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난 후 저자의 또 다른 책이 읽고 싶어졌다.'어느 어릿광대의 견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이유는...이미 나에게 있던 책이였기 때문이다.몇해 전 선물 받았으나 도저히 책장이 넘어 가질 않아 포기했던 책! 놀랍게도 다시 읽기 시작한 뵐의 책은 너무도 잘 읽혀서 오히려 당혹스러웠다.휘리릭 넘길 내용이 아니였음에도 이상하게 잘 넘어갔다.비교의 문제는 아닐텐데,'카타리나...'보다도 더 잘 읽혀서 당혹스럽기까지 했다.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면 가볍게 읽어야 할 내용이 아니였음에도 그랬다.
주인공의 직업은 어릿광대.대사없이 몸짓과 표정으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직업이다.그에게 사람을 관찰 하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일일지 모르겠다.해서 어릿광대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위선으로 가득차있다.종교라고 해서 예외도 아니고,가족도 예외는 아니였다.광대 눈에 비친 세상과 사람들은 위선 그 자체였다.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시대의 독일 역사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종교가 권력과 결탁이 되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는가를 미뤄 상상해 보며 읽는 것만으로도 공감가는 바는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 역시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합리함 들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나치를 비판하고 종교가 돈의 맛을 따라 가는 것을 풍자하는 것 이외에 예술가 라는 포지션이 갖는 수많은 고뇌를 풀어 놓는 한스의 이야기를 따라 가는 것 역시 불편했지만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밑줄을 그어야 할 내용들이 많았다.너무도 인간적이란 말은 역설적이게도 위선에 가득찬 세상을 살아가기엔 버거울 수 밖에 없는 그래서 한스는 광대라는 직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6세 관람가 영화들을 즐겨 본다.그런 영화에는 간통과 이혼 같은 성인 세계의 저속한 일들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간통과 이혼에 관한 영화에는 항상 누군가의 행복이 중요하다./124
희극의 의미는 낯선 현실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에서 가져온 상황들을 추상적 형식으로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282
반천주교주의를 표방하는 작품으로 분류되어 천주교 관련 서점에서 공개 판매가 불가능 할 정도였다는 역자의 설명에 격한 공감이 가긴 했다. 나는 비종교인임에도 프란체스코 교황이 오는 이 시점에서 왜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일까 왠지 죄짓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런데 한스는 아마도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날때마다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지 않았을까? 언뜻 보면 종교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종교 를 방패삼아 위선을 떠는 위들을 고발하는 것이였을 테니까.. 소설의 흐름에 자연(?) 스럽게 프란체스코 성인의 이름 언급이 반가웠다. 누군가 내게 교황에 대해 물었을 때 비종교인으로 딱히 할말이 없었는데,성인의 세례명 뜻을 말해주는 것으로 궁금증이 풀렸기때문이다. |
|
어릿광대 한스 슈니어. 그는 어느 날 순회공연 도중 다리를 다쳐 공연을 중단하고 고향 본(독일:서독)으로 돌아온다. 한스가 아내라고 여기는 동거녀 마리가 떠난 후, 그는 술에 의존해 공연을 하다 결국, 박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공연이 취소되고 아예 그의 예술성을 펼칠 기회조차 박탈당하자, 삶의 기로에 선 그는 주변인물에게 전화를 건다. 주머니에 돈이 1마르크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전화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오간다. 그는 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도 못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과의 대화, 회상을 통해 그들의 위선적인 삶을 폭로한다. 나치에 순응했던 이들의 전후의 성공한 삶에 대하여. 그 부조리를 견디지 못했던 한스 슈니어는 그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그 부조리함을 공연으로 표출하며 어릿광대로도 성공하지만, 마리는 천주교의 영향으로 법적으로 아내가 아닌 동거녀라는 죄책감 때문에 늘 괴롭다. 끝내 한스를 떠나게 되고 그로 인해 그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마리는 취프너에게 간다. 취프너는 마리가 그토록 간절해하던 '천주교의 공기'를 늘상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마리와 취프너의 결혼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절차를 거쳤기에 인정하지만 한스와 마리의 결혼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한스는 마리를 아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한스에게 마리는 네 아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인리히 뵐은 천주교의 윤리로 세워진 사회의 윤리적 결핍을 이 작품을 통해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한스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투쟁한다. 그래서 어릿광대가 되어야만 했다. 자신의 날카로운 풍자적인 예술로 세상을 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는 천주교회 내에서뿐만 아닌 모두 종류의 제도화된 권력 내에서 존재하는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밀어내는 '추상적인 질서원칙들'을 고발하고 싶었다. ''나는 어릿광대야.그리고 순간들을 모으고 있지.'' 한스는 부조리한 순간을 포착해서 우리에게 들려 준다. 그들은 자기 나름의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은 '악어의 눈물'일뿐이다. ''내 양심이 너를 쫓아내라고 내게 강요한다''라며 아들을 쫓아낸 엄마. 영광스러운 독일의 땅을 위해 아껴야 한다며 인색했던 엄마는 혼자서 몰래 지하창고로 내려가 햄을 자기 입 안으로 쑤셔넣었다. 양심이란 무엇인가...의문이 드는 지점에서 양심은 모두 선을 향하지 않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부모조차도 한스를 돕지 않는다. 그가 제도권 안에서 순응하며 살든지 굶어 죽든지의 선택권을 줄뿐이다. 그래서 한스는 거리로 나간다. 모자를 펼치고 구걸을 하며 세상의 부조리를 노래한다. 그것이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이다. 그리고 엄마는 말했다 네 직업운이 나빴구나... |
|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하인리히 뵐 <인간성이 제외된 법과 제도의 무서움> 사람은 자유를 추구했다. 피와 고통인 혁명을 통해 봉건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바뀌었다. 이제 사람들은 타인에게 맡겼던 자유의지를 되찾아 그것을 실현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유를 느꼈고, 행복을 만끽했다. 이 변화된 사회를 유지하려고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며 고민을 하며 법(규칙)과 제도를 만들었다. 즉, 복귀를 막을 장치이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발판으로써 사람들은 법과 제도를 규정했고, 이에 준수했다. 초기에 법과 제도는 인간의 고유한 성격인 자유를 존중하고, 보존하려 했다. 하지만 그 법과 제도가 인간성을 말살한 채로 운영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을 위해 만든 법과 제도가 오로지 법과 제도로만 묶여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광대 한스 슈니어는 어느 날 순회공연 도중 다리를 다쳐 공연을 중단하고 고향 본으로 돌아온다. 갈탄 재벌가의 아들인 그는 6년 전 어릿광대가 되려고 대학입학시험을 포기하고, 천주교인인 마리와 동거를 시작한다. 그 때문에 부모에게 완전히 외면을 당하지만, 마리와 함께한 6년의 시간 동안 그는 어릿광대로 성공한다. 그러나 마리는 동거생활에서 오는 죄의식이 점점 견디기 힘들어지자, 그를 떠나 ‘진보적 천주교인들의 모임’의 고위 간부와 결혼한다.(이 부분이 문제이다) 마리가 떠나면서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몰락의 길로 치닫는다. 수중에 단돈 1마르크를 지닌 채 고향으로 돌아온 슈니어는 할아버지가 조건부로 사준 아파트에 들어앉아 돌파구를 고민한다. 그는 서너 시간 동안 열 명 남짓한 지인들과 전화를 하고 아버지의 방문을 받지만 어떤 출구도 찾지 못한다. 결국 네 시간 전 도착했던 역으로 되돌아가 역 계단에 앉아 구걸 공연을 시작한다. <p328 인용> 위 문단에서 (이 부분이 문제이다)를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다. 천주교에서는 결혼한 부부로 인정을 받으려면 오로지 절차에 따라야 한다. 한스와 마리가 6년간 동거한 경험은 결혼한 부부로 인정되지 않는다. 단지 같이 산 것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천주교에서 결혼을 인정받는 것은 두 가지를 해야 한다. 천주교 개종과 천주교에서 마련된 서약서. 이 두가지를 해야 만이 결혼한 부부로써 사람들이 인정해준다. 한스와 마리의 경우, 한스는 무교였지만, 개종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서약서에 싸인을 하지 않았다. 천주교 혼인 절차를 따르지 않아 한스와 마리는 동거를 했지만, 남남(서로 사랑하지 않는 남녀)일 뿐이다. 즉, 법과 제도(천주교 혼인 제도)가 인간성을 상실한 채, 그 자체로만 유지되어 갔다. 작가는 한스와 그 천주교 사람들과의 전화통화를 독자에게 보여주었다. 그 통화를 들으면서 그는 인간성이 제외된 법과 제도의 무서움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만민에게 적용된 법이 특정한 소수에게 유리하게 적용될 때,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법을 법으로만 따르려는 사람, 그리고 이런 행동을 보고도 의심을 품지 않은 채 외면만하려는 사람들. 이러한 모습을 한스는 ‘출구 없는 미로 속’이라 말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한스는 순응 대신 화를 냈고, 그것을 표현했다.
작가는 한스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인간성을 제외하고 세운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모든 질서를 문제 삼으라고 말이다.
|
|
뵐은 1985년 개정판에서 이 소설은 이제 역사적 소설이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뵐의 말이 거의 맞는 것 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너무 시대 함몰적이고 종교적이고 또 독일적이어서 감동이나 동조는 고사하고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책들은 그가 글을 집필한 바로 그 시기의 독일 정치와 또 독일의 사회적 문제와 쟁점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열차는 정확했다'(1949)는 독일의 패전 직전인 1943년 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젊은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그리면서 전쟁을 말하고 있다. '운전 임무를 마치고'(1966)는 연방군 탈영과 군용차 방화라는 그룰 부자의 행위를 통해 1960년대 서독의 군의 재무장과 군비 팽창으로 이어지는 전체주의화를 경계하고, 군 내부에 만연한 부조리와 허위를 고발, 비판하고 있다. '카탈리나 블롬의 잃어버린 명예'(1974)는 1972년 독일 좌파 테러조직인 바더 마인호프 그룹을 도왔다는 협의로 언론의 비난과 해직 등을 경험한 하노버 공대 심리학 교수인 페터 브뤼크너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독일의 대표적인 황색언론지 빌트지가 마녀몰이식 기사를 싣자 뵐이 이에 반박하는 글을 발표했고 이후에는 그 자신이 언론은 물론이고 보수 시민들의 욕설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작가가 밝힌 적은 없지만 소설 속 '라이퉁'지는 바로 이 빌트지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 책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도 그렇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1960년대 초이고 이 시기는 기독교민주연합의 아네나워가 정권을 잡은 시기(1949~1963) 라고 한다. 뵐은 종교와 제도가 개인에게 휘두르는 권력과 자유의 침식에 대해 어릿광대의 눈을 빌어 파헤친다.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휘갈길 수가 하며 허를 내두를 만큼 그는 정치적 쟁점에서, 당시 독일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에서, 또 인간의 자유와 권리가 위협받는 것에서 결코 주저하지도 우회하지도 은유하지도 않는다. 단 한번도 말이다. 그러니 늘 논쟁의 중심에, 싸움의 맨 선두에 있었다. 전쟁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피폐화시키는가에 대한 성찰, 다수 안에 내재된 집단 광기에 대한 경고, 군부 팽창에 대한 경계, 또 언론이 개인에게 또는 소수에게 가하는 총칼 없는 위협과 폭력까지, 이처럼 지독히 변하지 않는 것들은 여전히 현대를 아우르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이 내가 뵐을 흠모하는 이유이고 그의 책이 여전히 '역사적 소설'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한스 슈니어라는 스물 일곱의 어릿광대가 있다. 갈탄사업을 하는 자본가 집안에서 자랐지만 요즘말로 그는 숫제 반항아에 이단아다. 그는 전쟁에서 누나인 헨리에테를 잃었다. 열여섯에 대공방위대에 지원한 헨리에테는 어느 날 열차를 타고 집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못 하고 한스는 그녀를 전쟁터로 보낸 부모의 허위를 경멸한다. 늦게까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사랑하는 여인 마리 데르쿰과 집을 나온다. 어릿광대가 되어 공연을 하기 위해 5년 동안 호텔을 전전하는 생활을 한다. 그 동안 마리는 두 번 유산을 했다. 천주교도인 마리는 이 모든 것들, 법적,종교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관계, 떠돌이 생활, 종교적 갈등 등을 견디지 못 하고 한스를 떠나 천주교 모임의 간부인 취프너에게 가고, 그와 결혼해 로마로 신혼여행을 떠나 버린다. 마리가 떠나자 한스는 술을 마시고 공연을 하기에 이른다. 공연은 연이어 실패하고 그는 어디에서도 공연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본의 집으로 돌아온다. 한스는 마리의 행방을 알며 그들의 헤어짐을 조장했다고 믿는 천구교 모임 사람들(프레데보일, 킨켈, 좀머빌트)에게 차례로 전화를 하고, 그를 방문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애인인 벨라 브로젠과 천주교로 개종해서 신학교 기숙사에 있는 동생 레오에게 돈을 구걸한다. 아버지는 도움을 거부하고, 레오도, 모니카 질브스도, 그 누구도 그를 도우러 오지 않자 한스는 역으로 가 계단에 앉아 구걸 공연을 시작한다.
왜 어릿광대이어야만 했을까. 실업자나 다른 예술가, 노동자이어도 되지 않았을까. 어릿광대는 사람들의 모습과 행위를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광대의 몸짓으로 그것을 재현한다. 어릿광대의 눈으로 본 세상과 사람들은 그럴 듯한 외향과 평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모순투성이가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허위와 위선, 가식과 죄의식, 그 모든 것들이 어릿광대의 눈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에는 오히려 주관이 아닌 객관이, 치우침이 아닌 중립이, 너그러움이 아닌 가차없음이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목소리는 크게 두 가지다. 전쟁시기에 전쟁의 조력자이고, 나치의 신봉자이던 사람들이 얼굴과 말을 바꾸고 지금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살고 있는지, 또 다른 권력으로 어떻게 부상하고 있는지, 가감없이 주저없이 비꼰다. 한스는 그들이 입으로만 뉘우치는 과거를 결코 믿지 못 한다. 한스는 헤르베르트 칼릭이 독일십자 훈장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는다. 그는 과거에 열살 한스가 '나치 돼지'라는 본인도 의미를 모르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해서 재판에 회부했던 사람이다. 한스네 집 마당에서 대공포 훈련을 하던 중 게오르크라는 고아 소년이 죽었을 때 칼릭은 그가 고아라서 다행이라고 말을 했다. 이웃을 감시하고 고발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행위들을 똑똑히 기억하는 한스에게 그의 참회의 눈물은 너무나 값싼 것이고, 어쩌면 용서는 한스의 몫이 아닌 것이므로 끝내 화해를 거부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종교, 천주교에 대한 그들이 가진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참 특이하게도 종교가 정권을 잡은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권력을 가진 종교가 국민들의 삶을 종교적으로 강제하기에 이른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불교 관련 정당이 다수당이 되어 정권을 잡으면 전 국민이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입법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라면 십일조를 법제화하면 어떨까. 한스는 마리와 결혼하지 않았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것인데, 자녀를 천주교식으로 양육하겠다는 서명을 해야만이 혼인 신고가 받아들여진다. 자유로운 인간의 전형인 한스가 이를 거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스가 천주교도인 마리를 사랑한 것,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자유롭고 거침없으며 예술가의 영혼을 가진 한스는 천구교도인 마리를 사랑하면서 그 모든 제도와 권위와 간섭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제도와 권력이 인간의 삶을 옭죄고 가르치려 드는 것, 종교라는 명목으로 선택의 자유를 앗아가고, 그들의 삶을 결국에는 강제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또 다른 전제주의가, 독재가 되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오늘날 종교단체가 조그마한 의사표명만 해도 '종교가 정치에 관여한다', '좌편향적이다' 하며 쐐기못을 박아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말해야 한다. 국민의 삶이 곤궁에 처하고, 자유와 정의가 위협받을 때 목소리를 내는 것은 결코 종교의 정치참여가 아니다. 종교의 정치 참여란 이런 것이다. 특정 종교, 특정 종파의 교리나 강령을 전 국민에게 들이대며 강제하는 것, 종교가 잇속을 더 채우고 몸집을 더 불리는 것, 그래서 로비를 하고, 신도들을 동원하고, 단체를 결성하고, 정당을 만들고 하는 그런 행위들이 바로 종교의 정치참여이다. 말 한디 하지 않고 주둥이 꾸욱 다물고 있는 것, 그것이야 말로 '중생을 구제하라','너희를 구원케 하라' 등, 그들 각자의 교리를 저버리는 반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작가가 모르는 게 있다. 여자가 남자를 떠나는 이유는 딱 하나, 사랑이 식어서다. 종교도 뭣도 아니다. 기냥 정이 떨어진 거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거나 삼자의 간섭에 의한다거나 하는 의심은 돌아올지 모른다는 낭만적인 기대와 함께 남자들이(혹은 여자들이) 흔히 빠지고 싶어하는 착각일 뿐이다. 그러니 한번 떠난 그 혹은 그녀는 거의,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애초에 뵐은 남녀 간의 사랑, 이별 따위로 이 소설을 풀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배경에 대한 사전 지식없이 이 책을 읽으면, 읽는 내내 한스의 그 모든 행위, 음주, 전화, 빈정거림, 조소 따위가 떠나간 여인에 대한 괴기스러운 집착,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찌질이의 전형, 객기와 자기연민의 집합체 쯤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읽는 내내 한스가 불편했다.
|
|
"술에 취한 어릿광대는 술에 취한 지붕 수선공보더 더 빨리 추락한다." 이 소설에서의 가장 멋진 표현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문장이다. 당연히 은유적인 표현이다. 주인공은 성격적으로도 사회부적응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하겠으나, 그보다는 자신 주변의 인물들의 세속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망각의 비양심에 대해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어릿광대로 자리매김하는 캐릭터이다. 그런데 그가 추락했다는 것은, 지붕 수선공의 추락과 같이 사고 또는 망신의 문제를 뛰어넘는 존재론적 전락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술취함의 원인은 또한 스스로 사회와 거리를 두는 가장 큰 근거중의 하나인 (왜곡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사랑의 실패이다 보니까. 그는 추락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증거가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의 주요 소재인 부상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의 연기에 스스로 웃어버리는 프로의식의 실종이 있는 셈이다. 주인공은 주변과,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후 독일사회와 괴리된 인간이다. 기민당과 사민당, 공산당... 그리고 개신교와 천주교, 나름 사회의 주류집단들 모두의 전후 자리매김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는 인물. 그래 사회부적응자다. 그렇기에 자신이 중요시 생각하는 사안들에 대해서 소통하지 못한다. 자신의 아픔을 남에게 이해시키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사람은 -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바깥에 있다 - 문제 안에 들어 있는 사람보다 늘 더 나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더 좋게 생각한다." 참으로 날카롭고 명징한 성찰이 아닌가싶을 정도... 사회부적응적인 주인공이 이렇게 말을 하다니, 좀 부조리하지만 말이다. 뭐, 주인공은 사회의 부조리를 자신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 그러한 대화는 자신의 한계에 봉착하는 결론으로 끝나지만 말이다. 매우 사적인 시점이 유지되는 소설이다. 대부분 주인공의 독백으로 전개가 되고. 하지만, 결코 사적이지 않은, 매우 무게감있는 사회비평이 아닌가 싶다. 이정도 성찰이 담긴 문학작품의 유무가 일본과 독일의 차이가 아닐까싶기도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