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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사상의 진정한 본질과 진심을 집약한 훌륭한 대중서
"애덤 스미스 사상의 진정한 본질과 진심을 집약한 훌륭한 대중서" 내용보기
이 책은 애덤 스미스가 생애에 남긴 단 두권의 대작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입문서 격인 책이다. 작가 도메 다쿠오는 일본에서 경제학설사에 권위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다쿠오는 여러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시장경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하는 시점에 있다면서 이 책을 쓰게 된 경위를 말한다. 20세기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시장경제만이 이용 가능한 경제시스템이라는
"애덤 스미스 사상의 진정한 본질과 진심을 집약한 훌륭한 대중서" 내용보기

 이 책은 애덤 스미스가 생애에 남긴 단 두권의 대작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입문서 격인 책이다. 작가 도메 다쿠오는 일본에서 경제학설사에 권위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다쿠오는 여러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시장경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하는 시점에 있다면서 이 책을 쓰게 된 경위를 말한다. 20세기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시장경제만이 이용 가능한 경제시스템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러 금융위기와 비대해져가는 빈부격차는 경제시스템에 대한 의문을 계속해서 낳았다. 이 때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올바른 방향을 모색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덤 스미스 (1723~1790)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상가이다. 그가 생애에 남긴 도덕감정론 (1759)과 국부론(1776)으로 단 두권이라고 한다. 도덕감정론은 윤리학으로, 국부론은 경제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권의 저서는 하나로 통합하여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애덤 스미스 사상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는 사회번영의 원천으로 이기심을 이야기 했는데 그로 인해 인간의 이기심을 적극 옹호했다고 오해를 샀다. 뿐만 아니라 국부론은 특정 국가의 경제성장률을 위한 지침서라던가, 급진적 규제 완화를 주장했다는 등 여러 오해를 샀다. 이런 오해들을 풀고 애덤 스미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다쿠오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두 권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개괄하고 파악하여 핵심 논의인 사회질서와 번영이라는 하나의 사상체계로 재구축했다고 한다.

 

 책의 목차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두 권의 내용을 요약하며 작가의 해설을 붙인 파트와 후에 애덤 스미스가 당시 어지럽던 유럽의 상황에서 자신의 사상을 어떻게 적용하려 했는지 설명하는 부분, 맺음말로 애덤 스미스가 남긴 유산에 대한 파트와 후기로 나누어져 있다. 

 

 애덤 스미스에 사상의 가장 큰 핵심 키워드는 동감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있고 이 본성에 의해 사회질서와 번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동감이란 인간이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그것과 같은 감정을 자기 속에서도 일으키려 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동감은 인간이 자연히 가지고 태어난 본성이다. 인간은 동감을 통해 타인의 감정과 행위를 자신의 마음에 비추고 자신도 그와 동일한 상태라 판단되면 인정을 하고 그렇지 않다면 불인정하려 한다. 그리고 타인도 자신과 같은 매커니즘으로 생각할 거라는 짐작을 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이런 동감 매커니즘으로 인해 인간은 어느 정도 부당한 행위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불특정 다수 모두에게 인정 받기를 원하지만 여러 상황이나 이해관계로 인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 이런 주변환경에 변화와는 상관없는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 라는 것이 형성된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기준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경험을 통해 얻은 부정, 인정의 기준이 이다. 공평한 관찰자라고 한것은 타인과는 달리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런 편견없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이나 행위를 이 공평한 관찰자의 기준에 먼저 그려보게 함으로써 인정받을지 부정당할지를 먼저 판단한다. 타인의 부정한 행위를 했을시 `나`가 그런 타인의 행위에 아무리 공감을 하더라도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그 행위를 부정하다고 판단하면 `나`는 타인의 행위를 부정하게 된다. 이런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기준을 따르는 것을 성숙한 인간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말한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 매커니즘을 설명하는 대목이 흥미롭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행위자와 행위를 받는 자가 있다고 먼저 설정하자. 마음속 관찰자는 행위자의 행위를 관찰하고 자신의 판단 기준에 맞다면 인정, 그렇지 않다면 부정한다.(이것을 직적적 동감이라고 한다.) 또 행위를 받는자의 마음을 관찰하는데 그 마음이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행위를 받을 시 상상하는 마음과 같은 형태면 행위를 이로운 행위로 인식하고 그렇지 않다면 해로운 행위로 인식한다. (이것을 간접적 동감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행위자를 판단할 때와 달리 행위 받는자를 판단할 때는 행위 받는자가 아닌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상상속에 있는 행위 받는자의 마음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만약 행위 받는 자가 죽었어도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상상속에 있는 행위 받는 자의 마음을 통해 계속해서 행위자를 판단한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는 이런 직접적 동감과 간접적 동감 모두를 이용해 최종적으로 행위를 판단하며, 이 매커니즘을 이용해 행위자를 칭찬할지 비난할지를 결정한다. 하지만 행위자와 행위받는자에 대한 판단기준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외도와는 달리 우연에 의한 영향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인다. 예를 들어 누군가(행위자) 좋은 의도로 직업을 소개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도움 받은 사람(행위 받는 자)이 어떤 이유로 인해 취업에 실패할 수도 있다. 이 때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는 행위자의 의도를 알지만 행위 받는 자의 결과가 취업 실패라면 상대적으로 칭찬을 낮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반대로 행위자의 의도와 달리 행위 받는 자의 결과가 좋다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칭찬을 높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칭찬의 경우가 아닌 비난의 경우도 같은 매커니즘으로 작동)

 인간은 의도와 다른 미비한 결과 (감사받을 결과가 미비하든 비난받을 결과가 미비하든)가 나올 시 칭찬이나 비난을 상대적으로 낮게 하고, 의도와 달리 더 높은 결과(감사받을 결과나 비난 받을 결과가 모두 높다면)가 나올 시 칭찬이나 비난을 상대적으로 높게 한다고 한다. 이런 경향이 생기는 이유는 인간 행위의 의도는 직관적으로 판단 되지 않지만 결과는 직관적으로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연에 의한 결과의 영향을 더 높은 비중으로 판단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결과가 미비하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칭찬을 받을 것을 우리는 알기에 의도에 맞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는 거라고 애덤 스미스는 설명한다. 반대로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비난 받을 결과가 나오면 우리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항시 조심하는 거라고 한다. 오히려 행위의 결과가 아닌 행위의 의도만을 놓고 판단하는 사회는 오히려 가혹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도쿠오는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사상 검열, 종교적 탄압 등을 예시로 든다.) 즉 결과에 판단 기준을 두는 사회는 실제적 이익, 손해감소를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의도의 검열이 아니라거 마음의 자유를 얻는 사회를 만든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갈수록 각박해지는 윈인을 행위자의 의도에만 초점을 맞춘 문화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후에 허약자지혜로운 자라는 개념이 나온다. 애덤 스미스는 세상의 평가를 제1심판관 그리고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평가를 제2심판관으로 규정한다. 제1심판관의 평가에 연연하여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을 무시하는 성향을 허약자로 규정하고 제2심판관의 평가에 연연하는 성향을 지혜로운 자로 규정한다. 재미있는 것은 둘의 공통점은 의도와는 달리 타인에게 모욕이나 모멸, 누명같은 것을 당했을 때 격분한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의 이런 특징은 애덤 스미스가 후에 사회 번영의 궁극적 목적의 이유가 된다.) 평범한 사람은 이런 허약자와 지혜로운 자 둘 모두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기만에 빠지거나 연약한 상태에 빠지면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려는 허약자 상태에 빠질 수 있는데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반적 규칙들을 설정한다. 

 일반적 규칙들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가 판단을 미리하여 비난받을 짓은 미연에 방지하고 칭찬받을 선행은 추천되어 하게 되는 기준들을 말한다. 이 기준들은 사회속에서 한 개인이 체험적으로 체득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애덤 스미스 사상의 중요한 요소를 발견한다. 이런 일반적 규칙들을 자신의 행위 적용시키는 것을 의무감(도덕감)이라고 한다. 의무감은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하나의 원칙이다. 특징은 우리 본성의 모든 감정들을 제어한다는 데 있다. 이 감정들에는 이기심과 자애심도 포함된다. 의무감에 의해 이기심과 자애심이 제어 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그가 무제한적 이기심을 권장했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일반적 규칙들은 정의의 원천이 된다. 의무감을 저버리고 부당한 행위를 한 인간에 대해 인간은 일반적 규칙들을 적용해 판단하고 그에 대한 처벌을 원한다. 부당한 행위자에 대해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지만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 분노는 억제되고 체계적 처벌을 행하기를 바란다. 이런 속성들이 법을 체계적으로 제도화 시킨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정의의 속성은 이타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분노라는 감정에 대해 본능적으로 거부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분노라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법이라는 체계적 시스템을 통해 일을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또 준법정신은 일반적 규칙들의 기준에서 비난 받을 짓을 회피하하려는 성향에서 나온 것으로 정의와 준법정신은 이타심이 아닌 자애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말한다. 사람들을 경탄하게 하는 이혜관계 없는 자혜로운 행위들(자기희생) 같은 것들은 의무감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서 곧바로 발현되는 행위로 일반적 규칙들의 엄밀성을 따지지 않는 행위다. 사회 정의는 무조건적 자혜로운 행위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규칙들을 엄밀히 따지는 `정의` (의무감)에 있다고 애덤 스미스는 말한다. 무조건적으로 이타심만을 강조하는 지금 사회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요소라고 생각했다.  

 정의가 구체화된 법과 의무감은 사회질서를 실현한다. 이런 사회질서는 한 개인이 한 사회에서 체득한 체험들을 기준으로 하는 일반적 규칙들과 인간의 동감이라는 본성에 의한 의무감이라는 것에 의해 설정된다. 이것은 이간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매커니즘을 자연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 불완전 하듯 완전한 사회 질서도 불가능하다고 보는 쪽이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질서는 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후에 인간 본성인 동감을 핵심 키워드로 하여 번영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 원인은 국부론에서 번영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안 논의가 된다. 번영의 기초는 인간의 야심과 경쟁에 있다고 한다. 야심과 경쟁으로 인간을 이끄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환희적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에 더 큰 동감을 가지며 비애를 자아내는 요소는 그 반대이다. 환희를 자아내는 요소는 풍부한 부, 높은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이 있고 이런 것들에 사람들은 큰 공감을 보내며 이런 사람들의 관심과 공감을 받기 위해 부와 높은 지위를 바라게 된다. (이 상태를 애덤 스미스는 야심, 또는 허영심이라고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고립 되어 있다면 높은 사회적 지위나 사치품등은 하등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야심을 가진 개인들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경쟁을 하게 된다.

 이 번영으로 이끄는 인간 본성 파트에서 애덤 스미스는 중요한 논의를 한다. 그것은 인간의 행복에 관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을 마음의 평온이라고 한다. 마음의 평온은 건강하고 빚이 없으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최저 수준 이상의 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한다. 단순히 빈곤이 실질적 생활상의 어려움을 자아내서 뿐만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했 듯,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에 따르는 지혜로운 자(현명한자)라도 모욕과 모멸등은 참지 못한다. 모욕과 모멸을 받는 위치에 서면 인간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나약한 상태에 놓일 수 있다. 이로 인해 빈곤으로 인한 고난을 극복하고자 보당한 범죄 행위에 빠질 수도 있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발전은 이런 최저 수준의 부 이하의 빈곤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구제해서 최저 수준의 부 이상을 획득하여 행복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마음의 평온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궁극적 이유라고 한다. 

 야심과 경쟁을 일으키는 원동력은 환희에 더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인간의 본성에 있다고 했다. 이 본성에 의해 세속적 인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부와 높은 지위를 원하게 되고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위에서 말했던 허약한자(연악함)들이다. 이런 연약함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인 것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연약함의 무제한적 방임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타인의 인정을 받는 길을 `재산에 이르는 길` 이라 하고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인정을 받는 길을 택하는 것을 `덕에 이르는 길`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설명한다. 재산에 이르는 길은 허약함이고 덕에 이르는 길은 현명함이다. 위에서 설명했 듯 인간은 연약함과 현명함 둘다 가지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재산에 이르는 길과 덕에 이르는 길을 동기에 걷는 것이 평범한 인간들의 경향이라고 한다. 인간은 돈을 벌기위해 일을 하며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에 의해 근면, 성실, 예의 등을 지켜며 산다는 것이다. 이 상태는 대부분 중하류층에 특성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부를 원하게 되면 덕에 이르는 길을 일탈해야만 한다. 다쿠오는 애덤 스미스가 야심과 경쟁에서 중요히 여겼던 것은 페어플레이 정신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연약함의 완전한 방임이 아닌 현명함과 법질서에 의해 어느 정도의 규제를 주장했다고 한다. 

 다음으로 국제질서의 가능성에 대한 얘기를 한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 기준은 그 사화의 경험 즉 관습에 의해 생겨난다고 했다. 이 기준은 개인이 속한 사회에서는 같은 기준을 공유하며 그럼으로서 그 사화의 질서는 유지 된다. 하지만 다른 사회와의 질서는 어떨까? 관습은 각 사화나 국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그런 차이를 초월한 공통된 보편적 판단 기준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각 사회는 유행하는 음악이나 시가 다를 것이고 통용되는 품행의 기준도 다르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서 만큼은 어떤 사회나 국가도 금지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입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유아살해관행이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관행이 있다고 해서 당시 사회가 살육행위 그 자체를 방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정 관습이 행위를 왜곡 시킬 수는 있지만 일반적 원칙들을 왜곡 시킬 수는 없다고 애덤 스미스는 보았다. 이런 보편적 도덕 기준이 만민법, 국제법의 기초가 되며 결국 국제질서는 실현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 기준 형성에 방해요인이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타 국가를 향한 국민적 편견이라고 한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에게 인류보편적 애정은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애정 순서는 가족, 친구, 지인 순이라고 하는데 이 순서는 인간이 자신과 공감을 시간적으로 많이 가진 존재들 순서이다. 그런데 이런 애정을 가진 존재들은 국가에 종속된다고 보고 왜곡된 애국심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보았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아무 이득없이 희생하고 폭력을 사용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애덤 스미스에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왜곡된 애국심은 타국가의 존재나 발전시에 증오와 질투를 느끼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국민적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다른 사회와의 교류가 필요하며 이런 교류를 통해 이질적 문화의 이해와 공통되고 정의된 도덕, 정의의 기준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교류의 장으로 애덤스미스는 각 국가 사이에 중립된 관찰자를 놓고 행하는 자유로운 무역을 주장했다. 애덤 스미스가 자유무역을 주장한것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부를 축적하고 더큰 부를 축적하기위한 규제 강화를 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비난했으며 앞으로도 이런 중상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다쿠오의 책에서 여러번 거론 된다.

 

 여기까지가 도덕감정론을 개괄한 내용이다. 중요한 점은 사회질서는 특정한 존재의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감이라는 인간 본성에 의해 자연히 구축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매커니즘을 자연의 섭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정의, 번영, 국제질서 까지도 모두 이 인간의 본성에 의해 일어난다. 다음으로는 이런 인간 본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사회 번영과 존속을 다룬 국부로는 개괄한다.

 

 국부론에서 다루는 것은 사회 번영이다. 사회 번영에서 중요한 건 `부`이다. 애덤 스미스는 부를 필수품과 편의품이라는 물질적 부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물질적 부의 원천은 `노동`이다. 소비인구보다 필수품과 편의품의 총량이 높은 비율일 때 국민의 풍요로움이 이룩 된다고 한다. 이 비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생산성이 높아야 한다.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생산적 노동인구가 아닌 생산적 노동인구(농업, 제조업 같은 지적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인구)가 많아져야 한다고 한다. 이러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은 분업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말한다. 분업을 통해 한 개인이 감당해야 할 공정이 분업화 되면 집중해야할 공정이 줄어들고 폭발적 생산이 가능하며 이렇게 성장한 기업은 또 다시 노동자를 고용한다. 이 과정으로 인해 노동생산성은 높아진다. 물질적 부의 풍요로움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배분되는 자연스러운 구조를 통해 최저 수준의 부이상을 누리는 인구는 많아진다. 

 중요한 것은 분업이 가능케 하는 원인은 인간의 교환 성향이라고 한다. 확실한 교환행위가 약속되어야 단일상품의 대량생산을 하기 위한 결심을 만든다. 분업은 보통 단일 생산물에 집중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교환성향은 인간의 본성중 설득 성향을 기초로 한다. 서로의 가치가 확인 되어야 교환이 가능하며 서로의 가치를 확인시키기 위해 설득을 한다. 이 설득 성향은 타인에게 공감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온다. 즉 교환성향도 공감이라는 본성 위에 성립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분업 또한 그 원인은 인간의 공감이라는 본성에 있다라는 말과 같다.

 교환 성향은 시장을 형성하는 원인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런 시장을 호혜의 장소로 보았다. 인간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 내가 병에 걸리면 병원을 가야한다. 치료자가 나에게 이타심을 가져 무료라는 선행을 베풀 수 있겠지만 일반적 경우는 그렇지 않다. 치료자는 치료비라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를 치료해주며 그 결과로 나는 건강을 되찾는다. 시장에서 교환은 이타심이 아닌 자애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분업을 낳는 교환 행위가 이루어지는 시장 중심의 사회를 시장사회라고 한다. 

 애덤 스미스는 건강한 시장사회를 위해서는 공정한 페어플레이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시장사회는 상업사회로도 볼 수 있고 자신의 이익 창출을 바라는 `재산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경쟁이 이루어진다. 이 때 공정하지 못한 독점 같은 술수를 쓰게 되면 자연스러운 가격의 안정화가 이루어 지지 않고 그로 인한 수요자의 감소는 양질의 노동자의 유입을 방해한다. 이로 인해 시장에서 양질의 제품 공급은 차질을 빚고 호혜의 성격을 가진 시장은 신뢰를 잃고 그 결과 노동생산성의 상승요인인 분업도 감소한다. 즉 공정경제는 분업 상승, 유지를 가능케 하고 번영에 초석이 된다. 애덤 스미스의 규제 완화는 이런 자연스러운 경쟁을 위한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중요한 가격의 결정은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발생을 주장한다. 실제자격과 시장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변동에 의해 일치 된다. 현실가격이 시장가격보다 비싸면 수요보다 공급이 높아져 잉여 공급이 상승하고 재고정리를 위해 결국 실제가격을 낮추면서 결과적으로 실제가격과 시장가격은 일치하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장가격과 자연가격도 마찬가지다. 시장가격이 자연가격(토지, 임금, 이윤에 대한 자연율)보다 높아지면 상승된 자연가격을 기대하는 양질의 서비스 제공자가 이 부문에 참가하게 되고 자연스레 공급이 상승한다. 그로 인해 시장가격은 하락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연가격과 일치하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장 기능의 유지는 참가자의 자애심 또는 이기심 때문이다. 시장가격의 안정화도 수요, 공급, 서비스 제공자들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다. 이 모든 건강한 상태는 인간의 본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 지는 것이가. 이 때 등장하는 개념이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이다. 

 

 분업은 번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허나 분업에 선행하는 중요한 일반 원리는 자본축적이라고 한다. 분업시에 원료, 기계, 도구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자본이 필요하다. (사회분업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사회적 분업을 위해서는 해당 구성원들의 부양이 풍족히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한다.) 당시 유럽은 계급사회였고 애덤 스미스는 이 때의 사회적 구조를 통해 자본축적을 설명하는데 지금 현대에 적용해도 유효한 원리라 생각한다. 

 당시 계급을 크게 지주계급, 자본가(중류계급), 노동자계급(하층계급)으로 나뉘었다. 지주계급은 토지를 소유한 계급으로 불로소득을 취한다. 그리고 정치적 지배계층이며 귀족으로 사람들의 동경을 받는 계층이다. 자본가는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을 소유한 계층으로 생산 조직의 주체이다. 이 계층은 지주에게 토지 비용을 지불하고 노동자에게는 임금을 지불하며 자신은 이윤을 챙기는 계층으로 경제성장의 축이 되는 계층이다. 이들은 앞서 설명했던 `재산의 길`을 걷는 자들로 올바른 덕과 함께 공정한 경제적 활동을 하면 생산성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그로 인해 생산적 노동인구 증가를 이룬다. 이로 인해 최저 수준의 부 이상을 획득한 노동인구는 증가하며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자본가 계층이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자본가는 자신의 이윤을 추구한다. 자신의 산업을 위한 토지 비용 지불과 고용과 임금지불은 사회 전체 생산물 분배를 이룬다. 이 때 토지 이윤 임금 등의 자연율, 즉 자연가격은 상승하고 그로 인해 노동고용과 임금 상승을 이룬다. 그 결과로 인구도 증가하게 된다. 반대 매커니즘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계층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층이다. 중요한건 이 계층은 사회적으로 볼 때 고용된 노동자와 실업자로 나눌 수 있다. 실업자는 고용된 노동자와 달리 최저 수준의 부 이하의 삶을 영위하며 자선이나 범죄말고는 연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이들의 구제법으로 단순 복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 실업자들은 단순히 빈부로 인한 생활상의 실질적 어려움 뿐만 아니라 사회적 모멸과 모욕이라는 상황에 놓여있다. 단순 복지는 일시적 배고픔은 해결해 줄 수 있어도 그들의 마음의 평온을 이루지는 못한다. 궁극적으로 이들을 구제하려면 그들을 자립된 상태가 되게 해야하며 그 방안으로 필요한 것이 일자리 창출을 일으키는 경제 성장이다. 

 책은 애덤 스미스가 설명한 자본축적의 구조를 간단히 요약하여 설명한다. 이 매커니즘에서 생산자의 잉여자본 사용이다. 크게 세금과 소비 저축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소비는 자가 소비와 비생산적 노동자 고용(ex 하인)으로 나뉜다. 여기서 성장을 위해서는 세금을 줄이고 소비를 줄이며 저축을 늘려야 한다. 그래야 자본과 고용, 생산성이 높아진다. 여기서 자가 소비를 줄이지 못하면 비생산적 노동자 고용 비용을 줄여야 하는데 그로 인해 비생산적 노동자는 생산적 노동자로 변화되어 고용된다. 세금을 줄이게 되면 정부 부문의 비생산적 노동자 고용이 줄어들고 이 노동자 들도 마찬가지로 생산적 노동자로 변화되어 고용된다. 이런 생산적 노동자의 창출과 고용은 또다시 생산성을 높이는 선순환을 일으킨다. 자본 계층의 자본축적을 위한 세금과 비생산적 노동인구의 절약은 생산적 노동인구의 증가를 부르는 결과를 낳는다 이 또한 의도한 결과가 아닌 자본가의 이기심의 결과이다.

 물론 자본축적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 모르겠지만 언제나 방해요인이 존재한다. 크게 개인의 낭비와 정부의 낭비로 애덤 스미스는 나눈다. 하지만 개인은 일시적으로 낭비해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장기적으로는 절약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낭비는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고 한다. 중요 한것은 공공자본을 다루는 정부의 낭비이다. 자신의 자산이 아니기에 공공자본을 다룰 때 인간은 거리낌이 없다. 정치가들은 불로소득 계급이라 자본의 이해가 없고 무능하여 공공자본을 함부로 다룬다고 보았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공공자본을 함부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 즉 공공이익을 위한 희생 정신이 부족한 계급이라고 보았다.

 

 후에 애덤 스미스는 자연스러운 경제 발전의 모델을 제시했다. 이 모델은 자연스러운 경제성장을 이루는 기초로 하나라도 순서가 바뀌면 경제성장에 해가 된다고 애덤 스미스는 주장한다. 그 순서는 농업 - 제조업 - 무역의 순서였다. 이 순서대로 투자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근거는 인간생활에서 가장중요한 순서로 투자가 이루어 지고, 투자 안정성의 순서라고 한다. 농업이나 제조업은 직관적으로 관리와 상황을 인지할 수 있지만 무역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토지에 대한 애착 때문이라고 한다.(ex 전원생활의 동경) 

 농업에서 토지 계량과 경작 확대를 통해 잉여생산물이 형성되면 이것을 원료등으로 해서 제조업에 이용된다. 제조업에서는 농업에 필요한 기계와 도구를 생산하고 농업은 다시 이 물품으로 인해 생산성이 증대된다. 이렇게 서로가 상생을 하며 발전을 하면 각 부문에서 폭발적 잉여생산물이 증가하며 남은 재고를 다른 국가와의 무역을 통한 거래를 하며 무역업이 발달한다. 이 모든 과정도 자본가의 의도가 아닌 자연적으로 이루어 진다. 그 결과는 당연 최저 수준의 부 이상을 획득한 인구 증가이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경제발전은 애덤 스미스가 말한 자연스러운 경제성장의 모델과는 정반대였다. 서로마제국 멸망과 함께 유럽의 경제 지형은 무역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건설과 확대, 그로 인한 각 유럽국가들의 분쟁일 일어나는 대항해시대로 향하게 된다. 그래도 식민지 확보를 기회로 영국을 포함한 유럽은 자연스러운 경제발전 모델로 복원하여 건강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식민지는 또 하나의 풍부한 자원을 가진 토지를 확보한 것과 같다. 이 토지를 경작해 농업 부문의 성장과 같은 효과를 불러오면 후에 제조업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유럽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식민지에 대한 과도한 규제와 원거리 무역의 확보에만 집중한 정책은 결국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식민지를 통한 부의 창출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본 정부는 무역 차액을 위해 각종 규제를 내놓는다. 그로 인해 식민지의 근로 의욕과 창의력은 꺽어져 버려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식민지의 무역 상대국도 제한하게 되는데 이 정책은 타 유럽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을 부추겼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무역차액과 무역관련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를 찾아 나섰고 중요 거점 지역에서는 전쟁같은 분쟁도 일어났다. 이로 인해 각 각종 방위비와 전쟁부담금을 감당하기 위해 국채를 남발했고 이로 인해 일반 사람들이 짊어져야할 세금 부담도 증가해 가기만 했다. 원거리 무역은 다른 인접국가들과 무역하는 산업에서 자본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로 인해 본국 제조업도 힘들어지고 생산적 노동 고용률은 저하된다. 식민지 독점과 규제는 식민지 주민 뿐만 아니라 본국 주민들에게도 피해가 된다. 애덤 스미스는 이런 중상주의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을 쏟아낸다.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결국 자연스러운 경제발전 모델로 복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급진적 규제완화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해당 정책과 산업의 지형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이들이 손해를 보게 되며 그 분노는 정부와 사회로 향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다른 규제안을 내놓아도 안된다. 만약 농업 부문의 증대를 위해 제조업이나 무역을 억제하게 되면 당연 해당 부문은 붕괴되고 농산물 수요는 줄어들것이고 결과적으로 농업 부문도 손해를 보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자연스러운 복귀과정은 인위적으로 급진적인 규제나 완화가 아닌 개인에게 맡기면 자연스럽게 자연적 발전순서로 복원 될거라고 보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결국 위정자의 형태였다. 애덤 스미스는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 정책을 펼치는 위정자들을 체계의 신봉자라고 명명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상과 능력에 과도한 자신감을 가진다. 그로 인해 인간 개개인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유지되는 사회질서와 번영을 해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한다. (다쿠오는 예시로 프랑스 혁명을 들었다. 실제 이 혁명으로 유럽 전역은 최악의 무질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지혜로운 통치자는 무모한 개혁을 지양하며 경제 활동에 개입하지 않고 자연적 경제발전 순서를 유지한다고 설명한다. 

 아메리카 식민지 상황에 대해서도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사상을 활용해 지적한다. 중상주의 정책으로 인한 문제점과 식민지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예측은 대부분 맞아들어갔다. 당시 영국이 애덤 스미스에 견해를 귀기울여 들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애덤 스미스의 유산은 무엇일까? 그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인간의 본성인 동감은 사회적 유대로서 이루어 진다. 그리고 이 본성이 어떻게 사회질서와 번영을 이룩했는지도 밝혔다. 위정자의 개입이 아닌 개개인의 자연스러운 본능에 맡겨야만 이루어진다. 부는 인간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매개역할을 한다. 시장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끼리의 교류를 이루고 경제성장은 부자와 빈자를 연결시킨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동감이라는 본성 위에 성립한다. 그리고 무역은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의 연결을 시켜주고 이로 인한 문화, 언어, 관습의 편견은 무너지며 사회질서의 초석이 된다. 이런 사람들과의 건강한 연결을 위해서는 시장과 경제가 자연스럽게 발전해야 하며 이것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당위성을 입증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자유시장경제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규제 감시는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시장의 감시는 불가능하다. 또 규제 주체인 정부와 관료가 부패하지 않는 다는 보증은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의 공평한 관찰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회인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애덤 스미스가 활동했던 시대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빛에 열광하지 않았고 어둠에 절망하지 않은 냉철하고 객관적 통찰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이라는 대작을 내놓았다. 이 대작들은 지금도 유효할 정도로 엄청난 통찰로 이루어져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철하고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는 학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 책을 다 읽고 애덤 스미스에 대한 기존의 오해가 풀렸다. 그리고 기존에 위정자들이 그의 사상을 어떻게 오용했는지도. 애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한다던가 옹호하지 않았다. 그저 경제발전의 원리에 필요한 하나의 구성물질로 인정을 한것이다. 이 이기심은 공정한 도덕과 정의에 의해 제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경제발전의 궁극적 목적은 최저 수준의 부도 획득하지 못한 인구를 줄이는 것에 있었다. 그는 단순히 경제학자가 아닌 인간을 애정어린 눈으로 관찰한 인간적인 철학자이자, 인문학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을 인간중심으로 통찰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인간 본성인 동감은 지금 봐도 놀라운 통찰이다. 현대 뇌과학에서 발견한 거울 뉴런이라는 것을 그는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제발전에 대한 설명은 진화론적 논리 구조와도 굉장히 닮아 있어 놀랐다. 실제로 진화론을 창제한 찰스 다윈은 국부론에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 외에 지금도 애덤 스미스의 사상은 후에 학문의 종류를 가라지 않고 많은 학자들에게 다양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사상은 국한되지 않고 창의적이며 정확에 가까운 통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도메 다쿠오 작가가 직접 선발한 내용들을 자신의 주장에 맞게 개괄한 책이다. 혹시 작가의 의도에 의해 애덤 스미스의 저작을 편향적으로 개괄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의 권위와 진심은 이 생각을 금방 해소해 주었다. 책은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쓰여진 책이어서 어력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필요에 맞게 원전에서 인용한 부분도 있으며 여러 주석들도 책을 이해하고 즐기는데 있어 풍부하게 해 주었다. 나같이 애덤 스미스 저작의 원전을 읽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가끔 의도치 않게 불행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영원하지 않다. 향유와 쾌락 또한 영원하지 않다. 고통과 절망, 향유에 너무 빠지면 생겨나는 과도한 감정에 격정에 불행은 더욱 크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 있지 않은 멀리 있는 부를 목적으로 하면 주위에 있는 행복의 조건과 근간들을 놓치게 된다. 행복의 조건은 지금 이 순간 나의 근처에 있으며 이것과 함께 하기위해서는 어떤 상황에도 격정적이지 않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말이다.

 

    

 

 

 

 

 

1******k 2021.10.25. 신고 공감 6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