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예찬》(난장, 2010)은 발터 벤야민의 사상적 편린에 대한 잡문집이다. 비록 부제가 '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이지만 모든 노트가 정치미학을 위한 담론이라고 여기기에는 다소 삼천포로 빠져버린 듯한 잡글들이 많다. 가령 내가 보기에 '게니우스'와 '조수들' 그리고 '몸짓으로서의 저자'는 문예비평과 페르소나를 위한 노트에 해당한다. 표제어 '세속화예찬'과 '마술과 행복'이 그럭저럭 정치미학에 해당하는 글이라고 보여진다. 만약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붙인다면, '벤야민 예찬'이나 '벤야민 패러디'쯤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10편의 글을 하나의 통일된 주제로 꿰기에는 꽤 잡다한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아감벤의 이런 잡문을 역자 김상운은 주석과 간주곡 '호모 프로파누스'란 글을 통해 애써 일관된 정치미학 담론으로 포장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만약 독자들이 정치미학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다면 가장 중점을 두고 읽어야 할 글은 당연 '세속화 예찬'이다. 그 글은 일단 근대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성과 속의 변증법과 엮인다. 아감벤은 벤야민을 따라서 자본주의를 근대적 종교 혹은 근대적 제의로 해석한다. 막스 베버의 세속화 테제가 근대와 종교와의 단절과 단절에 따른 탈주술성을 강조한다면, 아감벤과 벤야민은 오히려 근대와 종교의 연속성과 친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아감벤이 보기에, 근대 사회는 그렇게 합리적이지도 개인적이지도 않다.
아감벤은 벤야민에 기대어 ‘환속화(secularization)’와 ‘세속화(profanation)’를 구별한다. 이런 구분이 과연 타당한지, 만약 타당하다면 유효한지는 차후의 문제다. 먼저 개념 이해부터 선행되어야 하는데 아감벤에게 있어서 '환속적-종교적' 대 '세속적-성스러운'이 서로 짝말이 된다. 그런데 나는 세속화에 대한 이런 개념 구별이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환속화는 성스러운 것을 폐기하지 않지만 세속화는 성스러운 것의 폐지를 목표로 한다. 환속화는 억압의 형식이다. 환속화는 자신이 다루는 힘을 그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만 함으로써 이 힘을 고스란히 내버려둔다. 이와 반대로 세속화는 자신이 세속화하는 것을 무력화한다. 환속화가 속세의 권력(군주 국가)을 천상의 권력 모델과 뒤섞음으로써 권력 자체를 존속시킨다면, 세속화는 성스러운 질서의 장치들을 비활성화해 완전히 무력화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세속적이란 과거에는 성스럽거나 종교적이었던 것이 인간의 사용과 소유로 되돌려지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