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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았을 때 저자가 아직 대학생이라는 것과 제목에서 인문학이라는 단어에 이끌렸다. 그러나 그의 바램인 “가능한 한 철저하게 ‘정치적인’ 방식으로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나의 바램과는 동떨어졌다. 나는 기존의 비평이 아닌 젊음(대학생)이라는 풋풋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그런 글들을 기대했다. 하지만, 비평은 비평이었다. 단지, 좀 더 읽기가 힘들어진 글이었다. 학술논문이나 비평집을 쓰기 위한 글이 아니고, 블로그의 글이라는 변명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 책은 대부분의 정의와 비판을 철학자 칸트와 문예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논리적 설명으로 풀이한 책인 것 같다. 최근 고진이라는 이름은 한국의 젊은 인문학자들의 글에서 많이 등장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사상적 편향, 어떻게 보면, 사상이나 시각이 철저히 서양 중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서양의 철학의 틀에 맞추어 설명하려는 조금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많은 서양의 철학자들이 언급되고 있지만, 동양의 사상가나 학자는 거의 없다. 인문학이 사라지는 시대. 모두들 인문학이 위기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아마 너무 철 지난 말 장난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시대에 뒤떨어진 논쟁에 몰입하는 모습과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버린 그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우매한 대중들의 잘못인가? 삶의 속도는 빨라만 지는데, 창조적인 새로운 시도가 아닌 과거를 계속 반복적으로 이용해 먹는 학자들의 잘못인지는. 그들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명제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책 내용에서 공감이 간 부분들이다. 자연이 의도한 목적에 따라 인간사는 부지불식간에 그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지금의 모습들은 가장 ‘호전적’인 국가들은 대개 의회제도를 갖춘 자유주의 세력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은 외부의 국제관계(타자)를 내면화할 때에만 비로소 ‘도입’되는 것이다. 1990년 전, 후 한국사회. 다변화된 갈등의 축이 있다. 시장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다변화된 시민사회 안에서는 어떠한 근본적인 정치적 기획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분명 촛불시위(집회)는 중대한 이정표이다. 다양한 사회경제적 갈등의 분출이다. 우리나라는 소위 눈부시게 발전한 나라이다. 하지만, 경제의 발전에 따르지 못하는 많은 부분은 수많은 문제를 내포한다. 그것들이 하나씩 사회에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 정의가 힘을 갖추거나 힘있는 자가 정의로워야 한다. 경찰조직이 근대 법질서 유지에 필수적이고, 의회제도의 내속적인 실패의 징후로 해석. 의회제가 본연의 이념(자유, 평등 등등)을 지키지 못했기에 경찰과 같은 억압적 행정기구들의 비대화를 낳았다. 우리네 국회의원들이 좀 읽고 반성하기를 바라며, 그들을 위한 변명의 글, 부르주아 혁명에 기원을 둔 의회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인 사태연관을 분명하게 폭로한다. 정치적 해법 안에서 정작 시급한 사회경제적 모순들에 대한 처방이 나오지 않는다. 정치적인 혁명은 개개의 주관으로는 반성될 수 없는 사회적 관계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 우리나라 소위 좌파의 지식인들이 보아야 할 글, 좌파는 단순히 노동운동, 계급적, 사회경제적 투쟁에 매몰되어 시민사회 내부에서 고립되었다. 적대하는 계급들 중 한 계급이 역사적 승리자가 되고, 나머지 한 계급이 소멸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이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의 감성을 표현하려는 지적해방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한 소수의 앞장섬과 노동자들의 뒤따르는 노동이었기에,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설명하고 언어화하는 노동자들의 진지한 실천들이 고급이론에 빠삭한 좌파 지식인보다 더 못할게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좌파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앞에 서기 위한 것이다. 그들과 동료이기보다는 지도자로서 서고 싶은 것이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성차에 관한 문제(젠더 트러블). 모종의 성적 편향, 페미니즘은 섹슈얼리티의 주관적 성향이 아닌 문화적 인식 가능성의 모태로 가능한 이론적 구성물이다. 문화적 현실 속에 종속된 여성의 위상과 맺는 관계. 페미니즘의 전략은 성차에 관한 이론적 질문들 자체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성차는 환원 불가능(성차는 존재한다.)하다. 여성이 없는 페미니즘으로 흘러가는 것 아닌지? 남성적 금기의 상징적 억압 대신에 여성적 금기의 상상적 억압을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사랑의 사건 속에서 하나인 동시에 하나를 구성하는 환원불가능 한 둘이 될 것이다. 분명 성차는 있는 것이고, 서로의 역할에 대한 이견이라고 해야 할지. 분명 과거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지고, 또 변하고 있다. 문화비평. 대중소설과 순문학에 대한 충고는 기성 문인들이 한 번 보면 좋을 것 같다. 특권적인 자의식적 태도는 여전한 채 그것을 가능케 했던 역사적 맥락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하루끼의 상실의 시대- 탈이데올로기 시대 이후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연애를 ‘이념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낭만적인 성장담과 보편적인 대사를 공유한다. 좀 공감 가는 글은 “일급 소설가나 시인이 동시에 일급의 비평적 권위를 가지는 것”좋은 예술(문학)은 부르주아들을 화나게 만드는 예술(문학)입니다. 좋은 소설이란 문단을 화나게 만드는 소설이다. 비평은 작품의 괴사다. 창작정신에 주제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와 작품의 단독성, 자립성을 괴사시키고, 그 단독성을 그것을 넘어선 다른 시점에서 파악하는 것. 비평은 주관적인 미적 경험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역사철학적 기원을 탐구한다. 외국번역서에 비해 팔리지 않는 한국문학은 질적 빈곤함과 비평에 책임이 있다. 평균적으로 우리 문학자들은 너무 쉽게 책을 내 놓는 것 같다. 물론 고심하여 수년 이상 걸기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책을 통해서 배우고, 느끼고 할 것이 부족하다. 또한 여행과 취미의 발전으로 일반인들도 책 내기를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질적 저하를 초래하는 것 같다. 검정을 거치지 않는 수많은 책들의 무더기에서 좋은 책을 찾기도 힘들고, 어려운 것을 피하고, 쉽게 즐기기 위한 독자들의 문학적 탐독도 문제일 것이다. 지금 20대들. 학생들은 자폐적인 취미영역과 자기 계발에 빠져있다. 우리의 시도가 얼마나 흥행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자퇴선언의 주체는 용기 있는 개인이다. 외국명문대학은 오랜 기간 축적된 학문적 연구와 지역사회에 기여한 역사가 명성을 만든다. 학문연구가 외부자본 유치와 대학의 경쟁력으로 전락했다. 학문기관에서 입시기관과 취업알선 시장으로 변했다. 20대의 자발적 참여 통로의 부재다. 우리를 국가와 자본과 연관되어 있는 개인화의 유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88만원 세대여 단결하라. 내일은 우리들이 정치의 주역들이다. 교양은 자기 포기의 도정이다. 우리에게 결여된 ‘교양’이다. 지금 대부분 학교 관계자들은 학생들의 학력저하를 고민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영어니 과학, 글쓰기, 예능 등을 배운다고 학원에 많은 시간과 자본을 투입하지만, 변한 것은 없다. 반대로 이전보다 교양도 떨어지는 젊은이들을 양산한 것은 아닌지. 어떻게 보면 난립하는 대학도 일부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낸 희생양 같다는 생각도 든다. 2부 문화비평과 4부 시사비평은 좀 가까이 있는 주제라서, 비교적 공감과 느낌이 다가왔지만, 1부 인문독서후기와 3부 인문적 사유는 그렇게 가까이 다가 오지 못했다. 읽는 이의 철학적인 사유와 공부가 부족한 것이겠지만, 비평과 독서 후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물론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비평을 위한 비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전체적으로 이 글들은 한자어와 외국어의 지나친 사용으로 의미의 전달의 어려움을 느낀다. 어떤 대상을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 책이 쉽게 읽히지 못하는 것은, 아직 젊다는 변명으로 덮으려 한다. 잘 쓴 글은 독자에게 개념을 쉽게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시대의 교육의 모든 것으로 변명하면서, 이 글을 일반 대학생들이나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학생이 있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글도 있다고 알리고 싶다. 세상은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는 좁은 길이 아니다. 다양한 길이 우리 앞에 있다. 그 길이 우리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바야흐로 다양성의 시대다. 수많은 다양성이 함께하는 거대한 문화의 조류를 만들기를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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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수가 없다. 아직 대학생이라고 하는 저자가 어찌되었던 또래의 다른이들과 달리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그리고 분석적인 그의글을 볼때 칭찬은 아무리해도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나의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까닭이겠지만, 정신을 집중하고 아무리 읽어보아도 머릿속에 쉽사리 들어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내가 아직 읽어보지도 않은책들이 많아, 그의 주장에대해 가타부타 말할 처지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평론서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개인적인 취향과도 관계가 있는것 같다. 어떤책을 읽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하는것은 각기 개인의 고유영역이란 생각이고, 그렇기에 남이 받아들인것에 왈가왈부하고 싶지않아, 아예 그방면의 책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저자가 읽은 책들을 저자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왈가왈부나, 그리고 그의 독서후기나 비평을 읽으면서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처음 들어와서 보고서를 많이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헤맸고, 다음에는 주절주절하는 말들을 간단한 한마디나 두마디로 압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썼을 때 보고서가 깨끗해지고 간단명료해지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부하사원들이 가져오는 보고서를 읽으면서 가능하면 풀어쓰기를 주문하고 있다. 본인이 내용을 완전히 아는 상태에서는 어려운 말들을 써도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본인도 모르고, 더군다나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무슨 내용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은 쉽게 쓰는 것이 좋은 글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알기 쉬운 단어들을 사용할 때 의미는 분명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단어들은 어려워지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책을 읽고 쓰는 글들이 리뷰나 서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독서후기, 쉽게 말해 독후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리뷰나 서평을 쓰는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책을 읽고 생각나는 대로 느끼는 대로 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독후감들 중에도 책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쓴 것들 몇 개가 있다. 지금 그 글들을 읽어볼라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가 보아도 알지 못할,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읽고서 고치려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글들이 다소 현학적이란 생각이다. 인문학 책들을 읽은 독서후기라고 하지만 쉽게 쓸 수 있는 단어들도 굳이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그대로 쓴 것을 보면서 아직은 배우는 학생이라는 점에, 개인의 블로그에 쓴 글이라는 점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책으로 낼 때는 다듬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하준 교수의 책들이 일반인들이 접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책을 읽으면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인문학서적의 편중이다. 그는 동양의 고전을 읽어보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질 지가 궁금해진다. 물론 우리들 모두가 어려서부터 서양철학을 배우고, 그것에서 모든 사유를 시작하는 것으로 교육을 받았기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서도, 동양의 고전이 한권도 들어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그리고 저자 자신이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한국문학 비평을 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가 않는다. 흔히들 현재는 더욱이 한국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고 한다. 물론 자기계발서나 재테크 서적이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아니라고 우기기는 뭣하다. 하지만 지금만 인문학의 위기일까?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고, 또 다른 나라에서는 인문학이 위기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인문학 책들이 이렇게 쓰여진다면 마땅히 위기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비평이든, 논쟁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기 쉽게 씌여지고, 읽으면서 재미를 느낄수 있다면 보다 많은 인문학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그들이 만들어 낸, 그들만의 자기변명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인지도 모른다. 인문학 책들을 가능한 정치적으로 읽어내려 했다는 저자, 그러나 어차피 한국사회에서 인문학 책들을 정치적으로 읽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학교 다닐때와 지금은 상황이 매우 다르지만, 우리 역시 모든 인문학 책들을 정치적으로 읽었으며, 책을 읽고 사유하는 것만을 떠나, 그것을 생활화하고 어떻게든 실천에 옮기기 위해 고민했고, 또 그렇게 했었다. 어찌되었던 아직 어린 나이의 저자가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를 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박수를쳐주고 싶다. 좀더 가다듬고 내면화 될 때 그의 인문학적 사유는 더 빛을 발하리란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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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위기? 인문학과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인터넷에서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만 검색하더라도 상당한 숫자의 책을 찾을 수 있다. 거기에 ‘인문학’이라는 단어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인문학을 다루는 책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적지 않다. 최근에 나온 책만 하더라도 저자가 언급한 인문학 서재>(2009),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를 제외하고도 <인문학 콘서트>(2010), <스무 살 인문학을 만나다>(2010) 등 다양한 인문학 서적이 서점마다 넘쳐 흐르고 있다. 게다가 저자마저 놀란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 등을 감안하면 지금 현재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듯하게 보인다. 자,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보자. 한때 유행했던 “한국” 인문학의 위기는 이제 극복된 것일까? 아니, 정말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온 적이 있을까? 혹시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과의 위기를 우리가 착각한 것이 아닐까?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인문학의 위기를 달라진 세계의 흐름을 인문학이 똑바로 보지 않고 방관자적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는 “쓸모 있는 실천으로서의 인문주의이며, 이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학자로서 무엇에 기여할 수 있는지 알고자 함이며, 이러한 원칙들을 자신들이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세계와 연결하고자 하는 지식인과 학계를 위한 인문주의입니다.”1) 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이란 죽은 학문일 뿐이다. 저자는 인문학과 학생의 미래에 대해 “나와 같은 20대에겐 인문학의 미래는 ‘저임금 시간강사’이다.”2) 라고 표현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사(士)”자 돌림으로 상징되는 전문직을 위한 학문과 대조적으로 인문학은 현실과 거리 있는, 돈이 안 되는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생존경쟁의 절박한 현실 속에서 기업은 오히려 인문학에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단순히 팔고문(八股文)을 외워 과거(科擧)에 합격하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유생(儒生)이 아닌 “문/사/철(文/史/哲)”로 상징되는 인문학을 통해 통찰력을 키운 지식인이 필요한 것이다. 즉, 적자생존의 험난한 파도를 자율적이고 자신 있게 해쳐나갈 수 있는 항해사나 선장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키워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학들은 제대로 인문학을 익힌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기에, 대학과 기업간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 아닐까? 부르주아"만"을 위한 인문학은 없다. 인문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저자는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 역시 ‘없다.’ 인문학은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들의 생계수단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인문적 사유 역시 더 이상 비천한 부르주아적 삶에 아부하는 데에도 점점 더 부적합해질 것이다. ~ 중략 ~ 앞으로의 훌륭한 인문학은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적 연대와 변혁에의 희망을 좀먹는 부르주아들의 옹알이를 끝장낼 역할에 복무할 것이다.”3)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만" 을 위한 인문학이 없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저자의 다른 주장까지 동의할 수는 없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우리가 인문주의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것을 민주적인 것으로, 모든 계급과 환경에 열려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뜻이며 또한 끊임없는 상기와 발견, 자기비판, 해방의 과정으로서의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더 나아가 인문주의가 곧 비판이며, 이 비판이란 대학 안과 밖의 사건들이 처한 상황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주장하겠습니다.”4) 라고 말했듯이 인문학이 어느 특정 계급만을 위한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은 모든 계급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기에 그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특정 계급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면 그 순간 인문학은 더 이상 인문학이 아니게 될 것이다. ‘실천적 비판’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문학은 이념을 위한 도구인가? 저자의 문학관은 상당히 독특하다. 마치 1920년대 중반의 신경향파 문학과 비슷한 느낌을 던져준다. 우선 문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살펴보자. 내가 가장 문학다웠다고 생각하며 흥미롭게 읽었던 소설은 오히려 이러한 문학적 서정과 거리가 먼 지극히 경향적이고 산문적인 소설이었다. ~ 중략 ~ 문학의 본질은 독백과 개인적인 서정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인 토론과 대화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나름의 확고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5) 그래서일까? 저자는 스스로 한국 문학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전혀 생각하거나 관심을 가져본 적 없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어쨌든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인 만큼 번역 문학이 아닌 한국 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묘한 의무감 같은 것에 이끌려 이러한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이다.”6) 라고 하면서 작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물론 여기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이문열과 김훈 같은 저열한 마초들의 소설에는 구역질 말고는 느끼는 게 없다. 묘하게 가르치려 드는 황석영과 이외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들이 한국어를 문학적인 의미에서 아름답게 사용한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지만, 아름다운 한국어와 투박한 번역 투를 구분할 줄 모르는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그런 것 따위는 관심 밖이다. 오히려 그나마 재미있게 읽은 소설은 박민규나 김애란, 정이현, 김연수와 같이 요즘의 서정을 보여주는 젊은 작가들이다. 그러나 나 개인에게 있어서 소설적인 재미에 관해 이들은 외국 소설에 미치지 못한다." 7) 소설적인 재미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일 수 밖에 없지만, 한국 문학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저자의 적나라한 평가를 보면서 최서해의 <탈출기> 같은 신경향파 소설을 읽으면 어떤 평가를 내릴 지 궁금함을 감출 수가 없다. 옥의 티. p. 280 국문학과나 문창과에 들어가면 더 상세한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일지도 모른다. ⇒ 국문학과나 문창과에 들어가면 더 상세한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른다. p. 447 2009년 3월경 고려대 정경관 후문에 걸린 “나는 대학을 포기한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 2010년 3월경 고려대 정경관 후문에 걸린 “나는 대학을 포기한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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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니 예전에 잠깐 논란이 있었던 <리뷰>, <서평>, 그리고 <독서감상문(독서후기)>의 구분법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생각이 떠올랐다. 다른 분은 이렇게 주장했다. 리뷰는 영화로 치면 예고편에 해당하고, 서평은 평론가와 같이 전문가들의 영역이며, 독서감상문은 일반관객의 관점으로 쓴 글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리뷰를 쓰시는 분들은 하릴없이 스포일러가 되지 말고 예고편 수준으로 책을 소개해달라는 대강 이런 내용의 주장이셨다.
공감한다. 그래서 적어도 내 리뷰는 책내용(특히 줄거리)을 주절거리는 법이 없이 책내용에만 충실히 쫑알쫑알대는 방식으로 쓰는 편이다. 물론 리뷰를 읽는 분들의 처지에서 보면 이런 리뷰가 참 곤혹스러울 테지만 그저 <예고편>에 불과한 글이니 리뷰를 읽고 마음에 드시는 점이 있다면 꼭 책을 읽어주십사하는 마음(특히 행사를 통해 받은 책은 어김없이 이런 마음을 담아 쓴다)에서 그렇게 쓰는 것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다.
어쨌든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박가분의 붉은서재>는 이런 <예고편>의 수준을 훨씬 넘어 <철학/인문학/문화/시사> 등에 폭넓은 혜안으로 깊이깊이 사유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고작 얇디얇은 교양서적을 리뷰하는 내 깜냥으로써는 도저히 이 책의 깊이와 가치를 가늠하기조차 너무 힘들었다. 다만 <독서후기>라는 이름의 글에 <참고문헌>과 <주석>까지 달아놓은 저자의 실력에 감탄이 절로 날 뿐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이런 글을 쓰게 된 동기를 단지 <인문학적 위기>라는 어느 교수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고 담담히 소개한 부분에서는 살짝 얄밉기까지 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서 읽은 구절인데, <바보는 천재의 위대함을 모르기 때문에 천재를 곁에 두고도 행복할 수 있지만, 수재는 천재의 위대함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자신은 그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기에 늘 슬플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글이 있었다. 정말 내가 바보였다면 이 책이 그저그런 책이거나 당최 뭔 소리를 이렇게 재미없게도 써놓았을까하고 푸념을 늘어놓으며 던져버렸겠지만, 나는 어느 정도 수재이기에 박가분이라는 천재가 부럽고 또 그저 부러울 뿐이다.
이렇게라도 나의 현재 수준을 <수재>의 위치에 놓아야 조금이나마 샘과 분을 풀 수 있을 듯 싶어서 주절거린 것이다. 여기에 조금 더 보태자면, <박가분>이라는 블로거도 그닥 뛰어난 천재가 아니지 싶다. 이렇게 말하고나니 조금쯤 속이 시원하다^-^;;
이렇게 잘난 글과 저자에게 조그만 흠을 들춰내자면, 나와 같은 수재(일반 독자)를 위해 현학적인 글을 좀더 풀어 썼으면 하는 점이다. 물론 철학과 인문학이 어려운 학문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마치 식자층만의 향연을 벌이는 듯한 낱말들의 나열은 글을 보는 이로 하여금 아주 질리게 만든다. 이 책에는 유달리 <칸트철학>을 인용한 표현이 많은데, 칸트를 모르는 분이 칸트를 비판한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을까? 또 배트맨 다크나이트의 등장인물과 칸트철학을 적절히 가미한 부분에 이르면 잘 몰라도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마땅히 비판할 것이 없다. 일반독자들은 조커를 그저 악당으로 보지 <칸트철학적 순수한 악>이기에 악당보다 더 가공할 악당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이런 식의 나열이라면 그동안 수없이 답습하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의 인문학적 위기>는 주로 <아시는 분들만의 향연>으로 그쳤기 때문에 왔다고 본다. 다시 말해, 현학적 어투를 사용하면 할수록 멋스러워지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일반대중의 이해에서는 멀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외면받아 따로 노는 소수로 전락할 뿐이란 말이다. 마치 차진 밀가루 반죽을 늘릴수록 처음 대중들은 신기함에 박수를 치며 열광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탄성의 한계에 도달해서 다시 대중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따로 떨어진 소수로 전락하고 만다는 얘기다.
또 이 책에서 가끔 보이는 <외래어 수식>은 좀 삼가해주었으면 한다. 이 책의 서문(12쪽)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좋은 문학이란 부르주아들을 화나게 하는 문학이라고 선언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다시 한 번 패러프레이즈하자면.." 기껏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친절하게 풀어 설명한다는 말을 꼭 paraphrase(쉽게 풀어)로 써야 좋은가? 굳이 이런 표현을 즐겨쓰는 똑똑한 분들이 심보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런 외래어 수식을 남발하기보다는 우리말 표현을 널리 쓰는 것을 니즈(needs)하는 바이다. 자꾸 이런 식이라면 우리말은 점점 사라지고, 어느 언어학자가 우려한대로 <우리말은 토씨(조사)만 남고 모두 외국어로 채워질까>봐 걱정이다.
옥에 티 같은 실수가 있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히려 이런 눈엣 가시 같은 것들이 눈에 띠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을 때 좀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 블로거라서 이 정도의 흠을 잡아낼 깜냥밖에 없는 나는 짜장짜장 부끄러울 따름이니까.
아무튼 2011년 새로운 목표가 이 책을 읽은 덕분에 생겼다. 2011년에는 <박가분처럼 리뷰쓰기>를 하겠다는 목표 말이다. 물론 나만의 개성을 살린 글쓰기가 될 테지만 <붉은서재>의 '차분한 열정'만큼은 꼭 배우고 싶다. 글을 쓰건, 말을 하건 쉽게 흥분해서 제 감정을 못 이기는 성격이라서 박가분의 글을 보고 많은 것은 느꼈다. 따라할 테다. 그래서 나도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가 될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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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몇가지 개인적인 느낌이 들었다. 첫째는 상당한 수준의 지적 분석능력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개인적으로 공개하고 있지만 정치적이라는 것, 그리고 세번째로 아직 가시지 않는 미숙한 젊음의 치기가 있다는 것이다. 톡톡뛰는 어법에 개념화된 용어를 다른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는 지적치기, 그리고 매우 높은 지적 표현 방법은 상당한 수준이지만 아직 숙성되지 않은 저자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가 자유롭게 사용하는 근대 최고 지식인들에 대한 인용은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그것을 나름대로 소화해내는지 알수 있다. 그리고 몇번 읽어야 이해가 될 정도로 밀도 있는 문장과 개념화된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색깔을 담기보다는 툭툭 건드리고 치고 빠지는 젊음의 지적 치기도 많이 보인다.
그는 먼저 요즘 20대 대학생이 남들은 연예소설이나 읽고 드라마를 통해서 아기자기한 사랑과 삶의 꿈을 키워나갈때 그 또래 학생들이 딱딱하다고 고개를 돌리는 그러한 철학, 정치 서적들을 탐독해가면서 다다른 지적 수준은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칸트와 아렌트, 바디우, 라캉, 들뢰즈를 무리없게 사용해가면서 자신의 이해범위 안에서 수용한 것들을 개념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읽어가다 보면 어렵다. 그런데 그 어려움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용어사용 때문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예를 들어 근대 이후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후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포스트 모던'을 '후근대'라는 용어로 사용한 책은 처음보았다. 이것은 저자가 나름대로 용어를 고민한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근대 이후의 변화를 명확하게 개념화된 용어인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는 아직 변화의 실체를 정확히 감지할 수 없다는 저자의 인식이 반영된 용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상당히 깊은 지적사고 수준이면서도 반동(reaction)하고 싶은 젊음의 치기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뛰어난 철학자들의 책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솔직히 나로써도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사유는 또래들에 비해서 훨씬 깊고 예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 방법도 날카롭고 조금은 자극적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인문학을 한다고 밝힌다. 서문에서 순수 인문학을 하는 또래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무사유의 극치라고 다소 자극적인 말을 사용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가지는 인문학적 감수성은 반드시 학생운동과 정치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정치적 색깔을 지는 인문학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이라는 것은 인간과 삶과 세계에 대한 더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와 타인을 향해 한발짝 더 다가가는 인간의 감수성이라고 정의한 철학자 강신주의 말을 떠올려 보면 저자가 말하는 이러한 인문학의 정치적 색깔은 아직 삶과 세계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 감동적으로 우러나오는 인문학적 감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분은 인문학에는 천재가 나올수 없다고 했다. 그것은 인문학 이라는 것이 지적인 능력이 있다고 해서 이룰수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연륜이 녹아 있어야 깊은 인문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지 지적능력이 뛰어나다 할지라고 평생을 하나의 문제에 고민하며 파고든 철학자들의 개념을 온전히 이해할수는 없는 것이다. 저자 박가분은 지적인 능력은 뛰어나지만 그것은 받쳐 온전하고 감동적인 삶의 경험과 연륜은 아직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연륜이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깊은 맛을 우려내는 인문학자로써의 성장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이 책이 저자가 활동하는 블로그에 올린 서평에 대한 모음집인데 저자가 읽은 책이 정확하게 나와있지 않아서 책에 대한 서평인지, 아니면 그 주제에 대한 비평인지가 모호하다. 책의 특성을 좀더 분명히 살리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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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 한숨이 푹푹 터져나왔다. 낯선 용어들과 작가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톡톡 튀는 어투가 나를 너무 의기소침하게 만들어서 책을 읽는 속도도 나지 않아 2주간동안 겨우 읽었다. 나의 인문학적인 무지에 답답했고 더 많은 인문학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독서후기와 문화비평, 인문적사유, 시사비평 이렇게 4개의 분야로 나누어 작가 자신이 책을 읽거나 접했던 사건에 대해 비평하는 모습이 혁명가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문학을 정치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좋았는데 제목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에서도 느껴지듯 읽는동안도 작가가 호소하고 있는 이 내용들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하는 염려가 함께 들었다. 세상을 바꾸려는 힘인 사회적 연대가 생겨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진 그 힘이 그닥 강력한 것 같지도 않고, 세상을 바꾸는 힘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인문적 사유를 하는 젊은 청년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에게 비춰진 20대들은 그저 개인주의적인 삶을 지향하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주체성'을 가진 20대가 나의 선입견을 깨준 셈이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2부의 문화비평과 4부의 시사비평이었다. 문화비평에서 하루키를 다시 바라보는 부분은 하루키의 소설을 마냥 좋아하는 것이 아닌 왜 하루키가 그런 소설을 쓰게 되었고 왜 사람들이 그 소설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또한 '88만원 세대'를 읽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는데, 그책을 젊은이들의 탈정치화를 부추기는 공범이라고 판단해버린 것도 충격적이었다.
읽는 동안 힘겹긴 했지만 나와 또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기치있게 발휘하는 젊은 청년을 만날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고, 앞으로의 사회는 공감을 위한 인문학이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 일어날텐데,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시켜주는 책을 만났다는 것에 만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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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느라 진짜 고생했다.
(고생한 곰이... 토닥토닥)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정말 잘 쓴 글이다.
대학생이 썼다고 믿기 어려울만큼 전문적인 용어와 깊은 생각, 그리고 여러 책을(그것도 어려운 책을!) 읽고 서로 비교해서 썼다.
진짜 대단하다.
진짜 잘썼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다.
읽는동안 전문용어와 어려운 말을 사용해서 읽기가 정말 힘들었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쉬운 말이나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내요이 나올까 싶어 참고 참고 또 참아서 읽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너무 힘들었다.
그나마 일요일에 [서프라이즈]에서 <배트맨 다크나이트>에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에 관해서 들었기 때문에 대략 알 수 있었고, 김예슬사건이야 책도 읽고 리뷰도 썼으니까 알 수 있었다.
<88만원세대>는 나와는 다른 해석을 했고, 김예슬 선언은 그 것만으로 소단원으로 4장을 얘기했다.
일단은 나와는 솔직히 맞지 않는다.
그 자신은 뭐라고 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운동권의 냄새가 조금 났다.
그것도 지금처럼 운동권이 많이 없어진 세대의 운동권이 아니라 97학번인 나 때만해도 아주 과격한(?) 그런 운동권...
나이도 어린 사람이 어찌나 이렇게 어렵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지(물론 그래서 책을 냈겠지만 ^^;;) 참 대단하다.
그것만큼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난...
그렇다.
이렇게 그을 잘 쓰고, 깊게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리뷰란 다른 사람이 읽기 쉽고 짧게 써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물론 내가 글을 못쓰는 이유도 있겠지만.. ^^;;;)
그래서 정말 인문대에서 대학교재로 써도 손색없을 정도로 잘 썼지만,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하기에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은 그닥 많이 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편집은... 너무 눈을 불편하게 했다.
(왼쪽은 테두리를 회색으로 처리하고 오른쪽은 상자처리함. 좀 쓸데없다 아깝다는 생각을함)
그래서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들뢰즈나 라캉, 한나 아렌트, 헤게모니, 기표 등등의 단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인문학을 아는 사람이니 읽어보라는 것이다.
진짜 좋다.
그렇지만 나처럼 저런 단어를 처음 들어보고 (그나마 지하철에서 읽어서 인터넷을 찾아 볼 수도 없었고 찾아볼 의지도 상실했다 ㅡ,.ㅡ) 인문학을 단지 개략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글쎄... 자신의 무식함에 혀를 깨물수 있으니(내가 그랬다 ㅠㅠ) 잘 생각해보고 선택하라는 것이다.
어느 교수가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진짜 잘 썼다, 그렇지만 쉽지는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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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목부터 강렬하다.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 제목에 일은 호기심은 책에 대한 소개로 이어진다. 젊은 유명 블로거의 글을 모아 만든 책. 그리고 그런 그의 책 제목이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라.. 과연 저자는 어떤 의미로 책의 제목을 정했을까. 서문을 보자 그의 생각을 조금 알 수 있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된 뒤 오히려 <인문학><인문>이라는 말이 점점 번지게 되는 현상속에서 이제는 정치와 경제의 최전선에서 인문학 찾기에 오히려 중독되버린 지금의 세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보고있노라면 응당 그의 외침이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이 아니라면 누구를 위한 인문학이어야 할까? 아쉽게도 난 이 책을 읽으며 누구를 위한 인문학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분명 그의 사유와 지식의 틀은 독창적이고 젊은 나이에, 그것도 비전공자라는 사실이 믿지기 않을만큼 박식하다. 난 지금까지 무얼하며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자의 글들은 그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부분이 점점 못내 아쉬워진다.
자기계발서와 재테크책이 판치던 저자가 대학에 막 입학했을 그 당시. 시간은 조금씩 흘러 다행히도 자기계발서와 재테크책 대신에 점점 문학과 인문학 관련 책들이 조금씩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참 '다행'인 세상에서 그의 글과 책들은 축복인 동시에 불행이다. 아직도 이런 글을 쓸수 있는 전공자가 아닌 일반 대학생이 있을수 있고 그런 그가 이런 책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런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
그는 분명 많이 안다. 전공자가 보기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철저히 평범한 독자의 눈높이를 가지고 있는 나의 눈에는 그는 분명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고민을 했으며 그것을 유려하게 뽑아내고 있다. 그런데 못내 아쉽다. 그는 처음에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고 설파했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할까? 올 한해 도서출판계 가장 핫한 책은 단연 정의란 무엇인가 이다. 왜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까? 이제는 나왔다하면 무조건 베스트셀러 상단에 책을 올려놓는 유일한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 얼마전 장하준 교수가 한나라당 국회의원 모임에서 강연을 하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격노 했다는 기사가 떴다. 왜 한나라당 의원들은 장하준 교수의 생각에 격노했을까. 왜 국방부는 장하준 교수의 책을 불온도서로 찍었을까. 그리고 그 책들이 왜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을까. 맥락은 같다고 생각한다. 정의의 부재. 특히 지난 10년간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탈권위사회, 그나마 정의로운 사회로의 나아감과 완벽히 대치되는 상황에서 국민들은 자연스레 정의란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계발서와 재테크책이 베스트셀러 1,2위를 다투는 세상과 인문학,사회과학 책이 1,2위를 다투는 세상. 인문학이 세상을 이끄는 것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꼭 이런 대중적인 인문학만이 발달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문학을,대중을 이끌어가는 소위 전공냄새 충만하고 책곰팡이 냄새 풍만한 철학과 인문학 역시 발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사이에서 자신의 방향을 조금 잃어버린 것 같다.
그의 글은 일반 대중이 보기에는 너무도 어렵다.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고 외치지만 그의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부르주아거나 철저하고 완벽한 프롤레타리아 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의 책읽기와 인문학이 정치지향적일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말이 옳다. 모든 인문학은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리고 그 정치의 물결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보다 대중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저자의 생각과 아이디어, 글은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참으로 좋다. 그러나 그의 책과 제목과 서문의 이야기가 삼위일체가 되지 못하고 각각 서로의 행성을 공전하듯 맴맴돌기만 한다.
그렇지만 아마도 20대 중반일 것으로 추측되는 저자는 아직 충분히 젊다. 아니 젊다 못해 어리다. 그에게는,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만 발전 가능성은 충분하며 이미 그의 책 이곳 저곳에 그의 명석함은 잘 드러낸다. 그래서 기대해본다. 저자가 진정 인문학에 대한 정치지향적인 글쓰기에 성공할 때까지. 저자의 이름은 아마도 내 머리속 한구석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