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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오즈amos oz의 『삶과 죽음의 시rhyming life and death』. 머리가 아프다. 상상인지 현실인지 심지어 아직도 모르겠다. 아직도 상상인지 모르겠다. 현실인지 심지어 모르겠다. 모르겠다 나는 심지어 아직도.* 주인공 <저자>가 뿜는 끝없는 상상의 똬리는, 도중에 멈출 수 없는 사정射精과도 같이 거침이 없다. 그런데 실제 ㅡ 실제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하면, 나는 심지어 아직도 모르겠다! ㅡ 로는 세피아 빛 사진의 시대에서 온 사진사처럼 셔터를 눌러 유령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p.128). 마술적 허구주의나 난폭한(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텍스트는, 이 작품을 더욱 가볍거나 더욱 무겁게 혹은 대상을 관통하거나 속박된 시詩를 표방한다 ㅡ 영화 《스내치》에 등장하는 후, 하고 불면 사라지는 브릭탑의 돼지우리처럼. 아니면 작가는 작품에서 아예 자신을 흔적조차 없이 제거했을 수도 있다. 현실과 판타지가 샴쌍둥이에서 온전한 하나의 숨죽인 목소리가 되었기 때문에. 아모스 오즈는 삶의 성질과 죽음의 성질을 연결하고 통합했다. 파편적인 것을 축적하고 그것들을 활자로 치환하여 극렬하게 소비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완전히 개방된 <삶과 죽음의 시>와 마주하게 된다. 현실의 그림자는 엄청난 함의로, 상상의 공간은 잠겨 있지 않은 출구가 되기 때문이다. 즉 여기 이 모든 건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이고 우습고 끔찍하다는 결론이거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기 위해 불을 켤 가치가 있거나(p.159-160). * 지금 이 자는 아모스 오즈의 『삶과 죽음의 시』에 나오는 구절을 어쭙잖게 갖다 쓰려 한다. 아모스 오즈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글쎄, 어디 봅시다. 당신은 심지어 아직도 모르겠다? 아직도 당신은 심지어 모르겠다? 심지어 아직도 당신은 모르겠다? 아직도 당신은 심지어 모르겠다? 아직도 심지어 당신은 모르겠다? 모르겠다 당신은 심지어 아직도? 자, 이 중에서 적합하지 않은 것을 지워 보시오.(p.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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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제목에 달라붙은 ‘~시(詩)’에 현혹되면 작품을 읽어나가는 데 혼란이 있게 된다. 작가의 감수에 의해 영역(英譯)된 제목을 보면 ‘Rhyming Life and Death’, 즉 이치 혹은 까닭이 있는 삶과 죽음, 또는 운율이 있는 삶과 죽음 정도로 직역 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이치(理致)를 말하는 것이다. 작품은 바로 그 조화의 질서를 탐색하는 것이지 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이해하고나면 소설을 읽어나가는데 저항감이 사라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익명의‘저자’이다. 그는 왜 글을 쓰는가? 왜 그런 글을 쓰는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가? 당신의 책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가의 치열한 글쓰기에 대한 자기 검열과 세상을 향한 겸허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주인공 저자는 소설 속에서 소설을 씀으로서 인간의 모든 것, 바로 삶과 죽음의 얘기를 들려준다. 글 쓰는 것의 실천 양상(樣相)을, 글이 궁극에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만들어 보이는 작업을 통해 인생의 본질을 들려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신작에 대해 독자들과 대화하는 문학의 밤에 가는 길이다. 시작 시간이 남아 카페에 들르고 웨이트리스의 스커트에 밀착되어 드러난 속옷의 비대칭 윤곽에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이내 그녀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상상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풋볼 선수와 사귀고 이내 헤어지고 남자는 또 다른 여자와 동일한 휴양지 호텔에서 사랑을 나눈다. 소설은 이처럼 보잘 것 없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인물들과 소재들이 상상 속에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현실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직조해내는 되돌이표 있는 악보이다. 문학의 밤 주체자인 문학부장, 작품 낭독자인 여성, 문학 평론가인 남자, 비아냥대는 듯한 어느 남자 청중, 문학에 관심이라곤 없는 길거리에서 마주친 소년과 아이의 엄마, 그들로 인해 관계를 맺게 되는 가공의 인물들이 생성되면서 어느덧 삶과 죽음의 모습들이 하나의 완결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소설에는 하나의 중심 플롯이 있는데, ‘체파니아 베이트할라크미’란 시인의 『삶과 죽음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인 조차도 저자의 짧은 현실의 시공에서 마주한 인물들, 그가 상상의 공간에서 만들어 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에 합류시켜버린다. 그런데 이 상상의 얘기가 문학의 밤을 마치고 어둠이 내린 쓸쓸한 도시의 늦은 밤과 새벽을 거니는 저자의 현실세계와 수없이 교차하여 그 경계가 흐릿해져 버린다. 현실이 곧 허구로 연결되고, 허구는 어느덧 현실에 와 닿는다. 자신의 작품을 낭독한 여성과의 산책, 그녀와의 하룻밤 기묘한 정사, 그러나 남성의 실패와 여인의 자격지심이 교묘히 얽히는 장면들, 복권에 당첨되어 잘나가던 한 남자가 죽음을 앞에 둔 채 병원에 누워있고, 어머니의 용변을 받아내야 하는 임시직을 전전긍긍하는 남자 등등 끊임없이 관계들이 만들어지고 전개된다. 이들 얘기는 살아있음에 대한 실제의 비루함으로 그득하다. 이 지리멸렬한 삶을 증거 하는 것으로 관능이 세밀하게 묘사되는 것도 아마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피부로 그녀의 호흡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과 그녀의 살갗에 이는 잔물결들을 감지하고,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이하 생략)”처럼 그 능숙하고 기막힌 관능의 포착은 작가의 소설적 기교가 어디에까지 이르러있는지에 대한 목격이 되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성의 이해는 “유성 생식이 출현했을 때 비로소 노쇠와 죽음이 출현했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 함께 태어난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성과 죽음일 것이다.”에서 정점에 이른다. 삶이 있었고 죽음과 성은 나중에 생긴 것이니 죽음의 불가피성은 제거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그러기 위해서 성을 제거하면 영생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흥미로운 주장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몇 차례 모습을 바꾸어 반복 등장하는데,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애무하는 듯한 젊은 여자의 손길을 느끼는 환상으로 내비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죽음의 파트너는 성이란 것이니, 일견 낭만적이고 희극(喜劇)적이라고 까지 할만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내일도 무덥고 축축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내일은 오늘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삶의 보잘 것 없음에 더욱 쓸쓸함을 더한다. 그저 이따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불을 켜는 것 말고는 별로 기대할 것 없는 것이 삶이란 말일 게다. 그러고 보면 결국 남는 것이 없다. 바로 무(無)! 그것의 깨달음 말고는..., 아니면 유성 생식과 죽음이란 그 영원한 반복, 영생의 이치 말고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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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출간된 아모스 오즈 작품을 모두 읽어보았지만 이 작품만큼 난해했던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몇 번을 읽다 멈췄는지 모른다. 분명 똑바로 읽고 있었음에도 길을 잃고 헤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읽었다. 그러다 겨우 줄거리를 잡고 읽다 잠시 쉬었는데 한번 끊겨버린 호흡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끝까지 다 읽었지만 안개 속을 뚫고 나온 듯 찜찜하고 불안한 마음을 내내 떨쳐버리지 못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상상이 현실과 버무려지면서 허구를 구분할 수 없었을 때 나는 길을 잃었다. 자신의 낭독회에 참여하기 위해 들른 카페에서 그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마음껏 그들의 이름과 삶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평소에 엉뚱한 상상을 잘하는 편이라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가진다는 것이 심하게 생뚱맞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 사람들의 인생까지 관여하지 못했지만 타인을 관찰할 때 단면적인 상상을 자주 하곤 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주인공의 은밀한 상상에 백퍼센트 공감은 할 수 없어도 그런 자유로움을 부러워하며 조금씩 편해졌던 것 같다.
마치 청중이 문학 전문가의 안내에 따라 그의 저작에서 곁가지에 해당하는 사소한 문제들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저자가 청중의 주머니를 털고 있는 듯하다.(30쪽)
소설 속 주인공이 타인을 보며 관찰하고 상상하는 모습을 묘사한 재미난 표현이다. 낭독회에 정신이 팔려 있는 청중을 보며 오히려 그들을 낱낱이 분석하는 것. 그 은밀한 세계를 그 자리에 찾아온 독자들에게 말할 수 없으므로 오히려 제 3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또 다른 독자인 나는 뭔지 모를 겹겹의 지켜봄을 경험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상상은 너무 현실 같아서 혼자만의 상상이라고 구분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또한 그 상상의 색은 밝은 색보다 어둠의 색에 가까웠다. 그가 묘사한 지하 어디엔가 살고 있을 것 같은 하급 당원의 모습처럼 어쩌면 저자의 상상 속 세계는 아직 바깥세상을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 첫 번째 구경꾼은 나이고 그 세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밖으로 나와 보니 마주한건 내가 처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몽롱했다.
그동안 만나왔던 아모스 오즈의 작품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문체와 인물들의 얽힘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건 없으니까. 단 하나도 없어.(150쪽)‘란 말처럼 이 작품을 읽고 난 이유가 생겨나길 바랐지만 똑 부러지게 그 이유란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하겠다. 그럼에도 책을 읽어나가면서 느꼈던 몽롱함. 저자가 상상해 놓은 세계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고 그 세계가 허구건 현실이건 구분하지 않은 채 나 또한 그 세계를 받아들이고 싶은 만큼만 받아들이는 과정은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줄거리를 간추리려 애쓰지 않고 어떤 의미가 내게 남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던 작품. 그것 하나만은 무척 자유로운 읽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