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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억의 예술을 통해 불가해한 인간의 운명을 소환하고 독일 점령기 프랑스의 현실을 드러냈다"라는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기억'과 '부재'이다. 아직 전작을 섭렵하지는 않았지만 몇 작품에서도 이 부분은 여실히 드러났고 이 키워드를 예외로 하고는 그의 소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일관된 주제는 자칫 식상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거듭 그의 작품을 읽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것일 테다. 『팔월의 일요일들』은 첫째,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한다. 둘째 기억의 모호성이 작품 전반을 관통한다. 그리고 부재 역시 소설의 흐름을 이어가는 주요 키워드다.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소설의 맥을 짚어가다 보면 혼란이 가중되기도 하는데 그게 또 『팔월의 일요일들』의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카파렐리 가에 살 때 나는 이따금 절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미래가 긍정적인 색채로 보였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이 미묘한 상황에서 결국은 벗어나게 되겠지. 니스는 우리에게 한낱 지나가는 과도적 단계일 뿐이었다. 머지않아 우리는 이곳에서 멀리 다른 나라로 떠나게 되리라. 그때 나는 많은 환상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 도시가 하나의 늪이라는 것, 그리고 그 늪에 내가 차츰차츰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50쪽
우리가 고통을 느끼게 된 것은, 막연한 죄의식을 느끼고 영문도 모른 채 무언가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우리 인생의 바로 그 시점부터였다. 우리는 이곳 니스에 낙착하기 전까지 그 도망의 길을 따라 숱한 장소들로 끌려다녔다. -205쪽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인과 관계를 따지다 보면 끝도 없을 때가 있다. 결과는 자명하지만 원인이라는 것은 관점의 차원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정 결과로 이어지는 일의 원인은 대부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일 확률이 높다. '나'는 현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원인이 무엇인지 끝없이 기억을 소환해 찾아내려 한다. 하지만 어떤 것도 확실한 이유라고 할 수 없고 이유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이미 모든 일은 일어나버렸다. '강변 풍경'이라는 사진집을 내기로 한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실비아와 대화를 하지 말아야 했을까. 그도 아니면 그녀의 저녁 식사 초대를 완강히 거절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그녀의 남편 빌쿠르를 만날 일은 없었을 테고 실비아와 사랑에 빠지는 일도 없었을 테고 급기야 그녀가 실종되는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일뿐이고 '나'에게 저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가변성이 우리의 삶에는 내재해있다.
모든 것은 남십자성이라는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때문에 일어났을 확률이 높다, 라고 가정하는 게 가장 그럴듯할지 모른다. 몇백 년 전부터 이 목걸이를 지닌 사람은 모두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목걸이를 훔친 실비아와 '나'는 야반도주를 하고 여러 휴양지를 배회하다가 '니스'에 정착한다. 목걸이를 팔아서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천문학적인 가격을 선뜻 제시할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그러다가 '닐' 부부를 만나게 되는데 이 부부는 어딘지 모르게 음습한 기운이 감돈다. 실비아의 남십자성 목걸이에 큰 관심을 보이며 남편인 '닐'이 그것을 사겠다고 제안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럴 재력이 당신에게는 없어 보인다고 코웃음 친다. 저녁 식사 초대를 받은 어느 날 저녁,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후 잠시 담배를 사러 간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닐 부부와 실비아. 과연, '닐' 부부의 정체는 뭐였을까. 실비아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들이 자신의 삶에 존재했던 인물들이 맞을까.
나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남자가 칠년 전의 그 남자와 조금도 닮은 데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때의 그 자신감, 그리고 나에게는 불쾌하기만 하던 그 상스러움이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지금 그에게는 어딘가 체념한 듯한 부드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손도 변했다. 그는 더이상 사슬팔찌를 끼고 있지 않았다. -14~15쪽
이미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시점, 빌쿠르와 니스에서 우연히 마주치면서 이 모든 기억의 소용돌이는 '나'를 다시 강타한다. 닐 부부와 실비아,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정말 모든 게 남십자성 목걸이의 불운 때문이었는지, 과거의 기억을 추적하지만 자신의 기억을 진실이라고 믿기 어렵다. 화자 자신은 과거 기억의 확실성을 강조하지만 실비아 전남편과 7년 후 재회했을 때 전혀 다른 사람, 그때 그 사람이 맞는지 확신이 없다는 말로 여러 번 되뇌는 것을 보면 역설적인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 혹은 퇴색해버린 것들에 대한 의미를 되짚는다. 몇 백년간 여러 사람을 거쳐 돌고 돌던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처음 의미는 숭배와 경이로움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것을 지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남은 의미는 돈으로만 환산될 뿐이다. 실비아와의 도피 행각 역시 불분명한 기억의 파편으로 인해 형체가 아닌 냄새로 더 깊게 남아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그리고 이제 어쩌면 영원히 떠나기 힘들 니스의 곰팡내가 풍기는 하숙집에서의 시간, 그 안의 습기 머금은 역한 곰팡내가 그것이다. 그녀와의 마지막 시간이 오롯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삶의 무용함과 원형에 가깝도록 복기하기 어려운 기억의 불완전성이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그가 말하는 진실이 진실이 아닌 착각일 수도 있고 놓쳐버린 시간이 분명 존재할 테다. 불확실한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슬아슬해 보인다는 것을 화자인 '나'만 잃어버린 채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진실이라고 확신했던 것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의 상실을 감당하기 버거워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차라리 기억의 확신을 믿어버리는 쪽을 선택했던 것일지도. 어차피 모든 것은 선택의 연속이고, 기억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때로는 기억하고 싶은 대로 윤색해버리는 게 삶을 위해서도 나을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나는 생트 안 하숙에서 닐 부부의 빌라로 오가는 한낱 몽유병자에 지나지 않았다. 오래도록 초인종을 누르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146쪽
『팔월의 일요일들』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마찬가지로 추리소설 형식을 띠고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상당히 궁금증을 유발하는 소설이고 앞서 읽었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보다 취향에 맞았던 작품이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 항상 끝은 부유하는 한 존재의 이미지로 막을 내린다. 운명에 굴복하고 순응하는 인간이기보다 배척하고 모험하는 인간상을 보여주기에 해피엔딩의 결말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새드엔딩도 아닌 그저 진행형일 뿐이다. 삶은 모든 과정에서도 언제나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궁금증이 커지는 소설이 있는 반면 언제 끝날지 감감한 소설이 있다. 단절된 이야기로 읽힐 때는 후자이고 유기적으로 얽혀있어서 다음 페이지에 빨리 도달하고 싶은 소설은 전자이다. 『팔월의 일요일들』은 전자의 소설이다. 읽을수록 궁금증이 증폭되기만 해서 손에서 놓기 힘들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중 역자 김화영이 특히 애착을 갖는 작품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팔월의 일요일들』이란다. 두 소설 다 기억을 소환해 자기 자신, 삶, 사랑을 추적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내게는 두 작품 다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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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타인과 사실이 단순히 파편적인 정보에 의지하여 꿰맞춰진 이미지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진짜 앎이란 삶의 속성상 불가능한 것일까. 그것이 과거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희뿌연 해질 것이다. 아래 번역자의 말처럼 말이다.
그 모든 반딧불과 밤나방들의 공간은 물론 새벽이 오면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모든 아름다운 밤이 그렇듯이, 모든 빛나는 청춘이 그렇듯이, 아니 역설적으로 말해 청춘은 그렇게 돌연 찾아오는 비극적 종말에 의해 비로소 통일성을 부여받게 되는 시간과 공간인지도 모른다. (252)
<팔월의 일요일들>은 종이컵에 들어간 호떡 같다. 간단하게 먹기 좋고 까다롭지 않다. 그러나 그 반죽이 무엇으로 빚은 것이며 또 얼마나 숙성한 것인지, 시럽의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어떤 수고로움을 감내했는지 모를 일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화자처럼 <팔월의 일요일들>의 주인공도 상대 여성을 터무니없이 잃어버린다. 함께 타고 있던 차에서 내려 타인의 차에 여자만 실려 보내는 황당한 실수가 연발한다. 눈앞에서 놓친 여자는, 그녀가 탄 차는 다시 볼 수 없다. 은유적으로 그렇게 놓치거나 잃은 사람이 젊은 시절에는 유독 많다. 그만이 그녀의 실종을 신고하고 알릴 수 있지만 현실 속에 그는 탐정소설 속 사립탐정도 아니고 무력하다. 자유를 향한 도주와 일탈의 순간에 국경을 넘지 못하고 좌초되어버린 그곳을 그저 걸을 뿐이다.
내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작은 틈 하나도, 조그만 접촉점도 찾을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게 모든 것에 빗장이 질려 있었다. (144)
7년이 지난 뒤 실비아를 꼭짓점으로 얽힌 남자들이 재회하지만 결국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다시금 서로 어긋난 길을 간다. 젊은 시절, 방황을 멈추고 한번 제대로 살고 싶다는 열망이 ‘다이아몬드’에 결연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훔친 다이아몬드는 닐로 변장한 사기꾼에 의해 다시금 빼앗기고 만다. 묵직한 보석은 그들의 보금자리를 확보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그 어떤 보석의 주인도 될 수 없고 안정감에 안착할 수 없이 떠도는 숙명적 유령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청춘 소설>과는 대조적이다.
한때 예술사진사였던 그도 겨우 한 두장의 명함과 사진만 건질 뿐 그 무엇 하나 선명한 재연이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읽은 모디아노 소설 중에서 가장 관능적이고 원색적인 묘사가 많았다. (다이아몬드 남십자성 목걸이를 한 실비아 때문일까.)
이 부드러운 살갗에 비하면 그것은 얼마나 단단하고 차가운가. 가냘프고 가슴을 흔들어놓는 이 육체 위에 얹혀 있는 보석은 얼마나 영원하고 견고해 보이는가. (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