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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일본만 하는 것이 아님을 근래에야 알았다.우리나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어릴적부터 왜곡된 역사에 세뇌당하면서 성인이 되어서도 왜곡된 역사관을 지니게 되고 편견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일본이라는 나라는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다. 유독 한국인들은 일본을 싫어한다.우리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일본보다 중국이 더 심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중국한테는 관용적이다. 중국은 강대국이고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였기에 우리를 괴롭혀도 어쩔 수 없다는 심리가 , 일본은 우리가 거의 모든 문화를 전파해준 문화적으로 후진국이고 야만적인 나라라는 심리가 우리들 마음속 깊이 박혀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런데 막상 일본을 방문해 보면 충격에 빠진다. 결고 마음속의 무시해도 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이 현실과 괴리된 사실은 잘못된 역사교육에서 초래한다.미워하는 나라일수록 더 잘알아야 이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잘알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아버리는 교육때문이다. 고대에는 우리에게는 문화를 전파받는 문화후진국이었지만 어느 시기에들어서는 훌쩍 커버린 나라가 일본이다.그들이 어떻게 지금의 선진국이 되었는지를 제대로 알고 배운다면 분명 우리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제대로 객관적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을때 비로소 경쟁상대로서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조금이나마 일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학교에서는 절대로 배울 수 없는 역사를 가르쳐주는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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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대한 저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는 오랜 기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의문이었다. 시중에 나와있는 어떤 일본 역사서와 비교하더라도 발군이라고 말하고 싶다. 관심있는 분들과 두루두루 나누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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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차에 등장하는 에도의 탄생, 참근교대제, 목판출판문화, 뉴스와 광고의 원형, 이노 할아버지의 지도, 서양언어 사전 편찬, 도자기 등등의 일일이 언급하기 힘든 다양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페이스북에 연재하시지 않았던 부분도 많고요. 신사장님을 통해서 <해체신서>의 위대함에 대해 듣고나서 몇 달 후에 아키타현을 갈 일이 있었습니다. 첨부한 사진들처럼 에도시대 사무라이 마을 가쿠노다테(1620년대 조성)의 청류가에서 사본을 보니 더 그 느낌이 더 각별하기도 했습니다. 일제시대의 수탈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도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서세동점의 시대에 악착같이 대응했던 에도시대 일본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부분도 인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신사장님은 끝부분인 제17장과 18장에서 화폐제도와 에도시대 체제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동시대 서양이 아닌 다른 지역 국가들 모두 같은 실정이었습니다. 즉, 일본이 웅덩이의 최강자인 악어로 진화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거죠.(악어가 된 원인이 꼭 에도시대에서 기인할 필요는 없지만요.) 신사장님의 첫 책 <일본은 악어다>도 재미있게 읽었던 입장에서는 에도시대부터 동양에서 독보적으로 앞서나갔고 전후에 경제적 부흥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웅덩이 안에서만 최강자로 군림할 수밖에 없는' 원인에 대한 말씀들을 기대했거든요. 예를 들어 일본의 월등한 관광인프라와 오퍼레이션 수준때문에 해외여행을 점점 더 가지 않는 일본인들의 성향으로 인한 국제적인 인적 교류에서의 상대적 소외라던가 말이죠.(다음 번 책 소재로 남겨두셨을 수도 있죠.) 외교관, 국비유학생, 중앙부처의 과장급 공무원, 우동 장인(쇼쿠닌), 여러 명을 고용 중인 사업체의 대표까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우리 사회를 입체적으로 보시는 분께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에게 비춰주는 거울같은 소중한 책이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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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한 만큼 실망을 주지 않았다. 학교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에도(江戶)시대를 살짝 들여다 본 느낌. 감동은 깊고 충격은 크다. 일본이 미국인 페리에게 굴복해 나라의 문을 연지 불과 40여 년 만에 근대화에 성공한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에도(江戶)시대, 260여 년간 축적된 사회 발전이 토대가 되었던 것.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섬유혁명’이라 불리는 목면이 전래된 것은 중국이 14세기, 우리나라가 15세기, 일본은 16세기로 각 백 년의 차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보급이 느린 곳이 일본이었으나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된다. 일본은 무서운 속도로 목면산업을 발전시켜 세계적 강국이 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때 이미 인구가 100만에 이르는 강력한 소비도시 에도(江戶)가 있었기 때문인데 한낱 버려진 갯벌에 불과했던 그곳이 이렇듯 번성한 이유는 뜻밖에도 의도하지 않았던 요인 ‘참근교대제’에 있다. ‘참근교대제’란 무엇인가. 에도막부(江戶幕府)를 창시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원래 본거지는 슨푸(駿府), 지금의 시즈오카였다.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제패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강력한 경쟁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본거지, 즉 번(藩)을 에도(江戶)로 옮기라 명령한다. 힘을 빼놓겠다는 의미. 명을 거역하지 않은 이에야스에게는 황무지인 에도(江戶)에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자신의 병력을 보내지 않아도 좋다는 혜택이 주어졌는데 이것이 일본의 역사를 바꾼 우연 중 하나. 병력을 온존한 이에야스는 임진란 후 토요토미의 아들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그 역시 지방 호족들이 두려운 것은 사실. 그들을 통제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바로 ‘참근교대제’이다. 1년을 단위로 각 번(藩)의 번주(藩主)들이 에도(江戶)에 일정기간 머물러야 한다는 것. 우리나라 신라 때 상수리 제도나 고려의 기인제 같은 것이다. 에도(江戶)는 지금 일본의 수도인 도쿄(東京)다. 생각해 보라! 전국에서 몇 백 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번주(藩主)들이 몇 달씩 걸리는 여정으로 에도(江戶)에 와 먹고 자며 생활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에 따르는 숙박비며 도로정비에 따른 제 비용 모두 각자가 져야 했다. 새로운 수도인 허허벌판 에도(江戶)의 건설비용도 다 이들이 내야 했다. 지방 봉건영주들이 도저히 돈을, 즉 힘을 모을 수 없도록 만들겠다는 것. 도쿠가와의 이 구상은 맞아 떨어졌으나 뜻하지 않았던 낙수효과가 생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해야 했으니 여행업, 숙박업과 더불어 교통이 발달했고(지금의 일본이 여행, 관광대국인 것도 결코 이와 무관치 않다) 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순수 소비도시 에도(江戶)를 유지하기 위해 상업이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상인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이 좀 더 고급스러운 옷을 찾는 소비 욕구가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 바로 이때 면화가 전해진 것이다. 폭발적인 수요에 맞춰 면방직 산업은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 고려말 문익점이 생사를 걸고 붓두껍에 목화씨를 들여와 한 세기나 먼저 면화를 도입했으나 발전 정도가 미미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은 에도(江戶)시대에 이미 면방직 산업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발전이 있었기에 서양의 각종 문물이 물밀듯 들어 왔을 때에도 이를 받아 들여 소화해 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 이 외에도 처음 들어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 있다. 일본, 아니 역사에 대한 편견과 무지, 몰상식을 깰 수 있는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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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한 감정적 접근이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무지를 조장하였는 가를 명확하게 일깨워주는 좋은 책입니다. 진정한 극일은 과거사의 피해에 집착하는 '반일'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가교역할을 하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알려는 '지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양국은 좋든 싫든간에 상생과 협력을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우선 당위과제로 부각된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일본이 우리를 알려고 하는 노력보다 더 적극적인 '지일'을 꾀하고 있는 지 냉정하게 반성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부분을 새로 배우며 진심으로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
| 이 책을 보면 왜 우리는 일본에 대해 이다지도 무지한걸까 의문이 든다. 피해자의식에 사로잡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애써 외면하고 폄훼해온 지난 세월은 고스란히 우리의 현대 지성사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다. 서구문물과 사상, 과학의 도입과 재해석, 그 속에서 도전하고 고뇌하고 방황하면서도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근세라는 림보의 시간을 창조해낸 일본을 이해하려 노력하는게 왜 어떤 사람들에겐 그다지도 역겨운 일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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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일본사를 배운 적이 있었던가. 교과서에 일본사와 중국사가 아주 짧게 실려 있던 건 기억하지만, 한국사를 배울 시간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시험에 나오지 않아서 건너뛰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내가 일본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다. 정치외교학 전공이고 개인적으로도 일본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관련 수업은 죄다 수강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일본사를 틈틈이 공부하고 있다. 주로 책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이라서 사실 '공부'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다. 전직 외교관 신상목이 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는 일본사 중에서도 에도 시대의 역사를 공부하기에 탁월한 교재다. 1996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이후 일본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한 저자는 일본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외교부를 퇴직하고 현재 서울에서 '기리야마본진'이라는 우동가게를 경영하면서도 한일 관계 증진에 도움이 될 만한 저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를 일컫는다. 조선으로 따지면 선조 말기부터 고종 초기에 이르는 시기다. 알다시피 이 시기에 조선은 영, 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지속하지 못하고 당쟁과 세도 정치를 일삼다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기 직전의 상황에 치달았다. 반면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과 조선통신사에게 배운 문물, 그밖에 중국과 서양 국가들로부터 흡수한 문화와 문명을 십분 발휘해 근대화의 기반을 닦았다. 저자는 무려 400여 년 전부터 선진국이 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한 일본의 저력이 무엇인지 분석한다. 저자의 시선은 에도 시대의 정치를 비롯해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를 망라한다. 여행, 출판, 교육, 언론, 광고, 과학, 지도, 사전, 패션, 도자기 등 테마도 다양하다. 인상적인 건 에도 시대에 발전한 분야가 지금까지도 일본을 먹여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출판 강국인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매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만큼 대학 수준도 뛰어나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요미우리 신문은 에도 시대에도 있었고, 단순하고 간결한 미의식을 중시하는 일본의 패션 문화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 조선 후기에 발전한 것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뭘까? 고리타분한 성리학 문화? 남존여비 사상? 착잡할 따름이다.
일본은 에도 시대 중기부터 여행 대중화가 진전되었다. 여행 대중화로 인해 일찍부터 교통망, 숙박시설, 치안, 오락시설 등이 생겨나고 융성했다. 이때의 여행은 진정한 여행이 아니라 관광의 속성이 강했다. 유교 사상에서 관광의 '광(光)'은 '빛나는 문물, 전통, 군주의 덕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찬란함과 위대함'을 의미한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광복(光復)'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다. 에도 정부가 장려한 여행은 어디까지나 나라의 위용과 위대함을 확인하고 애국심이 고취되도록 하는 '관광'이었다.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역시 한국이 최고야!'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것이 관광의 목적이라니. 이 밖에도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볼 수 있는 내용이 여럿 실려 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일본에 관한 것은 무조건 싫어도, 한 번쯤 읽고 찬찬히 생각해볼 만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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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역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한다. 일본이 에도시대부터 근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많은 것들이 궁금해졌다. 이걸 풀기위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하여 유신이라고 하고 한국은 아리래부터의 혁명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붙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백성들은 의병활동이며 아래로부터 나라를 구하기위해 고군분투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많이 알기는 하지만 일본도 알아야 앞으로 일본친구들에게도 잘못된점을 지적해줄수있지 않을까?
근대화 우등생 일본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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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베총리조상의 고향
아베총리는 도쿄 (관동지방)에서 태어났지만, 고향은 야마구치다. 그이 지역구가 야마구치일 뿐만 아니라 윗대 조상과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고향도 대마도 바로 밑에 있는 야마구치현이다. 10선의원으로서 '정의 황태자'였다. 야마구치현(옛 이름은 조슈번)은 일본 정치사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도 짓궃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19세기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자들과 한일병탄 후 조선을 통치하였던 주요 인사들이 바로 이곳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도 야마구치의 풍수에 주목한다. --- 보통 '조슈 타입'이란 말이 있는 데, 이 말은 머머리가 좋고, 분석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행정 능력이 뛰어나고, 정치적이며, 권력행사 특히 인사에 능숙한 사람을 지칭할 때 쓴다. 메이지 이후 대표적 인물로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있고, 2차대전 이후에는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두 총리가 있다. ......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을 볼 때 그 땅의 유전자라든가 혹은 특별한 바일이러스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도 할 정도다. --- [명치라는 국가] 조선 병탄의 주도적 인물 이토 히로부미,가쓰라 다로 ,명성황후 시해 당시 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 조선 총감을 지낸 야마가타 이사부로, 그리고 이들의 스승으로서 일찍이 정한론을 주창했던 요시다 쇼인도 이곳 출신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한 것이 아니라 야마구치가 조선을 병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아베 총리는 동아시아 침략의 책임을 외면하고, '일본의 주권회복'을 내세우며, "천황 만세"를 외치고 있다. 야마구치가 그의 정치적 고향이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이러한 야마구치 풍수는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우주를 구성하는 4대 요소 지,수,화,풍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땅"이라는 일본인의 대지관과도 연결된다.
2012년 12월 아베 총리가 총선에서 승리하자 곧바로 선영을 찾아가 '정권 탈환을 보고'한 에서도, 그리고 조상이 사살던 집이 지금도 그곳에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고향은 야마구치다. 우리는 시는 구로 나누고 도는 군으로 나눈다. 일본은 막부(도쿠가와 군사정권)시절 무신정권을 수호한다는 울타리란 뜻의 번으로 행정구역을 나눈다. 200여년의 군부독재이후 1868년 메이지천황을 옹립하는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곧이어 조선의 갑오개혁에 해당하는 폐번치현이 단행된다. 폐번치현은 무사의 칼착용금지,전국민에게 성씨를 나누어줄 것, 번을 현으로 바꿀것 군사정권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뒷방에만 앉아있던 메이지천황에게 이양한다는게 골자다.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주도적 번은 조슈(야마구치현)번,사쓰마번,도사번이다. 야스쿠니도 사실은 이때 죽은 사람들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만든 현충사 개념인데 여기에 태평양전쟁 전범들을 합사한데서 문제가 야기되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야스쿠니(초혼사)는 좋은 뜻으로 세운곳인데 후세들이 나쁘게 이용했다고 보면된다. 그럼 행정구역인 번은 모두 사라진걸까 우리주위를 보자. 번짓수 잘못찾으셨어요,번호,순번,주번,당번 모두 무신정권시절의 흔적이다. 후쿠오카공항에서 자동차로 3시간을 달려야 아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나가토시 유야라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유야는 분지인데 서쪽으로는 바다가 이어지고 나머지 삼면은 병풍처럼 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아베가묘소'라는 푯말이 길이 꺾이는 곳마다 박혀있어 선영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야마구치에서 야마란 일본에선 대체로 산을 의미하지만 고대엔 야마토(경북고령)란 대가야를 뜻한 지명이었다. 85년 한국혈액원에선 전남지역에서 CIS-AB형을 찾아냈다. 보통AB형과 O형이 만나면 AB형이나 O형이 태어날 수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 서남부지방과 일본 큐슈(야마구치현)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서남부인 전북군산에서 옥포까지 일직선으로 활모양으로 연결하면 진도,목표쪽의 모든 지역과 일본 야마구치현은 바로 삼국시대 백제문화권과도 일치한다. 고사기,일본서기의 제작시기도 백제가 멸망한 후 본토의 백제지식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온 직후 쓰여졌다는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최근 학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광주 전남지역 헌혈잘자를를 대상으로 혈액형을 분석한 결과 1만명당 3.5명꼴로 CIS-AB형이 나타나고 있다고한다. 다시 말해 아베총리조상의 고향은 큐슈의 야마구치가 아니라 전남의 목포,진도지역이라고 보아야 정답인 것이다.
제목 : 영화 해적을 보고
우리는 월드컵과 양대올림픽에서 뜨거운 환희와 함께 우리의 저력을 확인했다. 운동뿐 아니라 경제, 학문, 하다못해 세계요리대회 마술대회등 소소한 것까지 우리는 세계를 상대로 우리의 저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ODA 받던 나라에서 베푸는 나라가 지구상에 유일하다는게 괜한 소리는 아닌듯 싶다. 이렇게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우리가 근세에 왜 그런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진 역사를 가지게 된걸까 나부터도 우리역사가 부끄러웠고 그걸 극복하는데 이십년 가까이 걸렸다 생각하지만 우리민족 대다수 특히 역동성 있는 88세대 조차도 마음한구석엔 근세 우리역사에 대한 부끄러운 얼룩들이 지워지지 못한채 남아있을 것이다. 이걸해소하는게 나는 우리역사의 당면과제중 가장 시급한거라 생각한다. 역사의 과오로부터 배우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반복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했던가 흔히 우리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나라가 이꼴이 났다고 말을하며 배워왔다 과연그럴까 만일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을 나라의 방향으로 잡던 그날 반대로 나라의 문호를 활짝열고 외부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유연성을 발휘했다면 그런 근세의 비참한 역사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하나더해 그시절 왕이 고종이 아닌 세종이고 병부를 이순신장군이 관장하고 있었다해도 역사는 달랐을까 나는 우리가 배웠듯 단 한차례의 싸움도 없이 국권을 넘긴 현실에 더해 장렬히 싸우다 국권을
잃었다는 역사의 한페이지만 추가할뿐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는 같은 위치를 굴러갔을거라 생각한다. 조선의 국시는 사농공상으로 정해졌다 또 외국에선 우리를 조선이 아닌 코리아로 부른다 왜일까 천하최고의 약수라해도 한그릇에만 담겨있다면 그것은 언젠가 썩어서 아무것에도 못쓰는 물이되고만다. 고려는 상업을 귀히여기고 장인을 우대하며 자주성이 강해 금속활자 고려청자 북진정책 여러대장경 코리아란이름과 불교예술 황제의 칭호까지 조선의 김치 불고기 누룩(여진어) 거북선등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지금 우리가 원조하는 아이티와 필리핀은 6.25직후엔 우리에게 원조를 주던 나라들이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상황이 뒤바뀐것일까 어떤 생각을 하는 지도자를 세웠는가가 가장 클 것이다. 우리의 역량을 세계최고의 교육열에서 찾는분들이 많지만 만일 세계최강의 군대를 지도자가
함정으로 이끌고간다면 그 부대의 역량은 아무 쓸모가없게된다. 조선의개혁정책은 그들이 요승이라 말한 신돈이 만든것을 패러디한 것이며 불교예술 자기 그외 문화
공예품 어느것하나 독창적인 것은 없다. 한글은 두가지 의견이 팽팽하니 접어두고라도 세종이
아니었으면 조선은 있어선 안될나라라 난 생각한다. 몽고의 말발굽이 지나간 수에즈 오스트리아의 노이슈타트 무굴 베트남서북쪽 운남까지의 나라중
그 나라의 국명이 제대로 보존된 나라는 지구상에 단하나 고려뿐이었다. 외세의 침략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말기 바란다. 고려는 군부가 여러개고 지금의 대한민국도 정당이 여러개다 왕이 정치를 잘못하면 군벌중
잘난사람이 실권을 잡다가 또 잘못하면 다른군벌이나 왕이 실권을 잡는것이 대한민국의 다수당제를
보는것같다. 조선은 어떤가 우선 탄생부터 사대다 자주성이 강한 고려인을 모두 제거하고 오로지 중국에
머리조아리는게 국시다. 조선 군벌들이 난립하면 왕권이 위험할 수 있다하여 모든 군권은
왕에게 집중된다. 북한도 수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 그러니 오랜가도 마지막엔 비실거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과 고려는 외부에 대해 모든 문호를 개방했지만 조선과 북한은 특정국가 한둘에
대해서만 선별적으로 문호를 열었을뿐 모든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했으니 지금은 북한도
대원군시절의 조선도 오랜세월 바가지의 묵혀놓은 최고의 약수 신세가 되지 않았나 감히 생각해본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란 영화를 안보신 분이라도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장수이야기를 안들어본 분은
별로 없으실것이다. 왜 될 성부른 사람은 싹부터 잘라버리는게 조선의 관행이었다. 그 사람이 커서 왕권을 위협한다면 그보다 악한 상황은 없기에 이순신이 그렇게 잡혀갔나보다. 왜 우리는 위화도회군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는걸까 오로지 내 생각엔 왕십리 같은 스토리텔링과 일부
내러티브적인 면이 사람들이 흥미를 유발했시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웃민족의 뇌리에 중화사상을 주입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삼국지 하지만 그 속엔 무한한
스토리텔링과 얼마간의 내러티브도 포함되었기에 중국을 적대시하는 나라에서도 중화민족주의를
은연중 심어놓는 삼국지를 널리 권장하는건 아닌지 의심해본다. 대장금을 중국국민뿐 아니라 지도부까지 열렬히 환영한다. 왜 을지문던 강감찬 같은 역사를 가진
민족이 별볼일 없는 벼슬을 하던 명나라의 사신에게 최고의 실권을 가진 조선의 정승이 벌벌기니
이미 우리 스스로가 중국의 속국임을 증명했다. 더이상 동북공정이 아니라 한반도공정을 해도
우리가 대장금에서 모든 명분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중국지도부가 좋아라할 수밖에 이제는 대장금을 중국에 수출해서 외화를 많이 벌고 한류가
뻗어나가겠구나란 생각은 버리자 조선시대에도 중국에 조공하는 물품보다 받아오는 물품이 더 많았다. 우리가 위화도쿠데타란 역사로 인해 우리민족에게 씻지못할 오류를 저지르고 있으때 명나라의
침략을 받은 월남은 항복한 명군을 선처해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얼마나 대단한가
우리는 오피러스를 타는데 그들은 자전거밖에 못갖는 처지라고 으스 대지말자 김연아의 재능을 가진 우리겨레가 지난600년 동안 이성계가 자기일족의 영화를 위해
우리민족에게 굴레를 씌웠던 사농공상의 허상에서 이제는 빨리 벗어나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는
일을 만들지 않는 각성이 온 국민적으로 인식될때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 조금은 우월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고려에는 벌리사란 직업이 있었다 한강이북에 왕기가 있다하여 오얏나무를 심었다 기른후 자르는
직업이었다. 그 오얏나무를 심은 곳이 강북구 번동이다. 제발 대한민국엔 벌리사란 직업이 없기를 바랄뿐이다.
제목 " 만약 권율장군이 역모의 수괴였다면?
학교에서 배운다. 소중화주의 한국은 작은 중국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여진,조선,일본을 오랑캐라 부르고 한국은 여진,일본을 오랑캐라 부른다.(대쥬신을 찾아서)
권율장군은 충신이고 영웅이다. 소설을 한 번 써보자.
권율장군이 어디 권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원권씨라고 가정해본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전 조선이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시비를 건다.
만약 연산군때까지 일본에 공녀를 바쳤던 조선이 중종때부터 자주개혁을 선언하며
이를 단절시켰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다시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이를 요구한다.
10만양병설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나 만일 실미도처럼 잘 훈련된 군대를 권율에게 맡기고
총지휘권을 주어 절벌하라 명했는데 낙동강쯤가다 지금은 농번기라 안되고 비가 많이와 활이
느슨해지니 안되고 북쪽에 있는 나라가 남족에 있는 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다라며
회군해 개혁을 단행하고 있는 조선왕조를 쓰러뜨리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명을 권율의
고향인 철원으로 하오리까 가야라 하오리까 여쭌다.
이에 고무된 도요토미는 가야란 이름이 아름다우니(일본고대사서중 하나엔 임라일본주 즉
가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란 허구적이야기가 나온다.)
그후 가야의 태조 권율은 자신의 역모를 감추기 위해 소왜국주의사상을 내세워 조선은
작은 일본이라 칭하며 일본은 아버지의 나라라하여 큰나라에 빌붙어 사는 사상인 사대주의로
일관한다. 동국여지승람의 동국도 중국의 동쪽에 붙어있는 중국의 속국이란 뜻이다
.(전통생태와 풍수지리)
아들이 아버지를 칠 수는 없다. 그럼 권율(이성계)이 낙동강(위화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게
정당화된다.
그리고 다시 공녀제도를 부활시켜 매번 공녀를 뽑아 왜국에 상납하고 그 반작용으로 조혼제도가
가야시절 내내 자리를 잡는다.
이게 오랫동안 정착되어 1909년 민적법에 의해 성씨가 없는 노비나 백정,망나니,재주꾼들은
기왕이면 왕족의 성씨를 갖자며 철원권씨난 김해김씨를 가져가고 이들의 후손들 중 성공한
사람들은 진짜족보를 사서 종친회에 나온다.(노컷, 조선왕조실록)
한술 더떠 어떤 이들은 진짜임을 강조하고자 권씨가 아니라 궐씨라고 고쳐부르기도 한다.
몽고는 세계를 휘두른 국가다 원도 몽고족이 세웠고 러시아인도 한꺼풀 벗겨내면 몽고인이라는
(진시황은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말이 있을 정도다.
인도 무굴왕조,타타르까지 전세계를 휩쓸었다 황인종을 몽골리안이라 부를는 것고 여기서
유래한다.
고려는 세계속에 그것도 몽고 바로 옆에 있다 모든 나라가 복속해야했듯 고려도 항제에서 왕으로
격하되고 앞에 충성충자를 왕에게 붙였으며 공녀를 바쳐야했다 이건 고려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적인 일이었다.
명은 원을 물리치고 중원만 통일한다 그리고 고려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건다.
물론 여기엔 공녀도 포함된다. 고려 공녀는 공민왕이 등극함과 동시에 없앤제도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고려는 전군의 총지휘권을 이성곙에게 맡기고
명을 치라 명한다.
고려는 문무를 겸비한 국가로 무인기질이 강했고 여러 전란을 거듭하면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전권을 갖게된 이성계장군은 위화도에서 우기가 오길 기다리다(욕망하는 지도) 지금은 비가
많이와 활이 느슨해져 안되고 농번기라 안되고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라며
창끝이 겨눈 방향을 반대로 돌린후 고려를 무너뜨리고 고려에 싸움을 건 적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새로 생긴 왕조의 국명을 이성계의 고향인 화양이라고 하오리가 조선이라고 하오리까 묻고
명태조 주원장은 이에 고무되어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다우니 (고조선은 중국이 지배했다고
중국은 아직까지도 우기고 있다) 조선이라고 하거라라고 한다.
이 때 고려의 대신 이인임이 이성계의 선조라고 자기네 사서에 기록해두고 후손들이 조선에 대한
외교적 히든카드로 써먹도록 조치하고 이를 임진왜란 직적 오키나와 상인들에게 전운이 감돈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의 관리들이 이 히든카드를 써먹는다.(풍수화/김용운)
홍역관과 병부상서 석성의 이야기는 얼굴마담일 뿐이다.
공녀를 보자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공녀제도를 다시 부활시킨다.
명태조가 죽을때 순장당한 16명의 여인중 조선왕조에서 보낸 여인도 끼어있었다고한다.
그리고 조혼의 풍습이 조선내내 이어지지만 지금의교과서엔 조선의 공녀이야기나 조혼이야기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온통 고려공녀 충성충자 고려임금 이야기뿐이다.
우리 조상들도 항상 그랬으니까 조선이 중국을 사대주의로 떠받들고 사대로 일관하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래야 자기들의 죄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개척한 갈라전(동북3성과 함경도일대)도 윤관의 동북9성도 흥남부두일대로
왜곡되어 있거나 함경도로 국한되고 교과서엔 온통 세종대왕의 4군6진이야기뿐이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군관 출신이고 세종의 대마도 정벌도 사실은 태종의 작품이다.
다시 말해 고려의 무인기풍이 세종때까지는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군권은 모두 임금에게 집중시키는 체제를 만들고 공맹사상만을 강조하는 문치시스템에만
역점을두어 결국엔 임진왜란과 36년국치를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
몽골제국시절 세계각 몽고에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쳤지만 명나라시절 세계에서 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친건 조선뿐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진짜 전주이씨임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은 이씨가 아니고 리씨라고
주민등록증에 달고다닌다.
악인열전을 보자 히틀러가 있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독가스로 살해한 인물 독가스를 누가
나치에게 팔았는가 유대인재벌 로스차일드가문 그 후손들중 일부와 관계자들은(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 1,2,3)
AP,UPI,로이터,워시턴포스트,헐리우드,뉴욕타임스,뉴욕포스트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위인전을 보자 이성계,쿠데타로 집권하고 스페인에서 학살을 일으킨 나폴레옹(지식의 미술관)
모두 역모의 수괴인데 그 잔당들은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너무 작아도 안보이지만 너무 커도 안보인다.
나폴레옹은 남의 나라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역모의 수괴인 이성계 이제 그만 이완용 같은
반열인 악인열전에 올릴때도 되지 않았을까
제목 : 동해 일본해 & 성폭력범죄자의 특징
요즘엔 전자발찌를 차거나 화학적거세를 한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처벌수위는 비슷하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5분내지10분의 쾌락을 위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짖밟아버리는 범죄.
5~10분의 자신의 쾌락 떄문에 , 이게 성폭력을 즐기는 이유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페탱원수의 비시정부이다.(먼나라 이웃나라)
페탱원수는 1차대전의 영웅이었고 대통령까지 되었다가 2차대전떄 프랑스 온천도시 .
비시에 나치가 조종하는 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 프랑스 국토의 1/3을 다스리다 전쟁이
끝난후 처벌받는다.
독일이 프랑스를 지배한건 3~4년이고 프랑스가 독일에게 문화적 혜택을 받은건 없어도
빼앗기거나 당한건 많다.
이성계를 보자 한족 부흥운동인 백련교도의 난으로 홍건적이 쳐들어왔을때 무찌르고
60년간의 일본남북조시대에 남조의 패잔병들이 남원쪽으로 진군했을때 황산에서
대파시켜 전쟁영웅이 된다.
여러대째 다루가치집안이었던 그는 (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명나라 토벌을
명받고 위화도까지 갔다 쿠데타를 일으켜 자주국인 고려를 멸망시키고 만주와 요동이
우리땅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을 모두 죽이거나 귀향보내고(오백년 도읍지를~) 명나라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나라이름을 지어달라고 애원한다.
조선은 500년내내 임금의 권한을 수행하려면 중국황제의 허락을 받아야했고 세자를
지명하려해도 그 지명이 유효하려면 중국사신의 허락이 있어야 그 지명이 유효한
중국의 유일한 식민지였다.(대장금)
500년동안 중국만 바라보며 사대주의 쇄국을 하던 조선은 근대 서양문물을 1543년부터
받아들인 일본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이권을 먹으려면 먼저
식민지관계를 청산해야되는걸 알기에 강화도조약 1조에 '조선은 독립국'이란걸 명시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시킨다.
우리는 36년이라 배웠고 지금은 35년이라 가르치지만 사실 50년이 맞고 이건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이었다.
3국간섭을 보자 중국땅을 점령했지만 서양세력이 간섭해 할양받을 땅을 포기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비스마르크를 보자 나폴레옹3세와 전쟁후 파리를 함락시키고 배상금을 요구하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대신 가지라고 했을때 그는 다른 나라들이 간섭할 걸
우려해 돈으로 달라고 한다. (비스마르크평전)
만일 2차대전후 미국이 전쟁배상금을 일본정부에 요구했다고치자 그리고 대신
조선을 가지라고 했다면 우린 기분이 어떨까 그런데도 우리는 프랑스를 찬양하면서
우리와 같은 역사를 안고 있는 월남은 무시한다.(호치민평전)
일본이 조선과 전쟁을 안한 두번째 이유는 군사력도 얼마안되고 아직도 활이
주력인 나라 학교도 지어주고 철길과 도로도 놔주어 조선사람들은 좋아하나 나중엔
조선을 삼키기 위한 포석인걸 안중근의사등 몇몇분만 빼놓곤 모른다. (시일야방석대곡)
그래서 1909년에 하얼삔에서 그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토의 자제 요청으로 조선을 삼키지 못한 일본은 바로 다음해 조선을 병합한다.
500년동안의 식민지배체제,쇄국정책을 이성계가 만들었고 그를 주도한 인물이 그의 군사(참모)
정도전인데 지금 이들은 자신들의 계략에 세뇌된 국민들에 의해 영웅이 되어 있고
너도나도 전주이씨라 자랑한다.
세계의 노예제도가 없어진건 1860~1870년 사이이고 일본도 1872년에 노예제도를 없앴지만
워낙 강고한 중국은 1903년에야 없애고 우리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제일 늦은 1909년에야
없앨 수가 있었다. (노컷조선왕조실록,청사)
누가 그런다 프랑스는 반민족 처벌했는데 우린 못했다고 그들은 3~4년 동안 우리는
50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는데 상황이 같은가 앞이 안보이는 상황인데 같은가 해방후
빨치산들이(권오석) 남한을 전복하려고 총파업,도로,철도 운행중단시키는데 이걸 막으려면
남로당같은 공산당을 색출할 능력이 있는 집단은 친일경찰뿐인데(한국보수세력연구) 상황이 같은가 우리의 근대문물은 거의 100%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쳐 들어왔다.(돈가스의 탄생) 교육,문화,법률,의료,과학 혈액형별성격테스트도 한국과 일본뿐이다.(헌혈,사랑을 만나다)
김구선생님꼐서 해방후 말씀하신다.
마지막까지 내곁을 지킨 사람은 넷뿐이었다고.....
지금은 보는 사람마다 자기가 거기에 속한단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회장이었고 갖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지만
노후생활의 안락함을 위해 변절한다.(한국분,한국인,한국놈)
유신반대 독재반대를 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은 노후생활의 안락함을 위해 KTX승무원을
등친후 먹튀한다.(그대들을 희망의 이름으로 기억하리라:KTX여승무원문집)
그리고 우린 어떤 범죄자에겐 감투를 어떤 범죄자에게 전자발찌를 채운다.
다시 말해 조선은 중국이라는 다국적기업의 현지인 사장체제였고 36년식민지는
일본이라는 다국적기업의 본사파견제 사장체제였다는 이야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보자 개막식때 천장철도가 잠시 나온다. 이건 티벳에 대한 식민지배
말뚝박기인데 우린 그런가보다한다.(중국의 거대한 기차)
폐막식때 보자 동해를 일본해라 표기하고 있다.
중국이 일본에 감정이 더 많을까 한국에 감정이 더 많을까
이건 이이제이,원외근공의 오랑캐토벌 수법이다.
한족은 강대국 요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멀리 있는 오랑캐인 금나라를 이용해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여진이 세운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후일 원나라를 세운
몽골을 이용해 금나라를 멸망시킨다.
멀리 있는 오랑캐를 시켜 가까이 있는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원외근공전략 폐막식때
일본해가 바로 그래서 나온 것이다.
지금 양국에게 가장 급한건 서로때리기 서로방어하기가 아니라 전권을 위임받은 양국의
대표학자 몇몇이 모여 양국국민이 인정할 수 있는 동해,일본해의 새로운 대안명칭을 찾는 것이다.
지금 양국은 명칭문제로 막대한 국력을 외교전으로 소모하고 있고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중국은 어부지리한다.
몽고,거란,여진,한국,일본,오끼나와까지 모두 알타이어족인 흉노유목민의 후손들이다.
(대쥬신을 찾아서1,2,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성서의 뿌리 p63,254)
오랑캐끼리 싸움붙이는 중국의 이이제이전법에 이젠 그만 놀아나자 가장 좋은예가 임진왜란이다.(풍수화/김용운)
중국은 지금 칭기즈칸과 을지문덕을 중국인이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동북공정 고구려사)
만주와 요동이 한국땅이란걸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우리는 중국을 어버이로
섬겨야한다는 소중화주의를 자신들의 6년간의 치부를 위해 자손들에게 심어주고
우리는 오랑캐가 아니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몇몇 동이족 반역자들의 논리에
이제는 그만 놀아나자
성폭력범이 5~10분의 쾌락을 위해 한 사람의 일생을 망친것과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가
6년간의 왕노릇을 해보는 쾌락을 만끽하기 위해 나라를 500년간 중국의 식민지배체제로
만든 역사의 과오에서 이제는 벗어나야한다.
여기 한양의 풍수설계자이며 이성계의 오른팔인 정도전의 용비어천가가 있습니다.
시간나시면 단양 도담삼봉에 한 번 가보세요 Re-born 8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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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자부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일본사에 관한 책은 보이는대로 다 사 읽었다.
지적을 하고 싶은데 지적할게 없다 외교관이라서라기보단 성격이 워낙 꼼꼼하고
조사를 철저히 한 티가 곳곳에 있다 잘썻다.
어느 페이지가 이렇고 어느 페이지는 느낌이 이렇다 말하고 싶지만 뱀몸통에
다리 붙이는 것 같아 별다섯개 주는걸로 감상평을 대신하고 싶다.
일기전 리뷰 읽은 리뷰 (이 리뷰) 읽고나서 리뷰 세 개로 나누어 리뷰를 단다.
간만에 읽는 좋은 일본문화사책이다 아주 잘써주셨다.
'일본의 상도' 이후 처음이다.
뒤에 돈가스의 탄생도 아주 훌륭한 책이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한국의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조선시대엔 조상들이 만든 복식부기,한글,인쇄술등 어느
것 하나 중시하지 않았다 일본은 장인을 우대해 임진왜란때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쇄환사가 데리러 가려해도 도공들은 이를 외면한채 도자기만 굽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번영의 길 일본의 상도 --- 두 권만 추천드립니다.
한국이 일본과 하나의 핏줄이라는 사실
대쥬신을 찾아서1,2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
추가로 국운풍수 (여기도 상수도시설이 나옵니다) 성서의 뿌리254 헌혈,사랑을 만나다 거란,잊혀진 유목제국이야기
제목 :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고
한일어는 의태어 의성어가 발달했다.
슬슬 소로소로, 터벅터벅 토빠토빠, 깔깔 가라가라, 벌벌 부루부루, 줄줄 주로주로,
술술 스라스라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역사상식이 많다 일부만 보자 율곡의
10만양병설과 원효의 해골물 삼천궁녀 모두 후대에 지어낸 허구이며 여몽의
왕실 통혼도 고려에서 먼저 요청했다.
60년이상 이어온 썪은 무신독재의 척결과 외교적 현안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다 조선말
세도정치 60년이 곪아 터진것과 같다고 보면 얼추 맞다. 군사정권에 목을건 삼별초도
어찌보면 조선말 사대주의자들의 시각에서 해석된건 아닐까.
조선이 금과옥조로 여긴 삼강오륜도 근본은 그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몽골의 노재지학이
그 뿌리다.
일본은 천황을 상징으로 남겨둔 채 중앙집권기인 에도시대 전까지 막부로 대표되는
지방군벌간의 천년 가까운 싸움으로 지방자치의 틀을 다지다 중앙지배로 하나 된 나라로
역량을 집적해 우리의 세종시대라 할 수 있는 메이지시대에 일본인이란 인식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등장한 가스라 고고로, 후쿠자와 유키치, 도고 헤이하찌로, 무쓰 무네미스와 같은
근대사의 선각자들의 등장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져 막부로 다져진 지방자치와 에도시대의
중앙지배가 조화된 가운데 메이지시대를 거치며 현대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나라가 된다
. 이 복받은 역사를 가진 나라는 근원이 어디일까 최근 250만에서 1000만으로 늘어난
만주족의 정체성의 근원도 같이 느껴보자.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일본인 구다라(백제),만주족(고구려),한국(신라)는 같은 언어
같은 핏줄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란 증거를 제시하고자 구체적이고 긴 글을 올렸다.
만일 누군가 제 이론을 반박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저와 같이 구체적인 자료로 반박해주시길
바라며 그냥 감정에 복받치는 소리치는 글로 반박하신다면 정신은 사라지고 단지
시정잡배들의 싸움으로 변질된 뿐입니다.
2002년 우에다 마사아카(일본의 저명한 원로사학자)교수는 신찬성씨록 좌경황별조
대원진인은 비다쓰천황의 손인 백제왕의 후손이란 대목에 대해 우리 기자에게 어떠한
대답도 못한 채 우물거리다 인터뷰를 끝맺는다.
구다라나이는 가치가 없다란 뜻이다. 구다라는 백제의 국명이고 나이는 무엇이 없다 이니
원뜻은 백제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란 말이된다.
2001년 12월 23일 월드컵전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천황이 자신의 몸속에도 한국인의
피가흐른다 는 즉 백제인의 후손이란 언급했고 일본언론은 아사히신문에서만 기사화했다.
전두환대통령이 일본을 공식 방문했을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사실은 우리 조상도
한국인이라 발언’ 함.
이방자여사도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본천황가에선 숭늉을 마신다고 언급.
동경대 인류학담당 하니와라 카즈로 교수는 동료교수들과 공동으로 일본 각지의
고대 무덤의 두개골등을 통한 연구조사 결과 2300년전부터 건너온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인의 조상이란 사실을 규명하고 7세기초 백제유민이 대량으로 건너가기전
고대선주민인 조몬계와 도래계인 야요이계의 비율이 1대8.6으로 나타났다 이건
현재 일본인구 1억4천만명중 도래인의 숫자가 1억1천2백만명이 넘는다는 수치이다.
교과서에 실린 것만 보자 왕인, 한고안무, 수수보리, 아직기, 왕류귀, 오경박사, 호류지, 시
텐노지, 금당벽화 우리의 국보5호 일본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미륵보살은
한국에서만 나는 적송으로 만들어졌고 한국인이 귀히 여기는 약지를 세웠으며 왕건릉에서
나온 인물상과 같이 유희좌를 하고 있다.
8.15광복후 우리정부가 일본에 요청했던 ‘한국문화재 반환1호’가 백제관음상인데
일본사찰에 내려오는 기록에 백제에 서 건너왔다고 자세히 나오나 일본인들은 유럽에
순회전시할 때나 자국에서 전시할 때도 일본 고유의 작품이며 조선에서 안나는 녹나무로
만들었다고 떠들지만 녹나무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벚나무와 함께 건너간 수종이다.
스다하치만신사인물화상경이란 고대 청동거울은 503년 백제 25대 무녕왕이 왜나라
왕실의 친동생 게이타이천황에게 보내준 이 거울에 ‘사마’란 휘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1971년 7월 8일 무령왕릉에서 나온 매지권에 사마가 무령왕의 휘란게 밝혀졌고 거기
명문에 적힌 무령왕의 친동생인 왜왕의 쾌유를 빌며 이 청동거울을 내린다라는 게
사실로 밝혀졌다.
무녕왕은 물에서 태어났다하여 무녕왕인가 일본의 가카라섬 즉 왕이난섬이다. 무령왕의
껴묻거리중 여러 목재유물이 가카라섬에서만 자생하는 나무로 만들어졌다는게 발굴직후
일본인학자에 의해 증명되기도 했다.
다른 이야기가 많지만 칠지도가 발목을 잡아 우선 거론한다.
전통은 계승된다. 군수뇌부가 결정되면 대통령은 칼을 장군에게 하사한다. 장군이 나라의
수반에게 칼을 올리는 일은 없다. 칠지도를 누가누구에게 올렸느니 내렸느니는
중요하지 않다. 칼을 만든 사람이 칼을 받는 사람에게 하사체로 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이 칼을 가진 자는 어떠한 적병도 물리칠 수 있다’란 명문, 어느 미친분이 그런 칼을
아무에게나 주겠는가 믿을 수 있는 같은 핏줄 아니면 어림없는 소리다.
백강전투에 패한 직후 왜군들은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며 왜군들이 귀소처의 상실로
눈물을 흘린 사실을 일본서기는 기록하고 있다.
712년에 지은 고사기의 저자 오노 야스마로 그의 부친은 황산벌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백제장수의 아들이다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안톤 오노 그냥 우연한 일이다.
알타이의 아사달 아사달은 고조선의 수도로 아침해 뜨는 언덕이란 뜻이 담겼고
고조선의 남하한 6부족유민이 세운 신라는 아사달과 김씨의 나라 김연아 그리고
아사달이 일본으로 건너가 받침이 사라져 아사다 마오 아사히 신문 아스카문명
그냥 우연이다 로또의 6자리 숫자처럼 가야 노부나가 이에야스, 백제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아이신자오뤄 누루하치도 사실은 김씨다 노루하치의 성인 아이는
아버지 신자는 신라 오뤄는 잊지말자 해석하면 아버지의 나라 신라를 잊지말자가 된다.
고사기보다 후대인 772년에 쓰여진 상표문엔 아스카 인구중 80-90%가 백제인이라
적고 있다. 아스카땅에 호류지의 찰주를 세우던 날, 소가노 우마코(목만치의 5대손)대신과
100여명의 만조백관은 모두 백제옷을 입었고 보는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했다 기록하고 있다.
현대에도 미치다 미치루 노루가 노로 미역, 미나리, 미늘, 미숫가루, 미꾸라지 모두
미즈(일본말 물)로 통한다 미는 즉 물이다.
김춘추는 왜사신과 대화에서 통역을 쓰지 않았고 백제 여인은 왜인과 대화했다고
일본서기는 남기고 있다.
어느 신문사의 일본 속 한국이란 제목으로 일본문화답사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구르다+마(싣는 기구)=구르마란 답이 나온다.
하나의 언어가 둘로 갈라지는 것은 점진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불과 2세대안에 끝난다
어중간한 상태의 단계는 아주 짧다.
8세기중엽 만엽집과 10세기초의 고금집은 그 실린 시구가 크게 다르다.
시모노세끼 근방 해안에 도이가하마라는 야요이시대 공동묘지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인골유적이 있다. 모두 마한땅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 귀소본능이 이런 것일까.
일본인들은 백강전투의 분을 풀기위해 신공왕후를 통해 신라정벌이란 글로써 복수했고
조선은 임진왜란의 분을 풀기 위해 우리가 임난후 통신사로 보낸 사명당을 통해 글로써
복수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두나라 사이에 대한해협이 끼어 있어서 조선동란(삼국전쟁등)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일본은 보다 일본적으로 바뀌어갔다.
신라는 백제의 문화를 망가뜨리고 장인과 유물을 많이 가져갔으며 남은 백제의 명맥을
섬에서 나오지 못하게해 결국엔 나라로 만들어버렸다.
일본은 조선의 문화재를 망가뜨리고 장인과 유물을 잡아갔으며 조선이 반도국에서
주저앉도록 반도사관을 심고 우리의 옛강토인 간도를 빼앗아버렸다.
신라는 백제의 역사를 축소왜곡말살했으며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축소왜곡말살했다.
역사에서 일방적으로 주는건 없다 뿌린대로 거둘뿐이다.
고대 백제와 일본은 누가누구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안에 경기도지사
강원도지사가 있듯 그냥 하나의 나라였을 뿐이다.
백제의 아비지는 황룡사탑을 조선의 심수관, 이삼평은 사쓰마 야끼를 선사했다.
삼국사기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동성왕과 무녕왕이 각기 일본에서 귀국해 백제왕으로
등극했다는 기사가 있다 또 일제대에도 조선총독으로 재직하다 일본수상으로
옮긴 경우도 있다. 생소해서 안믿기는가 중국사료엔 구려의 추를 유인해 죽였다고 했고
삼국사기엔 추(주몽)의 밑에 장수가 잡힌 것이라 다르게 적고 있다.
삼국사기엔 백제 26대 성왕이 관산성전투에서 신라 말을 관리하던 하급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적고 있지만 일본서기 왜로 건너와 긴메이천황이 되었다 적고있다.
누가 그랬다 재료를 살 때 바가지를 안쓰려면 재료상 세 군데 들러서 값을 알아보라고...
중국측 자료엔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에 흐르던 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었지만
중국에선 해석하길 선조들이 실수로 적은것이라 말하고 있다. 어떤것이 진짜일까
왜국도 잃어버린 강토와의 연을 끊고 새롭게 나가야 자기들의 살길임을 알았을까
천무천황은 고대 영토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없앨것을 명하고 한일 양국은 동종이라는
책들이 불태워진다 간무왕은 나라땅 선주민 세력등으로부터 질시와 견제를 받아 왕도를
두 번씩이나 옮길 정도로 애를 먹었고 간무시절 분서사건에 대해 14세기 일본의 거물
정치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도 옛날 일본은 삼한과 동종이었느니라고 하는 책이 있어서
그 책을 간무 연대에 불태워 버렸다고 신황정통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교류가 없으면 언어도 이질화되고 결국엔 2개국어가 된다. 몽고어와 한국어는 유사점이
매우 많지만 현재 지리상의 장애물도 많다 한국어 만주어 일본어는 오랜 기간 떨어져
있어도 생각해봐야할 언어다 북한어와 남한어는 분리가 시작되는 단계의 언어다.
만주어, 고대한국어, 일본어는 모두 받침이 없는 개음절이지만 현대한국어만 받침이
있는것도 한번 생각해보자. 또 현대한국어도 조사가 붙으면 개음절이 된다.
조선 일본 몽고 거란 고려 부여 여진 신라 모두 국호가 해를 상징하며 유목민은 해를
숭상했다는 점이다. 유목민은 살찐 양과 큰 뿔 가진 순록을 귀하게 여겼는데 고려란
글자를 풀이해보면 그게 나온다 신라의 금관이 사슴뿔과 자작나무를 상징하듯
생태학적으로도 시조는 같으나 오랜 기간 떨어져 있으면 별종처럼 보이는 종이 참 많다.
고구려 사람들은 668년 이후 당으로 일부는 신라로 편입되고 일부는 돌궐방향으로 서진한다.
일제시대 우리는 만주로 연해주로 일본 구라파로 중앙아시아로 흩어졌고 결국 우린
한반도에 남아 있지만 고구려는 민족 전체가 그 땅에서 사라졌나보다.
일본이 도시락 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국물에 건더기가 없어서다 그네들은 수저가
있을 필요가 없다 단 한 사람 천황만은 한국사람처럼 수저를 쓴다. 고구려벽화엔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이 많다. 우리도 왕비가 주름치마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명왕이 큰 강을 만나 거북에 올라타 쭉 갔고 일본초대 천황인 진무도 동정하다
바다를 만나 거북의 등에 올라타 쭉갔다. 거북을 신성시하는 것까지 공통이다
거북 참 오래도산다.
고대 우리 역사의 흔적은 고베를 비롯한 세토나이카이(내해)를 따라 지명,유적,유물이
수없이 많이 남아있다.
고려의 지배층에 편입된 신라인들은 그들이 백제와 고구려를 완전히 없앴다고 해야
조상의 위신이 서지 않았을까 만일 고구려와 백제의 후예들이 다른 곳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면 신라의 최대치적인 삼국통일을 했다는 역사가 더럽혀질게 뻔하다
고려에 궂이 ‘구’자를 집어 넣어 고구려로 만든 건 어쩌면 거란,여진이 고구려를
대신하고 남부의 일본이 백제의 명맥을 이어가는데 자기들이 섬기는 나라 고려가
그 위에 고려인들이 세운나라와 더불어 열도백제까지 같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위신이
무어가될까 그래서 우리의 역사서엔 통일신라를 강조했고 한반도 남북부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일까 그래서 소송녕과 서희가 옛고구려를 들먹인 것일까.
거북선이 철갑선으로 둔갑한 이유도 붓으로 싸운 조선군을 칼을 가지고도 못이겼으니
무언가 그럴듯한 패전에 대한 변명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1995년 8월 동몽골 다리강가에서 고구려식무덤과 성곽을 손보기교수가 발굴했다
7세기흉노는 10만가구를 남겨두고 서진해 질지(아프가니스탄)를 거쳐 훈족,
헝가리로 이주한다.
7세기말 동몽골에서 발원한 종족이 몽고인의 실질적인 조상이된다. 그리고 고구려가
역사에서 사라진건 668년이다.
한국사학계에선 식민사학의 원흉으로 시라토리 구라키치를 지목한다.
헌대 그는 1933년 발해에 관한 논문에서 지배층은 고구려인 주민은 말갈인이라
발표했고 현재 우리사학계는 그 논문을 신앙으로 여기고 있다. 말갈이란 말은 5세기
부터 사용된 고구려인의 별칭이란게 이미 정설이 된지 오래다.
우리아기 사진첩에 우리아기보다 다른 아기사진이 더 많이 실려 있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우리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처럼 일본엔 일본서기와 고사기엔 백제의 역사가
일본역사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시대 그들은 우리의 정수리에 앉아 조선을 통치하고 물러났다.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다스린걸 기리기 위해 일본궁,일본강, 일본마을을 만들진 않았다.
교토 천황궁엔 죠메이천황을 안치하기 위해 구다라궁 북쪽에 지은 빈궁의 이름
역시 구다라대빈(백제대빈)이었다. 백제교,백제문을 비롯해 소가노 우마코(목만치의 5대손)가
호류사에서 행사할때도 귀족들이 모두 백제옷을 입었다고 일본사서들은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 군부는 한국과 관련된 지명을 수도 없이 없앴는데도 백제강,백제역
백제신사 백제마을등 너무 많은 우리고대 지명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규슈 기리시마공원에서 가장 거대한 산봉우리는 한국악이다.
일본땅을 만든 두신중 남신인 이자나기가 요미노쿠니(황천)를 탈출하여 온 곳도
히무키노쿠니 현재의 규슈 아와키하라 해변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섬 규슈는 일본 고대사가 시작하는 땅이다.
우두산이 한국엔 거창, 소양강등 여러곳에 있다 일명 소머리산 일본엔 소시모리가
고대역사의 중요한 지명으로 쓰인다.
소에 남부억양이 참가되어 시 머리는 모리로 변한다.
단군이 천부인인 거울, 북, 칼을 가졌고 천황가의 3종신기인 구리거울 ,칼 ,곡옥을 가졌다.
신들의 이사를 간나즈키라 한다. 10월에 신들이 일본을 떠난다는 말이다. 우리의 영고,
동맹은 10월에 한다. 그냥 우연이라 생각한다. 평안도말에 간나새끼가 있듯이
백강전투 후 한국과 일본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후에 각각에서 독립적으로
생긴말이 가까운 것은 그만큼 한국과 일본의 기초어와 사유방식이 비슷했음을 의미한다.
고사기에 나오는 농업신 ‘히요우케 히매가미’가 죽자 그의 몸에서 곡식이 나오는데
머리에선 소,말 눈에선 누에가 배에선 벼 귀에선 기장 코에선 콩 보지에선 보리라는
한국남부어가 등장한다. 또 우케를 훈민정음에선 찧지 않은 벼라고도 말했다.
고대 한국어에는 ㅆ이 없었고 받침도 없었지만 중국식 원음대로 한자를 읽어온 한국은
이두로 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음운범위를 확장했고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혁명적인
한글이 창제되었으며 고대의 음운변화를 그대로 유지해온 일본어는 동음이의어가
많아져 한자의 뜻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만일 백제가 백강전투에서 승리했다면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언어는 영국과 미국이
영어를 쓰는 것처럼 백제어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9세기말 영국수상 솔스베리가 남미에 대한 이권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남북미대륙의
이권 독점을 내세운 먼로주의의 파기를 요구하자 미국대통령은 의회에 영국에 대한
전쟁 선언을 요청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중남미에서의 이익이 엇갈리자 전쟁
일보직전의 험악한 관계가 되고 미국민은 영국에 대한 독립전쟁을 되새기게 된 것이다.
이때 영국 외상 밸포어의 ‘서로 같은 영어를 사용하는 국민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
한마디로 전쟁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간 한일 사이에는 거듭되는 전쟁, 침략의 역사로 얽히고 있는데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다면 지난 역사와 같은 극단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일본장군 도고가 대한해협에서 격파하고 이순신장군을 칭송하는
한마디를 한다. 그는 억세게 운이 좋으면서도 무사가 갖추어야할 덕목을 두루 갖춘 명장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우리가 나폴레옹, 링컨을 이야기하듯 민족적 동질감을 상실한듯한
느낌을 받아 하나의 민족으로 다시 합쳐지기 위해선 아직 우리가 갈 길이 많음을 느낀다.
우리가 하나되면 유물도 다 찾을 수 있다 통일이된 후 국립박물관이 평양에 있으면
어떻고 제주에 있으면 어떤가 초기엔 반발도 국가적으로 거세겠지만 대한민국의 경상도,
전라도의 현실이 나은가 신라와 백제로 나뉘어 싸우는게 나은가 밥을 들고 먹으면
우린 상놈이라 한다. 일본은 밥그릇을 내려놓고 먹으면 짐승이라 한다.
우린 산꼭대기에 올라가 쉬고 일본은 꼭대기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쉰다.
그 차이가 무슨 상관인가 서로 차이가 있는게 무슨 야만족의 척도인가 이세상엔
야만족이란 없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 못하는 외부인만 존재할 뿐이다. 우린 일제식민사관을 심각하게
여기지만 인조반정 공신들의 여진, 몽골에 대한 더러운 협잡을 우리 뇌리에 깊이
심음과 우리를 오랑캐로 생각하는 중국을 사모하는 소중화 사상의 폐해가 더 심각하다
생각한다.
충렬왕 같은 부마왕을 몽고가 만들었다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상할대로 상한
무신정권을 뒤엎고 노련한 외교를 위하여 우리가 먼저 몽고와 왕실혼을 제안한걸
우리는 반대로 알고있다. 고려는 역사서를 본기로 적고있지만 우리가 존경하는
집현전학사들은 우리역사를 중국의 지배하에 있다는 세기로 낮추어 적고있다는걸 우리는
지나치고 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황제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33배를 했다고 배웠지만 그런 일은
우리사서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조조의 100만대군이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대장금에서 중국사신이 그녀를 인정해주니 기분 좋은가 일국의 왕위계승 문제도 별볼일
없는 중국사신에게 허락을 받아야한다는 게 조선왕조는 좋았나보다 이성계가
이자춘의 아들이 아니라 이인임의 아들이라 그들의 사서에 적어놓았기에 우린 주청사를
보내고 건국후 180년 동안 굴종적인 자세를 유지했다는 걸 인조반정공신들은 애써
외면하고 오로지 사대사관만 후손들에게 심는 걸 최고의 덕으로 삼아 우리의
학창시절에도 소중화사상을 참 많이 주입받은 기억이 난다.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에 국호가 없어지지만 왜국은 669년부터 왕 또는 대왕의
호칭을 천황이라 고치고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백제의 강돌문화를 넘어 마한을 정복한 후 백제가 일본열도를 백제땅으로 끌어들인 것은
오진왕 때부터라는게 통설이다.
일본문화와 조선문화가 같은 조상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솔직하게 받아들여서, 일본문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또한 그들의 고분에서 삼국의 유물이 나왔다고 우쭐대며
식민지시절의 분풀이를 하듯 우쭐대기 보단 80년대초 잃었던 피붙이를 만나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이산가족상봉 같은 느낌을 가지라면 나의 욕심일까.
여진족은 중국각지에 만성(만주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세워 260년간 350:1이란
민족비율로도 팔기제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확립해왔다.
18세기초에 옹정제는 “앞으로 시위와 호군 및 황궁을 지키고 파수보는 모든 인원은
만주어만 사용해야 한다. 한어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된다. 훈련시 병사들이 소집되어
연병장에 있을 때에도 만주어만 사용해야 한다.” 할 정도로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우리가 잘 아는 마지막 황제 푸이가 할 줄 아는 만주어는 “일리” 즉 일어서다란 만주어인
일립비의 명령형인 일리뿐이었다고한다.
뇨후루씨의 뇨후루는 만주어로 늑대를 뜻하는 뇨허이고 한어로 늑대랑이라고 쓰다가 후에
젊잖은 의미의 동음이의어인 사내랑으로 바꾸어 랑씨가 된다.
만주족의 한화의 원인은 만주족의 후손들에게 중국이라는 또 다른 고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1750년쯤에 건륭제는 신강원정을 단행하고 시버와 솔룬은 탁월한 전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나고 신강을 병합키 위해 수천명이 영구 주둔 임무를 띠고 가족과 함께 파견되어
현재까지도 4만명가량의 시버족이 남아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만주족이거나 자신들의
말이 만주어라고 알지못한 채 현재 지구상에서 만주어를 말하는 마지막 사람들로 남아있다.
누루하치가 칼카몽골에게 보낸 서신에서 “중국과 조선 두 나라는 오직 언어만 다르다.
그들은 입는 옷도 같고 생활방식도 같다. 몽골과 여진 두 나라는 오직 언어만 다르다
우리는 입는 옷과 우리의 생활양식도 같다.” 또 흑룡강일대 시보, 솔론, 다우르,
부트족은 지리, 언어, 생활양식 면에서 여진과 몽골의 중간단계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대한해협이 있어 한일어는 중간지대가 없다.
그래서 두 개의 언어로 착각하게 된 건 아닌지
건륭제는 서몽골인 준가르제국을 정복할 때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도시를 점령하면 그곳의
주민을 모두 죽이는 작전을 구사해 서몽골의 준가르제국을 점령한 후 서몽골에 남아 있는
몽고족은 전쟁전의 10분의 1로 줄어들어있었다.
현대에도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마오쩌뚱이 국토정화 명목으로 내몽골의 원주민
수십만명을 죽이거나 몽고로 쫓아 보냈으며 대만의 20%의 소수민족을 구성하는
중국인 정권의 수장인 장개석도 2만명의 대만원주민을 학살했지만 이들의 행각은
건륭제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고 건륭제는 알타이유목민이 정체성을 상실했을 때 같은
민족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는 역사상식이 많다 일부만 보자 율곡의 10만양병설과 원효의
해골물은 모두 후대에 지어낸 허구이며 여몽의 왕실 통혼도 고려에서 먼저 요청했다
60년이상 이어온 군사독재의 척결과 외교적 현안들을 타파하기 위하여 조선말
세도정치 60년이 곪아 터진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무신정권은 개성을 지키기 위해
모집된 정예군을 왜 자기집 대문앞에 배치하는가 군사정권에 목을건 삼별초도
어찌보면 조선말 사대주의자들의 시각에서 해석된 건 아닐까.
조선이 금과옥조로 여긴 삼강오륜도 근본은 그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몽골의 노재지학이 그
뿌리다.
대륙을 넘어 정복활동을 한 몽고와 후금은 대양과 대해에서 무수한 수전을 경험한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지만 고려는 정책상 하위에 있었기에 강화도를 안건넌거 뿐이다.
금태조 아골타와 후금의 누루하치는 모두 아이신자오뤄란 성을 가지고 있다.
아이는 아버지 신자는 신라 오뤄는 잊지말자 즉 아버지의 나라 신라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두 사람도 모두 경주 김씨를 쓰고 있다.
금나라는 고려를 아버지의 나라라 보듬어 안았고 후금은 조선의 계속된 호전적 태도에도
국채를 유지시켜 준다.
현재까지도 청대 만주족 팔기의 후손들은 과거의 만성이었던 여러 도시에 거주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렵게 지켜나가고 있다.
이제 고구려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말조차 잊은채 250만으로 줄어들어 중국에 흩어져 있다.
중국이란 나라가 만들어진 후 그들의 국시는 한결같이 주변 민족을 거란처럼 흡수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인조반정 공신들과, 이성계가 신앙처럼 여기는 새끼중국인 사상인
소중화사상을 언제까지 중국의 전통인 장자세습, 과부의 재가금지, 남존여비, 시집살이 ,
항렬(돌림자)를 가보로 간직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정체성을 점점 인식하고 있는
남아있는 주변의 형제들과 다시 한 집에 살 것인가.
문화적 특징인 언어가 사람들을 결합시킨다면 구성원이 모국어를 포기할 때 그 집단은
해체된다.
제목 : 미즈노교수와 종로피맛골이야기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생글생글 잘 웃던 미즈노교수가 방송에 잘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여서 토론하던 곳에서 미즈노교수는 "저희 일본에서는 자식이
사업자금이 부족해 시골 부모님에게 가서 가만히 있으면 말을 안해도 부모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또 연인들끼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해도 다 압니다."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말에 주변사람들은 "에! 그게 뭐야 말을 해야지" 하며 어이없어 했다.
이야기가 좀 다를진 몰라도 야만이란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말로 자신의 문화가
다른 문명보다 우수함을 말하기위해 만든 말이다.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적 시각으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적인 예가 '야만'이라는 단어다.
12세기 한국과 일본에는 모두 무신정권이 같은 시기에 등장한다.
청기백기게임의 원형도 알고보면 운동회때의 청백전이 아니라
백강전투후 400년동안 일본에 존재했던 시대가 헤이안시대고 그 이후가 700년간의
무신시대다.
수도를 두 번씩이나 옮긴 간무천황이 794년에 헤이안쿄(현재 천왕이 사는 도시 교토)를 도읍으로 정착시킨후 1185년에 이르러서야
미나모토가문이 다카모리왕의 손자 다이라씨와 전장에서 맞붙었을때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한쪽은 등에
홍기를 꼽고 한쪽은 등에 백기를 꽂은데서 청백전이 유래한다.
이로인해 다이라씨가 궤멸하고 군사,경찰,행정권이 미야모토가문의 수장 요리토모에게
넘어간다.
이때 시작된 또 하나의 풍습이 있는데 무신정권의 호화로운 요리인 가이셰키요리와
승려들의 공양음식인 쇼진요리가 합해져서 현재의 일식요리의 원형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런 전통이 1868년 메이지천황의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700년 동안 무신들이 전국에서
난립해 싸우는 전국시대가 계속된다.
우리나라에 군청단위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현단위의 땅에 지배자인 영주가 있어 그곳의
무사집단과 농민집단이 영주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경쟁하는 시대를 그들은
700년이나 지속시킨다.
만일 거기속한 사람이 자신의 불만이나 억압에 대한 표출을 하게되면 그곳 집단에 해를
끼쳐 단결에 해가된다하여 자신의 욕구불만을 자신의 내부로 내면화하는 문화가 뿌리를
내려 지금도 일본에선 제일 심한 욕이 우리가 잘아는 '빠가야로'라는 바보란 말이 제일 심한
욕이라 알고있다.
어느 기자가 그런다 한국과 일본의 고소고발 사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이건 단순비교가 아니라 원인을 역사적 유래를 놓고 비교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라마다의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건 무리가 따를 때도 있다.
그럼 한국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보'는 욕도 아니다 그냥 애칭 정도일까
조선은 500년동안 양반중심의 중앙집권제가 뿌리를 내린다.
서민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멸시와 천대를 뒤에서 욕으로 푸는걸로 해소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욕으로 푸는 문화를 발달시키게
되었고 일본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내면화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사대부의 발원지를 보자.
진,송시대이후 사대부라는 명칭이 직업은 비록 달랐지만 농,공,상과 같이 섞여 살았다가
후대에와서 사대부는 곧 문벌이 높은 집안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들이 사는 곳은
농,공,상과 완전히 구별되도록 서로 섞여 거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압구정도 중국 송나라의 정승 '한충헌'이 황제를 새로 세운 공을 이룬뒤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은후 벼슬을 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논다는 겸손의 뜻이 원형이다.
그 압구정이 조선으로 넘어와 '계유정난'을 기획한 한명회가 갈매기압으로 부르던 정자를
지은후 그곳의 뜻이 서민들에 의해 누를압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발원지를 알면 재미나는 것들이 많다.
한강의 발원지도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 황지의 창죽동의 검룡소를 발원지로 보기도한다.
여기는 귀한 곳이기에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럼 지금 한국은 발원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문화유산은 또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안압지,불국사,석굴암,첨성대,무령왕릉,고인돌,장군총등 거의 다인 문화유산은 모두 귀족이나
왕족들을 위한 유산이다.
그럼 우린 이런 문화유산을 정말 잘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약간이라도 불편하거나 보기 싫으면 싹쓸어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종로의 피맛골,중앙청,명성황후생가 담장의 일부,북촌을 밀어버리고 빌라단지를 만들자는
사람들,창덕궁의 아기자기한 산책로를 시원스럽게 밀어버린 사람들,천재시인 백석과
길상사 자야여사가 사랑을 나누던 집,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조선시대 세운 단성사가
헐릴때 우리 영화인들은 돈세는 일만했다.
돈에 미친한국영화인들,올림픽 메인스타디움과 국회의사당을 지은 건축가 김수근씨의
집도 싹 밀어버리거나 밀려고했다.
이제껏 나온 문화유산중 95%인 서민들의 유일한 유산 한국에 욕이 왜 많은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가 바로 종로의 '피맛골'이다.
종로통 대로변 정승판서행차의'말을 피하다'에서 유래된 피맛골은 종로통의 뒷골목이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은 한국이 지닌 약점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세월이 지나면 무엇이든 잊혀지는 법이지만 역사의 현장은 고이 보존되고 간직되어 다시
후손들에게 전해져야하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전통과 낙후를 구분못하는 혼돈에 빠져 있지않은지...
가난의 잔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구시대적 발상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하고 있는 것일까 1392년 조선은 개국했고 그 시절 숭례문을 만들게된다.
숭례문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있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우를 범하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69세 노인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그 노인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감옥으로 향했다.
종로의 피맛골은 1392년 조선의 개국시절 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기게된다.
피맛골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존재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자랑하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으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국민들은 무관심하거나 부순사람을 지지한다.
옛날 것을 없애는 것은 한국의 약점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몇몇 정치인의 생각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를 통째로 바꾸려는 발상 이제는 좀 바꿀떄
도 되지 않았을까
외국에서는 모짜르트생가 베토벤 생가에서 외국정상들과 칵테일 파티를 한다는데
왜 우리는 이런 야만의 시대에 살아야할까
참고도서 몇권만 추려서 권한다
서울, 북촌에서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일생에 한 번은 독일을 만나라
세계는 기다리지 않는다
내사랑 백석
맨큐의 경제학 페이지230 (역사적건물의 외부효과)
구석구석 찾아낸 서울의 숨은 역사이야기
Reborn -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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