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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들이 어지럽게 흩어진다. 거리의 이름, 사람들의 이름, 도시의 이름. 기억에 천착하는 소설가 패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속에 무수히도 많은 이름들이 봄날 벗꽃잎 흩어지듯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우리는 살면서 기억상실증을 경험한다. 분명 인생의 어느 순간 함께 했던어떤 이름, 어떤 거리, 어떤 얼굴들이 퇴적되는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기억 저편으로 밀려 없어져 버리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억나? 라고 하는 통상의 질문 속에서 기대하는 긍정형 대답은 몇퍼센트나 될까. 나는 기억하지만 너는 기억할 지 모르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이 우리 인생을 관통했지만, 또 그렇게 멀어져갔고, 어떤 사실, 어떤 시간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잊혀졌다. 다라간에게 갑자기 나타난 남녀(남:질 오톨리니, 여 샹탈)는 잃어버린 수첩을 주었다며 접근하여 그 수첩 주소록 속에 기록된 한 남자의 행방을 찾는다. 그들은 다라간의 기억을 쥐어 짜서 다라간이 수십년도 전에 수첩에 적었던 한 남자의 인물을 기억해 내기를 원한다. 남자 질 오톨리니의 목적은 의뭉스럽다. 남자와 동행한 여자 샹탈 그리페 역시 비밀에 쌓여 있는 듯 보이긴 매 한가지인데, 자신의 남자친구인 질 오톨리니가 주말에 놀음을 하러 간 틈을 타서 다라간을 다시 찾아 그가 모은 자료를 복사해 주며 정보 제송에 협조하길 부탁한다. 그녀가 하는 말은 후에 몇몇은 거짓말임이 드러나고 그녀가 사용하는 샹탈이라는 이름도 개명을 했다고 둘러대시는 하는데 본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녀는 또한 질 오톨리니에 대한 두서없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으니 부탁을 드린다는 취지였지만 점점 더 그에 대한 석연치 않은 사실들을 털어놓는데, 다라간은 그녀가 진실을 말하는지 혹은 그와 한패로 짜고 치는 것인지 확신하지도 못하면서도 남자에게와는 달리 여자의 청은 뿌리치지 못하고 새벽 두시에 남 자는데 경우도 없이 홍두깨비처럼 갑자기 전화해서 방문하겠다는 청을 뿌리치지도 않은 채 그녀의 청을 들어주고 얘기를 들어준다. 이야기는 이미 소설가로 이름이 알려진 다르간에게 접근하여 과거 속에 묻힌 그가 연루된 어떤 사건을 파헤치는 것처럼 전개되지만, 좀처럼 이야기는 앞을 향해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샹탈이 복사해 준 자료 속에는 마치 이름 속에 묻힌 어떤 과거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듯 묻혀있다. 이름과 이름 사이에서 아득히 먼 시간 저편 깨알같이 작은 디테일들이 떠오르고, 그녀가 준 자신의 첫번째 소설의 일부 페이지에 잠시 아무 의미 없는 이름으로서만 등장하는 '기 토르스텔'은 기어이 어떤 날의 다른 기억을 부른다. 소설은 어떤 지점에서도 그들이 누구인지 왜 그를 혹은 기 코르스텔을 쫓는지 밝히지 않는다. 이들이 왜 그를 괴롭히는지, 아니 그것이 괴롭히는 것인지 혹은 기 토르스텔을 어떤 목적으로 추적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기억이 찾아가고자 하는 이야기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끝날때까지 모호하다. 이들의 등장은 단지 다라간의 어떤 기억을 환기시킬 목적일 뿐으로 그들은 단지 그가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을 통해 어떤 과거의 가을날을 기억하고 그 기억속으로 미끌어들어가는 역할을 마친 후 자신들의 임무는 끝났다는 듯이 그를 기억의 미끄럼틀 속으로 밀어넣고 떠난다. 기 토르스텔이라는 이름 역시 다라간에게 기억의 미끄럼틀 위에서 손을 잡아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그는 그 여자의 이름 샹탈이라는이름에서 자신이 청춘 시절 함께 있곤 했던 동명의 여자를 떠올린다. 과거의 샹탈과 현재의 샹탈은 유사점이 있는데 하나는 과거의 샹탈이 주말이면 도박하러 다니는 남자친구를 두고 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들의 파트너가 없는 사이에 어떤 목적으로든 다라간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샹탈의 남자친구가 도박하러 갔던 장소와 질 오톨리니가 간 곳은 공교롭게도 같은 곳이다. 그는 젊은 시절 폴이 샹탈을 떠났을 때마다 그 과거의 샹탈과 그는 함께 시간을 보냈음을 떠올린다. 또한 거의 대인기피증 에 가까운 그이지만 어쩐 일인지 의뭉수럽기 짝리 없는 현재의 샹탈에게도 좋은 감정을 갖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샹탈에 대한 기억은 기 토르스텔과 함께 트랑블레라는 경마장을 환기시킨다. 어느 가을날 샹탈-폴 커플과 함께 트랑블레에서 돌아오는 길 자동차를 운전했던 사람이 기 토르스텔이었으며, 그가 그 커플을 내려준 후 조수석에 있던 다라간에게 그가 거의 한번도 함께 시간을 보낸 적 없는 그의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하던 것을 떠올린다. 다라간에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죽은 것도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닌 채로 방치해, 이 사람 저사람의 손에 맡겼졌던 것 같다. 기 토르스텔이 그의 어머니라고 기억했던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아나 아스트랑이라는 여성이고,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잠시 돌보아주었던 보호자였음이 그의 기억의 미끄럼틀을 미끌어지며 드러난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아나 아스트랑이라는 여인을 찾던 그의 청춘시절의 어느 가을날을 찾아 가서 그 시절에 자신이 쫓던 아나 아스트랑, 그 과거에 자신이 떠올렸던 더 깊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다. 다시 말해, 이 소설 속에서 시간의 시점은 6세 정도의 아주 어린 과거, 그 후로부터 15년이 흐른 후의 어느 가을날이라는 과거, 그리고 현재 이렇게 세 개로 분절되어 있으며, 그 기억으로 미꾸러져 가는 과정 속에서 처음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지명과 인명들은 그 시간 여행을 더듬는 지팡이에 불과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채로 몇달 동안 통화하는 이조차 없이 홀로 살아가던 그에게 시간 또한 다르지 않아서, 현재조차 과거를 품지 못하고 덩그러니 섬같이 격리된 현재, 지워진 과거 속에 현재 만을 살기를 고집하는 다라간에게 잊기가 쉬운 선택이었으리라. 지평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두 편의 패트릭 모디아노 작품을 읽었는데, 전작들이 꽤 오래전에 쓰여진 것에 비해 이 소설은 노벨상을 받던 해에 쓰여진 비교적 최근작이다. 그 전에 읽은 두 편의 소설이 과거의 시간, 잊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기억이라는 주제의 깊이를 더욱 입체적이고 깊이있게 다루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모디아노가, 아니 다라간이 찾는 것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며 과거의 어떤 날 그가 찾던 과거이다. 삼중의 시점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청춘 시절의 자신, 한 때 어린 자신을 보살피고 또 방기했던, 어머니로서의 혹은 연인으로서의 아나 아스트랑의 행방을 찾던 청춘의 모습, 그리고 어린 시절 아나 아스트랑과 함께 이사를 다니고 학교에 입학하고 했던 기억을 찾고자 어떤 이름 붙여진 거리들을 찾아 다니던 청춘 시절의 자신과 현재와의 설명할 수 없는 거리다. 그 청춘 이후 35년여간 어떻게 그 중요했던 이름들을 모두 잊어 처음에는 자료 속의 검은 글씨일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들이 되었는지에 대한 아무 설명도 없이 덩그러니 혼자인 상태는 오히려 다라간의 인생 혹은 파트릭 노디아노의 인생의 어떤 미세한 부분 혹은 전체일지도 모를 어떤 것을 장황한 삶의 이야기 서서가 말해줄 수 없는 깊이를 설명하는 것 같다. 그에게 청춘 시절은 아마도 아나 아스트랑을 쫓던 날글로 채워져있을 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결핍의 상징이 되었지만, 방기하고 내버려둔 어머니 대신 어떤 기억 속에서 어린 소년이 의지했을 대상은 아나 아스트랑이었다. 그의 청춘 어느 가을날 그 사무치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 혹은 원망 혹은 알 수 없는 감정은 그녀에게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기 위해 책을 쓰게 만든다. 다라간은 자신에게 소중했던 사람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인물이 일단 거울을 통과하듯 소설 속으로 미끌어져 들어오고 나면 영원히 저자의 수중에서 벗어나고 마는 것을. 실제의 삶에는 존재한적 없던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사람들에 의해 무로 환원되고 마는 것을. 78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씀으로서 그녀를 영원히 소멸시키는 선택 대신 그녀와 자신만이 공유했을 어떤 순간을 묘사한다. 그들이 국경을 넘기 위해 위조 여권용 즉석 사진찍는 장면이 그것이다. 둘이 했던 대화, 미세한 행동, 번쩍이는 플래쉬에 눈을 감아버려 다시 찍던 일 등 둘만 알 수 있는, 소설의 나머지와 어울리지 않는 소설 속 '남몰래 삽입한 현실의 한 조각'은 아나 아스트랑을 그에게 닿게 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청춘 시절의 그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가 그 흩러진 이름들 속에서 아나 아스트랑의 이름조차 단번에 붙잡아 낼 수 없을만큼 완전히 잊고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더 어린 시절의 그는 절대로 혼자서 방치되면 안되는 나이의 어린 그는 그렇게 낯선 국경지대의 한 호텔 방에 홀로 남겨져 버려지면서 언젠가 그녀를 그런 방식으로 다시 만날 거라고 그리고 또다시 영원할것처럼 잊혀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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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의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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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에서 기억은 아주 중요한 주제다. 그의 소설에서 기억은 모든 감정의 집합체로 나타난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는 여정,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 조각난 기억을 맞춰 삶을 이어가고 싶은 간절함이 가득하다. 잊었다고 믿었던 기억이 불쑥 떠오르는 순간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무슨 빛일까? 인디언 핑크처럼 아련한 색일까. 그게 어떤 색이든 선명한 색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기억을 탐미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는 기억이란 그 자체가 존재의 증명이라는 걸 말하는 듯하다. 노년에 접어든 소설가 장 다라간에게 젊은 시절의 기억은 별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빛과 동시에 우울하고 암울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것은 유년의 어느 시절에서 기인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그것을 점차 잊고 지냈다. 모두가 그러하듯이.
잃어버린 수첩이 장 다라간에게 돌아오듯 그 시절의 기억이 돌아온다. 수첩을 돌려받는 자리에게 장 다라간은 한 남자의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그의 소설 속에도 등장한 인물. 과연 그는 누구일까. 장 다라간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그가 궁금하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기억을 더듬는 여정으로 이어진다. 잃어버린 수첩, 낯선 남자, 기억에서 지워진 이름, 어렴풋이 떠오르는 하나의 사건.
‘예전에는 새로운 만남이 급작스럽고 거침없기 일쑤여서 사람과 사람이 어린 시절 타던 유원지 범퍼카처럼 길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잃어버린 수첩, 전화 속 목소리, 카페에서의 만남…… 그래, 모든 게 꿈결처럼 가벼웠다.’ (64~65쪽)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설정은 이미 익숙하다. 기억 저편에 자신을 다정하게 돌보는 여자와 그 곁에 한 남자, 낯선 거리, 그리고 선명하게 떠오른 하나의 장면. 그랬다. 꿈처럼 흐릿했던 기억은 점차 선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애써 모든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다. 낯선 장소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주소를 적은 쪽지에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란 세심한 마음까지 전했던 여자의 실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왜 부모님과 헤어져 그 여자와 살았는지, 왜 자신을 버렸는지. 그저 천천히 기억을 따라 장소를 거닐고 그곳을 묘사할 뿐이다. 누구나 그런 기억 하나쯤 간직하고 있다는 걸 말하는 듯. 그러니 사건은 해결되지 않아도 괜찮다. 기억은 아픈 상처를 증명하기도 하고 그리움의 다른 말이며 현재를 만든 조각이라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때로 잊으려 애쓰고 새로운 기억으로 덮는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 우리는 어느 순간 찾아오는 기억이라는 감정과 맞주할 것이다. 흐릿해지다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과 말이다. 그때는 소설 속 장 다라간처럼 한 발 떨어져 가만히 바라봐야겠지.
‘우리는 불편하거나 너무 고통스러운 인생 소사들을 결국에는 잊는다. 깊은 물 위에 눈을 감고 누워 물을 가만가만 실리기만 하면 된다.’ (10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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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어가 그의 내부에 있는 무언가에 그 자신도 모르게 찰칵 하고 시동을 걸었다. 잊고 지낸 삶의 편린 하나가 서서히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것 같았다.” (34쪽)
거의 외부와는 차단된 채 지내는 60대의 소설가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난다. 그들은 소설가에게 과거로의 기억을 향한 시동을 걸고는 사라진다.
소설가는 과거를 찾아 나선다. 소설가에게 과거는 단 두 시점밖에 없다. 여섯 살과 21살. 60대의 소설가는 40년 전의 기억으로 향하고, 40년 전의 청년은 다시 15년 전의 기억으로 향한다. 모두 아니 아스트랑이라는 여인과 관련된 기억. 그는 자신을 지웠었고, 자신과 관련된 이들을 지웠었다.
흔적들은 흐릿하지만, 조금씩 흔적을 드러낸다. 그 기억은 지워진 게 아니라 지운 것이었다. 그것은 완강한 자기 보호의 기작이었다. 자신을 보호하던 사람들로부터의 버려짐에 대한 충격적 과거는 그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없는 기억이었다.
“어쩌면 그는 자발적 기억상실을 통해 이제야말로 완벽하게 과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83쪽)
노벨문학상이 수상자로 선정되기 바로 직전 발표한 이 소설에서도 파트릭 모디아노는 끈질기게 잊힌 과거를 향한 발걸음을 힘겹게 내딛는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변주이지만, 그 끈질김은 보상을 받았다. 그 반복이 지겹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것이 진실에 가까워서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다라간은 여태 고이 파묻혀 있던 슬픔이 마치 불붙은 완연(緩燃)도화선처럼 지난 세월을 타고 서서히 타들어가지나 않을까 너무 두려웠다.” (1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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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가 노벨문학상을 탄 해에도 그의 책을 읽지 못했다. 이번에 드디어 만나게 된 그의 책.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님에도 빠져들어가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처럼.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길을 잃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시간의 한 귀퉁이를 접어 서로 만나게 한 것 같은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는 뻔한 스토리도 신파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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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이 책의 가치를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답하리라. “망각의 빛깔인 하양”을 검은 발자국으로 채우는 시간이었노라고. 이 대답은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이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패턴에 반복적인 소재를 쓰는데도 전혀 식상하지 않다. 그만이 주는 강렬함(혹은 역사의식)이 있다. 분량은 짧은데 많은 질문을 던진다. 고뇌하는 인간이 저 앞에 서 있으니 다가가 보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 한참 젊었을 때 만나지 않아 다행인 소설가이다. 들끓고 뜨거운 시기에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모호하고 희뿌연한 것은 어떤 위안도 주지 못하고 답답함만 더할 뿐이다. 무엇을 잃고 놓치는지 연연하지 않고 종횡무진 달리는 게 젊음의 속성일 게다. 되돌아가 다시 걸어볼 생각을 먹었다면 그는 이미 한 시기를 빠져나온 뒤이다. 서.서.히 늙어가고 있다는 소리이다.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노라면 로랭 가리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 중 자신의 삶을 살았다고 단언할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주어진 환경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모디아노는 철저히 어느 시대에 속한 사람이다. 흐릿한 얼룩 같고 잠시잠깐 마주한 환영 같지만 한 시대의 지표 같은 작가이다.
그 시절은 이젠 불투명한 유리 너머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어슬핏한 빛만 유리를 통과할 뿐 누구의 얼굴인지, 누구의 윤곽인지는 구분할 수가 없다. (83)
모디아노의 소설에 끌리는 이유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흐릿하게 만드는 체념적 어조이다. 단 한 번도 선명한 그림을 제시하지 않는다. 불투명한 유리나 굴절된 거울로 겨우 희미하게 볼 수 있다. 미추(美醜)에 예민한 작가의 세상을 보는 방식인 것 같다. 자연스레 뒤엉키는 시간관도 허용한다. ‘나는 대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그 물음을 튀는 영상물처럼 듬성듬성 산다. “아이들은 의문을 품는 법이 없다. 퍽 여러 해가 지난 뒤, 당시에는 수수께끼가 아니었던 수수께끼를 풀려 애쓰고, 자모조차 생소한 낡은 언어로 쓰여 이제는 반쯤 지워진 글자들을 해독하려 애쓸 뿐이다(133-134).” 그래서 과거의 나에 대한 물음은 불가피하고, 존재의 근원이나 본질에 가닿는 말이라 선뜻 문을 열고 들어서지 못한다. 여는 순간 이어지는 비탈에 온몸을 맡기고 미끄러지는 이들이 소설가이지 않나 싶다. 고로 질 오톨리니는 (일반의 우리처럼) 작가일리 없다. “물론, 오톨리니는 목표물을 겨냥할 사각을 찾지 못하고 여긴가 저긴가 더듬거리다, 샛길에서 길을 잃고 주제의 본령으로 들어가지 못했다(52).”
옮긴이의 말처럼 모디아노의 소설은 대체로 ‘기억과 망각’의 변주이다. 잊어야 살아지는 일반적인 삶과 기록해야 되는 소설가의 임무가 서로 충돌한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에서도 노년의 작가가 덮어두었던 청년 시절의 처녀작을 더듬다 종국에는 초년의 아이와 마주하는 내용이다. 소설의 서두를 장식하는 의심쩍은 커플은 여정이 감행될수록 존재감을 잃는다. 내키지 않지만 자의반 타의반에서 시작된 과거 여행은 고통스런 기억을 부화시킨다. 썰렁한 유머이지만 ‘아니를 아니 ’는 유사 부모에게조차 유기된 아픈 기억을 호출한다.
하지만 길모퉁이에서 어떤 얼굴을 마주칠 때, 아니, 심지어 대화중 느닷없이 등장한 어떤 단어나 음악 속 어떤 음을 듣기만 해도 그 이름, 아니 아스트랑은 그의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런 일은 갈수록 뜸해졌고 또 갈수록 짧아졌다. 들어왔다 바로 꺼지는 신호등 불처럼. (98)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외면해온 진짜 나와 마주하는 일은 엄청난 사건이다. 핵심으로 진입해야 나를 설명할 열쇠를 찾을 텐데 다시 열어볼 일 없는 “여행가방”처럼 방치한다. 어떻게든 열쇠를 찾아 가방을 여는 작가가 없다면 우리의 진짜 이야기는 영영 폐기되어버릴 것이다. 지금의 나를 받치고 있는 여럿의 나를 살피게 한다. 가족오락관이라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알아맞히는 게임 같다.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을 때면 상자 속에 손만 넣어 내용물을 맞추는 게임을 하는 심정이다. 누가 주인공이고, 뭐를 향해가는 글인지 탐색하게 된다.
예전 길 위에서 발견하는 기억의 편린들. 그 서정적이며 동시에 서사적인 스케치들. 내가 생각하는 모디아노의 문체는 흐릿하게 그리며 지우고 덧칠하는 수채화 기법인데 너무나 공들인 도드라진 번역(단어 어감)에 날카롭게 찔리곤 했다. 작가 본연의 얇은 붓의 느낌을 지우는 역효과를 내는 듯싶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쏟아지는 햇살 아래 단어들을 생생이 일으켜 세우기보단 전체적인 풍경과 인상으로 누그러뜨리는 문체가 작가의 색이라고 본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에서는 여섯 살 아이의 눈에 들어온 바다색 여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첫 소설에 대한 언급도 예사롭지 않다. 육십 대에 접어든 노작가가 밝히는 처녀작 <그 여름의 어둠>의 집필 계기는 다름 아닌 수배 전단지 역할이다. 한사람의 기별을 기다리며 쓴 소설은 실종과 죽음이 난무하던 당시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처음 집필 목적과 달리 마지막에 가서 1-2장, 즉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와 직결되는 생뢰라포레로의 귀환과 블량슈 광장은 완성된 소설의 비계로 철거된다. 소설의 출발은 잉여로 지워진다. 이것은 소설과 현실의 혼동에 대한 내밀한 경고로 보인다.
혹자는 늘 같은 소재와 패턴으로 끝을 흐리는 소설작법에 의아해할 수 있다. 소설 참 쉽게 쓰시네요 라는 비난 섞인 말이 나올 수도 있겠다. 마치 그런 웅성거림을 알기라도 하듯이 “건초 더미에서 찾아야 할 바늘 같은 이름(46)”이라고 항변한다. 노작가라는 인식에서 온 해석일지 모르겠으나 주인공이 집필실 밖으로 보이는 사시나무에 위안을 받고, 꽃과 나무에 관해 글을 쓴 뷔퐁이라는 작가를 선망하는 말에서 과거와 인간사를 조명해온 작가의 피로감과 고단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 다라간은 여자가 건넨 ‘자료’들을 스페이스를 적절이 두지 않은 서로 밀착한 말들 때문에 읽기 곤란하다고 언급한다. 사십년도 더 묶은 기록물을 노년의 작가는 그다지 읽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 설정들이 너무나 문학적으로 들린다.
말을 아끼는 소설이라 그런지 작은 상징에도 큰 의미를 두게 된다. 뜻밖에 소설 제목은 아니가 어린 주인공에게 집주소를 적어주며 함께 적은 문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던 그녀가 그를 버린다. 생물학적 혹은 사회학적 부모가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해 많은 아이들이 고아로 내몰리고 신원미상의 처지에 머물던 역사의 씁쓸한 단면과 깊은 상처를 담아내고 있다. 직선으로 뚫린 지름길보다 곡선의 우회로와 막다른 골목을 그리는 그의 걸음은 오랜 뒤에도 많은 이에게 잔잔한 울림을 선사할 것 같다. 더욱이 “깊은 물 위에 눈을 감고 누워 가만가만 실리기만(108)” 해도 되는 시점에 횃불을 밝혀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와 작가정신이 은은한 감동을 준다. 급 마무리되는 결말도 아직 진행 중인 삶에 대해 굳이 끝을 단언하고 싶지 않은 작가의 ‘길 위의 정신’을 발현하는 듯하다.
나 역시 번역자와 마찬가지로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 파리 테러의 지평 속에 그가 어떤 말을 건네올지 내심 기대된다. 늘 핵심으로의 진입은 은근슬쩍 피하고 주변만 어슬렁거리는 내게 일침을 가하는 작가라 다음의 말이 크게 남는다. “그때와 똑같은 경로를 따라 똑바로, 계속 똑바로, 경사진 길을 따라 내려가다보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1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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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소설을 읽고 후에 작가의 생을 읽다가 둘이 데칼코마니같아 놀랄 때가 있다.
물론 책이란게 작가의 머리, 가슴을 다 풀어헤쳐 쓰는거라 실은 놀랄 것도
없지야 않지만(글을 쓰는 입장에서 더더욱 공감하기야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이렇게까지 다 말해줘도 되는거야?'
이 책이 그렇다. 이건 파트릭 모디아노의 자서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프랑스전쟁을 전후로 남의 손에 맡겨져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전전해야 했던
소싯적에 어두운 그늘진 기억이 있는 그가 기억의 실을 더듬어 쓴 듯한
이 소설은 나이 지긋해진 즈음에 당신이 당신에게 주는 선물의 느낌이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글쎄.. 이 말은 '네가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게' 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왠걸? 소설을 다 읽고나면 참 저 제목이 고뇌에서 비롯된 말로 들리는건 왜일까?
이 책은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어찌보면 그에게 있어 가장 솔직한 작품이기도 하다.
갑자기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남자, 과거, 그를 또 좇는 나, 망각 그리고 기억
같은 듯 하나 다른 느낌의 그의 소설.
참 그의 소설은 내게 있어 아이러니하다. 이 점이 재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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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편하거나 너무 고통스러운 인생 소사들을 결국에는 잊는다. 깊은 물 위에 눈을 감고 누워 물에 가만가만 실리기만 하면 된다. p.108 다라간은 끊기지 않고 울리는 전화를 받는다. 사람들의 연락처라 없어도 상관없던 그 수첩을 굳이 돌려주겠다고 하는 사람과 만날 약속을 잡는다. 200쪽도 채 되지 않은 분량이면 금세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내용. 다라간에게 오톨리니를 조심하라고 이야기하는 샹탈 그리페라는 여자.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저 스쳐가는 인물이었던 두 사람. 사람들을 향해 등대 불빛을 쏘거나 모스부호를 띄워 보내는 일과 같았다. p.78
15년이 지나 성년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 일까지. 기억이리란 생각을 했다.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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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나는 중학교 일학년 초 (첫 번째 학교를 한 달도 다니지 않아다) 포천에서 용인으로 이사를 한 적이 있다. 이사를 하고 얼마 뒤 포천의 친구들로부터 한 무더기 편지를 받았다. 그들은 나를 잊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낯선 곳 용인에서 낯설기만 한 중학생으로서의 시작을 견뎌냈다.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흐른 뒤, 그때 그 시절 함께 중학교에 진학했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도 중학생 노릇은 처음이었고, 그럴 정신이 없었다고 하였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저 믿을 수 없는 기억이라도, 기억하고자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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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지 않는 목소리의 사내에게서 내게 전화가 왔다 수첩을 잃어버리지 않으셨나요 수첩에는 별 내용은 없었지만 나는 그를 만나기로 했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글 쓰는 작가인 주인공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이방인을 수첩을 잃어버린 인연으로 만나 게 되고 기사를 제대로 쓰지 못했던 작가인 그는 주인공에게 자기 글을 봐달라는 부탁들 하게 되며 기억나지 않는 장소와 이름이 화두로 떠오른다.
자기계발서나 경제 예측서, 업무 잘 하는 비법 같은 것을 주로 읽던 나에게 소설을 역사서 보다도 훨씬 훨씬 먼곳에 있는 장르이다. 참고로 나는 의외로 역사서를 좋아하며 삼국지나 수 호지 대망 같은 류의 소설은 즐겁게 읽은 편이다. 천국의 열쇠나 신부님 우리 신부님 같은 류 의 소설은 예외로 하고 현대인의 감정을 풀어낸 소설은 왠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편이었다.
당연히 제목과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드는 이 책은 아내 선물용이었고 아내에게 칭찬을 받 았다. 결혼 생활이 20년을 넘긴 분은 아실 것이다. 아내에게 잘했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얼 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말이다.
비 온 또는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건너는 여인의 다리를 찍은 사진은 무슨 무언가 의미가 깊 이 내포되어있는 느낌이었고 "네가 길을 잃지 않게"는 누군가가 좀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주고 있나든 느낌을 내게 주었다.
우엣든 이 책은 아직 일독을 마치지 못했고 내게는 숙제꺼리이지만 왠지 이 책을 좋아할 것 같은 또는 좋아해야할 분들이 괘 계실 듯하다. 리뷰는 독서의 시작이자 끝이니까 바쁜 와중 에도 이 끈을 놓지 않고 싶다. |