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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읽기와 쓰기를 즐겨했던 우리 조상들은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나, 아쉽게도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없다. 일단 한자로 기록된 작품이 많아 번역이 요구되고, 한글이라 하더라도 한문투여서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거니와 고루하다는 편견 때문이다. 그래서 서해문집에서 내는 '오래된 책방' 시리즈는 정말로 고맙다. 산성일기는 작가 미상의 작품으로 남한산성 안에서 임금과 함께 수난을 당했던 사람 중 한 명으로 추측되는 인물이 쓴 책이다. 낙선제본, 국립중앙도서관본, 고왕궁본의 세 종류가 전해내려져 오는데 낙선제본판이 정성을 들여 또박또박 쓴 글이라 이 책을 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임금이 숭은전에 새벽 제사를 드리고 돌아오니 까막까치가 날아들어 길조라 했다는 세부 묘사에서부터, 김상헌이 목 매단 사건이나 정온이 칼로 배를 찔러 죽으려 했을 때의 자세한 서술은 현장에 있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언어들이고, 한글로 썼지만 한문 어투인 점, 전란 당시의 국서가 그대로 수록된 점, 척화파의 우두머리를 존경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남한산성에 함께 들어갔던 김상헌의 아들 김광찬이나 조카 김광현 등으로 추정된다.' 고 추측하지만, 보다 확실한 증거 기록이 나오기 전까지는 작자와 창작연대는 미상으로 표기된다고. 1589년 청의 누르하치가 명에게서 용호장군의 이름을 얻는 데부터 시작하여 1639년 12월 삼전도에 승전비를 세우는 데까지 50년의 세월을 담은 일기로, 병자호란 당시의 역사를 당대의 시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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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서 도서 『산성일기』는 병자호란에 급히 남산산성에 피신한 인조와 대신들의 피란기이다. 쓰라린 역사인 병자호란의 기록인 도서 『산성일기』를 읽고서 2018년을 사는 현대인이라면 느낄 당연한 감상이겠지만, 답답함을 넘어 역겨움을 느꼈다. 특히나 위의 도서를 통해서 알게된 김자점과 김류 부자의 패악질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간략히 소개하자면, 김자점金自點은 조선의 핵심 병력인 황해도 병력을 거느림에도 "도적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 라며 안일하게 요행을 바라다가 정작 위급한 상황이 되자 각종 핑계를 대다가 마지못해 출전하여 황해도에서 전투를 지휘 중 겁에 질려 달아나고 이후 성에 숨어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데 급급하였다. 영의정 김류金瑬는 함정임을 걱정하는 병사들을 잔혹하게 사지에 내몰았음에도 결국 책임을 회피하고 죄를 전가하려 했고, 그리고 전시상황에 혼란함을 틈타서 강화도 검찰사로 자신의 아들인 김경징金慶徵을 부임시켰는데, 김자점과 마찬가지로 안일하게 대비하지 않고 매일 과음하다가 청나라 수군에 의해 천해의 요새인 강화도가 함락되어 봉림대군 및 각종 고관대작이 포로로 잡혀 인조의 항복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그래서일까? 자신들이 저지른 불합리함에 대한 보복이 두렵고, 기존에 만끽하던 기득권과 권력욕을 숨기기 위해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면서 안일하게 대처한 인조와 청음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서인세력에게 "무엇이 너보다 못하리오?" 라는 청나라의 황제 '홍타이지'의 글은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울림이 있었다. https://youtu.be/XQjjK-qFek8▶ 손석희의 앵커브리핑 - '노무현의 회한, 그리고...'
국익보다는 권력욕에 몰두해서 해괴한 소리로 국민을 편가르기하고, 공포심을 남발하려는 2018년의 수구세력에게 하고픈 말이다. "무엇이 너보다 못하리오?" p.s. 우리 고전의 대중화를 위해 서해문집에서 정성들여 만든 위 도서지만, 개인적으로는 크게 2가지 아쉬움이 조금 있다. 먼저 편집의 아쉬움이 있다. 중간 중간 관련 자료를 첨부했는데, 글 중간에 뜬금없이 나와서 독서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page 69~ 73를 예로 들자면, page 69 에는 인조가 국서를 보낸 기록을 설명하는데 page 70 ~71 에는 [인조대의 최명길] 의 해설이 있다. 그리고 page 72에는 다시 국서 내용이 이어지는데, 이런 식의 첨부하기보다는 해당 일자의 기록의 끝맺음에 맞춰서 첨부를 하거나 도서의 후반부에 배치하길 추천한다. 다음으로 소현세자에 대한 각주는 정정이 필요하다. ![]() 소현세자가 자진해서 심양에 갔다고 했지만, 이는 위 도서의 1637년 1월 28일(피란 46일째-99page)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청나라 황제인 '홍타이지'의 요구사항 중 하나로써 맏아들(소현세자)과 둘째 아들 및 대신의 아들과 아내를 볼모로 요구했다. 즉, 자진해서 시얌에 갔다고 설명할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요구에 큰 저항없이 갔다'고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볼모로 잡혀가서 8년간 청나라에 체류하면서 청나라나 우리나라에서 제대로된 후원 받지 못하였고, 결국 농사를 일구고 그 이득을 통해 체류비 뿐만 아니라 조선인 포로 지원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각주에는 '막대한 비용을 조선에 부담시켰다'라고 하는 의견은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https://youtu.be/X_TW7HLelL8 - 생생 한국사 '소현세자'
p.s.2. 산성일기&병자호란 해설
https://youtu.be/mDWH99O4OVA ▶ 김용민 브리핑 - 정선태 교수의 [오늘을 읽는 책] (1:11:00 부터 해설)
▶ 이중석 한국사 - 호란사 / 간도문제 (37:00 부터 병자호란 해설)
▶ 9bul - 남한산성 + 역사적정황
▶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 '엄중한 한반도 정세, 병자호란을 기억하라'
▶ 한명기 교수 - G2 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쥐픽쳐스 - 병자호란 한방에 정리! http://www.podbbang.com/ch/11403?e=22032777 ▶ 살아있는 역사 라토리 - 최명길(병자호란) 2 p.s.3. 남한산성 사진&기사 p.s. 4.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 - 환향녀(還鄕女)
p.s.5. 삼전도비 ![]() ▶ 답사여행의 길잡이 - 삼전도비 ============================== 《산성일기》의 산성이란 남한산성의 준말이다. 그렇다면 남한산성 일기란 무엇일까? 병자호란 때 청나라 오랑캐들이 급습해 전세가 급박해지자 미처 강화도로 피란 가지 못했던 인조 임금과 세자 그리고 정부의 관리들이 남한산성에서 난을 피하면서 겪은 일, 즉 청나라에 대한 주화파와 척화파 간의 심각한 갈등으로부터 인조 임금의 굴욕적인 항복에 이르는 그 모든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린 일기 문학을 일컫는 말이다. 《산성일기》의 정확한 창작 연대와 작자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창작시기를 인조 말년, 즉 1649년 이전으로 추론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 현종 말년이나 숙종 초년까지 후대로 내려와서 지은 것은 아니므로, 아무리 내려 잡아도 인조 말년(1649) 이전 그러니까 병자호란이 끝나고 10여 년 사이에 창작된 것이 아닌지 유추할 뿐이다. 그 작자에 대해서도 누구라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작품 속에 묘사된 내용으로 봐서 병자호란 당시 임금과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수난을 당했던 사람으로 추측된다. 이는 김상헌이 목 매단 사건이나, 정온이 칼로 배를 찔러 죽으려 했을 때의 모습, 정축년 정월 11일에 임금이 숭은전에 새벽 제사를 드리고 돌아오니 산성에 이제까지 없던 까막까치가 날아들어 사람들이 길조라 했다는 등 사소한 일까지도 세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산성일기》가 한글본이나 그 문체는 한자어로 되어 있는 점, 정부 관리들의 이름과 직책이 정확하게 기술되었고 당시의 국서國書가 그대로 수록된 점, 척화를 앞서 부르짖다가 삼학사三學士로 추앙받게 된 윤집·오달제·홍익한과 화친을 반대하며 자결까지 하려던 김상헌·정온 등 5명에 대해서는 윤공·오공·홍공·김공·정공이라 존칭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이름을 그대로 부른 점 등으로 보아 작자는 척화파의 우두머리들을 존경하던 남성으로 척화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유추해, 당시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이들과 함께 지냈던 김상헌의 아들 김광찬金光燦이나 조카 김광현金光炫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신빙할 만한 기록이 나오기 이전에는 단언할 수 없다. p 010 《산성일기》 에 대하여 ![]() ==============================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위치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중요한 산성이었다. 산성의 성벽은 청량산(해발 497.9 미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해발(462.6 미터), 동쪽으로 망월봉(해발 502미터)과 벌봉(해발515미터),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성 밖에서 보면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나,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한 넓은 구릉성 분지이다. 또한 물이 풍부해서 자연·지리적으로 훌륭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은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의 성터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광해군(재위 1608-1623) 대였다. 광해군이 1621년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했으나 준공치 못하고, 이괄의 난을 겪은 인조에 의해 1624년 다시 공사가 시작되어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그리고 순조(제 23대왕)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성내 시설이 확충되었다. ![]() 성내 시설로는 수어장대, 숭렬전, 청량당, 현절사, 연무관, 침괘정, 자수당,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행궁 등이 있고 성곽 시설로는 여장 옹성 암문 수구, 치 등이 남아 있다. 인조는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남한산성을 축성했으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和議 하고만다. p 052, 053 ![]() ============================== 부평 안산의 돌이 옮겨져 놓이고, 경상·평안도의 오리가 싸우고, 대구에는 구름이 진을 치고, 청파(서울 서북쪽 청파역)의 개구리가 싸우고, 예안(경북 안동 지역)의 강물이 끊어지고, 서울의 땅이 붉게 변하고, 도성 안에 하루 사이에 스물일곱 곳에 벼락이 치고, 큰물이 급히 들어와 동대문 길이 막히고,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영의정 김류金瑬 등이 묘당廟當(의정부)에 있었으나 화친은 이미 믿을 것이 못 되고, 싸우기와 지키기를 다할 뿐이었다. 최명길이 상소해 화친할 사신 보내기를 청한 데 대해 교리校理 오공(오달제)과 이조정랑正郞 윤공(윤집)이 상소해 최명길을 베라고 했다. 조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김류와 최명길이 의논해 역관을 심양에 보내어 오랑캐의 뜻을 탐지하도록 했다. 이때에 홍타이지가 역관에게 "너희 나라가 동짓날 25일 안으로 대신과 왕자를 보내지 않으면 내 당당히 동쪽으로 크게 진격하리라" 하고 그 답서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너희 나라가 산성을 많이 쌓았으나, 내 당당히 큰길을 따라갈 것이니 산성에서 나를 막을쏘냐? 너희 나라가 강화도를 믿는 모양이나, 내가 조선 팔도를 짓밟을 때에 조그만 섬에서 임금 노릇을 하고 싶으냐? 너희 나라의 의논을 짐작하건대, 모두가 선비이니 가히 붓을 쌓아서 나를 막을쏘냐? ![]() 묘당이 그 편지를 보고 대신을 보내고자 했으나, 척화하는 의논이 바야흐로 무거우므로 보내지 못하고 오랜후에 보냈으나 (저들 또한 그 편지를) 믿지 못했다. 김류나 김자점金自點이 의논해 의주의 (군사를) 백마산성에 옮기고, 황주의 (군사를) 정방산성에, 평산의 (군사를) 장수산성에 옮기니, 각각 큰길에서 30리나 되고 먼 곳은 약 이틀 걸리는 거리였다. 양서(황해도와 평안도)의 큰길에 사람이 없었다. 김자점이 도원수가 되어 말하기를, "도적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 했다. 혹 도적이 오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크게 화를 낼뿐, 성을 지킬 군사를 조금도 더하지 않았다. "의주 저편 용골산 봉화가 서울까지 가면 소동이 나리라." 해서 도원수가 있는 정방산성까지만 (봉화 불빛이) 오게 정했다. 납월臘月(음력 섣달) 초6일 이후에 연이어 봉화 두 자루를 올렸으나 자점이 말했다. "반드시(필시) 사신을 맞이하는 불이다. 어찌 도적이 올 리가 있으리오." 초 9일에 비로소 군관 신용申榕을 의주로 보내어 적병을 탐지했다. 신용이 순안(평양 서북방 지역)에 이르러 보니 적병이 이미 널리 퍼졌으므로 달려와서 보고하자 자점이 크게 노해서 신용을 베려고 했는데 다른 군관이 또 보고하니 비로소 장계狀啓를 올렸다. 대개 적병이 강을 건너는데 대로에 거리낄 것이 없으니 달려오기를 바람같이 하고, 번신藩臣이 보내는 장계는 적이 모두 빼앗아 가졌으므로 조정이 막연히 몰랐다가, 12일 오후에야 비로소 적세가 급한 줄 알았다. 13일에 강화도로 들어가기를 의논하며 김경징金慶徵(김류金瑬의 아들)을 검찰사로, 이민구李敏求를 부사로 삼았다. 김류가 아들의 공적 없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가속家屬의 피란을 위해 김경징에게 검찰사를 시키고, 임금이 물으시니 "어떤 이가 경징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라 했다. ※ 김경징金慶徵(김류金瑬의 아들)은 강도(강화도) 검찰사로 부임했으나, 유흥에 빠져 청에게 패하고 탄핵을 받아 사사되었다. p 035 ~ 039 산성일기 병자 ============================== 1636년 12월 28일(피란 15일째) 체찰사體察使 김류가 친히 장사將士를 거느리고 북성에 가서 싸움을 재촉했다. 이때에 도적이 포 쏘는 소리를 듣고는 거짓으로 물러나며 군사와 우마牛馬만을 놓고 가니, 이는 우리 군사를 유인하는 꾀였다. 김류가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군사를 독촉해 내려가서 치라고 했다. 그러나 산 위에있는 군사들은 그 꾀를 알고 내려가지 않았다. 이에 김류가 병방兵房 비장裨將 유호에게 환도環刀를 주어 내려가지 않는 이를 어지럽게 마구 찌르도록 했다. 그러자 군사들은 내려가도 죽고 내려가지 않아도 죽겠으므로 내려가 적진에 있는 우마牛馬들을 잡았다. 적들은 이 모습을 본 체도 않으며 군사들이 모두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더니 한순간 복병이 사방에서 내닫고, 물러갔던 적병이 몰려나와서 잠깐 사이 우리 군사를 다 죽였다. (당시) 접전할 때, 김류가 화약을 빼앗아 두었다가 많이 주지 않았으며 겨우 달라기를 기다려서 주었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급해지자 군사들은 화약을 미처 청하지도 못한 채, 조총으로 서로 치다가 결국 당하지를 못했다. 패한 군사들은 산길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길이 급해 오르기가 어려웠으므로 모두 죽기에 이르렀다. 김류가 전군이 패하는 모양을 보고 비로소 초관哨官에게 명해 기旗를 휘둘러 군사를 퇴각시켰다. 그러나 군사가 금방 죽을 때를 당해 기를 어찌보며, 기를 본들 어찌 달아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류가 초관을 베어 죽이니 사람마다 원통하다고 했다. 김류가 스스로 싸워 패하고 탓할 곳이 없으니 핑계를 댔다. "북진 대장 원두표가 서로 구원하지 않은 탓이다." 그러고는 장차 큰 죄를 주려고 하니 좌상 홍서봉洪瑞鳳이 말했다. "으뜸 장수가 패하고 버금 장수에게 죄를 전가함이 마땅치 않다." 김류는 마지못해 대궐에 가서 대죄待罪(석고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中軍에게는 곤장 여든을 쳤다. 건장한 군사와 날래고 용맹스러운 무사가 모두 체부體府(체찰사가 일을 보던 관아나 군영)에 모였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300여 명이 죽은 것이다. 김류는 실상을 고하기를 꺼려 40여 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자 인심이 이를 더욱 납득하지 못하고, 여러 군사들이 싸울 뜻을 잃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화친하기로 결단했다. p 055 ~ 057 산성일기 병자 ============================== 1637년 1월 2일(피란 20일째) 홍서봉·김신국·이경직이 적진에 가니 적장이 누런 종이에 쓴 편지를 상 위에 놓았다. 홍서봉 이하가 먼저 네 번 절한 후에 편지를 받아 오니 그 편지의 내용이 이와 같았다. 대청국大淸國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詔涂(임금이 명령을 내려깨우침)하노라. 내 군사가 지난번 양합良哈(몽골 동부 지방)을 칠 때에 너희 나라가 맞아 치고, 후에 또 명나라 군주를 도와 나의 나라를 해쳤으나 내 오히려 개의치않고 믿을 만한 땅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네가 또 내 백성을 끌어들여 명조明朝에 바치니 짐이 이에 크게 노해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를 친 것이다. 내 어찌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켰으리오. 네 어찌 도리어 네 번신藩臣에게 일러 충의지사忠義志士로 하여금 각각 책략을 내게 하고 용맹한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좇게 해 짐을 치라고 했는가? 그러고는 짐이 이제 친히 이곳에 왔는데 네 어찌 몸소 한번 나와 싸우지 아니하느냐? 짐의 제후들이 네게 편지를 하니 무슨 까닭으로 "본디 편지하는 법도는 관례에 없노라" 했느냐? 정묘년에 네가 섬 가운데로 달아났을 때에 편지 왕래한 것이 제후가 아니었던가? 짐의 아우와 조카가 무엇이 너만 못하리오? 또 외번外藩 (제후, 영주가 다스리는 나라) 여러 왕을 막고 받들지 아니하니, 그 여러 왕은 대원大元(원나라) 황제의 자손인데 무엇이 너보다 못하리오? 대원 때에 조선이 조공 바치기를 끊이지 않더니 이제 어찌 이토록 높은 체하느나? 짐이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 대접하거늘, 내 더욱 패악해 스스로 원수가 되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성곽을 내던지고 궁실을 버리며 처자를 버려서 서로 돌보지 못하게 하고 혼자 몸만 산성에 들었으니 비록 천 년을 산들 무엇이 유익하리오? ![]() 정묘년의 치욕을 씻고자 하다가 목전의 즐거움을 무너뜨리고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기니 이런 치욕을 장차 어찌 씻으리오? 네가 비록 몸을 감추어, 살기를 도모하나 짐이 어찌 가만 놓아두리오? 짐의 내외 여러 왕과 문무 제신文武諸臣이 짐에게 권해서 황제가 되었는데, 네가 차마 듣지 못할 바라고 말하니 어찌된 말인가? 황제가 되고 아니 됨이 네 뜻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늘이 도우면 필부도 천자가 되고, 하늘이 벌을 내리면 천자도 필부가 되나니, 너의 이 말 또한 망령되도다. 맹세를 배반하고 사신을 박대하며, 명나라 군주를 아비 같이 섬 긴다고 해 나를 모해하니 이것이 큰 죄이다. 짐이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너희 팔도강산을 마구 치지만 네가 아비같이 섬기던 명나라 군주가 장차 무엇으로 너를 구하라요? 자식이 급하면 아비가 구하지 않을 데가 어디 있으리오? 그렇지 않으면 그 백성을 수화水火(물에 빠지고 불에 타는 극심한 고통)에 빠뜨림이라. 억만 백성이 어찌 너로 인해 한恨을 품지 않으리오? 네가 만일 할 말이 있거든 짐에게 고해야 해롭지 않으리라. 숭덕崇德(청 태종 홍타이지의 연호) 2년 초 2일. p 060 ~ 063 산성일기 병자 ============================== 1637년 1월 18일(피란 36일째) 홍서봉·최명길·윤휘 등에게 국서를 주어 적진에 보내니 용골대가 "마부대가 다른 데에 갔으니 받지 못하노라" 하고 또 이르기를, "내일이나 모레 두 날 중에 싸우리라" 했다. 이때 국서의 내용은 이와 같았다. 조선 국왕 모某는 대청국 관온인성황제께 글을 올리니 (대국이) 그 책하기를 엄격히 하며, 가르치기를 지극히 함에 엎드려 밝은 지혜를 받도다. 가을 찬 서리가 살을 에는 듯한 가운데 따뜻한 봄의 뜻을 띠었으니 엎드려 읽음에 죄송하고 감격해 몸 둘 곳이 없도다. … 소방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가 이러하니 이것이 경계함이요, 명령에 따름이라. 황제가 바야흐로 천지생물天地生物로써 마음을 삼으니 소방이 어찌 사람기르는 가운데 참예하지 못하겠는가? 황제의 덕이 처지 같으니 감히 실정을 드러내 말하고 공경히 은혜를 기다리노라. ![]() 이는 이조판서 최명길이 지은 것이다. 예조판서 김청음金淸陰(김상헌)이 비국(비변사)에 들어가 이 편지를 보고 손으로 찢고 실성통곡하니 곡성이 대궐 안에 사무쳤다. 이로 인해 김공이 최명길에게 이렇게 일렀다. "대감이 차마 어찌 이런 일을 하시오?" 그러자 명길이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대감이 편지를 찢었으니 우리는 당당히 죽으리라." 그러고는 종이를 낱낱이 주워 모아 붙였다. p 078, 079 산성일기 병자 ============================== 1637년 1월 20일(피란 38일째) 큰 눈이 내리고 큰 바람이 불었다. 우상과 명길, 윤휘가 적진에 가서 답서를 받아 오니 답서에 이르는 말이 이와 같았다. 대청국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하노라. 네가 하늘을 어기고 맹세를 저버린 까닭으로 짐이 크게 노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쳐도 바야흐로 싸울 울 뜻이 없더니 이제 네가 외로운 성에서 고단해 짐이 조서를 내려 심하게 책망함을 보고 이에 죄를 뉘우치는구나. 짐이 너를 용서해 스스로 새롭게 하라 함은 (내)힘이 너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출성出城해 짐을 만나라 명함은 첫째는 네가 성심으로 항복함을 보려고 함이요, 또 하나는 네게 은혜를 베풀어 다시 나라를 보전하게 하고 군사를 돌이켜 어진 마음을 천하에 보이려 함이니라. 만일 계교로 너를 달랜다면 짐이 바야흐로 천명을 받을어 사방을 다스리니, 정희 너의 죄를 사해 남조의 바람(표적)을 삼으려 함이라. 만일 간사한 속임수로 너를 잡겠다고 한다면 천하에 큰 것을 다 속임수로 얻겠느냐. 네 만일 의심해 출성하지 않으면 지방을 다 짓밟고 생명이 다 진흙이 될 것이니 진실로 잠시도 머물지 못하리라. 너를 본보기로 해 맹세를 저버린 신하를, 짐이 처음에는 다 죽이려 했는데, 네가 이제 과연 출성해 명에 따르겠다면 우선 우두머리로 도모하던 두세 사람을 묶어 보내라. 짐이 당당히 효시梟示해 뒷사람을 경계하리라. 짐이 서쪽으로 침략할 큰 계교를 그르치게 만들고 너의 생명을 수화水火에 빠뜨린 것이 이들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네가 만일 성을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빌어도 짐이 듣지 않으리라. 이에 임금이 말씀하셨다. "차라리 척화한 신화와 함께 죽을지언정 어찌 가히 묶어서 보내리오!" 그러자 동궁(소현세자)이 여러 신하를 돌아보고 말했다. "자네들 때문에 우리 집이 다 죽게 되었네." 여러 신하들이 할 말이 없었다. p 082, 083 산성일기 병자 ============================== 1637년 1월 21일(피란 39일째) 동틀 무렵에 우상 이하가 적진에 가서 국서를 전하고 저녁에 다시 나아가 답서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출성하지 않은 일과 척화한 신하들을 잡아 보내는 일을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들이 크게 노해 국서를 그냥 보내고 답을 주지 않았다. 그 국서의 내용은 이와 같았다. 조선국왕 신臣 모某는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리나니 신臣이 하늘에 죄를 얻어 멀지 않은 장래에 망하리라. 비록 사정이 급박해 여러 번 글을 올려 스스로 새롭기를 구하나 실로 감히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기약치 못했더니, 이에 은혜로운 뜻을 받을어 지나간 죄를 다 버리고 가을날 찬 서리같이 엄한 위엄을 녹이고 따뜻한 봄같이 어진 덕을 펼쳐 장차 동방 수천 리의 생명을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할지라. 군신부자君臣父子가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은혜 갚을 바를 알지 못하나, 신이 몹시 걱정되고 절박한 사정이 있어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기를 바라니라. 동방 풍속이 좁고 예절을 까다롭게 따지고 살피므로 그 임금의 거동이 조금이라도 예사롭지 않음을 보면 놀라서 서로 괴이한 일로 여기나니, 만일 풍속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마침내 나라의 기강을 세우지 못하리라. … 이제 폐하가 군君과 신臣 간의 대의大義로써 천하를 감화시키니 이 무리를 마땅히 용서할지라.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의 큰 도량이 천지와 같으니, 이미 임금의 죄를 사하며 이런 소신小臣(척화파)들은 다만 소방에 맡겨 다스림이 더욱 큰 덕이라. 신이 이미 폐하의 위엄으로 구함을 입은 까닭으로 성심으로 친하고 추종하기로 다짐한 마음을 다해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드리노라. 이는 최명길이 지은 것이다. 임금이 명길과 대제학大提學 이시직에게 다시 짓게 하니, 비록 명길이 글을 쓰진 않았어도 글 뜻은 (그의 뜻과) 다름이 없고, 이시직이 자기 (뜻대로) 글을 쓰지 않은 까닭으로, 명길을 공치사功致辭하며 스스로 높은 체하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이때 이조참판 정온鄭蘊이 국서에 '신臣'이라 칭함을 보고 분통해 상소했다. … 그 소䟽(임금에게 올리던 글)의 내용은 이와 같았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이 듣자오니 어제 사신이 적진에 갔을 때 신하로 청하겠다고 아뢰었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이 말이 진실로 그러합니까? 진실로 그러하면 반드시 이는 명길의 말입니다. … 명길의 뜻대로 하면, 한번 신하를 칭하면 포위를 풀 것이요, 임금을 편안하게 하리라 하지만 이렇게 글을 올림도 오히려 소인의 충성입니다. 예로부터 천하의 국가 중 망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사느니, 바른 것을 지키고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니 하물며 군신부자君臣父子가 성을 의지해 한 번 싸우면 성을 지킬 도리가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중국(명나라) 이 부자의 은혜와 군신의 도리가 있으니 어찌 가히 배반하리오. 하늘에는 두 해가 없거늘 명길이 두 개의 해를 만들려 하고, 백성에게는 또한 두 임금이 없거늘 명길이 둘을 만들려고 하니, 차마 이것을 한다면 무슨 일을 또한 못하겠습니까! p 083 ~ 088 산성일기 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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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일기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조정대신들이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복하기까지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전화가 닥친 마당에도 명분에 입각하여 적은 글은 당시 지배층의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읽다보면 그저 답답함만이 느껴진다. 지배층이지만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는 아둔함과, 대비책도 없는 답답함, 막상 화가 닥치자 보여지는 지배층의 한심한 모습 등. 다른 의미로 경계의 표본이 될만한 책이다. 옛 글을 번역하여 다소 어려울수는 있으나, 어느정도 역사지식이 있으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또, 배경지식이 없어도 뒷부분에 연표와 함께 용어와 직급등을 설명해주어 읽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