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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카프카의 염세주의적 사회비판)
"변신 (카프카의 염세주의적 사회비판)" 내용보기
<변신>( 만약 당신의 가족이 벌레로 변한다면? )   카프카의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책은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행스럽게도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통해서 간략하게나마 실존문학의 맛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실존문학의 선구자인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것은 배추김치를 집집마다 다른 방법으로 담그는 것에 비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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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만약 당신의 가족이 벌레로 변한다면? )

 

카프카의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책은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행스럽게도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를 통해서 간략하게나마 실존문학의 맛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실존문학의 선구자인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것은 배추김치를 집집마다 다른 방법으로 담그는 것에 비교하면 저렴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그 만큼 색다르고 맛 다른 경험이었다.


카프카의 <변신>은 밑도 끝도 없이 바로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 가 독충으로 변신하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불쌍하게도 카프카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그레고르는 가족들(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을 전부 부양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불평 없이 충실이 이행하던 장남에서, 하루아침에 가족들에게 있어서 외부에 절대 드러나서는 안 되는, 쓸모없는 존재인 독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자가 갑작스럽게 그를 미물로 만들어버린 의도는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가 만들어낸 독충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왔다. 사회는 그들에게 백수라는 낙인을 찍고난 뒤에 능력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경우에 따라서 가족 내에서도 우리 아들이, 딸이, 형이, 누나가, 동생이 백수라고 밝히기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한다. 그레고르가 독충이 되어버린 현실과 우리들이 백수가 되어버린 현실이 무엇이 다를까? 독충이 되는것과 다를바 없는 우리들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책을 읽어나갔다.


카프카는 예상대로 그레고르의 가족들을 비인간적으로 표현한다.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독충이 된 그레고르가 자신들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에게 위로와 슬픔과 격려를 주기는커녕 그레고르의 슬픔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에게서 도망가 버린다.


어머니는 그레고르의 모습을 잘 살펴보기 위해 들여다보고 있기는 했지만, 발은 그와는 반대로 정신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39쪽)

아버지는 구원의 손길은커녕 이때다 하면서 그에게 가차 없이 일격을 가했다. 그레고르는 피를 뿜으면서 방 안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40쪽)


그리고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던 그의 누이동생마저 그에게서 멀어져 간다. 독충으로 변한 그의 식성을 알아내고자 여러 음식을 가져다준 따뜻했던 마음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누이동생은 예전과는 달리 아침이든 낮이든 가게에 나가기 전에 뭐든 있는 대로 쓸어보아 그레고르 방에 밀어 넣고 나가버렸다. 요즈음에는 청소도 대강대강 해치웠다. 이제 먼지는 벽을 따라 띠처럼 쌓이고 군데군데 쓰레기와 먼지와 오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80쪽)


마지막까지 보살펴주던 동생마저 그에게서 떠난 순간, 그를 담당하게 된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새로 들인 하녀가 되었다.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은 그레고르가 하녀라고 대접해줬을까? 그렇지 않았다. 하녀는 그를 마치 실제 벌레처럼 취급했다. 가족의 손을 떠난 순간 그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졌다.


가정부가 늘 하던 대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을 때 그레고르는 화가 나고 말았다. 그래서 덤벼들 듯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가정부는 놀라기는커녕 태연히 문 옆의 의자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들어올린 의자로 그레고르의 등을 내려치기 전에는 결코 그 입을 다물 것 같지 않았다. (83쪽)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수입에 의존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나섰지만,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생활고 때문에 살고 있는 집을 처분해야 되는 상황까지 내몰리게 된다. 하지만 집을 처분하려면 그레고르의 문제가 걸릴 수밖에 없었고 그것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이 괴물 같은 벌레 앞에서 오빠 이름조차 거론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우리는 이 괴물로부터 벗어날 궁리를 해야만 해요. 우리는 이제껏 이 괴물의 시중을 들어왔고, 또 이 괴물로 인한 고통을 꾹 참아왔어요. 우리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러니 이제는 이 괴물을 버리고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를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어요.” (92쪽)


누이동생의 가시돋힌 독설을 백번 옳은 주장이라며 맞장구치게 하면서 카프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족들의 비정함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일어나는 가족의 비정함을 더욱 극대화 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카프카는 결국 그레고르를 가족들의 버림 속에서 괴로움만 겪다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는 불쌍한 존재로 만들면서 극을 고조시켰다.


그레고르는 삶의 무게를 벗어던졌다. 그러나 나는 그것과는 다른 무엇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제발 그를 원래대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그레고르가 꾼 꿈으로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으니 꿈이라고 말해달라고 기도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카프카는 나의 기도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카프카의 이야기에서 그레고르의 행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프카는 떠난 그레고르를 바라보는 가족의 미묘한 심리를 표현해내면서 나에게 분노와 씁쓸함을 가득 안겨다 주었다. 가족들은 어찌되었건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들하고 이리 와. 지난 일에 얽매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 생각도 좀 해줘.” (103쪽)


그레고르가 떠난 뒤 그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들에게는 가족보다 더 중요했던 경제적인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과거에서 벗어나 점차 생기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새로움 꿈과 아름다운 계획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끝나버렸다.


씁쓸하면서 한편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족 개개인에게 독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는 부담해야 할 짐이었으며, 바깥으로 드러나서는 안될 치부가 되었다. 카프카의 이야기처럼 사라져 주는게 오히려 낫다고 가족들은 생각했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은 지겹도록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가족들마저도 그 본능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카프카의 메시지를 접하고 나니 뭔가 빠진 것처럼 허무해졌다.


아마도 카프카가 노린 것이 이것일까? 허전한 마음을 돌아보고 이 이야기에서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 찾아보라는 것이 책에 숨겨진 그의 질문이었던 것인가? 허무한 결말대신 권선징악의 대표작들처럼 인륜을 저버린 이들에게 행복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메시지로서 그들을 괴롭혔다면 어땠을까? 왜 그들의 불행을 그리지 않았을까?


카프카는 끝까지 매정했다. 차도살인이라고 했던가? 우리에게 칼만 쥐어져 놓고서는 유유히 떠나버렸다. 우리는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맞이할 불행을 우리가 직접 그리던지 아니면 우리는 그들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고 판단할지...  하지만 어느 면을 보더라도 <변신>은 타당한 근거를 가진 완벽한 모습을 하고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심판> (아무 이유없이 죄를 얻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 

 

곽복록 서강대 명예교수님이 번역하신 <변신>에서는 변신 이외에 다른 소설이 하나 더 담겨있었는데, 카프카의 고독 3부작 중 하나인 <심판>이었다. 헌법에 대한 책을 몇 권읽은 것이 고작인 나로서는 카프카가 이야기하는 소송에 관련된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받아들이기 수월치 않았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아직도 통용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심판>에서 이야기하는 카프카의 비판적인 목소리를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심판>에서도 <변신>과 마찬가지로 인생을 결정지을만한 사건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등장한다. 책의 주인공은 젊은 나이에 은행 부장의 직위까지 올라있는 요제프 K.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는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두 명의 감시원에 의해 자신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가 조무지 통하지 않았던 감시원들 다음에 등장하는 주임도 그에게 같은 사실을 인지시켜준다. 그들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본의 아니게 감시당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첫 번째 심리가 벌어지던 날. K는 작심하고 자신을 거칠게 다루었던 감시원들과 아무런 이유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심리하고 있는 재판부의 사람들을 격렬한 어조로 비판한다.


“이 사건 때문에 저는 불쾌했고 다소 화도 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또다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170쪽)

“확실히 이 재판소의 모든 현상의 배후, 제 경우를 예로 들어 말씀드린다면 체포 및 오늘의 심리의 배후에는 하나의 커다란 조직이 숨어있습니다.” (172쪽)


K의 심리장에서의 발언은 그를 찾아왔었던 감시원들을 무서운 처벌을 받도록 만들고, 자신 또한 상부의 인물들에게 미운털이 박히고 만다. K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상처를 받는 이들은 힘없는 말단 조직원이었고, 자기 자신이었다.


K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은 시골에 살고 있던 그의 숙부에게까지 전해지고, 사실을 알기 무섭게 숙부는 그를 데리고 자신의 친구인 훌트 변호사를 찾아간다. K는 그곳에서 레니라는 변호사의 하녀를 알게 되고, 그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훌트 변호사와 재판소의 고위 인물에게 또 한 번의 안 좋은 기억을 남기게 된다. 


어찌되었건 간에 훌트 변호사는 K의 사건을 맡아서 진행하게 되지만, K는 훌트의 지지부진한 작업속도에 불만을 느끼고, 점차 자신의 일을 등한시 하면서까지 소송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로 인해 회사 내의 경쟁자였던 지점장 대리에게 허점을 보이기 시작한다.


K는 차라리 자신이 직접 진술서를 작성하고 무죄를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서는 변호사를 찾아가지만 훌트는 법조계 세계의 진실에 대한 어두운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카프카는 개인이  아무리 몸부림 쳐봤자 부질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변호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개인적 연고이고, 변호의 가치는 그 대부분이 이 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변호사들이 정보를 캐내거나 몰래 찾아가 서류를 뒤져서 고객을 유치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고육지계에 불과하며 진실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정정당당한 인간관계가 차차 뚜렷하게 재판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279쪽)


내게는 높은 지위에 있는 지극히 훌륭한 재판소 직원들이 일부러 찾아와서 여러 가지 정세에 대해 지극히 호의적으로, 또는 적어도 금방 풀 수 있는 수수께끼의 형태로 이야기해 줍니다. (280쪽)


즉, 홀트 변호사는 K에게 재판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빽의 힘이 중요하며, 자신의 고위층에 연결된 인간관계가 바로 그 해답일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이야기해준다.


훌트는 이렇게 말만 번지르르 하게 늘어놓고 여전히 그의 사건의 처리에는 미온적인 반응을 계속 유지했고, 그 덕분에 K는 소송에 대한 압박감으로 점점 더 일에 대한 집중을 잃어갔으며, 그러던 그때 자신의 고객 중 한명이 화가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제공한다.


재판관들의 지정 화가 일을 업으로 삼고 있던 티토렐리는 K가 아무리 무죄라고 해도 한번 결정된 사실은 캔버스에 그려진 모든 재판관을 줄지어 놓고 앞에서 변호하는 것이 실제의 재판을 받는 것보다 나을 정도로 절대 번복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즉, K는 무죄였으나 이미 유죄라고 체포되었으므로 아무리 재판을 거쳐도 결국 그는 유죄라는 것이었다. 이런 그에게 티토렐리는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 가지의 방책을 알려준다. 그것은 실질적 무죄, 형식적 무죄, 소송의 진행 방해. 이렇게 세 가지의 방식이었다.


티토렐리는 자신이 이제껏 살면서 실질적 무죄로 벗어나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일러두면서 다시 K에게 완전 무죄는 없음을 인식시킨다. 결국 K에게 가능한 방법은 형식적 무죄와 소송의 진행 방해 이렇게 두 가지였는데, 이 두 가지 방법은 K가 생각하기에도 충격적이었고, 나 역시 그러하였다.


형식적 무죄는 일시적인 무죄의 방식으로 하부 조직의 재판관들을 설득하여 무죄를 얻어내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을 통하면 티토렐리가 근무하는 재판소의 재판관들로 하여금 무죄를 받아낼 수는 있으나, 그 위의 재판소가 다시 소송을 제기하면 혐의는 다시 재판에 회부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즉, 이 방법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지막 방법인 소송의 진행 방해. 티토렐리에 따르면 이 방법이 가장 효율성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즉, 말 그대로 유죄인 상태에서 소송의 진행과정을 답보상태에 계속 머무르게 하여, 죄를 보유하고 있으나 처벌이 없는 상황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사건의 관련 재판장과 같은 인물들에게 호의적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성공하게 되면 정기적으로 심문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출석할 필요 없이 알아서 처리될 것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공짜란 없던가? 이야기를 마친 후 티토렐리는 갑자기 자신의 그림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K에게 이야기한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그렇다. 자신이 정보를 제공해 주었으니 대가를 요구했던 것이었다.  


절대적인 결백을 증명할 수도 없었으며, 모든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뇌물과 같은 것이라는 카프카의 날선 비판을 담은 이야기에 구토가 밀려왔다. 결국 K는 화가가 이야기한 두 가지 방법을 모두 다 거부하고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서 싸움을 해나갔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지지부진한 움직임을 보이던 변호사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그곳에서 만난 상인 블로크의 진술도 그에게 변호사와의 결별을 위한 동기가 되어 주었다. 블로크는 5년간 훌트와 소송을 준비했지만 현재까지 해결될 기미가 없었으며, 그 이외에 7명의 다른 변호사들을 고용하여 일을 진행시키느라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결국, 카프카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변호사를 고용해 봤자 돈만 받아먹고 시간을 낭비할 것이며, 재판관을 구워삶아 형식적 무죄나 소송의 진행 방해를 해봤자 원래부터 무죄였던 K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의 음모로 인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책의 미완성으로 인해 도중에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는 면이 약간은 있었으나 마지막에 가서 K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죄명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이 카프카의 실존문학에서 이야기하는 그 시대의 실제라고 생각하니 <변화>에서 느꼈던 분노보다 훨씬 더 강렬한 분노가 찾아왔다.


대체 누가 무고한 그를 고발한 것인가? 누가 상부에 로비를 벌여 그를 타락으로 이끌었는가? <심판>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의 추측을 해보았다. 책의 미완의 단장에 의하면 이야기 내내 유능한 것처럼 보였고 자기 실력만 가지고 그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했던 K도 역시 그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하스테라라는 검사와의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지점장 눈에 띄게 되었고 그가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능력에 관계없는 인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가 가장 피해를 입었을까? 바로 지점장 대리라는 생각이 바로 정답으로 떠올랐다. 오랜 시간동안 은행에서 일을 하면서 구축해 놓은 인맥도 있었을 것이며, 돈을 관리하고 대출해주는 입장이었으므로 그를 궁지에 몰아넣을 인물을 포섭하기에도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왜 K는 끝까지 검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다.


변신과 심판 이 두 가지의 소설을 통해 사르트르보다 더 매운 실존문학의 맛을 본 것 같다. 다소 직설적이고, 근거가 없는 사건의 발생이 일어났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깊숙이 파고들어 따져볼 수 있다면 사회에 대한 시각을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연 머리에 쓴 책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었음을 이 책은 증명해냈던 것 같다. 



k*******7 2009.06.23. 신고 공감 3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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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난세에 영웅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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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 때는 참 낯설고 어색한 작품이어서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지 막막했던 것 같다. 시인 이상의 시들과 함께 '낯설게 표현하기'를 배울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훌쩍 지난 삼십대 중반에 다시 읽은 <변신>은 역시 그때와 다르게 읽혔다. 여전히 낯선 상황, 낯선 표현임에는 변함이 없는데, 작품을 더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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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 때는 참 낯설고 어색한 작품이어서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지 막막했던 것 같다.

시인 이상의 시들과 함께 '낯설게 표현하기'를 배울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훌쩍 지난 삼십대 중반에 다시 읽은 <변신>은 역시 그때와 다르게 읽혔다. 여전히 낯선 상황, 낯선 표현임에는 변함이 없는데,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조금 생겼나 보다.

 

부모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영업사원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독충으로 변해 있다. 이런 황당한 상황에 가족들은 경악하고, 두려워하지만 점점 적응해 간다. -역시 인간이 적응 못할 상황은 없다.- 상상조차 힘든 상황에 처한 가족들이 적응해 가는 과정, 또 벌레로 변한 당사자 그레고르 또한 벌레로서 삶에 익숙해져 가는 모습, 그 과정 속에서 가족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찾고 여동생이 가족의 새로운 희망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단 이 작품의 서술에서 카프카가 참 예민한 사람임을 느낄 수 있다. 이런 느낌은 어디에선가 본 카프카의 사진 때문이기도 한데, 살이 없는 볼, 배우 정보석의 입처럼 얇으며 일자로 다문 입술, 위로 날카롭게 솟은 귀, 거기에 눈동자가 큰 눈. 어쩐지 힘이 있어 강직하기 보다는 내적 고집 덕에 버티고 있는 만만치 않으면서도 조금은 가련하기까지 한 인상이다. 나는 종종 작가의 얼굴을 알고 나면 작품을 읽는 내내 작가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작품에 완전 몰입하는데 어려움을 겪곤 하는데, 이 작품은 오히려 카프카의 모습을 계속 그리면서 읽다보니, 더욱 잘 읽혔다. 아마도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가족의 모습이나 분위기가 카프카 본인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어서 일 것이다.- 해설이 그렇다고 확인해 주었다.- 거기에 카프카는 부모가 모두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세상에 내놓고 인정받기 보다는 안으로 더 고독을 쌓는 시대적 우울함도 가졌다고 하니,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만들어졌겠구나 싶다.

 

이 작품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중 여동생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음악에 재능도 있고, 관심도 있지만, 음악학교에 진학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집안일이나 도우며 소일하던 여동생이었고, 그레고르가 돈을 더 벌어 음악학교에 진학시켜 줄 계획을 갖고 있는 자립할 능력이 없는 존재였는데,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해 방 안에 갇혀 지내는 동안 유일하게 매일 그레고르의 방을 방문하고 청소하고 먹을 것을 챙기는 용기를 발휘한다. 그리고 그레고르가 죽은 후 가족이 전차를 타고 야외로 나가서는 그레테 그녀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좋은 신랑감을 만나 결혼을 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원으로서 또는 새로운 삶에 대한 꿈과 계획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떠오른 문구가 '난세에 영웅이 난다' 였다. 그리고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였다. 내가 무언가를 꼭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으면 가진 능력도 썩히기 마련인 걸 살면서 많이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건성하고, 집안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는 제 앞가림도 못하고 살던 사람이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집안이 망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여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해 내는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자주 보게 된다. 사실 내 주변에도 몇 있다. 그 들은 어려운 상황을 만나고서야 자신의 존재감을 자각함은 물론 주변 사람들 조차 '그래 너라도...'하며 그들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하고 그를 중심에 두고 희망을 품게 된다. 그리고 좀 다른 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그 주변의 희망의 눈길이나 텔레파시가 그를 일으켜 세우고 영웅이 되게도 하는 것을 본다.

실존. 실존에 대해 문학계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실존은 방금 언급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각각의 존재가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순간. 그것을 포착한 작품, 그것이 실존문학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카프카.. 시간을 갖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더 찾아 읽어보고 싶어졌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 표현이 부족한 듯 하나, 정말 즐겁고 의미있는 독서였다.

 



p*****5 2009.07.08. 신고 공감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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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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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글쓰기 관련 서적을 통해 카프카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몇 페이지 되지 않았지만 편식이 심한 읽기 습관 탓에 그동안 멀리했던 것에서 느끼는 신선함과 고전문학에 대한 고정관념의 무너짐에서 오는 충격까지 그의 매력에 빠지기에 충분했다.그의 작품 중에 변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작품의 엇갈린 평가 때문이었다. 독자들에게는 그의 작품 중 으뜸으로 여겨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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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글쓰기 관련 서적을 통해 카프카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몇 페이지 되지 않았지만 편식이 심한 읽기 습관 탓에 그동안 멀리했던 것에서 느끼는 신선함과 고전문학에 대한 고정관념의 무너짐에서 오는 충격까지 그의 매력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그의 작품 중에 변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작품의 엇갈린 평가 때문이었다. 독자들에게는 그의 작품 중 으뜸으로 여겨지는 반면 작자 자신은 변신을 그의 실패작이라 평했다고 한다. 심지어 변신을 쓴 후 자신에게 재능이 없음에 괴로워 했다 하니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이런 극과 극의 평가가 나올 수 있는지 궁금했다.

카프카의 작품을 살짝 맛본 것으로 어느 정도 고전문학에 가지고 있던 편견을 없애주는 계기가 되었으나 여전히 고전은 누런 종이 깨알 같은 글씨가 촘촘히 박혀 있는 책의 느낌을 떨칠 순 없었다. 다행히 표지에서 보여주듯 산뜻한 느낌의 종이 위에 큰 글씨와 넉넉한 여백 그리고 챕터별 포함된 일러스트는 고전은 절대 무섭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듯하였다.

카프카의 변신은 시작부터 황당하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벌레로 변해 버린 자신의 몸을 확인하면서 시작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 황당함은 점입가경을 이룬다.

벌레로 변한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 또는 좌절보다 출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시간에 얽매여 초조해 하는 모습이 앞선다. 자신이 벌레로 변했는데 출근 준비를 걱정하다니. 물론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출근하기 위해 아픈 몸을 침대에서 질질 끌고 내려와야만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공감 이상의 절감을 불러오는 장면이었다. 그의 걱정대로 늦은 출근에 지배인이 집으로 찾아와 더이상 일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협박을 한다. 그는 벌레로 변한 몸을 신경쓰기 보다는 지금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지배인을 만나려 한다. 그의 노력이 안타까웠다. 해고 당할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 동료의 모습이 보였다. 밥벌이의 고달픔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결국은 밖으로 나가지만 모두 그의 변한 모습에 기겁하며 도망친다. 그 이후 그가 받아야할 냉대와 겪어야 할 외로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누구도 그의 방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당분간의 누이동생의 배려가 있었으나 이도 오래가지 않았다.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으로부터까지 냉대를 받게 된다.
불빛 아래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어두운 방 조금 열린 문틈으로 흐뭇해하는 그의 대비적인 모습에 극한의 외로움이 느껴졌다.그와 가족 간의 짧은 거리는 안타까움만을 배가시켰다.

벌레에게서 감정이나 의도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두려움이 되고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면 죽일 태세를 갖춘다.주인공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가 움직인다. 아버지는 사과를 던져 그를 죽이려 한다. 등에 사과가 박혔다. 결말 부분에서 등에 박힌 사과는 썩고 주위는 돌보지 않아 먼지와 고름으로 가득 찬다. 사람과 사람 사이 의사소통의 단절로 의도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다가오는 누군가에게 방어태세를 공격을 꺼리지 않고 상처 내기를 서슴지 않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누이동생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과는 달리 어쩌면 마지막 구원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그녀가 닫은 문에 갇혀 그는 서서히 죽게 된다.

벌레가 죽었다고 슬퍼할 사람이 있을까? 벌레를 죽였다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듯 벌레로 변한 그가 죽은 후의 가족들의 일상은 평화롭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간다. 오히려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읽는 내내 그가 주인공을 벌레로 변신시킨 의도에 감탄했다.감정이나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벌레라는 설정과 그의 실질적인 의도나 감정을 서술하는 독백이 맞물려 극한의 단절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를 극에 달하게 했다.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른 책이 있다. 변신도 그러하다. 학생 때 읽었다면 그저 황당한 설정에 매료되었을 것이고 20대의 지금은 그의 외로움과 고통을 공감하지만 여전히 그를 관찰하는 제 3자의 입장에 머문다 그러나 오늘의 고독과 내일의 불안이 쌓이고 쌓였을 때는 벌레로 변태한 자신 속에서 그를 절감하게 될 것 같다.

d********l 2009.07.0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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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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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 그레고르는 잠자는 자신이 어느새 거대한 벌레로 변해 침대 위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로 시작하는 <변신>은 그 시작만큼이나 결론 또한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쪽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가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신체에 대한 좌절을느낄 새도 없이 출근을 해야 한다고 발버둥 치는 대목이다.   그레고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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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아침, ~ 그레고르는 잠자는 자신이 어느새 거대한 벌레로 변해 침대
위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로 시작하는 <변신>은 그 시작만큼이나 결론 또한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쪽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가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신체에 대한 좌절을
느낄 새도 없이 출근을 해야 한다고 발버둥 치는 대목이다.
  그레고르는 왜 이상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몸을 걱정하기 보다는 출근시간을
지키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컸던 것일까?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 몇년전 사업이 망해서 집에 계시는 아버지, 몸이 불편한 어머니 그리고
음대를 가고싶어하는 철부지 여동생이 있다. 어쩌면 그가 벌레로 변한 자신을
위로하고 자신의 인생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상황을 몰고간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가족에 대한
아주 일차원적이고 실질적인 애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점은 가족은 그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족간의 맹목적인 사랑이든, 이성간의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든 우리 인간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은 같이 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실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싶어서 더 편한 직장을 구할 수 도 있는 그레고르가 왜 그렇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겠는가?  인간은 자신만의 허용과 한계의 수치가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수치는 정확한 커트라인이 있는것도
아니고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다음 가족
들의 태도는 -어쩌면 우린 이렇게 쉽게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레고르가 하반신
마비가 되었든, 식물인간이 되었든 최소한의 인간의 모습만이라도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그런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 실로 충격적
이였다. 아들의 이상한 변신에 충격을 받지만 한달이 흐른뒤에도 직접 보기를
거부한 어머니, 그에게 일격을 가한 아버지의 행동이 너무나 이질적이였으며
-상황자체가 이질적이였기에 그랬을 지도 모르나 - 여동생만이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듯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계속 전개되면서 여동생의 행동이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노력하는 모습이라고 느꼈던 것은 그레고르의 바램이
그렇게 보였을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시대 상황으로 보아 여동생의
나이면 학교가 아니라 일을 할 수 도 있었을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제적상황으로는 이룰 수 없는 막연한 꿈을 꾸고 있으며 그의 아버지 또한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만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인 이기주의적인 행동양식을 보인게 아닌가한다. 그러다 자식이 벌레가
되니 일을 하게 되고, 이제는 자기와 아내 그리고 딸이 일을 갖게 되니 아들이
꼭 벌레에서 인간으로 되돌아 오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그러한 희망이
그레고르를 외면하게 하는데..
  이처럼 우리 인간은 상황이 좋을 때는 느끼지 못할 자신의 잔임함을 극한
상황에서는 그것을 합리화 하고자 하는것 같다. 그레고르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벌레를 아들로 믿고 최소한의 희생을 보여주지만 각자가 '허용'할 수 있는
희생의 수치에 도달하고 결국 '한계'의 종을 울리자 마자 그를 버리고자 하지
않는가? 혈연으로 맺어진 맹목적인 사랑을 하는 가족간에도 우리는 '허용의
수치'와 '한계의 수치'를 가지고 있고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틀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체험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가족을 잔인하다고 매도할 수 도 있으나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구나 그렇게 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레고르가 죽은 뒤에
어떤 감옥에서 해방된 듯 야유회를 떠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때문에 사는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음에 가슴이
아프다. 수십년이 흐른뒤에도 카프카의 <변신>이 우리에게 읽혀 지는것은
세상이 고도화 문명으로 발전하고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고 더욱더 이성적으로
변했다고는 하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항상 그자리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한번 <변신>을 만날 수 있게 해준것에 대해 감사한다. 우리 항상
이문제를 외면한 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c*******k 2009.06.2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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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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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만나는 순례길의 첫 행선지로 카프카 선생님(Franz Kafka, 1883.7.3~1924.6.3)의 《변신》이 선정되었습니다. 생의 부조리성을 사르트르나 카뮈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보다 20여년이나 앞서 재현한 작품이죠. 현대적 인간의 실존적 체험과 모순을 표현한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우선 소감 한마디 부탁 드립니다.저 역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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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만나는 순례길의 첫 행선지로 카프카 선생님(Franz Kafka, 1883.7.3~1924.6.3)의 《변신》이 선정되었습니다. 생의 부조리성을 사르트르나 카뮈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보다 20여년이나 앞서 재현한 작품이죠. 현대적 인간의 실존적 체험과 모순을 표현한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우선 소감 한마디 부탁 드립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제 유서에서도 《화부》, 《심판(소송)》, 《배고픈 예술가》등과 함께 인정한 작품이죠. 형식은 우화에 가깝고 내용은 그리 유쾌하진 않지만 적절한 수준의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변신》은 인간 존재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시스템의 부조리와 인간소외를 그려보려고 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주체성을 건드리고 사회적으로 가족시스템의 역학관계를 묘사했습니다.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상징하는 타자성에 관해 먼저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주체와 타자의 문제는 문학의 원형이자 근본적 테마 아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수많은 상징적 이름들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이방인, 주변인, 괴물, 외계인, 유령, 악, 잉여인간, 고독자 등으로 말입니다.

그레고르는 가족의 이질적인 구성원입니다. 몸에 박힌 일종의 가시와 같은 존재죠. 가족의 의미와 함께 연관지어 해석해야 합니다. 가족이 안식처가 아니라 족쇄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아버지, 어머니, 누이동생 등 집안 사람들은 왜 그레고르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취했을까요. 가족의 의미가 심상치 않습니다. 선생님 가족관계의 직접적인 투영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늙은 부모님은 노동을 해야 했고 누이동생은 직장을 다녀야 했던 가난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맡아야만 했던 부담이 무척 컸을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 그레고르는 5년 동안 가족부양의 책임을 지고 있는 평범한 영업사원으로, 병약한 어머니를 걱정하는 듬직한 아들이자 누이동생에게는 속 깊은 오빠이기도 합니다. 주인공과 완고한 아버지와의 살벌한 관계가 인상적입니다.

가족은 권력지배구조의 대리자로 증오와 광기의 기제를 재현합니다. 그레고르는 결국 가족이란 파시즘적 마피아적 기제의 희생양이죠. 카프카의 사전에서 가족적이다란 말은 마피아적이다란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레고르가 죽은 뒤 가족들은 마치 병에서 완쾌되어 건강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듯 야유회를 떠나면서 장래 희망을 얘기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레테가 결혼할 나이가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재원이 될 수 있기에 가족들의 미래는 밝다고 여깁니다. 그레테가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 마피아의 실질적 대부가 된 듯한 경우죠. 주의할 점은 주인공 그레고르의 눈에 비친 선량한 그레테가 사실은 가족구성원 중에서 가장 속물적인 인간이라는 겁니다.

네. 누이동생의 배신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레테의 속물근성과 위선에 놀라게 됩니다. 집안사정은 전혀 고려치 않고 음악학교에 들어가려는 망상이나 꿈꾸고 쓰레기들을 오빠에게 먹이로 던져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게 주인공의 눈에는 친절하고 동정적이고 사려깊은 행위로 비춰집니다. 이런 잔잔한 고발이 그레테를 더욱 영악하게 그레고르를 더욱 순진하고 가엽게 만듭니다.

아버지는 작가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제 개인적인 일을 묻는다면 아버지의 존재는 언제나 넘기 힘든 산 같은 존재였습니다. 인정받고 싶지만 또 미워하게 되는 그런 이중적인 면이 많았죠. 제게 가족이란 휴식을 가져다주는 그런 말랑말랑한 안식처가 아니었습니다. 아마 많은 남성작가들에게 아버지는 영원한 비교대상일 겁니다. 오디푸스 콤플렉스가 단지 서양작가들에게만 국한되는 이론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당시 아버지에 대한 재현은 세기말적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가령 《변신》의 탈고는 1912년, 간행은 1915년이죠. 1차세계대전(1914년-1918년)이나 흑사병에 빗대 백사병이라 불린 결핵의 유행 등 아마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묵시론적 세계관을 아버지의 존재에서 찾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제가 살던 1910년대는 한마디로 불안의 시대였고 변신의 시대였습니다. 전쟁과 질병이 만연했고 굵직한 혁명 2건이 중국(1911년 신해혁명)과 러시아(1917년 붉은 혁명)에서 일어났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신 겁니까. 사랑과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카프카의 연인으로 펠리체 바우어, 율리에 보뤼체크, 밀레나 예젠스카, 도라 디아만트 등이 유명하죠. 펠리체 바우어와의 두번에 걸친 약혼과 파혼에 연이어 율리에와의 약혼과 파혼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해 하실 말씀은.

독신남이란 꼬리표가 저에게 붙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신주의자는 결코 아닙니다. 독신주의란 독신을 이미 결정한 확고한 결단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독신남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지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있지만 그 욕망을 무한 연기하기에 언제나 미결정적인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오히려 제게는 금욕주의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저의 본래의 본성이 폐쇄적이고 말이 없고 사교성이 없는 불청객입니다. 가정에서 선량하고 친절한 가족들 사이에서도 남 이상으로 서먹서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섹스와 결혼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결벽주의라 놀리셔도 좋습니다. 섹스는 늘상 저를 괴롭힙니다. 고백하자면 침대 위의 30분이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을 줍니다.

철학적으로는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쌍둥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선생님이 창조하신 인물들이 그의 철학과 어떤 묵계적인 공감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언어로 저의 글을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많이 닮았습니다. 《공포와 전율》, 《죽음에 이르는 병》, 《이것이냐 저것이냐》 등 모두 실존과 존재적 불안의 의미를 묻고 있으니까요. 사상적으로 친밀한 가족유사성을 갖습니다만 다른 점도 많습니다. 특히 그의 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의 실존적 이론틀은 그와 저를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윤리적인 단계에 서 있는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 단계에 도달하고자 노력한 「신앙의 기사」입니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그의 말 잘 아시죠. 그는 기독교적 색채가 너무 짙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가 아닙니다. 아직 미적 단계에 머물러서 윤리적 인간관계적 단계를 갈망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그저 미학적인 댄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이죠.

저명한 문인을 만나면 하루 일과에 대해 물어봅니다.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개성과 세계관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일과를 소개해 주시죠.

제 생활방식은 단지 글쓰기를 위한 배치입니다. 저는 글을 쓸 시간을 얻기 위해 엄격한 자기절제를 추구합니다. 만약 저의 생활방식에 변화가 있다면 그건 그것이 글쓰기를 위해 더 나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짧고 몸은 약하고 사무실은 재앙이고 집은 시끄럽기 그지 없으니깐요. 예술로 성공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로서의 자신을 소모시키는 것입니다. 직장은 최악이죠. 왜냐하면 저의 직장은 유일한 욕망이자 유일한 직업인 문학에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학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고 문학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보험국의 일을 마치고 귀가해서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잡니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 한 시간의 산책을 하고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합니다. 그런 다음 밤 11시경에 쓰기 시작해서 새벽 2시나 3시 혹은 좀더 늦게까지 글을 씁니다.

선생님 성격이 무척 내성적인 것 같아요. 결벽증도 있으시고, 소음에도 민감하시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방에 들어가기를 꺼려하고, 약속시간에 맨날 늦으시고, 편지를 몇 주 동안 뜯지 않고 방치하시고… 자신을 가장 마른 사내, 옷을 입은 사람 가운데 유일한 벌거숭이, 배고픈 예술가, 폐결핵 환자 등으로 묘사했는데 혹시 자신을 위대한 패배자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죽음에 이르는 질병으로 인해 패배한 위대한 작가로 말입니다.

질병은 세계의 은유이자 제 전 생애를 아우르는 숙명적인 은유입니다. 폐결핵은 육체적인 질병이고, 고독이나 공포 같은 존재적 불안은 심리적인 질병입니다. 결국 질병이 저의 신앙이 된 셈이죠. 수난자로서 제가 갈망하지만 두려워하는 그런 윤리적 세계가 질병의 세계입니다.

작가에게 책은 어떤 의미입니까.

한 권의 책이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습니다. 우리가 읽은 책이 우리들 머리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해서 각성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습니까. 우리를 괴롭히는 불행이라든가 자기 자신보다도 더욱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든가 아니면 자살이라든가 또는 우리의 모든 사람들의 곁을 떠나서 숲 속에 버림을 당하는 경우라든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과 같은 그러한 영향을 주는 책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일찍이 글쓰기는 기도라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네. 쓴다는 것은 기도의 한 형식입니다. 글쓰기는 이상하고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데 위험한 일탈의 위안이 그것입니다 제가 쓴 것은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의 삶 자체가 거기에 의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

끝으로 동료작가들 중에서 자신의 계보를 잇는 작가와 저작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양작가로는 카뮈의 《이방인》과 《전락》,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동양작가로는 이상의 《날개》, 루쉰의 《광인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루키를 예로 들어 볼까요. 하루키의 소설은 일명 사소설이라 불립니다. 아웃사이더를 묘사하고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파고들고, 사적 자아와 공적 자아에 대하여 뚜렷한 규명을 행한다는 점에서 저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지구의 공기는 내게 너무 진하고 지구의 중력은 내게 너무 무겁다」, 《댄스 댄스 댄스》는 이렇게 말하죠. 그러나 하루키의 인물은 카프카식 인물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하루키의 주인공은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고, 개인주의와 자아주체성이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같은 건 생각지 말고 계속 춤을 추어라. 가급적이면 근사하게, 너만의 스텝으로」와 같은 표현도 이를 웅변합니다.

장석주는 하루키 소설의 특색으로 「물질주의적 추구에 대한 염증, 아버지의 부재, 반권력적 지향, 근원적 상실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꼽습니다. 이런 일련의 특징은 장정일, 윤대녕, 구효서, 배수아, 조경란 같은 한국작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책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z***a 2009.06.26. 신고 공감 0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서평]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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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다를바 없는 오늘아침, 늘상 그렇듯 오늘 할일을 대충 생각해보고 기지개를 펴려는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 그렇다. 나는 벌레가 된것이다.어떤가. 흥미진진한 상상인가? 사람들은 가끔 발칙한 상상을 하곤한다. 내가 만일 어느 나라의 공주라든지, 아님 저번주에 산 로또가 1등에 당첨된다는 등등의 것 말이다.  하지만 내가 벌레라면...이라는 상상은, 어떠한가. 한 가정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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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다를바 없는 오늘아침, 늘상 그렇듯 오늘 할일을 대충 생각해보고 기지개를 펴려는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 그렇다. 나는 벌레가 된것이다.
어떤가. 흥미진진한 상상인가?

사람들은 가끔 발칙한 상상을 하곤한다. 내가 만일 어느 나라의 공주라든지, 아님 저번주에 산 로또가 1등에 당첨된다는 등등의 것 말이다.  하지만 내가 벌레라면...이라는 상상은, 어떠한가.

한 가정이 있었다. 무기력한 아버지와 약한 어머니,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는 여동생,그리고  자신의 월급으로 힘겹게 가족을 부양하며 아끼는 여동생을 음악학교에 보내주려는 착실한 청년.
가족들은 그런 그에게 고마워했고 아들은 이내 그러한 희생을 자신의 삶의 이유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가족들이 그에대한 고마움이 만성이 되어 별다른 감흥이 없을즈음,  그 어떤 이유도 원인도 모른채 정말인지 하루아침에, 그 아들이 벌레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모든게 변했다.

처음엔 다들 걱정했고 애틋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가족들은 깨닫기 시작한다. 그는 더이상 돈을 벌어오지도 못했고 남들은 커녕 자신들이 보기에도 징그럽고 흉물스런 벌레가 되어버렸다.
 그에게는 이제 신선한 음식보다 썩고 버려진 음식들이 더 입맛에 맞기 시작했으며 침대보다는 바닥이, 사람으로써 사용하던 책상이며 장롱이 벌레의 긴 몸뚱아리를 이동하는데 걸리적 거리는 방해물이 될 뿐이었다.
그렇게 그레고르는 점점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한채 벌레로서의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아주 잘.
이 현실을 인정할수 없는 아비는 폭력과 외면으로 일관했고 나약한 어머니는 안타까우면서도 직접 마주하지 못한채 그저 방관할뿐이다. 그가 가장 아꼈던 여동생조차 처음의 애틋함과 달리 이내 약자를 동정하며 느끼는 자기만족, 나만이 이를 감싸고 보살필수 있다는 소녀특유의 자만심으로 가득차버린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진정 저 벌레가 오빠라면 우리를 위해 진작에 스스로 떠나가야함이 옳다고 마지막까지 희생을 요구한다.
벌레로서의 삶을 하루하루 견뎌내던 그레고르는 아끼던 여동생의 소원을 들어나주듯, 다음날 아침 싸늘하게 죽은채로 발견된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그가 죽음으로서 자신들의 삶에대한 평안을 확인받게 되고 이내 앞으로의 새로운 날들에 대한 희망과 활기로 가득차게 된다.

겉모습만 '사람'인채 사실상 벌레처럼 그 어떤 변화도, 희망도 거부한채 그저 삶을 견뎌냈던 이전의 가족들과 겉모습은 징그런 벌레로서의 삶일 지라도 속모습은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잃지않던 주인공.
과연 누가 진짜 사람이고 누가 진짜 벌레였을까.
또한  징그러운 벌레로의 변신과  폭력과 외면으로 일관하며 자기 내부의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가족들의 변신,  어느게 더 끔찍한가.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귀하고 존경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허나 과연 그 말이 진심일까.

벌레가되 필요없어진, 그레고르에 대한 가족들의 냉대처럼 사실은 우리도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 한다는 전제하에서만  한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사랑하는것은 아닐까.

s***a 2009.07.0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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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끼치는 소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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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인간에의 소외감.. 처음에 주인공이 벌레로 변했을때도 직장일만 생각했지, 그 엄청난 충격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있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그는 단지 해충일뿐 더이상 누군가의 오빠, 아들이 아니였다. 그도 가족들을 조금 배려할뿐 벌레모습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나 보다. 그 숨겨진 마음속의 소외감, 한번도 말로 표현하지 않은 고독이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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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인간에의 소외감.. 처음에 주인공이 벌레로 변했을때도 직장일만 생각했지, 그 엄청난 충격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있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그는 단지 해충일뿐 더이상 누군가의 오빠, 아들이 아니였다. 그도 가족들을 조금 배려할뿐 벌레모습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나 보다. 그 숨겨진 마음속의 소외감, 한번도 말로 표현하지 않은 고독이 마음을 통해 전해진다. 하지만 마지막엔 한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인간적 감정을 보이면서 감동과 사랑으로 식구들을 회상한뒤 서서히 죽는다. 처음에 난 그가 차라리 자살하는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그가 괴물모습으로 살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사랑하는 것들과 이어진 인연의 끈, 죽으면 풀려버리는 그 끈을 놓기가 너무나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그에게는 결국 죽음밖에, 인연의 끈을 놓는 선택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죽고 해방됬다고 그제서야 활기를 띄는 가족들에게 분노와 경멸을 느꼈다. 그리고 죽기전 가족들을 돌아봤던 그에게 눈물이 나도록 연민을 느꼈다. 그가 느낀 고통스러운 소외에 쓴 감정과 함께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살면서, 인간은 그 존재자체로 더없이 소중하다고 배워왔다. 그게 장애인이든, 범죄자든 누구든간에 인간임에 소중하다고..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면?.. 한때 인간이였던 , 그러나 지금은 이간이 아닌자라면? 작가 카프카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게 아닐까 싶다 당신이 가족이 벌레가 되버린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감정도 변할 수 있는 인간임에,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이런 인간임에 너무나 두려워졌다.

[인상깊은구절]
감동과 사랑으로써 식구들을 회상했다. 그가 없어져 버려야 한다는 데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한결 더 단호했다. 시계탑의 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내내 이런 텅 비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였다. 사위가 발아지기 시작하는 것도 그는 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머리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힘없이 떨어졌고 그의 콧구멍에서 마지막 숨이 약하게 흘러나왔다.
z******2 2003.01.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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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변신>
"[서평] <변신>" 내용보기
변신 프란츠 카프카 저         언젠가 어렸을 적 읽었던 <변신>. 그때는 책을 읽는내내 충격 그자체 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체 벌레같은 괴물로 변신해버린 주인공에게  속으로 곧 괜찬아질꺼야, 아니면 이건 악몽 같은 꿈일 뿐이겠지, 혹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본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로 기대반걱정반으로 힌자 한자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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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프란츠 카프카 저

 

 

 

 

언젠가 어렸을 적 읽었던 <변신>. 그때는 책을 읽는내내 충격 그자체 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체 벌레같은 괴물로 변신해버린 주인공에게  속으로 곧 괜찬아질꺼야, 아니면 이건 악몽

같은 꿈일 뿐이겠지, 혹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본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로 기대반걱정반으로 힌자

한자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해피엔딩은 커녕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야기의 막이 내리면서

가슴 속 무엇인가가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달까? 그렇게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너무나 아팠었던 것 같다. 

 

내게 아렇게 <변신>이라는 책은 큰 충격이었고, 그책을 썼던 작가에게 화가 나기에 충분했던 책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몇년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읽게 되어서 과연 여렸을 때랑은 어떻게 다른 감흥이 생길지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도 궁금했던 책이다. 이렇게 같은 책을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읽어본다는 점은 언제나 설레이기에 충분한 

것 같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여동생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그레고르가 가장이 되어 모든 생활은 그레고르의 월급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자신이 가족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의 생활보다는 가족들의 안위가 최우선으로 여겨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회사일에만 매달린다. 여느 때와 다르게 그레고르는 심상치않은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이 평범한 한 인간이 아니라 온갖 수십개 다리와 끔찍하고 징그러운 벌레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서서히 회사를 갈시간이 다가와도 어찌할빠 몰라했던 그는 어머니가 깨우러 오는 소리

조금있다가 일어나겠다고 얼버무리지만 시간이 가도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올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벌레로라고 변한 모습으로 회사에 출근하여 사정을 설명하고 일을 할 생각에만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괴물로 변했다는 것보다 오히려 앞으로 가족을 책임질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걱정과 왜이렇게 변해버렸을지 가족

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란 생각만으로 가득차게 된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회사 상사의 방문과 아버지,

어머니의 근심어린 걱정으로 인해 방문이 열리게 되고,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본 그들은 경악을 하며 괴물 취급을

하게 된다. 이부분에서도 그레고르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리고 그레고르를 그의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가둬둔다.

그레고르가 돈을 벌었을 당시에는 나머지 세가족들은 그가 벌어다준 돈으로만 생활을 하고 자신들은  일도 하지 않고

집안에서만 조용히 지냈지만, 이제 돈을 벌어다 줄 그레고르가 없기에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궁리를 하게 된다.

특히 사업실패로 너무나도 무기력했던 아버지는 어느샌가 새로운 직업을 구하고, 집에 빈방에 세를 놓는 등 나머지

가족들과 살아가게 되는데..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정말 착실하게 가족만을 위해 희생을 해온 그였기에. 어느 날 아무런 이유없이

괴물같은 모습으로 변한 후에도 줄곧 가족 걱정만을 하던 그였기에 왜 그레고르가 이러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절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아들이나 오빠로 생각하기보다는 정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괴물 따위로 생각하고, 심지어 그를 폭행하고 결국엔 죽음까지 몰고가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그들은 괴물로 변한 그레

고르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들의 불행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생활에 활기를 되찾는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잔인한 인간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를 통해 작가 카프카가 전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레고르에 대한 가족들의 변해버린 행동들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에는 자신들의

아들이자, 오빠였던 그레고르가 이제는 필요없는 무거운 짐이 되버리자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배신, 배반의 모습까지

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돈을 벌때에는 가족의 중심에 있었던 그레고르기에 끔찍한 모습으로 변한 뒤 그는 가족

들의 소외와 무관심 속에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게 된 것이다. 더이상 이러한 인간소외의 문제는 개인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로 까지 번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렸을 적 읽었을때는 그레고르에 대한 생각만으로 머리속이 가득 찾지만 몇년이 흘러 이렇게 다시 읽어보니 그때

처럼 읽기 힘든점은 같았지만 그레고르 뿐만 아니라 주위에 등장했던 가족들과 상사, 가정부 등등이 암시 하고 있는

점들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깊이 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많이 모자르는 나이기에 다시 몇년이

지난 후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된다면 카프카가 정말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메세지를 더욱 빠르게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몇년 뒤를 기대해 보며 책을 덮었다.

 

 

 

 

 

i*****0 2009.06.28. 신고 공감 0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필독서..
"필독서.." 내용보기
소설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것을 체험할수 있도록 해 주는 상당히 좋은 도구이다..그것도 일반적인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소설로 꾸미는것도 좋지만, 미생물..또는 동물의 공간속에서 소설을 꾸미는것도 상당히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그 동물의 생각을 대신 해 보는거....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이 변신이라는 소설은,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인간이 하나의 동물로 변신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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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것을 체험할수 있도록 해 주는 상당히 좋은 도구이다..그것도 일반적인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소설로 꾸미는것도 좋지만, 미생물..또는 동물의 공간속에서 소설을 꾸미는것도 상당히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그 동물의 생각을 대신 해 보는거....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 이 변신이라는 소설은,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인간이 하나의 동물로 변신해서 겪을수 있는 참 많은 주제와, 그런 고뇌 기타 등등 당황함을 생각해 볼수 있게 한다...그리고 자기 자신의 가족들이 단순히 겉만 바뀌었을 뿐이고..마음속은 그대로 나 자신인데, 나한테 해주는 그런 것들이 갑자기 바뀌어버리니..그것도 참 적응하기 힘든 노릇이 아닌가...이런 것들이 인간생활사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것이니 생각해 볼 문제이다..필독서...
YES마니아 : 로얄 a***u 2003.04.0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