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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고 지나쳤던 책이 어느 날 문득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되는 책은 예전에 읽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툭 하고 던져주게 마련인데 그럴 때 나는 택시에 놓고 내린 물건을 다시 찾은 느낌으로 '흠, 이런 게 있었군.' 여러번 되내면서 책에 빠져들곤 합니다. 최근에 내가 읽었던 J.M.쿳시(Coetzee)의 <추락 Disgrace>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윤모 전 청와대 대변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썼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순간 '그래, 이런 비슷한 주제를 다룬 소설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입니다.
"아이삭스는 부드럽게 말한다. 말이 한숨처럼 그의 입술을 떠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추락하셨죠?" 추락했다? 그래, 추락이 있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이 그에게 맞는 말인가? 그는 자신을 모호하고,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변방에 속하는 인물. 그는 말한다. "어쩌면 가끔씩 추락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지요.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p.253)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루리 교수.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한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학과 부교수로 있는 그는 50대의 이혼남입니다. 소설의 첫문장인 '그는 이혼까지 한, 쉰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한다.'에는 여러 의미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에는 무관하게 자신의 욕망을 해결해 왔음을 말해줍니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 때 여자들에 묻혀 살았다'는 표현은 그가 여자들로부터 떠받듦을 받으며 성장했고 '그의 큰 키와 균형잡힌 골격과 올리브색 피부와 부드러운 머리'로 인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여성은 누구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던 듯합니다.
이 소설의 주된 스토리는 루리 교수가 그의 제자 멜라니와 관계를 갖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의 집으로 멜라니를 끌어 들인 루리는 '12살 어린이처럼 가냘픈 엉덩이'를 갖고 있는 멜라니와 성관계를 갖게 됩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루리 교수는 멜라니와 만남의 횟수를 늘려갑니다. 그러면서 루리 교수는 점차 대담해집니다.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루리 교수는 학과사무실에서 알아낸 멜라니의 아파트로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곤 합니다. 곤경에 처한 멜라니는 수강을 취소하기에 이르고 멜라니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남자친구의 고발에 의해 학교와 멜라니의 아버지에게도 알려집니다. 학교의 진상조사위원회가 개최되고 사과와 자숙을 권고하는 대학의 요구를 루리 교수는 거절합니다. 그는 결국 파면되어 시골에 사는 자신의 딸 루시의 집을 찾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에서도 꾸준히 있어 왔던 흔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시가 말한다. "값을 톡톡히 치르셨군요. 어쩌면 그녀는 나중에 뒤돌아보면서 아버지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여자들은 놀랍게도 용서를 잘 하거든요." 침묵이 이어진다. 자식인 루시가 그에게 여자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려고 하는 걸까?" (p.105)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바뀜으로써 스토리는 이제 루시의 이야기로 빠르게 전환됩니다. 루시는 자신의 농장에서 위탁 받은 개를 돌보며 지냅니다. 흑인 원주민의 세력권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백인 여성이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워 보입니다. 루시는 자신과 함께 살았던 여자 친구 헬렌의 방을 아버지에게 내어 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총을 든 흑인 삼인조 강도가 루시의 농장에 쳐들어 옵니다. 그들은 루시가 키우던 개를 죽이고, 루리 교수를 폭행하고, 루시를 성폭행한 후 루리 교수의 차를 훔쳐 도주합니다. 분노한 루리 교수는 경찰에 신고하고 복수를 다짐하지만 루시는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경찰에게 끝내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여파겠지. 침략의 여파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금 지나면 몸은 저절로 치유가 되고 그 속에 사는 영혼인 나는 다시 옛 자아를 찾겠지. 하지만 그는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삶에 대한 즐거움이 꺾여버렸다. 시냇물 위에 떠 있는 하나의 나뭇잎처럼, 산들바람에 날리는 한 알의 민들레 씨앗처럼, 그는 종말을 향해 떠내려 가기 시작했다." (p.163)
루시의 농장일을 도와주는 나이든 이웃 원주민 페트루스가 집을 지은 기념으로 루시와 루리 교수를 파티에 초대합니다. 루리 교수는 그곳에서 삼인조 강도 중 한 명이었던 나이 어린 흑인을 발견합니다. 분노한 루리 교수는 페트루스에게 격분하여 따지지만 어린 흑인이 자신의 친척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루시가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둘씩이나 있는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라는 것이었죠. 루리 교수는 자신의 전처이자 루시의 엄마가 있는 네덜란드로 가서 살면 어떻겠느냐고 루시에게 권합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땅을 페트루스에게 지참금으로 주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집과 개를 돌보는 일은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말합니다. 강간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그것이 마치 그들의 영역에서 살아가기 위한 '세금 징수'와 같은 것이라고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얘야, 화내지 말아라. 그래, 나는 이것이 유일한 삶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동물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하지만 균형을 잃지는 말자. 우리는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피조물이다. 반드시 더 높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면, 죄의식을 느끼거나 보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단순한 아량에서 그렇게 하자." (p.112)
법률적 용어로 말하자면 위계에 의한 성추행의 가해자였던 루리 교수는 자신의 딸 루시에 의해 피해자의 아버지로 전락합니다. 루리 교수는 한동안 돌보지 않아 폐가처럼 변한 케이프타운에 있는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그곳에서 있었던 자신의 삶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멜라니의 아버지를 찾아가 만나기도 하고, 연극 공연을 하는 멜라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도 합니다. 루리 교수는 결국 딸 곁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루시의 이웃 중에는 동물 병원을 하며 루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베브 쇼가 있습니다. 베브 쇼는 주로 치료가 불가능한 동물의 안락사를 담당합니다. 루리 교수는 동물 병원에서 나온 죽은 개의 시체를 자신의 차에 실어 화장장으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젊은 시절의 루리 교수였다면 베브 쇼는 결코 쳐다보지도 않을 여인이었지만 베브 쇼의 유혹에 적당히 넘어가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이 책의 주제와도 같은 대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들의 섹스에 대해서, 적어도 자신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정열은 없지만 혐오감도 없다. 결국 베브 쇼가 그녀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도록, 그녀가 의도한 것은 모두 성취됐다. 데이비드 루리, 그는 남자가 여자한테 도움을 받듯이,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 루시 루리는 어려운 방문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그들이 지치자, 그는 그녀 곁에 누워 이렇게 생각한다. 이 날을 잊지 말자. 이것이 멜라니 아이삭스의 달콤하고 젊은 살 다음에, 다다른 지점이다. 이것이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 이보다 못한 것조차." (p.225)
약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직접 약자의 입장에 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83년, 1999년 2회에 걸쳐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2003년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었던 J.M.쿳시는 자신의 소설 <추락 Disgrace>에서 모든 갈등에는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윤모 전 청와대 대변인의 칼럼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만 한 번의 추락을 경험했던 윤모 대변인은 아직도 약자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나이를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좋은 말을 다 벗겨내고 보면, 바로 그것을 처벌하려고 위원회가 열렸던 것이다.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재판. 부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해, 늙은 씨, 피곤해진 씨, 생기없는 씨를 뿌린 것에 대해. 자연에 반한 것.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탐내면, 종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고발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었다. 문학의 반은 그것에 관한 것이다. 종족을 위하여, 나이든 남자들의 무게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들. 그는 한숨을 쉰다. 감각적인 음악에 묻혀, 나 몰라라, 서로를 껴안고 있는 젊은 사람들. 이곳은 나이든 남자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p.286)
'나이든 남자들의 무게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들'의 심리를 윤모 전 대변인은 과연 몰랐을까요? 한 번의 추락으로도 그는 뭔가 깨닫는 게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도 분명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날이 있겠지요. 쿳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은 결코 나이든 남자들을 위하 나라가 아닌 듯합니다. 그도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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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쿳시'의 첫작품으로 '추락'을 읽었다. 아주 특별했다. 다른 글들과 차별성이 있었다. 내가 여지껏 읽었던 책들이 믹스된 비빔밥을 한숟가락 뚝딱 떠먹고 "아! 맛나다" 라고 했다면 쿳시의 작품은 재료들을 늘어놓고 그것도 고급재료들로 레시피를 손에 쥐어주고 요리를 해서 격식되로 차리고 하나하나 맛을 음미해보라고 들이미는 것 같은 어려움이었다.
작가의 이력 자체가 발광이다. 컴퓨터와 수학,언어학과 문학을 전공했단다. 쩝~~~이공계와 문학계를 두루두루 섭렵한 우뇌와 좌뇌가 골고루 발달된 천재적인 교수다. 그리고 미국인이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난 네덜란드계 백인이란다.
남아프리카공화국하면 요즘은 더듬더듬 말을 하는 '브루닌인지 부르난'인지 '미수다'에서 나오는 여인이 떠오른다. ㅋㅋ(나의 지적 능력이란...) 아무튼 그 미녀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집을 방문하는 아침프로를 본적이 있다. 100년 된 저택이라고 했다. 하얀색 으로 지어진 우와한 집이었고 내부는 깨끗했고 집도 넓직해 보였다. 어머니에 어머니로 부터 물려받은 다이아몬드 시계, 영국식 식기 셋트 등... 눈이 휘둥그레졌던 기억이 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들은 참 잘 사나보다란 생각이 들게끔 했다. 그런 밝음과 달리 이책은 무겁고 회색이다.
뭐 스토리는 간단하다. '그'=데이비드 루리는 낭만주의 시를 강의하는 대학 교수다. 두번 결혼을 실패하고 홀로 살면서 별 일 없이 잘지내왔다. 그러던 어느날 강의하던 중 멜라니라는 학생을 마음에 두게 되고 제자를 범하고 그 사건이 알려지면서 대학에서 쫒겨나게 된다.그리고 딸이 있는 농장에서 머무르게 된다. 딸이 사는 지역은 흑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고 딸은 그 지역에서 사는 몇안되는 백인이다. 그곳에 세명의 침입자가 찾아와 딸을 강간하고 차를 훔쳐가고 개를 죽인다. 그 사건으로 그는 모든 것이 바뀌고 딸을 지키려하나 딸은 그곳에서 버티려한다. 이 줄거리 가운데 너무나 심오한 것들이 담겨있다.
정치적인것, 역사적인것, 인종적인것, 문학적인것 모두모두 잘 배열되있고 잘짜여져있다. 아주 간결하게 냉소적으로 표현되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금의 현실 백인의 입장, 흑인의 입장 젊은이와 늙은이의 사랑과 현실적인 눈과 잣대 이상속에 사는 그와 현실을 들이미는 딸
"그래. 이게 전부야!어떻게 내가 그걸 잊을 수 있었지? 나쁜 남자도 아니고 좋은 남자도 아니고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가장 뜨거울 때조차 그렇다. 테레사의 척도로는 아니다. 바이런의 척도로도 아니다. 불이 부족하다. 그것이 그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일까?"
마음에 욕망과 욕구는 넘치나 현실과 타협이 안되는 현실을 살아나가는 정열이 불이 부족한 주인공은 결국에는 현실을 단념하는 것인가?
"그렇소. 단념하는 거요."
참 알듯말듯 아니 모를듯한 소설이다. 나의 역량이 안따라주는 이소설을 모두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단 하나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해준 책이다. 감사감사 잘쓰려고 하지않는 머리가 조금은 끄적끄적 되게 만든 책이다. |
| 2003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 태생의 백인인 J.M.쿳시는, 최고.최고..최고라는 평을 듣는 작가이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실"이라는 뉴욕타임즈의 극찬. 책을읽다보면, 가끔은 아니며, 어쩌면, 꽤 자주 그 페이지, 페이지를 읽어가느라, 전체를 놓치게 될 때가 있다. 이 책도 한참을 그렇게 읽어가다가, 다 읽고난 후에야 전체에 대응하는 하나의 "이미지"를 그리게 되었다. 개우리, 그 철창 구석에 고개를 파묻고, 움츠리고 있는 50대의 그. 데이비드. Disgrace.. 치욕,불명예..혹은, 한글판 제목인 추락. 격렬하다. 그 격렬함 속에서, 결국에 할 수 있는건, 체념이고, 단념이다. 혹은, "해결"로 나타난다. 해결..단념도, 체념도 큰 해결이다. 그래서, 이 책은, 격렬한 속에서 일말의 주저도없었던 어느 소설의 누군가나, 대립속에서 버티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 어느 소설의 누군가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읽으면서 되뇌였다. 도저히 용서가되지않는데, "죽여버려라" .하지만, 작가는 담담히 현실로써 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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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케이프타운. 대학교수인 52세의 이혼남 데이비드 루리는 본인의 수업을 듣는 멜라니라는 여학생과 가졌던 반강제적인 관계가 들통나 교직에서 파면되고 도망치듯 딸 루시의 농장으로 떠나와 그녀와 함께 생활한다. 어느 날, 부녀는 집으로 들이닥친 3인조 흑인 갱들에게 집단 린치와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범인들은 전리품을 챙겨 빼앗은 차를 몰아 달아난다. 루시는 그들 중의 한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그녀는 이를 신고하지 않고 아이 또한 낳아 기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땅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지참금으로 하여 이웃의 흑인 페트루스의 셋째 부인이 되어 그 곳에서 계속 살아가길 원한다. 번듯한 외모에 여성편력 끝판왕. 고고한 학자(인 척하는)인 데이비드의 가슴엔 학문에 대한 열의 대신 욕정만이 가득하다. 나이 어린 제자를 건드려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뒤에도 형식적인 유죄 인정뿐 진심으로 사과하고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은 없다. 그러나 딸 루시가 강도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무력하게 그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을 때 비로소 그는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범죄를 자신이 저지른 불명예스런 행동과 결부지어 생각하게 된다. 수 백년간 백인들 위주로 흘러갔던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의 모든 정책들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적폐는 뿌리 뽑혀진다. 그 과정은 결코 조용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시는 분노를 싸지르듯 자신의 육체에 몸을 부린 그들의 행위를, 유구한 세월동안 겪어야 했던 흑인의 수난을 되돌려 받는 의식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런 무법천지에서 범죄를 피할 길은 단 한가지. 원주민에게 종속됨으로써 그 집단의 보스에게 보호를 받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제자를 유린했고 그의 오랜 기질과 살아온 방식은 그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곧이어 돌아온, 백인이란 이유로 흑인들을 멋대로 부린 것에 대한 보복성 짙은 폭행. 18세기의 프랑스에 혁명의 구름이 몰려들 즈음, 파리 시내를 가로지르는 귀족의 마차가 습격을 당하고 폭동의 불씨가 된 것처럼 그것의 성격은 원한으로 똘똘 뭉쳐 있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위계가 허물어지고 모든 것이 혼란에 휩싸인 시대. 작가 존 쿳시는 90년대 만델라 정권 초기의 남아공이라는 특정한 시기와 공간 위에 사건을 펼쳐놓고, 권력의 수직관계가 낳은 오랜 정치적 이념이 전복되는 시점에서 한 가족과 개인의 삶 전체가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며 그 의미를 깊이 통찰한다. 특정 집단에게만 당연한 듯 쏠리던 혜택을 고루 재분배하는 일. 그것은 동물복지나 여성인권문제로까지 확장된다. 가망 없는 개를 안락사시키는 이웃의 일을 돕는 데이비드는 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녀석들의 모습에 투영된 자신을 본다. 저항없이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는 개들. 루시는 저들처럼 되려는가. 자신 또한 그래야만 하나. 원치 않는 생명과 함께 이질적 집단에 묻혀 살아가는 것. 그러한 극단적 방법은 나로썬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것이지만 그녀에겐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일이자 패배는 아닌, 일종의 타협인가 싶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최근의 월드컵 개최국이란 것만 빼면 내겐 너무도 낯선 나라다. 인종 차별 정책. 그것은 경험이 아닌 내 머릿속에 학습으로만 자리한 관습에 불과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가깝게 느끼려면 관련 문학을 읽어야 한다. 쿳시의 다른 책을 찾아 보니 제국주의나 식민주의를 다룬 비슷한 성향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대개의 소재가 읽기 불편하고 심각한 반면, 문장은 아름답고 단순명료하며 덤덤하다. 근래에 읽은 소설들 모두가 '윤리'라는 큰 틀에서 해석된 것에 비교해 보면 이 책의 내용 역시 같은 카테고리로 묶여져 고통스럽지만 마주해야 할 것들 중 하나로 자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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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원제: Disgrace 치욕/블명예)』 J.M 쿳시, 동아일보사, 2014 개정판 『추락』은 부커상을 최초로 2회 수상한 J.M 쿳시의 소설로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엄격하고 비정하고 정교하게 쓰인 쿳시의 소설은
새로 탄생한 남아프리카한테 두들겨 맞아 개처럼 코너에 꼼짝없이 몰리고 굴욕을 당한 진보적인 학자의 이야기인데, 이 소설에서 그는 사랑, 섹스, 정치의 한계만이 아니라 인간성 자체의 한계를 테스트했다.”고 평가되고 있지만, 내겐 다만 나약한 한 인간의 꿈과 현실의 불일치가 가져온 “처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읽혔다. 『추락』은 냉소적인 백인 대학교수 데이비드 루리와 아프리카의 땅을 사랑하는 그의 딸 루시가 겪는 두 개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은 단문을 사용하여 한 문장이 두 줄을 넘지 않고, 시종일관 현재형 시제로 쓰인다. 그만큼 감정을 철저히 배제해 단어 하나하나를 함축적으로 제시하여,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실”을 던지는 만큼 글은 담백하고 강렬하다. 《그는 이혼까지 한, 쉰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목요일 오후, 차를 몰고 그린포인트로 간다. 그러면 113호실 문 앞에서 소라야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향긋한 냄새와 은은한 조명이 적절하게 뒤섞인 침실로 곧장 들어가서 옷을 벗는다. 소라야는 욕실에서 나와 옷을 벗고 그의 옆으로 들어온다. 그녀가 묻는다. “저 보고 싶었어요?” “난 당신이 늘 보고 싶어” 그는 이렇게 대답하며. 햇볕에 타지 않은 갈색 꿀 같은 그녀의 몸을 쓰다듬는다. 그는 그녀의 젖가슴에 입을 맞춘다. 그들은 사랑을 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50대 백인교수 데이비드 루리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위와 같이 그려진다.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는 케이프타운 전문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강의를 하는 교수이다. ‘워즈워드’의 시를 좋아하고 ‘바이런’의 사랑을 담은 오페라를 쓰고 싶어하던 낭만적인 인물 데이비드 는 어느 날 젊고 아름다운 자신의 제자 멜라니에게 빠져 충동적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 같은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며 결국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공개적으로 회개하라는 압력에는 끝내 굴복하지 않는다. “ 어느 정도 나이가 지나면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법이다. 그저 멜빵을 풀어 놓고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거야. 자기 시간을 채우는 거지.” 결국 데이비드는 사직하고 자신의 딸 루시가 소유한, 흑인들이 사는 지역의 작은 농장으로 은거한다. 여기까지가 추락의 전반부의 이야기다. 마치 지금 우리 사회의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된 대학교수의 말로를 연상케 하는 스토리다. 허나 이야기는 현실보다 더 가혹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데이비드는 딸 루시의 농장에서 동물 보호소를 운영하는 베브 쇼의 일을 도우며 바이런에 관한 오페라를 쓰면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시적인 평온 상태로 보였던 그의 일상은 흑인 강도들에 의해 그의 딸 루시가 윤간을 당하면서 순식간에 깨어지고 만다. 이 폭행 사건은 여전히 흑백갈등이 잔존하는 남아공의 현실과 맞물려 있다. 딸 루시는 흑인들이 모여 사는 시골 농장에 고립된 백인이라는 이유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고,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흑백갈등이 단순한 정권의 양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흑인들이 그녀를 강간하며 내보이는 원한과 증오는 남아공 흑인들의 역사를 담고 있으며 부녀가 느끼는 공포와 위기의식은 사실상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남아공의 현실을 보여준다. 끔찍한 사건 후 당장 농장을 떠나지는 데이비드의 권유 앞에 루시는 해결되지 않는 폭력에의 노출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그들의 땅에 사는 대가로 담담히 받아들이며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빠, 이건 어디까지나 제 문제고 제 인생이에요. 제가 가는 길은 잘못된 길일지 몰라요. 하지만 제가 농장을 떠나면 저는 패배한 것이 돼요. 저는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살수 없어요. 아버지가 언제까지나 아버지일 수 없듯이 말이에요." 결국 자신의 땅을 전부 흑인들에게 넘겨주고 강간의 흔적이 남긴 아이을 낳으면서도 그녀는 완강하다. “... 제가 하는 일을 아버지가 좋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맞춰 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어요. 아버지는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아버지 삶의 일부인 양 행동하시잖아요. 아버지는 중심인물이고, 저는 이야기의 반이 지날 때까지는 나타나지 않는 주변인물이고요. 하지만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어 있지 않아요. 저는 주변인물이 아니에요. 제게도 아버지의 삶이 아버지에게 중요한 만큼이나 중요한 삶이 있어요. 제 삶에서, 결정을 하는 건 저예요. ” 유죄는 인정하되 참회는 할 수 없다는 데이비드의 고집을 꼭 닮은 그의 딸 루시의 결심은 마치 남아공의 현실도 수많은 고통과 상처의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듯 처절하게 다가온다. 딸 루시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뿌리깊은 원한과 증오의 결과로 이해하고, 그 빚을 자신이 대신 갚겠다는 “희생 제의”의 방식으로 모두 용서하고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 지점이 바로 데이비드와 딸 루시의 선택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딸 루시를 통해 작가는 오랜 개인적/역사적 상처/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선 결코 회피하거나 외면하거나 눈 감는 것이 아니라, 기어이 그걸 드러내고 불가피한 상처를 통해서라도 치유/극복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역사의 상처는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감당해야 할 집단적 트라우마인 것이다. 『추락』을 통해 당신은 한 남자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대한 처절한 삶의 복수를 보고 싶은가. 『추락』을 통해 당신은 가혹한 운명의 비정함을 읽고 싶은가. 『추락』을 통해 당신은 오랫동안 차별과 희생을 겪어왔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들의 치유되지 못한 역사의 상흔을 보려는가. 『추락』을 통해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인간의 굽히지 않는 의지를 읽고 싶은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소설 『추락』은 당신들에게 강한 생각거리를 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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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은 독일의 경계를 넘어 어떤 사회적 불평과 불만이 팽배해 있는 모든 나라들로 퍼졌고, 특히 소수의 무자비하고 강압적이며 비효율적인 집단이 지배했던 나라들에 널리 퍼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소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을 오래도록 지배해왔고, 현재는 인종차별이 표면적으로는 사라졌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 터질지모르는 화산과 같은 응어리들이 미봉책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바로 그 남아공에 민족적, 정치적 문제에 전혀 관심도 없고 그저 학생들에게 낭만주의 시를 강의하는 데이비드 루리 교수가 있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소명을 갖지도 열의를 갖고 있지도 않지만, 자신이 언젠가는 바이런의 마지막 일대기에 관련된 책을 쓰리라는 열의는 잊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추락'에서 그가 마지막까지도 놓지 못했던 바이런이 갖는 상징성은 무엇일까? 아마도 19세기초 유럽의 낭만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바이런의 대표적인 구절을 살펴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 떨어져 그는 기쁨 없는 몽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쾌락에 무감각해진 그는 차라리 비탄을 갈망하니, 새로운 인생을 맞게 된다 해도 그는 그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죽음)를 희구할 것이다. 그의 마음에는 모든 것에 대한 경멸이 고동치고 있으니... 그는 이 살아 숨쉬는 세계의 이방인으로 서 있다.... 그는 힘차게 천상으로 솟구치거나 까마득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도록 저주받은 인간들과 함께...}
나는 바이런의 이 글이 놀랍도록 '추락'에서의 루리의 추락의 과정과 일치한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글에서 볼 수 있듯이 루리는 자신의 육체는 현실에 굴복할지언정 낭만주의의 높은 이상을 마지막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낭만주의자임을 알게 된다.
루리의 낭만주의적인 특질을 본문을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제자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동료교수들은 해임을 비켜가기 위해 학교측과 일정부분의 합의를 할 것을 설득하는데 이에 대해 그는 ["나를 교정하려고?나를 치료하려고? 나한테서 적절치 못한 욕망을 치료하려고?"] P67 라고 되묻는다. 여기에서 낭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낭만주의는 기존의 제도나 보편성을 부정하며 개인의 행동을 통한 창조적인 결과물들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루리는 자신은 연애를 했을 뿐인데 이를 통속적인 사회적인 잣대 아래 놓고 자신을 조정하려는 일련의 모든 것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대변인이 필요없습니다. 난 내 자신을 완벽하게 대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유죄를 인정했는데도, 심문을 계속할 필요가 있습니까?"]P75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 전에, 실제로 진술서 내용을 읽어보는 게 신중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삶에는 신중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P76 그에게는 타인이 자신에게 갖은 종류의 규제를 가하는 것을 견디느니, 차리리 자신 스스로 욕망을 거세하거나 죽어버리는 게 나은 선택인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그는 어찌보면 몸은 현실에 있으되 꿈을 꾸는 몽상가와 같다. 현실은 그의 정신세계에 혼란을 끼칠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제자와의 스캔들로 인해 갑작스럽게 현실은 그의 전 영역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그 결과 갑작스럽게 현실을 감당해내야하는 육체와 정신에서 오는 괴리감은 그를 도시에서 떠나게 만든다. 하지만 농장생활은 그에게 더 큰 혼란을 가져온다. 자신의 이상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며 사는 사람들, 그리고 수동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개들, 특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수용하려 애쓰는 자신의 딸로 인해 그는 육신의 모든 것을 포기(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견디는 법)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지치자, 그는 그녀 곁에 누워 이렇게 생각한다. 이 날을 잊지 말자. 이것이 멜라니 아이삭스의 달콤하고 젊은 살 다음에, 다다른 지점이다. 이것이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 이보다 못한 것조차.]P225 이렇듯 현실의 밑바닥에 다다른 그이지만 마지막까지도 그를 구원하는 것은 바로 낭만적 이상이다. [~그는 생각한다. 그래, 이것이 예술이다. 이것이 예술의 방식이다! ~그는 며칠동안 블랙커피와 시리얼로 버티며, 바이런과 테레사에게 매달린다. 냉장고는 비어 있다. 침대는 엉망이다. ~그는 생각한다. 상관없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P278 낭만주의의 또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낭만주의의 이상에는 완성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계속된 행동의 여정일뿐 바이런의 오페라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 루리에게 이제 현실에서의 추락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는 음악을 만들고 있다. (혹은 음악이 그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역사를 만들고 있지는 않다.]P279 이렇게 볼 때 범인의 관점에서는 루리의 추락은 패배이나 루리에게 있어 그 추락은 결코 끝이 아닌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며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이성이 통제하지 못했 던 육신은 이미 그를 대신한 '개'의 죽음으로 끝났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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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교수처럼 언어를 잘 구사하고 책을 많이 읽진않았지만 어쩌면 교수보다 훨씬 더 깊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건 역지사지의 자세로 인류애적인 사랑을 생각해보고 실천해보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였을까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도 지난 날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과가의 실수들을 다시 반복하지않는 성숙한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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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인 'Disgrace'치욕은 여운을 남기고자 하는 역자의 의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추락'으로 번역되었다. '치욕'이라는 말보다는 확실히 '추락'이란 단어에서 자의적인 고통의 여운을 느낀다. 치욕이 타인의 시선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면 추락은 굳이 타인이 아니여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얀 마텔의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를 읽으며 존 쿳시를 알았다. 얀 마텔이 수상에게 추천한 존 맥스웰 쿠체의 책은 <야만인을 기다리며>였지만, 어쩐일인지 '대출가능'이라고 검색된 그 책을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 책을 제자리에 두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돌아 나오기가 아쉬워 존 쿳시의 책을 이것저것 들춰봤다. 얀 마텔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로 존 쿳시를 꼽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추락>을 골랐다. 표지에 노벨의 금딱지 메달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이렇게 씌여 있었다. '2003 노벨문학상 수상작'.
경험상 보자면 다른 상은 몰라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그다지 즐겁게 읽지 못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은 나 같은 보통의 독자를 겨냥한 작품은 아닌 것인지 끝까지 읽은 책을 손꼽을 정도로 지루하고, 잔뜩 무게를 잡은 자의로 뒤덮여 있기 십상이다. 그런 이유로 살짝 망설이기는 했지만, 첫 페이지 첫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쉰 둘의 남자도 성욕때문에 인생을 망치기도 하나? 물론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끔씩 사회면을 뒤덮는 신문기사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 싶다. 실제 삶 속의 그들은 원시적인 욕망 때문에 쉰 두해 동안 쌓아온 것들을 망치거나 하기에는 욕망에 관해서나 삶에 관해서나 이미 너무 많이 알고있는 나이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쉰 둘의 그 남자는 바로 그 문제때문에 '추락'으로 접어든다. 나는 치욕보다는 추락이 더 자의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쉰 둘의 그는 남들은 '추락'이라고 보는 그 상황을 추락으로도 치욕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이용해 그를 조롱하고 굴복시키려는 자들을 경계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한편 그의 추락에 관한 이야기는 서막에 불과하다. 그의 딸이 걷는 치욕의 길에 비한다면. 그러나 그의 딸 루시는 치욕을 겪었을 망정 추락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의 터전에서 '떠남'이 어째서 그녀에게는 명예에 관한 일이 되는 것일까,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되는데도 계속 '치욕' 속에 머물기를 원하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녀를 거부하거나 예속하려는 아프리카의 농경지 외에서의 삶은 상상할 수 없었단 말인가.
이 책을 이해하려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백 년에 걸친 백인 식민사회를 이해해야 하고, 그 후 백인 정권이 종식되고 흑인에게 정권이 이양된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그 증오는 또다른 증오를 낳으며 역사는 되풀이 된다. 루시의 아이는 또 어떤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까.
얀 마텔은 문학을 읽으면 '정적감'을 느낄 수 있다 라고 했다. 이 책은 바로 그 '정적감'을 위한 책이다. 책을 덮고 깊은 생각에 빠진다. 치욕과 추락에 관해서. 치욕적일 수 있으나 추락하지는 않는 루시의 삶에 관해서. 존 쿳시를 얀 마텔처럼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일단은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읽어보아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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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J.M.쿳시/동아일보사 우리에게는 생경하다 할 수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저자는 200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거장임에도 그 이름은 아직 낯설다.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는 케이프타운 전문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강의를 하는 교수이다. <워즈워드>의 시를 좋아하고 바이런의 사랑을 담은 오페라를 쓰고 싶어한다.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경험이 있고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딸 루시가 있다. 그 딸은 셀럼시 근처 농장에서 코뮌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하다가 코뮌이 와해된 후에도 친구와 함께 자작농지에 남아 생활하고 있다. 데이비드는 이혼 후 혼자 살면서 자신의 성욕을 창녀들을 대상으로 해소한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무절제한 섹스 후의 만족감을 느끼던 엠마 보바리와 동일시한다. 그래, 이게 행복이야! 엠마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며 말한다. 자신의 강의를 듣는 여학생 멜라니와 동침을 한 일이 발각되어 고발을 당한 후에도 그것은 에로스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며 자신은 더 풍부해졌다는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교수직에서 해임당하고 딸이 있는 도시로 간다. “당신이 지키고자 한 원칙이 뭐였죠?” “말의 자유, 침묵할 자유” 딸 루시의 농장에서 흑인 이웃 페트루스와 동물 보호소를 운영하는 베브 쇼의 일을 도우며 바이런에 관한 오페라를 쓰면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자 한다. 그러던 중 흑인 세 사람이 침입하여 루시를 윤간하고 임신을 하게 된다. 데이비드는 낙태를 종용하지만, 아기를 낳고 페트루스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이는 루시의 결정을 존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의 심각성에 비해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담담한 어조가 더 충격적이었다. 그 절제된 감정들은 사건의 내면을 읽도록 유도하는 저자의 의도적인 장치라고 보인다. 아라파트헤이트 정책에 의해 오랫동안 차별과 희생을 겪어왔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들은 차별이 철폐된 후 그동안 받았던 박해에 대한 복수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깊은 역사적 반성이 이 소설의 근간이다. 루리는 자신의 성추행 혐의를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하여 희생양이 되기를 바라는 대학과 많은 사람들의 제안을 거부하였지만 루시는 자신을 윤간한 세 사람의 흑인과 자신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꾸민 페트루스의 흉계를,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원한과 증오로 이해하고 그 빚을 자신이 대신 갚겠다는 생각으로 모두 용서하고 받아들이고자 한다. 여기가 바로 구세대와 젊은 세대로 대표되는 아버지 루리와 딸 루시의 시선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오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산 자들이 감당해야 할 업보요 유산이라는 저자의 뜻일 것이다. 사건을 서술하는 잔잔하고 평이한 문체는 글쓰기의 좋은 표본으로 삼기에 충분하였다. 아직도 다 아물지 않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적 아픔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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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의 가슴도 그랬을 것이다. 처음으로 그는 뼛속까지 피곤해지고, 희망이 없고, 욕망도 없고, 미래에 무관심한 노인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맛본다. 악취나는 닭털과 썩은 사과 무더기 가운데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한 방울, 한 방울 그로부터 고갈되는 걸 느낀다. 그에게서 완전히 피가 마를 때까지는 몇 주, 아니 몇 달이 걸리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피를 흘리고 있다. 그는 그것이 끝날 때쯤이면, 거미줄에 걸려 있는 파리 껍질처럼, 닿기만 해도 부서지고, 나락의 겨보다 더 가벼워 어디론가 떠내려버릴 태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p163
사람은 어려워지는 것에 익숙해지는가.
그는 생각한다. 밤낮으로 돌아가며 명성을 쌓고 부수는 소문의 방앗간. 구석에서, 전화로, 닫힌 문 뒤에서 회의를 여는 정의의 공동체. 기쁨에 들뜬 속삭임들. 남의 불행을 놓고 희희낙낙 하는 것. 판결부터 내리고, 재판은 나중에 하고. –p66
이후 머리를 식히러 들른 딸 아이의 농장. 데이비드는 그 곳에서 동물병원에서 무료 봉사를 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찰나, 흑인 무장 강도의 습격을 받는다. 자신도 상처를 입고, 딸 아이도 무참하게 폭행을 당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당한 고통에 대해 이웃 흑인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수수방관한다. 데이비드는 딸 아이에게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고 다그치고, 그 지역을 떠나자고 부추기지만 딸 아이는 농장에서의 삶을 버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맞선다. 그렇게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책은 후반부에 이르면, 더 큰 disgrace가 기다리고 있다. 이 부녀가 처한 상황은 가위에 눌린 꿈을 꾸는 듯 답답하다.
항상 더 어려워져요. 베브 쇼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더 어려워지지만 더 쉬워지기도 한다. 사람은 어려워지는 것들에 익숙해진다. 너무너무 어렵던 것이 아직도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데, 더 이상 놀라지도 않는다.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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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과 흑인의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나는 전반 부 교수에게 닥친 스캔들과 그로 인해 추락해 가는 주인공 남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표지에 한 영화배우가 추천하는 책이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는데, 그녀가 이 책에 끌렸던 것은 혹시 그런 대목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공인으로서 항상 심판 받는 위치에 서 있다는 부담감, 주인공이 당한 경우처럼 법규를 어겼을 때 유죄를 인정하면 끝이 나야지 마치 매국노라도 되는 것처럼 사죄를 강요당하는 억울함 같은 것. 주인공을 통해 이런 면들을 본 것은 아닐까하는.
책의 문체는 간결하고, 사건과 대화 위주의 글이라 페이지는 쉽게 넘어간다. 그러나, 추락에 대처하는 데이비즈 부녀가 처한 상황은 어딘가 몹시 불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