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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문수정)
이아인 : 가정식 백반 '소담' 사장. 집에서 먹는 밥처럼 사소한 양념 하나에도 모든 정성을 쏟고, 재료도 최상의 것만을 쓴다.
최도한 : 회계사. <AJ 컨설팅> 1팀의 팀장. 유능하고 똑똑하다. 별명 칼 있으마. 더 정확하게는 혓바닥에 칼 있으마. 어찌나 사정없이 말을 내뱉어 주시는지 그 혓바닥에 상처 입고 쓰러진 직원이 한 둘이 아니다.
"그 사람이 우리 가게에 밥 먹으러 온 지 이제 일 년이 다 돼가요." "그걸 기억해?" 찬주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다고 첫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처음엔 솔직히 오기였다. 아인이 그를 기억하게 된 동기는 그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요리하는 걸 직업으로 택하고 나서 유별난 손님들도 제법 보았지만, 도한처럼 그녀가 만든 반찬에 손대 대지 않는 손님은 처음이었다. 뭘 내놔도 마찬가지였고, 밥도 늘 반 공기를 남겼다. 어느 정도는 자신이 만든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자존심도 상했었다. 입이 참 짧은 사람이구나. 좋아, 그럼 어디 두고 보자. 그런 오기로 신경 쓰게 된 손님. 그러다 어느 날,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운 그의 밥공기를 봤을 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바쁜 점심시간에도 도한을 눈여겨보게 된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늘 1시 정각이면 같은 자리에 앉아 말없이 밥을 먹고 가는 손님에 대한 관심이 점차 다른 감정으로 자라기 시작한 건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건 아인도 알 수 없었다. "그럼 다시 대시해 볼 거야? 이대로 포기할 건 아니지?" "하하, 아무리 그래도 장난이라고 펄쩍 뛰는 사람한테 다시 고백할 마음은 안 드는데요?" "내가 가서 오해를 풀어주면, 그러면......" 아인은 고개를 저었다. 찬주는 비록 그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녀가 부탁하면 아낌없이 도와줄 것이다. "그냥 이걸로 됐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고백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와 억지로 무슨 인연을 맺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그때 말이나 해볼 걸, 미친 척 좋아한다고 고백이나 해볼 걸.' 그렇게 두고두고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식당 한가운데서 그렇게 창피당할 줄 알았으면 죽어도 고백 같은 건 안 했겠지만 만이다.
"이렇게 대놓고 묻는 게 창피하긴 한데, 그래도 혼자 삽질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요." 아인은 자신이 밸런타인데이 때의 고백처럼 불쑥 입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괜히 오해하고 지레 짐작하고, 그런 건 안 하고 싶어서요. 그날, 기회를 달라고 하셨죠? 그 고백에 대한 답을 할 거라고. 근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직접적으로 대답을 들은 기억은 없거든요." '맞죠?' 하는 듯 쳐다보는 아인의 눈빛에 도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이제 확신이 생겼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확실하게 말해 주세요. 저를......"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얼굴이 빨개진 채로 아인이 물었다. "좋아하세요? 그러니까...... 저를 조금이라도 좋아하시나요?" 잔뜩 쑥스러워 하면서도 아인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한은 용감하게 부딪쳐오는 까만 눈동자에 속절없이 빨려들었다. "난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툽니다. 예민하고 까다롭고, 곁에 있는 사람 마음 잘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할 줄도 모릅니다. 그에 비해 당신은...... 천성적으로 상냥한 사람이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지요." '나 같은 사람도.' 그러니 그에게 그녀는 무척 과분할 사람일 것이다. 정직하게 마음을 드러내고 용감하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따뜻하지만, 마음에 없는 소리는 농담으로라도 할 줄 모르는 여자. "아직은 내 마음이 당신에 비하면 부족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웃는 얼굴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게만 웃어주면 좋겠다는." 그게 무리라면 최소한 곁에서 볼 수 있게 해주기를. 자신이 그 웃음을 빼앗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그게 당신의 고백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면...... 예, 맞습니다. 난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녀를 똑바로 마주하고 도한이 대답했다. "두 달이나 걸려서 미안합니다. 그러니 이제 내게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아인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에게 빨아 당겨진 혀끝이 아릿했다. 그는 이제 그녀를 거의 들어 올리다시피 한 채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잠시 후,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던 키스를 멈추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인은 휘청거리며 그에게 매달렸다. 여전히 강하게 붙잡고 있는 그의 팔이 아니었더라면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도한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댔다. 터져 나온 거친 호흡이 서로의 얼굴에 닿았다. 천천히 그가 그녀를 똑바로 세워주고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그가 완전히 떨어져 섰을 때, 아인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힘차게 부둥켜안았던 허리가 아릿했다.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내려다보며 도한이 물었다. "데이트, 언제라고?" 단 하나의 위안이 있다면 그의 음성도 잔뜩 쉬어있다는 사실이다. 아인은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를 미치도록 안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 * *
한 사람에겐 얼마나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는 걸까? 도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아인은 깨달았다. 지난 밤 나누었던 그와의 키스로. 점심시간, 아인은 직원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온 도한을 쳐다보았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식사가 나오길 기다리는 그를 보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가 그렇게 뜨겁게 키스할 줄 아는 남자라는 걸. 그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사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어쩌면 그녀가 안다고 생각했던 건 그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할지 모른다.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남자인지 다는 모르니까. 하긴 사람이 누군가를 백 퍼센트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건 가족이라고 해도 어려운 일이다. 아인이 전표를 확인하고 그대로 서서 도한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인은 흠흠 거리며 돌아서서 불 위에 올려놓은 뚝배기들 앞으로 갔다.
"남자한테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여자, 참 매력 없잖아요. 나는 사랑을 한다고 해서 자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믿거든요. 누군가한테 기대기 시작하면 다시는 제 발로 설 수 없으니까. 당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런 짐을 지워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 일이니까 알고 싶어 하는 거잖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 일이니까." 도한은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져놓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 곁에 내 자리를 만들어놓고, 아무런 권리도 주지 않겠다는 거야? 걱정조차 하지 말라고? 나에게 기대 자신을 버리라는 게 아니야. 단지 당신 옆에 함께 서고 싶을 뿐이야. 모르겠어?" "알아요. ......알아요." 아인은 손을 내밀어 그의 가슴에 얹었다. 혼자서 결정해야한다는 부담감에 미처 도한을 배려하지 못했다. 그대로 남을지, 정말 가게를 정리하고 떠날지. 오로지 혼자서 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누구의 강요나 설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정하게 되면 나중에 후회할 지도 모른다. 그때 가서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다, 그런 원망은 하고 싶지 않았다. 도한에게도 엄마에게도. "미안해요." "당신은 아직도 모르는군. 내가 진짜 화를 내는 이유는......" "당신한테 기다려 달라고 말해야 했어요." 도한이 소리치는데 그녀가 말을 자르고 얘기했다. "사정을 얘기하고 내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으면, 당신은 기다려 줬을 텐데.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해해 줬을 텐데." "아니. 그게 날 떠나는 거였다면 이해해 주지 않았을 거야.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당신을 놓아주는 일 따윈 하지 않아. 당신이 떠난다고 하면 그래, 잘 가. 그렇게 가볍게 인사할 거라고 믿었다면......" 문득 도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나는...... 나는 당신한테 똑같은 걸 바라. 나에게 당신이 그런 것처럼, 나도 당신의 전부가 되고 싶어." "도한 씨......" "그래, 당신 말대로 그게 착각일 뿐이라고 해도, 인생이란 결국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도, 함께 있을 때만은 당신에게 전부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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