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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렬한 늙음은 더이상 슬퍼지지 않기 위하여 입술과 밤을...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졸렬한 늙음은 더이상 슬퍼지지 않기 위하여 입술과 밤을...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내용보기
입술이 입술에 베인 적이 있다. 입술로 입술을 벤 적이 있다. 가을이 혼비백산하던 겨울의 초입, 절단난 산 허리에서 시작되던 첫 번째 계단, 삶을 오해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말미였다. 몸을 쥐락펴락 하는 공기의 온도가 마음을 쥐락펴락 하는 관계의 온도에 자리를 빼앗겼고, 계단은 텅 비어 있었는데, 그 놈의 각도를 살피느라 고개를 드는 그녀의 각도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졸렬한 늙음은 더이상 슬퍼지지 않기 위하여 입술과 밤을... 김경후,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내용보기

  입술이 입술에 베인 적이 있다. 입술로 입술을 벤 적이 있다. 가을이 혼비백산하던 겨울의 초입, 절단난 산 허리에서 시작되던 첫 번째 계단, 삶을 오해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말미였다. 몸을 쥐락펴락 하는 공기의 온도가 마음을 쥐락펴락 하는 관계의 온도에 자리를 빼앗겼고, 계단은 텅 비어 있었는데, 그 놈의 각도를 살피느라 고개를 드는 그녀의 각도를 그는 놓치지 않았다.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 그러나 나의 입술은 지느러미 /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겹 주름진 지느러미 / 네게 닿고 싶다고 /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 <입술> 중

 
  문득 밤을 추적하다, 문득 주저하는 달을 끌어안은 적도 있다. 빈티지 담벼락을 따라 느리게 걷던 그림자가 휘청거렸다. 청색 기와가 밤새 얼굴을 붉혔고, 앙심을 품은 우물에서 오래된 유서가 떠올랐다. 불평등한 육식의 세계를 향해 누렁이가 컹컹 짖는 동안 산복도로를 따라 트럭이 툴툴거리며 지나갔다. 권위를 잃은 가을이 낙엽 흘린 길, 들키지 않은 속내를 낙엽이 두껍게 감싼다.


  “나와 나 사이 단 하나의 다리, / 우회도로 없이 / 기다리는 너 없이 / 언제나 이 시각 지체되는 다리, / 기다리다” - <오늘도 기다리다> 중


  깍지 낀 손가락의 숫자를 헤아리는 밤,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염려되는 혼잣말은 무색무취하다, 서둘러 결론을 내린다. 내가 나를 깜짝 방문 하는 밤, 나는 어떻게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호시탐탐 무료한 시간은 허전하다, 서둘러 결론을 내린다. 어떤 이론들은 고독사하고, 또 다른 이론에게는 기소가 이루어지는 밤, 모든 이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밤, 피해자들은 입을 굳게 다무는 밤이 깊어간다.


  “너의 등에서 짓밟힌 눈사람 냄새가 났을 때 / 나는 너의 등뼈가 되었지 / 붉은 네 심장을 감싸는 / 세상에서 가장 많이 움츠린 등뼈” - <등이 되는 밤> 중


  나의 입술은 모든 밤을 수령한다. 나를 호명하는 입술과 호명당한 등뼈 사이의 거리가 멀다. 나를 후원하던 시간들이 지척에서 사라져 가는데, 밀고 당기는 재주가 등뼈를 분질러대는데, 훔쳐보는 자들은 민첩하게 낙엽의 색으로 위장하고 있다. 해독할 수 없는 은둔의 표정이 피로하다. 저 편으로 가는 것은 이 편에 기대어 있는 것보다 피곤하다. 천천히 걸으면 밤도 따라 천천히 흐르겠지, 낙관하고 싶다.


   외벽방


  비 내리는 밤
  외벽방
  너무 삶은 국수 가닥
  같은 여자


  밤과 비 사이
  외벽방
  풀어헤친 백발로
  짰다 풀었다
  다시 짜는 여자의 뜨개질


  잠들지 못하는 누에 울음
  우는 여자
  빗소리 흐르는
  외벽방


  계단도
  추락도 없이
  밤, 외벽방


  존재의 이유가 아니라 증명의 이유를 찾아야하는 밤, 쓸모가 모자란 방에는 부조가 어울린다. 완전하지 않은 석공의 팔에 시달리는 망치와 정을 닮은 감상의 취향으로 읊어댄다. 입술과 밤이 토닥토닥 두들기는 허기져 흔들리는 어깨의 울음, 위로받는 멜랑꼴리는 그저 청년의 특권인데, 졸렬한 늙음은 더 이상 슬퍼지지 않기 위하여, 입술과 밤의 우상화 작업으로 오랫동안 불가사의하고 싶다.



김경후 /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 창비 / 115쪽 / 2017 (2017)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18.11.1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