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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은 1970-80년대 상아탑속에서 바둥거렸던 세대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과 더불어 대학 새내기들이 필히 의무적으로 읽어야할 책으로 대학의 교양과목 이상의 덕목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만큼 이들 책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당시 외부세계와 차단된 지성인들의 갈증을 단숨에 해소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그리고 저자인 리영희의 진실과 혼이 담겨져 있었기에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책장을 넘기면 잔잔한 감동으로 와닿는 것이다.
사상의 은사라는 호칭보다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대명사로 더 알려진 리영희는 언론의 기능이 무엇이며 이에 종사하는 언론인은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에 대해서 명백한 길을 제시했다. 이러한 길을 그저 글이나 이념의 설파등으로 제시했다면 그를 감히 사상의 은사라 칭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리영희 자신은 언행의 일치를 손수 보여주었고 그 선택에 대해 일말의 후회를 가져본 적 없는 행동으로 움직이는 지성 그 자체였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질곡의 현대사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의 전향과 배신 그리고 독단을 목격해 왔기 때문에 유독 한길만을 고수한 그에게서 진정한 은사의 향을 맡을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주저없이 "선생"이라는 호칭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묘한 시간의 조화라고 해야 할지 의도된 기획이라고 해야할지 몰라도 <리영희 평전>은 그가 타계하고 바로 출간됨으로써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해야겠다. 그동안 강준만교수등을 비롯해 리영희에 대한 저작들이 나왔지만 이번 책은 말그대로 평전으로 출간되었다. 한창 일제의 식민정책이 절정을 달하던 1929년 평안북도에서 출생한 그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굵직 굵직한 질곡의 세월을 같이 했다. 항상 현장에서 두눈으로 확인하고 냉철한 머리와 온화한 가슴으로 세월과 사투하면서 살아왔다가 자신이 맡은 1인분의 역활을 완수하고 간다는 변으로 세상과 이별했다. 비록 그가 남긴 물질적인 유산은 변변치 못하지만(그의 삶속에 이런말 자체가 어울릴 수 없지만) 그나마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엄청난 정신적 유산을 남겨 주었다. 그 유산은 세상과 자신을 보는 올바른 눈일 것이다.
비록 리영희라는 일개 개인의 평전이지만 그와 한국현대사를 논외로 규정하기 힘들듯이 평전이라는 형식보다는 오히려 한편의 역사 다큐처럼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일제강점기에서 부터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 이승만의 독재, 4.19혁명, 5.16군사쿠테타와 박정희라는 희대의 유신독재와 광주민중항쟁과 또다시 등장하는 군부독재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이 리영희와 연계되어 있는 점을 보게 되면 정말 개인으로서 이만큼의 시대적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왔다는 그 자체에서 겸허한 마음을 금할수 없다. 특히 이러한 격동의 시대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 바로 리영희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 그 자체이지 않을까 싶다.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를 신념으로 외롭고 고된 길을 걸어왔지만 그런 그가 이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루쉰과 백범을 삶의 지표로 삼았고 모진 차별과 투옥등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변치 않는 자신의 길을 걸었던 그이지만 정작 자신의 가정과 가족들에게 작은 사치하나 해주지 못한 미안함을 표출할땐 읽는 독자로 하여금 가슴이 메이게 한다. 왜 그렇게 살았냐 약간의 타협도 하면서 살아간다고 대수가 되겠느냐라는 자기합리화적인 말을 수 없이 되뇌어 보지만 왠지 이런 어구들은 그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을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리영희는 모진 눈보라가 치는 눈길을 걸어갈때 앞만 보고 걸어간 것이 아니였다. 자신의 뒷에 따라올 이들을 위해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비록 힘들고 고되더라도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정도와 진실을 향해서 곧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가 걸어 갔던 길을 수 많은 후학들이 따라 걷게 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고 지금도 그 길은 진행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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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를 곧추세운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리영희 선생을 빼 놓을 수 없다는데 이견이 없을 테다. 리영희 선생에 대한 신산한 삶을 차치하더라도 그 분의 인물됨이나 올곧고 강직한 성품에 대해 더 이상 다른 말을 보태기 힘들다. 선생이 남긴 족적은 현대사를 가르는 분명한 지침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민족의 스승으로서, 선각자로서, 지도자로서 선생은 묵직한 가르침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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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5일 리영희 선생은 향년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회 각계 각층에서 조문과 애도의 물결을 이루고, 지금 이 시간에도 인터넷 분향소에서는 그를 기리는 많은 이들이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 생활을 했던, 그동안 특별히 어떤 커다란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거나 한 경험이 없는 나 역시도 시대를 대표하는 별 하나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에 한없는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낀다.
사상의 은사 새대의 선구자 60년대 70년대 80년대 대표적 지성 아 이 한반도의 살아 있는 정신 불 얼음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이상은 시인 고은이 리영희 선생 화갑 기념문집에 쓴 그에 대한 수식어다.
평전을 받아 손에 쥐고는 쉴 새 없이 읽어 나갔다. 재작년 임헌영 선생과의 자서전격 대담집인 <대화>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평전이나 자서전이나 모두 한 인간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기에 기존 <대화>와 중복되는 내용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지루함이나 식상함을 느낄 만한 틈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나를 이끈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국토의 변방인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나 일제 군국주의 교육을 받으며 해방과 더불어 월남하여 등록금이 없는 국립해양대학에 들어가 졸업하고,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지원입대하여 7년간 통역장교로 복무했으며, 이어서 언론사 외신기자로 시작된 언론활동과 한양대학교 교수 생활은 계속된 강제퇴직과 투옥으로 점철되었고, 그런 속에서도 지성과 이성으로 무장한 예리한 필봉을 멈추지 않았으며, 한국 사회에 깊숙이 똬리를 튼 우상들을 격파하는 전사의 역할을 행한 선생의 일생은 그 누가 읽는다 하더라도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20세기 한국 사회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인물에 선정된 리영희 선생님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실천하는 지성, 인식과 실천이 일치하는 인간'이라 거침없이 말하고 싶다.
어떠한 훌륭한 인물이나, 경외로운 대상을 두고 우리가 존경해 마지 않는 커다란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남들이 하지 못하는, 혹은 충분히 물질적 유혹이나 입신양명, 개인적 안위를 취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흔쾌히 불편함을 감수하는 그러한 정신과 행동에 기인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리영희 선생 역시 7년간의 통역장교 생활을 통해 남들과 같이 미군을 등에 업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기자 생활을 통해 특종을 거머 쥘 즈음에도 남들과 같이 권력에 빌붙어 개인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것도 충분히... 그러나, 선생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시대가 요구하는 냉철한 이성과 국제사회의 거시적 흐름을 꿰뚫어 사회에 고언을 내뱉고야 만다. 오직 진실을 추구하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그의 정신은 영락없는 기자의 그것이다. 때문에, 그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3대 군사정권으로 부터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탄압과 옥고를 치를 수 밖에 없었고, 이는 그대로 가정의 경제적 궁핍함과 연결되기도 했으나, 끝끝내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날카로운 펜을 놓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 끝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을 무릅써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 서문중에서..)
나는 그의 유명한 전작들을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생을 이야기하는 두 권의 책 <대화>와 <리영희 평전>을 통해 한 지식인의 삶과 그의 정신세계,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실천적 삶을 느낄 수 있다. 선생은 결코 편협하지 않았다. 그리고 양심이 향하는 대로 그대로 실천하는 생을 살았다. 양심이 향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매일 매일 뼈절이게 느끼며 생활하고 있는 내게, 일제의 폭압과 해방정국의 혼란, 미군정의 점령, 이승만의 독재,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 파시즘 등 헤아릴 수 없는 시대적 소용돌이와 격변의 현장 속에서 그것을 지켜내기란 정말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른 말, 바른 행동 하나가 권력에 반하거나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면 가차없이 인권을 유린하던 서슬퍼런 독재정권의 한 가운데에서 말이다.
새삼, 선생의 삶이 소중하고 위대하게 여겨지는 까닭이다. 또한 책을 통해 더 각인되어 지고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베트남에 대한 우리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는 부분이다. 우리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를 향해 침 한번 뱉은 적이 없는 베트남에 우리 군대가 파병하여 수많은 살상을 행하고 아무 명분도 의미도 없는 전쟁 속에 야만적 행동을 자행한 우리는, 일본의 침략에 핏발을 세우며 목청을 높이지만, 정작 베트남에 대한 공식적 사죄는 하지 않는다는 이 이중적 태도는 과연 우리들의 양심인가? 역시 이라크 파병과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UAE 파병 또한 그 연장전 선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생의 일생은 죽는 날까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이토록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역설적으로 선생과 같은 기자, 학자, 지식인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 생각도 해본다. 물신주의에 매몰된 우리의 현재는 나 하나의 명예와 안위를 위해 진정으로 지녀야 할 각기 자신의 위치에서의 참된 가치는 2, 3순위로 밀려나 있는 것은 아닌지...비단 기자, 학자, 지식인을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까이 나와 내 주변, 바로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책을 덮으며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내게 '리영희'란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그래, 나도 안다. 내 속물적 근성이 자그마한 이해관계에 어떠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얼마나 얄팍하고 자기 중심적인 결정을 해 왔는지를...또, 앞으로는 어떠할 것인가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곱씹어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시 시궁창을 향해 몸을 던질 지언정,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적어도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비록 그것이 자위행위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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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평소에 리영희 선생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던 중에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을 읽으면서 선생에 대해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일곱 분(리영희, 손호철, 김삼웅, 이이화, 안병욱, 홍세화, 유초하)의 강연이 담겨 있었는데, 그중에서 우리의 분단과 통일에 대해 논한 선생에 글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일곱 저자 중에 한 분인 김삼웅 선생이 집필한『리영희 평전』은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작년 연말에 이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그런 인연으로 만나게 된 이 책을 읽기까지 1년이 걸렸으니 나의 무심함이 컸다고 할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떠오른 단상을 몇 가지만 적겠다. 첫째, 생각했던 이상으로 몰입하면서 읽었다. 스스로 원해서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치기를 망설였던 이유는 600여 쪽 가까이 되는 분량의 압박 때문이다. 가벼운 주제도 아닌 듯한데 분량까지 방대하니 책을 펼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완독했다. 학년말의 바쁜 일정만 아니었다면 종일이라도 읽고 싶을 만큼 책속에 빨려들었던 것이다. 김삼웅 저자의 글은 자주 대한 바 있다. 그의 저서도 서너 권 읽었고,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던 여러 인물들의 평전 시리즈도 탐독한 바 있다. 저자의 글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감명을 느끼곤 했는데, 이 책에서 어느 때보다도 더욱 공감하면서 책속에 몰입했던 것이다. 둘째, 이영희 선생의 개인사를 통해 우리 현대사의 질곡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이영희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평안북도에서 태어나서 2010년에 작고하셨다. 6.25 무렵에는 통역장교로 7년이나 복무했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의 정권은 물론 이명박 정권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마다 독재정권에 대해 올곧은 소리를 멈추지 않으셨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현대사의 전개 과정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선생의 행동은 가열찼다. 셋째, 성자와 같은 삶을 사셨던 선생의 본모습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이영희 선생을 존경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인 면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신문기자셨고, 한양대 교수였으니 어느 정도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선생은 장남을 영양실조로 잃을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셨다. 신문기자나 대학교수였다고는 해도 독재정권에 의해 해직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연금 등의 혜택도 없었으므로 작고하실 때까지도 그런 환경이 이어졌다. 현대사를 돌아보면 한때 민주화의 화신같았던 투사가 변절을 하고, 국민의 추앙을 받았던 원로가 불의한 정권과 야합하는 등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천수를 누리면서 작고하시기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던 분은 거의 없었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이영희 선생이 아닌가 싶다.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우상의 칼에 맞선 이성의 펜’이라는 선생에 대한 평가는 어느 한 시기가 아니라 평생 동안 흔들리지 않는 생애 전체에 대한 헌사였다. 글을 읽으면서 역대 정권이 왜 선생을 핍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의 치졸하고 야비한 행위에 대해 언행일치의 글을 통해 추상같은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선생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끝으로 선생에 대해 죄송하면서도 다행스러움을 느끼는 나의 비겁함을 고백한다. 죄송함을 느낀 이유는 이영희 선생의 명성은 듣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본격적인 저서를 읽기는 처음이라는 것이다. 『전환 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8억인과의 대화』등 선생의 명저들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읽지 않았다. 문학적인 취향의 나의 독서 경향과 맞지 않은 점도 있지만, 무언가 어려운 내용일 듯해서 펼치지를 않았던 것이다. 선생의 생애를 알고 난 지금에 와서야 그 책들을 읽고 싶은 마음이 치솟는다. 그러나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청춘이 다 지난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겠으며, 느낀다고 해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다행스럽다는 것은 선생의 책을 읽었다면 나의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다. 독재정권의 추악함을 알게 된 나는 선생과 같은 투사의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다면 나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차라리 모르고 지난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선생의 삶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죄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비겁함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하고 싶은가? 온 국민의 필독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꼭 읽어야 할 사람을 한 명만 추천한다면‘우리 아버지는 애국자다.’라고 공언하고 있는 어느 대통령의 딸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이 책을 읽고도 선친을 애국자라고 할 수 있냐고? 어쩌면 애국자인 것은 맞다고 강변할 지도 모른다. 히틀러나 스탈린도 나름으로는 애국자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다만 이것만은 꼭 묻고 싶다. 사과할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 한 분밖에 없었느냐? 이영희 교수님 같은 분한테는 아무렇지도 않느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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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김삼웅 지음 책보세 刊
이 책을 지은 저자나, 이 책에 모여들어 글을 섞은 인사들은 모두 한다하는 글쟁이들
리영희 교수의 필모그래피 중 '전환시대의 논리' 는 그 디테일도 모르면서 뉴스위크와
사회의 혼란과 갈등은 극우파의 온상이며, 혼란과 갈등은 좌파의 온상이기도 하다. 몰
사족이지만, 리영희와 리승만은 같은 종씨로 창씨라도 했는지 극과 극의 대칭 환경에
故 리영희 교수는 한마디로 얼음같이 차가운 이성과 지성이였다. 리영희 교수가 간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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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등의 저서로 이 땅의 수많은 지식인들의 사상의 은사가 되었던 리영희 선생이 작년 12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그 후 며칠 되지 않아 그의 평전이 나온 것을 보고, 법정스님 타계 후 나왔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의 행복>이라는 수준 이하의 책처럼 고인의 명성에 기대는 책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하지만 김삼웅의 <리영희 평전>은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수백 편의 글들을 아우르며 자료를 준비하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정리하고 평한 최초의 책으로, 결코 급조된 질낮은 책이 아니다. 사실 나는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리영희 선생의 삶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유명한 책들을 통해 약간씩 접했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현대사와 잔혹한 군사독재 시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새삼 반성하게 되었다.
리영희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소학교와 경성공립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치하에서 가난과 억압을 겪으며 암울한 시절을 보냈지만, 학교와 하숙을 오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의 명저들을 읽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후, 어려운 생활에 남대문시장에서 담배장사 등을 하며 간신히 삶을 이어 나가다가 학교의 교재를 살 돈도 없어서 서점에서 영어 교재를 훔치고 이를 오랫동안 괴로워하기도 한다. 보통 자서전이나 평전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은 슬그머니 감추기 마련인데, 그런 것도 빼지 않았다는 점에서 리영희 선생의 강직한 성품과 이 평전의 객관성을 엿볼 수 있다. 다른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생활고 때문에 학비가 전액 면제되는 국립해양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나서, 중학교 영어교사로 취직한 그는 3개월도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지고 군에 연락장교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전투에 참여 중 동생 명희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에게 이 사건은 군대에서 겪은 갖가지 부패상과 함께 그의 마음가짐에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다. '국가제도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회의하고 반문하고,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이면의 진실을 밝혀내어, 진실 이외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충성을 거부하려는 종교 같은 신념이 굳어가고 있었다고 한다.(p.115)' 이 고달픈 군인생활은 장장 7년이나 이어진다. 절대 부정이득을 취하지 않고 청렴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아버지의 회갑조차 치르지 못했다고 한다. 결혼하고 얼마 안있어 예편하게 되었지만, 합동통신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일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가 언론사에 입문할 무렵은, 이승만이 영구 집권을 위해 온갖 음모와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였다. 언론계에 그가 발을 들여놓은 것은 가히 운명이라 할 만하다. 영어와 일본어, 불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외신부로 발령을 받은 리영희는 베트남의 민족해방 투쟁과 중국공산당의 혁명전쟁,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 혁명투쟁 등의 외신 기사들을 접하며 전 인류를 투쟁으로 이끌어내는 변혁의 시대정신에 열정적으로 공감한다. 기자 생활 때도 역시 심한 궁핍을 겪으면서도 결코 기자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제는 부양해야 할 가족들까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번역 등의 부업을 항상 손에서 놓지 못했다. 정식으로 기자수업을 받은 적이 없지만 치열한 노력으로 극복해낸 그는, 이승만 정권의 포악상을 지켜보면서 국내 언론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외신을 통해 하기 위하여 워싱턴포스트에 익명의 통신원으로서 기고하기도 한다.
4.19 혁명이 터지자 리영희는 펜을 놓고 서슴없이 시위대열에 몸을 던진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또는 시민으로서 4.19 혁명의 중심에 서서 '진리에 복무' 하였다. 결국 사태는 민중의 승리로 기울어 이승만이 하야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비겁한 지식인들과 기회주의적인 언론인들을 향한 추상같은 질타를 잊지 않는다. 이는 마치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는 '비판언론'이라는 미명으로 시퍼렇게 날을 세우다가 이명박 정권 들어 다시 용비어천가 합창단으로 변신한 수구보수언론의 행태를 내다본 것같이 느껴진다. 그 후 5.16 쿠데타가 발발하자 의기 넘치는 언론인 리영희는 군부독재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언론계 역시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였지만 그는 진실을 밝히는 일이 언론의 본분이라고 굳게 믿었다. 살벌한 박정희 치하에서도 리영희는 계속하여 큰 특종들을 터뜨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박정희 정권에 유착되지 않은 조선일보 외신부로 옮긴 그는 곧 필화사건에 휘말린다.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문제를 기사로 썼다는 이유로 반공법을 적용하여 구속한 것이다. 리영희는 박정희 때 두 번, 전두환, 노태우 때 각 한번씩, 군사독재 30년 동안 네 차례의 옥고를 치렀는데, 그때가 그의 첫번째 시련이었다.
그 뒤로 베트남 파병부대 시찰 거부를 빌미삼아 조선일보에서 퇴사를 종용당하고 리영희는 외판원으로 생계를 꾸리게 된다. 그는 한국인에게 한번도 피해를 끼친 적 없는 베트남인들을 죽이기 위해 왜 한국에서 수십만의 군대를 파병해야 하는지, 그 배경에 대해 묻는다. 미국이 베트남 폭격의 배경으로 삼은 통킹만사건 역시 미국 전쟁세력이 날조한 것임이 폭로되었고, 결국 베트남에서는 외세를 등에 업은 정권세력이 자주적인 민족주의세력에 패배하게 된다. 나 역시 왜 한국이 이해관계도 없는 베트남에 수많은 병력을 파병해서 살상행위를 해야 했는지, 왜 미국이 멋대로 벌인 전쟁에 다른 나라 국민들의 피를 흘려야 했는지 항상 의문을 품고 있었다. 6개월간의 외판원 생활은 그에게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텔리가 노동자가 되는 것은 혁명가적 신념과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230)' 이 부분을 읽으며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안락한 길을 버린 채 노동자의 편에 섰던 시몬느 베이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복귀하여, 논객으로서 글을 쓰고 대사회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리영희의 삶은 잠시도 평온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논문들을 발표하고 탄탄한 논리와 예리한 투시력으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글을 쓰고 있는 동안, 국내정세는 거꾸로 회전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3선 이후, 64인 지식인 선언에 참여한 리영희는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와 함께 언론계에서 또 추방되고 만다. 그는 일련의 논문들을 1974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펴냈는데, 그 유명한 <전환시대의 논리>로 그의 첫 번째 평론집이다. 이 책은 불온서적으로 지목되어 유통과 읽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노동자와 학생들은 몰래 구해다 읽곤 했다. 그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아 현대사를 연구하게 된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폭압과 야만이 판치고 '유신귀신'과 '우상'이 우글거리는 '동굴' 앞에 서게 되었다. 그에게는 한 자루의 펜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p.257)' 리영희는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강단에 서게 된다. 그는 박사학위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평론활동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교수가 된 후에도 대학에서 강의만 하고 있지 않고, 집필과 사회참여를 계속한다. 그는 지식인이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꺼린 채 사회로부터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거은 올바른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믿었다.
독재체제가 강고해질수록 리영희의 저항도 따라서 더욱 치열해졌다. 앰네스티인터네셔널(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 결성에 참여하고, 연달아 선포된 긴급조치로 유신독재의 광기가 사납게 몰아칠 때 각계의 인사 71명이 결성한 국민회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한양대에서 파면되었다. 하지만 많은 연구와 평론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두 번째 평론집 <우상과 이성>을 펴낸다. <우상과 이성>은 <전환시대의 논리>와 더불어 수많은 지식인, 노동자, 학생들에게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의식화의 교과서가 되어 우상 타파의 강고한 전선을 형성시켰다. 그로 인해 결국 리영희는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고,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당한다. 이때 신문을 맡은 D검사와의 대화는 아주 속이 시원할 정도다. 서울법대 출신의 검사를 통쾌하게 이겨 버리는 모습에 그의 내공(!)이 느껴진다. 그가 재판을 받을 때 일본 지식인들이 '문제를 삼은 글의 내용을 학문적 검토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것'을 요청할 만큼, 박정희 정권은 '비학문적'인 이유로 지식인들을 투옥한 것이다. 그는 겨울이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감방에서 2년을 지낸다. 수감 중에 어머니의 부음 소식을 들은 그는, 감방 안에서 주어진 식사로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만기 출소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우상' 박정희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출소한 후 리영희는 4년여 만에 다시 한양대학교로 복직하여 강단에 서게 된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평소 거의 교제가 없었던 김대중과 엮이는 날조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다시 구속된다. 신군부가 5.17 쿠데타를 자행하면서 김대중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고, 그는 일종의 '제물'로서 엮여 들어간 것이다. 강제로 한양대 교수 사직서를 쓰게 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광주폭동 배후조종 주모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혀 있을 무렵 광주에서는 '20세기의 마지막 비극'인, 광주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시민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궐기한 것이다. 털어도 나오는 것이 없으니 두 달만에 그는 석방되었지만, 한양대 교수직에서 두번째로 해직되고 저술활동과 번역 등으로 생활을 꾸려가게 된다. 일제 말기의 친일군상과 일본 교과서 왜곡의 본질에 대해서도 쓰고, 한 시대를 지탱하고 지켜낸 양심적인 사람들과도 교감하며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혹독한 군부독재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서전 집필 작업 중 '북괴 찬양선동죄'라는 황당무계한 죄목으로 또 끌려가게 되지만, 아무리 검토를 해봐도 기소할 빌미가 없으니 2개월 정도 수사 끝에 기소보류로 석방했다.
1984년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에 복직한 리영희는, 크게 달라진 대학 풍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많은 글을 쓰고 책을 펴낸다. 일본의 문화침투를 경계하는 글을 쓰기도 하고,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과 베트남전에서의 미국의 부당한 역할을 비판하기도 한다. 일본 지식인들에게 초청을 받아 도쿄의 아시아문제연구소에서 공동연구와 강의를 하고, 독일의 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아내와 함께 독일을 방문하기도 한다. 다시 타오르는 민주화의 열기 속에서 1987년 6월 항쟁의 거센 불길이 타오르고, 수많은 학생, 노동자들이 투옥, 고문 등으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이는 리영희의 글을 읽고 '의식화'된 청년학도들의 힘이 컸다. 6월 항쟁으로 인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지만, 군부세력과 수구언론, 재벌기업, 관료층의 협력으로 전두환과 더불어 군부쿠데타를 주도했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국민의 실망 속에서 대안언론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고 그때 태어난 신문이 한겨레신문이다. 리영희는 한겨레의 논설고문과 이사직을 맡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쓴 연구논문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연구'로 그는 북한의 남침위기론이라는, 또 하나의 우상을 깨게 된다. 하지만 방북취재단 사건을 말미암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안기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된다. 수많은 단체가 항의 성명을 내고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이 곳곳에서 전개되고 결국 6개월만에 석방되었지만 3대 정권에서 연이어 고초를 겪는 일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정의와 진리를 추구했던 리영희와 그의 가족은 몇십 년 동안 결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독재체제가 끝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 하에서도 그는 수많은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고, 기회주의적 지식인과 언론인을 통렬히 비판한다. 결혼 40년 만인 1994년이 되어서야 온수가 나오는 집에서 살 정도로, 그는 극히 청빈한 삶을 살았다. 1997년 내 시대는 끝났다며 '퇴장선언'을 했지만, 그는 펜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수구세력의 전쟁 부추기기, 국가 부도의 경제위기 등에 시대의 이성이 절필을 선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숱한 옥고로 인하여 나빠진 건강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성은 녹슬지 않았다. 평론집 <반세기의 신화>를 펴내고 많은 집필활동을 하던 중 그는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지고야 만다. 오른손이 마비되었지만 불편한 몸으로 계속 글을 썼고, 정성스러운 아내의 간호로 건강이 점점 호전되었다. 2005년에는 대담을 통한 자서전인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랑>을 펴냈고, 많은 매체와 기관으로부터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노령의 리영희 부부에게는 앙코르와트에 가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건강 악화로 인해 그 꿈을 접게 되었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이 책의 저자가 2010년 8월 마지막으로 리영희와 인터뷰할 때도 꼭 쾌차하셔서 앙코르와트에 다녀오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결국 가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뜬 것이 가슴아플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리영희의 평생 동안 지속된 우상과의 싸움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부독재 시절 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에도, 팔순이 넘어서도 수구세력이 판을 치고 미국의 노예나 다름없어진 이명박 정권을 규탄했던 그는 한시도 정의와 진리를 잊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많은 우상들을 격파하는 전사의 역할을 평생 동안 계속한 것이다. 기회주의자와 변절자들이 득실거리는 사회에서도 끝까지 청렴한 자세로 살아온 것 역시 존경해 마지않을 점이며, 그의 저서들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결코 시효가 끝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고 이어져야 할 정신적, 학문적 자산인 것이다. 아마 지금의 대학생들은 리영희 선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책들이,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고 마침내 행동하게 하기를 나는 강하게 바라고 있다. 그는 타계하였지만, 그의 이성은 영원히 살 것이다. Veritas liberabit vos(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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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큰 별이 지다
작년 12월 초 프랑스 출장을 다녀온 후 밀린 신문을 읽던 중 가장 슬픈 기사 하나가 들어왔다. 리영희 선생의 별세였다. 믿기지가 않아 나의 스승이신 강만길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확인해봤더니 별세하셨다는 암담한 말씀만이 핸드폰을 타고 귓가에 들어왔다.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부터 저명하신 분들이 한 둘씩 세상 떠나시는 것을 보면 이번 정부는 확실히 인복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이야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이치라 할 수 있겠지만 유독 이명박 정부 때 이런 일들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기우일지도 모른다. 아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내가 이명박 정부를 증오하는 데서 오는 생각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생각의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사회의 큰 공헌을 하신 분들이 왜 하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다고 본다. 천수를 다하시고 돌아가셨다는 말을 한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 반박을 못하겠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엔 허망한 마음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리영희 선생은 군사독재시대 이래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청년학도들에게는 ‘사상의 은사’로 불리고, 분단체제와 병영체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매도되었다. 그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에 맞추지도 않고, 어떤 유혹과 탄압에도 흔들리거나 짓밟히지 않겠다는 의지와 자기 삶의 원칙대로 살아왔다. 리영희 선생의 결곡한 삶의 궤적과 선비 같은 늠염한 자세는 광기의 맹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에 참 지식인이 취해야 할 모습을 보여준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직성과 엄격성, 불의에 맞서는 장렬함과 자신에 대한 준렬함은 지사지식인에 손색이 없다. 불의만 있고 공분이 사라진 시대에, 리영희 선생의 존재는 불의를 날카롭게 투사하는 명징한 이성과 그 실천성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아는 리영희 선생은 이랬다. 언론에서도 ‘사상의 은사’, ‘실천적 지식인’, ‘시장․냉전 시대의 모순은 집요하게 비판한 사람’, ‘해직기자’, ‘저항교수’, ‘실천적 언론인’, ‘5번의 구속과 3번의 징역을 겪는 분’이라 보도했다. 맞는 보도며 또 정확한 사실이다. 나 또한 이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북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거쳐 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언론인,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은 충분 했다. 아니 ‘과하실 정도’였다.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그렇다. 냉철한 시각과 정확한 자료 분석으로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글을 쓰시던 분, 부정부패에 절대로 타협할 줄 모르는 사람, 전형적인 조선 선비의 스타일이셨다. 아니 나는 한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충신’이라 일컫고 싶다.
충신이란, ‘임금이 올바른 정치를 하지 못할 때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 일에만 매달린다’고 말한다. 꼭 리영희 선생께 어울리는 문장이다. ‘목숨을 걸었다’, ‘바른말을 했다’,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꼭 리영희 선생의 삶과 흡사하다. 그래서 그를 충신이라 쓴 것이다. 그가 실천적 지식인의 역할을 했던 목적은 나라와 대통령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중들을 위해서였다. 민중을 향한 ‘애정’과 ‘사랑’이 없었다면 구지 험난하고 위험천만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진정한 휴머니스트라고 부르는지도…….
김삼웅 선생이 쓴 <리영희 평전>을 보면서 이런 단어들을 재확인 했다. ‘정직’, ‘엄격’, ‘장렬’, ‘준렬’, ‘실천’, ‘이성’, ‘용기’, ‘애정’, ‘사랑’. 이 단어들은 리영희 선생의 삶을 대변하는 단어이자, 그분의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내가 아는 리영희도 이와 비슷했다. 변변치 못한 글을 쓰면서 리영희 선생의 존안을 떠올려 본다.
“어둠의 시간에 그가 있었다. 아픔의 시간에 그가 있었다. 거짓에 길들여지는 시간에 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간 속에서 그가 있었다가 아니가 그가 있는 것이다.
리영희!”
2011. 1. 22
덧붙임
2011년 1월 22일, 오늘 리영희 선생의 49재 있었다. 바른 일정을 소화해 가면서 한 달간 그의 저작들을 보며 생을 다시 한 번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사람들의 사상적 은사요, 시대의 선구자요, 살아있는 한반도의 정신, 리영희 선생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내가 태어난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 나에겐 행복했다. 이 자리를 빌려 머리 숙여 감사드리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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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하여 미국과 친일 군부 독재를 우상숭배 하듯 찬양하던 야만의 시대, 홀로 깨어 국민의 사상적 각성을 외친 지사적 언론인. 사상가. 리영희 선생. 학창시절 잠깐 뵈었던 그분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세대뿐만 아니라 명성의 무게만으로도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던 어른이셨기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시대 대다수 사람들처럼 나도 세상에 무관심했던 탓이 클것이다. 그 후로 사회생활을 하고 여러 정치 격변을 지나오면서 내 삶에 정치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 몸소 체험하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고 많지는 않지만 몇몇 훌륭한 정치인들도 보게 되었다 . 뿌리 깊게 박힌 기득권 세력과 그를 숭상하는 우매한 자들의 비이성적이고 막무가내식 비난을 받아가며 현실 참여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고 외치는 그들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그들은 그와같이 깨우칠 수 있었을까? 그것을 추적해보면 그 끝에는 어김없이 리영희 선생이 있다. 오죽하면 그분을 일컬어 '의식화의 원흉'이라며 매도했을까. "사상의 은사"와 "의식화의 원흉"은 입장에 따라 표현을 달리 했을 뿐이지 그리 다른 말이 아니다. 친일 독재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들은 개 돼지처럼 무조건 정부에 충성해야 하는데 그들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불경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리영희 선생이 일부(?) 학생과 지식인들을 눈뜨게 하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은 대역죄에 가까웠으리라. 학연 지연이 판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는 이북 출신에 이름도 생소한 대학을 나왔지만, 좋은 배경을 지닌 자들이 국민의 의무를 등지면서 일신의 영달과 부패한 정권의 충복을 자처할때 그는 6.25 전쟁때 7년간 군에 복무하며 나라를 지킨 예비역 소령이었고, 모두 입닫고 권력의 눈치만 보고 있을때 홀로 펜으로 불의를 비판한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 군사 정부 하에서 안기부와 형무소를 수시로 드나드는 그의 삶은 고달팠고 가족들은 고난을 감수하며 모진 세월을 견뎌냈다. 이로서 학생과 지식인에게는 그들이 나아가야할 바를 몸소 보여주는 귀감이 되었으니 역사적으로 한국 지성 사회나 더 나아가 국민들은 리영희 선생과 그 가족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그의 글은 세상을 바라보는 미국과 한국 중심적 시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는 미국의 요청 혹은 자진해서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한국군의 만행을 제일 먼저 비판하고 반성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그토록 엄혹한 시절에 어쩌면 눈감고 넘어가고 싶던 우리의 치부, 즉 우리 국민이 남의 나라에 가서 저지른 일에 대해 비겁하게 침묵하지 않았고 인간 본연의 양심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수많은 기사와 칼럼등 저작 활동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민족 통일 전쟁으로 봤을 뿐만 아니라 남미 문제, 중국 혁명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향을 좁은 한반도에서 세계로 돌려 놓고 국제 관계 속에서 우리 민족을 바라보고자 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그가 생을 마감할때까지의 모습은 감동적이다. 어느정도 민주화를 이룬 후에 뒤로 물러서 있자 사람들이 그의 변절을 의심했다. 그는 "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을때는 나라도 나서야 했지만, 지금은 너도 나도 말을 하니 나까지 보탤 필요가 있겠는가" 라며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모처럼 찾아온 심신의 평화를 즐기던 모습에서 나는 위인의 풍모를 보았다. 내려갈 때를 아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핍박과 고통뿐인 과거에 대해 새 시대를 맞이해서 작은 보상이라도 바라는 것이 인간일텐데 그는 한점 부끄러움을 허락하지 않았고 기자생활 시작하는 날부터 죽는날까지 언론의 타락을 경계했다. 65세에 처음으로 연탄 집에서 온수가 나오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니 그의 대쪽인생을 짐작할만 하다. 그러나 안락한 삶도 잠시, 보수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또다시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보며 그는 "미국의 노예정권" "파쇼의 재등장"이라며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2010년 어느날, 수십년간 쌓은 민주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 탄식하던 노사상가는 삶의 끈을 놓으면서도 나라를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7년 후 당신의 후예들이 이룩한 촛불의 기적을 보며 하늘에서도 흐믓해 하지 않을까. 리영희 선생의 글과 그의 삶의 궤적을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참으로 부끄럽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스스로 부끄러웠고 이런 분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으며 리영희 선생과 같은 양심적인 어른들의 피와 땀으로 빚어진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나는 그가 흠모해마지 않던 "루쉰"의 책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가 영어, 일어는 물론 중국어 불어등 언어를 독학으로 익히고 그것을 이용해 사상의 지평을 넓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게도 항상 미지의 언어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는데 요즘엔 중국어로 된 책을 한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번 독서를 통해 공부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긴것 또한 선생에게 감사할 일이다. 작가 김삼웅씨는 위인들의 평전을 많이 쓰신 분이라고 들었다. 이 책에서는 내용의 중복이 많고 작가의 말인지 위인의 말인지가 불분명하기도 하며, 인용 글에 대한 설명도 약간 부실해서 뒤의 각주를 봐야하는 불편이 있었다. 전자책 버전이라 그런 지는 모르지만 대체로 편집에는 약간의 허점이 보였으나 리영희 선생의 선명한 사상과 삶은 활자와 책이라는 형식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그리 걱정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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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같은 진실의 추구가 흑암의 세상을 밝히다 언론인의 상식이란 언제나 한결같은 ‘진실의 추구’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리영희 선생은 그 누구보다 상식적인 언론인이었다. 그는 한평생 진실만을 추구했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면 지체 없이 진실이란 나침반을 꺼내 들어 방향을 잡았다. 해직, 가난함, 가족의 고통, 불효한 삶, 고문과 수형의 연속. 그의 삶은 언제나 험난했지만. 오로지 ‘진실의 추구’만을 위해 살았고 마침내 흑암의 세상을 밝힌 시대의 횃불이 되었다. 상식적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상식과 비상식을 가르는 기준의 잣대가 매번 다르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상식의 전형이다. 그럼 무엇으로 기준을 세울까, 바로 논증의 원리이다. 논증의 구조가 탄탄할수록 기준은 단단히 뿌리내린다. 리영희 선생은 이런 일관성과 논증의 표상이었다. 우상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그가 언제나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삶 전체에 걸쳐 적용된 일관성과 그의 글이 가진 논증의 구조 때문일 것이다. 합리적인 인간, 원칙적인 인간, 상식적인 인간 합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집으로 똘똘 뭉친 고지식한 사람이 아닌 유연하고 효율적인 사람 말이다. 20대의 끝이 보일 즈음, 산티아고 순례를 떠났다. 순례 도중 다친 발목이 올바른 자세로 걷자 가장 빨리 낫는 걸 경험하고 원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효율이란 명목 아래 원칙을 어기는 편법이 오히려 훨씬 더디다는 걸 배웠다. 출판 세상을 꿈꾸는 지금, 이제는 상식적인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누구보다 상식적인 인간, 리영희 선생의 삶을 내 가슴에 새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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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1년 독서모임의 첫 번째 교재였다.
독서모임 때문이 아니라도 지난 12월에 작고하신 고 리영희선생의 생애를 알기 위하여 이 책 이외에도 임헌영씨의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먼저 읽은 바 있다.
독서모임에서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평전으로서의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별로였다.
고인에 대한 저자 자신의 평가 내용보다 고인의 기존 저서와 자서전 성격의 책과 글, 그리고 당사자의 이야기에 주로 의존한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평전을 쓰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고인이 위독하였고 고인이 살아계실 때 완성된 평전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급하게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서모임 논의 중에 고인에 대한 평전으로는 강준만교수가 펴낸 <리영희 -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가 추천되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보다는 어제 독서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생전에 고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죄도 있고 해서...^^)
독서모임의 주된 이야기는 책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독서모임 참가자들이 과거에 고인 및 고인의 저서와 맺게 된 사연을 회고하는 내용과 고인의 핵심적인 사상과 자세, 진실과 진리에 대한 탐구, 성장배경과 ’사상의 은사’로 불리게 된 과정 등이 중심이었다.
1. 평전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 있고
2. 고인의 태생적인 조건이 걸출한 저널리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고인은 이북, 그것도 이북의 변방 출신이었고 중등교육은 경성공업학교라는 조선인이 드문 학교를, 고등교육의 경우 해양대학이라는 마이너 대학이었으며 7년간이나 군대에 몸을 담았음에도 통역장교라는 군내 내 비주류 직책이었다.
그런 상황들이 한 편으로는 친일파와 주류에서, 해방 후 사상적 혼돈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구조와 배경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해방 후 주류들이 득세한 언론계에서 자신이 언론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불굴의 노력과 치밀함을 잉태시켰다.
3. 그와 관련하여 시대적인 배경과 과정도 고인의 능력에 도움이 되었다.
고인은 1929년 생으로 일제에 의하여 본격적인 조선어 말살정책이 강행된 1940년대 초에 중등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이북 출신으로 경성에서 중등학교와 해양대학을 다니면서 학비가 부족하여 놀이와 사교보다 대부분의 개인시간을 학습과 영어공부에 투입한 것이 후에 한국전쟁 발발 후 통역장교로 복무하게 된 계기가 된다.
7년간의 통역장교 경험은 고인이 영어에 익숙하게 만들었고 언론사 국제부에 근무하게 되고 중국혁명에 관심을 가진 것들이 중국어와 불어까지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4개 외국어 실력은 고인이 친일파와 서울대 등 주류대학 출신들이 장악한 언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함과 동시에 해외언론을 통해서 수많은 사실적인 정보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외국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4. 이과 전공, 주류와 권력에 대한 위기감, 진리추구의 열정이 한국현대사의 걸출한 언론인을 만들어내었다.
고인은 중등교육(공업학교)과 고등교육(해양대학) 과정이 모두 이과였다.
일반적인 이과 교육과정이 그러하듯이 치밀하고 논리적인 교육내용이 어려서부터 부여된 천재적인 공부실력과 더해져 고인의 치밀한 논증과 이론의 기반이 되었고,
친일파와 주류들 속에서 비주류로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기 위해,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폭압전제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안위와 기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인은 더욱 더 근거와 사실에 입각한 기사를 작성할 수 밖에 없었다.
고인은 또 사교와 접대를 멀리하면서 남는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전부 투입하여 수많은 고전과 이론서, 자료 등을 수집하고 공부하였다.
마지막으로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성격적으로, 그리고 경쟁적으로 고인은 해외 언론의 보도내용과 해외에서 필요한 자료를 입수하여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으로 사건과 배경, 현황과 전망에 대해 당시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뛰어난 기사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성과 진실, 진리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이 전제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고인은 자연스럽게 민주투사가 되었다.(9번의 체포, 5번의 재판, 4번의 징역)
5. 사상과 생활이 일치된 삶으로 일관하신 분이다.
7년간의 통역장교 시절부터 고인은 공과 사를 구분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잡기도 하나 없었음.)
언론계에 종사한 이후에도 끝까지 국제부 이외의 정치,사회부 등으로 옮기지 않아 향흥이나 접대, 금품을 수수하지 않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도 가난하여 부친의 환갑잔치를 치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정도였다.
고인은 50대에 넘어서서야 끓는 물이 자동으로 나오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고인 스스로 지성인으로서의 책무를 삶의 최우선 가치로 삼아 살아오셨기 때문에 항상 가족의 가난과 고통에 마음 아파하셨다.
독서모임 참가자들은 모두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고인과 같은 언론인, 그리고 지성인이 다시 이 땅에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부디 고이 잠드소서..
[ 2011년 1월 30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