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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도서관 매주한권 휴먼터치 https://youtu.be/7YfKtXBF8v4 이번 책은 ]그리스 신화와 철학으로 보는 영혼의 역사]입니다. 저자는 장영란입니다. 도서관 책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입니다. 책날개에 적혀 있는 ‘20년 이상의 연구 결과물’이라는 글귀에 신뢰가 가서 챙겨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쏠리게 했던 책날개의 내용을 옮겨봅니다.
이 저작은 20년 이상 그리스 서사시, 비극 및 철학에서 나타나는 영혼 개념의 주요 특징 및 그 형성과 변천 과정을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혼 개념은 서양의 문학, 예술, 철학, 역사, 종교 등의 근원이 되지만 데카르트 이후 학문적으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영혼에 대한 연구는 고대로부터 철학의 궁극적 목적인 영혼의 치유와 관련해서 유용한 담론을 제공할 것이다.
책은 페이지를 가득 채운 책 읽는 여자의 사진으로 시작합니다. 저의 시선을 한참 붙들었습니다. 새록새록 잠들어 있는 평화로운 아기의 얼굴은 들여다보고 또 보아도 여전히 심심해지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사진이 그랬습니다. ‘생각함’과 ‘생각안함’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아기 얼굴 들여다보듯 사진을 들여다봤습니다. 사진 속에서 책을 읽는 여성의 이마는 밝게 빛납니다, 응시하는 유순한 눈매와 다물고 있는 단정한 입매에서 책이 발하는 영혼이 읽혀질 듯합니다.
사진 속의 책은 많이 두껍습니다. 여성이 그렇게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작품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그렇지만 작은 여성은 사뭇 무겁지 않은 듯 받쳐 들고 읽고 있습니다. 책의 두께만큼 책이 품고 있는 영혼의 품도 넉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지된 사진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가롭게 부지런합니다. 가슴이 고요하게 요동칩니다. 책 읽는 영혼의 아름다움에 담뿍 젖어들게 됩니다. 해당 도판에 대한 설명을 찾으려 애써 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단 하나의 도판만으로도 책은 이미 저에게 충분한 가치를 발했습니다.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인터넷서점에 들어가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2010년 출간 당시 책의 정가는 3만2천원인데 중고가격이 8만5천원이었습니다. 아마 책 속에 포함된 도판이 풍부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정가보다 높은 중고가격에 유쾌하게 허허 웃었습니다. 책은 저마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게 마련입니다만, 지금까지 책맛보기 한 책 중에 최고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2020년 12월 [영혼이란 무엇인가]로 새롭게 출간되어 있었습니다. 책의 두께가 거의 반으로 줄어든 신간은 이렇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영혼’이란 주제에 깊이 천착한 장영란 박사의 저서이다. 원래 『영혼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던 것을 ‘영혼’이라는 주제에 집중되도록 구성과 내용을 정리하여, 새롭게 출간하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영혼 개념을 통찰하고, 나아가 “영혼의 치유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라며 철학이 ‘뜬구름 잡는 학문’이 아니라 지극히 실천적 학문임을 강조한다.
2010년에 출간된 [영혼의 역사]와 2020년의 신간 [영혼이란 무엇인가]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책맛보기는 2010년에 출간된 [영혼의 역사]를 그대로 펼치기로 결정합니다. 그림과 글을 동시에 읽는 책맛을 느긋하게 충분히 즐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역사]는 완전히 논문투로 쓰인 책이어서 글맛이 운치를 자아내지는 않습니다. 젊은 시절 비극을 쓴 이력이 있는 플라톤은 드라마틱한 요소와 대화형식을 저서에 가미했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글쓰기는 플라톤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데에도 기여했을 듯합니다. 책은 플라톤의 글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비극작품을 가지고 경연대회에 가려던 도중에 소크라테스를 만나 철학에 입문하면서 자신이 기존에 썼던 비극작품을 모두 태워버렸다. 플라톤이 젊었을 때 비극 작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비극작품을 쓰는 데 몰두했다는 사실은 문학에 대한 플라톤의 관심과 이해를 충분히 보여준다. 플라톤이 비극작품과 유사한 대화형식으로 작품을 쓴 이유는 대중을 대상으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구체적인 현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 소박한 문체로 기술하면서도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이성에 호소한다. 보편적인 진리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말하는 대화형식은 단지 이성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감성적인 것도 영혼을 설득하고 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존하는 저작들이 주로 오늘날의 논문과 같이 서술형으로 쓰여진 것과는 다르다
[영혼의 역사] 책은 ‘책 읽는 영혼에게’라는 제목으로 시작됩니다. 처음으로 건네는 저자의 말에서 친근함과 경쾌함이 느껴집니다. 책의 첫머리는 저자의 심경과 각오를 담아 책 전체의 내용을 스케치해 줍니다. 옮겨봅니다.
이 책은 서구 역사 속에 묻혀 버린 고대인들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영혼에서 찾고자 한다. 영혼 개념은 인류가 역사적으로 존재하기 훨씬 이전인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나 유물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영혼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영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 ‘정신’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영혼보다는 ‘의식’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오늘날에 와서 영혼에 대해 말하려는 이유는 고대인들의 영혼 개념 속에서 인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 지혜를 살펴볼 수 있으며, 현대인들의 피폐한 삶을 치유할 중요한 단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혼의 기원과 개념, 영혼의 시간의 신화, 영혼의 기억과 상기, 영혼의 윤회와 금욕, 영혼의 돌봄과 조화, 영혼의 훈련과 글쓰기, 영혼의 탁월성과 훌륭한 삶, 영혼의 고통과 치유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영혼의 역사] 책은 크고도 두껍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 속에 포함된 수많은 사진들을 우선 넘겨가며 감상했습니다. 그리스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수집한 것들을 책에다가 총집합시켜 놓은 듯했습니다. 이렇게 풍부한 그림과 글로 이루어진 책을 예전에 만났던 적이 있었던가,싶을 정도였습니다.
도판마다 알찬 설명이 첨부되어 있어 그리스 시대를 만끽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진 읽기의 재미가 쏠쏠하다보니 대박물관이나 대미술관을 방문한 느낌을 방불케 했습니다. 변방의 리틀도서관 책맛보기에서 다루기에는 송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저자의 노고가 배인 연구의 성과물이라는 책을 저의 유치한 이해가 누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을 만큼만 해보자는 소박한 기백을 갖게 된 것은 이 책 덕분이었습니다.
책은 그리스 철학으로 바라본 영혼의 개념과 치유 방법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를 통해 고대 그리스를 여행하며 당시 살았던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득할 것 같은 고대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유년 시절이 엊그제같이 여겨지는 걸로 봐서, 또 어르신들이 ‘한평생은 눈 깜짝할 사이’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면, 천 년 세월쯤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닙니다. 2,3천 년 전 고대 적 사람이라고 해도 사이보그나 AI가 아닌 이상 지금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고대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들보다는 영혼을 더 염두에 두며 산 듯합니다.
책은 철학과 영혼의 상관성에 대해 다루면서 철학이 나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영혼을 보살피는 데에 꼭 필요한 학문이라는 데에 동조하도록 만듭니다. 철학의 가치를 강조하는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철학은 일종의 영혼의 훈련이다. 인간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정화이다. 진정한 철학자들은 종교적 제의를 통하지 않고 영혼의 훈련을 통해서도 정화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참된 철학자는 영혼의 해방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쾌락과 고통을 멀리해야 한다. 철학은 지혜를 얻으려는 훈련과 노력이라는 점에서 삶의 방식이다.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철학은 인간이 삶 속에서 겪는 고통을 치유하는 치료약과 같다. 철학자는 철학을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만 하지 말고 진정으로 철학을 해야만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타인의 영혼도 치유할 수 있다.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은 실천적으로 타인의 영혼을 돌보는 것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성찰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행위는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 할 수 있게 한다.
책은 총8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8장부터 펼쳐보았습니다. 8장의 제목은 ‘영혼의 고통과 치유, 방황하는 영혼의 평정을 찾다’입니다. 8장은 렘브란트의 그림 [명상에 잠긴 철학자]가 반갑게 맞아주고 있습니다. 철학자를 등장시킨 그림에서 영혼 치유로서의 철학의 역할에 대해 논지를 전개하겠다는 저자의 의도가 읽혀지는 듯합니다.
책은 플라톤이 40세 경에 쓴 [국가]와 60세 경에 쓴 [파이드로스]에서 거론한 영혼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국가]는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정치 담론을 펼친 작품이며, [파이드로스]는 아름다운 강변 숲속에서 소크라테스와 제자 파이드로스가 나눈 대화를 담았습니다. 플라톤에게 영혼의 의미는 앎이나 배움에 관여하는 ‘이성’, 기운차게 싸울 줄도 아는 용감무쌍한 ‘기백’, 육체적 감각적 ‘갈망’ 등과 같은 것들을 모두 아우른 것입니다. ‘영혼이 무엇인가’에 대해 플라톤이 자신의 두 저서에서 언급한 견해를 인용해 봅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가장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문제는 바로 ‘영혼이란 무엇인가’이다. 플라톤에게 자기 자신은 영혼이다. 그는 영혼을 세 부분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 배우는 부분인 이성(reason)이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격정을 느끼는 부분인 기개(spirit)이다. 그것은 지배하고 승리하고 명성을 떨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온갖 욕구들과 관련된 욕망(appetite),이다. 그것은 돈이나 이익을 좋아한다. [파이드로스]에서 영혼은 쌍두마차에 비유된다. 인간의 영혼은 마부인 ‘이성’과 ‘기개’인 착한 말과 ‘욕구’인 나쁜 말로 이루어져 있다. ‘기개’라는 말은 분별심과 수치심이 있고 명예를 사랑하여 참된 견해를 동반자로 삼아 명령과 이치에 따라 인도 된다. 하지만 ‘욕구’라는 말은 무분별과 거짓을 동반자로 삼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 채찍과 막대기를 들어야 겨우 말을 듣는다. 만약 말을 듣지 않는다고 없애버리거나 강제적으로 묶어놓는다면 쌍두마차는 제대로 날아오를 수가 없다. 따라서 영혼의 세 부분이 모두 자신의 일을 제각기 할 수 있을 때 영혼의 여행은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성’이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본래 영혼의 마부인 ‘이성’은 ‘기개’와 ‘욕구’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조절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이성과 기개 및 욕구가 각자 자신의 일을 할 때 조화를 이루고 정의롭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모든 욕망이 억압되거나 절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욕망을 적절하게 통제하라는 것이지 아예 없애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지 이성만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며 기개와 욕망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이성이 충동적인 기개와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는 단서는 존재한다. 플라톤 철학에서 자기 자신을 돌보는 기술은 바로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기술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지배는 바로 이성이 기개와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상태이다. 만약 이성이 올바로 훈련되지 못해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욕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의 병은 이성 , 기개, 욕구들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항상 잘 살펴서 원인을 파악하면 대부분 스스로 치유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동안 영혼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잘 알고 돌볼 수 있을 때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영혼의 개념도 이성의 역할을 중시하는 플라톤과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런 느낌을 들도록 한 저자의 논지를 옮겨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영혼을 분류하는 기준으로서 이성을 제시한다. 영혼은 이성을 가진 부분과 이성을 가지지 않은 부분으로 나뉜다. 이성적이지 않으면서도 이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설득 되는 부분이 바로 욕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이 탁월하게 발휘될 수 있다면 다른 감정이나 욕망들에 의해 쉽게 동요되지 않기 때문에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인생에 불운이 닥치더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적절한 방식으로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예기치 않은 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그것들은 의지에 의해 통제되거나 조절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것들을 불가피하게 겪을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만약 진정으로 훌륭한 분별력을 갖췄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운을 잘 견뎌낼 것이고 가장 훌륭하게 행동할 것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우리의 무지가 영혼을 병들게 한다고 봅니다. 합리적인 쾌락 추구 방법을 알려주는 에피쿠로스학파는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 일차적으로 해야 하는 공부로 자연학을 제시합니다. 자연학을 진화론과 연관시키니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진화론 관련 지식들을 알기 전과 후는 고통을 마주하는 태도에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연 이치와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이성적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진화론이 인간사를 조금이나마 의연히 바라볼 수 있도록 안목과 저력의 바탕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자연학 공부도 세상사를 통찰하는 힘이 되었으리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을 인용해 봅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왜 자연학이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대부분의 인간이 우주와 자연의 본성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움에 휩싸여 고통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연학은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일차적인 학문이 될 수 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자연에 대한 연구야말로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연구는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들어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학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평정심이다. 이것은 영혼의 동요와 혼란이 없어지면서 도달하게 되는 상태이다. 모든 불행과 고통은 인간들이 진정한 쾌락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고 진정한 쾌락을 추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을 에피쿠로스학파는 사명으로 삼는다. 이를 위해 이 세계의 근본적인 특성과 인간 영혼의 본성을 탐구하는 자연학 연구는 필수적이다. 자연학은 이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특성과 법칙을 연구한다.
스토아학파도 에피쿠로스학파와 마찬가지로 자연학을 중시했다는 것을 책을 알려줍니다. 스토아학파가 자연학의 범주에서 객관적으로 파악한 인간의 실체는 이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돌보는 존재였습니다. 즉 자기 보존 욕구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스토아학파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쾌락이 아닌 자기보존을 추구하며, 쾌락은 단지 자기를 보존하려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파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스토아학파가 주장하는 인간의 자기 보존 욕구는 여타의 동식물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책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보존은 단지 신체를 보존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동식물과 달리 인간의 자기 보존, 즉 자연을 따르는 삶은 신체적 보존 욕구를 넘어서 자신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욕구와 관련이 있다. 스토아학파에게 인간의 자연은 이성이다. 인간에게 가장 고유한 자연 또는 본성은 이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이성을 따라 사는 것이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이 된다.따라서 자연을 따르는 삶은 바로 자연의 작용 원리이며 인간 영혼의 원리인 이성을 따르는 삶이다. 만약 인간이 본능적이고 이기적 욕망만을 추구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할 것이다. 그것은 현재에만 집착하여 미래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아학파에서 제안하는 영혼의 훈련 방법은 자신들의 철학적 원리와 일치한다. 보편적 이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자연학 연구는 우주 변화의 합리적 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주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모든 것을 보편적 이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사에 보다 초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기 보존 욕구가 신체 보존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책은 일깨워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인간의 탁월성을 거론함에 있어 신체의 탁월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인간의 탁월성은 곧 영혼의 탁월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탁월성은 신체가 앞장서야만 가능해 질 수 있습니다. 몸이 먼저 나서서 실제로 실천하고 행동해야만 탁월한 영혼을 지닐 수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을 옮겨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가 인간의 탁월성을 말 할 때 신체의 탁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탁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탁월성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의 두 종류로 지성의 탁월성과 성품의 탁월성을 거론한다. 지성의 탁월성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하여 지성의 탁월성에 도달할 수 있다. 성품의 탁월성도 절제하는 습관의 결과로 생겨난다. 영혼의 탁월성은 마치 기술처럼 먼저 발휘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직접 연주함으로써 연주자가 될 수 있는데,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다. 정의로운 일들을 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탁월성은 일정하게 어떠한 행동들을 반복 실천함으로써 획득되고 비로소 갖추게 되는 것이다. 탁월성은 이처럼 어떻게 습관을 들이느냐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이나 교육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좋은 삶으로 여기는 것은 관조적 삶이다. 관조는 인간의 이성이 가장 탁월하게 발휘하는 것으로 인간의 최고의 활동이다. 그러니 지혜로우면 지혜로울수록 혼자서 더 잘 관조할 수 있다. 관조는 다른 어떤 활동보다 더 활동적이다. 관조 자체가 일종의 활동 이기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 삶을 최선의 삶으로 보는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이성적 훈련을 한 후에 관조적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자기 보존 욕구를 가진 인간에게 죽음은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우리들의 영혼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을 회피하고 싶을수록 두려움은 커집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것의 고통이 영혼을 파괴할 정도로 압도적일 때도 여전히 죽음이 삶보다 두려울지 의문입니다. 간절히 죽고 싶어도 영영 죽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도 죽음은 다름없이 무서울지 의문입니다. 삶이 죽음보다 더 비참한 경우는 도저히 없는지도 궁금합니다.
어쩌면 고통스러운 누군가에게 죽음은 공포가 아닌 위안이나 축복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삶의 지독한 고통이 죽음의 공포를 사라지게 하는 특효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약을 가지지 않은 보통 사람들을 위해 에피쿠로스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처방을 다음과 같이 건네줍니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두렵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비판한다. 죽음에 이르게 되면 오히려 고통스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죽을 것을 미리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고통을 주지 않으며 고통을 줄 수도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감각을 빼앗아간다. 이렇듯 우리가 죽음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죽을 운명을 지닌 삶도 즐겁게 된다. 우리에게서 불멸에 대한 욕망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쾌락이라고 한다면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죽음도 쾌락일 수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감각이 사라지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헛되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듯합니다. 살아 있을 때 즐겁게 살다가 죽어질 때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는 말아야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이 자기 보존 욕구를 이성적으로 현명하게 실현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죽음으로부터 무작정 달아나지 않으려고 하는 영혼을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리스 아테네의 비극 시인 소포클레스도 죽음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에 대한 내용을 책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소포클레스는 너무 지나치게 오래 살려고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너무 기나긴 삶은 즐거움보다는 슬픔을 쌓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더욱이 나이가 들어 늙으면 이뤄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에게 죽음은 자유이며 축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영혼의 방황과 타락을 두고만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책에 기록된 영혼 치유 방법에는 글쓰기, 음악 듣기, 솔직하게 대화하기, 철학하기, 명상 및 관조하기 등이 있습니다. 두서없이 책맛보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