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 누구도, 무엇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당신을 잃고 난 후, 난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
...당신은 그 누구도, 무엇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당신을 잃고 난 후, 난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싱글맨 A Single Man 』은 1964년,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가 60세일 때 쓴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은 쿠바 미사일 위기로 고조되었던 전쟁의 긴장이 간신히 가라앉던 1962년 미국 어느 마을,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하루다. 『싱글맨 A Single Man 』은 샌토머스 주립대학교 대학교수이자 58세의 싱글맨 조지의 하루를 담고 있다. 단 하루의 일상이지만 그에겐 그 하루가 살아야 할 단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다.
“날마다, 해마다, 이 좁은 장소에서 작은 스토브 앞에 팔꿈치를 맞대고 서서 요리하고,좁은 계단에서 간신히 서로 스쳐가고 작은 욕실 앞에서 함께 면도하고, 계속 떠들고, 웃고, 실수든 고의든, 육감적으로, 공격적으로, 어색하게, 조급하게, 화나서든 사랑해서든 서로 몸을 부딪고 함께 사는 두 사람을 생각하라. 두 사람이 곳곳에 남길 수밖에 없는, 깊지만 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생각하라! 주방으로 가는 문은 너무 좁다. 손에 그릇을 든 두 사람이 서둘러 가면 이 문에서 부딪치기 십상이다. 거의 매일 아침 계단을 내려온 조지가 자기도 모르는 새 갑자기 참혹하게 꺾인 듯, 날카롭게 갈린 듯, 길이 산사태로 사라진 듯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늘 처음인 양 아프고 생소하게 깨닫는 곳도 여기다. 짐은 죽었다. 죽었다.“( p.11~12) 오랫동안 함께한 연인을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나보낸 조지에게 혼자 눈을 뜨는 아침은 새로운 하루라기보다 고통의 되풀이다. “늘 처음인 양 아프고 생소하게 깨닫는” 건 그의 연인 짐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 상실감은 결코 특별하게 기억나는 옛 상처의 들쑤심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생생한 고통이자, 하루를 시작하는 신호다. 조지가 짐을 잃은 것은, 똑같이 사랑하는 이를 잃었지만, 아내나 남편을 잃은 일과는 같지 않다. 사랑도 기억도 고통도 여느 사람들과 같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짐과의 관계는 온전히 혼자인 그의 세계에만 남아 있다. 이처럼 위로 받을 수 없는, 혹은 위로조차 꿈꿔야 하는 조지의 고독은 이 세계엔 제대로 이야기되지 못한 무수한 삶이 지금도 ‘있음’을 역설하며, 각자의 삶을 설명하고 서로의 고독을 이해해야 할 더 많은 세계가 아직 무수히 많이 남아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스트렁크 부인, 부인이 읽는 책은 틀렸어요. 그 책에는 내가 짐을 진짜 아들, 진짜 동생, 진짜 남편, 진짜 아내의 대용품으로 생각한다고 적혀 있죠. 그러나 짐은 무엇의 대용품이 아닙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짐의 대용품은 없습니다. 어디에도요.”( p.27~28)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을 잃은 자가 혼자 남겨져 남은 날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싱글맨 A Single Man 』은 조지의 어느 하루를 통해 그걸 집요하게 파고 들어간다. 동성애를 다룬 퀴어 소설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그/그녀”인지는 중요치 않다. 사랑을 잃었다는 것, 그의 부재를 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야 한다는 것의 무거움은 그 무게가 동성끼리라 해서 특별히 다를 일은 없는 것이다. “조지는 집에서 편하게, 지금 산 재료로 저녁을 만들고, 책꽂이 옆에 있는 소파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서서히 잠드는 밤을 상상한다. 얼핏 생각하기에, 집에서 만족스럽게 보내는 저녁으로는 더할 수 없이 그럴싸하고 멋진 장면 같다. 그러나 금세 조지는 그 장면을 무의미하게 만들 허점을 발견한다. 그 그림에서 빠진 것은 짐이다. 소파 맞은편에 반대로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짐. 각자 책에 몰두하고 있지만, 서로 상대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 두 사람.” (p.117) 외로움을 느낄 만한 빈 공간조차 없는 작은 집이지만(소설에선 무척 허름하고 작은 시골집으로 묘사되지만, 영화는 전형적인 중산층의 집을 배경으로 하는 점이 의아함), 짐과 함께한 일상의 소소한 기억들은 곳곳에 숨어 있다가 그에게 스윽~ 일어서 다가온다. 하지만 ‘조지’는 능숙하게 출근하고, 동료 교수들과 대화를 나누고,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다. 언제나처럼 눈뜨고, 출근하고, 강의하고, 퇴근하는 하루. 이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에도 매순간 무언가는 일어난다. 조지는 강의실에서 “진정한 공통점은 다급함뿐인” 학생들에게 “소설 제목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 소설에 관심 있는 척 할 수 있나요?”라고 갑자기 화를 냈다가도 곧 후회한다. 동료 교수 그랜트의 호의와 제안에 담긴 어두운 유머에도 조지는 가슴이 아프다. “우리에겐 훨씬 끔찍한 두려움이 생겼다. 살아남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살아남아서 파편만 남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조지는 자기 몸에 기뻐하고 싶다. 살아남은 자의 힘들게 승리를 거둔 몸으로 자신을 느끼고 싶다. 그러나 그의 몸은 “짐보다 오래 산 늙은 몸”일 뿐이다. 퇴근길에 조지는 오랜 친구 샬럿의 집을 방문한다. 조지가 짐의 사망 소식을 듣고 빗속에 처절하게 울며 뛰어가 안겼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를 안고 위로해 준 그의 친구. 조지보다 어린 마흔다섯 살, 샬럿은 자신이 비참할 때조차 행복을 만들 수 있는 여자다. 대부분의 행복은 여성적이다. (단, 그러기 위해선 늘 위스키나 보드카가 필요하다.) 술이 없는 때, 샬럿의 우울을 마주치게 되는 운 나쁜 상황도 있다. 그러면 무덤처럼 지루하다. 그래도 “오늘”은 아니다. 오늘 조지는 기꺼이 샬롯과 저녁 식사를 즐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그 사람들을 두고 떠난다고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아니, 전혀...자, 조지,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봐. 내가 두고 떠나면 죄책감이 들 사람이 있어? 누구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있어?” 조지는 “내가 있잖아”라고 말하지 않는다. 둘은 술에 취했을 때라도 그런 유혹의 말은 조지와 샬럿에게 걸맞지 않은 사이인 것이다. 그러기에 조지는 “죄책감이 머물거나 떠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잖아. 중요한 것은 샬럿이 가고 싶은가 아닌거지. 가고 싶으면 가야지.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마.” 그러자 샬롯은 그 말이 맞다며 슬프게 고개를 끄덕인다. “샬럿은 조지와 포옹을 하는 사이, 입에 입을 맞추고, 갑자기 혀를 넣는다. 샬럿은 전에도 자주 이런 행동을 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일만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있는, 술을 핑계로 삼은 유혹 중 하나다. 어떤 관계를 제 궤도에서 이탈시켜 다른 궤도로 홱 옮기려는 시도. 여자들은 이런 시도를 영원히 멈추지 않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이런 시도를 절대 멈추지 않는 덕분에 오히려 좋은 패배자가 되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조지는 적당히 시간을 두고 가만히 있다가 몸을 뺀다. 샬럿이 다시 조지에게 매달리지는 않는다. 이제 샬럿은 더 이상 막지 않고 조지를 보낸다. 조지가 샬럿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샬럿은 마침내 이불 속에 들어가는 어린아이 같다. “푹 자.” (p.160~161) 샬럿의 집을 나온 후 조지는 혼자 술집으로 향했다. 짐과 처음 만났던 게이바 스타보드 사이드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지막 몇 안 남은 식민지 시절 이주민인 노인 커플이 술 기운에 벌이는 가벼운 말다툼, 아이들처럼 늙어가는 남남커플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이 늙다리, 이 늙은 잡것, 이 늙은 개자식. 미움 없는 화, 앙심 없는 욕. 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럴 것이다. 부디 두 사람이 절대 헤어지지 않고, 맥주 얼룩이 든 두 사람의 침대에서 같은 밤, 같은 시각에 죽을 수 있기를.”(p.154) 조지는 바의 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제자인 케니와 마주친다. 케니는 조지가 그 게이바에 자주 오는 걸 알고 기다렸다고 한다.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 특정한 관계 속에 함께 들어 있는 것에 서로 만족하며, 케니의 제안에 함께 바를 나와 근처 바닷가로 달려가 옷을 벗고 밤바다에 뛰어든다. 두 사람은 짧은 취중 일탈을 즐기곤 젖은 몸으로 함께 조지의 집으로 간다. “분명히 유혹하는 분위기가 되고 있다. 서로. 케니의 담요가 대화와 맥주로 편안해진 영향으로, 흘러내리면서 한쪽 팔과 어깨를 드러내며 어느 철학자의 젊은 애제자임이 틀림없는 제자가 입은 그리스 고전 의상 클라스가 된다. 이 순간, 케니는 몹시, 위험하게, 아름답다.”(p.175) 조지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되고 사이사이 교감을 이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점멸하며 조지의 어떤 하루는 사라져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완전히 지친 수영 선수나 육상 선수의 모습. 그러나 포기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저 동물은 끝날 때까지 계속 싸우리라.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대안은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p.9) 끝날 때까지 계속 싸울 것이다.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대안은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는 이는 없고 파편만 남은 세계에 홀로 살아남게 된다 해도 더 절실하고 열렬하게 살아 있음의 경이와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나는 살아 있어!” 조지는 힘들게 승리를 거둔 늙은 몸으로, 현재에 사랑하고 현재에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싱글맨 A Single Man 』은 현대 동성애 인권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최초이자 최고의 소설이다.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 스스로 자신이 쓴 글 중 가장 사랑하는, 바라는 바 그대로 쓰인 유일한 작품이라고 밝혔다. 『가디언』 선정 ‘100대 영문 소설’로도 꼽혔다. 2009년 톰 포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및 『타임』 선정 ‘올해의 영화’ 등으로 호평 받은 바 있으며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통렬하고 뛰어난 책”이다. 동성애자임을 공언한 첫 세대에 속하는 이셔우드는 자신과 같은 나이에, 사는 곳도 직업도 같은 조지를 통해 정면으로 퀴어 문제를 다루며 본격적인 퀴어 문학의 장을 열었다. 20대 후반에 집필한 『베를린이여 안녕』에서 “결국 우리는 모두 퀴어죠. 정말 너무나 퀴어죠”라고 씁쓸히 말하던 이셔우드의 분신 같던 젊은 인물들은 이제 1960년대 미국에서 노년을 앞두고 퀴어로서 사랑하고 살고 이별한 후일담을 들려준다. 소설은 시종 잠잠한 일상을 따라 흘러가지만, 그 속에 깊숙이 자리한 분노나 맹렬한 비판을 부드럽게 덮어두지는 않는다. 조지는 상념 중에 “사람들은 짐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그 사람들 말, 그 사람들의 생각, 그 사람들의 생활양식, 그 모두가” 짐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분노를 속으로 곱씹거나 혐오자들과 선동가들을 상상하며 세상을 향한 증오를 드러내기도 한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있지도 않은 존재, 기껏해야 동정이나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조지는 나의 연인은 남편이나 아내의 대용품이 아니고, 나의 사랑도 뒤틀린 정신의 문제가 아니며, 퀴어인 나는 여기에, 바로 당신들 한가운데 있다고 선언한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톰 포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솔직히 나는 조지에게만 반한 게 아니고 이셔우드에게도 빠졌다. 통찰을 담은 이셔우드의 목소리, 글들에서 도드라지게 울리는 그 목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내게 말을 건넨다. 이셔우드의 글들이 그토록 명료하고, 그토록 생생한 것은 그가 맹렬히 살고, 쓰고, 사랑하기를 갈망했기 때문이리라.” “조지는 현재만 끌어안는다. 현재에 조지는 새로운 짐을 찾아야 한다. 현재에 조지는 사랑을 해야 한다. 현재에 조지는 살아야 한다.” (p.189~190) ‘당당한’ 동성애 소설, 그러나 결국 모든 인간의 상실과 극복에 관한 이야기. 『싱글맨 A Single Man 』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한 남자의 어느 하루를 놀랍도록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주인공 조지는 이방인이다. 미국에 사는 영국인이고, 이성애자 세상에서 사는 동성애자이고, 세속적인 취향을 가진 이웃 사이에 사는 특별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작가는 조지를 통해 성(sex)과 젠더(gender)에 관한 인간적 관찰, 그리고 소수자의 삶과 인권에 관한 솔직한 주장을 공감 있게 그려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지 ‘동성애 소설’에만 머물지 않는 이유가 역설적으로 그 평범하게 그려진 일상에 시선의 따뜻함이 있고, 인식의 포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
|
싱글맨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남자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상실을 경험한 와중에도 시간은 똑같이 흘러간다.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강의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퇴근을 한다. 이렇게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도중에 문득문득 파고드는 상실의 감각이 아프게 느껴졌다. “주방으로 가는 문은 너무 좁다. 손에 그릇을 든 두 사람이 서둘러 가면 이 문에서 부딪치기 십상이다. 거의 매일 아침 계단을 내려온 조지가 자기도 모르는 새 갑자기 참혹하게 꺾인 듯, 날카롭게 갈린 듯, 길이 산사태로 사라진 듯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늘 처음인 양 아프고 생소하게 깨닫는 곳도 여기다. 짐은 죽었다. 죽었다.” 읽다보면 의식의 흐름이 행동의 흐름을 따라가다가도 여기저기로 통통 튀는 것이 우리의 내면의 생각을 잘 나타낸다고 느껴진다. 한 사람의 하루를 묘사하기 위해 여러가지 감정을 담으면서도 그 감정을 절제되게 표현한다는 것이 굉장히 대단하게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