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빠 떠난 빈방에 남겨졌던 한 권의 책
원래는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아니었다. 드물지만 어느 순간 무슨 책인가 뒤적거리다 결국 끝까지 읽고야마는 책이 있지 않는가? 나에겐 이 책이 그랬다.
오빠가 지난 달(정확히는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또 뭐가 급하다고 오빠의 유품을 그리도 빨리 정리하려 했던 것일까? 그래봤자 평소 입던 옷가지들과 일상 잡동사니들이 전분데 그 가운데 책도 대여섯 권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른 책들은 어디 가고 남은 두어 권 중 하나로 남겨진 책이 내 눈에 띈 것이다.
오빠가 떠난 후, 나는 낮이면 주로 그 방에서 밥상을 앞에 놓고 독서를 하곤 했다. 빈방을 비워 두는 것도 뭐하고, 무엇보다 오빠 방은 볕이 잘 들어 어두 컴컴해 대낮에도 전깃불을 켜야하는 내 방을 생각하면 전기 요금도 아낄 겸 나는 그 방에서 밀린 독서를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읽었던 책은 읽어 줄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으나 다소 지루한 감이 있는 그래서 손에 들고 있기도 뭐하고 때려치우기도 뭐한 그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 잠시 기분도 전환할 겸 이 책을 펼쳐들게 된게 결국 읽고 있던 책 보다 먼저 읽고 만 것이다.
하긴, 그러리만치 빠져버린 탓도 있지만, 책 두께가 얇야 읽는데 부담이 없던 이유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지닌 힘이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 아니 그 어떤 책 보다 세다.
동화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
사실 저자가 문학계에 알아 줄만한 시인이고, 제목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게으른 나의 독서에 밀려 나온지는 꽤 되었으면서도 감히 읽을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왜 나는 오빠가 떠난 후에야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정말 잠깐 읽다 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내내 감탄하며 읽었다. 책 표지 왼쪽 맨 꼭대기에 조그만 글씨로 '어른이 읽는 동화'라고 씌여 있다. 역시 동화는 아름답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아니, 아름답다란 말은 너무 판에 밖힌 말이다. 차라리 '동화는 힘이 세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이후 동화는 거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어렸을 땐 독서에 관심이 없었던터라 대표적인 동화외엔 읽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들이 읽는 동화도 있으니 동화를 어린이만 읽는 건 이제 시대착오다. 사실 동화만큼 간결하면서도 확실한 메시지를 주는 장르가 또 있을까?
책을 읽으니 저자는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자연과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 잘 꽤뚫고 그것을 잘도 엮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대상을 의인화하는 상상력이 탁월하다. 동화의 미덕은 인간이 지녀야할 가치에 대해 교훈적이면서도 재밌게 잘 풀어놨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웬만한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 보다 낫다. 게다가 아무래도 저자가 시인인만큼 시를 짓는 마음으로 언어를 다듬고 또 다듬었을 것이다. 특히 첫번에 나오는 '항아리'나 '선인장 이야기' 같은 이야기는 읽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인간만이 후회한다. 그러나 동화는...
그런데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동화는 감동스럽다기 보단 뭔가 얼굴이 화끈거리게 만들었고 이내 가슴을 쓰리게 만들었다.
이야기는 이렇다. 잣나무 한 그루가 동서남북으로 가지를 뻗고 살고 있는데, 햇볕이 잘 드는 남쪽의 가지는 길기도 하거니와 잣 열매를 잘 맺는데 비해, 북쪽의 가지는 길이도 짧고 열매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남쪽의 가지가 북쪽의 가지를 업신여기다 못해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북쪽의 가지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남쪽의 가지는 북쪽의 가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런 남쪽 가지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여름 날 태풍이 불어 그만 북쪽 가지가 부러지고 만 것이다. 남쪽의 가지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북쪽의 가지가 없어지고 보니 몸이 기울어져 보기가 흉할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열매도 많이 맺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그 잣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려고 하는 것이었다. 남쪽 가지는 그제야 북쪽 가지가 있어야 자신도 존재할 수 있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어찌보면 지금 소위 잘 나가는 사람에게 주는 교훈일런지도 모른다. 지금은 워낙에 불경기니 모든 사람들이 다 음지에 있는 것만 같아도 분명 양지에서 잘 나가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이 자기 혼자 잘 나서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그건 분명 알든지 모르던지 음지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잘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겸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아 순간 교만한 생각이 들 수 있고, 그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크게 보면 자신에게 이득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결국 네가 망하면 나도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서로 상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그리 썼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글을 읽고 그리도 마음이 쓰리고 먹먹해졌던 것일까?
나와 오빠의 관계는 세상에서 말하는 '둘도 없는 오누이'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땐 오빠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적잖이 무시당한 탓에 싫어하기도 했다. 그런 것이 오빠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현격하게 말 수가 줄어들더니 이내 가족에게서 마음의 문을 닫고 지냈다. 아니 차라리 가족들에게 자기 표현하는 것을 서툴러 했다고 해 두자. 난 그런 오빠를 답답해 하다못해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오해와 원망, 미움과 갈등이 없지 않았던터라 내가 오빠를 싫어했던 건 어찌보면 당연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내 나도 가인콤플렉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나마 오빠 생애에 있어서 죽기 마지막 6개월이 어떻게 보면 가족과 가장 가까이 지냈던 행복하지는 않아도 다행스런 기간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세상을 떠나고 나니 나의 마음 한켠이 허전하다 못해 마음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걸 상실감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왜 우린 살아있을 때 오누이의 정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영영 이별해야 했던 것일까? 미워하는 가족라도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낫다더니 나는 그걸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동기간이란 유기적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나에겐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이 동화가 특별하게 와닿는 것이다. 그리고 남쪽 가지의 마음을 백 번, 천 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은 후회하는 존재다. 인간만이 후회한다. 그리고 동화는 그런 인간을 먼저 훈계하고, 교훈한다. 이것이 동화의 힘일 것이다.
책 읽는 마음
니나 상코비치는 언니를 암으로 잃고 그 상실감을 독서로 채워 <혼자 책 읽는 시간>이란 책을 냈다. 독서가 정말 가족을 또는 사랑하는 사람 잃은 상실감을 채워주며 치료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선 나 자신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 책의 부제처럼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독서하는 행위에 대해선 동의하고 싶다. 적어도 나는 늘 독서에 대해서만큼은 부채감을 안고 책을 읽는 사람이니까.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면 나는 그 이유를 거기에 두고 마음을 다잡고 책을 읽어 볼 참이다. 그래서도 오빠 떠난 빈방에 들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괜찮은 책을 발견했을 때는 맛있는 음식을 보고 군침을 삼키는 것과 똑같은 심리상태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빨리 하던 일을 마쳐놓고 책 읽기에 돌입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난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오빠를 잃은 상실감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현대화된 세상에서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될거라고 우려의 소리를 높이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책을 읽고, 찾는 한 그러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적어도 이런 좋은 동화를 찾아 읽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은 언제나 인간의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여러 모양으로 말하곤 했다. 특히 동화는 확실히 그래왔던 것 같다. 동화가 인간의 영원한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한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을 때까지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빠는 과연 이 책을 다 읽었을까? 살아생전 오빠의 성정으로 봐선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 책을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단출한 성격으로 봐 읽지 안을 책은 살 리가 없으니 다 읽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와 다 읽었냐고 쉽게 물어 볼 수 있는 곳에 있는 곳도 아니니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정말 멀어도 한참 멀다 싶다. 책도 언제 샀는 지 조금은 누렇게 빛이 바래있다.
새삼 이 책에 대한 인연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빠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의 방에 무슨 책이 있는 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오빠가 세상을 떠나서야 볼 수 있었으니 마치 오빠가 마지막 떠나면서 나에게 편지대신 남겨준 것 같아 읽는내내 뭉클했다. 난 아무래도 또 오빠 떠난 슬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
정호승님의 항아리를 읽고
순서가 좀 바뀐 것 같지만, 정호승님의 비목어를 읽고 항아리를 읽었다. 그리고 모닥불과 연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비목어를 읽었을 때, 그 느낌 그대로의 상쾌한 기분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렸을적 연애(戀愛)를 하는 느낌의 착각에 빠지는 것만큼 행복해진다. 먹지 않고 그 맛을 모르듯, 읽지 않고 내가 맛본 그 느낌을 글로 적는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듯 하다. 밀물과 썰물 서해안에 살고 있는 밀물이 썰물을 찾으러 다닌다. 결국 그 썰물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노송(老松)에게 듣게 된다. 그리고 썰물과 밀물이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것을 느낀다. ‘아, 우리는 하나구나 ,하나의 바닷물이구나, 공연히 내가 썰물을 미워했구나.“ 눈에 보이는 바닷물을 썰물과 밀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가 고민해 보았다. 어쩌면 이것은 내 마음속의 ‘사랑’과 ‘미움’이 아닐까? 본질적인 나의 마음은 하나인데, 밀물이 썰물을 미워하듯, 나의 사랑이 다른 미움을 미워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상사화 천국에서 살던 자매가 땅으로 내려와 꽃이 되었습니다. 그 둘이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였습니다. 그 둘은 같이 꽃이되여 한몸으로 사는것만으로 행복했답니다. 그런데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꽃과 잎이 함께 피어나지 않는 것이였습니다. 동생인 잎은 누나인 꽃이 보고 싶어 견뎌보았지만 꽃이 피기 전에 시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불행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보고 싶었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때문에 단 한번도 피어나지 않은 해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꽃을 상사화(相思花)라 부른답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억들은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고도 인연이 될 수 없는 슬픈 사연들이 분명히 주변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들이 세상의 혼탁한 잣대로 잃어버리는 실수는 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쩌면 상사화처럼 평생을 두고 지울 수 없는 기억 속에 살아가야 하니까요.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잣나무 한 그루에 남쪽가지와 북쪽가지의 이야기이다. 남쪽가지는 북쪽가지를 미워하였다. 어느날 태풍이와서 북쪽가지가 부러졌다. 남쪽가지는 잘된일이라고 생각했다. 북쪽가지가 없는 잣나무는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잣도 제때 못여는 볼품없는 나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잣나무는 사람들의 땔감이 되었다. 직장,가정,모임에서 공동체의식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손가락 열 개중 필요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작가는 세상의 모든 생활에서 나 하나의 존재를 나뭇가지에 표현했다. 내가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존재도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다. 가족, 동료, 내가 참여한 작은 모임의 사람이 중요하고, 사랑해야 할 이유는 당연하다. 좋은 숲에서 훌륭한 나무가 자랄 수 있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족제비 탑 지리산 영원사에 많은 눈이 왔다고 한다. 그 암자에서 구곡각운 스님은 불경을 집필하고 있었다. 염송설화라는 총 30권에 이르는 불경이다. 그 눈은 암자와 인기척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불경의 마지막 한권을 남겨놓고 붓이 다 닳아 없어진것이다. 눈 때문에 마을로 붓을 구하러 갈수도 없었다. 스님의 고민에 빠졌다. 그 때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났다. 예전에 독사의 독 때문에 약초로 치료를 해준 족제비였다. 그 족제비는 스님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걱정이 없다는 듯, 족제비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다. 족제비는 자신이 스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그동안 스님의 은덕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해온 자신이였다. 다음날, 스님이 계신 암자로 가서 죽음을 택하였다. 족제비의 죽음으로 인하여 염송설화는 완성되었다. 스님은 족제비 시체를 소중이 거두어 다비|를 해주었다. 다비의 불길이 다 꺼지고 , 그 몸에서 사리가 나왔다. 스님은 족제비가 부쳐님이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사리를 안치했다. 바로 그곳이 영원사에서 위쪽 길에 있는 ‘상무주암’는 암자의 삼층 석탑이다.
잉어
창덕궁 후언 부용정 근처에 연못이 있다. 매우 아름다운 연못이다. 밤이 되면 이 연못에 달그림자가 비치곤 한다. 물위의 연꽃과 더불어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 때문에 달과 연못은 서로 다투었다. “달이 있기 때문에 이 연못이 아름다운 것이다.”, “연못이 있기 때문에 달이 아름다운 것이다, ” 하면서 자기가 아름매일 다투었다. 연못의 편을 들던 잉어가 물위에 비친 달빛을 지우고 다녔다. 화가난 달은 바람을 시켜 잉어를 물밖으로 몰아쳐 버렸다. 그리고 그들을 밤만되면 다시 싸웠다고 한다. 그 잉어가 연못에 잉어조각으로 남아있다고한다.
지리산 상주무암에 고승이 살았던 것 ,부도탑이 족제비의 것인지의 사실여부는 중요하기 않다. 작가는 부도탑에게 족제비의 사연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창덕궁의 연못에서 잉어조각에게 달과 연못이 싸우던 일들을 분명히 들었을것이다. 우리가 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물(事物)들이다. 작가는 아무것도 아닌 사물에서 의미를 부여했다. 그에게는 그 사연을 들을 수 있는 귀와 그 사연들을 볼수 있는 눈이 있다. 이렇게 부여된 의미는 글로 옮겨져 ,우리 눈앞에서도 생생하게 볼수있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정채봉 작가는 이 책을 "연필로 또박또박 눌러쓴 작품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책을 펴서 느낌가는곳 어디서든 읽어도 좋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드는 표현같다. 아름다운 글을 전해준 작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
<신데렐라>,<백설공주>,<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모르는 이가 없다. 이 책들은 어렸을땐 환상적인 꿈과 희망을 주는 동화로 읽히고 커서 읽으면 명작소설쯤으로 읽혀지는지라 많은 이들에게 동화는 이 책들이 처음과 끝으로 통하나 보다 싶다. 더 더욱 어른이 되어서 동화는 어린아이들의 책쯤으로 보여져 괜시리 낯부끄럽다고까지 한다. 나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중, 소설의 긴 줄글에 지쳐 책장을 뒤적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어른이 읽는 동화'라는 말에 아무런 생각없이 책장을 펼쳤고, 오랜만에 어깨에 힘 빼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을 넘겼던 것 같다.
이 책에는 항아리, 비익조, 밀물과 썰물, 선인장 이야기 등 짤막한 단편 동화들이 여럿 실려있다. 그 중에서도 <항아리>는 단순하지만 결코 단순하지않고 짧지만 여운이 긴 동화다. 천신만고 끝에 가마를 견디고 나온 항아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항아리는 썩 잘 만들어지지못했다는 이유로 아무한테 쓰이지 못하고 버림받다가 오줌통 신세가 된다. 하지만 훗날, 오줌통 역할의 항아리는 범종의 음관 역할을 하는 항아리로 쓰여져 영롱한 종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얘기다. 무심코 읽어내리면 못난 항아리의 운 좋은 이야기 쯤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항아리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싶다. 뜨거운 가마를 견디듯, 온갖 교육에 시달려 사회에 나오지만 변변찮은 일자리 하나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음들. 하지만 항아리가 그랬듯, 언젠가 맑고 청아한 종소리를 낼 날이 오리라 믿는다.
매일 -다 로 끝나던 책만 읽다가 이렇게 -습니다로 끝나는 책을 읽으려니 어색하면서도 푸근한 느낌이다. 어린시절 할머니가 이야기해주시듯한 느낌, 짤막한 글이여서 부담도 없고 머리를 싸맬 만큼 어렵고 무겁지도 않다. 무심코 읽으면 가볍지만, 곰곰이 읽으면 여운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 이것이 동화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싶다.
|
|
항아리 비익조 밀물과 썰물 선인장 이야기 손거울 물과 불 상사화 섬진강 어린 왕벚나무 동고동락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두 그루의 오동나무 인면조 족제비 탑 가을 파리의 슬픔 어느 손 이야기
이 책 <항아리> 안에 있는 꼭지들이다. 항아리 안에는 이렇게 짧은 이야기가 모여있다. 이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항아리', '밀물과 썰물',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 이렇게 3개. 솔직히 나머지는 감동도 적고 재미없었다. 하지만 내가 별4을 주는 이유는. 이 3개의 이야기만으로도 책가격이 아깝지 않은 감동이 있었다.
정호승 책들의 특징같다. 모든 이야기가 감동이진 않지만 다른 재미없는 이야기까지 커버해주는 깊이있는 이야기가 중간중간 있는거.
|
|
오랫만에 꺼내든 책 이번주에 구입한 책값만 해도 38만원어치다. 물론 나 혼자 볼건 아니고 선물할려고 산것도 있고, 공금으로 구입해서 토론회를 준비하려고 산책도 있지만 언제나 yes24골드회원인데 막상 읽는 책은 구입하는 책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것 같다.
게다가 이번달에는 책을 읽는다는것이 왠지 사치스러운 느낌이랄까...
행복해서 웃는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지는 것이라지만 마음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것인데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니 책을 읽기가 어색한 느낌.
그래도 가을이니 한권 잡아든것이 정호승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항아리'였다.
고등학교때인가 안도현이 썼던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를 읽고 나름 괜찮았던 기억이 있는데다 정호승이라는 시인자체가 주는 이미지, 이 가을에 왠지 어울릴것만 같은 시인...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선택은 실패했다.
연어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쭉 이어지는 한권의 책일거라 생각했는데 한 네다섯장정도로 다른 이야기들을 엮어둔 책이였다.
그것도 정호승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여기저기서 간단한 우화들을 옮겨논것 같은 느낌.
전혀 정호승의 필체가 느껴지지 않는 책이였다. 그리고 이 가을에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 책이였다.
어찌보면 객관적인 평가라기보다는 지금의 내 감정과 코드가 잘 맞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별점을 주자면 2개정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