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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살던 아파트에는 전신을 사용하지 못해 항상 특수 제작한 휠체어에 의지해 나다니던 여자아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쯤 되었던 것 같았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아이의 엄마와 함께 몇 번 마주쳤다. 힘들 것이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전혀 힘들지 않은 얼굴로 즐거이 아이와 눈을 맞추고 휠체어를 미는 손에는 항상 힘이 넘쳤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 말도 걸지 못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엄마의 인사에 작은 미소로 화답하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할머니께서 그 아이와 외출했었는데 그 할머니는 손녀를 예뻐 죽겠다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나에게 “정말 예쁘죠?”라고 물어 보았다. 내 눈에도 그 아이는 정말 예뻤다. 눈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그 아이의 눈길이 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아이와 그 아이의 가족의 행복을 의심할 구석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1층에 내려왔을 때 할머니와 아이가 먼저 내리고 난 후 엘리베이터를 타는 두 남자 중학생의 대화를 들었을 때 나의 마음에는 정말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 왔다. 그 중학생 중 한 아이가 “병신, 졸라 재수 없어.”라고 말한 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을 때 난 그 소리가 그 할머니에게 들렸을까 안절부절못했다. A라는 중학생이 있었다.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잘했다. 몇 번만 들어도 쉽게 뭔가를 외웠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학원도 다니며 이것저것 배웠다. 피아노도 꽤 쳤고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은 항상 전교 몇 등 안에 들었다. 엄마는 그 아이를 항상 자랑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A가 중학생이 되자 당연하게도 외고를 준비했다.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어학원에서 토플 공부를 했고 그 지역에서 외고를 가장 많이 보낸다는 학원의 민사고 반에 들어갔다. 토플을 배울 때 거기에 있는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문제를 좀 더 많이 맞힐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민사고 반에서 배우는 수학은 고등학교에서나 나올 문제들로만 도배되었지만 당연히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A가 배우는 것들은 보통 중학생들이 푸는 문제들이 아니었으며 그 학원을 계속 다니는 이유는 다른 아이들이 배우지 않는 토플과 민사고 대비 수학 문제를 배우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단지 보통의 인문계를 가는 쓰레기 같은 아이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공부를 기초부터 다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공부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저 멀리 이데아계서나 있을 법한 외계의 언어로 되어 있는 불가해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중 2가 되었을 때 성적은 점점 더 떨어졌고 이제 공부는 전혀 재미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A는 게임에 빠져들었고 어이없게도 게임중독에 걸렸기 때문에 외고에 갈 수 없다는 변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2년 간의 시간은 그 가족에게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고 그 중간에 있었던 수많은 협박과 회유, 가출과 참회, 흡연과 음주, 가수 오디션 등등의 이야기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예전부터 있었던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최근에 널리 퍼지고 있는 이야기일까? 세상에는 항상 공부 싫어하는 학생들로 넘쳐나고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춘기 학생들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병신이라고 함부로 놀리고 게임중독에 쉽게 빠져드는 중학생에 대하여 특별히 분노할 이유가 따로 없을 수도 있겠다. 게다가 기성세대란 것들도 욕심에 눈이 어두워 온갖 비리에 이권다툼, 부동산 투기, 주가조작 이런 짓들을 쉽게 하니 신문을 3일만 열심히 보아도 비단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마 삶을 ‘살아 있음’으로 인식하지 않고 ‘비즈니스’라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인간 내면에는 악의 씨가 자라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악의 평범성’이나 인간의 이중성이라는 분석을 따로 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는 약한 존재는 외부의 환경이 조금만 불리하게 변해도 인간성은 타락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약한 존재가 원래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할 줄 알았으며 삶에는 열정이 있었고 사랑에는 순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이라는 압도적인 힘을 만났을 때 그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든 부정적으로 작용하든 그 열정과 순정은 어느 순간 자본의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그리고 자본의 파도는 어느덧 인간의 전 영역에 힘을 미쳐 인간은 그 파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욕망의 현실태인 주리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반반한 얼굴과 글래머러스한 몸매, 그리고 사진이라는 문화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여대출신의 여성들은 졸업 후 모임에서 자신의 결혼 예정자나 배우자의 혹은 시댁의 재산상태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토론한다.
그 욕망의 가능태가 현실태로 바뀌는 것은 프라다나 에르메스일 수도 있고 아우디나 BMW일 수도 있다. 시어머니로부터의 결혼 선물이 BMW가 되는 순간 결혼할 때까지 겪었던 굴욕이나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동창회에 나와 신랑의 집안이 준재벌급임을 자랑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주리가 그런 여자들 중의 한 명인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일 수 있다. 그런 그녀가 사랑과 섹스를 비즈니스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애당초 지금 내게 ‘비즈니스’를 가르치고 입문하게 도와준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사진과를 졸업하고 여성잡지 사진기자를 하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대구에서 섬유업으로 크게 성공한 집의 셋째 아들로서 경제적으로는 준재벌급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녀는 곧 사진기자를 그만두었다.」- 58쪽 중학교를 다니는 정우의 엄마에게 과외비를 벌기 위해 ‘비즈니스’의 세계로 입문시킨 주리는 현실세계의 여자들에게도 어딘가에 한 명쯤은 존재한다. 그 주리 같은 여자를 자신의 친구로 둘 것인지 아닌지는 현실세계의 여자들에게 도덕적 선택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세상의 여자들은 도덕적 결정으로 친구를 저버리는 행위는 거의 하지 않는다. 결국 주리는 항상 대한민국의 여성들 주위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자본재(資本財)를 가지고 있는 얼굴 반반하고 몸매 좋은 여자들은 아주 쉽게 비즈니스우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비즈니스우먼이 있으면 비즈니스맨도 있다. 그런 것을 세상의 균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여름이 아빠는 경찰에 투신해 부정과 비리에 얽매이지 않고 진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동료들의 배신이었고 함정에 빠져서 더 이상 자신의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쿨’하게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경찰을 그만두고 이 욕망의 도시에 내려와서 운동권 경력이 있는 시장의 선거를 돕고 ‘한 방’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한다. 그러나 이 과감한 ‘한 방’은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었고 결국 그 ‘한 방’을 가장 반대했던 아내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다.
그리고 그는 ‘타잔’이 되었다. 그만의 새로운 비즈니스가 시작된 것이다. 비즈니스우먼과 비즈니스맨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필연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우연 같은 필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는 자폐를 앓고 있는 여름이다. 이 우연의 모든 연결고리는 계절로서의 여름이고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에 꽃이 피는 이팝나무이고 이 냉혹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여름이에 대한 사랑이다. 「여름인 내가 동행한 것이 참 좋은가 보았다. 얼굴엔 화색이 돌았고, 콧구멍을 일없이 벌름벌름했다. “이 나무 이름, 뭐예요, 이모?”라고 물을 때는 놀랍게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난데없이 바위에 올라 보건체조를 하기도 했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오겠다면서 비탈길에 잰걸음을 놓기도 했다.」111-112쪽 이 모든 추악한 욕망의 덩어리들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여름이에 대한 사랑만이 순수하다. 대한민국에서의 행복한 삶은 맬서스적 가치를 지닌 선택받은 소수와 장자적 가치를 지닌 현실의 비즈니스를 비웃는 깨달은 소수만이 영위할 수 있는 것일까? 공자가 생각했던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대동(大同)세상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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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 1. '나' 얼마전 설문조사문항에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에 대한 선택이 있었다. 심심치않은 질문이다. 글쎄... 10년전만 하더라도 아니 5년전만 하더라도 내 대답은 아무리 그래도 사랑이 제일이지 였을 것이나 현재로선 자신있게 '사랑' 이라고 말 할 수가 없다. 사랑으로 맺어졌지만 경제적인 고난으로 부담과 원망이 쌓여 헤어지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경제적 고난은 사랑으로 잉태된 결실마저 버리게끔 만들지 않던가. 그렇다고 돈만 있으면 괜찮은가? 역시 아니다. 이건 자신있게 아니다. 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돈이 있으면 불편함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만 있어서도 돈만 있어서도 행복질 수가 없다.
'나'는 과거 사랑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사랑만으로 선택한 남편은 사법고시에 실패하고 사업실패로 빚만 잔뜩 껴안게 만들었다. 남편의 부모님이 살던 ㅁ시로 낙향한 '나'는 아들이 남편같은 인생을 살지 않도록 하기위해 살아가고 있다. 남편의 인생이란 실패한 인생이다.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공한다는 것이고 성공을 위해서는 우선 좋은 학교에 가야한다. 아들의 성적을 올리기위해 학원에 보내고 그 학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비즈니스'를 하게 된다.
드라마 '강남 엄마 따라잡기'에서 하희라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전재산을 털어 강남군으로 이사한다. 웬만한 사람의 한달치 월급에 맞먹는 월세와 아이의 학원비, 그리고 생활비를 벌기위해 일식집에서 일을 하기도하고 그나마의 작은 아파트에 하숙을 치기도 한다. 몇 년전 미용실에서 집어든 월간지에서는 맞벌이를 위해 또는 아이 학원비를 위해 노래방도우미를 한다는 주부들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2. '제인을 잃어버린 타잔'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던 타잔은 정의에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는다. 자신의 터전이었던 횟집을 되찾기 위해 그는 도둑질을 한다. 타잔과 '나'와의 만남은 타락의 길에서 마주침이었다.
구원 태초의 모든 것은 어머니에게로 향한다 (이 책과 함께 출간된 길 위의 시대에서는 '아버지'로 향한다) 타잔은 '나'를 만남으로써, '나'는 아이를 통해 구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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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시대에 따라, 또는 주관에 따라 그 정의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단어가 가난이지 싶다. 우리가 흔히 비슷하게 사용하는 '빈곤'이라는 단어가 절대적인 물질적 결핍의 의미로 제한되어 사용되는 것과는 조금 달리, 가난이라는 단어는 그 어원인 '간난(艱難: 괴로울 간, 어려울 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힘들고 어렵다'라는 감정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다. 이 작품 속 「무국적자들」 中에서.. 개인적으로 17년을 '전사(戰士)'로 살았고, 또 앞으로 '전사(戰死)'할 때까지 별수없이 '이짓'을 계속해야하는 아비의 입장에서 아들에게 같은 짓을 반복시키고자 이렇게 애쓸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사뭇 심각한 회의감이 들었다. 잘 살아보겠다 죽어라 공부며, 일이며 발버둥쳐봐야 별반 달라지지 않는 런닝머신같은 '가난'한 내 삶에 무슨 귀감이 있다고, 과외비에 조기유학에 당장 노후대책에도 빠듯한 살림을 퍼부어 대는건지.. 한 번쯤 진지하게 재고(再考)해봐야지 싶다. 그 '재고(再考)'가 결국 살던대로의 삶의 패턴에 뭍혀 상념의 한켠에 '재고(在庫)'로 팽개쳐지더라도, 아니 분명히 또 그렇게 되고야 말 테지만, 아이들 사교육비로 쏟아붓는 얼마안되는 돈들이라도 애들 이름으로 개인연금을 넣는게 진정 아이를 위하는 길인건 아닌지 '당장'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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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과 수익을 기반으로 한 용어,‘비즈니스’, 순수한 인간의 이기심이외의 모든 동기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시장을 대표할 만한 상징으로 가히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이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오늘, 우리들 사회의 자기이해에 대한 진술인 이 작품의 도덕적 냉소는 반복되는 통증임에도 좀처럼 치유되지가 않는다. 매춘(賣春), 그러니까 봄(몸)을 팔아 돈을 버는 행위이니 분명 비즈니스다. 그러니 봄을 파는 여성은‘비즈니스 우먼’인 게고, 이런 비즈니스 세계에 감상이나 연민과 같은 감각이란 필요 없는 것인데, 상대의 섬세한 동작에 몸이 가늘게 떨려오는 감각은 정말 위험한 신호라 할 것이다. 게다가 신도시 개발에 발군의 능력을 자랑하는‘비즈니스 맨’을 자처하는 국제적 감각의 수완 좋은 시장(市長), 이에 한 몫 하는 교활한 권력자와 자본가인 비즈니스맨들의 부정한 재산을 훔쳐내는 도둑님이라는 비즈니스맨까지 모두 “삶의 유일한 전략”은 비즈니스라고 외친다. 소설은 이처럼 비즈니스 맨, 비즈니스 우먼들만이 가득한 오늘의 세상을 전형적인 천민자본주의의 집약지로 21세기형 꿈의 도시,‘☐市’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민활하고 유능한 사냥꾼들이 모여 사는 신도시와 사냥꾼의 대열에서 추방당하여 인간-쓰레기가 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구도시가 부정적인 신자유주의 소비지향의 시장경제 사회인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식재하고 있다. 폴란드의 저명한 사회학자‘바우만’은 이러한 사회, 즉 작금의 인간사회를「유동하는 세계의 지옥」이라 하였던가! 사냥꾼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사냥감이 되거나 아니면 추방당하거나, 그래서 대열을 이탈하지 않으려고 죽도록 뛰어다니는 경계에 놓인 우리들은 오직 약육강식의 정글 속을 헤쳐 나가는 전사로 양육되고 이 장엄한 비즈니스전략을 세습시키려고 모두들 안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식의 과외비를 벌기위해 오욕이 가득한 화류항(花柳港)으로 나가는 어미”가 되어야 하는 비열한 세계가 여기 있다. 사법고시에 실패하고 사회의 밑바닥을 욕망이 해제된 채 무기력한 노인처럼 살아가는 남편과 같은 세상을 자신의 아이만큼은 세습시키고 싶지 않다는 열망, 고작 세습되는 천박한 자본 귀족들이 던져주는 조악한 권력과 부를 움켜쥐는 것일 뿐인 그러한 세계를 주겠다고. 너도나도 꿈 같은 소비의 자유를 누리겠다고, 비즈니스의 세계가 마치 유토피아를 담보해주는 양, 사랑도, 연민도, 아니 사람 그 자체까지 상품, 비즈니스 거래의 대상으로 내어주는 모멸과 수치만이 깊은 세상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사랑과 결혼까지 비즈니스인 사회를 당연이라 하는 불온한 세계, 세상의 모든 가치가 오직“자본의 요람에 들어간 세계”, 세상이 이쯤 하니“윤리도 효율성의 보장을 받아야”한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것이다. 돈 많은 속물들,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의 덕택으로 권력을 차지한 어설픈 오늘의 귀족들이 짧은 시간에 내면화하지 못한 문화예술이란 것만큼 계급을 구별짓는 수단은 없을 게다. 사진작가라는 그럴듯한 예술의 포장은 천박한 부자와의 원활한 비즈니스, 결혼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 되어주지만, 결국 비즈니스의 속성이란 그렇듯이 수익과 효율성이 상실되면 버려지는 것 아닌가. 아이의 외국어고 진학을 위한 고액의 과외비를 위해 몸을 파는‘나’의 대학동창인‘주리’의 자기파멸은 비즈니스의 네거티브(negative)한 순환을 그대로 보여준다. 끝 간 데 없는 이 세계에서 화대(花代)로 열악한 가계를 채우는 여인이 있는가하면, 비즈니스 세계의 논리를 수용치 못해 그 사냥꾼의 대열을 이탈한 남자, 신도시의 부자들을 터는 도둑인‘타잔’이 비즈니스세계를 맘껏 유린하며 소설의 축을 구성한다. 게다가 신시가지가 번성할수록 쓰레기 하치와 소각장이 있는 구시가지의 쓰레기는 늘어나는 이 기이한 균형(?)의 현상, 인간쓰레기(잉여인간)가 되었든, 오물이 되었든 21세기형 꿈의 도시라는 ☐시(市)의 구시가지는 퇴락한 짐승의 마을로 변해간다. 비즈니스의 세계에 뛰어들지 못하는 순간 더 이상 사냥꾼일 수 없다. 짐승의 마을로 들어가 사냥꾼들의 먹이가 되거나 세상에서 사라지는 길 뿐. 그러나 수완 좋다던 비즈니스맨 시장도, 도둑님 타잔도, 사랑도 비즈니스라는 여인도, 봄을 파는 유부녀인 비즈니스우먼도 결국 이 자기파멸의 욕망을 은폐한 자학과 자조의 언어가 내재한 자기모멸과 자기파괴를 피하지 못한다. 그래 우리들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물신적인 시장(市場;market)이란 수렁 속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비즈니스 순환의 종착이 올 때까지 어리석게도 자각하지 못한다. “여기서 도망쳐야 해!”이 역설적인 비즈니스의 사슬을 끊어내고서야 우리는 모처럼의 평온을 누릴 수 있을 게다. 우리 사회의 낯부끄러운 자괴감, 우매함, 이에 더해 도덕적 불쾌감까지 명민하게 그려낸 역작이다. 자본의 폭력이 난무하는 이 왜곡되고 부정적인 사회의 구조적인 오류는 거듭 반복되어 진술되어야 할 것이다. 자기 꼬리를 잘라먹고 사는 뱀과 같은 사회, 자신이 뜯어먹던 타자성의 마지막 풀까지 먹어치우고는 굶어죽는 이 자본만능의 치명적 결과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냉정하고 섬세하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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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의 은교를 빌리고 싶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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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신시가지라는 단어는 어느듯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겐 그다지 낯설지 않는 용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뉴스을 포함한 각종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국토를 신도시와 구도시로 구분하고, 도시내에서서도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구획하는데 전혀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물론 행정법상이나 지적법상에 이러한 용어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법정 동명으로만 존재하지만 실생활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법규상의 구분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우리자신들이 정해놓은 신시가지나 신도시가 더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新이라는 개념에도 모호한 정의가 뒤따른다. 언제부터인가 新은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의미를 뛰어 넘어서서 새롭다는 뜻보다는 "좋다" 혹은 "남들과 다르다"라는 의미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增이라는 뜻이 있건만 이제 우리는 "좋다"는 의미로 新을 사용하는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신도시나 신시가지라는 말은 그 본연의 개념인 새롭다는 뜻을 희석해버리고 "좋다"라는 의미로 굳어져 버렸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속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재화에 좋다는 의미로 항상 新을 덧붙이면서 타인과 조금이라도 차별화 자신의 모습에 자위를 삼는게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모습이다.
<비즈니스>는 한마디로 소설임에 틀림 없지만 왠지 소설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래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그 석연치 않은 점이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 작품속의 내러티브와 등장인물 그리고 그들의 삶이 바로 지금 이 시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마치 리얼타임으로 찍어내는 듯한 한편의 다큐를 보는듯 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회고발 프로를 시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소설이다. 작중 여주인공이 뇌깔리이듯 성토한 "이 이 도시에서의 윤리성이란 안팎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는 가치가 아니라 지켜지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어 얻어내는 가치였다. 쉽게 말해 들키면 반윤리, 안들키면 윤리라 할 수 있었다."라는 말에서 이 작품의 플롯이나 그 결말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개발발전주의와 빗나간 자본주의의 정점인 ㅁ도시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축소판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아들의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비즈니스(매춘)를 하는 어머니, 자신을 등진 세상에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비즈니스(도둑질)을 하는 전직 경찰, 오로지 선거와 발전만이 지상과제인양 열을 올리는 시장이 속해 있는 신시가지는 겉으로는 좋다라는 의미를 부여잡고 있지만 그 내막은 그야말로 낭떨어지 위를 외줄타는 아슬아슬한 인생들의 집약판과 다를 바 없는 곳이다. 서로가 알면서 속이고 속는 과정의 되풀이가 바로 신시가지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임을 여실없이 보여준다.
타잔의 자폐아 아들 여름이와 여주인공의 남편을 통해 신시가지에 입성할 수 없는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삶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또 다른 어둠의 영역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구시가지는 惡을 대변하는 곳으로 비쳐진다. 좋다라는 개념에 비견 되어서 실패했다는 인생들의 도피처가 바로 구시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그 어떠한 희망도 정열로 없는 죽은 시가지로 남겨지게 된다. 그러나 정작 악의 근원은 다름아닌 다리 건너 신시가지라는 좋은 곳에 있었던 것이었고 이를 누구나 알면서 속이고 속고 그러게 스스로를 자위하게 되는 것이 신시가가지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일 것이다.
전국토가 부동산투기장으로 돌변하고 급속한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마지막 끈이라도 잡을려고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엔 신도시나 신시가지의 新자만 접두어로 붙게 되면 모든것이 다 양해되고 용서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어느 그룹 총수는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 다 바꿔야지 살 수 있다는 표현을 하듯이 우리는 舊라는 글자를 이제는 오래되고 고풍스럽다는 의미보다 나쁘고 뒤떨어진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정말 모든 것을 바꿔 나가고 있다. 이러한 일련을 행위들을 <비즈니스>라는 그럴싸한 용어로 탈바꿈시켜 전국민의 비즈니스맨, 비즈니스우먼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적 공간적 신시가지의 적나라한 모습을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처럼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곳이 다름 아닌 우리가 오매불망 바라고 그 속으로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입하고 싶어하는 신시가지의 참 모습인 것이다.
대체로 사회고발적인 소설의 취약점은 플롯이나 내러티브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입이 한쪽으로 과도하게 편협될 수 있는 우려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경우 비뚤어진 인간 군상들의 빗나간 행태보다 그들 내면속에 잠재되어 있는 심리상태와 그에 따른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격분된 감정에 휘말리는 것을 자제토록 한다. 우리주변의 이야기이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을 눈살 찌푸리지 않고 읽어 나가게 하는 안전장치를 인물들 각각의 가슴속에 녹아 놓았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소재의 작품이 시니컬한 뒷맛을 자아내게 하지만 영화 <폭풍속으로>에서의 엔딩장면처럼 모든 것을 품고 삼킬 것 같은 파도속으로 떠나는 이와 이를 지켜보면서 살아 숨쉬는 듯한 파도 소리를 듣는 남겨진 이를 통해 세상과 화해를 하고 新의 진정한 의미인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독자들의 가슴속에 각인시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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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한 경찰이었으나 모함으로 경찰복을 벗은 남자주인공과 아이의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 매매춘에 뛰어든 여자주인공이 있다. 남자는 아내를 잃게 되고 자폐증을 앓는 아이가 남는다. 자본주의와 자폐증. 실상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어찌 보면 자폐증 걸린 아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일 수 있겠다. 일본의 히끼꼬모리 같은 경우도 그렇고… 물론 인터넷 기반의 탈주체화시키는 대중문화가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지만, 인간이 노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잉여가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병폐 탓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청년 실업이 계속 늘어나고, 중산층이 몰락하고, 직장을 얻을 수 없거나 명퇴를 당해서 마지못해 고육지책으로 자영업자가 되었던 사람들도 무너지고 있다. 이로 인해 가족들도 붕괴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실체이다. 인간 소외의 극치를 겪고 있는. 그러나 지독한 개인주의의 감옥 속에 사는 개개인은 벙어리 냉가슴일 뿐이다. 무엇인가 잘못된 건 알겠고 분통이 터지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래서 그저 자기 안에 갇혀 살 뿐이다. 무기력한 모습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경찰이었으나 도둑이 된 남자나 아이의 과외를 위해 매매춘을 하게 된 여자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윤리를 말하는 것은 가진자들의 논리일 따름이다. 이야기의 기본 포맷이나 문제의식, 주제 등은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한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를 닮았다. 이 이야기도 표면적으로는 간통을 말하지만 들여다 보면 ‘개발’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박범신은 향기로운 우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개발의 이익에 눈멀어 잃은 것들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데, 주제의식과는 상반되고 이질적이게까지 느껴지는 매우 감각적(시각적 후각적 이미지를 잘 활용했다)인 문장과 고운 정서를 바탕으로 격앙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던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돈 몇 푼에 판단력이 흐려지면, 그로 인한 재앙은 감당할 수가 없다. 이 작품도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의 동일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주제의식의 과잉이 느껴지는 것이 아쉽다. 직접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중후반부에는 거의 한 페이지에 한 번씩은 ‘비즈니스’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 같다. 순간순간 격앙된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가 지나치게 말이 많다. 좋은 작품은 독자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게 할 여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욕 때문인지 욕심 때문인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개탄이나 탄식 때문인지, 계도에 대한 열망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지나치게 서두르는 듯하다. 그러나 그 모든 유혹이나 조급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좋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서두르지 말고 조급하지 말고 바쁠수록 돌아가는 느긋함을 갖는 것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일상에서의 실천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작가는 자기가 주장하고 싶었던 의도와는 달리 스스로 지나치게 자본주의화되어 있는 게 아닐까? 자신도 모르게. 이런 부분들만 제외한다면 괜찮은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길 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연재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계간 『자음과 모음』 2010년 가을호와 겨울호에서 연재되었고 연재와 동시에 책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계간 『자음과모음』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정여울씨도 그 계간지에서 지적을 했던 것처럼, 지면에서든 온라인에서든 소설이 연재되면서 연재 완료 시점에 맞춰 책이 출판되는 것이 가지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작가가 충분히 퇴고하고 수정할 시간을 준 후 느긋하게 출판하는 게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좋을 것 같고, 이런 식의 시도나 기획들이 오래도록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장기적 전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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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페이지 조금 넘는 짧은 소설이다. 표지가 출퇴근길 들고 다니면서 읽기는 약간 머슥하다. S라인의 여인이 요염하게 빨간 침대를 연상시키는 쇼파에 잠들어 있는 모습이다. [비즈니스]라는 제목도 너무나 평범한 제목이어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고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이야기는 새로 조성된 신도시와 신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희생양이 된 구도시의 묘사를 하면서 시작된다. 구도시는 신도시의 쓰레기들을 모아 버리는 매립장이 되어가고 기존에 있던 공장들이나 가게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되고 구도시의 인력들은 신도시에서 파출부, 경비원 등의 일을 도맡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신도시에서 주요 부요층과 요직에 있는 인물들의 집에 도난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많은 경비원들과 모든 경비망들을 뚫고 대담한 방법으로 물건을 훔쳐갔고 도난품은 비공개 되었다.
일명 '타잔'이라고 불리는 대도는 그후 많은 아류작이 생겨날 정도로 많은 이슈가 되었다. 나는 아들 정우의 신도시로 학교를 보내고 과외비와 학원비를 벌기위해 몸을 파는 비즈니스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다 '옐로'라는 아이디의 고객을 만나게 되고 그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리고 마지막 관계후 '여보'라고 외치는 외마디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나의 친구 주리는 대학때 부터 족발집에서 일하는 엄마의 돼지 기름 냄새를 지우기 위해 스폰서를 두고 대학을 해결한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재력가에게 시집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결국엔 그렇게 된다. 사랑없이 결혼한 주리는 몸을 나누는 남자친구를 만들면서 그럭저럭 보내다가 나에게 비즈니스를 소개시켜주었던 것이다.
옐로와 다시 만나게 된 모텔에서 옐로는 횟칼을 들고 나를 위협한다. 도대체 누구냐고? 왜 나에게 접근하게 되었느냐고? 그렇게 시작된 관계가 사랑으로 발전하고 그의 자폐아 아들 여름이하고는 더 깊은 정을 느끼게 된다.
구성도 탄탄하고 이야기 소재도 진부하지 않고 짧고 강렬해서 금방 쉽게 읽었다.그러나 뒷맛은 있는 소설이었다. 자본주의 와 교육제도의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절박함이 묻어나오고 그 와중에도 희망의 끝을 놓치않으려는 작가의 의도가 적절히 버물려 있었다.
깊은 밤 잠이 안오실때 간략히 읽어볼 책으로 강추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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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물은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나는 맨손으로 그것들을 빨기 시작했다 빨아야 할 것들은 그러나 그것들이 아니었다 내몸과 마음부터 독한 세제를 풀어 썩썩 비벼 빨고 싶었다 p 174 중에서
나도 섬뜩할 정도로 이익과 욕망이 꿈틀댈때면 내자신을 빨고 싶어질때가 있다 잘풀리는 이중세제를 넣어 남의 눈에 내가 세상의 욕망에 찌든 얼룩이 티가 나지 않게 하얗게 말이다 간음을 하고 있거나 ,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등등 우리는 세상에 너무나 많은 일들로 내자신,세상을 표백제로두 지우기 힘든 때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책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주위에 너무나 흔히 일어나는 평범한 이야기 같다는 생각에 새롭지 않았다 그러나 새롭지 않기에 주위에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한장을 넘기면서 그동안 양심, 윤리, 인간적인 애정들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의 조그마한 모형인 ㅁ시에 살고 있는 하층민의 삶을 통해 작가는 어떤맘을 생각,양심,사랑을 주려고 했던 것일까 ? 라는 의문이 들어서 순식간에 읽어 내려 갈 수 있었다
책속의 내용은 이러하다
ㅁ시- 21세기형 꿈의 도시 라는 캐치 프레이즈처럼 막 발전을 시작하고 있는 지방소도시 어디쯤 조그마한 도시안에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에 신세기대교를 사이에 두고 20분이라는 거리에 무색하게 30년,40년의 차이가 나는 대조적인 도시 풍경을 가지고 있다 시대에 떨어진 빈촌은 짐승의 마을라고 불리기 까지 한다 그속에 나와 타잔의 만남이 있다 아니 우리현실이 녹아져 있다
나 -사업에 실패한 남편, 아들과 같이 ㅁ시로 내려와 아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몸을 팔고 있다 나에게도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절은 있었다 남편을 만났던 그때 비즈니스 우먼이 되기 전 이팝나무 아래에서 순수한 사랑을 나누었던 나 , 이팝나무 아래서 처음 만났고 처음 키스를 나누었던 그때가 그립다
타잔- 전직 경찰, 사업등을 하였으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부동산 정책으로 인해 모든것을 잃고 아내도 죽고 자페아 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신시가지 고위층 집만 도둑질 하는 일명 타잔이다 죽은 아내 유골를 남의 뒷산 아내가 좋았했던 이팝나무 아래에 묻어 뒀다
이둘은 몸을 파는 비즈니스 우먼인 나와 정글의 타잔이 아닌 가스배관을 타고 다니면서 여자를 사는 비즈니스맨으로 만나면서 그둘은 죄를 지니고 있다는 윤리적 공평성 때문에 가까워 졌는지도 모른다
이팝나무라는 순수한 감정과 동시에 도둑과 간음이라는 원죄를 가진 그들 동전의 양면성처럼 우리삶도 어느 한순간의 잘못된 발디딤으로 그 나락으로 쉽게 떨어질 수 있는 시대를 나타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과 결혼을 비즈니스로 절처히 계산했던 친구 주리, 아내의 매춘을 알고 있으면서 눈감아 버렸던 남편, 귀족들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정글속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전사로 길러지고 있는 아들 정우처럼 꿈을 잃고 사는 ,무엇이든 품어주시던 어머니를 잃고 살아가고 우리의 모습들이 그속에 있었다 " 어머니는 조국이다, 꿈이 조국이다 라는 말처럼 우리모두 조국을 잃어버린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내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어 버렸다 나또한 무국적자로 오랫동안 살아오고 있었던게 아닐까 ? 나만 잘살기 위해 , 나만 배불리 먹기 위해 남을 상처주고 가족의 소중함을 모른채 말이다
책말미에 모든 것이 드러나고 타잔의 정부로 낚인 찍힌 나는 아들 정우에게는 몸을 팔아서 과외비를 댄것을 모른다는 남편의 말을 들으면서 " 이도시에서 윤리성이란 안팎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는 가치가 아니라 , 지켜지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어 얻어내는 가치였다 ,쉽게 말해 들키면 반윤리, 안들키면 윤리라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반윤리적이라고 판결이 났으니, 한가지 죄목이 감춰졌다고 정우에게 윤리적이라 강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반윤리와 윤리를 가르는 것이 들키고 안들키고 의 차이로 결정되어 지고 있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단순한 소설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므로 마무리로 갈 수록 나의 얼굴이 뜨거워지고 부끄러움에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내삶이 힘드므로 남에게 가하는 잘못된 행동들은 반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남들이 인식하지 않고 괜찮다는 여럿이라는 다수의견만 있다면 내행동은 윤리적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이다 얼마전 읽었던 법륜스님의 책속에 한구절이 생각난다 문득
세상을 굴림을 당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굴리는 삶으로, 세상에 물드는 삶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정화하는 삶으로 지금 이순간, 지금 이자리에서 자유롭고 행복하십시오
마지막 구절에ㅍ시로 옮겨간 주인공 나가 말했던 것처럼 " 지금 ......참 좋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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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가의 소설은 지금까지 대부분 하루나 이틀이면 독파했었다. 『비즈니스(2010.12.8. 자음과모음)』 역시 예외는 없었다. 주말 하루를 꼬박 투자해서 한 권의 책을 읽어냈다. 아들 과외비를 벌기 위해 스스로 비즈니스라 부르는 사업, 즉 몸을 파는 일을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소개글을 읽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었다. 어디까지 몰락해야 정신을 차릴 것인지 한숨만 나왔다. 퇴폐한 자본주의의 단면을 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넘겨야 하는 책장보다 넘긴 책장이 많아질수록 비난했던 첫 마음이 점점 사라져갔다.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 또한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질하며 무리 밖으로 내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리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로 보였다.
『비즈니스』는 아들의 성공을 보장받는다면 몸을 파는 비즈니스는 윤리적으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가 등장한다. ‘나’는 비즈니스를 작은 수고로움이라는 말로 마음을 달랜다. ‘나’는 비즈니스 중에 고위층과 부자 집만 터는 ‘타잔’을 만난다. ‘나’는 ‘타잔’의 아들 ‘여름’이와도 친해지면서 세 사람은 한 가족이 된 것처럼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아들 과외비를 벌기 위해 매춘을 하는 엄마와 자폐아 아들을 방에 가둬둔 채 고위층과 부자 집의 값나가는 물품만 골라서 터는 도둑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 ㅁ시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구분되는 도시 ㅁ시는 지방과 수도권으로 나뉘는 우리나라 현실과도 비슷하고, 강북과 강남으로 나뉘는 서울의 현실과도 비슷하다. 신시가지의 발전을 위해 지금까지 ㅁ시의 터전이었던 구시가지는 쓰레기하치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구시가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은 버려지고 태워지는 쓰레기하치장처럼 황폐화된다. 어디로 가는 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오로지 밝고 빛나는 신시가지 사람들을 따라가지 위해 애간장을 태운다.
이 도시에서의 윤리성이란 안팎에서 일관되게 지켜지는 가치가 아니라, 지켜지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어 얻어내는 가치였다. 쉽게 말해 들키면 반 윤리, 안 들키면 윤리라 할 수 있었다.(p230)
소설의 마지막은 반윤리적이라는 죄목을 갖게 된 여자가 자폐아 여름이와 함께 살면서 ‘지금, 참 좋아’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남편과 아들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들과 함께 있으면서 행복하다니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할까. 소설은 매춘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지만 실제 우리 현실에서 성공만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작품 속 주인공처럼 아들의 성공을 위한다는 긍정적인 명목아래 윤리와 도덕은 잠시 묵살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부와 명예를 원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탓하자는 게 아니라 욕망을 위해 희생되는 또 다른 마음을 생각해 보자는 얘기다.
매년 발표되는 행복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경제력에 비해 많이 뒤쳐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돈에 대한 끝없는 집착이 불러온 결과일까. 한강의 기적을 배우겠다며 전 세계가 우리나라로 몰려들지만 정작 한국인은 돈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런데 돈이 많아지면 정말로 행복해질까? 자본주의에서 윤리는 어떤 방식으로 지켜지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 한국인은 무엇으로 행복해질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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