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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더러운 곳에서 피어나는 사랑
여전히 시인들은 사랑을 노래한다. 사랑을 노래하는 게 무어 그리 논란이 될 만한 문제는 아니다. 시는 근본적으로 대상(사물)을 향한 사랑의 노래니까. 자고 일어나 보니 벌레가 되었다는 그레고리 잠자(카프카 『변신』의 주인공)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는 잠자고 있는 우리를 한 마리 갑충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문 안의 세계만이 아니라 문 밖의 세계, 요컨대 상상의 세계마저도 통제하는 근대문명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사랑은 그러한 흐름을 혼란시키는 물결로 의미화된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김왕노의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천년의시작, 2011)는 이별이나 상처의 치료약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표제와 같은 제목의 시에서 시인은 우선 인간사 “백년의 고통”을 노래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바로 “사랑을 알고부터 백년은 너무 짧다 생각했습니다.”라는 시구에 표현된 것처럼 사랑에 대한 예찬으로 변주된다. “사랑 속 천 년도 하루 햇살 같은 것입니다.”라는 잠언조의 시구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김왕노에게 사랑은 그레고리 잠자가 넘쳐나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긍정된다. “새 운동화를 신고 산책에 나서, 길가의 꽃과 솜털 뽀얀 소녀와 마주친 적 있다.”(「갑충 날갯짓하다」)는 과거를 기억하는 한, 그레고리 잠자는 여전히 “피 붉은 청춘”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의식이 어떤 맛일까, 도시에 찌든 내 육신은, 종일 도시와 교미하다 허기진 옆구리에 갈비대가 들어난 내 건강상태는, 건강을 증진한다고 보양식이라고 TV 홈쇼핑에서 본 그 음식물은, 내 이 긴 섹스를 보장해 줄 수 있을까, 난 도시와 교미하며 해체 중, 도시의 몸속으로 아득하게 쏟아져간 내 하얀 정충들이, 또 다시 나를 복제하며, 내 지루한 이 생활패턴을 반복하며 세월의 긴 낭간을 먼 후일에도 지나갈까,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한 번쯤 자신이 아삭 아삭 잡아먹히는, 극적인 순간을 한번쯤 거쳐야 하는 것을, 그것이 사랑이 향기를 머금는 계기라는 것을 - 「사마귀와의 교미 혹 사랑론」 4연
그레고리 잠자가 간직하고 있는 “피 붉은 청춘”은 “잡아먹힐까 봐 가까스로 다가간 수놈의 치열한 사랑”(같은 시 1연)과 다르지 않다. 생명의 씨앗을 쏟아 붓고 암사마귀의 먹이가 되는 수사마귀의 강렬한 사랑은 시인으로서의 김왕노가 꾸려내는 강렬한 세계를 구성한다. 위에 인용된 부분에 나타나거니와, 김왕식의 이러한 사랑은 도시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불가능한 사랑으로 인지된다. 그럼에도 시인은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섹스로 온몸이 짓이겨지는”(같은 시, 5연) 도시와의 사랑을 끝까지 수사마귀의 소신대로 밀어붙이려 한다. 타나토스(죽음)를 뛰어넘는 에로스(생명)의 사랑을 시인은 사마귀들의 그 끔찍한 교미로부터 찾아내고 있다. 죽어야 생명을 퍼뜨릴 수 있는 역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마귀는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한번쯤 자신이 아삭 아삭 잡아먹히는, 극적인 순간”에는 이처럼 새로운 생명을 낳으려는 자연의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 도시의 사랑에 드리워진 불모성은 이러한 자연의 본능을 인위적인 욕망으로 변질시킴으로써 발생한다. 「내 한 홉의 사랑은」이란 시를 참조한다면, “그 한 홉의 사랑이라면 내가 먹고 / 구름도 먹고 숲도 먹고 새도 먹고 / 지화자 누구에게나 꽃 시절 오겠는데” 내 한 홉의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에 휩싸인 인위적 사랑(섹스)은 있어도, 구름과 숲과 새가 먹을 수 있는 사랑은 없다. 내 한 홉의 사랑은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거쳐야만 생성될 수 있다. “무너져야 사랑이다.”(「질타」)라는 시구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인간중심적으로 펼쳐지는 도시의 사랑에 질타를 보낸다.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섹스는 무너질까봐 겁내는 사랑이다. 수사마귀가 죽음이 두려워 암사마귀를 찾지 않는다면 사마귀라는 종족 자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수사마귀는 무너짐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죽임으로써 사랑을 성취하는 역설적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없는 사랑에 대한 에스프리」에서 시인이 “오늘도 나는 없는 사랑을 기다립니다.”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없는 사랑”은 사랑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도시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을 긍정하는 것이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 나는 없는 사랑을 내 사랑이라 나직이 불러”보는 시적 정황은 ‘없는 사랑’을 향한 그리움이 궁극적으로는 시인이 소망하는 사랑의 맥락과 결부되고 있음을 예시한다. 호명(呼名)의 시학은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라는 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너의 부름(호명)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김왕노의 사랑의 시학은 타자 지향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타자는 나와 적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생성되는 터전이다. 터전으로서의 타자라는 인식이 실상은 김왕노의 사랑학을 잉태하는 시적 계기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죽은 쥐 몸속으로 회색 털을 밀어내며 바글거리며 파고드는 구더기 떼의 몸춤을 한 번쯤 보아라 쉰내 나는 죽은 쥐의 몸속으로 온몸을 밀어 넣는 그 모습이 역겹다가도 구더기도 한 목숨인데 날아오르기 위한 에너지를 저 죽은 쥐의 몸속에서 얻어내는 목숨의 춤사위 한창인데 하면 그마저 아름다워 보인다. 가장 더럽다고 여기는 곳에서 몸 굴려서라도 구더기 떼는 한 번 날아오르고 싶어 몸춤을 추는 거다. - 「몸춤」 1연
죽은 쥐의 몸속으로 바글거리며 파고드는 구더기의 형상은 그 자체 김왕노식 사랑의 시적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더럽다고 여기는 곳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시학은 “몸춤”이라는 시어가 함의하는 바, 오로지 생명에 대한 본능 속에서 처절하게 진행된다. 끔찍하되 끔찍하지 않은 구더기의 몸춤은 ‘죽은 쥐’라는 타자(죽음)의 공간을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생명의 공간으로 변주시킨다. 시궁창 같은 도시 밑에서 비참한 삶을 영위하면서도 “구더기처럼 정신없이 바글거리다가 몸춤으로 정신없이 역겹게 놀다가 / 그래도 날자, 한 번 날아보자꾸나”(같은 시, 2연)라는 자유의 시학이 생성될 수 있는 이유도, 사랑은 그 비참한 삶마저 딛고 일어나 새로운 것을 낳는 원초적 생명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궤나」라는 시를 참고한다면, 사랑의 생명력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정강이뼈로 만든 악기”인 궤나 소리와 다르지 않다. “전생에 두고 온 내 정강이뼈”가 있고, “오늘은 이 거리를 가는데 종일 정강이뼈가 아”프다고 고백하는 화자(시인)가 있다. 아픔의 기원을 거슬러가면 죽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이다. 현재의 아픔이 전생의 아픔과 연결되고, 전생의 사랑이 다시 현생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곳에 김왕노가 이야기하는 ‘백년의 사랑’이 있다. 나의 사랑이지만, 나의 사랑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생명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는 것, 그것이 어쩌면 김왕노가 시를 통해 꿈꾸는 ‘진정한’ 사랑의 맥락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