집 , [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 중에서 ㅡ
수많은 책을 읽었고 , 읽었다고 생각했다 . 수많은 시집을 읽었고 안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도 아직도 , 낯설고 모르는 시인의 이름과 시의 제목과 싯귀 속에서 말을 잃는다 . 1979 년의 시 , 1999 년의 시를 이제 만나면서 , 나는 무엇을 읽고 읽었다고 생각했는지 , 이럴 땐 읽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 시작도 끝도 없을텐데 싶어서 마음이 무너진다 . 시를 세상 한 귀퉁이에 내놓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 , 이름만 , 책의 얼굴만 나오는 것이라도 , 때로 감사해야 할까 ? 어쩌면 ...... 내 사소한 읽음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 어쩌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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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억 7천만 년의 고독
함성호
ㅡ
21세기는 우리를 , 마약과 동성애와 근친상간과 싸운 바보스러운 세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성 聖 과 속 俗 과 천국과 지옥의 잠 속에서 나는 그대를 추모하지 않는다 당신은 꽃과 비의 정원에서 무엇인가를 불리어가는 듯한 썰물과 흉한 가슴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모든 죽음들에게 , 입에서 항문까지 비로소 내장된 세상이 환하게 보인다 기껏 보살펴주었더니 몸이 나를 배반한다 바람에 담쟁이덩굴이 온 집을 흔들어놓고 당신은 안개꽃을 먹으세요 나는 장미꽃을 다 먹어치우지요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내일 신문에 코를 박고 방금 자신들이 떠나온 세상의 풍경들을 읽어내며 간단없을 생을 수군거립니다 권태롭듯이 아버지가 실내 낚시터에서 돌아오지 않고 형은 노래방에서 하루 종일 살았습니다 적막강산 寂寞江山 ㅡ , 오늘은 비가 징벌의 연대기처럼 내려 만화방창 萬化方暢 의 정원에서 식구들은 내 머리에 자라 있는 무성한 숲을 보고 놀라 시퍼런 낫을 들고 쳤지마는요 나는 늘 시원했습니다 나도 뜨겁거나 차지 않은 것들은 모두 내 입 밖으로 뱉아버리겠습니다 당신의 그 지루한 기다림만큼 아무것도 제시할 수 없는 이 위증의 세계에서 나도 그댈 겁나게 기다립니다 당신은 오래 꽆과 비의 정원에서 서 계세요 나는 넘치는 술잔을 들고 삼독번뇌의 바람을 기다리 지요
(본문 168 , 169 쪽 )
봄내 ,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함성호
ㅡ
바다를 보지 못해 나는 병들었다 헛헛한 꽃들이 마른버짐처럼 피어나는 한 철 송홧가 루 날리는 독백의 산 그림자 속에서 나는 변절의 수상스 런 기포를 끊임없이 뿜어 올리는 눈먼 쏘가리였다 청춘 의 푸른 가시에 상처 입은 맨살 위로 축축한 안개에 불을 지르는 자학의 방화범 , 얼른 잿더미로 화해버리지 못해 안달하곤 하던 번제의 부정한 제물이었다 솔잎혹파리에 침식당한 소나무숲을 가로질러 은 . 백 . 회색의 나무들을 기르는 긴 강이 비에 젖을 때 내 광활한 불의 나무숲도 그 중심으로 푸르게 젖어갔다 살아 있다면 흐르는 푸른 색으로 보호받고 싶었다 ㅡ 짙푸른 밤의 바다뱀 자리가 눈부신 햇살을 인 자작나무처럼 별들은 사원 목어의 빈 배를 두드리며 죽은 나무숲의 뿌리를 적시고는 곧 , 지하 의 수맥으로 흘러갔다 봄볕에 투사된 연녹색 이파리 위 에서 봄볕보다 더 투명해져가던 카멜레온의 진정한 색은 무엇이었을까 ㅡ 무성한 수풀이 가르마처럼 갈라지며 종 다리 우짖는 창천의 하늘 아래로 한 마리 정결한 산뱀이 사라져가고 가는 가지에서 막 자라는 순결한 잎은 마지 막 내려앉은 불은 삐라처럼 빛났다 엄청난 수압의 폭포 를 뚫고 둥지를 키우는 물까마귀의 날개처럼 몰래 키워 온 내 어린 철쭉의 붉은 꽃잎도 폭설에 부러지는 예각의 솔가지로 눈멀어갔다 강의 상류로 흘러가는 일점 바람은 뛰어오르는 잉어의 아가미를 꿰어내고 봄내 , 거기서 나 는 죽어도 좋았다
(본문 170 , 171 쪽 )
함성호 시 [ 56억 7천만 년의 고독 , 1992 ]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중에서 ㅡ
모처럼 반짝 말갛게 개인 하루 봄볕이 마냥 좋은지 집 앞 겨우내 비어있던 정자에 모인 사람들 말소리가 두런 두런 두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하하 호호호 정겹다 봄 햇살은 이제 서늘해졌을 시간인데 사람들의 시간도 봄처럼 깊어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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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사랑 노래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
사랑한다 사랑한다 ,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
성긴 눈이 날린다 .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 ㅡ 황동규 <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 1978 >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 망가드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 서로 다른 새떼 지저귀던 앞뒤 숲이 보이고 안 보인다 . 숨찬 공화국이 안 보이고 보인다 . 굴리고 싶어진다 , 노점에 쌓여 있는 귤 , 옹기점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 , 둥그렇게 누워 있는 사 람들 , 모든 것 떨어지기 전 한번 날으는 길 위로 . ㅡ 황동규 <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 1978 >
가속하는 세계 , 길 위를 보면 더 먼 옛날의 길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그립거나 , 그립지 않던 날들의 풍경 그러거나 말거나 자연은 변함없이 그 위로 변화를 보이고 , 사람들 왔다 간다 . 나도 왔다 갈테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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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숲 1 여느 새벽보다 일찍이 수레를 끌고 숲으로 나갔다 . 어둠이 걷히지 않은 하늘 위에는 희미한 하현달이 사위어가고 별은 구름장에 가려져 있었다 . 동이 트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 내 당나귀가 간밤 늦게까지 실어나른 곡식들과 함께 곯아떨어져 있었으므로 나는 어둠 속에서 살결을 쓰다듬으며 깨웠다 . 소나무 껍질같이 거칠어진 잔등 . 당나귀는 몇 번인가 새벽 공기 속으로 입김을 불며 흰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 여느 새벽보다 이른 새벽이었다 . 내 당나귀는 이상히 생각하리라 . 먼동이 트고 쓰러진 잿빛 구름 기둥 틈 붉은 빛 움틀 때 주인을 따라 수레를 끌었으므로 . 하늘에는 잿빛 구름장이 빠르게 이동하고 언 호수에는 새벽별이 박혀 있었다 . 얼음의 거울에서 수없이 눈 깜짝하는 빛 . 어둠 속으로 나 있는 샛길은 아무도 들어가보지 않은 길처럼 충만하고 은밀하다 . 수없이 다니던 길이었다 . 하지만 전혀 한 번도 다니지 않은 길처럼 빛이 감돌고 있었다 . 낯익은 길도 첫길처럼 느끼는 수도 있으리라 . 착한 대지의 딸들인 길들아 . 저 숲속에서도 길들이 일어났구나 . 착한 내 딸들아 . 착한 내 딸들아 . 빛을 마중 나왔구나 . 수레에 실은 곡식들의 예쁜 잠이 흔들리지 않도록 나는 조심스레 당나귀를 데리고 갔다 . 숲으로 가는 언덕은 언제나 자갈길 내 당나귀가 몇 번을 울었는지 모든 희미한 빛이 지상에서 더욱 고요해지는 그 시각에 울음을 멈췄으므로 숲은 더욱 적요하고 고요했다 . 공손해라 , 가까이 왔다 . 저 숲의 고요를 관장하는 그분에게 방정맞은 네 울음이 들려 고요를 깨워놓지 않도록 . 숲은 청빙 淸氷 하고 고요했다 . 내 늙은 수레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풍금 소리를 냈으므로 나는 사방 숲을 향해 수없이 사과를 하며 지나갔다 . 조용해라 , 어진 수레야 , 네가 배운 공손함을 그분께 보여라 . 먼 길을 가깝게 귀 대고 듣는 너희의 귀에 그분의 고요가 깃들이면 영혼은 즐겁게 자갈길을 노래하리라 . 숲 가운데로 들어서자 언 호수에서 빛이 일어서고 있 었다 . 어둠 속에서 밤새들이 언 공기를 털어내며 깃을 움추린 그때 새벽별이 눈을 깜짝거렸으므로 나도 눈 깜짝이며 미소를 보냈다 . 이제 조금 있으면 동이 트리라 . 날개가 무거워 땅에 끌리는 육신들이 천상 天上 의 노동에 참여하는 첫 일과는 움트는 빛을 착한 딸들과 함께 미리 마중 나가는 일 . 나와 너희들은 수레에 실린 곡식을 내리며 천상에서 터지는 징 소리를 처음처럼 맞이하리라 . 숲은 비밀스러운 부름이 있는 곳 . 붉은빛이 나래 치는 바윗가에서 부름 소리를 들으리라 . 그 소리가 귀에 닿기 전 회리바람이 불어 앗아가는 일은 없으리라 . 하지만 기다리는 육신에게 신은 언제나 묵언 默言 으로 말할 뿐 . 새벽빛 같은 눈짓으로 묵시 默示 할 뿐 . 여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별들은 광채에 싸인 숲길에 나타났고 내 착한 딸들은 먼저 나와 있었다 . 나는 숲 가운데 언 호수를 지나 그분을 찾아갔다 . ㅡ조정권 , <신성한 숲 ,1994 > ************************************************************* 매혈자들 그들은 제각기 얼어붙은 몸으로 찾아와 병원 침대에서 한 삼십 분 정도 누워 있다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선짓국 집으로 몰려왔다 사골뼈 대신 공업용 쇼팅 기름을 쓴 이백 원짜리 국밥을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 개중에는 아편을 사듯 소주 반 병을 시켜 먹고 의자 뒤 로 스스르 주저앉아 못 일어나는 이도 있었다 적십자 병원 뒤 영천 靈泉 시장 말바위산이 올려다보이던 어둠침침한 밥집에서 서로 등 돌리고 서로의 밥에다 가래침을 뱉는 그 바닥 . 갈 곳 없는 심연 속을 그들은 걸어 내려갔다 제각기 몸을 등잔으로 삼고 어두움 속으로 . 육신에 가둬놓은 영혼의 어둠이 견딜 수 없이 몸을 누르고 눈을 봉할 때 그들은 다시 와서 피를 뽑았다 . (본문 39 , 40 , 41 ,42 , 43 , 44 쪽 ) ㅡ 조정권 , < 신성한 숲 , 1994 > 시집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 중에서
몸을 텅 비우며 자라는 대나무를 생각한다 . 몸안에 시커먼 구멍을 키우는 사람을 생각한다 . 제 속을 비우고 껍질의 두께를 키우고 마디를 키우는 대나무 . 제 몸 속 따듯하게 돌던 피를 빼내고 나오는 허기짐 . 울컥하는 비참함에 선짓국 대신 들이켰을 소주 반병 . 벌컥하는 가난앞에 누가 빼앗을까 밥 그릇을 지키던 마음 . 그 차디찬 열기를 텅 빈 몸은 못이기고 주저 앉았을 생에 대해 그 뜨거운 생에 대한 집착을 누가 매혈이라 비웃을까 생각한다 . 멀건 피가 돌고 있을 그들의 어두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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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해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 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줜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 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 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오규원 < 길 , 골목 ,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 , 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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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둑
강과 둑 사이 강의 물과 둑의 길 사이 강의 물과 강의 물소리 사이 그림자를 내려놓고 있는 미루나무와 미루나 무의 그림자를 붙이고 있는 둑 사이 미루나무에 붙어서 강으로 가는 길을 보고 있는 한 사내와 강물을 지그시 밟 고서 강 건너의 길을 보고 있는 망아지 사이 망아지와 낭 미초 사이 낭미초와 들찔레 사이 들찔레 위의 허공과 물 위의 허공 사이 그림자가 먼저 가 있는 강 건너를 향해 퍼득퍼득 날고 있는 새 두 마리와 허덕허덕 강을 건너오 는 나비 한 마리 사이
(본문 28 , 29 쪽 )
오규원 <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 2005 >
ㅡ 시집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중에서 ㅡ
낭미초를 찾아보니 , 우리가 흔히 강아지풀이라 부르던 풀이었다 . 이리꼬리풀이라고도 수크령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 그렇지만 강아지풀은 수크령과 다르다 . 강아지풀이 더 작고 아담하고 수크령은 확연하게 크다 .
어릴 때 주먹 쥔 손위에 올려 놓고 강아지풀을 가지고 놀던 기억 . 수크령은 본 기억이 있지만 가지고 논 기억은 없다 . 이슬 잔뜩 묻은 강아지풀에 종아리가 늘 젖던 기억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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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위한 기도
남진우
이 밤 대지 밑 죽은 자들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내 잠을 깨운다
지하를 흐르는 검은 물줄기가 누워 있는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와 몸 가득히 어두운 말을 풀어놓는 시각 목구멍을 타고 내 몸 곳곳에 번져나간다
죽은 자들로 가득 찬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가보면 멀리 밤하늘에 떠 있는 차가운 달의 심장
대지 저 밑에서 죽은 자들의 손톱과 머리칼이 소리 없이 자라듯 나는 이 밤 그들의 말이 두근대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어둠 저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의 눈빛을 막막히 마주 보고 있다
(본문 106 쪽 )
남진우 시 , [ 죽은 자를 위한 기도 , 1996 ] 시집 ,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중에서 ㅡ
3월 주말 저녁 비가 오는 거리 , 마냥 젖는 바닥 . 허연 길 바닥 위에 무수한 풍경 위에 점점이 내려 앉는 빗방울 . 돌아오는 길은 빗방울이 모두 차지하고 앉았다 . 길 바닥이 검게 지워지는 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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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뿌리 끝까지 잡아당긴다
비는 내리고 나무들이 낮아지는 하늘을 흔들고 있다 높은 새집이 위태롭다 빗속에서 이 하루의 남은 빛을 나무는 뿌리 끝까지 잡아당긴다 어둡다 오늘도 병 病 같은 우리를 덮치는 밤은 어디에서 오는지 온갖 소리들이 젖어 몸에 감기고 기둥 같은 내 슬픔도 완강하게 불어난다 어둠은 늘 내 몸에서 시작된다 내가 있는 곳은 유독 어둡고 바람은 밝은 물방울들을 훑어서 간다 어제의 그 슬픈 별도 숨은 이곳을 등지고 얼마나 멀리 나는 갈 수 있을지 빗물은 낮은 땅을 지우고 물속까지 어둠이 자꾸 모여드는데
조은 , < 무덤을 맴도는 이유 ,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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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맴도는 이유
알 수가 없다 내가 자꾸 무덤 곁에 오게 되는 이유 무덤 가까이에 몸을 둬야 겹겹의 모래 구릉 같은 하늘을 이고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무덤처럼 형체를 갖는 이유
그러나 , 알고 있다 , 오늘도 나는 내 봉분 하나 넘어가지 못한다 새들은 곳곳에서 찟긴 하늘처럼 펄럭이고 그들만이 유일한 출구인 듯 눈이 부시다
알 수가 없다 무덤만 있는 이곳에 멈춰 있는 이유 막막함을 구부려 몸속으로 되밀어 넣으며 싱싱했던 것들이 썩는 열기를 느끼고 있는 이유
사람들이 몇 줄 글로 남겨놓은 비문을 찾아 읽거나 몸을 잿더미처럼 뒤지며 한 생명이 무덤 곁에 있다
( 145 , 146 , 147 쪽 )
조은 < 무덤을 맴도는 이유 , 1996 > 시집 [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 중에서
화요일에 업데이트 되는 네이버 팟캐스트 알람이 울리고 , 호안 미로와 파블로 카잘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팟캐스트를 끄려다 문지사의 오늘의 시가 눈에 들어 왔다 .
무덤을 맴도는 이유 . 남자 성우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지만 , 시는 나를 불렀다 . 정말 , 시집 제목이 좋다 . 시가 나를 불렀다 .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ㅡ 이 느낌을 처음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다 . 내가 시를 찾아 페이지를 넘기고 조은 시인을 찾아보게 되는 동안의 느낌 . 부르고 부른다 . 서로 짝을 찾는 것처럼 .
무덤을 맴도는 이유를 , 알지만 또 알 수가 없다 . 그 곳을 찾는 그 마음을 알지만 살면서는 왜 , 왜 , 이렇게 죽음이 , 보낸 상처가 아물지를 안을까 ... 그러니 찾아가게 되고 되돌아올 뿐이다 .
죽음이 , 늘 코 앞인 듯이 따라 가고 싶다가도 알고 싶음이 내 옷깃을 잡고 아직 가지 말라 , 때가 아니라고 한다 . 그곳은 이상한 구덩이이다 . 어둡지만 , 혼자지만 , 이상한 아늑함 . 그렇지만 알 수없다는 말을 알아 듣는다 . 그래 그래 , 그렇지 , 하면서 ... 같이 고갤 끄덕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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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구경
ㅡ따듯한 봄날 어머니 , 꽃구경 가요 .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쿰씩 한 움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며 가네 . 어머니 , 지금 뭐 하시나요 .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 솔잎은 뿌려서 뭐 하시나요 . 아들아 , 아들아 ,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 김형영 < 다른 하늘이 열릴 때 , 1987 > ***************************************************** 노루귀꽃 어떻게 여기 와 피어 있느냐 산을 지나 들을 지나 이 후미진 골짜기에 바람도 흔들기엔 너무 작아 햇볕도 내리쬐기엔 너무 연약해 그냥 지나가는 이 후미진 골짜기에 지친 걸음걸음 멈추어 서서 더는 떠돌지 말라고 내 눈에 놀란 듯 피어난 꽃아 김형영 < 낮은 수평선 , 2004 >
지금은 비가 오는데 , 책 장 속의 시는 눈부신 봄 다정한 부름이다가 돌연한 공포로 봄 날의 바람이 덜컹일 수도 있구나 . 어지러운 꿈을 꾸게 될 것 같은 시 한편 . 어머니 , 차라리 두렵다 말씀하실 것이지 ... 모진 아들 걱정이라니 , 저 모성이 나는 더 무섭다 . 차라리 암말 말고 숨죽여 우셨더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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