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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골목길 부처다 - 이언진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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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을,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 경기를 보지도, 응원하지도 않지만 드미트리는 민족주의자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민족주의는 당연한 가치일 테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짙게 베인 세계관이지만, 어쨌든 이 세계관을 벗 삼아서 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수천 년을 버텨온 선조에 감사의 마음을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표시하며 살고 있다. 오해하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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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을, 동계 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 경기를 보지도, 응원하지도 않지만 드미트리는 민족주의자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민족주의는 당연한 가치일 테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짙게 베인 세계관이지만, 어쨌든 이 세계관을 벗 삼아서 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수천 년을 버텨온 선조에 감사의 마음을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표시하며 살고 있다. 오해하지는 말라. 기독교를 모르고 살았을 선조를 한방에 지옥으로 보내버린 근본주의 개신교 가르침만 아니라면, 기독교도 썩 괜찮은 세계관이라 생각한다.

 

끝 문장은 드립이었고.

 

그런 드미트리이지만.

 

"한국 사상가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라는 질문에 얼마 전까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다. '한국 사상가'라는 단어가 가진 모호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게 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이제는 그럭저럭 답할 수 있을 듯하다.

 

"이언진이요." 


『나는 골목길 부처다』는 박희병 교수님이 쓴 책이다. 제목보다는 부제가 더 많은 정보를 준다. '이언진 평전'이 부제인 이 책은 말 그대로, 이언진 평전이다. 이 책은 채널예스에 게재하는 '좋아서 보는 인문학(http://ch.yes24.com/Article/List/2460)'이라는 코너를 진행하다 알게 됐다. 돌베개 편이었는데, 그때 이경아 고전팀장님께서 친히 추천해 주셨다. 드미트리가 이탁오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바로 추천해 주신 책이 이 책.


이탁오는 주류에 반항하던 사상가였다. 그러니, 이언진도 당연히 그런 사상가일 거라 짐작은 했다. 실제로 이언진은 이탁오를 긍정한 조선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박희병 교수는 "18세기까지의 조선 사상사에서 이탁오를 긍정적으로 읽은 사람은 딱 세사람밖에 없다. 허균, 이용휴, 이언진이 그다.(200쪽)"라고 썼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용휴가 이언진의 스승이라는 사실이다.


이언진은 1740년에 태어나서 1766년에 죽었다.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짧았다는 점을 고려해도 다소 빠른 죽음이다. 이탁오는 75세까지 살았는 데 비해, 1/3밖에 못 산 셈이다. 사상범으로 몰린 탁오는 옥에서 자살을 시도했고, 자살을 시도한 지 얼마 안 있어 죽었다. 그렇다면 이언진도 혹시 불온한 사상 때문에 박해를 받아 죽은 것일까? 아니다. 애석하게도, 그는 천성적으로 약했고 병으로 죽어버렸다. 물론 저자인 박희병 교수는 그의 육체적인 죽음 뒤에는 정신적인 좌절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를 좌절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우선 그는 사대부가 아니었다. 이언진의 선조는 대대로 역관을 한 중인 계급이었다. 이언진 자신도 역과의 한학 분야에 지원해 합격했다. 당시 역과에는 한학, 몽학, 왜학, 여진학이 있었는데 각각 중국어, 몽골어, 일본어, 만주어에 해당한다. 역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청나라와 일본에 다녀오는데, 특히 일본에서 그의 뛰어난 문장력이 유명해지면서 일본의 여러 학자와 필담을 나눴다. 이언진으로 검색해 보면, 한류의 원조로 그를 평가하는 사설도 발견할 수 있다. 


일본 통신사 시절에도 이미 그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했다. 심지어는 앉아서 필담이 불가능해 양해를 구하고 누워서 필담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 조선으로 귀국한 뒤, 그는 죽음을 예견하고 자신이 쓴 모든 글을 불태우려고 했다. 이를 보던 아내가 다행히도 「호동거실」만은 건졌다. 조선 시대의 다양한 균열을 묘사하고 이언진 개인의 통찰을 전개한 이 시집에 관한 평설은 『저항과 아만』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책도 읽어볼 생각이다. 여하튼 우리가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이언진의 「호동거실」을 평한 박희병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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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거실」은 170수의 연작시다. '호동'은 주로 가난한 하층민이 사는 '골목길'을 뜻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언진이 이 단어를 자호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 이름을 정확히 옮기면 '호동 이언진이 사는 집'이 된다. 이언진은 서민이 사는 호동을 자호로 삼음으로써 서민과 자신을 일체화하고 있다. 이 일체화를 통해 이언진은 피지배층인 하층민을 옹호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집은 지배층에 대한 이언진의 항거가 그 본질을 이룬다.

「호동거실」은 6언시이며, 중국 구어인 백화가 도처에 구사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언진은 전통과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와 새로움을 호흡하기 위해 이런 형식을 의도적으로 택했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이 시집은 그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이미 그 형식 선택에서부터 저항성과 불온성을 담지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시집은 미적임과 동시에 정치적이다.

이언진은 이 시집을 통해 신분 해방과 인간 평등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으며, 세습적 권력과 지위, 일체의 억압과 지배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는 신분차별로 인해 이언진이 지니게 된 치유하기 어려운 깊은 내상과 세상에 대한 불화의 감정들이 곳곳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이 시집에는 억압받고 가난한 하층민의 삶에 대한 시인의 따뜻하고 자별한 눈길과 그들에 대한 신뢰와 연대가 표명되어 있다. 이런 신뢰와 연대가 시인의 몸 바깥이 아닌, 시인의 상처받고 죽어가는 몸 '안'에서 즉 자신의 고통 '속'에서 구축되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115-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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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독서와 뛰어난 문장력으로 어린 나이에 시대를 앞서 갔던 이언진. 그가 좀 더 살았으면 어땠을까. 정체된 사회에 활기를 불어 넣어 좀 더 평등하고 부유한 세상이 되었을까? 아닐 것이다. 설사 그가 더 살았어도, 세상은 변하지 않고 탁오처럼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박희병 교수는 그의 죽음에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박지원의 혹평도 한몫했을 거라고 말하는데, 박지원의 태도에서 보듯 조선의 주류가 받아들이기에 이언진의 글은 너무나도 이단이었다. 여기서 조선 후기의 지배적인 학문에 관해 짚어 보고 넘어가자.


알다시피, 조일전쟁과 조청전쟁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더 교조화된다. 종법 질서에 기초한 가부장제가 강화되면서 여성을 향한 차별이 심해지고, 서얼을 배제하는 정도도 강해진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의 인구가 급감하면서 재생산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장자에게 몰아주는 방법 밖에 없었으리라는 분석이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여남과 적서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데 성리학을 교조화시키는데. 사실, 이 둘 간의 연결 고리를 해명하는 것까진 드미트리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좀 더 공부해야지. 어쨌든, 조선의 유학은 기존의 권력 관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사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원래 유학은 경세와 심성론이 함께 가는데, 주자학은 후자에 좀 더 치중된다. 이런 주자학을 조선 후기 지배층이 이데올로기처럼 받드는데, 반대편인 일본에서는 다소 다른 학풍이 발전한다. 바로 소라이 학이다.


오규 소라이로부터 시작한 소라이 학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주자학이라 일컬어지는 송학은 불교 등 이질적인 것이 섞인 것으로, 원래 유학이 아니라고 배척했다. 실제로 정이ㆍ정호 형제와 주희가 집대성한 송나라 유학은 도교와 불교의 도전을 받아 이들 가르침의 일부를 유교화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둘째, 일본식 훈독이 아니라 중국음으로 직독했다. 셋째, 문학적으로 송시를 부정하며 복고주의를 주장했다. 어쨌든, 종합적으로 본다면 소라이 학은 조선의 주자학 만큼 사변화되지는 않았다. 이로부터 조선과 일본이 근대에 진입하며 걸은 전혀 상반된 두 행로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 테제가 맞다, 안 맞다는 쉽사리 결론 낼 수 없긴 하다. 상부구조와 하부토대 간 논쟁은 지식사회학에서 결코 결론 낼 수 없는 화두니까.


박희병 교수가 이 책에서 이언진을 시종일관 칭송하고 있지는 않다. 천재로 추켜 세우긴 하지만, 그의 한계를 분명하게 긋는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에서 활동하던 사상가로는 농촌과 농민 그리고 농업을 너무 몰랐다는 점이다. 죽기 전에 시골에서 잠시 산 적이 있긴 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활동했던 그는 철저하게 도시 지식인이었다. 이런 약점으로 이언진의 사유에는 사회 전체를 변혁시킬 만한 현실성이나 구체적인 방법은 부족한 편이다.


여하튼 이 정도에서 『나는 골목길 부처다』에 관한 이야기는 끝내기로 하고.

 

아쉬운 점은...




 

2010년에 나온 책인데, 여전히 1쇄다...

 

처음 보는 인문학... 이런 책도 좋지만 언제까지 입문서만 읽으실래요? 제대로 된 역사ㆍ사상 책을 좀 삽시다. 인문학에 입문이 왜 필요해요? 어차피 인간 사는 세상 다루는 게 인문학인데...

 

돌베개, 삼천리, 도서출판b, 따비, 교양인, 앨피, 오월의봄, 길, 이런 출판사에서 내는 책을 좀 읽으라고요.




YES마니아 : 플래티넘 l****i 2014.04.10.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18세기 조선의 주체적 인간 이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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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진은 18세기 조선의  '문제적 인간'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는데 이언진은 비천한 중인계층의 역관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는데, 이언진은 유불도 삼교를 모두 회통하고자 노력한 아웃사이더였다. 저자 박희병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가장 이단적이고 가장 문제적인 인물로 우상 이언진(1740-1766)을 꼽는다. ​이 책 『나는 골목길 부처다』(돌베개, 2010)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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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진은 18세기 조선의  '문제적 인간'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는데 이언진은 비천한 중인계층의 역관이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는데, 이언진은 유불도 삼교를 모두 회통하고자 노력한 아웃사이더였다. 저자 박희병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가장 이단적이고 가장 문제적인 인물로 우상 이언진(1740-1766)을 꼽는다. ​이 책 나는 골목길 부처다(돌베개, 2010)는 저자의 이언진에 대한 사랑과 그의 요절에 대한 애석함 잘 드러나 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명문대 교수가 조선의 불우한 아웃사이더에게 꽂힌 셈이라서 눈길이 간다. 시대와 불화한 아웃사이더는 모름지기 훗날이 되어야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는 법인가? 

 

저자는 당시 아시아의 사상적 이단아들과 이언진의 사상을 비교하고 있는데, 비교대상이 명말의 사상가 탁오 이지와 일본의 의사 출신의 사상가 안도오 쇼오에키다. 이탁오는 명말의 저명한 사상가로 인간의 평등을 부르짖었고, 쇼오에키는 철저하게 신분계급을 부정한 사상가였다. 세 사람 모두 사회적 억압과 차별에 반대하면서 인간 평등을 추구한 이단아들이.

 

조선은 유교국가였다. 유교 중에서도 주자학이 국시로 떠받들어졌다. 주자학은 상하의 분별, 위계의 엄격한 고수, 예를 통한 신분적 차등 등의 정당화를 그 핵심으로 한다. 주자학은 신분의 차등은 하늘이 낳은 것이며 인간은 이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진리인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언진은 유교의 독점적 지위를 부정하면서 유교를 불교와 도교와 함께 3교의 하나로 재정립하고 유교의 자리에 주자학 대신에 양명학을 앉혔다. 일반적으로 양명학은 우파, 정통파, 좌파로 분기되는데, 이언진은 인간의 평등성을 강조한 좌파에 기울었다.

 

가령 이언진의 시문은 자유와 평등, 자주에 대한 지향의 시학을 보여준다. 이언진의 이런 저항적 주체 형성에는 '18세기 조선의 호동'이라는 시공간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골목길'을 뜻하는 호동은 도시 서울의 서민과 여항인의 주거공간이다. 호동은 농업이 아니라 상업이나 수공업이 물적 기반이었으며, 농민이 아니라 상인이나 수공업자가 삶을 영위하던 공간이었다.

 

주자학 근본주의의 대표적 인물은 우암 송시열과 택당 이식(1584-1647)이다. 송시열은 '주자학은 무오류'라는 선언을 내세우면서 주자의 경전해석에 수정을 가하고자 했던 윤휴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내몰았다. 이식은 학자들은 오직 정자와 주자의 가르침만을 마음에 두어야 하고 그 이외의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배격했다. 조선 주자학의 교조적 근본주의를 비판한 17, 18세기 지식인들로 계곡 장유(1587-1638), 상촌 신흠(1566-1628), 허균(1569-1618), 홍만종(1643-1725), 담헌 홍대용 등을 꼽을 수 있다. 중국처럼 불가와 도가도 인정하고, 유교도 주자학만이 아니라 양명학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자고 했다. 획일적이거나 교조적인 학문 태도,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인 학문 태도를 거부했다. 양명학에 대한 장유나 신흠의 관심이 대체로 왕양명에 국한된 온건한 것이었다면, 허균은 이탁오, 초횡, 원굉도 등 급진적 성향의 양명학 좌파에 관심을 보였다.

 

26살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간 이언진은 18세기 중엽 조선 한양에 살았던 중인 신분의 중국어 통역관이었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중 중국과 일본을 모두 들여다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1763년, 일본의 제10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당시 정사는 조엄, 부사는 이인배, 종사관은 김상익이었다. 그리고 제술관은 남옥(43세), 정사 서기는 성대중(33세), 부사 서기는 원중거(46세), 종사관 서기는 김인겸(59세)이었다. 이언진(25세)의 직책은 한학 압물통사였다.  

 

1763년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1763년 8월 3일 한양을 출발해서 10월 6일 부산에서 일본으로 출항, 12월 3일 밤 아이노시마에 도착하고, 1764년 1월 21일 오오사카에 도착해 28일에는 교오토에 그리고 2월 16일 에도에 도착한다. 1764년 3월 11일에 귀국길에 오르는데, 4월 5일 오오사카에 도착, 5월 26일 아이노시마, 6월 22일 부산에 도착하고, 7월 8일 무사히 귀경한다.

 

이언진과 필담을 나눈 일본 문사는 가메이 난메이(21세), 오쿠다 쇼오사이, 미야세 류우몬(46세), 이마이 쇼오안(24세), 다이텐 겐죠오 등이다. 현재 전하는 가메이 난메이(1743-1814)의 『앙앙여향』, 오쿠다 쇼오사이(1733-1807)의 『양호여화』, 미야세 류우몬(1719-1771)의 『동사여담』, 이마이 쇼오안(1741-1824)의 『송암필어』, 다이텐 겐죠오(1719-1801)의 『평우록』 등이 모두 필담을 기록하고 있는 책들이다.

 

1974년 3월 10일 밤, 미야세 류우몬과 이마이 쇼오안이 이언진의 숙소를 방문한다. 미야세 류우몬은 『동사여담』을 남겼고, 이마이 쇼오안은 『송암필어』라는 필담집을 남겼다. 당시 조선의 문사들은 왕세정과 이반룡 등 명나라 고문사파를 배척했다. 고문사를 주창한 명나라 고문사파로는 전칠자의 리더인 하경명과 이몽양, 후칠자의 리더인 이반룡과 왕세정이 있다. 이언진은 왕세정이 이반룡보다 훌륭하다고 강조한다. 반면 일본의 소라이 학파 문인들은 왕세정보다 이반룡을 높이 평가한다. 당시 이반룡과 왕세정의 문장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길굴오아하다는 평이 있었다.​

 

z***a 2014.04.03.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