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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날자.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학창시절, 내가 가장 먼저 접한 이상의 작품은 날개가 아니라 오감도였다. 오감도 시제 1호를 읽고서는 피식 웃고 말았는데, 시제 2호와 3호를 읽어가면서부터 헷갈리기 시작했으며 시제 4호를 읽을 때쯤 매너리즘에 빠졌다. 그 후에 접한 이상의 날개는 왜 제목이 날개인지 알 것 같은 주인공 '나'의 무기력한 그의 자아분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옥상에서 날개를 외치는 장면을 읽다 불현듯 그의 오감도 시제 1호를 다시 생각해봤다. '뚫린 골목'은 희망적인 탈출구를 의미하니, 날개와 같은 의미겠구나....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가 이상 자신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묘사구로 그는 한국 현대시사에서 식민지 시대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그는 불우했던 자신의 성장기를 바탕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인 이상향을 추구하는 이상주의의 이상(理想)으로 불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뜻은 틀려도 발음은 같으니까...
날개는 그의 삶이 반영되어있음을 보여주는 듯, 몸은 허약하고 무기력하지만, 자의식의 강하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탐구정신이 강한 '나'는 이상 자신이었으며, 아랫층 기생은 그의 여자 '금홍'이다. 봉별기에서도 이상이 다방 '제비'를 운영할 때 금홍은 '제비'의 마담이 된다. 그의 글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기생으로 그의 삶을 반영한다.
이상은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쳐야 하는 유년기 시절에, 自己愛(나르시시즘)이 형성해야 될 시기에서 양자가 되어 어머니라는 존재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상처를 많이 받았기에 그의 삶은 정상적이지 못했으며 일반적인 여성에게 기대기 힘들었으리라 본다. 그 상처가 불안으로 나타나지면서 그의 작품 전체적으로 반복과 강박적인 부분이 많다. 특히 오감도에서 두드러지지만 날개에서도 그는 저녁 늦게 밤거리를 하릴없이 이곳저곳을 '불안'한 마음으로 서성임을 반복하기도 하며, 기생 아내가 전해준 그 몇푼의 돈을 받으면 다시 돌려줌을 반복함으로써 그 돈 자체로써도 불안감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성을 만나는 것도 속으로는 불안해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연구하기까지 하니 그 얼마나 기묘한 일인가?
날개 이외의 글들도 모두 역설적이며 자기 분열과 자의식의 과잉 등의 비합리적 세계로 일관되어 읽는 내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몽환적이라 좋다. 향에 취한 듯한 묘한 음악에 취하듯이 그의 글에 단숨에 취해버린다. 고전이지만 고전같지 않은 현대적인 느낌. 문체와 형식의 자유로움 덕분에 더 그러한 느낌을 받겠지만, 그래서 그를 천재라 칭한 것이 아닐까?
다방과 까페등을 운영하며, 그가 서울이 아닌 동경의 한 빌딩의 옥상에서 날개를 펼치듯 이상의 이상향은 자신의 모국보다 발전한 낯선 타국이었을까? 결국 그는 동경에서 몇몇의 작품을 쓰고 생을 마감했는데, 그 동경에서 쓴 몇몇의 작품중에 '권태'는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 정열과 목표 그리고 희망이 없음을 암시하여 꼭 자신의 삶의 끝이, 즉 그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것 같았고, '종생기'는 자기의 삶의 종언을 예언하듯 유언장의 느낌이었다. 하긴 그는 종생기를 끝으로 삶을 마감하였다하니 유언장이라 해도 다름없겠다.
< 부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부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부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좁은 방 것이나 우주에 꽉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쉴 것도, 또 어루만질 것도,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권태의 마지막 부분-
<씻어 버릴 수 없는 숙명의 호곡, 몽고레안푸레케 오뚝이처럼 쓰러져도 일어나고 쓰러져도 일어나고 하니 쓰러지나 섰으나 마찬가지 의지할 얄팍한 벽 한조각 없는 고독, 고교, 독개, 초초. 나는 오늘 대오한 바 있어 미문을 피하고 절승의 풍광을 격하여 소조하게 왕생하는 것이며 숙명의 슬픈 투시벽은 깨긋이 벗어놓고 온아종용, 외로우나마 따뜻한 그늘 안에서 실명하는 것이다. 의료하지 못한 이 홀홀한 '종생' 나는 요절인가 보다. 아니 중세 최절인가 보다. 이길 수 없는 육박, 눈멀은 떼까마귀의 매언 속에서 탕아 중에도 탕아, 술객 중에도 술객이, 난공불락의 관문의 괴멸, 구세주의 최후연히 방방곡곡이 여독은 삼투하는 허식 중에도 허식의 표백이다 출색의 표백이다.> -종생기 p128-
이상의 실화에서의 이 부분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슬퍼? 응, 슬플 밖에. 20세기를 생활하는데 19세기의 도덕성 밖에는 없으니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로다. 슬퍼야지, 만일 슬프지 않다면 나는 억지로라도 슬퍼해야지. 슬픈 포즈라도 해보여야지. 왜 안 죽느냐고? 헤헹! 내게는 남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버릇밖에 없다. 나는 안 죽지. 이따가 죽을 것만 같이 그렇게 중속을 속여주기만 하는 거야. 아 그러나 인제는 다 틀렸다. 봐라. 내 팔. 피골이 상접. 아야아야. 웃어야 할 터 인데 근육이 없다. 울려야 근육이 없다. 나는 형해다. 나라는 정체는 누가 잉크 짓는 약으로 지워 버렸다. 나는 오직 내 흔적일 따름이다."
여전히 그의 작품은 쉽지않다. 어른이 되서 읽으면 좀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겠지 싶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단지 그의 삶을 심리학적으로 또는 정신분석학을 통해 이해할 수 있으며, 그의 소설 또한 이해할 수 있을 뿐.. 그를 알고자 하는, 그가 소설속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그 느낌을 완벽하게 알 수 없어 약간은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몇 번 더 읽어봐야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으로 자꾸 눈길과 손이 간다.. 그의 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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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나이에 있었을 땐 알지 못했다. 시험에 나오는 작품. [날개]. 그 자체만 속독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명이 김해경이고 2 살 무렵부터 친부모로부터 떨어져 지내야했던 불우하고 불안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작품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상의 많은 작품들이 실린 이 책을 통해서 그의 문학 작품의 경향을 떠나 두 아이를 키우는 어미로써 많은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눅눅해졌다.
하지만 자신의 아픔을 딱 그 만큼의 크기만 나타냈다면 오늘날까지 소위 위대한 작가로 불리진 않았을 것이다. [보리피리]를 노래한 한하운도 그랬듯이 작품으로서의 어떤 묵직한 '승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의 여러가지 경험은 작품 세계에서 대부분 그대로 녹아나온다. 독일의 유대인 대량학살정책에 소년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임레 케르테스는 '내가 무엇인가를 쓰려 하면, 아우슈비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이상도 그랬을까? 그의 단편 하나하나가 염세적이고 권태적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매번 '동경'으로 가자라고 하는데 난 아직 그 이유는 모르겠다. (더 공부를 해야지...)
[권태]라는 작품은 이상의 풍부한 섬세한 묘사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도 그의 일관된 (어쩌면 생 전체의 한 줄기로서) 마음을 엿볼 수 있는데, 불에 달려들어 불을 끄는 부나비를 보고 '부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라 자찬하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라고 한다.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한 이상이 너무 쓸쓸해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