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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최악. 출판사와 번역자는 각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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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남편이 보고 있는 책은 왠지 재미있어 보여 빼앗아 읽게 된다. 쌓아둔 책 100권을 뒤로 하고 남편이 읽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서론이 뭔가 심상치 않다. 본문은 점점 더 심상치 않다. 번역이 개판이다. 역자가 책을 쪼개서 자기 학생들에게 번역 숙제를 내준 다음에 제대로 퇴고도 하지 않고 넘겼다는 데 500원 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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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남편이 보고 있는 책은 왠지 재미있어 보여 빼앗아 읽게 된다. 쌓아둔 책 100권을 뒤로 하고 남편이 읽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서론이 뭔가 심상치 않다. 본문은 점점 더 심상치 않다. 번역이 개판이다. 역자가 책을 쪼개서 자기 학생들에게 번역 숙제를 내준 다음에 제대로 퇴고도 하지 않고 넘겼다는 데 500원 걸겠다. 그렇게 낸 역서는 실적으로 인정되겠지. 역자의 절친으로 이정서를 추천한다.

 

간단히 말하면 애정이 규범으로 존재한 것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이랬다. -,-;;;;;;

<simply that they(attachments) did not stand out as norms.>

번역이 구글 번역기 수준이다. 아니, 구글 번역기는 not을 빼먹고 번역하진 않지. 대체 어떻게 저 문장을 저렇게 번역할 수 있냐고! 그런데 책 처음부터 끝까지 저 수준이다.

 

과거에 관한 연구는 아리에스로 하여금 근대와 전근대 어린이 사이의 관계가 널리 오해되어 왔다고 믿게 했다.>

이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감이 오시는지?

<Aries’ take on the past convinced him that the relationship between modern and premodern childhood had been widely misunderstood.>

이게 원문이다... <아리에스가 과거 연구를 하다가 근대와 전근대 아동기 사이의 관계가 널리 오해되어왔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뜻.

 

발번역에 대해서는 완전히 포기하고 개별 단어들을 머리 속에서 마구 굴려서 대충 내용을 파악하며 읽기로 했다. 빛나는 인사이트는 그지같은 번역을 어떻게든 뚫고 나와 반짝이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원서 역시 별로였다. 일반화를 경계해야겠지만 그래도 일관된 논지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대체 뭘 말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중언부언중언부언중얼중얼..

 

게다가 원서 역시 퇴고를 거쳤나 의심스러운 대목들이 발견되었다. ‘유아 살해가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스파르타의 어린이를 아테네와 비교해볼 수 있다.’라는 문장에 지은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스파르타는 유아 살해를 한 대표적 폴리스이다.’라는 역주가 달려 있다. 나는 역자가 괜히 지은이 탓을 하나 싶어 다시 원문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원문이 잘못된 게 사실이었다.

 

전부 다 아쉽지만 그 외 아쉬운 점들.

-현대의 뇌과학과 전혀 통합되지 않았다. 2011년 책이니 옛날 책도 아닌데 어린이-청소년이 왜 다르게 대접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최근의 논의는 다뤄지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군 위안부, 서구화된 데이트 문화, 교육열로 언급만 되고 지나간다. 한국에서는 아동의 역사 같은 미시사 연구가 역시 미진한 것 같다. 북한과 남한의 아동 상황에 대해서는 비교 연구가 꼭 필요하겠다. 그러고 보니 아동 세계사의 모든 측면을 한반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노동력으로서의 아동, 소년병, 전쟁고아, 급속한 교육보급에 이은 강제 주입식 교육, 여아살해, 낙태, 미국식 소비주의, 출산률의 급격한 저하, 어린이에 대한 사회주의 의식화, 기근으로 인한 사망률의 증가 등등.

 

-what is the use of a book without pictures or conversations? 사진과 삽화가 있으면 훨씬 좋았을 책인데 텍스트만 있음.

 

메모.

Phillippe Aries는 아동기 연구의 선구자. 전근대 유럽에서는 아동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고, 아동기라는 개념도 근대에 나왔다고 주장했다. 나중의 수정주의자들은 전근대에도 아동기란 개념도 있었고 부모들은 자식을 사랑해왔다고 주장함. 일단 수정주의자 승. 하지만 차이들이 있긴 하다.

 

수렵채집 사회(기원전 250만년~기원전 1만년). 아이들은 이동의 제약이 되었고 10대가 될 때까지 경제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긴 모유수유, 선별적 유아살해, 낙태 등으로 출산율을 낮게 유지했다. 하지만 수렵 채집에는 하루에 몇 시간 정도 들이고, 나머지 시간에는 어른들이 아이들과 놀아 주었다. 어떤 사회는 아이의 분노표현을 적절히 유도하지만, 캐나다의 Utku 이누이트 집단은 2세 이상 아이들의 분노를 인정하지 않고 분노를 뜻하는 단어도 없다.

 

농업 사회(기원전 1만년~기원전 3500). 7세 정도면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고 10대도 충분히 가족경제에 기여할 수 있게 됨. 따라서 일을 할 수 있는 6-7부터는 엄격하게 훈육 시작. 출산율 높아짐.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는 말은 사실인데, 아이가 그렇게나 많았기 때문에 아동 중심 사회일 수밖에 없기도 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법으로 아이 양육을 강제. 여전히 어린이들은 많이 죽었다. 죽음이 불가피하다고 여겨, 의학이 있던 곳에서도 의술로 어린이를 치료하려 애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아프리카에서는 쌍둥이가 악마이 영혼을 옮긴다고 믿어 죽게 내버려 두었다. 인더스 강을 따라 형성된 초기 Harappa 문명에서는 악마의 영혼에 빠지지 않도록 어린이 귀에 구멍을 뚫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양막에 싸여 태어난 아이를 두려워했다.

부모가 나이들었을 때 일해줄 아이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40대에 의도적으로 아이를 가졌다. 이런 아이들을 wished child, 근대 초 독일에선 Wunschkind(소원 아동)이라고 불렀다.

잉여생산으로 상류층 어린이는 전족이나 마야문명에서 유아시절에 두상을 길쭉하게 만드는 헤어밴드 등 지위 차이를 드러나는 시술을 받게 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탄생시 여아 남아를 구분하지 않아서, 여아살해를 하던 그리스인들이 신기하게 생각했다.

 

 

 

문명기(기원전 3500~기원전 1000). 대규모의 가부장제 국가 탄생. 상속 문제에 관심. 글쓰기 교육이 널리 퍼짐. 위계질서와 아버지에 대한 복종 의무화. 메소포타미아, 유대법에서는 반항아를 사형까지 시킬 수 있었다.

 

고전시대(기원전 1000~ 서기 500). 중국과 그리스로마 모두 조혼이 가능했지만, 권위는 더 나이든 성인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완전한 성인 지위는 더 늦은 나이에 인정했다. 인도는 힌두교 때문에 어린이를 태어날 때부터 가치 있게 대했고 상상력을 격려했다. 인도에서도 여아 살해는 종종 있었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일을 했으며, 조혼했다. 전체적으로 고전시대 아이들도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하긴 어렵다.

 

후고전시대(500~1450). 선교종교의 확산. 예수의 어린 시절을 그린 그림 등, 종교 기록들은 어린이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어린이를 신의 창조물로 여기면서 주요 종교들은 유아 살해를 강하게 반대하기 시작. 아동 매매 금지 등 어린이 보호 법률이 증가.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어린이의 복종을 강요했다. 기독교와 불교는 (한계는 있었지만) 여성들이 신앙 속에서 교육받을 기회 제공. 불교는 인연으로부터의 해탈을 중시해 독신을 격려했으므로 어린이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으나, 소녀의 조혼에 반대했다. 기독교는 신생아도 원죄가 있다고 했으나, 이슬람교는 모든 유아는 무죄이며 천국에 간다고 보았고 해체된 가정의 어린이 보호, 고아의 재산권 등 근대적이기까지 한 권리를 제시했고 (종교교육이 대부분이지만) 학교 교육도 광범위하게 실시했다. 30%의 성인이 문해력이 있었고 이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슬람권에서는 소아과도 발달했다. 체벌이 있었으나 체벌에 대한 규제도 존재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위로하는 조의록도 많이 나왔는데, 이 시기 서유럽에는 이런 장르가 없었다.

에릭 에릭슨은 루터가 아버지로부터 학대당했고 이 때문에 종교개혁의 주도자가 되었다고 주장. 또한 유럽인이 자녀를 때리는 것을 보고 아메리카 선주민이 충격받았음을 묘사.

흄은 17세기 프랑스의 황태자 교육을 묘사하며 방치, 학대, 대상화되는 (손님접대에 나오고 그 파티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성기를 웃으며 만짐) 사실에 주목했다. 이 시기 서유럽에서는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벽에 있는 고리에 매달아 놓고 일하러 나갔다. 아기가 기는 모습은 동물 같아서 싫어하고 걸을 때까지는 풀어놓지 않으려 했다. 아이를 많이 내다버리거나 다른 집에 맡겼다. 아이들이 종교에 빠져 십자군 같은 비극도 일어났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여성 26, 남성 27세로 꽤 늦게 결혼했고 극빈층은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았다. 성적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남녀가 옷을 입은 채 함께 자는 bundling 등이 있었다. 아동과 성인 사이의 과도기가 상당히 길었다.

 

잉카 문명은 군사라는 관점으로 아이를 바라보아 가혹하게 다뤘다. 신생아를 찬물에 빠뜨린 뒤 누비이불에 쌌다. 한편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어린이 장난감을 열심히 만들기도. 바퀴 달린 장난감은 수송용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어린이가 나이 많은 형제자매에 복수를 하는 상상적인 설화가 나왔는데, 연령 위계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여러 우화는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도 전해졌다.

아프리카에서는 유모차 판매가 실패로 돌아갔다. 아이와 신체적으로 밀착되어 있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근대 초기(1450~1800)

소녀들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많은 사회는 이런 변화를 오랜 기간 은폐했다.

계몽주의와 과학주의로 원죄 개념이 흔들리고 빈 서판 개념이 등장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강조하고 아이들의 개성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두 살까지 이름을 짓지 않거나 죽은 아이의 이름을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다시 붙이는 관행이 없어졌다. 아기가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포대기를 없앴다. 성인들이 자기 나이를 젊게 속이는 경향이 생겨났다.

피아노는 1830년대 이후 반드시 갖추어야 할 가구가 되고, 가족 휴가, 어린이 생일잔치도 생겨났다. 1860년대는 중산층 소녀들이 거식증이 나타났다.

1830년대 이후 adolescence라는 개념이 나왔다. 사춘기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시기로 성적으로 성숙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 순수함과 희망이 있는 때이므로 성인 범죄자와 같이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소년법원이 나왔다. 소년과 소녀는 아주 다르다고 인식되어 위치가 가정과 직장으로 구획되었다.

 

동시대에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노예제가 시작되었다. 어린이들에게도 당연히 끔찍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혼혈 사생아 비율이 매우 높았다.

 

장기 19세기 (18세기 말~1차대전)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어린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미 19세기 초에 유학자들과 사찰이 세운 학교가 많아서 문해력 인구 비율이 세계 최고였고, 이후 국가 주도로 교육이 더 보편화되었다. 과학과 외국어 등을 배워, 소녀를 포함한 아이들은 부모가 모르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한편 복종과 충성심을 강조하는 교육은 군국주의와 연결되었다.

어린이를 소비의 대상으로 여기는 변화의 중심에도 일본이 있다. 일본의 장난감 수출은 전쟁 전후 폭발적으로 늘었다. 닌텐도식 접근은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라 그 자체로 다루었다.

러시아혁명 후 공산정부는 유아원과 유치원 네트워크를 포함한 학교를 세웠고, 어린이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체벌을 폐지하려 노력했다.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건강검진을 받지 않은 아이의 부모에게 연락하고 방문까지 했고, 권고를 담은 지침서를 만들었다.

중국 공산정부 역시 학교를 광범위하게 세웠다. 흥미롭게도 공공장소에서 침뱉기 등을 방지하기 위해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을 감시, 감독하는 업무를 맡기기도 했는데 이는 유교 위계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산아제한은 광범위한 여아 낙태와 여아살애와 연결되었으며, 한편 4-2-1 집단(조부모4-부모2-아이1)에 의한 학교 압박 등의 문제를 낳기도 했다.

 

현대(1차대전~)

아동 보호를 위한 국제적인 실천이 일어나면서 아동노동이 금지되었다. 그 결과 아동은 자산이 아니라 부채로 여겨졌고 출산율은 줄어들었다. 또 연금의 등장으로 자식이 아니라 정부에 노후를 의지하게 되었다.

소비주의는 미국에서 촉발되었고 방학과 생일은 소비주의의 축제가 되었다. 1950년이 되면 부모는 자녀를 심심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어린이, 특히 소녀는 지루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배워야 했다.

1907년 스웨덴의 교육자 엘런 케이는 20세기가 어린이의 세기가 될 것이라 선언했다. 하지만 어린이 비만, 10대의 우울증과 자살, 소비 지상주의 같은 문제가 생길 거라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전쟁과 학살은 어린이와 여성에게 더 큰 피해를 준다. 직접 대면 전투가 줄어든 이후 20세기 후반~21세기 초반에 갈등으로 사망한 사람이 80%가 여성과 어린이로 추정된다. 에이즈도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겪는 큰 문제로 부상했다.

글로벌 기준은 각 나라에게 영향을 준다. 2003년 아랍에미리트는 어린이를 낙타 경주의 기수로 삼는 것을 금지했다. 어린이는 가볍기 때문에 이전에는 어린이가 아무리 무서워해도 낙타에 묶어 달리게 했다.

소비주의의 이면에는 제3세계의 아동노동이 있다. 또한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미국 스타의 모습을 신봉하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어린이가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마도 미국이 주도하여 서구 전체로 확산된 아주 최근의 개념이다. 서구만 보면 어린이들이 행복해지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새로운 차원의 질병이나 노동 착취, 전쟁에 시달리는 동시대 어린이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소비 지상주의로 어린이들이 정말 행복해지는지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YES마니아 : 로얄 r****t 2017.12.25. 신고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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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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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국어 ‘어린이’의 옛말인 ‘어린아’는 15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어린아’는 ‘어리-’에 관형사형 어미 ‘-ㄴ’, “아이”의 뜻을 가진 ‘아’가 결합된 것이다. 16세기 문헌에서는 ‘어리니’, 17세기 문헌에서는 ‘어리니’와 ‘어린이’가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어리-’에 명사 파생 접미사 ‘-이’가 결합된 것이다. 다만 이를 연철하느냐 분철하느냐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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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국어 어린이의 옛말인 어린아15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어린아어리-’에 관형사형 어미 ‘-’, “아이의 뜻을 가진 가 결합된 것이다. 16세기 문헌에서는 어리니’, 17세기 문헌에서는 어리니어린이가 함께 나타나는데 이는 어리-’에 명사 파생 접미사 ‘-가 결합된 것이다. 다만 이를 연철하느냐 분철하느냐에 따라 어리니’, ‘어린이로 나타난 것이다.

 

인터넷에서 어린이라는 단어로 검색하니 이와 같은 설명이 나왔다. 15세기 무렵 조선은 왕권을 다지고 문화 융성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권력을 공고히 하는 작업에 몰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자신감이 붙은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이제껏 힘을 쏟지 못했던 다방면에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 등장했던 건 아니지만 어린이를 일컫는 별도의 용어가 탄생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물론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친 192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 우리나라에서 어린이가 독자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오늘날 세계는 고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를 부추기는 가장 큰 원인으로 손꼽히는 게 바로 저출산이다. 여성이 이기적이라 그렇다는 식의 주장도 존재하지만, 개개인을 손가락질 하는 것으로는 문제의 해결이 힘들다. 사회가 달라진 만큼 사람들의 사고 또한 변한 것이므로, 이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은 필수다. 집집마다 많아도 두 명 이상의 아이를 거느린 경우는 드물다. 그런 만큼 대다수의 가정에서 아이는 대접받고 있다. 부모의 선택에 의해 탄생한 아이는 사랑 받아 마땅한 존재다. 여느 포유류와 달리 어린이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그들을 보살피는 건 부모, 더 나아가 어른들의 거부해선 아니 되는 책무라 하겠다.

오늘날에 당연한 일이 과거에도 당연했으리라 여기는 건 오해다.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라는 책은 제목에서부터 어린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시대마다 달랐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실제로 인류는 자신이 처한 상황,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른 태도를 취했다. 과거 사람들이 더/덜 못됐기 때문에 그랬던 건 물론 아니다. 어떻게 해야 생존에 더 유리한지, 우리의 조상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기본 생존마저도 힘겨웠던 시대였기에 다른 감각은 애써 외면해야만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누군가는 선택을 받았으며, 누군가는 버림을 받았다. 딱 봐서 살아남을 능력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겐 의도적으로 먹을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보살핌을 끊는 등의 방식을 가했다. 잔인하다는 평은 그 당시로선 성립하지 않았다. 그리함으로써 모두가 생존하는 데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농업에, 공장 노동에 어린이가 활용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시선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아니 할 정도로 어린 아이조차도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일을 했다. 아동 학대에 대해 인류는 알지 못했다. 알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는 표현도 맞다. 서구 사회가 급속도로 산업화, 현대화를 일구는데 아동 노동력도 제법 큰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나 오늘날 우리는 그리 하지 못하고 있다. 인류는 현재에 갇혀서 과거 또한 사고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 시절을 평가하면서 적잖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서양인 저자의 눈에 일본의 사례는 꽤나 독특했던 모양이다. 일부러 분량을 할애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치고 나갔다고 볼 수 있는 일본을 언급한 것을 보면 분명 그러하다. 이 나라는 일찌감치 서양에 인력을 파견했다. 사례를 탐구하고는 바로 접목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문제는 그 시도가 다분히 일본적(?)이었다는 점이다. 국가에, 황실에 충성하는 태도가 절대시 여겨졌는데 교육에서도 이 점이 두드러졌다. 시키는 일에는 반항 않고 행하는, ‘성실이라는 단어로 수식되는 일본인 특유의 태도 또한 어쩌면 이 시기에 더욱 강화됐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60-70년대, 더 나아가 지금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 저임금 여성 노동 또한 왠지 일본에서부터 건너온 게 아닌가 짐작이 갔다. 원자재가 없고 오로지 갖춘 것은 노동력뿐인 상황에서 경쟁력을 발휘하기 위한 선택으로서는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가장 손쉬운 것이 바로 노동 착취였는데, 일본이, 뒤이어 우리나라도 그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행복했던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감수해야만 하는 오늘날의 아이들을 고려한다면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기가 힘들다. 마침내 장시간 고강도 노동으로부터 벗어났다며 안도하기에는, 오늘날의 환경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기도 하다. 결국 어른들의 바람대로 아이는 그 동안 살아왔고, 현재도,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도 같다. 이런 비관적인 사고가 현실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나만의 것은 아니길 바란다.

q*****2 2018.11.04.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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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성노예도 소년병도 바라지 않았다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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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23아이들은 성노예도 소년병도 바라지 않았다―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피터 N.스턴스 글/김한종 옮김 삼천리, 2017.8.4. 19000원농업이 가져온 가장 명백한 변화는 일을 할 때 어린이가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었다. 수공예품 생산이나 가내 제조 활동을 포함하는 대부분의 농업 사회는 수렵채집 사회보다 훨씬 더 명백히 어린이의 핵심
"아이들은 성노예도 소년병도 바라지 않았다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내용보기

책읽기 삶읽기 323



아이들은 성노예도 소년병도 바라지 않았다
―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피터 N.스턴스 글/김한종 옮김
 삼천리, 2017.8.4. 19000원


농업이 가져온 가장 명백한 변화는 일을 할 때 어린이가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었다. 수공예품 생산이나 가내 제조 활동을 포함하는 대부분의 농업 사회는 수렵채집 사회보다 훨씬 더 명백히 어린이의 핵심적인 속성을 유용하다고 규정했다. (47쪽)


  사람들은 예부터 아이를 어떻게 다루었을까요? ‘다루다’라는 낱말이 걸립니다만, 어른은 아이를 때로는 ‘다룹’니다. 때로는 ‘보살피’고 때로는 ‘가르치’며 때로는 ‘이끌’어요.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굴리’기도 할 텐데, 이러면서 아이하고 함께 살림을 ‘꾸리’거나 ‘지으’려는 몸짓이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서양의 가난한 가정에서는 종종 아이를 내다버렸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문 앞에 갖다놓는 것이 즐겨 쓰는 방식이었다. (131쪽)

근대적 모델은 대체로 아동기와 성인기 사이를 농업 사회에서 나타났던 것보다 더 크게 분리했다. 어린이는 더 이상 부모 곁에서 일하지 않았다. 산업화와 함께 부모는 일하러 집 밖에 나가야 했고, 어린이는 학교에 다녔다. (158쪽)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삼천리, 2017)를 읽습니다. 유럽을 바탕으로 이 지구라는 별에서 ‘어른’이 아이를 마주한 몸짓이나 눈길을 여러 자료를 살피면서 이야기를 엮습니다. 지나온 발자국이라면 책이나 벽그림에 나온 대목을 작은 실마리로 삼아서 돌아볼 만합니다. 따로 책이나 벽그림이 없더라도 입에서 입으로 이어온 노래하고 이야기에서 어른이 아이를 가르친 몸짓이나 살림을 엿볼 수 있어요.

  서양에서는 ‘아기 버리기’가 제법 흔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기라 하더라도 입에 풀을 바르기가 너무 벅찼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지난날 아기를 그토록 흔히 버리던 서양은 오늘날 온누리 여러 나라 아이들을 널리 받아들이곤 합니다. 이른바 ‘입양을 많이 하는 나라’가 지난날에는 ‘아기를 쉽게 흔히 버리던 나라’였어요.

  우리는 옛날에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 나라 이 겨레도 지난날에는 먹고살기 벅찰 적에 아기를 버릴 수 있었을까요? 아무래도 우리는 서양하고 달라서 ‘아기를 버릴 만한 예배당’이 그리 흔하지는 않았겠지요. 다만 이 나라에 절집이 생긴 뒤로는 절집 앞에 아기를 놓고 간 일이 더러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그리고 오늘날 한국은 아직도 유럽이나 미국에 아기를 많이 내보내는 손꼽히는 나라입니다.


1980년대에 이르면 점점 더 많은 미국 어린이들이 17살 이전에 방과후 파트타임이나 방학 기간에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일과 다른 활동 때문에 학업과 집안일에서 멀어지고 청소년들이 피곤해서 공부에 열중하지 못함으로써 실제로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 … 학교가 끝난 다음 일을 하는 것은 가족이 아니라 주로 자기 자신, 예컨대 자동차 같은 소비 상품을 사거나, 미국에서는 특히 마련하기 힘들었던 대학 공부에 들어가는 비용에 보태려는 목적이었다. 또한 대체로 어른이 되어 가질 직업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낮은 수준의 서비스 업무에 종사했다. (248쪽)


  살림에 보태려고 일하는 어린이나 푸름이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살림에 보태는 ‘어린이·푸름이 노동’보다는 ‘자동차 소비’ 같은 데에 쓰려고 일하는 푸름이가 많았다고 합니닫. 오늘날 한국에서 푸름이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요? 편의점을 비롯한 여러 시설이나 가게에서 일하는 푸름이는 어떤 뜻으로 학교 밖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할까요? 그리고 학교 밖이나 집 밖에서 일하는 어린이하고 푸름이는 무엇을 배울 만할까요? 앞으로 전문 자리를 얻을 만한 일을 해 보면서 일솜씨를 갈고닦을까요, 아니면 적은 일삯으로 오래도록 고단한 하루일까요?


20세기와 21세기의 어떤 단일 사건도 홀로코스트처럼 많은 어린이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폭력의 패턴은 제2차 세계대전과 그에 이은 수십 년 동안 점점 더 심해진 것 같다. (276쪽)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일본 군대는 조선의 어린 소녀들을 붙잡아 강제로 성노예로 삼는 폭력을 저질렀다. (278쪽)


  지구라는 테두리에서 어린이를 바라볼 적에 ‘성노예’하고 ‘소년병’이 불거진다고 합니다. 사회나 정치에 평화 아닌 전쟁을 끌어들이는 어른은 아이들이 평화롭고 사랑스레 자라는 길이 아니라, 두 성별에 따라 벼랑으로 떨어지는 길로 내몬다고 하지요.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라는 책에서 다루기도 합니다만, 왜 어른은 전쟁무기하고 군대를 단단히 붙잡으려고 할까요? 전쟁무기로 평화를 지키겠다는 말은 참으로 얼마나 올바르다고 할 만할까요?

  어른으로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로서 이 대목을 자꾸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무기를 새로 뽑아내고 군대를 자꾸 키우는 이는 바로 어른입니다. 아이들은 소년병으로 끌려가기는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는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자라서 군인이 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첨단무기나 미사일이나 원자폭탄 따위를 뽑아내지 않습니다.

  전쟁무기를 거느릴 돈으로 민주와 평등을 이룰 사회 터전을 닦을 노릇이 아닐까 궁금합니다. 군대를 키울 돈으로 평화와 사랑과 복지를 나누는 정치 얼개를 바로세울 노릇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많은 소년병들은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몹시 잔혹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총이 발휘하는 파괴력에 환호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 이상의 다른 아무런 이유 없이 종종 사람을 죽이고 불구로 만들고 성폭행을 저질렀다. 이런 활동을 한 소년들은 강제로 전쟁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집에 돌아가기가 힘들었다. 집에서는 고분고분해야 했으며, 부모들이 없는 경우도 많았고 지역사회는 당연히 적대적이었다. (285쪽)


  몸뿐 아니라 마음이 다친 아이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몸뿐 아니라 마음이 다치도록 아이들을 내모는 어른들은 언제쯤 이 쳇바퀴를 멈출 만할까요. 남녘에서는 사드라는 미사일이, 북녘에서는 핵무기 실험이, 그야말로 남북녘 모두 전쟁무기 소용돌이에 휩쓸리기만 합니다.

  미사일 하나를 만들지 않으면 그만큼 평화하고 멀어질까요? 오히려 미사일 하나를 만들지 않을 적에 그만큼 평화하고 가까울 수 있지 않을까요? 군대를 더 늘리지 않으면 평화를 못 지킬까요? 도리어 군대를 더 늘리거나 군사비를 자꾸 늘리기 때문에 평화를 잊거나 잃지는 않을까요?

  2000년대로 접어드는 지구별 아이들 살림살이를 돌아보는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인데, 앞으로 2050년쯤 이르면 이 나라를 비롯한 온누리 아이들은 어떤 살림을 누리고 어떤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 헤아려 봅니다. 앞으로 이 나라 아이들하고 온누리 아이들은 전쟁 아닌 평화로 나아갈 만한지, 민주와 평등이 어우러지는 정치로 거듭날 만한지, 이러면서 마을마다 서로 아끼는 따사로운 꿈을 이룰 만한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2017.9.30.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h*******e 2017.09.3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당위적 인식에 대해 근본적이나 정돈되지 않은 질문들
"당위적 인식에 대해 근본적이나 정돈되지 않은 질문들" 내용보기
결론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자면..."어린이의 세계사와 관련된 요소를 한데 모으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아동의 지위에 대한 세 가지 주요 해석을 강조했다. 수렵채집 사회, 농업 사회, 그리고 근대적 아동 지위이다. 이 논의에서 아동의 지위는 무엇보다 경제 시스템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는 학교교육과 소비 지상주의에 휩싸여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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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부분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자면...


"어린이의 세계사와 관련된 요소를 한데 모으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이 책에서는 아동의 지위에 대한 세 가지 주요 해석을 강조했다. 수렵채집 사회, 농업 사회, 그리고 근대적 아동 지위이다. 이 논의에서 아동의 지위는 무엇보다 경제 시스템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는 학교교육과 소비 지상주의에 휩싸여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소비자로 훈련받은 어린이들은 이런 특별한 시스템을 지탱하는 데 필수적이다. 문화와 가족의 구조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이는 하나의 전통적인 농업적 아동 지위가 없고 경제적 변수를 제외한다면 어떤 단일한 근대적 아동 지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동의 지위가 장차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생각할 때 어린이의 세계사, 특히 근대사에서 비롯되는 두 가지 기본적인 문제가 떠오른다. 우리가 아동 지위의 근대적 모델이라고 불러 오던 것은 늘어나는 소비로 치장을 했다. 그리고 그 모델 가까이로 이동하는 사회의 수도 늘어났다. 그렇다면 그 모델은 가까운 미래의 전세계 아동 지위를 보여주는 것일까? 반면에 여러 사회에서는 그 모델이 주는 시사점이 확대되고 있을까? 이런 질문은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다가올 수십 년에 걸쳐 아동 지위의 틀이 이 지역과 저 지역 사이에 더 비슷해질 것이라고 기대해야 할까?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일까?"


결론 부분에 이처럼 명쾌하게 정리된 저자의 문제의식, 이 책을 저술하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고, 많은 자료들을 모으고 분석하면서 계속 따라다니던 질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름의 정리를 하면서 독자들과 학계, 그리고 지구사회에 던지고 싶어진 질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정말 명쾌한 문제의식이 끄트머리에 나타난 것이 하나의 독자로써 다소 당혹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저술 전반에 걸쳐 깔끔하고,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딱 이 문제의식을 계속 곱씹으면서 다양한 사례와 분석자료들의 논거를 정리하고 다듬었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한다. 


초반부, 특히 농업사회에 대한 부분을 보면서 이런 의문을 가져봤다. '아동을 대하는 태도에 이러한 변화와 다양성이 생기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어쨌건 경제를 둘러싼 필요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 너무 당연할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를 왜 직접적으로 하지 않을까?' ... 그런데 결론부분에 경제시스템의 배경을 태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 사학자가 경제에 대해 언급을 하고 강조를 하는게 기술적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건, 난 읽어나가면서 저자가 푸코의 계보학의 방식으로 역사를 기술하려는 것인가? 다양한 특징의 사례와 표면들을 엮어서 나름의 에피스테메 같은 것을 제시하려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종교이야기는 모든 시대를 함께 관통하고 있고... 전쟁과 사회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저자의 논지는 주로 이데올로기 이론과의 유사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였다. 내 스스로 깔끔하게 구분/정리할 수 없는 입장에서 '그래 어쨌건 푸코의 세례를 받았고, 후기구조주의적인 분야사를 정리하려는구나', 라는 생각을 해봤다. 더구나 그것이 소비주의의 문제로 이어지는 막바지에 가서는 말 그대로 소비사회이론에 대한 저작들이 살짝살짝 생각이 나게 논지들을 이끌어갔다. 아니... 이끌어갔다기 보다는 그런 논지들을 개별적으로 도입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역시 앞의 인용문에서도 '최종심급은 경제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같은 부조화는 일단 독자의 과문함이 원인이라 하겠으나, 그럼에도 뭔가 아쉬움은 남는다. 


건방지게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야심만만한 박사과정생이 초안으로 제시한 학위논문 원고가 아닌가 싶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로서는 깔끔하게 정리된 결론의 핵심논리를 바탕으로 전체 내용을 다시쓰라고 권고하고 싶다. 개별 시대 및 사례들에 대한 정리는 나름 그럭저럭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걸 하나의 저작으로 엮고자 한다면, 최소한 전체를 관통하는 무언가는 있어야 하는 거라고 본다. 


어쨌건 미래 노동력의 가능성으로 어린이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시대에서,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는데 기여를 하는 종교의 영향을 받아 자원으로써의 아이의 양태는 달라져왔던 것이고, 특히 계급구분에 따라 새로운 성격의 노동력(통치, 행정, 지배 등의 능력을 갖춘)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 경제력의 성장에 따라(그 과정의 식민주의나 전쟁은 비극적이고, 특별하나 너무나 만연되었기에 각론으로 둘 수준은 아니게 되어버렸으나), 생산능력에 대한 요구도 변화하였던 것이 근대에서 노동과 학교사이의 갈등의 원인이었고, 그 뒤집힘의 키를 가진 셈이고. 더구나 20세기 중반이후 소비사회 부흥시점에서는 그 예비군 성격의 유보에 덧붙여진 새로운 소비시장의 주체들로써 자원의 흐름과 순환에 기여할 수 있는 주체로써의 어린이라는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것, 그것이 역사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분명 저자가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였듯이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특성들은 수십세대를 통시적으로 관통하면서 개별 사례들의 특성들을 결과하였고, 이른 단순히 최종심급으로 단순히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부분이 이 저술의 나름의 가치가 아닌가 싶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의 두번째 질문이 의미가 있다고 동의한다. 


다시금 논지정리의 아쉬움을 언급하지만, 어쨌건 의미있는 시도라고 동의는 해 주고 싶다. 


원서를 보지 않아 한계가 많으나, 또 하나의 가장 큰 아쉬움은 번역과 편집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참 해독하기 어려운 정돈되지 않은 문장들이 책의 논지를 따라가는데 또 하나의 걸림돌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혹시 개정판이 나오게 되면, 대표역자와 편집자는 진지하게 스스로 원고를 다시 적어보는 것을 권유하고 싶다. 

e****s 2017.12.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