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도 똒같지도 않은 이유. 누가 책 제목을 이렇게 붙였을까. 여성이라는 단어가 책 제목으로 쓰이는 경우는 대개 페미니즘 책이거나 아니면 여성을 낮추어 이야기 되는 책인 경우가 흔하게 보여져 왔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은 이도 저도 아닌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말했던 중용의 덕이라구 할까 그런 흔적이 보여서 느낌이 새로웠다. 평소에 친구들과 만나서 여성의 삶이니 아니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할 때 동감하면서도 때론 그게 정말 사실일까 의구심을 가졌던 그런 부분들은 의외로 편견과 고정관념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친구의 애인 - 바로 친구의 남자친구와 엉겹결에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게 결국 여성이 제 목소리를 내지 않아서 자초한 결과니 여성이 불평등을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구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까닭이 아니냐면 여성 자신의 문제라구 말하는 그 남자에게 몹시 분해서 씩씩거리던 생각이 난다.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여성과 남성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차분하게 이성적인 토론보다는 논쟁에 더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다. 그때 나는 사회의 문제가 아니냐면 반문했지만 조목조목 그 사례를 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그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읽어보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구 나 역시도 여성성의 편견 못지 않게 남성성의 편견에 길들여진 건 아닐까 하는 '자아비판' 같은 걸 하게 되었다. '왕이 용을 물리치면 내 딸 한 명을 주겠노라고 기사들에게 말할 때, 포상으로 공주를 주면 공주는 가야만 한다는데 대해 아무도 그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저자가 예를 든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다. 왕의 딸은 자신의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싫던 좋던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그렇게 물건처럼 양도되는 대상인가. 참 화가 났다. 어려서부터 듣고 또 읽던 동화책 속의 여자 주인공들이란 자기 의지가 아니라 그저 기다리고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밖에 아무런 행동이란 게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저 여성의 미덕은 끊임없는 기다림이라는 것인가! 책의 차례를 보면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차례의 구성을 보면 흔히 말하는 여성 중심으로만으로 또는 남성위주만으로 되어 있지 않다. 저자는 여성과 남성을 극단적으로 분리 대립하는 성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우리'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남성의 신화에 대해서 또 여성의 신화에 대해서 조목조목 지적한다. 예를 들어서 남자는 호전적이서 전쟁을 선호하고 여성은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편견에 여지없이 반격을 가하는 전쟁을 지지했던 스파르타의 어머니들, 걸프전의 참전했던 군인들 중 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책 곳곳에 제시되어 있다.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봤던가 아니 해 본적 있지만, 그런 것이 불합리하다고 제대로 이야기 해 본적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 것, 지금은 예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여성의 지위가 상승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그 지위의 상승을 운운하는 권력은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남성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교육, 인성, 환경 때문이다. 반면 여성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여성의 심리 때문이다. 남성에게 문제가 있을 때 사회는 그 원인을 설명하려고 외부의 요인을 살펴보지만, 여성에게 문제가 있을 때는 내부의 요인에서 원인을 찾는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르게 친밀성을 규정하고 사랑을 표현한다. 많은 남자들에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하는 행동이나 많은 여자들에게 사랑은 상대방을 흠모하고 있다는 그 생생한 느낌을 즉각 알게 해 주는 것, 즉 말하는 것이다. 여성에겐 감정을 드러낼 것이 기대되고 허용되고 요구되는 반면 남성에겐 감정을 거부하거나 억누를 것이 기대되거나 요구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인생 행로가 남성의 것보다 못한가 아니면 더 나은가 하는 질문 자체가, 남성이 정상성의 기준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마치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밑줄 좍을 강조하던 선생님의 수업처럼 책을 읽는 동안 몇 곳에 밑줄이 그어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무슨 주문처럼 단문이지만 소리내에 읽게 된 대목이다. 여성성의 억압과 남성성의 억압에 대한 저자의 사회심리학자로서의 해박한 지식과 사례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설득당할 수 있게 한다. 간혹 서구적인 입장에서 제시된 의견이나 사례들이 우리 사회와는 조금 거리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권력은 역시 남성의 것이기 때문에 여성학이란 학문도 생겨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만일 모계사회라면 남성학이란 학문도 생겨날까! 교양 선택으로 들었던 여성학 강의 시간 때 들었던 여성학이란 여성만이 우월하다거나 혹은 남성이 더 우월하다 편 가르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여성의 입장과 함께 세상의 절반씩을 이루어 살아가는 여성과 남성이 평화롭고 서로 존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성학이란 일종의 사회학의 한 분야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흑인의 민권 운동의 역사가 하나의 사회적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던 것처럼 여성학이란 것도 성의 편견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면서 공동체적 삶을 함께 영위하려고 하는 그런 사회학 말이다. 앞으로는 여성학이니 페미니즘이 어떤 당돌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우리'라는 개념으로 성의 편견을 없앨 수 있는 분야가 되었으면 좋겠구 읽고 나서는 남자들에게 읽어보고 한번 같이 이야기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커다란 전제의식이나 부담감 보다는 편안하고 생각하게끔 유도를 하는 책의 서술이나 구성방식이 돋보이는 책이다. |
| 진부한 질문 하나. 여성과 남성은 같은가, 다른가? 다시 말해, 여성은 남성과 똑같아지기 위해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남성과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가(즉, 그렇게 폄하되고 억압되어 왔던 소위 '여성성'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발견해야 하는가?) 여전히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 여성과 남성이 같아야 한다면 그것은 기회의 평등이란 점에서 그러한가, 아니면 결과의 평등이어야 하는가? 또한 만약 성차를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생물학적인 측면인가, 사회적구성적 측면인가? 평등-차이(에 기반한 보호) 논쟁이라고도 불리는 페미니즘의 이 고전적 테마는 현재에도 숱한 담론과 실천을 낳는 쟁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물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단호하게 말한다. 여성과 남성은 '다르지도, 똑같지도 않'다고. 차이라는 것은 개별적으로, 맥락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지, 특정한 성에 고유한 특성이라 하는 것은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니체적 의미에서의 '관점주의(원근법주의, perspectivism)'!) 그것은 이데올로기이다. 법에서는 '합리적인 남성', 의학에서는 '70kg의 남성'을 표준 삼아 '보편과 정상'의 이름 속에 타자들을 폭력적으로 가두는 성정치이다. 법, 의학, 심리학, 성, 사랑 등의 주제들을 성큼성큼 내딛으면서 뿌려지는 방대한(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다) 실증 자료들은 저자의 주장을 꼼꼼하게 뒷받침한다. '여성'도 '남성'도 가차없이 해체된다.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여 개념짓는 사고방식은 인간 역사의 뿌리깊은 버릇이다. 구별짓기는 본능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게이다.(노예의 도덕) 이원화는 필연적으로 위계화를 낳는다. 한 쪽은 보편자, 동일자라는 정상적이고 우월한 가치가 된다. 반면 다른 한 쪽은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타자가 되며 여기에는 비정상, 열등함의 딱지가 달라 붙는다. 차이는 차별이 된다. 이제 우월한 가치는 이 세계를 떠나 천상으로 올라간다. 그것은 이 세계를 규정하고, 변화시키는 '외재하는' 원인이 된다. 天上天下 唯我獨存의 초월자가 된다. 권력이 된다. 로고스도, 神도, 진리도, 도덕도, 남성도(!) 이러한 권력의 다른 이름들이다. 형이상학-지배하고, 종속시키는 권력자의 철학(!)-이 완성되고, 인간의 불평등이 여기에서 기원한다. 문제는 무질서한 세계를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다. 항존하는 불변의 존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생성과 운동-변화-만이 있다. 아르케는 형이상학적 탐닉에서 구할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찾아야 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에 의한-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될 수 있을 뿐이다. 다양한 전망에 대한 다양한 해석. 달라지는 관점을 두루 수용하여 주어진 사태를 역동 그 자체로 체험한다는 것은-세계를 '일단 정지'시켜 놓고 원인과 결과로 이분법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깊이와 강인함을 요한다. "동시에 파악되는 것-그것은 완전한 것이면서 동시에 완전하지 않은 것이고, 일치하면서 동시에 일치하지 않은 것이며, 서로 어울리면서 동시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가 가능하고, 하나로부터 모든 것이 가능하다.(헤라클레이토스)" 그것은 곧 주인의 도덕이요, 유물론이다. p.s. 여성성을 긍정하고 여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에코페미니즘과 문화페미니즘의 경우 새로운 가치의 모색이 큰 해방감을 느끼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실제의 변화라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 반디나 시바, 창비 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 |
| 남성과 여성의 관계성 문제는 인류에게 주어진 최대의 숙제 중의 하나이다. 그 과제를 잘 풀어내어 삶 속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풍성한 인성적(人性的) 조화를 누리고 나눌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불행한 관계적 역기능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조화로운 남녀 관계성을 위한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 사회 심리학자 캐롤 타브리스(Carol Tavris)의 책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도 똑같지도 않은 이유』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먼저 "여성과 남성은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또는 그렇다면 누가 더 나은가?" 하는 물음들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서 일차적으로 남성은 만물의 척도이며 여성은 비정상적이라는 견해를 철저한 편견이라고 말한다. 사실 남녀의 차이에 대한 자료들을 훑어보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식의 내용들을 쉽게 접하게 된다. 예컨대 여성은 남성보다 자의식이 낮으며, 자기 능력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기에 남성에 비해 독립적인 정체성, 자의식을 발달시키기 어렵다는 식의 주장이다. 하지만 타브리스가 볼 때 이러한 주장들은 어디까지나 왜곡된 개념이다. 즉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 사회는 여성성을 양육, 의존성, 수동성, 가정적인 특성과 직결시키면서 여성을 무능력한 존재로 전환시켜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왜곡된 주장의 일례로 소위 '월경전 증후군(Premenstrual Syndrome)' 개념을 들고 있는데 사실 여성의 생리적 변화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대중 매체들은 그것을 대부분의 여성이 앓고 있는 질병으로 정의하여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왜곡은 대중 매체가 제약 회사와 철저하게 결탁한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결국 이 책에서 그는 여성의 비정상성(非正常性)을 주장하는 잘못된 논리들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타브리스는 남성 우월 주의처럼 여성 우월 주의 역시 병리적이며 극복해야할 관점으로 보고 있다. 근래 많은 사람들은 남녀간에 매우 큰 차이가 있으며 여성의 가치체계가 남성의 것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것 역시 지나친 이분법에 근거한 논리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견해들이 바로 문화 페미니즘이나 에코 페미니즘 등인데 이 이론에서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 철학이 여성, 어린이, 다른 모든 문화와 환경에 해로운 결과를 끼쳤기 때문에 이제는 여성성이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타브리스는 이렇게 남성과 여성을 대립 항으로 보고 우월성에 있어서 마치 양자 택일을 하는 식으로 접근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그것은 계속해서 남과 여라는 범주로 상호 간을 대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남녀간의 조화와 공생(共生)을 위해 더 이상 남녀간의 차이점을 부각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타브리스의 견해가 남녀간의 선천적인 차이를 도외시하는 극단적인 오류로 발전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동안 남녀 차이를 강조하는 분위기로 인해 오히려 남녀 사이의 불평등한 왜곡 상태가 심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제는 남녀가 서로 간의 차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동질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녀간의 본성상의 차이에 대해 명확하게 주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남녀 서로 간의 상생(相生)을 위해 현 남녀 관계의 제 구조들과 문제점들에 대하여 매우 적절한 언급을 한 타브리스의 견해에 대하여 우리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남녀 상호 간에 조화로운 관계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서로의 다양성을 수용하면서도 하나를 이룰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 닮은 아름다운 인성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존중할 때 그러한 조화로운 남녀간의 공동체 성은 이 땅 가운데 아름답게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진다. |
| 내게 이 책은 미국 생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출판문화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처럼 보인다. 작가가 중요시하는 것은 '여성은 주체적 존재'라든지, '여성은 얼마든지 남성만큼의 능력을 지닌다'등의 개별 명제에 대한 논증이 아니다. 작가는 용의주도하게도 여성에 대한 무수한 '특별한' 담론들이 존재함을 지적한 다음, 그 지적들이 갖는 정치적 함의들을 조목조목(지겨울 만큼) 벗겨낸다. 그 자세에서 이 책은 이전의 무수한 관념적, 감정적 여성학책과 사뭇 다르고, 더욱 우수하다. 인류의 반(참 이상하게도 새삼스럽지 않은가?)인 여성이 '여성'이라는 접두어로 기존 단어에 결합할 때, SF소설가가 있고, 추리소설가가 있듯이 '여성'소설가라는 단어가 존재할 때, 우리는 인류가 얼마나 주류적 규범norm을 가진 존재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은 학문과 사고체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깊숙히 가슴에 품어야 할 문제의식이다. 작가는 통쾌하게도 'PMS'라든지, 'codependency'와 같은 미국사회의 여성에 대한 학술적이고 선의적(?)인 담론들이 사실은 상품과 베스트셀러를 위한 "유행어"라는 것을 밝혀내는 집요한 추격까지 나아간다. 동네 미장원이나 병원에서 기다리면서 집어드는 여성잡지를 한 두번쯤 본 사람들이라면 그 무수한 광고에서 여성에 부가되는 무수한 미의 목록에 대해 기를 차본일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미가 있어 상품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있어 비로소 '미'가 창출되는 꼴이었다. 젖꼭지가 검지않고 핑크색이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여성의 존재가, 그 '관음자'로서의 남성의 시선속에서 형성되는, 마치 '게임 속 여자 캐릭터'같은 존재라는 것을 이 책은 잘 표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