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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의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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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년 아우크스부르크 전쟁 당시 56척의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를 지휘하던 영국의 제독 토링턴(Torrington)은, 프랑스의 대 선단의 압도적인 화력을 보고 템스 강까지 퇴각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정치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였다. 명예혁명으로 실각한 제임스 2세를 추종하는 이른바 ‘제커바이트파’(Jacobites)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봉기를 일으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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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년 아우크스부르크 전쟁 당시 56척의 영국-네덜란드 연합 함대를 지휘하던 영국의 제독 토링턴(Torrington)은, 프랑스의 대 선단의 압도적인 화력을 보고 템스 강까지 퇴각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정치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였다. 명예혁명으로 실각한 제임스 2세를 추종하는 이른바 ‘제커바이트파’(Jacobites)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봉기를 일으키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토링턴 제독은 고국의 정부를 자극하지 않으려 ‘방어’(in defense) 대신에 ‘현존’(in being)이라는 말을 써서 전황을 보고한다. 그는 만일 프랑스 해군에 들키지 않고 자신의 함대가 퇴각한다면, 프랑스 함대는 어딘가에 영국 함대가 ‘현존’한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함으로,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리라 여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전략은 적중하였다. 처음 영국 정부는 토링턴 제독의 계획을 일축하였고 지속적으로 공격명력을 하달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세가 급도로 불리해지자 제독은 애초의 계획대로 퇴각을 실시하는데, 프랑스 해군은 영국-네덜란드 함대의 반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추가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 함대의 전력 손실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명력불복종 죄로 군사법정에 섰고, 퇴각의 책임을 물어 두 번 다시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후에 허버트 제독에 의해 현존함대(fleeting in being)라고 불리게 되는 토링턴 제독의 ‘현존’ 개념은, 처음 사용 된지 200여년이 흐른 후 미국의 제독이자 전략가였던 알프레드 마한(Mahan)에 의해 재평가된다. 현존함대 개념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실천적으로 접근이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노력덕분이었을까, 오늘날에 현존함대 개념은 더 이상 군사적인 차원에만 제한받지 않는다. 이젠 전 사회적으로 통용될뿐더러 그것에 의해 사회가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대륙의 일인자 가운데 하나였던 작센의 모리스(Maurice) 백작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능력 있는 장군이라면 일부러 전투를 벌이지 않고서도 평생 동안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사실 현존함대는 보이지 않는 선단의 운용술을 철두철미하게 활용하는 병참기술이다. 비록 지금 당장에는 보이지 않지만, 언제 어디에서든 공격을 개시할 수 함대가 바다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 이는 적에게 승리를 확신할 수 없도록, 즉 전 세계 모든 곳을 안전하지 않게 만듦으로서 적의 공격 욕을 사전 봉쇄하는 것이다. 과거 물리적으로 실존하여 ‘존재’(l'etre)하는 함대에서, ‘존재하고 있음’(l'etant)의 개념으로 바뀐 셈이다.
따라서 현존함대는 직접적인 대결이나 대규모의 유혈참사를 피하고, 적으로 하여금 자신의 공격의지와 힘을 상상하게 함으로서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함대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존재하는 한 적은 가망 없는 전투에 일부러 뛰어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존함대는 “장기간 적군의 절망감을 자극해대고 끊임없이 도덕적, 물리적 고통을 가해서 적군을 줄여나가며 서서히 제거하기. 이것이야말로 유혈참사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절망 속에서 항복하도록 만드는 우회 전략(p.107)”인 셈이다.
시간과 공간에 많은 제약을 받았던 과거의 전쟁과는 달리, 현존함대에 의해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상상력을 통해서 과거의 제약을 뛰어넘는다. 많은 장애물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육지라는 한계를 넘어, 전 바다를 ‘병참학적 막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위협은 도처에 널려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총체적인 위협은 사람들의 인식 또한 변화시킨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는 순간에서 믿을 것은 적어도 적보다는 한 발짝 더 앞선 자신의 기술뿐이다. 그러나 적이라고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으랴!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무기가 등장할 때마다, 곧장 더 센 무기로 이전의 무기를 대체해야만 한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명은 속도를 향한 중단 없는 경쟁, 질주의 본능뿐이다. 20세기 미국과 소력 양국을 중심으로 발생하여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었던 군비경쟁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비릴리오는 “무기는 불길한 징조를 드러내는 도구”라는 손자(孫子)의 말을 인용하며, 무기의 ‘상서롭지 못한’ 성격을 세 가지 요소로 지적한다. “하나, 무기가 창안되고 생산될 때 드러나는 무기 성능의 위협. 둘, 적에게 맞서 무기를 사용한다는 위협. 셋, 인명에 치명상을 입히거나 재화를 파괴하는 등 무기를 사용해서 생긴 결과.(p.26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요인 즉 새로운 무기가 창안되었을 때의 위협으로서, 군비경쟁이 심화되는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가령 핵을 사용한다는 위협(두 번째 요소)은, 핵을 실제로 사용했을 시 벌어지는 끔찍한 사태(세 번째 요소)를 통해 어느 정도 진전될 수 있다. 그러나 순진하게 실재하는 적 그리고 잠재적인 적에게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얻어낼 수 있을까? 어쩌면 당연한 이러한 불신과 의문이 ‘억지력’이라는 전략을 용인하며, 결국 새로운 무기의 지속적인 개발(첫 번째 요소)을 불러온다. 적어도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적의 위협 앞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길은, 원자폭탄에는 수소폭탄으로 맞서는 것과 같은, 적어도 적보다 우월한 위협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따라서 군비경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특히 오늘날 새로운 무기 개발은,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적보다 더 큰 규모의 무기가 필요하다는, 다시 말해 ‘수비’의 가면을 쓰고 있기에 도덕적으로도 정당화되어 더더욱 멈출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기술발달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무기의 규모나 성능은 이미 인간의 통제능력을 훨씬 넘어섰다. 1960년도 초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의 대표는 적국의 핵미사일 발사 확인 후 15분 이내에 전쟁을 선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었다. 그러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사태는 만약 소련의 미사일이 쿠바에 정착된다면, 발사 확인 후 전쟁 선포 결정시간이 30초로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10여년이 흐른 후 1972년에는 통상적인 경보발령 대기시간이 탄도미사일의 경우에는 19초, 위성무기의 경우에는 단2초로 급격하게 줄어든다. 사실 꼼꼼하게 검토를 한다 해도 항상 오류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인간에게는, 초 단위는 실로 ‘비인간적인’ 시간단위가 아닐 수 없다. 그 초 단위가(위성무기의 경우 심지어 2초 이내이다!), 수십억 지구인을 죽음으로 내몰고,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을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제3차 대전 발발의 위험성을 심사숙고 결정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모든 변수를 입력한다면 슈퍼컴퓨터에게도 버거운 작업이 아닐까 싶다. 결국 속도의 전쟁은 우리 인간의 의사결정능력까지 폐기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이성능력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자연 상태의 혼돈상태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war of all against all)을 말한 홉스를, 자신의 상상력에 놀아난 사람으로 치부한다. 홉스가 말하려 한 것은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자연(전쟁)상태에 대한 공포이다. 홉스가 말한 그런 전쟁은 존재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사람들에게 전쟁을 떠올려 보라고 말하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할 것인지 상상하게 하여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현존함대 그리고 전쟁 억제력으로서 군비경쟁 또한 마찬가지로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래서 홉스의 전쟁 안에는 “전투가 없고 유혈도 시체도 없다. 거기에는 표상들, 현시들, 기호들, 그리고 과장적·계략적·허위적인 표현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표상들이 교환되는 무대이고, 어디까지나 잠정적일 뿐인 두려움의 관계이다.『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부정의 상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이 인간의 가장 큰 선물이라면 꼭 그렇게 극단적인 상상으로만 나가야 될 이유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지금까지의 사회는 우리를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한 방향으로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상상을 강제해왔다. 이 상상이 지난 세기의 낡은 삶을 재생산해왔다면, 변화와 창조의 상상력, 긍정의 상상은 분명 새로운 삶을 창안할 수 있을 것이다. 
비릴리오는 어느 인터뷰에서 상상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릴레오의 저서는 정치적이다. 코페르니쿠스나 아인슈타인의 저서도 정치적이다.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꾼다는 것, 그것은 곧 정치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낡은 상상은 가고 새로운 상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과장된 위험에 두려워할 필요도, 우리의 고유한 신체 리듬을 파괴하여 죽음으로 향하는 속도와의 전쟁을 치룰 이유도 사라질 것이다. 이 새로운 관점의 변화, 새로운 정치적인 변화 앞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기 속도, 자기 스스로를 다시 ‘발견’할 수 있으리라.

 

YES마니아 : 로얄 a*****e 2008.02.16.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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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와 정치의 테크놀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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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오텍스트에서 출간된 영문판 [Speed & Politics](1986)은 판형도 작고 편집도 허접하다. 영문판보다 한글판이 여러모로 훨씬 낫다. 한글판은 영문판에 없는 존 아미티지의 서문과 여러 사진들과 더불어 역자 이재원의 해설이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양장본이다. 가격도 한글판이 훨씬 저렴하다. 국역본 [속도와 정치](그린비, 2004)는 적극 권장해주고 싶다. 나로 하여금 원서를 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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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오텍스트에서 출간된 영문판 [Speed & Politics](1986)은 판형도 작고 편집도 허접하다. 영문판보다 한글판이 여러모로 훨씬 낫다. 한글판은 영문판에 없는 존 아미티지의 서문과 여러 사진들과 더불어 역자 이재원의 해설이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양장본이다. 가격도 한글판이 훨씬 저렴하다. 국역본 [속도와 정치](그린비, 2004)는 적극 권장해주고 싶다. 나로 하여금 원서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번역본을 탐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양질의 책들이 많이 나와야 된다. 
 

속도가 바로 힘이다. 속도가 시공압축으로 지구촌을 조성했다. 마셜 맥루한의 '지구촌' 개념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작은 사회'의 이미지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연결하고 지리적인 장벽을 허물고 거래를 활성화함으로써 세상을 더 작고 풍요롭고 통합된 공간으로 만든다. 굳이 1450년에 등장한 인쇄매체의 발명을 거들먹거리지 않아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면 속도의 힘을 바로 체험할 수 있다. 공항은 가장 현대적인 운송과 속도의 건축학을 재현한다. 그리고 인간과 테크놀로지 사이에 존재하는 비교적 거시적인 순환 관계를 잘 대변하는 모형이기도 하다. 우리의 인천국제공항은 세계적인 운송과 통신을 아우르는 전송 테크놀로지의 압축판이다.

 

비릴리오는 [속도와 정치](1986)에서 산업혁명이란 없었고 다만 질주정체(dromocracy)의 혁명만이 있었다고 단언한다. 다시 말해서 비릴리오는 막스와 달리,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경제적인 변화였다가 보다는 군사적 공간적 정치적 기술적 변형이었다고 가정한다. 비릴리오는 전쟁모델로 근대 도시의 성장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한다. 군사적 공간과 영토의 조직화가 주제로 부각된다. 가령 봉건제 시대의 요새화된 도시나 현대의 벙커는 모두 전쟁기계였다. 전쟁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군산복합체야말로 도시의 창조, 정치생활의 공간적 조직을 논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프랑스 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속도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창립한 질주학(dromology)은 속도가 현상의 출현 방식을 제한하는 방식을 다루는 지식체계다. 국내에선 대체로 '질주학'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속도학'으로 번역해도 무방하다. 질주학에 따르면, 운동과 속도는 세계 공간의 경험방식을 구성하는 원리다. 비릴리오는 사회적 공간, 정치적 공간, 군사적 공간이 운동 벡터와 이 운동 벡터를 달성하는 전송속도로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질주학은 가속화한 전송속도가 군사, 사회, 정치조직에 미치는 영향을 주로 연구한다. 속도과학으로서 질주학은 전송속도 증대가 개별 지각을, 사회생활과 정치 생활 및 문화생활을 결정지은 방식을 탐구한다. 비릴리오는 그런 자신을 '테크놀로지의 예술평론가'라고 불렀다.

 

z***a 2013.04.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