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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과학읽기(실천문학사, 2004)
"인문학으로 과학읽기(실천문학사, 2004)" 내용보기
제주도 명물 중 하나로 물회를 쳐먹는 ‘자리’라는 물고기가 있다. 이 자리라는 놈은 물살이 빠른 암초 주변을 끼고 다니는 습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물을 치기 매우 힘들다. 암초에 너무 근접해서 치면 그물이 찢어지고, 좀 멀리 치면 고기가 빠져나간다. 그렇지만 제주도 어민은 이놈을 잡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가늠을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가늠이란
"인문학으로 과학읽기(실천문학사, 2004)" 내용보기

제주도 명물 중 하나로 물회를 쳐먹는 자리라는 물고기가 있다. 이 자리라는 놈은 물살이 빠른 암초 주변을 끼고 다니는 습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물을 치기 매우 힘들다. 암초에 너무 근접해서 치면 그물이 찢어지고, 좀 멀리 치면 고기가 빠져나간다. 그렇지만 제주도 어민은 이놈을 잡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가늠을 이용하여 이루어진다. 가늠이란 총에 있는 가늠자와 가늠쇠의 원리와 똑같은 것으로 주변의 눈에 띠는 지형지물이 암초 가까이에 정확하게 그물을 드리우는 노릇을 한다.

 

이 제주도의 가늠은 동아시아 과학사의 대상인가 아닌가? 아마도 우수성과 창조성만을 지나치게 고집한다면 이 가늠은 과학사의 족보에 등록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민중의 삶과 관련된 정도만 따진다면, 이 가늠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상당한 타당성을 띠게 될 것이다. 천문, 역법, 의약, 풍수지리뿐만 아니라 농업, 수렵, 어로, 방직, 염색, 건축, 주물, 음식 등에서 가늠과 비슷한 것은 수두룩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과거 민중의 삶이나 오늘날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통로를 제공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과학사는 뚜렷한 과학 전통(또는 분야)에 대한 족보를 구성하는 작업이 아니라 다른 일반 역사 작업처럼 역사적 삶의 발현과 관련된 과학 내용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과학에 묻어 있는 각종 사상, 정치, 종교 따위의 편린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사회 내에서 위치하는 전반적인 맥락과 실질적인 기능, 존재 이유 등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옛 과학 전통에 묻어 있는 현대 과학적인 편린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동아시아 각국의 과학사 연구에서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국수주의적 편향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고학 또는 문화사로서 과학사가 아닌,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 동아시아 과학사의 확립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동원, 동아시아 전통과학사론의 비판적 검토, 257~259

 

 

t****b 2016.01.0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