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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지 표시가 잘 안될경우 이쪽으로.. https://rosehill.tistory.com/342같은 시기에 태어나 외모나 체형마저 비슷한데 전혀 상반된 두 길을 갔던 사람이 여기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 사람은 웃음과 희망을 전해준 캐릭터로, 또 다른 하나는 전쟁과 증오를 생각나게 하는 캐릭터로 오래 도록 기억되고 있다.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오노 히로유키 作) 몇일전 댄 브라운의 신작을 예약 주문하고 나서 뭔가 읽을꺼리를 찾던중 눈에띄는 책표지가 들어왔다. 비슷한 외모에 콧수염을 교집합으로 공유하며 반반씩 그려진 얼굴.. 그러나 우리에겐 전혀 다른 이미지로 기억되는 두 사람.. 바로 채플린과 히틀러다... 채플린과 히틀러(Chaplin & Hitler) (출처 : Google) 1889년 4월 16일 런던 빈민가에서 한 사내 아이가 태어난다. 그로부터 4일후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암인에서 또 한명의 사내 아이가 태어나게된다. 불과 4일 밖에 차이 나지 않는 이 두 사람은 이후 , 상반된 길을 가며 숙명적인 캐릭터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미디어라는 또 다른 전장터에서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드라마틱한 두 사람의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씌여진듯하다. 작가 오노 히로유키는 일본 채플린 협회의 회장이며 영화 프로듀서로 소개 되어있다. 아마도 채플린 협회 회장이니만큼 ,두 사람의 이런 드라마틱한 일대기가 그의 관심을 끌었으리라 생각된다. 크게 두 사람의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긴 하지만, 비교적 채플린의 일대기 위주로 이어지는데 특히, 주로 2차 세계대전을 전 후 해서 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를 만들기 위한 기획과 과정들이 간간히 당시의 히틀러의 행보와 맞물려 소개되어지고 있다. 작가가 후반에 서술하듯, 자신이 채플린의 전문가이며 채플린의 일대기 특히 위대한 독재자를 만들때의 과정을 조사하다 보니, 영화속에서 조롱하고 있는 타겟, 즉 히틀러를 조명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편으론 이것은 어떤면에서 미디어라는 전장터에서 맞붙은 전쟁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찌됐건, 이 책은 채플린에 관심이있거나 혹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본 사람들, 또는 히틀러와 채플린이라는 두 상반된 캐릭터가 비슷한 시기의 상반된 행보들에 흥미가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 여겨진다. 주로 위대한 독재자를 만드는 과정과 험난했던 여정들이 그려지지만, 다른 에피소드들 채플린과 히틀러의 콧수염과 관련한 이야기들이나, 다른 영화들을 구상하려 했던거나, 삭제 혹은 편집본에 대한 이야기들도 소개가 되고있다. 내가 이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느낌은 채플린은 히틀러라는 하나의 만들어진 캐릭터를 뭉게 버리기 위해 자신의 고유캐릭터를 내 던지면서까지 일종의 자폭 비슷한 도발을 한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자폭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 같지만, 영화 위대한 독재자를 보고, 또 이 책을 읽어 보면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채플린이..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당시 히틀러는, 자신의 미디어를 총 동원하여 (그러니까 주로 라디오와 영화가 되겠다.) 1차대전 패전이후 경제난에 시달리던 당시의 독일 국민들을 하나로 휘어잡고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자신이 독일을 구할 수 있는 구세주, 메시아와 같은 존재처럼 자신을 우상화 시켰다. 특히 영화는 그의 가장 강력한 선전도구이자 자신을 우상화 하는데 있어 최고의 강력한 무기였다. 그리고 그런 독일 국민들을 특정 세력에 대한 증오감과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면서 세계대전이라는 전쟁터로 국민들을 서서히 몰아가고 있었다. 연단에 혼자 서 있는 지도자,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며 찍은 샷...등을 통해 히틀러를 구세주나 메시아 같은 존재로 이미지화 시킨다. (리펜슈탈의 선전영화 의지의 승리 중에서..) 그런데, 여기서 당시의 채플린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는 어떤면에 있어서 바로 그 미디어.. 즉,영화.. 그 영화의 태동기부터 영화를 접하고 그 무렵 부터 수 많은 영화들을 만들고 출연하던 어떤면에서 바로 그 미디어를 통한 관객을 휘어잡는 능력이 탁월한 전문가였다... 채플린은 알다시피 이미 영화가 태동하기 이전에 어린 시절부터 쇼 극장 무대에서 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20세기 초반 당시의 활동사진(영화 초창기의 단순한 몇분짜리 필름들..)에 매료되었고, 바로 그 무렵부터 맥 세닛이 이끌던 키스톤 스튜디오(Keystone Studio)에서 영화를 배우고 출연하고 있었기때문이다. 말하자면 태동기부터 미디어를 만지작 거리던 전문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미디어를 통해 관객을 휘어잡는 그 탁월한 기술을 히틀러와는 정 반대로, 자신이 바보가 되는 캐릭터, 즉 우리에게 잘 알려진 떠돌이,방랑자 캐릭터(Tramp)를 통해, 관객과 대중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선사하는 "기법"을 선보이고 있었던것이다... 즉 자신이 바보가 되면서 관객들에게 위안과 웃음 희망을 전해주는 용도로 그런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만일 당시의 히틀러의 행보.. 선전부장 괴벨스와 함께 또 독일의 여성감독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나 의지의승리.. 웅장하고 현란한 선전영화들을 통해 미디어를 통한 자신의 우상화 또 거기에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대중을 증오와 전쟁터로 몰아가는 그런 나치 독일의 행보들을 봤을때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이 망할 개자식 같으니 , 난 네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고있어".. (중략) "...이 친구는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배우인걸..." (229페이지 본문중에서.....) - 1940년 6월 프랑스의 항복 소식을 들은 히틀러가 기뻐서 춤을 추었다는 뉴스를 반복해서 본 채플린이 보인 반응 ( * 주석에 따르면 이 내용은 듀란트의 회상 : 채플린 거장의 생애와 예술 781쪽에 나와있다고 한다) 많은 것을 똑같이 따라하려고 했던 흔적이 엿보인다.(우측사진 253p) 만들어지는 히틀러의 캐릭터를 어떻게든 뭉게 버리고 싶었던게 아닐까. 미디어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채플린이 어떤면에서 자신이 하는것과는 정반대로의 행보를 보이는 히틀러가 얼마나 얄밉게 보였을지는 저 위의 글을 보면 유추할 수 있을것같다. 그리고 이 책에서 위대한 독재자의 만들어진 과정에서 눈에 띄는것은 최초의 원본과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우리가 영화로 본) 부분이 많이 다르다는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마지막 영상의 연설씬이다.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장면 연설씬 연설을 마친 채플린은 마치 뭔가를 더 이야기하고 싶은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카메라를 바라보고, 이내 영화는 끝나버린다. 그 동안의 채플린의 캐릭터 (떠돌이,방랑자, 어리숙하고 바보스런 캐릭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장면이기도하다. 어떤 면에있어서 캐릭터를 던지면서까지 이런 무리수를 두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식의 긴 연설과 교훈적이지만 뭔가 이전의 바보스런 캐릭터와는 거리가 먼 듯한식의 진지한 연설의 형태가 아니었던것이다. 초기에 초본을 작성했을때와 영화 만들어질 무렵의 당시의 국제 정세와 2차 세계대전을 승승장구 하던 히틀러의 행보들을 보면서 이후에 채플린이 수정을 하였다는것인데, 이것이 어쩌면 개인적인 히틀러에 대한 감정을 분출 시킨 것이 아닌가, 이 양반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캐릭터를 던져가면서까지, 상대의 캐릭터를 뭉게버리고 싶었던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이게 맞던 맞지 않던.. 어찌됐던 결과론적으로 볼때, 이후에 히틀러의 이미지는 채플린의 이미지에 가려지며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연설 횟수가 훨씬 줄어들었다고 하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외소한" 히틀러의 이미지 역시도 사실은 채플린에 의해 덧 씌워진것이라고 한다. (실제 히틀러는 170넘는 키에 다소 통통한 몸집이었다고 함) 그러니까 채플린이 만들었던 떠돌이 바보 캐릭터는 히틀러의 왕국에서 미디어로 열심히 만들어낸 히틀러의 캐릭터에 달라붙어 자폭을 한 셈이 된다.. 채플린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껏 어수룩하고 바보같은 떠돌이가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순간 더 이상의 떠돌이 캐릭터를 유지할수 없을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아마도 연설씬을 그렇게 수정하는 순간부터 이제 떠돌이 캐릭터는 이전과 같아 질 수 없슴을 채플린 역시 각오했을 것이다. 관객역시도 마찬가지 였을것이다. 그래서 이후에 다음작품 "살인광 시대"엔 떠돌이가 나오지 않고, 그 다음 작품인 라임라이트(Limelight)를 통해 떠돌이의 쓸쓸한 퇴장을 보여준다. 한때 유명했던 코메디언 칼베로는 빈 객석을 허탈하게 바라본다 라임 라이트 중에서(Limelight,1952) 미디어 전장터에서 붙은 캐릭터 대결.. 누가 승자일까..? 영화가 개봉된 이후 미국에서 찬,반 팽팽한 논란을 일으켰지만, 대체적으로 큰 흥행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채플린은 힘든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후버 국장 시절의 FBI는 끊임없이 그를 옥죄었고, 결국 라임라이트 개봉당시에 영국을 방문한 채플린의 재입국을 거부하며 추방시켜 버리고 말았다. 히틀러는 연설횟수가 줄어들고 패전이 짙어지면서 45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채플린은 추방이후에 스위스에 거주하면서도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지만 떠돌이 캐릭터가 사라진 그의 영화는 이전 만큼의 인기를 누리지는 못한다. 두 캐릭터의 충돌은 어찌보면 승자도 패자도 없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기억한다. 누가 승자이고 누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가를.. 이후 알려졌다시피 1972년 채플린은 자신을 쫓아낸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 명예롭게 초청되어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속에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게 된다. 영국여왕은 75년 채플린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다. 떠돌이 캐릭터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여전히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
![]() 위의 도서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사랑받았던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 Sir Charlie Chaplin 을 중심에 두고 동시대에 그와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비교 소개한 도서이다. 1889년 4월 4일차를 두고 (채플린 16일, 히틀러 20일) 출생한 것과 비슷한 스타일의 콧수염을 가진 두 사람이 미디어라는 전장에서 어떻게 맞붙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40년에 개봉된 영화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의 제작과정을 상세히 소개하는데, 여러 악조건에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영화를 통해 시대의 광기에 맞서 풍자의 힘을 발휘한 채플린을 만날 수 있었다. 모두가 그와 같이 위대하고 용기있는 삶을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기계, 짐승이 아닌 인류애를 간직한 인간임을 자각해야함을 느꼈고, 어린시절 그저 순수하고 유쾌한 이미지로 기억되었던 채플린을 위의 도서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를 읽은 뒤 인류애를 가진 용기있는 멋진 사람 찰리 채플린으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p.s. 영화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의 핵심 장면인 연설 영상과 영화를 아래에 첨부하였는데 시청을 추천하며 글을 맺는다. ▼ The Great Dictator Speech - 한글자막 ============================== ▼ The Great Dictator Speech 한글 자막 + No Music ▼ The Great Dictator Speech 한글 자막 + Music I'm sorry, but I don't want to be an Emperor -- that's not my business. 죄송합니다만, 저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I don't want to rule or conquer anyone. 누군가를 다스리거나 정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I should like to help everyone, if possible -- Jew, gentile, black man, white. 유대인, 비유대인, 흑인, 백인이든 가능하다면 모든 이들을 돕고 싶습니다. We all want to help one another; human beings are like that. 모든 인류가 그렇듯이 우리 모두는 서로 돕기를 원합니다. We want to live by each other's happiness, not by each other's misery. 우리는 서로의 불행이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원합니다. We don't want to hate and despise one another. 우리는 서로 미워하거나 경멸하고 싶지 않습니다. In this world there's room for everyone and the good earth is rich and can provide for everyone. 세상에는 모두를 위한 공간이 있고 풍족한 대지는 모두에게 제공될 수 있습니다. The way of life can be free and beautiful. 인생은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지만. But we have lost the way. 우리는 그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Greed has poisoned men's souls, has barricaded the world with hate, has goose-stepped us into misery and bloodshed. 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중독시키고, 세계를 증오의 장벽으로 가로막았으며, 우리를 불행과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We have developed speed but we have shut ourselves in. 우리는 빠르게 발전했지만 스스로를 가둬버렸습니다. Machinery that gives abundance has left us in want. 기계는 풍요로움을 주었지만 우리에게는 결핍이 남겨졌습니다. Our knowledge has made us cynical, our cleverness hard and unkind. 지식은 우리를 냉소적으로 만들었고, 영리함은 무정하고 불친절함을 만들었습니다. We think too much and feel too little. 우리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만 느끼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More than machinery, we need humanity. 기계보다는 인간성이 더욱 필요하고. More than cleverness, we need kindness and gentleness. 영리함보다는 친절과 관용이 더욱 필요합니다. Without these qualities, life will be violent and all will be lost. 그렇지 않으면 삶은 비참해지고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The aeroplane and the radio have brought us closer together. 비행기와 라디오 방송은 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었습니다. The very nature of these inventions cries out for the goodness in men, cries out for universal brotherhood for the unity of us all. 이러한 발명의 본질은 인간의 선함에, 전 지구적 형제애와 우리 모두의 화합을 호소하기 위함입니다. Even now my voice is reaching millions throughout the world, millions of despairing men, women, and little children, victims of a system that makes men torture and imprison innocent people. 지금도 제 목소리가 세계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좌절하는 남성, 여성, 아이들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가두는 체제의 희생자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To those who can hear me I say, "Do not despair." 제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The misery that is now upon us is but the passing of greed, the bitterness of men who fear the way of human progress. 우리가 지금 겪는 불행은 스쳐지나갈 탐욕일 뿐이며, 인류의 진보를 두려워 하는 자들의 조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The hate of men will pass and dictators die; and the power they took from the people will return to the people and so long as men die, liberty will never perish. 언젠가 증오는 지나가고 독재자들은 사라질 것이며 그들이 인류로부터 앗아간 힘은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인류가 이것을 위해 희생하는 한 자유는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Soldiers: Don't give yourselves to brutes, men who despise you, enslave you, who regiment your lives, tell you what to do, what to think and what to feel; who drill you, diet you, treat you like cattle, use you as cannon fodder. 군인들이여, 스스로를 짐승같은 자들에게 굴복시키지 마십시오. 그대들을 경멸하고, 노예처럼 다루며, 그대들의 삶을 관리하고, 행동과 사고와 감정까지 통제하며, 그대들을 짐승처럼 다루고 사육하여, 총알받이로 만들고 있는 자들에게. Don't give yourselves to these unnatural men, machine men, with machine minds and machine hearts! 이런 비정상적인 자들에게, 기계의 지성과 마음을 가진 기계나 다름없는 자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You are not machines! 당신은 기계가 아닙니다! You are not cattle! 당신은 가축도 아닙니다! You are men! 당신은 인간입니다! You have the love of humanity in your hearts. 당신의 마음속에는 인류애가 있습니다. You don't hate; only the unloved hate, the unloved and the unnatural. 증오하지 마십시오. 사랑받지 못한 비인간적인 자들만이 증오를 합니다. Soldiers: Don't fight for slavery! Fight for liberty! 군인들이여, 노예제도를 위해 싸우지 말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십시오! In the seventeenth chapter of Saint Luke it is written,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man" 누가복음 17장에서, "주님의 왕국은 인간들 사이에 있다" 라고 했습니다. -- not one man, nor a group of men, but in all men, in you, 한 사람, 한 무리가 아닌 , 모든 인류에게, 바로 당신 마음 속에 있는 것이며, you the people have the power, the power to create machines, the power to create happiness. 기계를 창조할 능력도, 행복을 창조할 능력도 가지고 있는 당신인 것입니다. You the people have the power to make this life free and beautiful, to make this life a wonderful adventure. 삶을 자유롭고 아름답게 멋진 모험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당신인 것입니다. Then, in the name of democracy, let us use that power! Let us all unite!! 그러니,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 능력을 이용합시다! 화합을 이룩합시다!! Let us fight for a new world, a decent world that will give men a chance to work, that will give youth a future and old age a security. 모두에게는 일 할 기회를, 젊은이에게 미래를, 노인들에게는 안정을 제공할 훌륭한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투쟁합시다. By the promise of these things, brutes have risen to power, but they lie! They do not fulfill their promise; they never will. 짐승같은 무리들도 이것들을 약속하며 권력을 키웠지만 , 그들은 거짓말을 했고! 그들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며, 절대 이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Dictators free themselves, but they enslave the people!! 독재자들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면서, 민중을 노예로 만듭니다!! Now, let us fight to fulfill that promise!! 이제 그들이 했던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싸웁시다!! Let us fight to free the world, to do away with national barriers, to do away with greed, with hate and intolerance. 세상을 해방시키고, 나라간의 경계를 없애며 , 탐욕, 증오 그리고 편견을 버리도록 함께 투쟁합시다. Let us fight for a world of reason, a world where science and progress will lead to all men's happiness. 이성이 다스리는 세계, 과학의 발전이 모든 이에게 행복을 주는 세계를 위해 함께 투쟁합시다. Soldiers: In the name of democracy, let us all unite!!! 군인들이여, 민주주의의 이름하에 화합을 이룩합시다!!! ▼ The Great Dictator Speech 영어 원문 자막 + no music ▶ 나무위키 - 위대한 독재자 - 참고 ▶ 나무위키 - 찰리 채플린 Sir Charlie Chaplin ============================== 1889년 4월 16일, 런던 빈민가에서 찰스 스펜서 채플린이 태어났다. 그리고 나흘 뒤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났다. 20세기에 가장 사랑받는 남자와 가장 미움받는 남자는 이렇게 불과 4일 차이로 세상에 태어났다. 반세기 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항복시켰고, 1940년 6월 23일 이른 아침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에 도착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했다는 뉴스에 전 세계가 경악했고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누구도 히틀러의 기세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찰리 채플린은 할리우드 촬영장에서 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장면을 준비했다. 채플린은 이 장면을 몇 달째 고심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무기를 버리고 유대인과 같이 춤을 추는 장면도 찍어봤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히틀러가 세계를 위협하던 1940년 4월부터 6월까지 채플린은 심사숙고를 한 끝에 세계를 향해 숭고한 메시지를 던지기로 결정했다. 6분이나 되는 바로 그 연설 장면이다. 이때까지 중립국이던 미국은 히틀러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는 듯한 채플린의 새 영화를 부담스러워했다. 여기저기에서 협박의 목소리가 쏟아졌고, 채플린의 측근들도 "연설 때문에 흥행수입이 100만 달러는 줄어든다" 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채플린은 "500만 달러가 날아간다 해도 상관없다" 면서 반대하는 스텝들을 세트장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홀로카메라 앞에 섰다. 오늘날 <위대한 독재자>는 세계 영화사를 빛낸 명작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제작 당시의 미국에서는 히틀러를 '독일을 역경에서 구한 지도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 정서 탓에 채플린은 무수한 비판과 압력 속에서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지금까지 〈위대한 독재자>의 상세한 제작 과정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 책은 바로 그 문제작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을 추적한다. 싸움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 채플린 가(家)에 보관되어 있던 메이킹 필름과 1만 쏙에 달하는 초고 및 메모, 제작 일지, 편지, 그 밖에 나지 관련 자료 등을 샅샅이 조사했다. 채플린이 시대의 광기에 맞서서 <위대한 독재자> 를 만들어낸 과정은 테러와 분쟁에 몸 살을 앓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전 세계를 휩쓸던 전체주의의 위협 속에서 채플린은 어떻게 세기의 독재자에게 맞설수 있었을까. 그가 손에 쥔 무기는 단 하나, 오로지 '웃음' 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p 004 20세기의 빛과 그림자 시작하며 ============================== 찰리 채플린과 아돌프 히틀러. 똑같은 콧수염을 길렀지만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천재 사이에는 불과 4일 차이로 태어났다는 우연과 둘 다 예술가를 꿈꿨다는 공통점, 두 사람 모두 쇼펜하우어의 애독자였다는 자잘한 가십까지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두 사람의 관계를 20세기의 빛과 그림자로 비유했다. 그렇지만 히틀러에게는 전차나 폭격기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이자, 마지노선(Maginot Line) 만큼이나 중요했던 또 다른 전쟁터가 있었다. 바로 미디어이다. 채플린과 히틀러는 바로 이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를 벌인 인물이다. 채플린과 히틀러의 싸움, 두 사람이 짊어진 역사와 사상의 충돌 속에는 현대인이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p 027 추 제1장. 콧수염 ============================== 놀랄 정도로 대조적인 이 두사람에게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콧수염이다. 1914년 1월 키스톤 영화사에서 영화 촬영을 막 시작했을 무렵 개그 소재를 고민하던 맥 세네트 감독은 채플린에게 "뭐든 좋으니 웃긴 모습 좀 해봐" 라고 지시했다. 채플린은 곤혹스러워하면서 분장실에서 이것저것을 몸에 걸쳤다. ![]() 꽉 끼는 상의에 헐렁한 바지, 작은 중절모에 커다른 구두, 신사의 복장이지만 떠돌이처럼 남루한 의상…. 그리고 어린 티를 감추기 위해 콧수염도 붙였다. 반년 뒤인 1914년 8월 1일, 사진가 하인리히 호프만이 독일의 선전포고에 열광하는 군중들을 찍은 사진 속에는 채플린과 똑같은 콧수염을 기른 히틀러가 있다. 정말로 히틀러는 채플린을 따라했을까? ![]()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채플린과 히틀러의 콧수염이 자주 거론되었다. 평론가 구사모리 신이치는 "채플린은 히틀러가 정치가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세계적 스타였다. 인지도로 보면 분명 따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라고 추측한다. 영화 비평의 대가 앙드레 바쟁도 '무의식에서 오는 사회학적 영향력의 결과'로 히틀러가 채플린의 콧수염을 따라했다고 논한다. 반면 히틀러 연구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역사가 베르너 마저는 "히틀러는 지나치게 옆으로 쏠린 코를 감추기 위해 보타이 모양의 수염을 길렀다." 라고 설명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채플린의 영화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처음 상영된 것은 1915년의 일이다.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히틀러가 채플린의 콧수염을 따라했다는 사실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똑같이 닮은 콧수염을 놓고 두 사람의 역사는 크게 교차한다. p 042 히틀러는 채플린의 콧수염을 따라했을까 제1장. 콧수염 ==============================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채플린은 캐릭터 개념을 개척한 인물이기도 하다. 1917년에 채플린이 멕시코의 찰리 아플린(채플린 흉내를 낸 예능인)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통해 '콧수염에 중절모를 쓴 방랑 신사 찰리'는 채플린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인정받는다. '캐릭터 초상권'을 확립한 이 판결은 이후 미키마우스를 비롯한 캐릭터 비즈니스의 초석이 된다. 히틀러도 캐릭터 이미지와 영상 미디어를 활용하여 정권을 차지하는데, 그가 주 전쟁터로 삼은 미디어라는 영역을 확립한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채플린이었던 셈이다. p 047, 048 세계 미디어의 탄생과 채플린의 베를린 방문 제2장. 히틀러의 등장과 채플린을 향한 공격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는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반면 1919년 4월 16일 서른 살 생일을 맞은 채플린은 유나이티드를 창설해 드디어 영화의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 전날 히틀러는 전후의 북새통 속에서 바이에른에 수립된 극좌정권 '바이에른평의회공화국' 평의원에 입후보해 19표를 얻으며 당선된다. (물론 히틀러는 좌익 정권에 적을 두었던 일을 끝까지 숨겼다.) 바이마르공화국이 평의회공화국을 제압하자 히틀러는 평의회공화국의 인사들을 심문하는 조사관을 맡아 과거의 전우를 고발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반유대 정당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한다. 10월 16일 열린 독일노동자당 첫 공개 집회는 히틀러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집회에서 히틀러는 두 번째 연사로 등장했다.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일은커녕 다른 사람과 만나는 일조차 드물었던 서른 살의 히틀러는 그 자리에서 쌓이고 쌓인 울분을 거침없이 토해냈다. 30분간 '작은 방에 모인 청중들은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했으며 연설을 마친 히틀러는 "해냈다" 라고 절규했다. 희대의 연설가 히틀러가 탄생한 순간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전쟁을 반성하면서 민주화를 단행해 근대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급속한 산업혁명을 추진했고 곧 강력한 공업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베르샤유 조약으로 군비가 제한되고 거액의 배상금에 허덕였으며 미증유의 인플레이션으로 국민의 생활은 고달파졌다. 사람들은 근대국가를 힘겨워하며 과거의 향수에 사로잡혔다. 깨끗하고 정직하지만 재미없는 민주주의보다 전통 있는 제정의 복권을 추구했고 판에 박힌 평화보다는 전쟁의 활기를 그리워했다. 한편 대기업과 은행을 장악한 유대인에 대한 반발이 거세졌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가 유행하며 열등한 유대 민족을 도태시키고 아리아 민족의 고귀한 혈통을 지키자는 과격한 인종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과격파의 수는 적었지만, 많은 국민이 비슷한 불안과 불만을 고유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앞길에는 연합국이 강요하는 가혹한 시련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민주국가이면서 민중이 만드는 역사를 믿지 않는 국민. 그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새 역사를 써나갈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독일 노동자당 무대에 등장한 천재 연설가는 독일의 시류에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1920년대는 히틀러가 지방 활동가에서 국정 수준의 정치가로 성장하는 시기다. 1920년 2월 24일 독일노동자당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으로 당명을 변경했고 히틀러는 권력 투쟁을 거쳐 당수로 취임했다. 1921년 8월 3일에는 돌격대(SA)를 창설해 끊임없는 행진과 폭력이 동반된 여론전을 펼쳤다. … 히틀러의 인생을 상술하는 것은 이 책의 역할이 아니지만 딱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경제 불황 속에서 소시민의 울분과 군부의 요청이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결탁하는 장면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나 스페인의 프랑코 등 다른 파시스트 독재자에게서도 보인다. 이들과 히틀러의 차이는 히틀러는 '편집광적으로 당시 느낀 공포의 모든 요소들을 단 하나의 원인', 즉 유대인을 향해서 발산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채플린과 히틀러의 싸움이 시작된다. 독일의 파시스트들은 언제부턴가 '채플린은 유대인' 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p 050 ~ 052 히틀러의 약진 제2장. 히틀러의 등장과 채플린을 향한 공격 ============================== 채플린은 유대인이 아니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그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다. 유대인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채플린은 매우 세련되게 대답한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하지만 내 몸 어딘가에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마르크스가 유대인이었던 탓에 유대인은 공산주의와도 엮여 공격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 발발 직후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자인가 아닌가도 관심의 표적이었다. 1921년 영국 여행에서 채플린은 매번 "볼셰비키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아니오, 나는 예술가지 정치가는 아닙니다." 라고 대답한다. "나는 인생에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볼셰비즘은 인생의 새로운 단면이니 언젠가 연구해보고 싶어질지도 모르지요"라고 대답한 일도 있다. 채플린은 예술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미국이야말로 자신이 살아갈 국가라고 생각했다. 나치는 유대인도 마르크스주의도 독일의 전통을 파괴하는 세력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들이 천재 예술가이자 평화주의자인 채플린을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로 몰아세워 공격하는 일은 시간 문제였다. p 054, 055 채플린을 향한 공격 개시 제2장. 히틀러의 등장과 채플린을 향한 공격 ============================== 히틀러의 일생을 돌아볼 때 그의 직업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정치가도 아니며, 본인이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예술가도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연설가, 혹은 선동가로 볼 수 있다. 히틀러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 끊임없이 투쟁 상태를 연출하고 사람들을 흥분속에 가둬두는 일, 즉 내용이 아닌 형식 그 자체가 중요했다. 미국식 선전 방식을 응용해 "타인을 정복하기 위한 이런저런 선전술을 익혔다. 이 예술을 완성하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고 말하는 히틀러의 선전 활동은 순식간에 뮌헨을 휘어잡았다. p 058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꾼 유성영화 제2장. 히틀러의 등장과 채플린을 향한 공격 ============================== 애국심은 온 세상이 겪은 것 가운데 가장 위험한 광기이다. 나는 지난 몇 달간 유럽 각국을 돌았다. 애국심은 도처에서 광란하고 있었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뻔하다. 또다시 전쟁이다. 이번에 전쟁이 일어나면 노인을 전선에 보내라. 오늘날 유럽에 진짜 범죄자가 있다면 바로 그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ㅡ 『채플린:거장의 생애와 예술』, 693쪽. p 068 애국심은 광기다 제2장. 히틀러의 등장과 채플린을 향한 공격 ============================== 나는 애국심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이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살해되었는데 어떻게 애국주의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ㅡ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755쪽. p 068 애국심은 광기다 제2장. 히틀러의 등장과 채플린을 향한 공격 ============================== 채플린의 영화 〈키드〉를 계기로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미디어로 성장했다. 유성영화를 이용한 교묘한 선전을 구사해 정권을 잡을 히틀러는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후 점점 더 미디어 통제를 강화한다. 먼제 1933년 3월 13일 요제프 괴벨스를 초대장관으로 하는 국민계몽선전부를 설립했다. 나치의 영화 통제는 영화 평론과 연구에까지 손을 뻗었다. 독일의 영화 관련 잡지가 재편되면서 4월 말 유대계 출판사에서 나오던 잡지의 발행처가 전부 독일계 기업으로 바뀐다. 나치는 유대인을 공작과 영화계에서 몰아내는 동시에 영화를 선전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쿠르트 베링이 있는 '지역 필름 제공' 영화사의 기사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는데 1937년까지 총 1억명이 선전 영화를 봤다고 한다. 영화라는 미디어를 통치 시스템의 기반으로 삼은 나치는 채플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배제했다. 나치가 채플린을 집요하게 공격한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채플린을 유대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둘째, 채플린은 평화주의자이며 채플린이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무렵 독일에서 채플린의 인기는 굉장했으며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용지에 '채플린'이라고 쓴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셋째, 채플린의 콧수염 때문이다. 독일의 지도자에게 콧수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빌헬름 2세, 비스마르크, 힌덴부르크,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붉은 수염이라고도 불린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이르기까지 각각 개성 있는 수염을 길러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보여주려 했다. (동시에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히틀러도 그 누구 못지않게 개성 있는 콧수염을 길러지만 채플린이 꼭 닮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것도 채플린이 먼저 유명해지는 바람에 불평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유대인 희극 배우와 똑같다는 이유로 콧수염을 밀어버린다면 자신의 권위가 실추된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패러디 대상이 되니 정치적 권위가 흔들린다. 콧수염에 골머리를 앓던 나치가 취한 정책은 철저하게 채플린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p 068 제3제국의 영화 통제 제2장. 히틀러의 등장과 채플린을 향한 공격 ============================== 인생의 전환기에 떠난 1년 반의 세계여행으로 채플린의 작품과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점점 제국주의로 기우는 영국, 이에 저항하는 간디의 사상, 독일의 위기, 친나치 성향의 미디어가 쏟아내는 중상모략과 과장된 애국심 등 채플린은 공황 이후 유럽의 불온한 움직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군국주의 광기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한편 히틀러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1932년 7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나치는 드디어 제1당으로 도약했다. 다음해인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는 수상에 임명되고 제3제국이 수립된다. 히틀러는 시정연설에서 '평화외고, 국제협력, 바이마르 헌법의 준수, 다당제 유지' 등을 강조했지만 이는 곧바로 거짓임이 드러난다. 2월에는 국회의사당 방화를 이유로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7월에는 나치 이외의 정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다음해인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서거하자 히틀러는 자신을 총통이라 칭하고 국가의 최고 법규이자 최고 권력자, 명백한 독재자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p 070 제3제국의 영화 통제 제2장. 히틀러의 등장과 채플린을 향한 공격 ============================== 채플린이 나폴레옹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던 1933년부터 1936년 무렵 유럽은 격변의 시대였다. 앞서 말했듯이 히틀러는 1933년 정권을 잡았다. 유례없는 불황 속에서 사람들은 히틀러에게 기대를 걸었다. '히틀러라면 뭔가 바꿔줄지도 모른다'고 희망하면서도 그 '뭔가'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른 채 사람들은 독재자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불황도 실업도 문화적 퇴폐도 모두 유대인의 잘못이라는 감정의 분출구를 발견한 시민들은 히틀러에게 열광했다. 히틀러가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미국에서도 대공황 이후의 경제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강력한 리더를 고대하는 움직임이 일면서 히틀러의 인기가 높아졌다. 채플린은 세계의 미래가 얼마나 큰 위험에 직면해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예술가로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자문했다. 그리고 미숙하지만 거침없는 정치적 메시지를 쓰고 나폴레옹을 통해 평화를 호소하려 했다. 나폴레옹 프로젝트는 그런 고독한 싸움의 기록이다. 그렇지만 채플린은 이 기획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나폴레옹 프로젝트로는 진정으로 세계의 위기에 맞설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히틀러도 나폴레옹에게서 점점 벗어나고 있었다. 히틀러에게 나폴레옹은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뛰어넘어야 하는 역사의 경쟁자였다. 히틀러는 "나폴레옹도 다만 한 인간일 뿐 세계적 사건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단순한 정복자에 지나지 않으며 자신은 세계사에 남을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자신의 공적 또는 사명은 '유대인이라는 바이러스'를 섬멸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채플린은 나폴레옹을 대신할 새로운 테마, 또는 자신의 사명으로 삼을 뭔가를 발견했을까. p 106, 107 단념 제3장. 나폴레옹 프로젝트 ==============================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치가 세력을 무섭게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4년동안 지속된 지옥과도 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잊을 수 있었을까." 채플린은 <위대한 독재자>를 제작하기 직전의 시대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했다. 사람들은 과거의 전쟁을 미화했다. 전쟁이 "산업 생산을 확대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며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 고 설파하는 사람도 있었다. 채플린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주식 투자로 수백만 달러를 손쉽게 벌어들이는 사람에게 수백만 명의 목숨 따위야 어떻게 되든 안중에나 있을까" 라고 기록했다.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부상하고 일본에서는 군국주의가 뻗어나가는 상황이 평범한 미국인들에게는 바다 건너의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세계 각지의 정세를 생생하게 파악했던 채플린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았다. '나폴레옹 프로젝트'가 좌절되고 폴레트를 위한 작품을 기를 쓰고 찾고 있었지만, 전쟁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를 우려하는 마음 또한 채플린의 창작에 강한 자극을 주었다. 폴레트를 위해 준비하던 역사근 <리젠시>의 창작 메모에는 「스페인 전쟁에서 나화한 반프랑코파의 한 군인에게 바친다」 라는 제목의 시가 남아 있다. 1936년 말 펜으로 휘갈겨 쓴 이 시에는 전쟁을 반대하는 채플린의 마음이 응축되어 있다. 또한 채플린은 스페인 내전에 가슴 아파하며 1938년 4월 프랑스 영화 잡지 『시네 몽드』에 「리듬」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프랑코파 작가의 사형 집행을 맡은 장교는 작가의 옛 친구이다. 장교도, 사격 대원 여섯 명도 마음속으로는 집행을 연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죽음의 시각은 차츰 다가온다. 장교는 어쩔 수 없이 리드미컬하게 호령을 붙인다. 장교가 '준비' 라고 외치면 총살 대원도 '준비!'라고 따라한다. '어깨총' 이라고 말하자 대원들은 총을 들었다. '조준'이라는 호령에 총구가 작가를 향한다. 발사 명령이 내려지면 사격 대원들은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장교도 사격 대원도 그 소리가 집행 유예 명령을 전하는 전령의 발소리라는 것을 안다. 곧바로 장교는 '정지'라고 소리 쳤지만 리듬에 맞춰 훈련 받은사격 대윈은 그 소리를 듣고 방아쇠를 당기고만다. 이 주옥같은 단편 소설을 통해 채플린은 파시즘의 본질이 개개의 정책 내용보다도, 개인의 사상은 물론 개인이 하는 말의 구체적 의미와 내용까지도 흡수해 버리는 '리듬'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리듬은 개인들 간의 차이를 없애고 개인의 의지를 제거하고 말과 의미의 내용을 말소시켜서,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는 순종적인 인간을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인간의 생명을 뺏는다. 책임 소재가 점점 모호해지면서 수많은 비극이 만들어진다. 채플린은 이 리듬이야말로 시대의 공포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았다. 그런 와중에 채플린에게 희한한 제안이 들어왔다.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을 보면 1937년 어느 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회사의 프로듀서인 알렉산더 코르다가 히틀러와 방랑 신사 찰리 모두 똑같이 콧수염을 기르고 있으니 이 점을 모티브로'히틀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물론 채플린이 독재자와 일반 시민, 두 배역을 동시에 연기하는 것이다. 제안을 받고 채플린은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히틀러로 분장하고 대중을 향해 뜻을 알 수 없는 모호한 말로 열변을 토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한다. 반대로 방랑자로 분장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 히틀러를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익살과 팬터마임을 결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 기도하다. 무엇보다 <위대한 독재자>의 구상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희극 배우와 가장 미움받는 독재자의 외모가 똑닮았다는 역사적 아이러니에서 출발한다. 히틀러를 패러디하면 나폴레옹에서 시도하려 했던 독재정치에 대한 풍자와 평화를 향한 메시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발산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채플린이 <위대한독재자>를 제작하기로 결심한 또 하나의 요인은 '찰리 캐릭터를 어떻게 할까'라는 큰 문제의 해결책이 보였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등장할 때에는 엉터리 독일어로 연설을 하는 등 언어유희를 가미한 시사풍자극을 만들 수도 있다. 또한 히틀러의 외모가 찰리와 닮았기 때문에 관객도 거부감이 적다. 한편으로 찰리를 연기할 때에는 무성 영화의 이미지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연기 할 수 있다. "익살과 팬터마임을 결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라는 채플린의 설명처럼, 〈위대한 독재자>는 희대의 캐릭터 '찰리'를 유성영화의 시대에 안착시킬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위대한 독재자> 제작 동기에 관해 아들인 찰스 채플린 주니어는 다르게 회상한다. 찰스 주니어는 아버지 채플린이 〈황금광시대> 가 독일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고 나서 〈위대한 독재자〉 제작을 최종적으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괴벨스가 1935년 〈황금광 시대> 상영을 금지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채플린은 아무런 정치적 성향도 띠지 않은 영화까지 탄압하는 나치의 가혹한 언론 봉쇄를 알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또한 제3장의 마지막에서 다룬 작가 이보르 몬터규가 보낸 『유대인이 당신을 보고있다』 도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몇몇 사건에 자극을 받아서 <위대한 독재자>는 싹을 틔웠다. p 113 <위대한 독재자>의 제작 동기 제4장. 프로덕션 6 제작 준비 ============================== <위대한 독재자> 제작에 관한 히틀러 본인의 반응을 남긴 기록이 있다. 1939년 1월 30일 국회 연설에서 히틀러는 "미국 영화사이 반나치, 즉 반독일 영화 제작에 반유대 영화 제작으로 대응하자" 라고 비판했다. 이름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위대한 독재자> 를 염두에 둔 말이 명백하며 아마도 히틀러가 채플린을 향해 한 유일한 말일 것이다. p 163 히틀러의 반응과 독일, 이탈리아, 영국의 압력 제4장. 프로덕션 6 제작 준비 ============================== 1939년 3월에는 채플린이 감기에 걸려 스튜디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이를 근거로 많은 언론이 <위대한 독재자> 제작이 중단되었다고 보도했다. 채플린은 곧바로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이후로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이 아이디어를 포기했다는 식의 보도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진실이 아니다. 나는 협박, 검열 그 밖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독재자의 인생을 다룬 희극 영화를 만들 것이다. 그 영화로 전 세계에 실로 건강한 웃음이 퍼지기를 희망한다. 성명에도 불구하고 제작 중단론은 끊임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심지어는 점성술사까지 나서서 "내년 4월까지 제작을 연기하시오" 라고 훈수를 둘 정도였다. 겉으로는 <위대한 독재자>가 민주주의를 위한 영화라고 채플린의 용기를 칭송하지만 속으로는 제작을 단념해주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미국 안에 팽배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미국의 여론 조사를 보면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사람이 90퍼센트나 됐고, 재계는 나치 정권에 거액을 투자했으니 과히 친파시즘 국가라 부를 만했다. 기자 앤드류 킷은 "영화 제작 직전 프로듀서인 채플린은 반파시스트 영화 제작을 저지하려는 월가 및 나치와의 싸움에 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라고 적은 뒤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이 영화는 훌륭한 반나치 프로파간다가 될 것이다. 인간적이며 유머러스하기 때문에 한층 효과적이다. 그러나 미국 금융가에는 친나치(즉 파시스트)가 많다. 영화 산업을 잠식한 월가는 <위대한 독재자> 제작을 막는 데에 성공할 수도 있다. p 167, 168 미국의 열풍 제4장. 프로덕션 6 제작 준비 ==============================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채플린은 파내시아호에서 마지막으로 각본을 퇴고하던 중 라디오 뉴스로 전쟁 소식을 접했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영불과 독일 간의 동맹이 깨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대한 독재자> 제작에 순풍이 불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작을 중단하라는 압력이 더욱 강해졌다. <위대한 독재자>의 주제가 반나치에 머물지 않고 전쟁 그 자체의 비인간성을 비판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난 마당에 전쟁에 만전을 기해야 할 각국 정부가 반전 영화를 지지할 리 만무하다. p 170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제4장. 프로덕션 6 제작 준비 ============================== 만년에 한 인터뷰에서 채플린은 "특별히 히틀러를 연구하지는 않았지. 히틀러가 유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남자라는 점도, 분명 자신의 지위에 겁을 먹고 있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고 말했지만, 스튜디오 시사 기록을 보면 채플린이 손에 닿는 대로 히틀러의 영화를 수집해서 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루이스 부뉴엘은 채플린이 1934년 나치당 전당대회를 촬영한 레니 리펜슈탈의 기록 영화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1935) 를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정도로 웃으면서 봤다.'고 회상했다. 채플린은 자료 영상을 반복해서 보면서 히틀러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했다. 찰스 주니어는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는 히틀러가 아이들에게 말을 걸거나 아기를 안아주거나 병원에 병문안을 가는 장면 등을 보면서 히틀러의 습관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배우야.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어' 라며 놀라워했죠." 팀 듀란트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채플린은 '이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본 가운데 가장 뛰어난 배우야' 라고 말할 정도로 히틀러의 연기에 감탄했습니다." 채플린은 히틀러와 자신의 공통점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채플린과 히틀러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채플린은 자신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라고 댄 제임스는 술회한다. "채플린의 세계도 히틀러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민주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찰리는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독재자로 군림했다." 찰스 채플린 주니어는 아버지는 히틀러를 절반은 공포, 절반은 매혹의 감정으로 바라봤다고 표현했다. 채플린은 종종 말했다. "생각해봐, 히틀러는 미치광이야. 나는 희극 배우이고. 하지만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배우로 살아가는 일은 정말로 하느님 덕분이다." p 181 ~ 183 힌켈로 변한 채플린 제5장. 촬영 시작 ============================== 1940년 1월 4일 나팔로니 역의 잭 오키가 촬영장에 투입되었다. 오키는 당시 인기 있는 희극 배우였다. 카메라 테스트 첫날 채플린을 만난 오키는 감독으로서의 채플린의 재능에 탄복한다. 오키가 배역에 맞춰 생각해온 표정과 동작을 다 선보이고 난 후에도 채플린은 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오키에게 다양한 연기를 시켰다. 그러면서 오키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기 연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자각한다. 오키는 찰스 주니어에게 "연기에 꽤 자신이 있엇지만 네 아버지에게는 무척 많이 배웠다. 아니 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기 전까지 나는 아마추어였어" 라고 말했다. 다른 인터뷰에서도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보다도 채플린과 함께 한 몇 주 동안 연기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라고 말했다. ![]() 찰스 주니어는 아버지와 오키가 촬영 중에 서로 누가 더 웃기나 경쟁하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봤다. 희극에 관해서라면 뮤직홀시대부터 감각을 길러온 채플린은 '희극왕이라는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리 없다' 는 사실을 알면서도 테니스 게임을 즐기듯 희극 경쟁에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장면을 생각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채플린은 결코 혼자서 웃음을 독차지하지 않았다. 자신보다도 오키를 위해서 재미있는 신을 많이 썼다. 오키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들려준다. 두 사람의 연기를 지켜본 형 시드니가 "찰리의 신이 전부 오키 것이 되어버렸어. 온통 오키의 대사뿐이라고" 라고 말하자 찰리는 "알고 있어요. 내가 그렇게 썼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오키는 순식간에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켜 화면에서 다른 배우를 지워버리는 연기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채플린은 "정말로 내게서 장면을 뺏고 싶다면 나를 보지 말고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라고. 거기에 관객이 있는 것처럼 항상 카메라를 향해야 해. 자, 다시 해보자" 라고 조언했다. 슐츠 역의 레지날드 가디너도 채플린과의 촬영을 회상하며 "아, 한 번만 더 같이 할 수 있다면! 그 마음뿐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굉장히 멋진 경험이었다" 라고 절찬했다. 이처럼 채플린의 연출은 당대의 대배우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채플린은 최고의 연기를 본능적으로 해내는 천재였기에 힌켈의 측근 가비츠 역을 맡은 정극 배우 헨리 대니얼처럼 계산적인 연기에는 서툴렀다. 본래 채플린은 모든 배역을 먼저 자신이 연기해보인 뒤 그대로 해달라고 하는 독특한 연출 방식을 취했지만, 정극 배우에게는 그들의 방식을 존중해 연기 지도를 피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대니얼은 채플린이 자신을 싫어하는 줄 알고 난감해 했다고 한다. p 192 ~ 195 소형 비행선과 잭 오키의 참여 제5장. 촬영 시작 ============================== <위대한 독재자> 마지막 장면은 6분이나 되는 연설 신이다. 이발사는 연설에서 독재에 맞서 민중의 손으로 평화를 일구어나갈 것을 호소한다. 카메라를 향해 줄곧 연설을 하는 파격적인 라스트 신은 채플린의 수많은 영화 가운데서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채플린은 영화 구상의 초기부터 라스트 신을 이발사의 연설로 끝맺으려고 했다. 1938년 가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초고(제목 : <Final 4>) 는 "불행한 처지에 있는 동지에게 나는 말한다. 절망해서는 안 된다. 증오가 세계를 지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라는 대사로 시작한다. 이 메모에서도 알 수 있듯 채플린은 처음부터 세계를 향해 메시지를 던질 예정이었다. ![]() 같은 시기에 작성된 다른 메모를 보면 완성본에 비해 과학 진보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내용이 나온다. 항공기, 원자력, 과학의 발전이 곧 문명의 진보이며 내셔널리즘이 진보를 방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히틀러의 인종 정책을 '중세의 광인'이라고 비판하는 채플린은 근대 과학의 눈으로 그 야만성을 부정하고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다만 실제 촬영용 대본에는 원자력 지지가 삭제되었다.) 1938년 가을부터 1940년 6월 연설 신을 촬영할 때까지 채플린은 연설을 몇 번이나 다시 쓰면서 퇴고를 거듭했지만 내용을 보면 초고에 과학을 신봉하는 말이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것 말고는 큰 차이가 없다. p 209 마지막 장면의 초기 구상 제6장. 연설 ============================== 채플린은 1938년 가을부터 1940년 6월까지 정력적으로 마지막 연설 장면에 몰두했다. 자필 메모와 조수 댄 제임스가 받아 쓴 노트, 비서가 타이프 친 원고를 퇴고한 글, 핵심 단어만 정리한 메모, 각본 모퉁이에 휘갈겨 쓴 심정 등 남아 있는 자료만 1,000장이 넘는데, 채플린 자료 창고에 보관된 관련 자료 가운데에서도 유독 많은 양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연설 아이디어' 라는 제목의 1938년 12월 9일자 메모이다. 연설 아이디어 1. 안녕하세요. 이 세상은 추하다. 세계가 추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2. 뭔가가 제대로 될 때 거기에는 보편적인 의지가 있다. 3. 고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4. 우리는 언덕의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5. 어쩌면 우리는지나치게 큰 힘을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여러 사람에게 위험한 일이다. 6. 증오는 그 앞에 위험이 있다는 반증이다. 7. 나는 내가 유대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초록 대지와 파란 하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모든 것, 모든 국가의 모든 사람을 총괄하는 위대한 체계에 속해 있다. 나에게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인생을 부여해준 체계. 서로 죽이기 위한 체계가 아닌,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시스템. 8.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선함을 부여 한다. 꽃에 색을 입히는 것과 똑같다. 자연은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올바른 일을 한다. 9. 이유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선량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 생각하지 말자. 다만 느끼자! 이해할 수 없어도 느낄 수는 있다. 10. 나는 영리하지 않다. 이유를 설명하는 일은 못한다. 하지만 동료들과 나누는 사랑의 감정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11. 논리. 나는 논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닭과 계란, 어느 쪽이 먼저인가.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라! 12. 지구는 우리 모두에게 충분히 베푼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줄 것이다. 이처럼 남겨진 메모는 인간의 선한 마음과 자연 본래의 풍요를 신봉하는 내용이다. 초기 구상의 다른 메모에서도 앞에서 언급한 '독재자에게도 땅은 있다' 라는 성선설, '보편적인 선한 의지' 를 강조하는 종교적 태도, '지구를 있는 그대로 두면 꽃이 핀다' (1938년 12월 16일자 '찰리의 연설) 등 자연 신봉, '과학, 마법의 양탄자', '과학과 발명은 사랑을 통해 온다' (1938년 12월 16일자 찰리의 연설) 등 과학 중시, '사랑은 영원하며 언제라도 계속된다'. '나는 아리아인도 아니고 유대인도 아니며, 나는 당신의 형제이자 나는 당신이다'처럼 사랑을 설파하는 표현 등 이상을 이야기 한다. 한편으로 '인생을 행진과 중노동으로 허비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면서 일관되게 전쟁과 노동의 비인간성을 비판했다. 어떤 당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일체의 통제도 거부한 채플린의 자유로운 성향을 읽을 수 있다. 1939년 7월 13일, 아직 '독재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던 〈위대한 독재자> 초기 버전 대본 표지에는 채플린이 연필로 쓴 메모가 있다. "어리석은 이기주의 따위는 잊어버리고, 이성의 빛을 보자. 흑인이든 백인이든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한 한다." p 215 ~ 217 연설 아이디어 제6장. 연설 ============================== 소문과 억측이 무성해지자 채플린은 담화를 발표했다. 신작 폐기 보도는 사실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편집 작업에 들어갔으며 음향 작업이 완료되는 대로 영화를 개봉할 예정입니다. 지금처럼 세상에 웃음이 절실한 때는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웃음은 광기에 대항하는 방패입니다. ㅡ New York Telegraph 1940년 5월 23일 외 다수. 담화 발표 날짜는 5월 22일. p 224 히틀러의 진격과 채플린의 고독 제6장. 연설 ============================== 데뷔 이후 계속 영화 속에서 도망 다녔던 찰리가 대중화·기계화 사회가 도래하면서 투쟁의 한가운데로 내동댕이쳐지는 일은 필연이었다. 그런데 <위대한 독재자>에 이르러서는 경관(권력)과 찰리(약자)의 쫓고 쫓기는 우화와 상징의 수법을 버리고 더욱 거대하고 더욱 생생한 현실의 적, 히틀러와 마주한다. 어떻게 해서든 소리 높여 싸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 p 240 찰리의 길 제7장. 완성 ㅡ 작품 분석, 작품 공개와 그 충격 ============================== 평범한 작가라면 게토의 주민을 영웅으로 상정했겠지만 채플린은 <위대한독재자>의 등장인물 어느 누구도 이상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았다. 우선 이발사는 전쟁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슐츠를 도운 것도 우연이었으며 비행기에서도 슐츠가 시키는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게토에서 이발사는 돌격대원에게 저항하지만, 그 이유는 정변이 일어난지 몰라서였다. 게토 주민도 재클을 제외하고는 힌켈 통치하에서도 그다지 상황은 나빠지지 않을 거라고 낙관하며 저항하지않는다. 힌켈이 돈을 빌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유화 정책을 폈을 때에는 힌켈 배지를 팔기도 했고, 한나도 "힌켈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라고 말하며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노베르트 어핑은 이 장면이 제3제국의 가난한 유대인 대다수가 취한 행동과 똑같다고 지적한다. 그런 기회주의적 태도가 나치를 점점 더 오만하게 키운 셈이다. 게토의 주민 역할을 맡은 배우는 채플린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이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동구 유대인식 영어가 웃음을 자아내는 요소로 정형화되어 있었던 반면, <위대한 독재자>는 동구 유대인을 진지하게 그린 최초의 작품이다. 5대 스튜디오 중 네 곳을 유대인이 경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계는 유대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일이 없었다. <위대한 독재자>는 유대인에 관한 미국 영화계의 기묘한 침묵을 깬 작품이다. p 243, 244 유대인 영화의 틀을 넘어 제7장. 완성 ㅡ 작품 분석, 작품 공개와 그 충격 ============================== 10월 18일 채플린은 런던 『데일리 메일』과의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왕관을 쓰지 않은 희극왕, <위대한 독재자>의 주역, 그리고 런던의 아이인 채플린」 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채플린은 전쟁의 화염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런던의 아이들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영감을 준다" 라며 고국을 격려했다. 또한 기사는 연설 장면을 "영국을 향한 프로파간다로서는 최고의 행동" 이라고 환호하며 반겼다. 채플린은 "나는 그저 야만적인 군국주의자들에 저항하는 인도주의자입니다.", "협박 편지를 몇 번 받았지만 심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경호원도 필요 없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전제주의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한순간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전체주의는 계속되지 않을 겁니다. 계속될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소중한 것은 개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믿습니다. 힘내십시오. 잘될 겁니다!" 라는 말로 끝맺는다. p 268 온 국민이 열광한 영국 제7장. 완성 ㅡ 작품 분석, 작품 공개와 그 충격 ============================== 히틀러가 〈위대한 독재자> 를 보고 세련된 감상을 남길 정도의 유머를 지닌 사람이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 〈위대한 독재자〉 가 개봉된 후 히틀러의 연설은 격감한다. 마치 희극왕이 희대의 연설가에게서 그 무기를 빼앗아온 듯이 말이다. 채플린의 연설이 전 세계에 울려 퍼지던 1941년 무렵부터 히틀러의 연설 횟수는 급격하게 감소했다. 1932년 선거 때 비행기를 타고 하루에 서너 곳을 방문하며 연설하던 선동가가 1941년에 한 대중 연설은 겨우 7회, 1942년에는 5회에 불과하며, 1943년에는 2회로 줄어든다. 괴벨스는 거리로 나가서 국민을 고무하라고 히틀러에게 요청하지만 총통은 자신의 이미지가 무너질 것을 두려위하며 전선 시찰을 하지 않았다. 베를린이 전쟁의 화염에 휩싸인 1945년 3월 말 괴벨스는 국민을 향해 라디오 연설을 하라고 히틀러를 재촉했다. 하지만 청중을 흥분으로 몰고 가는 데 능수능란했던 선동가는 이제 마이크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측근들이 "국민은 하다못해 슬로건이라도 기대하고 있다" 라고 부추겼지만 히틀러는 "연설을 위한 재료는 아무것도 없다" 라며 지하 방공호에 틀어박혔다. 그때서야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한 달 뒤 히틀러는 자살한다. 독재자의 황당한 야망은 무너지고 채플린의 웃음은 남았다. p 284, 285 히틀러는 봤을까 제7장. 완성 ㅡ 작품 분석, 작품 공개와 그 충격 ============================== 채플린과 히틀러의 전쟁은 채플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채플린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나치에 이어서 등장한 냉전과 매카시즘이라는 집단 히스테리도 범죄 조작, 여론 통제, 미디어를 이용한 선동이라는 측면에서는 나치와 다를 게 없었다. … 1941년 가을, 채플린의 인생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고립주의자들은 끝까지 참전에 반대했다. 보수파들은 <위대한 독재자>가 전체주의에 대항하라고 호소하면서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였다고 비난했다. 상원의원인 베넷 클라크와 제럴드 나이 등은 주전파인 루스벨트가 <위대한 독재자> 제작을 종용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제럴드 나이는 해외 시장을 영국와 영국의 식민지에 의존하고 있는 영화계가 영국의 승리에 목을 매고 있으며 영국의 앞잡이가 되려 한다고 비난했다. 채플린을 향해서는 "30년 이상 미국에서 부를 축적했으면서도 영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고 인신공격을 퍼부었으며, 결국 10월 6일 채플린을 상원 공청회에 소환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루스벨트는 영화를 만들라고 종용했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성서도 대부분 유대인이 썼고 호전적이고 반고립주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지 않느냐며 여론도 채플린을 두둔했다. 또한 해외 시장이 영국와 영국의 식민지에 한정된 것은 모든 산업이 다 마찬가지인데 "나이 의원 등은 히틀러 예찬 영화라도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며 극단적 의견을 비판했다. 신문에는 제럴드 나이가 히틀러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채플린인줄 알았습니다" 라고 독재자보다 희극 배우를 더 무서워하는 상황을 야유하는 풍자 만화도 등장했다. 채플린은 소환에 "기꺼이 응한다" 고 말하며 "모든 영화는 프로파간다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영화는 사랑의 프로파간다이며 갱스터 영화는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프로파간다, 그리고 <위대한 독재자> 는 민주주의 프로파간다입니다." 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p 289 ~ 291 끝나지 않은 전쟁 제8장. <위대한 독재자>라는 미디어 ============================== 1942년 11월부터 연쇄 살인 사건을 테마로 한 차기작 <살인광 시대>에 착수한다. 그 무렵 권총을 가지고 채플린의 집에 불쑥 찾아오는 등 기괴한 행동으로 희극왕을 괴롭히던 조안 베리라는 여성이 친부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예전처럼 유능한 비서 고노 도라이치가 곁에 있었다면 능숙하게 처리했을 테지만 정의감에 불타는 채플린은 엉뚱한 생트집에 진지하게 응대하다 2년에 걸쳐 재판을 받게 된다. 미국 당국은 채플린을 공격할 호기라도 잡은 듯 조안 베리 사건을 이용했다. 연방재판소는 만법 Mann Act 위반으로 채플린을 고소했다. (Mann Act : 여성이 매춘을 목적으로 주 경계를 넘어 이동하는 일을 금지하는 법) 조작된 재판으로 당연히 무죄 판결이 내려졌지만 당국은 지문 채취 장면 등을 공개하면서 채플린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민사재판에서는 "채플린의 아이가 아니다." 라는 혈액 검사 결과 증거를 무시하고 채플린에게 법적 후견인으로서 양육비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5년에 걸친 네거티브 캠페인 때문인지 1947년 4월 11일에 개봉된 <살인광 시대> 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기자회견장에서도 "공산당을 지지하는가?", "애국심은 있는가?" 라는 질문만 쏟아졌다. "저는 국가주의자가 아니라 국제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은 것입니다." 라는 채플린의 대답은 우파를 더욱 격앙시켰다. 우익 세력은 각지에서 피켓을 들고 상영을 방해했다. 나치도 하지 않았던 부끄러운 실력 행사였다. 그 결과 미국에서 32만 5,000달러만 벌어들이면서 채플린 영화 중 개봉 시기에 유일하게 손해를 본 작품이 되었다. <살인광 시대> 는 불황으로 은행에서 쫓겨난 남자 주인공이 여성을 유혹해 죽이고 재산을 손에 넣는다는 설정의 냉소적이면서도 세련된 코미디 영화이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로 바뀌어 있었다. 재판정에 선 <살인광의 시대> 의 주인공 베르두는 "사람을 한 명 죽이면 죄가 되지만 수백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됩니다. 숫자를 숭배하게 되는 것이죠." 라고 말하는데, 전쟁의 승리에 열광하던 미국에서는 이 대사조차 위험한 사상이 되었다. <살인광 시대> 개봉 직후인 6월 12일, 의회에서는 채플린을 두고 뜨거운 설전이 벌어졌다. 존 T. 랜킨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채플린은 미국 시민이 되기를 계속 거부한 자이다. 채플린을 추방해 미국 영화계에 발 붙일 수 없게 하고 미국 청소년이 채플린의 불온하기 짝이 없는 영화를 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채플린을 추방해야 한다. 보도를 접한 채플린은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평화 선동가입니다." 라는 유머로 가득 찬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도 채플린을 향한 공격은 끊이지 않는다. 우파의 인신공격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는데 "채플린의 큼직한 구두에는 러시아의 눈이 묻어 있다" 라는 등 뜻을 알 수 없는 매도가 되풀이되었다. 이런 정치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채플린에 대한 대중의 사랑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었다. 1950년에 재개봉된 <시티 라이트> 가 대성공을 거둬 뉴욕에서만 개봉 8주간 20만 명을 동원했고 텔레비전에 방송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부활했다. 1952년 채플린은 <라임라이트> 런던 프리미어 상영을 위해 뉴욕 항에서 퀸 엘리자베스호에 승선했다. 그 직후 미국 정부는 채플린의 재입국 허가를 취소한다. 사실상 국외 추방 처분을 내린 것인데 이를 두고 전 세계의 비난이 쇄도한다. 하워드 맥그래스 법무장관은 채플린의 재입국을 허가하는 않는 명확한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 뒤 스위스에 자리를 잡은 채플린은 <뉴욕의 왕> 을 제작한 것은 그 대상이 나치이든 미국이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희극왕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언론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조작해 계속 비방을 쏟아낸다. 냉전기 매카시즘 광풍은 나치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고, 채플리은 히틀러가 패배하고 사라진 뒤에도 '히틀러의 유령'과 계속 싸워야 했다. p 293 ~ 295 냉전기의 채플린, 평화 선동가의 고난 제8장. <위대한 독재자>라는 미디어 ============================== 냉전기에도 채플린은 미국 이외의 국가에서는 세계적 명사로서 존경 받았다. 하지만 미국 언론은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나치 언론이 채플린의 업적에 일일이 공격을 가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다. … 미국에서 채프린에 대한 재평가는 시간 문제였다. 채플린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아이들의 스타로 자리 잡고 여전히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고 전후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 잭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 등 비트제너레이션이 채플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비트 제너레이션은 방랑 신사 찰리의 채릭터를 '반체제와 아나키즘뿐만 아니라 비트 시인의 철학과 삶의 방식에 내재한 미와 단순함의 상징' 으로 예찬했다. 철두철미하게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채플린의 삶의 방식에 매료된 것이다. 결국 채플린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뒤인 1972년 다시 미국 땅을 밟는다. 아카데미 특별상 수상을 위해 20년 만에 할리우드를 방문한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를 내쳤던 미국의 최소한의 사죄였다. 미국이 다시 채플린의 유머를 즐기기 위해서는 베트남 패전이 필요했던 것일까. p 295 ~ 297 미국에서의 채플린 재평가 제8장. <위대한 독재자>라는 미디어 ============================== 채플린은 영상이 허구를 내포할 위험성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1961년 채플린이 마지막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무렵 일본에서는〈위대한 독재자>가 개봉하면서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 붐이 불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에서도 히틀러를 다룬 작품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채플린이 "어떤 영화를 골라 보더라도 거의 전부가 히틀러의 잔인함을 부정한 것뿐이며 전쟁의 비참함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의도대로 젊은이들에게 전쟁이 비참하다는 인상을 심어줄지는 모르겠다." 라고 걱정했던 것처럼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히틀러 붐이 일었다. 채플린은 방일 기자회견에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전 세계 영화인은 기록 영화로 돈을 벌고 있다. 기록 영화에는 아무리 씻어도 어딘가에 독이 남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 라고 간결하게 답했다. 진실을 포착해야 할 기록 영화에 독이 있다는 채플린의 말은 매우 급진적인 영상미디어 분석이다. 1960년대에 활약한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맥루언의 "미디어는 메시지다" 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은 전하려는 내용이 아니라 미디어 그 자체가 메시지라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키라 아사다도 지적했듯이 "미디어가 메시지다" 라고 옮겨야 한다.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가 아니라 텔레비전에 나오는 일 자체가 메시지이며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서 시청자가 의심을 품을 여지는 적다. 지금 이라면 인터넷 검색어 상위에 오르는 현상 그 자체가 메시지이다. 우리는 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만다. 영상이 주는 충격은 특히 강하며 진실을 비췄다고 여겨지면 비판 없이 수용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큐멘터리 영화이든 뉴스든 카메라를 들이대고 편집을 하기 시작한 시점에 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는 영화이든 극영화와 똑같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선구자격인 〈북극의 나누크 Nanook of the North>(감독 로버트 J. 플라어 티, 1922) 에서도 선주민이 감독의 의도에 맞춰 당시에는 이미 사라진 옛 전통 생활을 재현한다. 영상은 진실을 간단히 위장해버리고 관객의 사고 방향을 정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채플린이 말하는 '독' 이다. 장 뤽 고다르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포착하지 못했던 강제수용소의 실태를 〈위대한 독재자>가 예언했다고 지적한다. 때로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픽션이 현실을 그대로 담아낸다고 말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보다도 진실을 깊이 있게 그려낸다. 채플린은 의도적으로 독을 수북이 담은 극영화가 독이 없다고 주장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보다 현실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틀러는 영상의 독을 최대한 활용했다. 영상에서 유대인의 공포를 날조하고 정책을 선전하고 자신의 연설을 반복해 상영 하면서 국민을 중독시켰다. 하지만 영상에 든 독을 다루는 방법에서 희극왕은 히틀러보다 한수 위였다. 〈위대한 독재자>를 둘러싼 전쟁은 미디어의 독을 이용해 권력의 정점에 오른 히틀러와 채플린이 벌인 미디어 전쟁, 콧수염을 둘러싼 이미지와 이미지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미디어의 독성을 간파해낸 채플린이 결국 승리했다. ![]() 이 점은 오늘날 히틀러의 이미지가 〈위대한 독재자> 의 힌켈 이미지에 완전히 잠식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최근에 나온 히들러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영화 <다운폴 Der Untergang>(감독 올리버 히르비겔, 2004)에서 브루노 간츠가 연기한 히틀러도 갑자기 격앙 되었다가 금방 소심해지고 과대망상증을 보이는데, 바로 채플린이 연기한 힌켈의 모습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렇듯 채플린은 "히틀러의 이미지를 결정지었다". 그토록 이미지 전략을 중요시했던 히틀러에게는 허망한 패배이다.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이 히틀러를 왜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역시 채플린의 영향이 크다. (히틀러의 키는 175센티미터 정도로 결코 작지 않으며 만년의 몸무게는 100킬로그램을 넘었다) 이렇듯 독으로 독을 제압하고 히틀러를 철저히 웃음의 대상으로 삼은 채플린. 웃음은 가치를 역전시켰고 세기의 익살꾼은 세기의 권력자에게 승리했다. 하지만 익살꾼이 권좌에 앉자마자 새로운 권위를 휘두르는 슬픈 희극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여기서 채플린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채플린은 권력을 웃음으로 만들었을뿐 아니라 영상에는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영상 자체를 걷어차버린다. 그리고 그 독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상으로 그려진 모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세계를 명석한 눈으로 바라볼 것을 진심으로 호소한다." p 306 ~ 309 필름에는 독이 들어 있다 제8장. <위대한 독재자>라는 미디어 ============================== <위대한 독재자> 의 마지막 연설은 관객의 능동적 참여를 호소한다. 영화 제작자인 데이비드 C. 로빈슨은 특히 "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짓밟는다" 는 대사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또한 나는 "사랑에 굶주린 자만이 남을 미워한다" 라는 구절에서 사랑의 본질을 배웠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한다. 자신이야말로 사랑으로 가득찬 인간이라고 여기며 모든 종교와 심지어 국가까지도 사랑을 설파한다. 그런 사랑이 서로 부딪쳐 전쟁을 일으킨다. 오히려 사랑받는 일, 상대방의 사랑을 느끼는 마음이야말로 가히 사랑이라 부를만하다. 발신만이 아니라 수신도 중요하다. 채플린의 연설이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방식에도 깊은 성찰을 주는 이유이다. p 309 영원히 현재형인 마지막 연설 제8장. <위대한 독재자>라는 미디어 ============================== 여기서는 내용보다도 형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 연설 장면의 형식에서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이발사가 줄곧 정면에 놓인 카메라 렌즈만 뚫어지게 쳐다본다는 점이다. 이 숏의 특이성은 히틀러의 연설과 비교하면 더 알기 쉽다. <의지의 승리> 에는 히틀러의 연설이 네 번 나오는데 정면에서 찍은 숏은 하나도 없다. 측면에서 찍은 숏으로 총통이 서 있는 모습을 그럴싸하게 포착하고 뒤에서 찍은 숏으로 청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강조한다. 총통을 우러러보는 관중 숏이 유난히 많은데 특히 나치 청소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를 향한 두 번째 연설에서는 히틀러를 찍은 열여덟 개의 숏 가운데 열여섯 개 숏이 위를 올려다보는 각도로 촬영됐다. 이렇게 해서 숭고함을 연출한 것이다. <의지의 승리>는 총통이 탄 비행기가 뉘른베르크에 착륙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 장면은 히틀러를 비참한 독일에 강림한 신처럼 표현했다. 이에 비해 이발사는 렌즈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한다. 애초에는 이발사의 얼굴에 예수, 링컨 등의 이미지를 오버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채플린은 손쉽게 신격화가 가능한 영상의 독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우직하게 렌즈를 향해 말을 건다. 영상 효과를 배제한 채 정면을 향해 호소하는 희극왕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빛나고 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신도 이발사도 아닌, 한 인간이다. p 310 영원히 현재형인 마지막 연설 제8장. <위대한 독재자>라는 미디어 ============================== 지금까지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이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의 전쟁을 살펴봤다. 역사상 처음으로 캐릭터를 전 세계에 퍼트린 미디어의 왕 채플린과 이미지를 무기로 권력의 최정상에 오른 히틀러. 두 사람의 생애를 비교하는 일도 흥미롭지만 채플린과 히틀러가 한 시대와 사고의 결정체라고 한다면 그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채플린적인 것' 과 '히틀러적인 것' 의 전쟁은 있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많은 국가가 직접 무력으로 싸우는 세계대전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미디어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전투 행위는 점점 격화되고 있다. 이미지를 무기로 한 미디어라는 전쟁터에서는 독성이 강한 거짓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허위 선전이 진실을 압도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도 채플린의 이미지가 히틀러의 이미지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전 세계 사람들이 웃었기 때문이다. 오직 우직함과 유머만이 '히틀러적인 것'에 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위대한 독재자>는 가르쳐준다. ![]() 채플린은 자신을 '평화 선동가(Peacemonger)' 라고 칭했다. '전쟁 선동가(Warmonger)' 를 풍자한 조어인데 '평화주의자(Pacifist)' 라고 말하지 않았던 점이 흥미롭다. 평화를 부르짖은들 전쟁을 부추기는 치들의 독에는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전쟁을 부추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를 부추기면 된다. … 채플린 그리고 <위대한 독재자> 는 미디어라는 전쟁터에서 앞으로도 계속 싸워나갈 것이다. 웃음이라는 무기를 들고. p 315 영원히 현재형인 마지막 연설 제8장. <위대한 독재자>라는 미디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