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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근원적 탐구와 위험사회에 대한 해결책-신
"서양 문명의 근원적 탐구와 위험사회에 대한 해결책-신" 내용보기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 신’. 평소에는 한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그것이 다른 분야에서는 어떻게 드러나고 영향을 미치는지 주제 중심적인 글 읽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분량이 무려 800쪽이 넘는데다 철학과 신학과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다른 때였다면 어렵다고 판단해서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순전히 신년 초라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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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 - 신’. 평소에는 한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그것이 다른 분야에서는 어떻게 드러나고 영향을 미치는지 주제 중심적인 글 읽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분량이 무려 800쪽이 넘는데다 철학과 신학과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다른 때였다면 어렵다고 판단해서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순전히 신년 초라는 시기가 크게 작용했다. 새해가 된만큼 심도 있고 체계적인 책을 읽고 싶다는 독서욕이 강하게 발동했던 것이다.

 

막상 책을 받고 보니 내 선택에 반신반의했다. 과연 이 책을 완독하고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을런지 걱정부터 앞서는 거였다. 800쪽이 넘는 책의 무게감이 생각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데다 목차에서 신이란 무엇인가?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의 소제목을 보고 나니 그 진지한 물음에 압도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너무 많았다. 영세를 받았지만 성당에 나가지 않은지 꽤 오래된 냉담자인 나로서는 읽으면서도 내가 믿는 신의 존재가, 신의 의미가 이렇게 해석되는 거였구나 하고 새롭게 알게되는 기쁨도 적지 않았다. 내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면 신앙 생활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멸하며, 우주 만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 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114쪽)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사과)을 그것(사과)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지요. 스스로 생성`작용하는  존재가 아니고야- 다시 말해 살아계신 하나님(el hay)이 아니고야- 어떻게 본질과 존재를 피조물들에게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장)’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그것이 바로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YHWH)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haya)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지요. (157쪽)


창조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역사가 아니고, 섭리에 의한 지속적 보존과 인도라는 의미입니다.(395쪽)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 구원입니다. 존재자체(ipsumesse), 진리자체(ipsa veritas), 선자체(ipsa bonitas), 또는 아름다움자체(ipsa pulchritudo)인 것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지요.(484쪽)


섭리의 어의적 의미는 '미리 보는 것(pro-videre)'인데,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신이 인간과 교회 그리고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로 해석합니다.

신은 미리 예정한 섭리를 통해 자신의 창조 세계와 그 안의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고 돌보며 구원하지요.(562쪽)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지요. 그렇지만 신은 오로지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갑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루지요.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침해도 없습니다.(609쪽)

 

그런데 이런 종교와 직접 관련있는 물음 외에 현재 우리 현실에 가장 맞물려 있는 주제도 있었다. 진화론과 창조론, 그리고 신의 유일성과 배타성 문제가 그 것인데 이 문제들이 과학과 종교의 긴장을 불러 일으키고, 또 현재 세계에서 테러나 종교간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불씨가 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김용규는 이 문제에 대해 전적으로 신의 입장을 긍정하고 있다. 기독교의 신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이지 않고 ,기독교의 창조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충분히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 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가는 것이다.

(중략) 그렇다면 자연선택이라는 것이 다윈의 ‘진화 원리’ 또한 신이 만들어 지속적 창조를 위임한 ‘현실화 원리’ 내지는 ‘자연법’ 또는 ‘영원한 법칙’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육4k 엇지 않은가!(454쪽)

 

그는 ‘신은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기독교가 이미 오래 전부터 확보했다는 것과 약간의 장애물만 제거하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신의 유일성은 기독교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또 포기해서는 안되는 신의 속성입니다.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 무차별적 포괄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인류 모두가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를 이루어나가야 하지요. (783쪽)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일자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성도 동시에 가지고 있지요.

일자성은 무규정성에서 나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이지만, 삼위일체성은 사랑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시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 공동체성, 영원동등성이고 몰트만의 표현을 따르자면 상호내주적`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적이지요.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heterologous love)’만이 존해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습니다.(800쪽 )


그는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오해하거나 무지하거나 혹은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기에 김용규는  ‘신의 유일성을 어떻게 보존하면서가 아니고 어떻게 '신의 유일성을 바탕으로 다른 종교와 연대와 협력을 이루어 낼 것인가 하고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한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의 유일성이 현실에서 배타적이고 폭력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그런 신학적 입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배타성과 폭력성을 오로지 오해와 무지 혹은 이데올로기적이라고만 파악하는 것은 현실에서 발을 뺀 학문적인 해석으로 치우쳐 보였다.  


필자 김용규는 철학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문학이나, 영화 등 다른 장르의 예술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해온 철학자이다. 대중들에게 철학을 좀 더 쉽고, 일상적으로 다가가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렇 ‘신’에 관련한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파고들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서양 문명을 읽는 코드-신’ 이 책은 설렁설렁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언급되는 것도 그렇지만 철학 혹은 신학 용어나 개념, 신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신학적 물음과 그 답의 흐름과 맥을 좇아가며 완독하는 것부터 버거울 정도로 고전하면서 읽었다. 일독하는 것으로 이 방대한 내용을 소화해서 받아 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재독, 삼독을 해야하지 겨우 제대로 이해하지 않을까 싶었으니, 철학, 신학에 대한 나의 이해도나 사고의 깊이가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용규가 ‘신’에 대해 이렇게 파고 들게된 이유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 문명에서 신이 몰락한 이후, 사람들이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에만 열을 올리지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기 때문이었다니. 그가 지적한 대로 세계는 지금 위험 사회에 접어들었고 그의 염려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가 시도한‘신'에 대한 탐구의 목적지는 결국 인간이었다. 서양 문명의 근원을 이루었던 신에 대한 접근은  신의 빈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험사회, 그리고 가치의 파편화 등 현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당면 문제를 짚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참고문헌과 찾아보기를 보면서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흘린 땀방울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YES마니아 : 로얄 e****0 2011.01.17. 신고 공감 10 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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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의 중심축,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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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 김용규 / 휴머니스트]   철학, 역사, 문학, 과학과 예술은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독자적으로 생성, 발전하지 않는다. 서로 연관을 갖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를 한다. 연결고리는 신(또는 신화)이다. 서양문명도 마찬가지다. 서양문명의 중심축은 기독교이며, 그 심연에는 기독교의 신이 자리 잡고 있다.   기독교와 신학은 당대를 지배적으로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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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 김용규 / 휴머니스트]

 

철학, 역사, 문학, 과학과 예술은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독자적으로 생성, 발전하지 않는다. 서로 연관을 갖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를 한다. 연결고리는 신(또는 신화)이다. 서양문명도 마찬가지다. 서양문명의 중심축은 기독교이며, 그 심연에는 기독교의 신이 자리 잡고 있다.

 

기독교와 신학은 당대를 지배적으로 주도하는 문명과 대립하는 동시에 융합하면서 성장해왔다. 처음부터 기독교가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온갖 박해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하고, 이웃 사상을 접목하면서 교리를 발전시켰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300년 가까이 탄압해오던 기독교를 공식 승인하는 사건이다. 이후 기독교는 1700년 가까이 종교의 입지를 다지며 서양문명에 스며들어 문화를 이어간다.

 

고대 서양문명의 두 기둥은 그리스 문명에서 유래한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에서 퍼져 나온 <헤브라이즘>이다. 두 문명은 서로 대립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각의 문명을 형성하는데 <밀라노 칙령>이후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다신교)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에 서서히 밀려난다.

 

그리스 철학으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문명은 인류 문명의 근원이다. 철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인간 사유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묻고 또 묻다가 인간 너머의 존재, 즉 신에 대해서 사유하게 된다.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듯이 신의 존재에 대해서 인간의 상상력(사유)이 커지면서 철학의 다른 모습인 종교(신학)가 태생한다. 그리고 신학의 영향력 아래 문명이 발전한다.

 

서양의 고대 종교는 구약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로 구분할 수 있다. 고대부터 내려온 서양의 신. 신이 커다란 줄기라면 철학, 역사, 문학, 과학, 예술은 곁가지에 해당한다. 서양의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곁가지를 아우르는 줄기, 즉 신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 신의 존재, 신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서양문명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그리스 철학이다.

 

철학자 김용규는 서양문명과 신의 관계에 대해서 800쪽에 걸쳐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철학적 사유의 시작은 개념을 정의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의 사용과 대상에 대한 명칭이 중요하다. 저자는 먼저 <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신의 모습을 유추하는 과정을 거친다. 고대 철학자와 신학자가 이야기하는 신의 모습과 현재 우리가 개념 잡는 신에 대해서 살펴본다. 그리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 조심스레 철학적 접근을 한다.

 

여기에서 신은 ‘존재’인가 ‘존재함’인가, 신은 ‘무엇’인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접근을 시도한다. 존재와 존재함의 차이, 거기에서 이어지는 신의 유일성, 영원성, 무한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신(창조자)의 위대함’을 설명한다. 이 과정을 거치며 저자는 그리스도교와 그리스 철학에 되짚어 보고, 철학자와 신학자의 업적에 대해서도 설명을 한다. 굉장히 지루하고 힘겨운 과정이지만 이것은 독자에게 ‘신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다. 저자는 시대를 넘나들며 그림과 문학작품, 철학과 과학으로 신의 존재와 의미를 설명한다.

 

철학적 접근방법을 이야기 하면서 저자는 종교간, 문명간, 영역간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특히 과학과 종교간 단절에서 ‘패러다임’과 ‘언어놀이’를 인용한다.

 

 등고선(等高線) 지도를 보면서 학생은 종이 위에 그려진 선들을 보지만, 지도제작자는 지형에 관한 그림을 본다. 거품상자의 사진을 놓고 학생은 혼란스럽게 끊어진 선을 보지만, 물리학자는 낯익은 원자핵 내부의 사건 기록을 읽어낸다. 그러한 시각적 변형을 숱하게 거친 다음에야 학생은 과학자 세계의 일원이 되어 과학자가 보는 것을 보고 과학자가 반응하듯이 반응하게 된다.
- [과학혁명의 구조 / 토마스 쿤] 중에서

 

패러다임은 곧 자신이 생각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토마스 쿤은 그의 저서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은 ‘종교적 개종’, ‘정치적 혁명’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과학과 종교는 패러다임이 다르기 때문에 보는 것과 인식하는 것이 다르고, 이것을 뛰어넘어 사고하는 것은 ‘종교적 개종’과 ‘정치적 혁명’처럼 어렵다.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우리가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보다 한 차원 더 유연한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다. 쿤의 패러다임이 상대적으로 ‘닫힌 체계’라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놀이는 ‘열린 체계’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 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의미를 발생시키는 규칙, 삶의 양식을 ‘문법’ 또는 ‘논리적 문법’이라 지칭했다.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다.

 

과학자와 철학자, 신학자와 과학자가 서로 다른 패러다임으로 서로 다른 언어(문법)로 소통하려 하기 때문에 단절이 생기고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특히 종교간의 단절은 서로를 배척하는 더 큰 문제로 이어진다. 각각의 종교가 자기만의 언어로 주장하는 행위는 종교간 단절을 초래하며 더 나아가 인간 사회 전반의 단절과 불안을 야기한다.

 

저자는 기독교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 그래서 오해받고 있는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도 성경과 신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 가장 많이 오해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이 유일신이기 때문에,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예전부터 그런 오해는 있었고, 최근에 중동 지역의 이슬람 문화와 서구의 기독교 문화가 충돌하면서 자연스레 이런 오해가 더 커지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배타적인 유일신이 아니라 포괄적이며 통일적인 유일신이다.

 

저자가 800여 쪽에 달하는 책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서양문명과 신의 관계만이 아니다. 신학자와 철학자, 과학자의 업적을 이야기하고 패러다임과 언어놀이를 거론하며 기독교를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서로(종교와 종교, 문명과 문명)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어떻게?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을 다시 살펴보면, 저자는 요즘의 서양문명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위기의 원인은 오랫동안 서양을 관통해왔고 지지해왔던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이했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신 중심 시대‘를 탈피해서 ’인간 중심 시대‘를 맞이한 서양이 문명적 위기를 맞이한 이유는 ’완벽한 신‘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고 ’불완전한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서양문명뿐만 아니라 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특정 단체나 국가 또는 종교가 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제적 대화와 연대 그리고 범세계적 협력이 필요하다. 당연히 종교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신의 말씀‘을 따르는 종교도 서로 배척하고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그것을 빌미로 이교도들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들이 믿는 경전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추종자일 뿐이다.

 

신의 유일성이 연대와 협력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최근의 사회문제, 국제문제, 불안과 위험... 이것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유일성을 지닌 종교(기독교에 한정된 종교가 아닌)가 필요하다. 저자가 신에 대해서 방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 시대에 다시 신을 찾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종교들 사이의 대화를 이끌고,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낳으며,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세계 평화를 이룬다. 서양문명의 중심축인 신은 곧 서양문명을 위기에서 구할 해결책이다.

 

 종교들 사이의 평화 없이 세계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종교들 사이의 대화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서로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는 종교들 사이의 대화가 있을 수 없다.
-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

 

인간 중심의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다. 고대가 저물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화합이 일어났고, 중세가 저물 무렵 르네상스가 일어났듯이, 위기의 시대에 통합과 소통의 길을 찾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이다.

o*****a 2011.02.11. 신고 공감 5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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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학변증 또는 기독교 철학서...
"기독교 신학변증 또는 기독교 철학서..." 내용보기
이 책은 표제로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고 하여 객관적인 시각에서 신이라는 단어를 통해 서양문명을 분석하는 내용인 듯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아니다. 기독교 호교론, 신을 변호하는 변신론, 변증론에 가까운 책이다. 또 서양문명을 다룬다기 보다는 서양철학, 이중에서도 기독교의 바탕이 되는 그리스철학에 대해 주로 다루며 그리스 철학이 기독교 교리 형성에 어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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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표제로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고 하여 객관적인 시각에서 신이라는 단어를 통해 서양문명을 분석하는 내용인 듯 보이지만 내용은 전혀 아니다. 기독교 호교론, 신을 변호하는 변신론, 변증론에 가까운 책이다. 또 서양문명을 다룬다기 보다는 서양철학, 이중에서도 기독교의 바탕이 되는 그리스철학에 대해 주로 다루며 그리스 철학이 기독교 교리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책이다. 즉 기독교를 철학이라는 포장을 통해 아주 세련되게 변호하고 지성적으로 이해되게 설명하려고 노력한 책이다. 즉 기독교인이라면 아주 흥미있게 읽을 가능성이 높고,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매우 답답함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달리 표현하면, 이 책을 신이라는 주제를 통해 서양문명을 이해하고자 접하려고 한다면 실망스러울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의 신개념, 창조의 개념,창조의 목적,신의 인격성, 유일신의 개념, 삼위일체의 개념, 배타적이라는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풀어보고자 기독교 교리를 형성한 그리스 철학자와 위대한 교부들의 이야기를 풀어서 설명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접근으로 지성에 호소하는 변신론에 가까운 글들 이지만, 종교라고 하는 것이 제 아무리 그럴 듯하게 철학적으로 풀어서 설명을 하더라도 철학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고 그저 비이성적인 믿음으로서만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책이다. 대표적인 예로 제시할 수 있는 것으로는, 이 책 초반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이방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의인화된 신과는 전혀 다른 신임을 역설한다. 이방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월적인 신,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존재임을 역설하면서, 나중에는 신과 동일본질인 성육신된 신, 예수의 등장에 대해서는 앞서의 세련된 철학을 동원한 설명이 전혀 적용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볼 수도 없고, 인간의 이성의 틀로는 알 수가 없는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앞서 저자 스스로 설명한 신개념을 스스로 부정해 버리는 꼴이다. 의인화한 그리스의 신을 비판한 저자가 내세운 기독교의 불가해한 신의 최대의 의인화가 바로 예수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들로는 창조의 목적은 구원이다라는 부분으로 기독교 교부와 종교개혁가들의 저술 내용을 빼곡이 설명을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알면서 창조했다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변증이 전혀 없다.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 역시, 삼위일체의 교리가 형성되기 까지 무수한 철학적 신학적 논쟁을 소개를 한 뒤, 결국엔 삼위일체가 가르치는 포괄성, 통일성, 포용성이 중요하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그 장문의 무수한 신학적, 철학적 논쟁소개가 과연 독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과연 이렇게 과한 분량이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양문명을 일목요연하게 관통하고자 하는 기대로 들었던 800여쪽의 책. 하지만 제목과는 달리 일관되게 변신론으로 흐르는 책의 내용에 다소 실망했다. 따라서 철학적이고 지성에 호소할 수 있는 기독교 변증론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할 뿐이다.

YES마니아 : 로얄 c*****e 2011.08.13.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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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의 흥망성쇠, 거시기뿐이 아닐터인데..
"서양문명의 흥망성쇠, 거시기뿐이 아닐터인데.." 내용보기
특정한 종교를 갖지 않은 이에게 당신의 종교는 무엇이냐는 묻는다면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이 묻는 답은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자랑하는 종교로는 불교와 천주교, 기독교가 있다. 그밖에도 다양한 종교와 같은 종교 안에서도 수많은 종파가 있겠으나 요정도로만 하자.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
"서양문명의 흥망성쇠, 거시기뿐이 아닐터인데.." 내용보기

  특정한 종교를 갖지 않은 이에게 당신의 종교는 무엇이냐는 묻는다면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이 묻는 답은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자랑하는 종교로는 불교와 천주교, 기독교가 있다. 그밖에도 다양한 종교와 같은 종교 안에서도 수많은 종파가 있겠으나 요정도로만 하자.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당신의 종교는 무어냐는 질문에 답을 하기에는 나 자신이 불교스럽지도, 그렇다고 천주교나 기독교스럽지도 않기에 <무교>, 즉, <종교가 없다>라고 말을 함과 동시에 "그럼, 기독교로 오라"는 답변이 쏟아지기 일쑤다. 왜냐하면, 자신의 종교를 다른 사람(이교도)에게 전파하려는 <복음주의>가 가장 강한 종교이기에 그렇다. 물론 모든 기독교가 그렇다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이렇게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서론만 하려고 해도 너무 길고 재미도 없다. 그래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서 읽은 구절을 늘 명심하고 웬만해선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 구절은 대충 이렇다. "정치와 종교에 딴지를 거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 왜냐면 아무리 소신을 밝혔을 뿐이라고 변명을 해도 수많은 바보들을 상대로 싸우려는 진짜 바보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구문은 아니지만, 대충 뜻은 이랬다. 물론 나는 <종교의 위대함>을 느낀다. 얼마 전에 선종하신 고 김수환추기경도 존경하는 분이셨고, <무소유>라는 책으로 귀의하신 뒤에도 유명세를 치르시는 고 법정스님도 존경해 마지않는 분이다. 그밖에도 수많은 종교인들이 사회의 낮은 곳에서 그 얼마나 힘든 일도 마다않고 자신의 믿음 하나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듣노라면 <종교의 위대함>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오직예수>,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다니며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칼'보다 무서운 독설(?)을 뿜어내는 모습을 볼 때면 저절로 얼굴이 찌푸리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더욱 종교스런 삶에 회의를 느끼며, 종교의 좋은 뜻은 깊이깊이 감복하고 가까워지려고 하나 어설피 믿는, 엉뚱하게 믿는, 맹목스럽게 믿는 이들과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이렇게 나는 특별히 종교스럽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런 내가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읽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신>에 관한 내용일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서양문명의 두 기둥하면 그리스 문명에서 퍼져나온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에서 퍼져나온 <헤브라이즘>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다신교)>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일신교)>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해석에 대해 주석을 단 책일 거라는 생각에서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초반을 읽을 때만 해도 그런 의심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1장이 끝나고 2장을 읽기 시작하면서 부쩍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서둘러 훑어본 나머지 장들의 내용 역시 모두 <헤브라이즘> 일색인 것을 확인하고서는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 두꺼운 책이 <오직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런지 하고 말이다.

 

  이 책은 5부 9장에 걸쳐 <신이란 무엇인가> 또는 <기독교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하면서 <기독교> 나아가서 <종교>가 '왜 필요한 지'에 대해 800여 쪽에 걸쳐 풀어놓은 책이다. 두꺼운만큼 지루할까? 사실 그렇지는 않다. 아니 딱히 그렇지 않지도 않다. 종교와 신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이 흥미로울테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온통 의혹투성이이고 왜 그렇게 이해해야만 하는지 마치 <신을 긍정스럽게 바라보고 이해해야만 '서양'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강요당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이런 분들에게는 발췌독을 권한다.

 

  이를테면,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그릴 수가 있지?'라든가, '하나님의 모습이 조금 이상한대? 마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제우스같기도 해'라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라면 이 책의 <1부>를 읽으면 스스로 품은 의문에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은 분들이라면 이 책의 <2부>를 읽으면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신이 어떻게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에서 말한 수많은 인문철학적 풀이로 신의 존재를 증며해냈지만..읽을 때는 고개가 끄덕여지다가도 돌아서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야? 라며 되돌아오는 통에 내 의식에 혼란만 올 뿐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종교스럽지 못한 성향 때문이겠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의 한판 승부에 대해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의 <3부>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무척 흥미로운 대결이지만 이 책에서는 결국 <창조론>이 승리하는(?) 싱거운 승부로 끝맺기에 소개는 생략한다. 아니 소개하고 싶지 않다. 내가 응원하는 편은 <진화론>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잠깐 책소개한다면, 한때 '당신의 종교는 무어냐?'는 물음에 '나는 불가지론자이야'라는 답변을 즐겨썼는데, 이 불가지론에 대한 어원을 밝히는 부분이 언급되었다. 이 부분을 옮기면, 토마스 헉슬리는 입증될 수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해 마치 뭔가를 아는 것처럼 주제넘게 왈가왈부하는 유신론자들, 무신론자들, 관념론자들을 싸잡아 조롱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불가지론(Agnosticism)'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437쪽) 이런 내용이다. 이 부분을 읽으니 앞으로는 '불가지론자'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겠다. 나는 훌륭한 종교인들은 물론이고, 보통의 종교인들과 맹목스런 종교인들을 싸잡아 놀려먹을 생각은 갓 털갈이를 한 가을 호랑이의 터럭만큼도 없다.

 

  하지만 <장난감 하나를 얻자고 영원을 팔아?(339쪽)>라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루크리스의 겁탈>을 인용하며 '신을 믿는 정당성'을 찾으려는 시도에는 불쾌감을 느꼈다. 물론 가을 호랑이의 터럭을 붙잡고 이 책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전체를 놓고 보아도 이런 식의 시도를 통해서만이 <서양문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라는 논지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아서 불쾌하다는 것이다. 서양문명을 오로지 (그리스도교의) <신>을 통해서만 이해하라는 옳지 않은 논지 같아서 더욱 불쾌했다.

 

  끝으로 오랜 논란이었던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왜 다른가?> 또는 <그리스도교(일신교)는 왜 그토록 다른 종교에 배타스러운가?>에 의문을 품은 독자라면 이 책의 <5부>를 놓치지 말기 바란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 등장하는 인물의 고민이기도 했는데, 이 물음에 미완에 그쳤던 답변이 이 책에서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싱겁게도 그 답변이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이 서로 화해를 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짜깁기>를 했다는 내용이었지만...

 

  답변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어떤 물음에 답을 내놓았는지 풀어보면,

 ·만일 야훼가 유일신이라면 구약성서는 왜 야훼에 대해 다신론적 표현을 사용했는가?

 ·유일신이 다른 신을 질투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사실 야훼는 이스라엘의 부족신으로서 그 이웃 부족의 신들과 싸우는 신이 아니었는가? 그래서 그토록 배타적이고 폭력적이었던 게 아닌가?

 ·아니, 다른 사설은 전부 집어치우자! 무엇보다 예수가 직접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라고 배타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러니 기독교는 마르시온처럼 야훼를 부정하거나, 자기들 신의 배타성과 폭력성을 인정하는 게 솔직해지는 방법 아닐까? 이에 대해 더 할 말이 있는가? (742~743쪽)

 

  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너무도 치밀하고 난삽해서 어떻게 정리할 수가 없다. 또 성경이나 성직자들의 견해에 전문스럽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이니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직접 읽으며 그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 보시길. 참고 삼아, 나는 이 실타래를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르처럼 단칼에 내리쳤을 뿐이었다.

 

  이 두꺼운 책을 읽기에 앞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할 내용은 이 책의 <맺음말>이 아닐까 싶다. 글쓴이의 표현을 빌자면 '신에 대한 우리의 길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하기에 앞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과 뜻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전체를 이해하기 힘들테니 말이다.

 

  글쓴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름아닌, <서양문명의 위기는 '신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이했기' 때문이다.>(803쪽) 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말인즉슨, <신 중심 시대>를 탈피해서 <인간 중심 시대>를 맞이한 서양이 문명적 위기를 맞이한 까닭은 <완벽한> 신을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고 <불완전한>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더 나아가 <신> 대신 <자연과 인간>에게 눈을 돌려 그것을 연구하고 표현하는 데 주력한 지금의 시대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 그러니 신의 창조물인 자연과 인간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막을 방법을 모색해보자...

 

  과연 글쓴이가 말한 <방법의 모색>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내 짐작이 틀림없다면 그것은 거시기일 것이 틀림없다.



YES마니아 : 로얄 z******8 2011.01.16. 신고 공감 3 댓글 6
리뷰 총점 종이책
신으로 수렴(收斂)되고, 신으로부터 발산(發散)되는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
"신으로 수렴(收斂)되고, 신으로부터 발산(發散)되는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 내용보기
솔직히 말하자면 그 두께와 쪽수에 적잖이 부담이 되는 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관심을 갖고 읽는다면 꽤 흥미진진한 이야기임은 틀림없지요. 목차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것이 더욱 좋겠지만 독자의 관심 부분을 찾아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자가 은연중에 신을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못내 불편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 사회가 직면한 종
"신으로 수렴(收斂)되고, 신으로부터 발산(發散)되는 서양문명에 대한 이해" 내용보기

 

솔직히 말하자면 그 두께와 쪽수에 적잖이 부담이 되는 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관심을 갖고 읽는다면 꽤 흥미진진한 이야기임은 틀림없지요. 목차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것이 더욱 좋겠지만 독자의 관심 부분을 찾아 읽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저자가 은연중에 신을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못내 불편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 사회가 직면한 종교 문제-폭력성과 배타성-로 인하여 의도하지 않은 색안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신을 빙자해 이익을 챙기고, 신을 방패삼아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이지요.

 

따라서 저자 또한 맹목적으로 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와 과학, 신학과 철학 등에서 펼쳐진 논쟁과 여러 문학과 예술 작품 속에 스며든 신을 이야기하며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로서의 신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11년 1월 6일, 성경에서 3명의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 예수가 태어난 곳을 찾아왔다고 돼 있는 예수 공현축일, 성 베드로 성당에 모인 1만여 명의 신자들에 대한 설교에서 “우주는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빅뱅(Big Bang)과 같은 복잡한 과학 이론들의 뒤에도 신의 뜻이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졌다는 사고를 거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이는 아마도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2010년 9월 9일 출간한 자신의 책 ‘위대한 설계(Grand Design)’에서 “우주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대폭발인 빅뱅이 신적 존재의 개입이 아닌 중력의 법칙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며 “우주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론 성격의 답변으로 보입니다.

 

교황이 이전에 진화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있었지만 빅뱅과 같은 특별한 개념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합니다. 교황은 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신’과 ‘빅뱅’을 언급했을까요?

 

빅뱅이론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우주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탄생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펼쳐졌다고 주장하며 오늘날 우주의 발생을 성명하는 표준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137억년 전 빅뱅에 의해 탄생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빅뱅이론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에서 주목한 ‘태초(princpium)’에 대한 설명과 흥미롭게도 맞아떨어진다며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서양문명을 읽는 기독교 코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단언했습니다.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의 관계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으니, 창조 이전에는 사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태초에’ 창조와 함께 시공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우주는 모든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아주 작은 시공거품(space-time buble)에서 시작되는데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그 시공거품들 가운데 초기 상태가 ‘우연히’ 우리가 사는 데 적합하게 발생되도록 조율된 하나가 팽창한 것이랍니다. 이는 스탠퍼드 대학의 러시아 출신 물리학자 안드레이 린데(A.Linde)에 의해 제기된 이론인 ‘다중우주 해석론(Many World interpretation)’으로 전체 우주에는 이런 시공거품들이 무수히 많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카오스(chaos)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상적인 아이디어가 서양문명에선 생소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조르다노 브루노(G.Bruno, 1548~1600)야말로 ‘무수한 우주’라는 발상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답니다. 중세신학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의 우주관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인 그는 ‘신의 본질이 무한하다’는 공인된 전제(principia communia)로부터 ‘우주는 무수히 존재한다’는 별론을 명백히 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최근 몇 년 아메리카 합중국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기독교의 창조론을 공격하는 다니얼 데닛(D.C.Dennett)이나 리처드 도킨스(R.Dawkins) 같은 과학자들과 이에 맞선 알리스터 맥그래스(A.E.McGrath)나 필립 존슨(P.E.Johns) 같은 기독교 지식인들에 의해 펼쳐지고 있는 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 논쟁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종교와 과학, 신학과 철학 등이 진행했었던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논쟁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겠더군요.

 

중세에 가장 탁월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T.Aquinas, 1225~1274)는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더 명백한 길(via manifestior)’, 이른바 ‘다섯 가지 길(quinque viis)’을《신학대전》에서 전개하면서, 다섯 번째 논증으로 사물의 궁극적 설계자 또는 통치자(gubernatione rerum)로서 신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영국의 자연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였던 윌리엄 페일리(W.Faley, 1743~1805)가 《자연신학》에서 보통 ‘페일리의 시계 유추 논증’이라고 부르는 예를 들어 쉽게 설명했답니다. 보통 이를 ‘목적론적 증명(der teleologische Gottesbeweis)’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종류의 논증에 대한 비판은 크게 세 가지로 이뤄졌다고 합니다.

 

첫 번째 비판은 페일리의 논증이 나오기 23년 전 영국의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D.Hume, 1711~1776)이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에 대한 자신의 비판서인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ouros, 기원전 341~기원전 270)의 우주론인 ‘에피쿠로스의 가설’을 예로 들면서, 어떤 것이 질서를 갖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설계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회의론을 제기했습니다. 우연에 의해서도 세계가 형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단순히 추론에 의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부질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두 번째 반론은 존 스튜어트 밀(J.S.Mill, 1806~1873)이 페일리 논증의 문제점을 논리학적으로 지적했답니다. 페일리의 논증은 유비추론(Analogical Inference) 형식을 취하는데, 유비추론은 전제들이 참(眞)인 경우에도 결론이 ‘확률적 참(probably true)’ 또는 ‘가능적 참(possibly true)’일 뿐 ‘필연적 참(necessary true)’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유비추론은 사물이나 사건의 유사성(analogy)을 근거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논증인데 비교하는 대상과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논거가 강해지고 낮을수록 논거가 약해지기 때문이죠. 이런 경우 현대논리학에서는 ‘참의 정도’가 낮다고 하며 결론이 ‘충분히’ 거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이자 가장 결정적인 반론은,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찰스 다윈(C.Dawin, 1809~1882)의 진화론에 의해 제기됩니다.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을 당시 서구 지식인들이 선호했던 귀납법을 사용해서 경험적․실증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새의 날개, 물고기의 지느러미, 인간의 눈과 심장 등이 그렇게 복잡하고 정밀하며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진 것은, 진화가 동식물을 막론하고 생존경쟁을 하는 가운데서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종만 살아남는 방향으로 ‘충분히 오랫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16, 17세기에 이루어진 두 차례 과학혁명과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을 거치며 과학주의와 실증주의에 물든 19세기 사람들이 굳이 페일리의 논증을 받아들이면서까지 그렇지 않아도 마냥 의심스러운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증거 자료가 뒷받침되는 다윈의 진화론이 논리적으로 더 타당하고 경험적으로도 더 건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페일리의 논증이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기 전에 이미 다름 아닌 기독교 안에서 강하게 비판을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18~19세기 서구에서 유행하던 자연신학은 당시 신교와 구교를 막론해서 진실한 신앙을 가진 신학자들이 맞서 싸운 가장 위험한 이단적 이론으로, 차라리 다윈의 진화론은 받아들일 수 있을지라도 페일리식의 자연신학은 허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理神敎), 인류를 숭배하는 인류교(人類敎)와 같이 기독교를 인간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종교로 개종하려는 이단들의 온상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독교는, 신의 존재 및 진리의 근거를 초이성적 계시에서 구하지 않고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에서 구하려는 자연신학에 대해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구호로 강력하게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답니다.

 

따라서 저자는 근래에 지적 설계론을 두고 과학자들과 기독교 지식인들이 벌이는 논쟁은 적어도 두가지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는 기독교가 예나 지금이나 적극 반대하고 있는, 전통적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연신학적 주장들, 페일리의 논증을 상대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과학자들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윈의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신은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여지를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가톨릭이 199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인정된 것처럼 어느 기독교 종파나 교단이 원하기만 한다면 진화론을 창조론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 같은 이유로 페일리의 시계 유추 논증, 목적론적 증명, 물리신학적 증명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번째 길’은 19세기에 이미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또한 종교적으로도 거부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이런 논쟁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철학하는 신학자’ 플라톤과 ‘철학하는 과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기원전 322), 이 위대한 두 거인의 학문적 취향이 서양 학문을 크게 두 줄기로 갈라놓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개념에서 출발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으로, 우리가 정신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idea)에 대한 지식’이 진리라는 플라톤과 ‘감각적 경험에서 시작해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논증으로, 우리가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이도스(eidos)에 대한 지식’이 진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적 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세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를 통해 전해진 플라톤의 영향 아래 있던 에리우게나,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보나벤투라 등을 비롯한 베네딕토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속한 학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새롭게 받아들인 로스켈리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등을 비롯한 도미니크 수도회 출신 학자들로 갈라섰답니다.

 

그리고 근대에는 각각 그 전통을 이어받은 데카르트(R.Descartes, 1596~1650), 스피노자, 라이프치히(G.W.Leibniz, 1646~1716) 등 대륙의 합리론자들과 로크(J.Locke), 버클리, 흄 등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첨예하고 대립한 것이랍니다.

 

 

그럼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일부 기독교인의 ‘사찰 땅 밟기’,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상징되는 포교 활동 등에서 보여지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요?

 

비단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지요.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신이 약속한 땅이라며 점령했습니다. 2001년 3월 8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신에 대한 모독이라며 파괴했으며, 2001년 9월 11일 알 카에다는 신의 성전을 외치며 세계무역센터를 폭파했지요. 2003년 3월 20일 아메리카 합중국은 악의 축을 제거해야 한다고 이라크를 침공했으며, 근래 유럽 몇몇 국가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을 금지시키는 법안이 속속 제정되고 있답니다.

 

한 세계를 지배하는 신 개념은 그 지역에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外延)이자 정점(頂點)으로, 그 세계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바꾸어 말해 그 세계가 숭배하는 신 개념에 속하지 않은 세계의 가치는 없고, 그보다 더 높은 가치도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만일 기독교를 비롯한 유일신 종교들이 주장하는 유일성이 곧바로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을 의미한다면, 도킨스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이 근거 없는 억지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속성들 가운데 유일성이야말로 지난 2000년 동안 서양문명을 암울하게 만든 가장 해악적인 요소라고 단정지어야겠지요.

 

그러나 저자는 유일신 개념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플라톤과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가 규정한 일자(一者)의 의미와 기독교의 삼위일체(Trinitas, 三位一體)를 살펴보며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일자성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뿌리인지 아닌지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종교와 과학, 신학과 철학 등에서 전개되는 신에 관한 논쟁을 접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대부분 흥미롭기는 하지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회피하거나, 머리 아픈 이야기라며 손사래를 치거나 혹은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정도가 일반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논쟁을 살펴보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종교와 과학이, 신학과 철학이 한편으로는 날카롭게 대립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에, 기독교와 신학은 언제나 당대를 지배적으로 주도하는 문명과 대립하는 동시에 융합하면서 성장해 왔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현재의 주도권은 거의 과학과 철학으로 넘어갔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대화와 소통을 통해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낸다면 바람직한 일이지만 급하게 서둘러야 할 목표는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종교와 과학, 신학과 철학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위해 우선 상대가 사용하는 전문용어(reminus)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함께 대화와 소통이 ‘상호주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답니다.

 

따라서 같은 용어로 같은 내용을 말할지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겠지만, 창조론과 빅뱅이론을 비교해 보는 것처럼 대립하는 두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물론, 히브리적 요소와 그리스적 요소, 유신론적 성격과 유물론적 성격, 종교적 믿음과 이성적 사고가 여전히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서양문명의 이중적 성격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렇듯 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함께함으로써 ‘온전한 담론’이 되게 하자고 합니다. 작은 이야기가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가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에 작은 이야기를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고 합니다. 물론 서로 상반․대립하는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한데 아우를 수 있는가, 충돌하는 가치들을 어떻게 종합할 수 있는가의 어려운 문제가 있겠지만 잠시 미뤄두자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 개념이 애당초 상반․대립하는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의 불가능한 종합을 시도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처럼, 당시 학자들이 이뤄 낸 놀라운 지적 노력을 추적하면서 상반․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종합하는 다양한 기법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찰하고 발전시키면, 우리가 해야 할 새로운 종합을 이룰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전근대, 근대, 탈근대라는 역사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위험사회’를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더 이상 “사냥꾼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고 유토피아를 창조할 수 있는 정원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신으로 수렴(收斂)되고, 신으로부터 발산(發散)되는 서양문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 무엇보다도 신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이 부당하게 떠맡긴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도 찾기를, 저자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른다면서요.

m***5 2011.01.17.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신과 종교 그리고 영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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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과 창조론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나는 자연과학자로서의 길을 걸을 것이므로 모든 종교를 배척함과 동시에 창조론은 말도 안되는 사상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주입식 공부를 하였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가졌던 생각들이다. 니체 = 신은 죽었다. 데카르트 = 방법적 회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등과 같은 이론은 학력고사에서 국민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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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론과 창조론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나는 자연과학자로서의 길을 걸을 것이므로 모든 종교를 배척함과 동시에 창조론은 말도 안되는 사상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주입식 공부를 하였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가졌던 생각들이다. 니체 = 신은 죽었다. 데카르트 = 방법적 회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등과 같은 이론은 학력고사에서 국민윤리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밤새워 머리싸매면서 외웠던 내용들이다. 방법적 회의가 무엇이며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라는 의미를 파악하기에 앞서 니체를 나체로 적지 않으면 다행이다 라는 생각 뿐이었다. 도대체 사상이 무엇이며 철학이니 신학이니 하는 것은 도통 알수가 없고 종교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수많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왜 아직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종교분쟁을 하는지 등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군대를 가게되었고 아마 대부분이 그렇듯이 주말에 고참으로부터 도망치고 쵸코파이 하나 얻어먹기 위해 여호와가 누구이며 성모마리아가 누구의 어머니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시키는대로 기도나 하고 연설들으면서도 저 사람들은 왜 여기 왔을까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종교가 무엇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휴가를 나와서 승용차를 트렁크에 물교기 표시가 있는 것을 보고 기독교 신자이구나 하는 정도의 지식은 쌓게되었다. 신을 믿고 하느님께 - 대부분의 책과 성경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던데 잘못된 표현이라 생각한다. 물론 유일신을 믿는다면 하나님도 틀린표현은 아니다 - 의지하면서 심지어는 수학 시험치르면서 문제 잘 풀리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를 한다거나 내일 야외회를 가니 비가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도 간혹 보았다. 신께서 그렇게 한가하신 분인가?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다 들어줄 수 있도록...그리고 삐딱한 나로서는 그렇게 신께 의존할 것이라면 당신을 그만큼 믿어보라고 충고를 하곤했다. 그러나, 인간이 신 또는 종교를 믿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완벽하지 못한 존재이므로 절대자인 신께 의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리라. 하긴 그렇게 강한 인간이라고 큰 소리쳤지만 나도 아이를 키우다보니 어쩔수 없이 절대자에게 의지를 하고 싶어진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런데, 종교를 믿지 않거나 혹은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이단자로 간주하여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행위는 어떻게 설명이 되어야하나? 전지전능하신 신은 오직 유일하다는 이유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근데 정말 전지전증하고 유일한 신이라는 이유로 나만 선택받는 민족이라는 이유로 남과 차별될 필요가 있을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로마가 망했던 이유도 인간에 대한 연구대신 신에 대한 연구를 함으로 인해 정작 중요한 곳에 힘을 쏟지 못해 망했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로마인들은 다신론자였기에 서로가 믿는 신이 유일신이라고 싸울 필요가 없었기에 역사에 길이남는 초강대국이 되지 않았을까? 그만큼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책 이야기를 해보자. 그리스 로마신화와 같은 스토리를 바라거나 혹은 다양한 신에 대한 이야기, 역사와 종교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이 책을 펼쳤던 나는 상당한 난해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85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대학교 전공서적을 읽은 이후로 단행본으로서는 최다 페이지가 아닐가 싶다.(물론 그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자격증 관련 책들도 있지만) 850여 페이지를 가득 채운 내용이 나에게 새로운 지식을 알려주거나 흥미를 불러일의키는 판타지 소설과 같은 내용은 전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철학과 신학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물론 종교이야기도 빠질 수가 없다. 신과 종교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겠다. 종교와 과학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갈릴레이의 명언인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종교앞에 어쩔수 없이 무릎을 꿇은 과학자의 처세술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도 종교와 과학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근데 웃기지 않는가? 과학자가 아니라 반대로 종교를 신봉하는 자는 과감히 순교를 하지 않은가? 종교와 과학의 태생부터가 다르기에 나란히 달리지만 서로 보완할 수 있다고 보는이들도 많다. 진화론을 믿는다면 최초의 생명의 탄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우주의 탄생은?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존재다],[신은 창조주다], [신은 인격적이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신에 대한 5가지 주제에 대해 엄청난 분량으로 다루었지만 읽었던 페이지 분량에 비해 나의 머리속에 남는 것은 엄청난 양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만, 머리속은 많이 혼란스럽고 또한 많은 숙제를 남겨주었다. 단순히 종교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독자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 종교가 무엇이며 철학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멍석을 제대로 깔아준 것이다. 그리고, 책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닐까? 종교에 대해, 신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보라고 그리고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제대로 해석해보라고.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주입식으로 암기했던 국민윤리나 세계사 교과서가 아니라 논술과목 교과서 인것이다.



s******5 2011.01.12.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제게는 벅찬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책이었어요.
"제게는 벅찬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책이었어요." 내용보기
요즘 아이들과 함께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 점점 신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즈음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참 흥미로운 제목의 책 한 권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정말 전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만난 것인데 863페이지라는 엄청난 책의 두께에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 제가 읽던 책 중에 그나마 좀 두껍다 생각되어지는 책의 페이지가 400페이지를 넘은 것이 없는데
"제게는 벅찬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책이었어요." 내용보기

 

요즘 아이들과 함께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

점점 신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즈음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참 흥미로운 제목의 책 한 권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정말 전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 책을 만난 것인데

863페이지라는 엄청난 책의 두께에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 제가 읽던 책 중에 그나마 좀 두껍다 생각되어지는 책의 페이지가 400페이지를 넘은 것이 없는데

그 두배를 훌쩍 넘어서니 솔직히 이 책을 과연 제가 읽을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선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잔뜩 겁을 먹고 책장을 펼치는 순간 엄청난 주석의 양에

이 책이 얼마나 제게 어려운 책인지 큰 중압감이 밀려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책상 위에 책을 올려다놓구선 며칠을 벼루다가 드디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작가소개란을 읽었는데

'그는 전문가들과의 논담보다는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철학자이다....

고상한 전문용어를 사용해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피하고 생동하는 일상용어를 사용해 독자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라는 소개글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름 아래에 철학자라고 적혀있는 작가의 소개글이

이 책의 두께만큼이나 부담스러웠는데요.

사실 제가 학창시절 세계사나 다른 과목에서 나오는 철학자의 이름이나

어려운 사상에 대한 이야기에 무척 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철학이라는 것 자체가 저와는 정말 별개의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런 제가 철학자의 책을 읽게 되다니 또다시 걱정이 슬슬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그 아래 적혀있는 위에 말씀드린 그 글귀가 그나마 제게 위안이 되고

독자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식으로의 이야기 전개라고 하니

이왕 읽어보기로 맘 먹은 거 걱정은 접어두고 용감하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요.

 

1부의 내용은 "신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되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저도 알고 있는 [천지창조]라는 그 유명한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로 시작되어지면서

제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철학을 접한 이들 또한 어렵지 않게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작가의 노력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서

어려운 내용이지만 다행히 크게 흥미를 잃지 않게끔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내용 중에 어려운 부분들에 대한 부분은

상세한 주석으로 친절한 설명도 잊지 않고 계셨는데요.

사실 주석의 내용도 어렵기는 했지만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되는 부분이었지요.

또한 중간중간 싯구를 인용한다거나 다양한 작품의 일부를 인용해서 설명하고

더불어 여러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을 나열하기도 하고

때로는 혹시라도 이해를 하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비슷한 내용을 다시 한번 풀어서 설명하는 등

정말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가 얼마나 대중과 소통하고 싶어하는지 

또한 대중들에게 자신의 철학적 지식이나 생각을 알리고 싶어하는지

그의 문체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지요.

 

이 책이 어느 철학가의 신에 대한 이해에 대한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신의 이야기를 담은 여러 걸작들에 대한 작품의 설명을 통해서

예술과의 소통도 가능하게 해주고

기독교인들만이 읽는다고 생각하는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가능하게 해주고

그와 더불어 가령 학창시절 스콜라 철학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결하면서

무작정 외우려고만 했던 어렵기만 했던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일화와 함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쉽게 알려주면서

여러 철학자와의 새로운 만남도 주선해주었는데요.

저뿐 아니라 어렵기만 했던 철학자의 이름과 그의 사상들을 외우는 일이

정말 고역이었지요.

그런데 이 책에서는 재미나게 풀어내는데요.  

이 책에서 그 중에 한 부분을 소개해보자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5살의 나이에 수도원에 입학하면서 수도원에게

"신이란 무엇입니까?"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하는 똘똘한 아이였었고

청년이 된 그가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 보낸 여인의 유혹에도

불에 달군 쇠꼬챙이를 들이대며 여인을 쫓아버렸고

여는 수도사들과 달리 큰 몸집으로 유쾌하게 떠들며 열심히 음식을 먹는 등

'천사적 박사'라고 불릴 정도로 남달랐으며

다른 수도사와 달리 왕성한 식욕과 과중한 체중으로 건강을 해쳐서 

마흔아홉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는 것이 조금은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그동안 제가 생각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인물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라

놀랍고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지요.

만약 교과서에서도 이렇게 재미나게 풀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라면

쉽고 재미난 철학공부를 할수 있었지 않을까 싶어 참 아쉽기만 합니다.

 

이처럼 작가는 대중이 최대한 철학에 대해 쉽게 접근하도록 이끌어주어서

철학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전무한 저조차도 괌심을 가지고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 참 놀라운 것 같습니다.

 

비록 이 책이 아주 두껍고 아주 어려운 내용들이 가득하지만

한번쯤은 용기를 위해 도전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기회에 저처럼 책에 대한 편식을 고쳐보는 것도 책에 대한 눈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아직은 제게 많이 어려운 책이라 한번으로 전부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또다시 한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거란 자신감이 생깁니다.

d******m 2011.01.10.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서양 문화를 알려면, 그들의 신을 알아야 한다.
"서양 문화를 알려면, 그들의 신을 알아야 한다." 내용보기
우선, 엄청나게 두꺼운 책이다. 무려 811 페이지에 해당하는 철학적인 책을 끝까지 각주를 포함해서 다 읽었다는 데에 내 스스로 자부심을 느낀다. 이 방대한 책의 내용에서 일부를 쓰거나 감상문을 적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런 구절이 있어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
"서양 문화를 알려면, 그들의 신을 알아야 한다." 내용보기

우선, 엄청나게 두꺼운 책이다. 무려 811 페이지에 해당하는 철학적인 책을 끝까지 각주를 포함해서

다 읽었다는 데에 내 스스로 자부심을 느낀다. 이 방대한 책의 내용에서 일부를 쓰거나 감상문을

적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런 구절이 있어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즉 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일(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212쪽-

흔히들 고등학교 윤리책에서 볼 수 있는 내용이 이 책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정리가 된다. 이 책의

장점 중에 하나이다. 이 책은 5부 9장에 걸쳐서 <신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하면서 "기독교"와 "종교"가 도대체 왜 존재하고 필요한지에 대해 해박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 작가 김용규는 방대한 자료와 참고 문헌을 통해서 신과 서양문명에 대해 이야기를

설득력있게 전개하고 있다. 서양 문학과 미술 및 음악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k****a 2011.02.24.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신(神)을 통해 서양문명을 읽다
"신(神)을 통해 서양문명을 읽다" 내용보기
신(神)은 무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고, 신을 직접 만나거나 볼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니고, 또한 영적(靈的)인 부분과 관련된 것이어서 단정적으로 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작년 한 해는 신의 존재와 관련한 책들이 다수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신을 통해 서양 문명을 읽으려는
"신(神)을 통해 서양문명을 읽다" 내용보기

신(神)은 무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고, 신을 직접 만나거나 볼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니고, 또한 영적(靈的)인 부분과 관련된 것이어서 단정적으로 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작년 한 해는 신의 존재와 관련한 책들이 다수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이 있었다. 이 책은 신을 통해 서양 문명을 읽으려는 의도로 쓰여진 책이다.

 

지금 세계는 서구의 시각으로 읽혀진다. 미국과 유럽이 형성한 문화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영역이 서구화되고 있고, 우리들의 생각도 부지불식간에 서구의 시선을 따라가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서구적인 취향은 세련되고 멋있어 보인다고까지 여겨지고 있다. 이런 서구화의 물결은 최근 세계화, 지구촌화라는 경향과 맞물려 짧은 시간동안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합리적인 사고와 이성을 우선시하는 경향은 감정과 온정주의를 강조하던 동양문화권에 좋은 영향을 준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물질주의, 극단적인 개인주의, 냉소주의, 문명의 충돌 등은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문화적인 충격으로 와닿았다. 지은이는 이런 서양문화의 본질과 내용을 신을 통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서양문화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해왔다. 최근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이야기들이 서양문화를 이해하려는 통로로 많이 읽혀지기도 한다.

 

신중심의 서양문화가 이룩한 기저에는 동양문화권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예술 등 다양한 방면에서 서양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면서 최근까지도 그들만의 생각과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이 서양문화에서 어떠한 위치즐 점하고 있는지를 분석해본다면, 서양문화의 특성과 본질을 이해하는데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지은이는 “신의 무엇인가? 신의 존재다, 신은 창조주다, 신은 인격적이다, 신은 유일자이다” 라는 제목으로 5개의 장에 걸쳐 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심층을 파악하려고 한다. 각 장의 주제가 가지는 무게는 상당하다. 당연히 책의 부피도 만만치 않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하이젠베르크, 리비트겐슈타인, 괴테, 셰익스피어, 단테, 미겔란젤로, 스티븐 호킹, 리처드 도킨스, 에드워드 윌슨 등 유명 철학자, 문학가, 예술가, 과학자들의 신에 대한 이야기 등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신을 이해하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닌데, 신을 통해 서양문화를 이해하려고 하니 결코 쉬운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은이의 해박한 지식이 날줄과 씨줄로 엮이면서 상당히 흥미로운 글이 나온 것 같다. 물론 서양의 문화코드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신이라는 존재를 빌어 왔기에, 신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경우에는 이 책이 그렇게 쉽게 흡수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책에 대한 생각은 아직은 여기까지다.

 

지은이가 이 정도의 분량으로 글을 쓸 정도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 것인데, 몇 일 동안 읽은 내용으로 무턱대고 이 글을 평한다는 것이 주제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시대에 가장 예민한 주제인 신에 관한 것이 이 책의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는 만큼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c*****1 2011.01.2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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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가 없는 신
"코드가 없는 신" 내용보기
이 책을 통해서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를 찾으신다면 책을 덮으세요.  없습니다.그저 신을 위한 변명만이 있습니다.그것도 이런 저런 신학이론들만 있습니다.실체가 없는 신을 설명하다보니 이론들도 서로 상충되고 일관성이 없어서, 또 다른 이론으로 보충설명하다 보니 장황한 문장들만 난무 합니다.그냥 신학 설명서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그리고 저자의 특이한 점이 있는데, 글
"코드가 없는 신" 내용보기

이 책을 통해서  서양문명을 이해하는 코드를 찾으신다면 책을 덮으세요.  없습니다.
그저 신을 위한 변명만이 있습니다.
그것도 이런 저런 신학이론들만 있습니다.

실체가 없는 신을 설명하다보니 이론들도 서로 상충되고 일관성이 없어서, 또 다른 이론으로 보충설명하다 보니 장황한 문장들만 난무 합니다.

그냥 신학 설명서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자의 특이한 점이 있는데, 글 중간에 "어때요?"라는 말이 무수히 나옵니다.
어때요...는 논리적으로 안 맞거나 설명하기 힘들거나 해서 슬쩍 넘어가려 할때 자주 쓰입니다.
어때요? 그렇지요? 이런 식인데 기독교인 아닌 사람이 보기엔 .. 어때요? 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
"아니네요" 이거나 " 그래서 어쩌라구요" 정도 입니다.

책을 읽은 소감은  신 - 어쩌라구?
                         코드 - 어디에?
                             정도입니다.

c******a 2011.08.23.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