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냥 지나가 버릴 수도 있었다. 문이 조금 열려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엘리너가 새 커피 기계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갑자기 기계가 쉬익 큰소리를 내서 데이비드의 주의를 끌지 않을 수도 있었다. 데이비드에게 남은 돈이 없을 수도, 문을 조금 더 열고 아직 주문받냐고 물어볼 용기가 없을 수도 있었다. 박물관 배치를 잘못 알아서 전시실도 다 못 보고 기차 시간에 맞춰 돌아가기 위해 서두르느라, 찻집에 들를 여유가 없을 수도 있었다. 이런 것들아, 하나씩 제대로 들어맞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 P.92 요즘 유행하는 막장도, 판타지도 모던클래식에는 없다. 포악마저도 잔잔하게 그려지고, 그걸 읽는 사람들 맘조차도 평화롭게 만드는 요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거리의 법칙>이 그랬고, <녹턴>이 그랬다. 읽기 쉬운 책들은 분명 아니다. 행간의 간격외에는 흐름을 놓쳐버리면 누구의 말인지 조차도 분간할수가 없다. 처음 모던시리즈를 접했을때는 주제 사라마구의 책이 생각났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읽기가 수월하다. 물음표도 행간도 있으니 말이다.
진실의 작은 일부분들이 하나둘씩 보여질 때마다 이 속에서 또다른 진실을 찾으려 하는건 요즘 너무나 많이 나오는 얽히고 섥혀있는 드라마나 영화, 그리고 책들의 영향일것이다. <너무나 많은 시작>에는 그런 내용은 없다. 하지만 책 표지의 수 많은 종류의 열쇠들처럼, 시작하기 위해 문을 열수 있는 방법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지금도 우리들 삶은 이길이 옳은지 저길이 옳은지 택일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
![]() 모던 클래식이 괜찮다는 얘기는 책 좋아하는 분들께 많이 들었다. 이 책의 평가도 좋은데다가 전작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은 영국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부커상을 비롯해, 브리티시 북 어워즈 ‘올해의 신예’, 커먼웰스 작가상, 《선데이 타임스》 올해의 젊은 작가상 최종 후보에 올라 영국 언론과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두 번째 소설인 『너무나 많은 시작』 역시 부커상 최종 후보작에 오르는 등 영국의 차세대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는 소개에 기대반, 걱정반으로 읽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은 시작』은 전작과 이어진다고 한다. 전작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왠지 전작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고 해야하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존 맥그리거의 스타일을 이해했기 때문인 것 같다. 전작은 『너무나 많은 시작』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카터와 엘리너의 딸 케이트 카터가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케이트가 보는 부모님과 어머니때문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간 케이트의 이야기를 엮은게 전작이라면, 이번 책은 전작의 주인공 케이트의 부모님들의 이야기였다. 크게는 데이비드의 중심으로, 부인 엘리너의 이야기까지 함께 곁들여졌다. 혹시 세번째 소설은 엘리너의 입장에서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데이비드는 잘 살고 있던 어느날, 어머니의 친구 줄리아의 치매때문에 자신도 모르던 과거를 알게 된다. 기억이 왔다갔다 거리던 줄리아는 결국 실언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실수한지도 모르는 줄리아를 앞에두고 어머니 도로시와 데이비드는 당황하게 된다. 사실 이 책은 이 내용이 주인 것 같지만, 사실은 데이비드의 어릴 때부터 나이가 황혼이 넘어서까지의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잔잔한, 누구에게나 있는 평범한 일대기인 것이다. 조금 특별한 것이라면 나름 출생의 비밀을 가진 것 이외에는 조금도 특별할게 없는 삶처럼 보였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한 사람이 지나온 일대기를 읽고 있는건지, 존 맥그리거가 쓴 소설을 읽고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일상과 같은 소설을 잔잔하게, 아무 소리 없이 부는 바람처럼 표현하고 있는건지 신기했다.
전제적으로 밋밋한 느낌이 없자나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독특했던 점은 스코틀랜드의 특유의 감탄사 Aya를 그대로 인용해 '어야'라고 표현한 것과 대화 따옴표(")가 없이 대화체를 쉼표(,)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존 맥그리거의 문체 스타일인 것 같은데, 옮긴이가 신경을 많이 쓴 것처럼 보였다. 왠지 역작보다 실제 언어로 적힌 책이 좀더 섬세하고 시적이지 않을까 싶다.
제목처럼 우리의 인생은 많은 시작점을 두고 살아간다. 그러한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싶었던 존 맥그리거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
초등학교 때, 방학 숙제 때문에 박물관에 처음 갔을 때가 기억난다. 정확히 그곳에서 어떤 유물들과 자료들을 보았는지는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나를 압도했던 오래된 유물들이 내뿜어 내던 오묘한 분위기는 지금도 또렷이 떠오른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압축해놓은 것 같았던 유물들이 살아서 움직이며, 어린 나에게 손을 내밀고, 말을 거는 것만 같은 독특한 느낌마저 들었다. 숙제 때문에 부지런히 유물들에 대한 감상을 노트에 적을 수밖에 없었지만, 대충 마치고 난 뒤 나는 친구들을 따돌리고 몇 분 동안을 박물관 주위를 둘러보며 그 독특한 분위기가 내게 과연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알아내려 애썼다. 그것들은 내가 그 당시 매우 궁금해했던 물음들, 예컨대 내가 두 발을 디디며 서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또는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어떤 존재인지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내가 차마 말로써 형상화할 수 없었던 박물관의 오묘한 분위기란 바로, 어느 누군가가 무심히 흘려보낼 수 있었던 순간의 기억을, 그 순간의 감상을 그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자 자취 그 자체에서 풍기는 것인지 몰랐다. 나아가 그것은 그 때 내가 풀지 못했던 그 막연한 질문들에 조금이라도 가닿기 위한 노력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물들을 바라보면서도, 그 박제된 과거의 흔적들이 내뿜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에 경외심마저 느꼈던 것이리라.
존 맥그리거의 이 소설 『너무나 많은 시작』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 데이비드라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데이비드를 압도했던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의 농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물들이었다. 그는 여러 곳을 혼자서 헤집고 다니며 특이한 물건들을 수집하고, 그 물건들로 자신만의 박물관을 만든다. 그는 자라면서 박물관 큐레이터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꿈을 꾸고, 노력 끝에 그 소망을 이루어낸다. 한동안 큐레이터 생활을 바쁘게 해오던 그는 에버딘의 한 박물관으로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엘리너라는 매력적인 여인을 만나게 되어 오랜 시간 편지를 주고 받다가 결혼을 한다. 박물관 큐레이터이자 한 여자의 남편, 또 딸 케이트의 아버지로서 순탄한 삶을 살아가던 그는, 한동안 감추어두었던 그 자신의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 아내와 함께 긴 여행길에 오른다. 그 비밀이란, 어머니의 오랜 친구인 줄리아 아줌마의 말실수로 인해 폭로된 사실, 즉 자신이 한 평생 친모라고 여겨왔던 어머니가 실은 친모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굳게 믿어왔던 삶의 증거가 시작점부터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크게 흔들리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숨겨진 과거를 찾기 위해 여태까지의 삶과 관련된 기록물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작가 존 맥그리거는 쉰 다섯 살이 된 데이비드가 친모를 찾아가는 여행 전에 준비한 물건들의 목록에 대해, 또 그 물건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삶의 내밀한 기록들에 대해 차분하게 서술한다. 나아가 데이비드가 한 평생 모아둔 소소한, 그러나 특별한 사연을 담고 있는 물건들은, 마치 작은 박물관에 밝은 조명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처럼 그려진다.
이 소설이 품고 있는 따듯함은 바로 데이비드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이어주는 방식을, 시간과 기억의 밀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사물’들에서 찾는다는 점에 있다. 우리의 삶은 부주의한 실수와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 우연들, 비밀들이라는 동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나 쉽게 그 존재 자체를 잊는 우리 주변의 사물들은, 무심코 흘려보냈던 삶의 순간들을 우리에게 다시 환기시켜, 잊혀진 그 시간들에 깊은 농도를 선사해준다. 무심코 넘겨 본 사진첩에서, 낡은 일기장에서, 상자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삶의 순간들은 한동안 지나쳐왔던 진실한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처럼 데이비드의 평범한 삶 자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지도, 장갑, 냅킨, 월급봉투와 같은 소소한 것들이다. 그는 자신의 삶 자체를 고스란히 말해주는 이런 것들을 찾아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나아가 이와 같이 소소한 물건들은 인생의 비밀을 풀기 위해 비로소 그 비밀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데이비드에게, 작은 단서이자 열쇠가 된다.
소설 말미에 데이비드는 친모인 줄 알았던 메리여사가, 친모가 아니란 걸 알게 되지만 크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길을 되돌려 어느 낯선 호텔로 향한다. 아내 엘리너가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지만 그는 단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만 내뱉는다. 그는 트렁크 가득 물건들을 싣고 다시 익숙한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를 것이다. 데이비드의 마지막 그 말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의 뒷모습을 들여다보고 싶어했던 자가, 그 뒷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시 덮어두고자 하는 작은 움직임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말처럼 “대신 미끄러져 들어갔을 또 다른 생이란 딱히 없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때때로 의식적으로 잊으려 하는 그 불편한 진실이기도 한 그 사실인 “인생은 훨씬 작은 계기와 우연들의 만남, 엿들은 대화, 일의 추이를 끊임없이 바꾸고 재조직하는 과정과 실책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그 삶의 방식과 모양이 제각기 인 것처럼, 저마다 다른 삶의 유물을 보관해둔 박물관이다. 우리가 익숙한 일상에 매몰되어 삶의 흐름 자체를 순응하며 살아갈 때, 책상 위에 무심코 놓아둔 작은 물건들과 같은 소소한 물건들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지나간 삶의 흔적들을 다시 우리 앞에 꺼내놓는다. 어쩌면 삶의 이야기 전체는 한 평생이 걸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가진 것들이 시작 지점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삶이더라도 적어도 기억의 농도를 그대로 담고 있는 물건들을 바라볼 때처럼, 우리는 제멋대로 흘러가는 삶 자체를, 그 흔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다. 삶이란 "관찰하거나 기록하거나 조종하기에는 너무나 미세하고 무수한 순간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에 의해, 변화하고 움직여 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진짜 이야기는 그의 말처럼 “사진첩과 스크랩북 몇 개로 모아 내기엔, 바다 건너 찾아가 어느 집 탁자 위에 펼쳐 놓기엔, 너무 복잡”한 것이다. 마치 우리가 불가해한 운명 자체를 거스르며, 거부하며 살 수는 없듯이.
|
|
전 고전을 어렵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삶에 고정되어진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펼친 순간 이걸 어떻게 이해를 하면 읽어야할까 했습니다. 현대문학과는 달리 좀더 진솔하고 깊이있는 내용이라는 점에 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말아야한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수많은 글자를 읽으면서 마치 한조각 한조각의 퍼즐을 맞춰나 가는 느낌입니다. 조각을 맞춰가면서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목표가 무엇인지 그것을 중심으로 이해를 하려고 했습 니다.
시작은 데이비드의 어머니 메리의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이 그집에 왜 가게 되었는지 데이비드가 어떻게 태어났고 헤어질수밖에 없었는지를 말입니다. 또 데이비드는 자신의 양모를 통해서 그동안 몰랐던 출생의 비밀을 알게되고 물품들 의 목록을 만들어 조각을 맞추어 나갑니다. 제목에서부터 그 퍼즐을 나가는 세삼한 표현이 맘에 들었습니다. 독자로서 이 부분을 통해서 데이비드의 노력을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어머니를 만나게 되고 그동안 자신이 생각했던 부분에 대 한 오해와 진실 그리고 현재의 심경을 적나라게 보여준다는 평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그저 일반적인 생활에 적응해 계속 살았더라면 데이비드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앗을까 생각하고 주변의 등장인물 들의 상처를 볼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친부모를 찾아가는 여정속에서 보다 넓은 의미의 세세한 인생표현을 본느낌이다. 앞에서와 같이 현대문학과는 달리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틈을 보여주지 않고 세세한 부분까지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들까 지 섬세한 심리묘사를 볼수 있었다. 어렵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순간 파노라마 사진이 그냥 스치듯 지나간다.
잘못하면 세밀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이 지루하게 느껴질듯 하지만 데이비드를 중심으로 이어진 내용속에 그곁의 사람들 이 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잠시 휴식을 준다. 그리고 전 해외로 입양된 우리의 아이들이 친부모를 찾기위해 고국을 방문하는 경 우와 비교하게 되었답니다. 데이비드와 입양아들은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에서 이것은 비록 꾸며진 이야기 이지만 현실일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근데 데이비드에게 묻고 싶습니다. 자신의 여정을 통해 서 진정 얻은 결과는 무엇인지 대답해 달라고 말입니다. 전 마직막 페이지를 넘기긴 했지만 아직은 그 해답을 제가 찾을수 없 습니다. 다시금 시간을 찾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소설이라고 하나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것 같다는 예상을 하게 됩니다. 어렵지 않다고 그렇다고 쉽게 이해할수 있는 부분은 아닌것 같습니다. 다만 가슴으로 느끼면 그 내용을 독자로서 충 분히 이해하리라 생각듭니다. |
|
‘너무나 많은 시작’이란 소설의 제목을 보고 이처럼 인생의 특징을 적절히 표현한 문구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시작과 끝을 겪고 있는가. 하나하나 미처 뜻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밀려오는 새로운 시작과 끝 때문에 자칫하면 인생 자체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을 지경이다. 거리를 다니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 이외의 느낌이 들지 않지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고 사정을 알게 된다면 드라마도 그런 드라마들이 없을 만큼 다양한 인생이야기들로 꽉 차 있을 것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듣다 보면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지나온 사소하고 구차한 이야기들이 모여 지금 한 사람의 존재를 형성하고 지켜온 것이기에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평균 정도 되는 주인공의 인생을 시시콜콜하면서도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다. 물론 주인공은 태어나자마자 어쩔 수 없이 부모와 이별할 수밖에 없었고 성인이 된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키워준 어머니와 갈등까지 겪는, 어찌 보면 평범하다 할 수 없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쉽게 밝힐 수 없는 사연 하나쯤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주인공 데이비드는 어렸을 때부터 삶이나 역사의 흔적을 남기는 물건들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의 출생의 비밀로부터 비롯된 본능적인 애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훗날 만나게 될 그의 어머니에게 들려주기 위해 그의 삶의 흔적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이야기를 채워가는 그의 모습은 인간에게 있어 개인사를 기록하고 증명해줄 물품을 수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상징적인 장면인 것 같다. 존재의 기초를 다지는 행위로써 현실의 흔들리는 삶을 바로잡으려는 몸부림이라고 할까.
작품 속에는 주인공 데이비드뿐만이 아니라 키워준 어머니인 도로시와 그의 취향을 유일하게 인정하고 개발해준 어머니의 친구 줄리아, 아내 엘리너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깊은 애정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가하면 반대로 갈등하고 다투며 상처를 주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결국 온전히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성숙의 단계로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도 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많은 시작’은 작가의 데뷔작인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함께 읽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과 단편집 ‘녹턴’을 읽었는데 존 맥그리거의 작품도 비슷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19~20세기 영국사를 관통하는 가운데 평범한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럽게 독자를 소설로 잡아끄는 매력 말이다. |
![]() 너무나 많은 시작.
민음사의 모던클래식의 책은 서점을 지나가면서도 굉장히 많이 봤었던 책이었고,
![]()
이 책의 시작은 데이비드의 어머니, 메리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서장의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전에 개봉해 화제를 모았었던
![]() 데이비드는 그러한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그 후로 데이비드는 자신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 자신의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가며 ![]() 기대와 설레임을 가지고 첫 페이지를 읽었을 때, 솔직히 당황스럽고 어이없고 황당함을 느꼈다.
여태까지 수많이 읽어왔던 소설들은 하나같이 한사람의 주인공, 여러 등장인물들이 겪는
![]() 이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시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
|
|
|
[너무나 많은 시작]은 내가 두번째로 만난 민음사 모던클래식 시리즈이다. 첫번째 책 [남아있는 나날]처럼 이번 책도 매우 모던하고 정적인 분위기의 소설이다. |
|
소설을 오랜만에 봤다. 흡입력 강하고 인상깊은 작품을 오랜만에 만난듯한 뿌듯한 기분으로,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은 존 맥그리거의 <너무나 많은 시작>. 왠지 제목부터가 많이 와닿아서, 그리고 제목들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많은 열쇠들이 나열되어 있는 깔끔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용 표지가 또 너무 마음에 들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재미있게 봤다. 올해 본 소설 중에서 인상깊게 본 작품을 손가락으로 꼽으라면 아마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감명깊게 보았다.
책 속의 이야기는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 데이비드가 평온하고 일상적이던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부모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고 지금껏 함께 지내 온 부모가 친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는 전개되고 있다. 그 옛날 어느날에 한 미혼모가 간호사에게 어린아이였던 데이비드를 맡겼었는데, 그 때의 그 간호사가 바로 지금의 어머니인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게 된 데이비드는 지금이라도 친 부모를 만나고싶은 마음에 모든 정보들을 다 수소문하고, 그러면서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자신의 인생들을 모두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 물품들을 하나, 둘씩 그러모으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부터 박물관을 너무나 좋아했던 데이비드는, 결국 사설 박물관을 만들기도 했을 정도로 그 열정이 대단했는데, 결국에는 지금의 코번트리 박물관에 취직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지금 일하고 있으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데이비드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작은 계기와 우연속에서 그가 친 부모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준비하는 물건들의 목록이기도 한 목차를 하나, 하나 밟아 나아간다. 실제로 이 소설의 목차 역시 그런 그의 물품들의 목록을 표현하고 있기에, 처음에 이 목차를 접했을 때에는 이게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 하고 호기심이 자극되기도 했었다.
데이비드의 여정을 기반으로 해서, 가족을 꾸려나가는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다. 가족이 되는 3가지 방법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 첫번째는 데이비드의 가족인 핏줄을 말하고, 두번째는 그가 출장을 갔던 한 박물관에서 찻집 아르바이트생 엘리너를 만나게 되어 펜팔을 하고, 사랑을 하게 되는 또 다른 한 방법,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 모든 것들을 선택해야 하는 데이비드의 몫. 이렇게 세 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아주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계기들과 우연한 만남들이 반복되기도 하고 얼핏 지나가기도 하면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데이비드의 이야기가 책 속에서 그러했듯이, 우리들의 이야기도 에피소드별로, 아니면 우리의 인생을 나타내는 아주 자그마한 물품 하나하나별로 그러모아본다면, 결국에는 백과사전보다도 훨씬 방대하고 복잡한 서사시의 책 한 권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존 맥그리거의 섬세하면서도 진지한 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상황에 대한 부연설명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소중한 이야기를 만났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는 정말이지, 책 이름만큼이나 너무나도 많은 시작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시작들 하나 하나가 모아져서 우리 전체의 인생 이야기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인 분위기와 아주 미세하게 드러나는 복선들이 인상적이었던 소설. 너무 즐거운 만남이었다. |
|
이 책은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으로 서머싯 몸 상, 베티 트라스크 상 등을 수상한 존 맥그리거의 두번째 소설이다. “존 맥그리거의 명성을 굳혀 준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 책은 전작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의 여주인공 부모의 이야기로, 이주와 변화를 통해 자유와 풍요를 얻은 현대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 미혼모가 맡기고 간 데이비드를 간호사로 일하던 어머니가 대신 맡아 키워 왔는데, 데이비드는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친모를 찾기 위해 수소문 한다. 한편으로 자신의 인생을 보여 줄 수 있는 물품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다. 어릴 때 부터 박물관을 좋아해 사설 박물관을 만들기도 했던 데이비드는 어른이 되어 코번트리 박물관에 취직한다. 어린 시절, 데이비드의 가족과 가까이 지내던 엄마의 친구 줄리아 아줌마는 늘 데이비드와 함께 박물관에 가 주주면서 돌봐 주었다.
어느 날 줄리아 아줌마는 기억력이 감퇴해 사람을 알아볼 수 없게 되자, 데이비드의 엄마 도로시는 더 자주 줄리아를 방문하고 돌보아 준다. 줄리아가 요양원에 들어간 후에도 데이비드를 데리고 자주 면회를 갔는데 어느 날 줄리아의 말실수로 데이비드는 자신이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때 어머니는 감춰 왔던 비밀을 고백한다. 아일랜드 사람인 메리가 어느 저택에 와서 돈을 벌다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데리고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에 줄리아가 돌아올 때까지 아이를 맡아 주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의 내용이었다. 데이비드는 엄마가 일찍 이야기를 해 주지 아니한 것에 대해 깊은 분노를 느낀다.
한편, 데이비드는 출장을 갔던 한 박물관에서 엘리너를 만나 그녀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주소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이 두 사람의 시작이었다. 엘리너는 데이비드의 도움을 받아 몰래 고향을 떠나서 두 사람은 결혼을 한다. 결혼 때문에 주거지를 옮긴 데다 대학 입학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엘리너의 정신 상태는 점차 나빠지고 급기야 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한다. 엘리너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가족들과도 거의 연락을 하지 않는다. 데이비드는 아내가 먹는 알약 하나하나를 마치 자기의 실패, 아내에게 해 주지 못한 것들, 그의 무능력의 또 다른 표시처럼 느낀다.
이 소설의 각장 제목은 쉰다섯 살이 된 데이비드가 친모를 찾아가는 여행 전에 준비한 물건들의 목록이다. 마치 박물관 전시물처럼 뽑아내 짧은 설명을 붙인 물건들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을, 추억들을 품고 있다. 담뱃갑, 지도, 월급봉투, 글씨가 쓰인 냅킨, 열쇠, 약병, 망치, 포도주 마개, 어린이 장갑, 이 모든 것들이 이야기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사소한 물건들 안에 농축된 수많은 시작들. 데이비드는 이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개인 박물관 속으로 친모를 초대하고 싶어 한다. 존 맥그리거는 데이비드의 삶을 해설하는 큐레이터가 되어 인물들 사이에 교묘히 병치된 절망과 열망을 직조한다.
이 책은 전체 플롯과 복선이 아주 전략적으로 구성돼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이 모든 이야기의 전말을 알아채고, 곳곳에 박힌 복선들을 발견하며 감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줄리아 아줌마가 남편과의 만남과 결혼,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무도회장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으로 소환해 회상하는 장면은 특히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