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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죽음에 대한 책을 찾아 읽게 된다. 계기는 없다. 객관적으로 봐서 죽음을 생각해야 할 나이도 아니며, 가까운 이의
죽음도 없었다. 그런데도 죽음에 관한 사유는 나를 끌어당긴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게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개인에게는 특수하지만, 모든 생명에게는 보편적인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문학평론가이자 대중문화, 영화비평가 강유정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학과 영화에서 죽음을 사유하는 방식을 찾아내 다시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 역시
보편적이지만 특수한 소재로서 죽음은 그녀에게도 매력적인 소재임에 틀림 없다. 많은 소설과 영화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소설과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죽음은 똑같지가 않다. 상황도 모두 다르며, 죽음의 의미도 다르며, 죽음이 가져오는 파장도 다르다. 그러기에 죽음이라는 소재는 무궁무진할
뿐더러, 그 다양함은 어쨌든 수렴하게 된다.
강유정은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미트리다테스 왕이 독살의 위협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매일 조금씩 독약을
먹었던 것(나는 이 이야기를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시리즈에서 읽었다)에 비유하면서 문학과 예술을
통해 죽음에 대해 면역력을 갖기 위해서라고 쓰고 있다. 더 많은, 다양한
죽음을 미리 만남으로써 실제 죽음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의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가당한
일인가 의심스럽다.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이 죽음을 이야기해왔는가. 아니
얼마나 오랫동안 신화를 통해 죽음에 관해 언급되어 왔던가. 인류는 그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읽어왔다. 그러나 인류가 죽음, 죽음의
두려움에 대해 면역력이 조금이라도 상승했다는 증거가 있는가. 죽음은 여전히 두렵다.
두렵기 때문에 소설은 죽음에 대해 쓰고, 영화는 그것을 화면에 옮긴다. 극복할 수 없기에,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쓰고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읽고 본다. 벗어날 수 없기에 늘 위로하고, 늘 두려워한다. 예술은 그저 언급하기에 의미가 있다.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는 일이리라. 죽도록 언급되는 죽음은 그토록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강유정이
죽음에 대해서 끈질기게 언급하는 까닭도 별로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강유정이 죽음을 찾아내고 있는 소설과 영화는 적어도 그 제목만큼은 낯이 익다. 물론
읽어보지 못한 소설도 있으며, 영화도 많다. 그러나 그 소설과
영화가 다루는 죽음은 무척 낯이 익다. 사랑을 위해, 혹은
사랑에 배신당해 죽고, 신념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사회에
대한 항의로 목숨을 내던지고, 우울함에 그저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혹은 누군가에게 죽음을 당하고, 또 어떤 사람을 악착같이 죽음을 거부한다. 어떤 죽음은 모든 사람이 기리지만, 또 더 많은 죽음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거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기에 돌이키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다 아는 죽음이다. 강유정이
하는 일은 그런 죽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죽음은 돌이킬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돌이킬 수
없음에 좌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강유정이 말한 면역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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