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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컨택트>를 본 적 있다. 끝까지 보지 않아 사실은 영화 결말을 모른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외계 비행체들이 나오고, 거기에 외계인이 나왔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외계인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읽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한다. 외계생물체는 인간에게 신호를 보내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된다. 외계인들 언어로 메시지를 보내니 지구인들이 알길이 없다. 서로 언어가 다른 존재가 대화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이 불통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쨌든 서로 주고 받는 신호는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쓰지 않아도 사람들은 몸짓, 발짓 다하며 어떻게든 기본 의사소통은 한다. 서로 신호를 주고 받을 수 있으니 가능하다. 하지만 자연과 대화, 나무와 대화하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해 보인다. 언뜻 보면 그들은 아무런 신호도 보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무런 생명력이 없는 일반 사물들과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나무 한 그루, 풀한포기가 모두 그렇다. 그런데 사실 그들도 생명 에너지를 지닌 존재다.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이 그걸 감지하지 못할 뿐,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언어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문득 나무가 내 일상에 들어오고 나서 내 삶의 속도가 정신없이 끌려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무에 다가가는 건 삶의 속도를 늦추는 행위다.' 삶이 바쁘고 정신없을 때 더 적극적으로 나무에 다가가야 하는 이유이다._(P.36)
누군가 나무는 말이 없다고 철썩 같이 믿을 때, 누군가는 나무가 보내는 신호를 읽는다. 물론 그 신호는 인간이 말로 표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을 감지하려면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이 책의 저자 이야기를 읽다보면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단지,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나무가 보내는 신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자신을 비우고 나무에게 온전히 관심을 보낼 수 있으면 된다. 이렇게 한다면 누구나 나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처럼 나무가 보내는 메시지가 머리속에서 우리 언어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칠 수 있을 듯 하다.
에이~나무와 어떻게 대화를 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가능성은 닫힌다. 나무가 어떤 언어로 인간의 뇌파에 신호를 주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신호든 간에 나무가 보낸 것이 아니라고 무시해버리면 대화는 무산된다. 나무가 어떤 방식으로 내게 메시지를 보내는지는 내가 감지하는 모든 신호에 집중해 봐야 알 수 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나무와의 대화 내용은, 딱 이거다라고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것을 저자의 언어로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나무의 신호를 정확히 인간의 언어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되어본 적 없는 우리는, 나무를 정확히 공감하기 힘들다.
나무에 다가가는 것은 그래서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무를 관찰할 때도 침묵하며 보아야 한다. 나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쩌면 내가 밖으로만 치닫던 마음을 안으로 돌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무에 다가오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나의 해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_(P.206)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주는 의미를 떠올려본다. 평상 시에는 몰랐던 것을 잠시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를 둘러싼 자연과의 대화, 나무와의 대화도 이런 여유의 시간, 비움의 시간에 가능해진다. 그리고 인간 언어가 주는 메시지만 의미를 가진다는 편견을 버리는 것도 중요하다. 쉽지 않겠지만, 이 책 <나무와의 대화>를 쓴 저자처럼 온전히 나무에게만 관심의 시선을 보내고 주목한다면 감지할 수 있는 다른 신호가 분명 있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나무와의 대화는 비움의 시간, 여유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시간 역시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건 누구나 바라는 일일 것이다. 그런 생명체인 나무와 통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 수 있다면 근사한 일이 될 것이다. _(P.2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