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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0 서울편 2 유홍준 창비/2022.12.7. sanbaram
서울 시내가 고층 빌딩숲으로 변한 요즘은 남대문을 지날 때도 예전처럼 우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0>에서는 먼저 조선이 한양도성으로 천도하게 된 사연부터 도성을 어떻게 짧은 시간에 쌓고 개축하였으며 관리하였는지를 설명한다. 북한 무장공비의 1.21사태로 인해 북악산 구역이 출입금지 되었다가 개방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설명한다. 이어서 자문밖으로 불리던 서북문인 창의문밖의 골짜기 옛별서지역의 시대적 변천과 의미도 짚어본다. 그리고 근대화시기의 우리 역사를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여 되돌아보며 유명무실해진 경희궁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이어서 동대문밖에 있는 동묘로 알려진 동관왕묘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성균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저자 유홍준은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박사를 졸업했다. 미술평론가와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추사 김정희>등 다수가 있다.
“서울의 자랑은 이처럼 자연과 인공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탁월한 로케이션에 있다. (p.18)”고 말하며 산과 강 그리고 도시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어우러진 서울이 조선의 도성으로 정해진 사연과 그 변화에 대해 고찰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왕조의 신도읍 건설이라는 대역사에 필요한 인력을 농번기를 피해 동원했으며, 전국의 승려들을 동원해 핵심 기술자를 충당하였다. 한양 도성은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총 길이 59,500척(약18.6킬로미터)에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축조하기로 계획되었다. 한양도성의 성곽 축조 공사는 600척(약 180미터)씩 모두 97구역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성곽 전체를 600척으로 나누면 97구역하고 1,300척이 남는데 이는 인왕산 자락의 자연 암반과 절벽을 성곽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각 구역을 지방별로 배정하고 책임자를 성벽의 돌에 새겨 실명제를 통해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여 짧은 공기에도 불구하고 튼튼한 도성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도성은 전쟁을 위한 성이 아니라 평상시 도읍의 울타리 역할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해자와 같은 방어시설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 4년, 세종대왕은 한양도성에 대한 전면적인 보수공사를 단행했다. 이때 세종대왕은 토성을 없애고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역사를 다시 벌였다.(p.41)” 인력은 역시 농번기를 피해 1월과 2월 농한기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동원했다. 이때 전국에서 동원된 인부는 1차 공사 때의 3배에 달하는 약 32만 명이었고, 기술자만 2,2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한양도성의 북쪽문인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도성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면서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었다. 그 때문에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조성되어 있지 않았다.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도 마찬가지여서 조선 초에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문루도 없었으며 숙종 때 당춘대성이 축조된 뒤에야 총융청 등 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성가퀴의 기본 구조는 낮은 맞배지붕에 3개의 총구멍을 낸 것이다. 하나의 성가퀴를 1타라 부르며 1타에는 3개의 총 쏘는 구멍이 있다.(p.74)” 가까운 곳을 쏘는 근총안 1개가 한 가운데 있고, 양옆에는 먼 데를 쏘는 원총안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원총안은 대개 구멍을 수평으로 뚫은 반면 근총안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고 설명하여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도 알기 쉽게 소개한다. 우리나라 성곽과 문루는 전란에 대비한 것이라기보다 도성의 울타리다. 이 점은 중국이나 일본과 전혀 다르다. 만약 전쟁을 고려했다면 벽체를 높이 쌓고 성곽 둘레에 해자를 깊게 파놓아 탄탄한 방어시설을 구축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본격적으로 실록 편찬 작업에 들어가면 초초, 중초, 정초 세 단계를 거쳐 실록이 완성되었다. 이렇데 완성된 실록은 사고에 봉안하고 실록의 초본인 초초와 중초, 그리고 사관이 개인적으로 제출한 사초는 기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종이를 물로 흔적 없이 씻어냈다, 이를 세초라고 했다.(p.133)” 태우지 않고 물로 씻어낸 것은 종이를 재생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 세초가 세검정 계곡에서 이루어졌다. 조지서가 가까이 있는 데다 계곡의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암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부침바위’라 불리는 부암(付岩)에서 비롯되었다. 이 부침바위는 소원을 빌면서 돌을 붙였던 기복신앙의 대상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잔 자갈돌을 계속 비비면 마찰 효과로 돌이 얹힐 수 없었을 것 같은 가파른 면에 달라붙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간에서 전해오는 풍습이나 동 이름이 생겨나게 된 배경을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덕수궁이라 불리기 훨씬 전에 이미 이곳엔 경운궁이라는 궁궐이 있었고 경운궁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p.195)”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철저히 파괴하기 시작해 경복궁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덕수궁은 궁궐이 아니라 공원으로 꾸몄다. 훗날 경기여고와 덕수초등학교가 들어선 선원전 구역을 매각하고 덕수궁과 오늘날의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길을 만들면서 궁궐의 일부 영역이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갔다. 광해군은 선조와 마찬가지로 석어당에 기거하고 즉조당에서 ‘청정(聽政)’했다. 청정이란 조선시대 임금이 정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한 것은 재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경덕궁은 서궐로 이궁 역할을 단단히 했다. 숙종은 경덕궁에서 태어나 재위 19년에는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궁궐지>를 편찬했으며, 영조는 재위 36년 이곳으로 이어한 뒤 16년 가까이 기거했다. 그때 영조는 궁궐 이름인 ‘경덕’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과 음이 같다며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고 이곳 집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의 덕수궁은 1만 8천 평을 둘러싼 돌담 안에 10여 채의 전각들이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서양식 건물들이 모인 석조전 구역이고 또 하나는 정전인 중화전, 침전인 함녕전 등이 있는 전통 궁궐 구역이다.(p.259)” 그러나 원래의 덕수궁은 현재보다 3배 이상 넓어 돌담 밖 북쪽의 옛 경기여고 터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을 모신 선원전 구역이 있었고, 서족 정동 극장과 예원학교 자리에는 황실의 생활공간인 수옥헌 구역이 있었다. 대한제국이 불과 13년 만에 막을 내리고 일제강점기로 넘어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쓸쓸한 마지막만 떠올릴 뿐 대한제국의 실체를 역사의 기억으로 거의 간직하지 못한 채 흔히 구한말이라고 칭하면서 조선왕조는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로 막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선왕조는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끝났고 그때부터 대한제국의 13년 역사가 이어졌다고 저자는 첨언한다.
“동묘는 ‘동관왕묘’의 준말이다. <삼국지>의 영웅인 관우가 사후에 점점 신격화되어 관왕으로 받들어지면서 사당보다 격이 높은 묘가 된 것이다.(p.308)” 본래 조선왕조엔 관왕묘가 없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조선에 파병 온 명나라 장수들이 주둔지에 관왕묘를 세우면서 등장했다. 관왕묘에 있는 <일월오봉도>는 같은 문화권이라 해도 중국, 일본, 베트남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조선의 독창적인 그림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 경전의 어좌 뒤에 장식되어 있고, 옥외 행사 때도 임금의 자리 뒤에 반드시 놓였다. 관우도 왕으로 승격하여 관왕이 되었기 때문에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세운 것이다.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는 염색을 하면서 궁핍하게 살면서도 세조가 내려주는 그 무엇도 받지 않았고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까지 다섯 임금의 시대를 더 살다 중종 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종은 단종의 묘소를 찾게 하면서 서서히 복권을 시도했던바 정순왕후의 장례 또한 대군부인격으로 치르도록 각별히 배려했다. 왕비가 살았던 정업원 터에는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청룡사가 들어서 있다. 청룡사는 비구니 사찰로 아주 깔끔하다고 한다.
“성균관의 기본 구조는 강학 공간인 성균관(명륜당)과 향사 공간인 문묘(대성전)를 양대 축으로 이루어졌다. 교학이 분리되지 않아 유학이면서 동시에 유교였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역대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p.382)” 우리나라 성현은 모두 열여덟 분이어서 ‘동국 문묘 18현’이라고 하는데 조선 국초 까지는 설총, 최치원, 안향 세 분의 위패만 동무와 서무에 모셔져 있었다. 한편 유생들의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무명자 윤기라는 분이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상을 무려 220수로 읊은 <반중잡영>이라는 장편시가 근래에 알려지면서 비로소 소상히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정위로 해 가운데에 모시고 좌우로 첫째 줄에는 4대 성인, 둘째 줄에는 공문 10철과 송조 6현, 셋째 줄에는 동국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4대 성인은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이고, 공문 10철은 공자의 10대 제자이며, 송조 6현은 송나라 때 성리학을 완성한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 등 6인이고 동국 18현은 우리나라의 신라, 고려, 조선의 명현 18인이라고 설명한다.
“탕평채의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영조의 탕평책 이후에 쓰인 <송남잡지>, <경도잡지>, <동국세시기> 등 세시풍속에 관한 책에 나오는 공통된 요리가 삼짇날의 계절 음식 중 하나로 대래 늦봄에서 여름 사이에 먹는 녹두묵무침이다.(p.478)”라고 소개하면서 탕평채에 들어가는 재료의 색은 각 붕당을 상징했는데,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을, 쇠고기의 붉은색은 남인을,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을, 김의 검은색은 북인을 각각 뜻했다고 한다. 다른 색깔과 향의 재료들이 서로 섞여 조화로운 맛을 내는 요리가 탕평채라고 소개한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문화 융성기를 일으켰던 영, 정조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8세기 3분기 석굴암, 불국사, 에밀레종으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2분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 때, 15세기 2분기 한글을 창제하고 종묘제례악을 정비한 세종대왕 때, 그리고 18세기 후반기 영, 정조 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고 부언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우리의 문화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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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에서는 총 5부로 한양도성, 자문밖, 덕수궁, 동관왕묘, 성균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중에서 덕수궁을 가보았던 것 빼고는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성균관은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정은궐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읽어 생소함을 면한 정도다. 덕수궁을 여러 번 가보았다고는 해도 덕수궁이 가진 이야기는 전혀 알지 못해서 덕수궁도 안다고는 못하겠다. 다른 지역의 문화유산을 담을 전편들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을 서울편에서도 느끼고 있다. 이야기의 처음 태조가 수도를 정하는 과정부터 시작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결정인지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옆동네인 신촌과 연희동 일대가 검토되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의 말이 결정적이었다고 저자는 전하는데 그 말을 '도성을 쌓아 도읍으로서 격식을 갖추라'는 것이라고 한다. 이로서 수도 한양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편 1에서 말하고 있는 종묘와 경복궁 등의 건축이 이루어진다. 기본 설계가 3개월만에 이루어졌고, 10개월 뒤에는 공사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공사가 완료된 9월의 다음 달인 윤9월에 한양도성 축성에 들어갔는데 조선 팔도에서 인원을 동원했고 공사 실명제로 성벽 돌에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남한산성을 갔다가 성벽 돌에 한글로 이름이 새겨 있는 것을 보고 '아니, 이런 글을 왜 새겨놨데?' 하고 의문을 가졌었는데 이 성벽 공사 실명제에 유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사실 낙서인줄 알았답니다.ㅠ.ㅠ;;;) 이 한양 도성의 공사도 1년 정도 걸려 완성을 시켰으니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세종 대에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성곽 전체를 성석으로 수축한다. "한양도성은 전란을 대비해 쌓은 성곽이 아니라 수도 한양의 권위와 품위를 위해 두른 울타리다. 집에 담장이 있고, 읍에 읍성이 있듯이 수도 서울에 두른 도성이다.(48쪽)" 그러나 전란을 겪은 뒤, 숙종 대에 수도 방어체제의 하나로 보강되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까지 전쟁은 없었다고 한다. 대신 성곽 순례인 순성놀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도시계획으로 평지의 성곽이 모두 헐려 총 길이 18.627킬로미터 중 10.5킬로미터만 남기에 이르렀고, 복원사업을 벌여 2016년 기준 13.1킬로미터가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북악산 개방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반갑고 재미있었다. 두번째 이야기는 자문밖으로 부암동, 신영동, 구기동, 평창동, 홍지동을 말한다. 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의 별칭이 자하문이고 자하문 밖을 줄여 '자문밖'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내게는 전혀 생소한 지명인데 그 중심이라는 세검정은 지나는 봤다. 저자는 지금은 사라진 장의사와 조지서, 연산군의 탕춘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숙종대에 지은 탕춘대성과 홍지문을 이야기한다. 그 일대의 변모를 안타까워 하면서도, '홍지문, 오간수문, 탕춘대성의 아름다움과 그윽함은 변함이 없고 풍광 자체가 워낙에 수려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116쪽)'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곳곳의 아름다움 유적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지척에 두고도 한 곳도 가보지를 못하였으니 정말 서울 촌놈이 바로 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세번째 이야기는 덕수궁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곳이지만,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되고 순종은 즉위 후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고종이 쓸쓸하게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대한제국은 결코 맥없이 쓰러진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일제의 강압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외세에서 독립된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안간힘을 썼던 그 몸부림을 덕수궁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300쪽)'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뼈아픈 자기반성은 이미 늦었고 실효성도 없었다. 외세의 강압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백성을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지 못한 무능력을 조선왕조 말의 왕은 사과하지 않았다. 네번째는 동관왕묘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라고 한다. 세검정은 이름이라도 들어보고 지나가기라도 해봤지만 동관왕묘는 정말 생소한 곳이다. 뭐 난 천주교인으로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니 할 말은 없지만 우리나라의 유명한 장군들이 많을텐데 그런 장군들의 사당이 아닌 관우를 신격화하면서까지 모셨다는 것이 그리 좋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중국인 관광객 유커들을 유치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라고 하니 조상이 남겨준 것은 무엇이라고 좋은 거겠지... 음... 마지막은 성균관이다. 읽는 내내 정은궐 작가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생각이 났고, 그래서 가보지 못했어도 친숙하게 느껴졌다. 은행나무 단풍이 드는 11월의 첫째주 일요일이나 둘째주 일요일에 이 책을 끼고 찾고 싶다. 그러면 존경하는 저자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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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녹색의 산줄기는 서울의 골격이 되고, 푸른 물줄기들은 도시의 살과 근육이 되고, 붉은색으로 나타낸 촘촘한 도로망은 실핏줄처럼 퍼져 있어 마치 산천의 맥박이 뛰는 것만 같다. 서울의 자랑은 이처럼 자연과 인공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탁월한 로케이션에 있다. -p18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경운궁과 덕수궁의 한 많은 역사의 여정을 마친다. 덕수궁 답사기를 쓰면서 내가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은 덕수궁이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바 덕수궁 답사기를 통해 대한제국의 실체를 가슴 깊이 새기기 위해서였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선포되었으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은 개국 120주년, 옛날식으로 말하면 2주갑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날 이때까지 이를 기리는 사업을 볼 수 없고 이를 각별히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다. 고종이 1893년에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 갔다가 한양으로 환어한 지 5주갑, 즉 300주년이 된 것을 기린 데 비하면 우리가 너무 무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p299~300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를 안정시킴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규장각을 세워 학자를 곁에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은술잔을 내려주면서 "100리 가는 사람이 90리를 반쯤으로 생각하듯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만천명월주인옹 자서]에서 냇물이 만 개여도거기에 비친 달은 하나인바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치며 달이 각기 그 형태에 따라 비추듯이 사람들은 각자의 얼굴과 기량에 맞게 대하는 것이 군주의 자세라고 했다. -p479~480
유홍준 작가의 책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담겨 있다. 한 장소가 지닌 시간을 글로 상세히, 생생하게 풀어놓는 대단한 능력을 어느 작가가 감히 따라할 수 있을까. 나는 유홍준 작가를 존경해 마지 않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읽어가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시간을 넘나들며 글자 위를 날아다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소 혹은 문화유산을 머릿속으로 그려내가면서 글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방대한 이야기에 머리가 지끈거릴 때도 있다. 허나 그 많은 이야기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이해되기에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읽고 또 읽는다.
서울편 두 번째 권에서는 한양도성, 자문밖, 덕수궁, 동관왕묘, 성균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무심코 지나쳤던 곳, 쓱 훑어보기만 하고 말았던 공간, 메체에서 접했던 곳과 문화유산 등이 나오자 자세를 고쳐 잡고 책에 집중하게 된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와 무언가를 알게 되었을 때는 천지 차이다. 책을 읽고 나면 책에서 언급한 장소를 빠짐없이 다시 가고 싶어지는 욕구가 인다. 때문에 어딘가로 여행을 계획했다면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책을 챙겨 가거나, 미리 읽어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들춰보기라도 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행의 재미가 진해질 것이라 장담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책 속에서 서울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살고 있는 곳을 여행하는 기분이란 상당히 묘하다. 다음 권을 읽을 차례네. 살고 있는 곳을 여행하는 요즘, 지루했던 이 도시가 조금 재밌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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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워낙 역사를 좋아하셔서 사드렸는데 정말 마음에 들어하세요 안에 사진들도 좋고 내용도 좋다고 정말 기뻐하시네요 ㅎㅎ 1권은 이미 있어 2권부터 5권까지 사드렸는데 나머지도 다 보고싶다 하세요 6권부터 10권까지 다 사드려야겠어요 어렸을 때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서 처음 봤던 거 같은데 10권까지 나왔네요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읽고 엄마도 읽고 가족 모두가 읽기에 참 좋은 책이네요 추천추천 ㅎㅎ 굿입니다 |
| 종묘, 창덕궁, 창덕궁 후원 그리고 창경궁을 다른 첫 번째 권에 이어 서울 한양도성, 자문 밖, 덕수궁과 그 외연 그리고 동관왕묘와 성균관을 다룬 두 번째 권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한양도성과 동관왕묘는 자주 찾아갈 때가 많아서 더 반갑고 흥미로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종묘와 여러 궁궐들은 몇 년에 한 번 방문하는 정도였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고 찾아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유흥준 선생님께서 책을 펴내며에 밝히신 것을 보니 향후 인사동, 북촌, 서촌, 성북동 등을 다룬 새번째 편과 한강과 북한산을 다룬 네번 째 편을 계획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또다시 큰 기대를 하게되는데, 특히 산을 가끔 찾는 저로서는 북한산 편이 기다려집니다. 아무튼 서울편 1, 2권은 두고두고 읽으면서 나온 곳들을 찾아가볼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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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편1을 읽고 종묘에 갔다 서울편2를 읽는 도중에는 부암동에 가게 됐다 책을 읽고 실제 답사를 나서는 일은 꽤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뭔가 뽐내보려는 욕심도 들었지만 박학다식한 애인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었다 불쌍한 나의 명함들 기 한 번 펴보지 못하고 *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았는데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알아가는 일의 즐거움을 알게된 것만으로도 이 책은 값진 역할을 했다 |
| 이제 10권째 이네요. 한줄 한페이지당 술술 넘어가는 재미가 좋습니다. 이미 방문했던 유적이라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되니 새롭습니다.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듯 느낌이 들어 감개 무량 합니다. 다음 11권째도 너무나도 기둘리겠습니다. |
| 20여년 전 학창시절 때부터 굉장히 좋아하는 시리즈였는데, 아직도 찾아서 읽을 만큼 너무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자칫 올드하고 지루해질 수도 있는 여러 우리문화유산에 대해 유홍준 작가님의 필력과 입담으로 말미암아 시간가는줄 모르고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다. 우리 아들, 딸과 이 책을 함께 읽고 연말에 책에 나온 장소들을 모두 답사해볼 생각이다. 그렇게된다면 이것만큼 살아있는 교육이 어디 있을까 싶다. 소장가치가 충분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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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창비에서 출판된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0 : 서울편 2권 리뷰입니다.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서울에 사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서울이라고 하면 수도이고 고층빌딩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외국인들은 고층빌딩과 궁이 공존해서 신기하다고 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1권의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서 한양도성과 덕수궁에 관한 설명도 잘 읽었습니다.
서울성곽에 대해서는 지금은 경계도 흐려져서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한 번쯤 걸어보고 싶어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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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0 : 서울편 2 ‘답사기’ 드디어 서울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돌아왔다. 1993년 남도답사 일번지부터 시작된 답사기가 제주, 북한, 일본을 돌아 드디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입성했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수도 서울의 문화유산과 역사,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특유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통찰로 풍부하게 담아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