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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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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국 쪽에서 나온 자계서를 보면, 그들의 역사상 유일하게 빈농 출신으로 일어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주원장을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유교 문화권에 철저히 편입된 나라라서, 중국 고대, 중세사의 군주들, 학자들, 기타 무웅(武雄)들에 대해 꽤 많이들 알고 있는 편입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걸 읽고 퍼 나르는 수준이 아니라, 고전문 원문 해독이 능숙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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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국 쪽에서 나온 자계서를 보면, 그들의 역사상 유일하게 빈농 출신으로 일어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주원장을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유교 문화권에 철저히 편입된 나라라서, 중국 고대, 중세사의 군주들, 학자들, 기타 무웅(武雄)들에 대해 꽤 많이들 알고 있는 편입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걸 읽고 퍼 나르는 수준이 아니라, 고전문 원문 해독이 능숙하게 되는 이들도 제법 많죠. 그런데 명 태조 주원장에 대해서는, 조광윤이라든가 한 고제(高帝)만큼 자주 언급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는 아마도 현재의 중국 고전 독서 풍조를 형성한 조선 말의 분위기가, 주원장에 대한 잦은 언급을 하지 않았던 탓이 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명대에는 서민 문학이 주로 발달하고, 유교도 양명학 위주로 논의가 되었던 까닭에, 조선이 직접 사대(事大)한 대상이 명조였다고는 해도, 그 황조가 낳은 갖가지 문화적 산물에 대해서는 그닥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죠. 명나라에서 여전히 서책을 수입해 왔지만, 이는 지난 송조(宋朝)에서 기반을 닦은 정주학 계열의 학술서나, 정통 사관에 입각한 역사서류에 치중되었습니다.  명이 망하고 나서 편찬된(보통 왕조가 교체된 후 직전 조의 역사가 편찬되곤 합니다) 명사는 청 제국에서 주도하여 사업을 이뤘고, 이 결과물이 대단히 공정한 서술을 이루고 있음에도, 조선의 지식층은 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새드 엔딩이 뻔히 예상되는 스토리를 읽지 않고 싶어하는 심리와 같습니다. 게다가 정묘, 병자의 양 호란 역시 명조의 사연이기에, 구태여 그 치욕적인 기사(記事)를 접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도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주원장은 정말 극적인 생을 산 위인이고, 단지 사회 최하층 밑바닥에서 일어나중원 통일의 대업을 이뤘다는 사실 이상으로, 자신보다 더 월등한 무력을 지닌 군웅들과 정면 대결하여 그들을 모조리 꺾었다는 역사가 입증하듯, 운과 실력을 두루 갖춘 창업자였습니다. 원나라를 막북으로 몰아낸 업적은 그리 자주 언급되지는 않는데요. 이는 아마 그가 축출하기 이전부터 원 황실이 내부 권력 투쟁과 부정부패로 빈사의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의 후손들이 권력을 물려 받은 시기에는 여전히 다시 발호하여, 오이라트와 타타르 부족이 끊임 없이 농경 문화권을 넘보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역시 소홀히할 대목은 아닙니다. 당장 영종만 해도 토목의 변을 겪고 간신히 살아들어와 두 번 제위에 오르는 소동을 빚기도 했죠.

이 소설은 주원장의 처참했던 젊은 시절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생계가 곤란해 순전히 밥 한 끼라도 거저 먹을 요량으로 절에 들어가서 동자승이 됩니다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절에서 청소 밥짓기 등 온갖 허드렛일은 도맡아서 해야 했는데요. 특히 그를 힘들게한 과업은 사천왕상 밑을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황제가 되고 나서 그는, 전국의 모든 절에 있는 사천왕상은 다리를 들게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믿거나말거니지만 자신의 올챙이적 시절을 잊지 않은 정사를 베푼 그다운 일화라 하겠습니다.

주원장은 황제가 되고 나서 공신들을 끔찍하게 숙청한 일로도 유명합니다. 호유용의 옥사에는 3만 명 가량이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고도 하는데, 인망이 높았던 호유용이 자신이 죽고 나서 주변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오르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시영이 일찍 죽자 그의 아들이 조광윤에게 자리를 뺏긴 전례도 있고, 무엇보다 동냥승, 비적으로 일관했던 자신의 출신이 부끄러워서 벌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신 황제의 위치에서는 세무(細務) 서사(庶事)까지 자신이 모조리 맡아 처리하는, 세심함과 비범한 능력, 정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서민 출신이었기에 탐관오리를 증오했고, 이로 인해 부수적으로 중앙집권이 강화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죠. 


v*****7 2016.01.21.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