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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키 입문작으로 많이 추천하길래 읽어보았다. 백 년 전의 청춘 소설, 성장 소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잔잔하고 풋풋한 작품이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산시로가 대학에 입학하며 도쿄로 상경하게 되고, 그러면서 노노미야, 미네코, 요지로, 히로타, 요시코 등과 어울리게 되며 일어나는 도쿄 생활의 이런저런 이야기다. '배짱 없는', '길 잃은 양'과 같은 미성숙한 청춘의 한 조각을 담은 이야기. 특별히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난다기보단 잔잔하게 흘러가는 느낌이라 크게 재밌다거나 하진 않았다. 기회가 되면 다음 작품으로 도련님이나 마음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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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가 아래 쭈그려 앉아 언덕 위를 올려다보는 장면 하나로 이 소설은 기억된다. 말도 설명도 없이 거리와 높낮이만으로 모든 것을 담아낸 그 이미지가 『산시로』의 전부다. 메이지 시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방어막 없이 시대를 맨살로 받아내는 청년의 이야기지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연못가를 떠올리게 된다. 길 잃은 양은 산시로만이 아니었고, 미네코도, 어쩌면 우리도 그렇다. 연애소설도 성장소설도 아닌 묘한 자리에서 시대를 말하는 소설 — 선로가 보이지 않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더욱 깊이 읽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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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소세키의 『신시로』는 메이지 말기라는 격동의 시기를 배경으로, 변화 속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모습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주인공 아라카와는 유럽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지만, 일본 전통과 서양 문물이 혼재하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갈팡질팡한다. 소세키 특유의 문장은 간결하지만, 그 안에 아이러니와 날카로운 사회 인식이 녹아 있다. 친구들과의 대화, 연인과의 미묘한 심리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는 오늘날 청춘의 고민과도 묘하게 겹쳐진다. 당시 일본 사회가 서양화의 파고에 휩쓸리며 겪었던 문화적 혼란과, 그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독과 불안이 작품 전체에 은은하게 스며 있다. 다만, 서사보다는 인물의 내면 심리와 시대 분위기에 더 집중하기 때문에, 사건 전개를 기대한 독자에게는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소세키 문학의 핵심은 바로 이 ‘여백과 사색’에 있다는 점에서, 천천히 음미할수록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
| 취미라고 우리나라의 대하소설 위주로 읽는 독서가 어느덧 나이들어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재미위주의 東野圭吾를 걸쳐 夏目漱石까지 넘나들게 되었다. 지금까지 도련님(坊っちゃん), 한눈팔기(道草), 마음(こころ)를 읽었는데, 산시로는 마음을 읽고나서 작가에게 푹 빠져서 읽게 되었다. 읽는 내내 내자신이 소설 속에 있었고, 그 시간 속에 녹아내릴 수 있어 좋았다. 일본여행을 통해 간접 경험했던 소설배경등도 한목했다. 작가의 다음 소설은 여행과 함께 할 예정이다. |
| 210페이지. 너는 어렸을 때부터 배짱이 없어서 못쓴다. 배짱이 없는 것은 손해 막심이라 시험을 볼 때와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곤란한지 모른다. 오키쓰의 다카 씨는 공부를 아주 잘해서 지금은 중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다. 그런데 검정시험을 볼 때마다 몸이 떨려 제대로 답안을 쓸 수 없다. 그래서 딱하게도 월급이 오르지 않고 있다. |
| 가끔 일본인들이 일문학을 공부하듯 고전 한국 소설을 가르치고 있을까 생각한다. 아마 내가 어릴때 하지 않았다고 지금도 그럴꺼라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나쓰메 소세키 등을 경외하며 읽는 일본인들 묘사를 보면 100년도 전의 근대 소설을 과연 쉽게 읽을 수 있을까 싶다. 이런 저런 마음에 시작한 소세키 읽기. 산시로로 시작한다. 예전에 '마음]을 읽었었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문학을 논할 수준은 아니다. 고전임에도 계속 흥미를 놓지 않고 읽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뛰어나 소설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렇게 세련된 문장과 이야기의 흐름은 여느 일본 현대 소설과의 비교에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일본 독자들이 많은 것인지도. 슬슬 다음 책을 선택해야겠다. 여전히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같을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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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시절 배운 독서상우라는 사자성어를 제법 좋아하여 요즘도 책을 읽을때에 느끼는 고양감을 표현하기 위해 종종 사용하고는 한다. 산시로를 읽으면서는 작가 소세키 그리고 역자 송태욱이란 사람과 동시에 벗이 되는 느낌을 받았다. 100년도 더 지난 소설을 읽음에 있어 시간의 간극을 매워주는 각주가 정말 섬세했다. 궁금한 것이 생겨 인터넷에 검색하는 것도 책을 읽음에 있어서의 흐름을 방해하지만 지나치게 장황한 각주 역시 독서의 흐름을 해친다. 그런 면에서 절제되었음에도 모자람이 없는 산시로의 각주는 소세키와 우리가 벗이 되어 산시로와 그 주변 인물들 그리고 근대라는 시대를 만나는 과정에 대단히 적절한 도움이 된다. 각주 덕분에 이번 도쿄여행에 다양한 방문을 해보며 책을 읽으며 상상한 것들을 실제로 마주해볼 수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동상은 책 속 화가의 언급처럼 차라리 게이샤를 본딴 동상이였으면 보다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야쿠타가와 전시에서 마주한 아사히 츄의 작품도 더욱 즐겁게 볼 수 있었다.(극중 산시로는 아사히 츄의 유작을 보러 가지만 소설속 이름은 아사히 츄가 아니며 각주에 아사히 츄라고 명시됨) 도교대학 안에 있는 산시로 연못은 실제로 보니 정말 좋았다. 얼마전 방문한 다카마쓰 리쓰린 공원의 연못들 처럼 막대한 돈을 들여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지만 에도시절 충분한 돈을 들여 이루어낸 ‘인위성을 곁들인 심미적 자연’은 언제나 보고 있으면 공간을 향한 소유욕이 자극받는다. 책의 묘사대로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고 돌다리도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 섬 위의 모습은 책의 묘사와 제법 차이가 있었다. 잼있었던 것은 산시로 산방에서 만화판 산시로를 발견하여 살펴보니 만화판의 그림속 섬은 소설의 묘사가 아닌 현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산시로가 가만히 연못의 표면을 응시하고 있으니 커다란 나무 여러 그루가 물속에 비치고 그 밑으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그때 산시로는 전차보다, 도쿄보다, 일본보다 멀고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연못의 표면 위로 비추는 나무와 그 아래의 푸른 하늘은 보고 있으니 21세기에 태어난 나역시 아득함을 느꼈다. 20세기의 산시로 그리고 지금의 나 어느쪽의 아득함이 클지 고민하며 아득함의 까닭을 찾으려 고민했지만 시대를 구분점으로 크고 작음을 비교할 만큼 쉽사리 단순해지지는 않았다. 또 연못의 나무 너머로 보이는 건물에 관한 노노미야의 호평을 듣고 나서는 마치 자신도 처음부터 그 건물이 건축적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는 산시로가 비평을 읽을 때의 내 모습과 무척 닮은 것이 부끄럽기도 잼있기도 하여 무척이나 기억에 남아 해당 건물이 무엇일까 역시 고민해 봤지만 100년이 넘은 건물따위 허물어졌을 것 같아 금새 그만두었다. 연못의 형상은 마음 심자를 본따서 만들었다는 책에는 묘사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무척이나 즐거웠다. 다시 역자님으로 돌아와 산시로를 읽기전 히로시마에 여행갔을때는 어느 바에서 바텐더와 대화하는 것이 너무 즐거워 7시간이 넘도록 바에서 술을 마셨다. 문학이야기도 했는데 나는 소세키 이야기를 주로 했다. 그러다가 내가 책을 한 권 추천해달라고 부탁드리니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라는 책을 종이에 적어주셨다. 나는 바로 예스24에 책의 이름을 검색하고 번역되어 있다고 했다. 게다가 요즘 빠져 있는 소세키의 전집을 번역하신 역자님이고 이분의 번역작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산시로를 읽기전에도 여러모로 감사했지만 산시로를 읽을 때에는 보다더 감사했다. 어디선가 영화 데드풀을 번역한 담당자가 데드풀의 네이버 베스트 댓글이 역자에 관한 칭찬인 것을 보고 무척이나 기쁜마음이 되었다는 영상을 본적이 있다. 이책의 역자 송태욱님도 어쩌다 이 글을 보고 하루에 행복을 더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굳이굳이 적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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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소설을 읽으며 지금 시대에도 통용이 되는 생각, 문화 등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사상이나 삶의 태도라면, 향후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할 것들이 아닐까. 1. '산시로에게는 세 세계가 생겼다. 모든 것이 평온한 대신 모든 것이 잠에 취해 있다. 돌아가려고만 하면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중략)... 두 번째 세계는 이끼 낀 벽돌 건물이 있다.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높이 쌓여 있는 책이 있다....(중략)... 세 번째 세계는 봄처럼 찬연히 흔들리고 있다. 환성이 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중 으뜸가는 것으로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 : 이 문장을 읽으며 대학 생활이 떠올랐다. 두고 온 고향, 대학 공부의 시작 그리고 모든 것이 재밌고 흥미로웠던 대학생활, 사람들과의 만남. 생각해 보니 비단 대학생활뿐만 아니라 직업을 가지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게 될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자라온 고향과는 동떨어진, 빠르게 변화하고 늘 새로운 자극을 주는 이 세계. 그렇지만 나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그것들과 거리를 두고 읽고 공부하고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는 것. 주인공은 공부는 공부대로 꾸준히 하면서 아름다운 여성을 어머니가 계신 촌으로 데려가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 세계를 단순 통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깨닫는다. 단순히 세 세계를 더하는 것은 나의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내가 그러한 상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직 철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새로운 스테이지로 넘어가려는 사람은 내가 가지고 있던 것, 내 삶의 일부분을 놓아주고 가야 한다는 것을. 2. '"제가 그렇게 건방져 보이나요?" 이 말로 안개가 걷혔다. 명료한 여자가 나타났다. 안개가 걷힌 것이 원망스럽다.' : 미네코는 신여성이다. 자신보다 떨어져 보이는 사람과의 연애는 꿈꾸지 않는다. 집안이 정해주는 결혼 같은 것도 상관 안 할 듯싶다. 산시로는 처음 미네코를 봤을 때 다른 사람을 개의치 않는 그녀의 당당함과 당돌함에 크게 반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태도가 개성이나 매력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데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환상이 깨졌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 가진 환상은 ‘환상’ 일뿐이다. 세상에는 그렇게 특출 난 사람도 모자란 사람도 드물다는 것. 싹수없음은 독특한 매력이 아니라 상대방을 무시하는 건방진 태도라는 것. 3. '"뒤집어질 정도로 웃었다느니 하는 놈들 중에 실제로 웃었던 놈은 하나도 없어. 내가 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는 것도 말이야, 실제 목적은 의식주에 있으니까....(중략)...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만큼 솔직한 것은 없고, 솔직한 것만큼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도 없으니까 모든 일에 솔직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까다로운 교육을 받은 자는 모두 비위에 거슬리는 거지."' : 히로타 선생이 볼 때 현실 세계는 위선자 천지다. 다들 목적은 다른 곳에 있으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럴듯한 말들을 꾸며낸다. 히로타 선생 본인도 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지만 학생을 위하는 것보다는 그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학교 근무의 주목적이다. 위선자 천지인 이 세계에서는 행위자체가 목적인, '솔직함'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솔직함이라는 아름다움은 위선자들에 의해 '어리석음'이나 어린 사고로 비하받는다. 위선자들이 아우성치는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솔직함을 잘 지켜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4. '"어느 모로 보나 상대에게는 위선으로밖에 보이지 않도록 대하는 거지. 물론 상대는 불쾌한 느낌이 들겠지. 그것으로 본인의 목적은 달성되는 거네. 위선을 위선 그대로 상대에게 통용시키려는 솔직한 점이 어디까지나 선임에 틀림없으니까. 이 방법은 교묘하게 이용하는 자가 근래에 꽤 늘어나는 것 같네."' : 그런데 이 솔직함이라는 것을 무기로 삼아 남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건방진 태도, 예의 없는 행동, 싹수없음을 솔직함이라는 낱말로 포장하여 남에게 상처를 주고 아무렇지 않게 지낸다. 이것 또한 이 시대의 문제아들이다. 솔직함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때에만 그 순수함이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가 그렇게 힘든 것일까. 이 책이 100년 전에 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나 어느 시대에서나 무식한 것을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자들이 넘친다는 것을 느꼈다. |
| 연애소설로 읽을 때, 『산시로」는 어딘지 어색하다. 결말에 이르러 미네코는 노노미야도, 산시로도 아닌 제3의 남자와 결혼하는 데,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다시피 이는 앞에서 나온 미네코의 신여성 적인 면모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숲 속의 여인>이라 는 제목이 좋지 않다면, 뭐라고 부르면 좋겠느냐는 요지로의 질문에 산시로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입속으로 '스트레이 십, 스트 레이 십'이라고 되풀이하는 소설의 결말 부분은 꽤 인상적이다. 이 장 면을 읽으면 숲 속의 여인'으로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던 미네코가 이제는 산시로에게 같은 눈높이로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산시로가 미네코의 위치까지 올라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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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 정말, 너무 좋아하는 ,,그 후,,의 프롤로그 격 되는 산시로… 내가 그 후를 얼마나 좋아하냐면 그 후 처음 읽고 잔잔한 감동이 오랫동안 사라지지를 않아서 다른 책을 읽고 혹시 나쓰메 소세키에게 실망하거나 그를 싫어하게 될까 봐 다른 소설을 읽지를 못했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를 존경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 후를 오마주했다는 노르웨이의 숲 증오함. 어디를 어떻게 오마주했는지도 알아서 진짜 증오함 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